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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26일 11시 58분 등록

모든 것이 절망이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그녀가 극단적인 행동을 한 것은 결국 도와달라는 무의식적인 호소였다. 자신이 얼마나 절박한 상태에 있는가를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정도로 그녀는 몸도 마음도 황폐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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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수녀원을 나온 것은 엄격한 규율이나 답답한 관행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말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수녀로서 오랫동안 그 안에서 수련했음에도 신의 부름을 받지 못 했던 것이다. 아무런 영적 체험 없이 그저 견디는 식으로는 엄혹한 수련을 계속하기는 힘에 부쳤다. 암스트롱은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내부에 신을 거부하는, 성스러운 것에 등을 돌리는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닌지 스스로를 질책했다.

 

<주제넘은 영혼의 야심 따위는 버리자.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자>는 마음으로 체념하듯 돌아왔지만, 세상살이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환속하고 나서야 자신이 더는 수녀원 사람도, 그렇다고 바깥세상 사람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7년은 긴 시간이었다. 그녀가 수녀원에 있는 동안 세상은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수녀원 밖 세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했고, 다른 이들에게는 평범한 일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사이 수녀원에서 시작된 신경쇠약 증세는 이제 간질 발작을 일으킬 만큼 심해지고 있었다. 그럴수록 세상으로부터 문을 닫고 혼자 스스로를 다독여야 했다. 뒤늦게 용기를 내어 찾아간 정신과 의사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캐내려고만 할 뿐 치료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증세는 점점 심해져 급기야 자살 시도를 하기에 이르렀다. 한꺼번에 삼킨 수면제를 게워 내고 병원에서 깨어난 그녀는 자신이 왜 자살을 하려 했는지 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분명한 것이라곤 살아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죽음보다 더 한 죽음

 

19133, 두 사람은 개인적 관계를 단절하는 편지를 주고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서른여덟이었고, 스스로를 독립정신을 가진 유능한 정신과 의사로 자부했다. 하지만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던 프로이트와의 결별은 그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직업적 위상이 흔들렸고, 그의 정신은 더 많이 흔들리다가 이내 붕괴되었다. 우울증에 시달렸고, 정신분열적인 모습을 보였다. 왕성했던 삶의 의욕은 독서와 사교 활동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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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신과 의사이자 학자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자기회의에 직면했다. 겉으로 보기에 <휴지기>를 보내는 듯 했지만 실상은 휴식과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이 시기에 융은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았다. 훗날 이것은 <창조적인 병>으로 채색되었지만 당시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융은 무의식의 심연으로 급격히 추락했다. 풍부한 의학 지식과 임상 경험을 가진 정신과 전문의였던 융은 무의식에서 치고 들어오는 환상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삶의 위기에 처했을 때나 의식의 힘이 약해졌을 때 무의식의 피괴적인 힘이 주도권을 잡으면 사람은 신경증에 걸리거나 심하면 정신분열증에 이를 수 있다. 특히 무의식에 휩쓸리면 현실 감각이 극도로 낮아져서 잠든 상태가 아닌 눈을 뜬 상태에서도 무의식적 환상과 실제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환상을 현실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는 자신이 제어력을 상실하여 무의식의 제물이 되지 않을까 두려웠다.

 

하지만 그는 무의식에서 솟아오르는 이미지들이 자신을 어디로 이끌든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외면의 죽음보다 더한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외면에서 죽고 내면에서는 살아있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내면의 생명이 있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그냥 살아만 있어주면 안 되겠니?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살아온 40년이었건만 어쩌다 내 삶이 이 지경이 되어버린 걸까?’ 내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잠들지 못 하는 밤이 잦아졌고, 혹 잠이 든다고 해도 호러영화관에 갇혀버린 느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보다 못한 남편은 제발 병원에 다녀오라고 했다. 그렇게 압구정 우울증으로 검색된 여러 기관들을 전전했다. 하지만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모든 시도들이 결코 근본적인 치료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018.2 박미옥의 <Me-Story> 중에서

 

