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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27일 18시 03분 등록
금요일 퇴근길은 빡빡한 지하철을 버텨내기가 그나마 수월한 편이다. 주말이 기다리고 있다는 안도감은 후줄근한 샐러리맨을 당당한 자유인으로 변모시킨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현관을 열고 집에 들어서자 느껴지는 기류가 심상치 않다. 아이들이 열공 모드에 들어가 있다. 이 상황에서 TV를 켜는 것은 자살행위다. 심각한 표정이 가득한 채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이 수학문제지를 붙잡고 있는 모습이 들어온다. 

"뭐하냐 아들? 불타는 금요일인데"

허공에 메아리만 되돌아온다. 아내가 내 준 할당량을 풀어야 하는 아들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아내 얘기를 들으니, 몇 문제 안 풀고, 딴 짓만 열심히 하는 중이란다. 우리 집에서 요새 가끔 보게 되는 풍경이다. 올해부터 아내의 관리 대상에 포함된 초등학교 1학년 딸래미 역시 책상에 앉아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지만, 따분해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하긴 수학이 재미있으면 그게 사람일까. 재미도 없는 수학문제가 눈에 들어올리가 없다. 문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 하고 눈알만 굴리고 있다가 여지없이 지 엄마에게 한소리 듣는다.

나를 닮아 그런지 두 아이 모두 수학에 영 재능이 없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제들을 일부러 돌아 돌아 이해를 해나가는 꼴이 아내의 눈에는 답답해보이기만 한 듯 하다. 어릴적부터 난 수학이 싫었다. 잘 하지 못하면, 재미가 없고, 재미가 없으면 더 못 하게 되는 법이니 수학 점수는 항상 낙제점이었다. 고교 시절 수학 중간고사 점수를 100점 만점에 14점 받은 적도 있다(이 점수에도 나보다 더 착한 몇몇 친구들 덕분에 꼴등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진학시 문과가 아닌 이과를 선택한 배경에는 고1 한문선생님의 지대한 공로가 있었다. 수학의 골치아픔을 상쇄할만큼 한문의 존재는 끔찍했다. 이성적으로 진로를 선택하지 못 한 전형적인 실패 사례이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수준으로 수학 성적을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은 고3 시절 귀인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고3 수학선생님은 나를 위해 태어난 입시용 족집게 선생님이었으니, 그당시 모두가 한권씩 가지고 있던 <수학의 정석>은 내다 버리고 문제를 우회해서 풀 수 있는 온갖 다양한 팁들을 많이 전수받았다. 정해진 공식을 따르지 않고, 문제에 특화된 최단 풀이 경로를 파악하는 방식은 수학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불경스러워 보이긴 했지만 형편없는 기본기를 가진 나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항상 한개의 답과 그것을 도출해 내는 단 하나의 정석적인 풀이과정에 집착하는 그 시절에 고3 수학시간의 경험은 초,중,고교과정의 모든 수학시간을 합친것만큼 값진 것이었다. 공대로 진학하고 난 이후에 비록 기본기 없는 수학실력으로 고생을 좀 하기는 했지만,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수학 때문에 고초를 겪어본 적은 없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에게 수학지식이 중요할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특수한 분야의 극소수 개발자들을 제외한다면 사칙연산만 할 줄 알면 된다. 물론 계산기의 도움이 약간 필요하다.

