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ggumdream
  • 조회 수 958
  • 댓글 수 1
  • 추천 수 0
2018년 2월 5일 11시 04분 등록

#34. 작고 사소한 일들

학과수업을 듣고 내무실로 복귀하면 집에 돌아온 것처럼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반대로 나는 가슴이 두 근 반 세 근 반이 되곤 했다. 내무실 문을 열었을 때 눈에 보이는 모습이 아침에 내가 정리한 상태와 똑같다면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고, 반대로 초토화가 되어 있으면 울상이 되곤 했다.

사관학교 시절 우리는 생활과 행동에 매일매일 24시간 검열을 당했다. 때론 훈육장교에 의해, 때론 선배들에 의해.

가장 기본적인 침구정리. 모포는 모서리가 직각을 이루고 시트커버는 팽팽하게 당겨져 있고, 베개 역시 구김없이 모포와 시트커버 중간에 놓여있어야 한다. 군화, 운동화 등 신발 또한 반짝반짝 빛나야 함은 물론 오와 열을 맞춰 가지런히 놓여 있어야 했고, 옷장속의 옷은 어깨 선이 나란히 평행을 이루어야 하고,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어야 했다. 아무튼 내무실에 있는 모든 물건은 흐트러짐이 없어야 하고 가지런해야 한다. 이것이 정리정돈의 원칙이었다.

사실 나는 이런 것을 잘 하지 못했다. 나름 한다고 노력하는데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41, 21실을 쓰던 시절이었는데 수업을 마치고 내무실로 복귀하면 이상하게도 룸메이트들의 물건들은 원상태 그대로 놓여있는데 나만 모포나 베개가 침대위에 흩어져 있고 책꽃이의 책도 책상위에 쏟아져 있었다. 아무튼 초토화가 되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그러면 항상 내 마음속에는 이런 의문이 생겼다. ‘왜 나만?’ 너무 양호한 동기들을 룸메이트로 둔 나의 실수였다고 합리화를 하지만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던 건 사실이다.  

그런 와 중에 항상 내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하나의 생각은 군인이 되어야 하는 우리는 도대체 왜 이런 사소한 것들에 신경을 써야 하나 하는 것이었다. 실제 전쟁터는 이런 작고 사소한 것을 요구하지는 않을텐데 말이다. 항상 그런 사소한 일들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자체가 불만이었다.

<침대부터 정리하라(Make your bed)>의 저자 윌리엄 H. 맥레이븐은 단순하고 간단하지만 침대 정리의 중요성을 얘기한다. 원래 이 책은 2014년 저자의 텍사대 졸업연설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다. 미 해군 대장 출신인 그는 텍사스 대학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ROTC 출신으로 2014년까지 37년간 미 해군에서 복무했다. 네이비 실을 시작으로 해군 제1특수전단 사령관, 합동 특수전 사령부 사령관, 미국 특수전 사령부 사령관 등 미 해군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2011년에는 오사바 빈 라덴을 사살한 냅튠 스피어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일약 전 미국인의 영웅으로 떠오르며 그해 『타임』지 올해의 인물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맥레이븐은 연설에서 텍사스 대학의 슬로건으로 말문을 열었다. <여기서 시작된 것이 세상을 바꾼다>. 그는 이 말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는 한 사람의 미국인이 평생 1만 명의 사람들과 접촉한다는 분석을 인용하며, 여기 모인 8,000명의 졸업생 각각이 평생 만나게 되는 1만 명의 사람들 중 단 열 명의 인생을 바꾸더라도 다섯 세대가 지나면 8억 명의 인생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야말로 여기서 시작된 것이 실제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차분하면서도 힘 있는 어조로, 그는 이것이 헛된 희망이 아님을 강조하며 졸업생들에게 세상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고 했다. 자신이 군에 복무하면서 배운 것들이지만 단 한 번도 군복을 입어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매우 유용한 교훈이 될 거라며

연설에서 그는 자신이 6개월 동안의 네이비실 기초 군사 훈련 과정에서 배운 열 가지 교훈을 제시했다. 연설은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침대부터 정리하라는 첫 번째 교훈으로 시작해, 무언가를 포기함으로써 인생이 수월해지는 경우는 결코 없음을 강조하는 열 번째 교훈으로 끝을 맺었다.

그는 첫번째 교훈에서 말한다. 침대 정리는 그날 나에게 주어진 첫 번째 임무였고, 따라서 제대로 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 일은 임무에 임하는 나의 태도를 설명해 보였다. 침대 정리는 내가 일의 얼마나 세세한 부분까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지를 보여주었고, 또한 그날 하루를 마무리할 즈음에는 내가 무언가를 잘 해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 임무가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제대로 해냈다는 점에서 분명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인간의 신념이 주는 힘과 위안을 대체할 수는 없지만, 때로는 침대를 정리하는 단순한 행위 하나가 하루를 시작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고, 하루를 제대로 끝냈다는 만족감을 선사해 줄 수 있다. 인생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침대부터 정리하라.