직장생활이 즐거웠다면 연구원이 되었을 리 없다. 1년 열심히 수련하다보면 갑갑한 직장을 빠져나올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약속했던 휴직기간이 조금씩 연장되어 4년을 꽉 채울 즈음 나는 분명히 직장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한때 내가 대안이라고 여겼던 이 세계가 주저리주저리 떠오르는 대로 써내려 가는 것이 글쓰기의 전부인줄 아는 왕초보의 응석까지 받아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무렵이었다.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거기엔 내 자리가 있었잖아. 지금이라도 얼른 돌아가자! 가서 버티자. 아이들도 기약도 없는 작가 연습생 엄마보다는 공무원 엄마를 더 좋아할 테니까한참 중요한 시기 직장 밖에서 보낸 시간이 너무나 아깝게 느껴졌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그 시간들 덕분에 직장의 소중함을 깨달았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들어가서 얼마간은 그럭저럭 재미있게 다녔던 것 같다. 무엇보다 월급통장에 찍히는 숫자들이 새삼스럽게 흐뭇했다. 하지만 그 흐뭇함조차 느낄 여유를 잃어버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회의와 피로가 쌓이며 몸과 마음은 급속도로 상해갔다. 내 삶의 이유라고 믿고 있던 아이들과 눈 한번 맞출 기운을 낼 수 없었다. 그러나 도무지 그만둘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로는 퇴직을 한다고 해도 좋은엄마가 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 내가 아이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어떻게든 회사에서 버텨서, 아니 죽더라도 회사에서 죽어서 조금이나마 경제적인 도움이 되어주는 거라고 믿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딸아이가 선물이라며 작은 노트를 만들어왔다. 백지를 잘라 접고 표지에 그림을 그린 노트였다. 작은 아기 토끼가 눈을 감고 있는 엄마 토끼를 멀리서 바라보는 그림이었다. 가슴이 미어졌다. 그날 정말 오랜만에 연필을 들었다. 그리고 머릿속의 생각들을 노트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그동안 몸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스스로에 대한 미움과 세상에 대한 원망이 종이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렇게 한참을 미친 듯이 쓰고 나자 간만에 숨이 쉬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태어나서 처음 가진 일터였다. 한 때는 평생을 걸어도 좋다고 생각한 적도 있는 공간이었다. 안팎으로 불안이 넘쳐나던 20대의 나를 구해준 동아줄이었고, 덕분에 아쉬운 소리 할 일 없이 15년을 살 수 있었다. 명문대에 따라온 든든한 직장 덕에 부모님의 자랑거리 역할을 오래도록 할 수 있기도 했다. 비록 내게 맞지 않은 옷이었지만 그렇다고 벗어내 던지기엔 너무나도 아까운 그것이었다. ‘대안을 찾겠다고 회사 밖을 나와 있을 때조차 나는 뼛속까지 조직인이었다. 언제든 돌아갈 그 곳이 있다는 것은 한계까지 나를 몰고 가지 않아도 되는 핑계였으며, 은근한 자부심이기도 했다.

 

바보. 어떻게 죽은 엄마가 살아있는 엄마보다 더 좋은 엄마일 수 있니? 욕심내지 말고 가능한 만큼만 살아있는 엄마로 아이들과 함께 해보면 안 되겠니? 어차피 죽을 거라면서 더 잘하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잖아정신이 번쩍 들었다. 복직한 지 14개월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그로부터 직장을 마음에서 완전히 지워내는데 채 두 달이 걸리지 않았다. 직장이 아무리 중하기로서니 자체를 넘어설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덕분이었다. 

 

전환기, ‘자체가 목적인 시간

 

집으로 돌아왔지만 별안간 훌훌 털고 일어나지는 못했다. 쓰기는커녕 읽기조차 버거운 시간들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런 시간들을 다 견디고 나니 신기하게도 다시 쓰고 싶어졌다. 2010년 현역 연구원 시절 체험했던 변화의 메커니즘을 내 언어로 정리해둔 매뉴얼을 따라가보기로 했다.

 

스스로 던진 질문에 공들여 대답하는 시간이 하루하루 쌓이면서 나의 과거, 현재, 미래가 오롯이 담긴 한 권의 책이 탄생했다이따금 어두운 마음이 밝아지고, 혼란이 몰입으로, 실패가 실험의 장으로, 깨지는 과정이 깨우침으로 바뀌는 순간을 체험하기도 했다. 그렇게 오직 나만을 위한 책을 만들어가며 조금씩 더 단단해져가는 나를 느낄 수 있었다.

 

아직 우울증의 후유증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나에게 자신이 감정적 수렁에 빠지는 패턴과 여기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이 잘 정리되어 있는 텍스트는 그야말로 든든한 백과 같다. 실제로 마음이 심하게 흔들리는 날엔 내가 쓴 그 책을 펼쳐 읽다보면 어느새 통증으로부터 빠져나와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나를 힘들게 하는 그 모든 것이 실체가 아니라 마음의 작용일 뿐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때문인 듯하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폼나는 귀환을 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자신이 없다. 하지만 내 삶이 다하는 그날까지 쓰기를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만은 장담할 수 있다. 내가 쓴 글만큼 나를 위로하는 텍스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본형은 책을 내기 위해 글을 쓰지 않았다. 그에게 글쓰기는 책 집필에 앞서 자기탐구의 수단이었고 학습의 일환이었다. 글쓰기는 숨겨져 있는 자기를 발견하고 재창조하기 위한 실험이었다. 그는 새벽을 자기탐구의 시간으로, 글쓰기를 탐구의 방편으로, 그리고 스스로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자기변화는 다른 무엇이 아닌 자신을 대상으로 부지런히 실험하고, 학습한 것을 자기 삶에 적용하는 활동이다. 이것이 임계점을 넘으면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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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러운 삶이 모여 책이 되는 경지, 그리도 원하던 가르침을 이리도 가까이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오직 살아있기 위해쓰고 또 쓰던 시간들이, 그 무용하기 그지없어 보이던 시간들이 그냥 흐르기만 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전에는 보지 못하던 것을 알아보는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되었으니 말이다. 모든  것이 절망이었던, 죽음 보다 더한 죽음이었던 시간들 속에서도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기에 얻게 된 선물일 것이다.  스스로에게 기회를 거두지 않는 결단이 있었기에 맞을 수 있는 오늘일 것이다.



이제야 알겠다.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기회를 주는 것이다.> 더이상 가망이 없다는 절망이 밀려올 때,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될 때 한 번 더 스스로를 믿어주는 것이다. 물론 모든 기회가 '성공'이 되지는 않겠지만 '삶'이 되지 않는 기회란 없는 법이니까. 살아있다면 한 번은 더 웃을 수 있는 것이 인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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