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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12일 14시 58분 등록

아침 조회를 마치고 카운슬러들이 난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 서서 수다의 꽃을 피우는 와중에 나도 늠름하게 그 대열에 합류 하였다. 그중에 한사람이 자랑스럽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꺼내었다.

“세상에 세상에 지난주 그사람에게 전화가 왔지 뭐예요.”

“누구 말이예요?”

나는 무슨 상황인지 몰라 질문을 하였더니 옆에 있던 분이 살며시 귓가에 속삭인다. ‘첫사랑 분에게서 연락이 왔데요.’

첫사랑이라. 오십이 넘은 가정 주부에게 첫사랑 에게서 연락이 왔다고. 허참. 나는 궁금중에 못이겨 짐짓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그래 전화 와서 뭐라고 합디까. 만나자고 하지 않던가요.”

“어떻게 아셨어요. 냐야 밑질 것 없으니까 만났죠.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 하기도 하고.”

동료들은 난리가 났다. 꿈 많던 단발머리 여고생 시절처럼 호기심이 도졌는지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라고 성화다.

“그래 뭐하는 분이래요.”

“파주에서 치과 의사를 하고 있다는데 돈도 잘버나 봐요.”

웃긴다. 속으로 미친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돈 잘벌고 있는 멀쩡한 놈이 무엇이 아쉬워 첫사랑을 찾으러 그 먼 파주에서 이곳 지방까지 직접 내려 왔을까.

“그래 어땠어요. 만나 보니까.”

나는 뻔한 이야기인줄 알면서도 궁금증이 더해갔다.

“첫 남자를 만난다는 느낌 그거 묘하데요. 잠도 못이루고 밤을 홀딱 새었지 뭐예요. 출근길에 남편이 저녘에 일찍 들어 오냐는 물음에 왠지 마음 한구석이 찔리기도 하였고. 여하튼 마중을 하러 역으로 나갔죠. 두근반 세근반으로 기다리고 있던차 우린 만나자 마자 서로를 알아 보았어요. 몇십년 만에 만났는데도 참 신기하데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할까.”

한순간에 알아 보았다고. 그녀처럼 나도 첫사랑을 만나면 알아챌수 있을까?

 

초등학교 6학년 시절. 같은 반이었던 그애의 이름은 이경숙 이었다. 긴 생머리에 호리호리한 몸매가 남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었던 아이였다. 덕분에 좋아하는 감정이 있었음에도 소심 많고 무엇하나 잘하는 것 없었던 나는 먼발치에서 그애를 바라다볼 수밖에 없었다. 하늘 하늘 거리는 머리카락을 날리며 등교하던 그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아웅~

마땅한 표현 방법이 없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 긴머리를 짖궃게 아주 가끔 잡아 당기는 것뿐 이었다. 별명도 붙여 주었다. 말꼬리 라고.

어느날 마눌님이 나의 사진첩을 뒤지다가 누구냐고 물었다. 당시 경주로 졸업 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 이었는데 우연찮게 옆에서 찍던 그애와 친구들 일행에 내가 찍혀 있었던 것이다.

“누구긴 누구야 내 첫사랑이지.”

떳떳하게 이야기하는 나와는 달리 마눌님은 우스워 죽겠다는 표정이다.

“첫사랑? 아이고 웃기는 소리 하고있네. 무슨 얼어죽을 첫사랑은... 왜 그녀가 잊지 못하고 있으면 찾아 가기라도 할래.”

“당연하지. 내 청춘을 돌리도 돌리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흥, 가라지. 누가 무서워 할줄 알고.”

빛바랜 기억속에 간직된 그애의 모습. 무얼하고 있을까. 어떻게 살고 있을까. 결혼은 당연히 했을 것이고 동창회 명부라도 뒤져볼까. 만약에 다시 만난다면 알아 볼수는 있을런지. 혹시 그애는 내가 좋아 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가만 있어보자. 누군가 이야기 했듯 이거 첫사랑이 아닌 짝사랑 아닌가?

 

그녀의 영웅담은 계속 되었다.

“그래 뭐하셨어요. 만나서.”

“호수 부근의 멋진 레스토랑에서 식사도 하고 차도 마셨죠. 멋지게 차려입은 옷에 매너도 좋더라구요.”

참 잘하는 짓이다. 남편은 이사실을 알고는 있는지. 그럼에도 다음 이야기의 뜸을 들이고 있는 그녀가 얄미워 지는 것은 왜일까.

“우린 이십대 중반에 볼링장에서 처음 만났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제가 그당시에도 잘나갔었거든요. 옆 라인에서 게임을 하고 있던 그사람이 내가 연속 스트라이크를 넣자 먼저 관심을 보이며 대쉬를 했었지 뭐예요. 몇 번 데이트를 하다가 콧대 높게 바람을 맞혔었는데 만약에 그때 잡았더라면...”

그 멘트에 당사자는 가만히 있는데 동료들이 더욱더 난리다. 다들 아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하기사 치과 의사인 첫사랑의 남자와 현재 평범한 샐러리맨인 그녀의 남편이 객관적으로 비교 되는건 사실이니까.

 

오래전 이휘재의 인생극장 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송에 방영되며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다.

하나의 상황에 대한 두가지의 반응 장면을 연출해 놓고 그 선택에 따른 결과가 판이하게 다른 내용을 다루었었는데, 픽션이긴 하지만 당시 시청자들에게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었다. 아무래도 밑바탕 기저에 깔려있는 사람들의 ‘만약에’ 라는 심리적인 속성을 예리하게 건드린 탓이었으리라.

 

세상에 만약 이란게 없다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작은 상상을 꿈꿔 본다.

만약에 내가 다른 부모 밑에서 성장 하였더라면

만약에 내가 그때 첫사랑과 맺어 졌었더라면

만약에 내가 그 기차를 놓치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내가 그 회사에 입사를 하였더라면

만약에 내가 재수를 하였더라면

만약에 내가 다른 남자랑 결혼을 하였더라면

만약에 내가 당시 빛을 내어서라도 아파트를 매매 했었더라면

만약에 고 노무현 대통령이 자살을 선택 하기전 시킨 담배를 경호원이 거부 했었더라면

우리는 꿈을 꾼다. 돈이 들지 않는 이룰수 없는 꿈을 꾼다.

그 꿈의 주인공은 나이고 주변 인물은 나를 흠모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퇴짜를 놓아도 내가 모르는체 상대를 하지 않아도 그들의 시선은 항상 나를 쫓는다. 이놈의 인기는 식을줄을 모른다.

우리는 그런 만약에 라는 환상 속에서 잠시나마 천상의 꿈이라는 영화를 찍는다. 시나리오에다 주인공, 각색, 감독까지 일인 다역을 한다. NG라는 용어도 없다. 그냥 액션이 ing로 진행 된다.

그러다 눈을 뜨고 정신 차리다 보면 피곤한지 뒤척이며 자고 있는 마눌님 한숨 소리의 현실이 들려온다.

 

그녀의 이야기가 끝을 맺어갈 즈음 가만히 듣고 있던 어르신 한분의 일침이 모두를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고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담밖의 장미보다 내 집안의 채송화가 소중한 법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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