나는 어쩌면 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실패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런 작고 사소한 것들을 말 그대로 작고 사소하게 생각하다 보니 정작 중요한 일 역시 잘못했던 것일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의미로 평소에 좋아하는 문장이 있다. <중용> 23장에 나오는 문장인데 영화 <역린>에서 나오는 대사로 처음 알게 되었다.

其次는 致曲이니 曲能有誠이니 誠則形하고 形則著하고 著則明하고 明則動하고 動則變하고 變則化니 唯天下至誠이야 爲能化니라

(기차는 지곡이니 곡능유성이니 성즉형하고 형즉저하고 저즉명하고 명즉동하고 동즉변하고 변즉화니 유천하지성이야 위능화니라)

여러 버전의 해석이 있지만 의미가 크게 다르지는 않다. 영화 상의 해석을 보면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

는 것이다.

이 나이가 되고 나니 이제는 알겠다. 대탐소실. 큰 것을 탐하면서 작은 것을 등한시하면 거기서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작은 것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큰 것을 얻을 수 있으랴.

군대에서 매일 매일 하는 점호와 인원점검, 각종 청소와 검열에 대해 이런 쓸데 없는 짓을 왜 하나 의구심을 많이 가질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해도 시스템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 의구심보다는 왜 이런 시스템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질까 생각해보면 좋겠다.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같이 생활하는 군대에서 이런 매일매일의 점검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한 얘기다.

군대든 사회이든 사람들은 중요한 것, 큰 프로젝트만이 자기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모든 것을 집중한다. 올바른 자세이고 바람직한 자세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그런 중요한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작은 것 하나, 사소한 것 하나에 신경쓰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큰 프로젝트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시대가 바뀌어도 언제나 진리는 통하는 법이다.  

IP *.106.204.231

프로필 이미지
2018.02.06 00:09:27 *.18.218.234

맥레이븐 연설 동영상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낼 수도 있구나. 

그나저나 제목을 '8억명의 인생을 바꾸는 군대 각잡기의 비밀' 뭐 그런 거 어때요?

000 하는 군대 삽질의 비밀, 거꾸로도 돌아가는 국방부 시계의 비밀 등 시리즈물로. 


맥레이븐 텍사스 대 연설에서 중용/역린 나오니까 톤&매너가 살짝 어긋나는 느낌이 있긴 하지만, 군대 내 '사소함'을 세상 밖에서의 '변화의 힘'으로 연결한 흐름 좋네요. ^^ 다음엔 군 관련 어떤 이야기가 나올 지 궁금. 매주 군 관련 글 쓰는 거 대단. ^^b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912 스승을 찾아 헤매일 때, 교육의 괘 <산수몽> file 보따리아 2018.02.10 1267
4911 #34 매일의 힘_이수정 [2] 알로하 2018.02.05 932
4910 [뚱냥이의 놀자 도덕경] 제1장 진정한 도는 무엇인가? [1] 뚱냥이 2018.02.05 994
4909 따뜻한 만남이 있는 한 주는 어떠실까요? [1] 송의섭 2018.02.05 936
» #34. 작고 사소한 일들 [1] ggumdream 2018.02.05 958
4907 베트남에서 본 우리의 30년 [2] 모닝 2018.02.05 954
4906 #34_하루 세번, 혼자만의 시간 [1] 윤정욱 2018.02.05 940
4905 칼럼 #34 혹, 우리 아이가 가해자는 아닐까? (정승훈) file 정승훈 2018.02.03 935
4904 사면이 꽉 막힌 벽일 때, 희망의 괘 <산지박> file 보따리아 2018.02.02 1383
4903 #33 오만과 미련_이수정 알로하 2018.01.29 990
4902 살면서 잊어버리는 것들 송의섭 2018.01.29 935
4901 #33. 34권의 책 [1] ggumdream 2018.01.29 950
4900 #32 태극기 집회를 만나고 (윤정욱) 윤정욱 2018.01.29 950
4899 작가라면 관찰의 괘, <풍지관> 보따리아 2018.01.29 1484
4898 # 나는 방송국에서 어떤 일을 하는가? (이정학) 모닝 2018.01.28 940
4897 칼럼 #32 혹, 내 아이가 피해자는 아닐까? (정승훈) file 정승훈 2018.01.28 956
4896 #31.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1] ggumdream 2018.01.22 947
4895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file [1] 송의섭 2018.01.22 1013
4894 칼럼 #31 우리 이모 (윤정욱) [1] 윤정욱 2018.01.22 969
4893 # 다시 찾은 제주에서 모닝 2018.01.21 9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