고금을 통틀어 위대한 과학자들중 한명인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에 필수적인 수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아인슈타인은 스스로 수학에 뛰어난 재능이 없다고 느꼈으며, 이 분야에서는 일부러 강의를 맡지 않았고 별다른 연구도 하지 않았다. 그는 "수학은 수많은 전문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는데 그 하나하나는 우리의 짧은 생애를 쉽게 소모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라는 말로 수학과 자신과의 거리를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수학논리적 재능이 남들보다 뛰어나게 보이고, 결과적으로 탁월한 연구성과를 이룬 것은 그만의 독특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인슈타인에게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수리 지능을 커버하고도 남을 만큼의 이미지 형상화 능력이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나는 직감과 직관, 사고 내부에서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심상이 먼저 나타난다. 말이나 숫자는 이것의 표현수단에 불과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어떤 수학적이고 물리적인 모형이 이미지 형태로 먼저 드러나고, 그것이 완전하게 정리된 이후 정제된 수학 수식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수학적 지능이 뛰어난 이들이 먼저 수식을 먼저 떠올리는 것과 접근방법의 차원이 180도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재능은 천차만별이며, 얼핏 비슷하게 보이는 재능임에도 내부적으로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고유한 지능들이 결합된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나같이 수학적 재능이 전혀 없음에도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것이 가능하고,  아인슈타인이 수식에 취약함에도 불구하고 상대성 원리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기질과 재능을 가능한 일찍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자신이 찾아야 하는 것이긴 하지만, 어린 아이에게는 부모나 선생님이 그 역할을 선행해줄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제약도 가해서는 안된다. 이제 나는 나의 수학적 무無재능을 확실히 알지만, 단순히 나와 유전자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또는 그들이 수학문제집을 붙잡고 허우적대고 있다는 이유로, 자녀들에게 내부적 한계를 규정짓도록 하는 언사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너는 수학을 못 하는 머리로 태어났어'라고 대놓고 말하는 것이나, "그런 것도 이해를 못 해!"라는 말은 같은 말이다. 부모는 자녀가 스스로 깨치고 자신에게 맞는 문제해결방법을 찾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수학 문제를 붙들고 끙끙거리는 것은 너희들이 멍청해서가 아니라, 남들과 다른 사고를 하기 때문이라고 얘기해주어야 한다. 정답지에 나오는 풀이방식만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수학말고는 다 잘하는 아이들에게 문제 몇 개 풀지 못하는 것 가지고  자존감을 끌어내리게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혹자는 게으르고 하기 싫어하는 태도의 문제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으나, 재미없는데다가 노력해도 잘하지 못하는 것을 하기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른 과목들에 딴짓을 부리지 않는 아이가 유독 특정 과목의 학습에만 게을러보이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어린 시절 화가가 꿈이었던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특활이라고 부르는 수업시간에 난 미술을 택했고, 그 당시 난 그림 그리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상담을 위해 학교를 찾은 어머니와 특활 담당 미술교사의 대화를 우연히 엿듣게 되었다. 그 미술 교사는 내게 미술적 재능이 전혀 없다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그 이유는 내가 색칠을 너무 대충대충 한다는 것이었다. 미술을 전공하지도 않은 미술교사의 말 한마디에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미술이 재미없어졌고, 화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더이상 들지 않았다. 학생이 특정한 한 가지 방식에 잘 따라오지 못할 경우 교사가 “넌 정말 멍청하구나”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시대에 학교를 다녔던 나의 비애이기도 하다. 내 인생만 반추해보더라도 학교 선생들에게 휘둘린 인생의 흐름이 만만치 않은데, 아이들이 부모에게서 받는 영향에 대해서 입 아프게 얘기할 필요가 있겠는가?

아이들에게 유투브와 함께 하는 불타는 금요일을 마련해주기 위해 용기를 내어 보지만, 지난번 아이 수학시험점수를 보기는 했느냐는 타박과 함께 난 세상 물정 모르는 아빠가 되고만다. 언제나 그렇듯 옛날과 지금은 전혀 다르다는 말에는 꼼짝할 수가 없다. 확실한 것은 지 엄마가 조금이라도 관리를 하니 아이들이 나보다는 수학점수는 좋을 것 같다. 결론은 다중 지능은 다중 지능이고 수학 문제는 풀어야 한다.
IP *.140.2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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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7 19:04:35 *.48.44.227

푸하하하하~ 수학문제는 풀어야 한다.

학교 선생들이 괴물이었군요~

저를 포함 입방정 떤 선생을 대표해서 사과할께요~

그래도 사람사는 일은 수학공식처럼 딱 떨어지지 않으니 더 고민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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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1 18:13:08 *.103.3.17

훌륭하신 선생님들도 간혹 있었답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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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8 06:48:24 *.124.22.184

"다중지능은 다중지능이고 수학은 풀어야 한다." ㅎㅎㅎㅎ

수학도 공부도 남과 다른 그 아이의 재능 중 하나일 뿐인데... 학창시절 12년을 좌우하니 무시할 수 없죠.

부인을 사교육걱정없는세상으로 전도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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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1 18:13:49 *.103.3.17

모두가 달려가는데, 걸어가고 있는 아이를 차마 볼 수가 없나 봅니다. 저는 어련히 알아서 갈거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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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9 18:27:49 *.7.28.140
관리가...너무 빠른거 아닌가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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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1 18:15:12 *.103.3.17

사실 공부를 많이 하고 그러지 않습니다. 제가 봐도 아주 새털만큼 조금 하는데, 하기 싫어 난리인 거죠. 애들은 놀아야 한다고 하면, 와이프한테 한소리 듣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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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1 14:26:19 *.130.115.78

'수학 문제를 붙들고 끙끙거리는 것은 너희들이 멍청해서가 아니라, 남들과 다른 사고를 하기 때문이라고 얘기해주어야 한다.'


열심히 공부하다 지친 아이들,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씩 사주면서 말해주면 참 좋을 이야기네요.


'어렵고 힘들어도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 포기하더라도 후회가 없다'는 이야기 살짝 보태서 저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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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1 18:15:40 *.103.3.17

사실 우리 자신에게 항상 해주고 싶은 얘기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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