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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10일 21시 22분 등록
흔히 말하길 프로는 결과로 이야기한다고 한다. 직장인으로서 살면서 아마추어라는 소리를 듣는 것만큼 자괴감을 유발하는 것은 없다.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밤새 지지고 볶고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아침을 맞아도 내놓을 수 있는 성과가 없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다. 오히려 능력없는 개발자로 찍힐수도 있다. 연말 인사고과에서도 업적평가 내지는 성과평가는 있어도 과정평가라는 항목은 없다. 과정은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이유만으로도 정량적인 평가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는 성실을 미덕의 으뜸으로 여기는 가치체계 덕분에 과정이 암묵적으로 중요시된다. 상사들은 근면성실한 부하직원을 총애한다. 노력이 언젠가 성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기대를 하는 것이다. 반면 성과는 탁월하지만, 성실하지 않은 개발자들은 겉으로는 인정하는 척 하지만 속으로는 그리 탐탁해 하지 않는다. 훌륭한 개발자의 딜레마는 여기에서 생겨난다. 

"걍성실"씨와 "나잘난"씨는 각각 다른 회사의 중견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다. 어느날 그들의 회사에 "엄청 어려운" 소프트웨어가 발주된다. 정확히 똑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소프트웨어였다. 각 회사의 프로젝트 팀이 가동되었고, 각 회사의 프로젝트 매니져들은 동일한 핵심 소프트웨어 모듈의 개발을 "걍성실"씨와 "나잘난"씨에게 할당했다.

"걍성실"씨는 나름 열심히 일을 했다. 예상치 못한 내부 문제를 해결해가며 3개월의 프로젝트 기간동안 철야를 밥먹듯이 했다. 하지만 정해진 기간안에 도저히 소프트웨어를 완료할 수 없었다. 계획된 프로젝트 마지막날 "걍성실"씨는 프로젝트 매니져에게 하소연했다. "정말 열심히 미친듯이 했는데요, 소프트웨어가 예상보다 너무 복잡합니다. 2000줄의 프로그램을 코딩했지만, 추가기능 구현 및 안정화까지 고려하면 한달은 더 필요합니다." 그리고 한달후 프로젝트 마지막날 "걍성실"씨는 새벽까지 분투한 끝에 개발 초기 단계에서 자신이 저질러 놓은 무지하게 찾기 힘든 크리티컬 버그(critical bug)까지 해결하여, 소프트웨어를 완성했다. 비록 약간의 버그와 오동작이 있긴 하지만 나름대로 잘 동작하는 소프트웨어에 프로젝트 매니져와 고객 모두 만족해 하는 눈치다. 무엇보다도 고객과 프로젝트 매니져, 그리고 팀장까지 모두 "걍성실"씨가 무진장 고생했음을 알기에, 그의 공로에 치하를 아끼지 않는다. 최종 소프트웨어는 3000라인이 넘으며, 그냥 보기에도 너무나 복잡해 보인다. 팀장은 "걍성실"씨에게 휴가를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말한다.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였군요!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나잘난"씨는 일을 맡자마자 분석 및 설계과정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한달이 훨씬 지났음에도 코드 한줄 작성되지 않았다. 프로젝트 기간 내내 "나잘난"씨는 야근한번 안 하고 정시 칼퇴근을 반복했다. 팀장은 "나잘난"씨의 실력을 알긴하지만, 그가 실력만을 믿고 프로젝트를 너무 건성으로 하는 것은 아닌지 프로젝트 매니져에서 철저하게 관리할 것을 지시한다. 프로젝트 매니져 역시 의구심이 들지만 "나잘난"씨가 별문제가 없다는데 할 말이 없다. 해당 소프트웨어 개발이 그리 쉽지만은 않을터인데, 이슈 리스트나 별다른 보고 또한 올라오지 않는다. 그러던중 프로젝트 완료 예정 일주일전 "나잘난"씨가 완성된 소프트웨어 모듈과 함께 완료보고를 하겠다고 한다. 코드라인은 꼴랑 150줄로, 사소한 버그도 없이 소프트웨어는 완벽하게 동작했다. 매니져는 소프트웨어 코드를 들여다 보았다. 코드는 초등학생도 짤수 있을 정도로 너무 쉬웠다. 결국 프로젝트 매니져와 고객은 "엄청 어려운" 소프트웨어가 실상은 "엄청 쉬운" 소프트웨어였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팀장에게 보고한다. 결국 "나잘난"씨에게 간단한 소프트웨어를 뺀질거리며 질질 끌었다는 비난이 쏟아진다. 

위 이야기는 인터넷에 떠도는 "훌륭한 개발자의 딜레마"라는 이야기를 다시 각색한 것이다. 극화하다보니 어느정도 과장된 부분은 있지만,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흔히 겪을수 있는 일이다. 비단 개발업무 뿐만이 아닌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겪을 수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주위를 보면 "걍성실"씨와 같은 개발자들이 많다. 나 역시도 "걍성실"씨와 같이 일하는 경우가 더 많음을 부인할 수 없다. 여기서 "걍성실"씨가 불성실한 의도를 가지고 일을 한 것인지 아닌지는 논외로 하자. 통상적으로 이런 문제는 "훌륭하지 못한" 프로젝트 매니져와 일하거나 그런 팀장을 가진 개발자들이 가질수 있는 문제다. 그런데 꼭 훌륭하지 못 한 매니져들만이 이런 오류에 빠지는 것일까?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눈에 보이는 것은 일을 하는 과정이나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전달하는 정보,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의 결과다. 이것들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며 전달되는 과정에서도 충분히 왜곡될 수 있다. 꼭 매니져가 충분히 훌륭하지 못 해서 그런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당신이 "나잘난"씨라고 치자. 능력도 부족하고 때론 입으로만 개발을 하는 "걍성실"씨보다 자신의 진가를 하찮게 보는 매니져와 회사에 실망과 환멸을 느꼈던들 그 비애가 충무공 이순신만큼 하겠는가? 소프트웨어 개발 얘기하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임진왜란으로 텔레포트한 것은 미안하지만, 좀 더 극적인 비유를 위함이니 독자의 이해를 바란다. 충무공 이순신은 그의 관직생활 내내 온갖 비방과 시기에 시달려야 했다. 서애 유성룡을 비롯하여 그를 알아주는 사람들도 일부 있었지만, 선조와 그 주변의 인물들에게 이순신은 정치판의 일개 말에 불과했다. 

