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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19일 11시 18분 등록

단 한 사람을 위한 책 지뢰복

 

 건괘.jpg 곤괘.jpg 지뢰복.jpg

여기 세 개의 괘가 있다. 하나는 하늘을 상징하는 건()괘로 양을 상징하는 이어진 마디가 6개 쌓여 있는 순양괘(純陽卦)이다. 또 하나는 땅을 상징하는 ()을 나타내는 끊어진 마디가 6개 쌓여 있는 순음괘(純陰卦)이다. 음을 대표하는 곤괘가 양을 대표하는 건괘와 관계할 때 생명이 창조된다. 그 생명의 기운이 어머니 대지 속에서 꿈틀거리는 형상을 표현하는 괘가 있다. 5개의 밑에 을 나타내는 마디가 놓여 있는 15음의 <지뢰복(地雷復)> 괘가 바로 그것이다. 지뢰복은 땅(地) 밑에 우레(雷)가 있는 형상이다. 땅 밑에 에너지가 도사리고 있다. 파릇한 새싹을 튀어 낼 씨앗의 기운이 느껴지는 괘이다.

 

요란하게도 추웠던 겨울이 가고 어느덧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왔다. 순환하는 계절, 봄날로 돌아가는 계절, 그 돌아감의 시작이 저기 땅 밑에 있는 기운찬 단 하나의 양의 기운에서 시작된다. 얼어붙었던 땅을 디밀고 머리를 내미는 파릇한 새싹의 모습을 상상하자니 캄캄한 엄마 뱃속에서 밖으로 나가려고 기를 쓰고 머리를 내미는 태아의 모습도 연상된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아기가 어느덧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부모의 봄은 아이들의 새학기 등교로 시작된다. 책가방을 매고 등교하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기특하고 귀엽다. 뒤집기를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걸음마를 했던 것도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저렇게 커서 자기네들끼리 등교를 한다. 하늘을 향해 쑥쑥 크는 나무 같은 아이들, 하지만 부모의 시계는 흙으로 돌아갈 때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탯줄로 이어졌던 나와 아이의 관계가 점점 멀어지고 언젠가는 놓아주어야 하는 때가 오겠지. 아이들이 스스로 서는 나무가 되었을 때 즈음 나는 흙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 아이들이 부모를 그리워할 때 부모를 대신할 수 있는 무언가를 남겨줄 수 있을까? 그것이야말로 부모가 남겨줄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이 아닐까.

 

아버님은 1963년부터 한약방을 하셨다. 우리가 결혼할 즈음 아버님은 이미 이별을 준비하셔야 하는 상태였다. 살 날이 많이 남지 않았건만 그 와중에도 아버님은 남편을 보시면 처방 이야기만 하셨다. 이런 환자라면 너는 어떤 처방을 하겠느냐. 남편이 답을 하면 격려와 호통을 번갈아 하셨다. 수십 년 간의 처방 경험을 아들에게 마지막까지 알려주시려고 그렇게 애쓰셨다. 물론 그 때는 그 마음을 몰랐다. 병상에서까지 너무 일에만 몰두하시는 건 아닌가 오해했다.


처방전2.jpg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수백 권의 처방전이 남았다. 환자의 이름과 증세, 처방 약재가 적힌 처방전 묶음. 아버님의 처방전은 시골 창고를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남편은 아버지가 그리울 때면 아버님의 처방전을 들춰본다. 그런 남편을 보고 있자면 영화 <시네마천국>에서 편집된 키스 장면을 눈물 지으며 보는 어른 토토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부부는 닮는다 했던가. 어머님도 위대한 유산을 준비하셨다. 어머님은 맏며느리이자 한약방 안주인으로 큰 살림을 이끌며 살아오셨다. 제사도 매우 엄격하게 진행되었다고 하니 차려내야 할 음식은 꼼꼼하게 준비 되었어야 할 것이다. 어머님은 손수 준비한 음식의 사진을 찍고 레시피를 적어 한 권의 노트를 만들었다. 아마도 며느리를 보시면 전수해주리라 생각하셨던 거 같다. 하지만 몇 년을 지켜본 결과 나는 적임자가 아니라는 것을 판단하셨는지 어머님을 닮아 손재주가 좋은 따님에게 그 책을 전하셨다. 나 역시 받을 엄두는 나지 않았지만, 그 기록 자체에는 큰 감동을 받아 사진으로 찍어 놓았다.


