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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7일 20시 41분 등록

한국인 팔자엔 주역이 있다.

 

내가 왜 팔자에도 없는 주역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거지…”

 

막상 공부하겠다고 주역 책을 잡았으나 어느 순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 투덜대는 나에게 친구가 말한다. “잘 생각해봐. 분명 네 팔자에 있을 거야.”

 

그 말을 듣자 마자, 불현듯, 글자 그대로 성냥개비에서 불이 화르륵 켜진다. 환하게 타는 성냥불 너머 10년 전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지역의 서쪽 도시 카쉬가르가 어른거린다. 한 때 러시아 영사관으로 사용되었던 유서 깊은 셔먼빈관(色滿)’의 존스카페에 앉아 있는 내가 보인다. 나는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태극기의 뜻을 설명하고 싶었다. 마침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있는 한국남자가 눈에 들어 온다. 한의사라는 그는 개원을 앞두고 여행 중이라 하였다. 처음 만났던 우루무치에서부터 동선이 같아 함께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는 항상 주역책을 손에 들고 틈만 나면 외우고 있었다. 그에게 불쑥 물었다.

 

태극기의 4괘는 무슨 뜻이예요? 외국 친구들한테 설명 좀 해주고 싶은데……”

 

기다렸다는 듯이 종이를 꺼내 4괘를 설명해주는 남편의 모습이 보인다. 고개 숙인 그의 머리카락이 새까맣다. 지금은 하얀 머리카락이 제법 덮여 있는데. 10년간 어쩌면 나는 이 장면을 한번도 떠올리지 못했을까? 정말 단 한번도 4괘를 묻는 나와, 설명을 해주는 남편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주역은 내 팔자에 있다 못해 우리를 이어주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남편은 태극기 4괘의 뜻을 마친 후 나에게 관심 있다는 고백을 하고 말았는데, 나는 그 대목에서부터만 기억하고 있었다.

 

주역이라 하면 삶의 현실과 동 떨어진 이야기같지만 사실 한국인이라면 모두 팔자에 주역이 있다. 태극기의 태극과 모서리에 그려진 ‘4를 우리는 대한민국의 상징으로 쓰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럼에도 너무 익숙해서 지나쳐버리는 주역의 8괘에 대해 이번 기회에 함께 알아보자. 전설 상의 인물인 복희(伏羲)씨가 만들었다는 는 언어가 생기기 전에 만들어진 일종의 암호라 할 수 있다. 음과 양의 조합만으로 만물의 뜻과 변화 원리를 설명한 괘를 아는 것은 조상이 우리에게 남긴 삶의 지혜를 발굴하기 위한 첫 시작이다.

 

먼저 괘는 이어진 막대기’(양효/陽爻)끊어진 막대기’(음효/陰爻)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막대기들이 1층에서 3층까지 쌓이며 8개의 괘상을 만든다. 그것이 주역의 8괘이다. 각 괘의 이미지와 상징하는 바를 살펴보기로 한다 

 

건괘.jpg 하늘, 건괘/乾卦

이어진 막대기’, ‘양효1층에서 3층까지 쌓여 있다. ‘순양(純陽)’으로 경계 없이 펼쳐진 끝없는 하늘을 상징한다. 쉼표가 없는 굳센 힘이 느껴진다. 하늘같이 든든한 사람을 상상해도 좋다. 괘상의 이름은 건괘(乾卦)'이다.

 

곤괘.jpg , 곤괘/坤卦

건괘와 반대이다. ‘끊어진 막대기’, ‘음효1층에서 3층까지 쌓여 있다. ‘순음(純陰)’으로 을 상징한다. 만물이 여기에서 나고 길러지므로 어머니와 같은 느낌이다. 괘상의 이름은 곤괘(坤卦)’이다.