1594년 임진왜란 발발후 조선은 불과 2주만에 한양을 왜군에게 내주게 된다. 왜군의 파죽지세에 조선군은 바람앞의 갈대처럼 우수수 쓰러질 뿐이었다. 그런 전황을 바꾼 것이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었다. 옥포해전에서의 승리는 밀리던 전쟁의 전황을 바꿀수 있는 극적인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바다에서의 연전연승이 이어졌다. 하지만 조정은 그 승리에 점점 무감각해져갔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이 부족한 자원과 군비에 대해 걱정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순신의 수군은 단지 못 몇개가 모자라서 배 수선을 제때 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쟁취해낸 값진 승리였지만 그 승리들은 폄하되기에 이른다. 조선수군이 계속 승리하다보니, 조정에서는 수군의 전력이 원래 왜군보다 월등하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만연하게 된다. 같은 시기 원균은 적이건 아군이건간에 그 수급을 모아서 전과를 부풀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능력도 없이 함께 묻어가고 있던 원균은 결국 이순신을 무고하여 이순신은 한양으로 압송된다. 칠천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이 궤멸되고 나서야 조선 조정은 정신을 차린다. 이순신의 빈자리를 그제서야 절실히 깨닫게 된다. 다시 이순신에게 삼도수군통제사의 교지가 내려오지만 조선수군에는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열두척의 배가 꼴랑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순신은 수군을 맡고 싶었을까? 마음속으로 수백번은 불가하옵니다를 외쳤으리라. 그런 엿같은 상황을 만든 원균이나 조선조정에 분노와 환멸을 느꼈으리리라. 그럼에도 그는 중차대한 임무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조정에서도 수군은 버리고 육전으로 병사들을 돌리라는 교지가 내려온다. 지극히 현실적인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알고 있었다. 바다를 내준다면 이 전쟁은 더이상 희망이 없다는 걸. 그래서 그는 말한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라고. 그리고 그는 휘하들과 함께 "필생즉사 사즉필생"의 각오로 배수진을 치고, 결국 명량해전에서 단 12척의 배로 이백척이 넘는 왜군의 대함대를 통쾌하게 쳐부순다.

좌초위기에 놓인 프로젝트가 있다.  현재로서는 실패확률이 크다. 상식적으로 깨끗하게 포기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에 회사의 사활이 걸려있다면? 그리고 당신에게 이 프로젝트의 성공여부를 판가름하는 핵심소프트웨어 모듈을 마무리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온다면? 쉽지 않은 결정이고, 사실 어떤 결정을 해도 비난 받을 수 없다. 이 프로젝트를 맡아서 결국 실패한다면 그 희생양이 될수도 있다. 12척의 배밖에 없는 당신, 수백척의 대함대와 맞서 싸우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필생즉사 사즉필생의 마인드를 가지는 것은 쉽지 않다. 허나 12척의 배로 왜군의 수백척 대함대를 상대해야 했던 충무공의 마음으로 돌아가 위기이자 기회에 도전해보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다. 냉정하게 분석해서 성공가능성이 있다면 도전해보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다. 이순신이 모함을 받고 풀려나온후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은거해버렸다면 우리는 충무공 이순신을 기억하지 못 했을 것이다.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성립되지는 않는다. 쉬운 문제조차 어려운 것으로 변질시켜버리는 "걍성실"씨에게는 이런 기회마저 찾아오지 않는다. 설령 "훌륭하지 못한" 매니져 덕분에 그런 기회가 찾아온들 감당해낼만한 능력이 있을리 없다. 이런 위기를 반전의 기회로 뒤집을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 그것이 이순신과 원균, 그리고 "걍성실"씨와 "나잘난"씨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당장의 환호와 오해에 우쭐하지도 좌절하지 말자. 인생은 길고, 개발자의 삶도 길다. 그대에게 능력만 있다면 언젠가는 그대의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임은 분명하다. 공자가 말하길 "지위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그 자리에 설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를 걱정해야 하며, 자기를 알아주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남이 알아줄 만하게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이 풍진 세상, 세상이 자기를 몰라준다고 소주병 기울이며 한탄만 하지말고, 묵묵히 자신만의 칼을 갈고 벼리자. 그리하여 언젠가 찾아올 단한번의 기회에 모두가 역부족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는 바로 그 순간 당당히 나서서 외쳐보자.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단, 최대한 비장하게 말하고 일하는 것이 포인트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훗날 위기를 별것도 아닌 해프닝으로 치부해버릴지도 모르니 말이다.



IP *.140.2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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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0 23:35:22 *.48.44.227

위대한 인물에겐 고난도, 엿 같은 상황도 위대하게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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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3 16:50:49 *.88.68.40

"지위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그 자리에 설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를 걱정해야 하며,

  자기를 알아주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남이 알아줄 만하게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공자형님이 멋진 말을 많이 했군요. 혜홍쌤, 한참을 웃었습니다. '엿 같은 상황'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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