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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19일 15시 37분 등록

      

컨셉도 기획도 정말 좋습니다만 이 원고 그대로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초고를 기반으로 좀 다듬어보면 어떨까요? 사회적 글쓰기 방식으로 고쳐보면 좋을 것 같은데...’

 

지난 해 말 한 출판사로부터 받은 피드백이었다. 같은 원고를 100곳의 출판사에 보내 놓고 보니 하루하루 도착하는 거절메일의 양 또한 엄청났다. 대부분은 ‘훌륭한 원고이나 인연이 아닌 듯 하니 더 좋은 기회를 만나시기 바란다는 형식적인 거절이었지만 간혹 원고 전문을 보내주시면 신중히 검토해 보겠다는 연락이 오기도 했다. 위의 피드백도 그런 출판사 중의 한 곳의 반응이었다.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고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내린 최종결론은 그럴 이유가 없다.'였다. 초고를 마치는 순간 몇 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했다. 기왕 쓴 원고가 책이 되지 못 한다는 사실이 섭섭하긴 했지만 이라는 모양새에 집착해 얼굴도 모르는 독자를 위해 추가의 에너지를 투입하는 것이 내키지가 않았다.

 

마음을 풀어놓고 내면의 소리와 소통하는 희열은 내가 글을 쓰는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글쓰기는 의무로 꽉 채워진 일상의 숨통이었다.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온전히 나로 있을 수 있었다. 그 자유의 時空에서 충전받은 에너지로 일상을 버텨낼 수 있었다. 그런 내게 사회적 글쓰기는 스스로 숨통을 막으라는 주문에 다름이 아니었다. 배울 이유가 없는 기술이었다. 아니 오히려 어떻게든 피해야 할 기술이었는지도 모른다.

 

14주간 현역 연구원들과 함께 내가 아는 유일한 방식으로 글을 썼다. 혼자 노트에만 끄적이던 글을 게시판에 올린다는 것은 분명 모험이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온 마음을 다해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야말로 지금으로선 현역 연구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기여라고 믿었다. 굳이 페이스 메이커라는 기묘한 역할을 자처한 것도 이런 상황인식 때문이었다.

 

연구원들을 기다리며 썼던 응시원서를 포함해 15꼭지의 글을 썼다. 글쓰기의 원칙은 딱 하나. ‘그 순간 품고 있는 가장 뜨거운 것을 끄집어 낼 것.’ 6월 오프를 앞두고 그동안의 글을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한편씩 읽을 때는 읽지 못하던 맥락이 눈에 들어왔다. 남들이 뭐라고 생각해도 상관없다고 큰소리 빵빵치던 것과는 달리 애절하게 읽는 이들의 사랑과 이해를 갈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삶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면서, 그 어느 때보다 사랑과 이해가 절실한 시기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아낌없이 주겠노라고 받아들인 그들에게 그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내가 가진 가장 풍요로운 것을 오히려 그들에게 구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기꺼이 마음을 내고도 그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제서야 애써 외면하던 사회적 글쓰기라는 단어가 가슴으로 무찔러 들어왔다. 연구원들의 여정을 돕겠다는 역할에 기대되는 역할행동에는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그들이 원하는 방식의 사랑을 익혀 전하려는 노력이 포함되어야 한다. 作家도 마찬가지다. 내가 꿈꾸는 作家는 독자를 대신해 고민해주고 그 해답을 살아주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독자를 위해 쓰는 에너지를 아까워해서야 되겠는가? ‘힘들게 얻은 깨달음으로 내 삶은 꽤나 괜찮아졌으니 필요하면 갖다가 쓰던가 말든가하는 태도로는 아무도 도울 수 없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꼭 전하고 싶은 깨달음이라면 그들이 받아들이기 편안한 방식으로 가공하는 노력을 아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 노력의 과정 또한 기쁨이 되지 않겠는가?

  

동안 미루고 미루던 사회적 글쓰기에 도전해보려고 한다. 더불어 연구원 과정에서도 그동안 고집하던 페이스 메이커딱지를 떼고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다할 것이다. 그런 나눔의 시간들이 쌓이고 모이면 도 되고 도 되겠지. 그 책과 삶이 곧 내가 되겠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제보다 더 아름다운 책과 삶을 지어간다는 의미일거야. 이렇게 내 삶의 한 페이지가 넘어간다. 고마운 일이다.


P.S.


1. 이번주부터 현역 연구원들과 같은 과제 올리기는 하지 않습니다. 대신 8년차 연구원으로서의 본연의 과제(책쓰기 ^^)에 충실하면서 여러분의 요청에 적극적으로 응하도록 하겠습니다.


1. 그렇다고 독자를 의식하지 않고 마음의 흐름을 따르던 그간의 글쓰기 방식이 틀렸다는 의미는 아닌 거 아시죠? 자유로운 글쓰기가 주는 정서적인 효용은 말할 것도 없고, 독자를 의식한 글쓰기를 위해서도 반드시 거쳐야할 과정입니다. 특히 연구원 1년 동안은 여한없이 자유로운 글쓰기를 즐겼으면 좋겠습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투정도 부리고, 필요한 것은 달라고 떼를 써보기도 하면서 그 요청에 반응하고 화답받는 아이같은 기쁨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IP *.130.11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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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9 18:20:30 *.103.3.17

훌륭한 페이스메이커 덕분에 여태껏 잘 온 것 같습니다! 이제 턴어라운드하여 달리시는 그 길에 아름다운 성취가 빛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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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9 22:31:34 *.54.43.11

이렇게 시도 많이 하는 것을 보니, 조만간 책 나오겠구나.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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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0 12:00:35 *.124.22.184

12기를 시작하며 누구 못지 않게 열심히 한 팀장님, 이제는 여유를 가질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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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1 06:46:41 *.48.44.227

40대들이 이렇게 생각을 많이 하고 고민하니 도리어 부러워요.  응원합니다.

맑은 이의 글을 나도 씁니다. 조만간 책 나오겠어요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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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7 14:52:09 *.252.203.12

멋지다. 해피맘.

내용이 궁금해서 클릭해서 단숨에 읽었네요. 좋은 성과가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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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0 10:55:44 *.70.59.205
미옥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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