레시피3.jpg


그 레시피를 어머님은 당신의 칠순 잔치 때 갖고 오셨다. 칠순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딸에게 물려줄 집안의 레시피 노트를 갖고 오신 어머님의 심정은 어땠을까. 마치 미리 유산을 챙기듯 가방 안에 노트를 챙기셨을 어머님의 심정을 뒤늦게야 헤아려 본다. 이렇게 아버님은 아들에게 처방전을, 어머님은 딸에게 레시피를 물려주셨다. 처방전과 레시피의 활용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거기에는 부모님의 삶과 혼이 담겨져 있다. 자녀는 그 책을 통해 부모를 느끼고 자신이 온 곳, 일종의 정신적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아버님이 아들에게 물려주신 처방전과 어머님이 딸에게 물려주신 레시피. 두 분의 기록은 나 역시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남겨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뒤늦게 아이는 자신의 뿌리를 캐고 싶을 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나의 아버지는 형제가 없다. 당연 내게는 고모도 삼촌도 없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어릴 때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내가 태어난 후 곧 돌아가셨으니 친가 식구와의 기억은 없는 셈이다. 어릴 적부터 외가 식구들과 어울렸고 친척이지만 기질이 다르구나 하고 느낄 뿐이었다.


우연한 계기를 통해 할아버지의 여동생인 고모할머니를 만났고, 그 분을 통해 다른 친척들과도 연결이 되며 뿌리를 알고 싶은 나의 취재가 시작되었다. 오랜 세월을 만나지 못했음에도 기질과 성향이 비슷한 것을 보고 매우 반갑고 놀라웠다. 그렇게 만난 나의 조각들은 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나의 아이들에게도 뿌리에 대해 알려주면 좋겠다는 마음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아이들에게 최소한 4代의 이야기를 단편적이나마 들려줄 수 있는 셈이다.

 

땅을 뚫고 머리를 내밀며 나오는 새싹은 자신이 품은 그 양의 기운으로 하늘을 향해 뻗어나간다. 하지만 언젠가 자신이 시작되었던 땅 속의 뿌리를 탐색 하고픈 때가 올 것이다.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시절, 부모의 삶, 조부모의 삶. 아이가 자신이 지나온 길을 궁금해 할 때 “welcome back, 어서 오렴!”하고 반겨줄 수 있는 기록이 있다면 좋지 않을까.

 

지뢰복의 괘사는 復亨(복형)으로 시작해서 利有攸往(이유유왕)으로 마무리 된다. 돌아감은 형통하며, 돌아갈 곳이 있음은 유리하다는 것이다. 비슷한 기질과 성향을 가진 가족들의 삶을 되돌아본다는 것은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는데 나침반이 될 것이다.

 

다시 봄으로 돌아가는 힘은 짓눌린 음의 기운 속에서도 힘차게 꿈틀거리는 양의 강한 에너지에 있다양의 기운이 생명과 계절을 순환시키듯, 부모가 왕성했을 때의 삶의 기록은 가족의 가치를 순환시키는 힘이 될 것이다. 나를 위한 일기도, 불특정 다수를 위한 책도 아닌, 단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한 책, 자녀를 위한 책을 기획하고 있는 이유이다.

 

IP *.18.187.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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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0 23:13:12 *.71.155.181

이미 책을 펴내신 분이니,

삶과 혼이 담긴,  

단 한권의 책. 

기대할게요.


프로필 이미지
2018.03.26 00:09:35 *.18.218.234

앗, 최우성 선배님..저 책 낸 거 어찌 아시나요..

까마득한 옛날이라 부끄러울 뿐입니다. ㅡㅜ 

격려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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