 

감괘.jpg, 감괘/坎卦

이 괘상은 1층과 3층의 음 사이에 양이 끼어 들어가 있는 모습으로 물()을 상징한다. 끊어진 막대기(음효)1층과 3층에 놓여 있어 그 틈 사이로 언제든 새어 나갈 여지가 있어 보인다. 미꾸라지처럼 틈 사이로 미끄럽게 빠져나갈 거 같은 통제불능의 자녀를 생각해보자. 어떤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는 존재를 생각해봐도 좋을 것이다. 호시탐탐 나가서 놀 생각만 하는 천방지축 아들래미가 생각나는 이 괘상의 이름은 '감괘(坎卦)'이다.

 

리괘.jpg, 리괘/

/감괘와 반대인 이 괘상은 1층과 3층의 양 사이에 음이 끼어 들어가 있는 모습으로 ’()을 상징한다. 외피는 밝으나 속은 어둡다. 겉은 강하고 속은 부드러운 어떤 것을 떠올려도 좋다. 하늘, 태양, 밝음 등을 상징하는 양이 2개나 있으니 그 후끈함이 느껴지는 괘상이다. 밝은 기분, 날아갈 것 같은 기분, , 희망 등을 표현할 있을 것이다. 괘상의 이름은 리괘()이다.   

 

여기까지 벌써 하늘을 상징하는 건괘’, 땅을 상징하는 곤괘’, 물을 상징하는 감괘’, 불을 상징하는 리괘 살펴보았다. 8괘의 반을 익혔고, 태극기의 4, ‘건곤감리 전부 살펴본 것이다. 하늘, , , 불을 상징하며 만물의 조화와 섭리를 나타내는 태극기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철학적인 국기라 하겠다조금만 힘을 내어 나머지 4괘를 알아보기로 한다.

 

태괘.jpg 연못, 태괘/兌卦

이 괘상은 1층과 2층에 차례대로 양이 쌓여 있고 3층에 음이 있어 연못을 표현한다. 연못은 아래가 막혀 있고 위로는 물을 담는 성격을 갖고 있다. 이어진 막대기 2개가 1층과 2층에 바리케이드처럼 놓여 있으니 물 샐 틈 없는 그릇을 상상해도 될 것이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람을 떠올려도 될 것이다. 지인 중에 모든 스트레스를 스폰지처럼 빨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내 마음을 꺼내서 짜면 아마 물이 엄청 많이 나올 거야라고 자조적으로 말하곤 했는데, 그 분 스스로의 스트레스나 화병은 있을지언정 그 분 덕에 집안의 평화와 질서는 잡히고 있었다. 화가 많은 남편, 우왕좌왕하는 아들을 그 분의 마음 속 그릇에 넉넉히 품고 있는 것이다. 그 모든 요동과 흐름과 변덕을 담고 있는 고요한 연못을 표현하는 이 괘상의 이름은 태괘(兌卦)이다.   

 

진괘.jpg 우레, 진괘/震卦

이 괘상은 끊어진 막대기가 2층과 3층에 2개나 버티고 있다. 아래에 있는 양의 기운이 지면(地面)의 음기를 뚫고 나오는 모습을 본뜬 것으로 그 힘찬 움직임 때문에 움직일 동()의 의미가 두드러지며 우뢰()의 성격을 나타낸다. 이 괘상의 이름은 우()와 진()의 합성어인 진괘(震卦)로 우뢰가 쳐서 사물을 진동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역동성이 가득한 사람을 상상해도 좋고 소리는 요란하되 결과는 파괴적이기도 한 모습을 떠올려도 좋다.  

 

손괘.jpg 바람, 손괘/巽卦

끊어진 막대기(음효)1층에 있으니 마치 무거운 배낭을 매고 길 위를 하염없이 걷는 여행자의 모습이 떠오르는 이 괘상은 손()괘로 바람을 상징한다. 개인적으로는 그냥 바라만 봐도 시원한 바람과 길 먼지가 느껴지는 이미지라 좋아하는 괘상이다. 또는 2층과 3층에 있는 양의 기운을 온 세상에 흩뿌리는 바람을 상상해도 좋을 것이다. 신화의 인물로는 경계를 넘나들며 바람과 같이 왔다 바람과 같이 가는 헤르메스, 한 공간에서의 보물이나 좋은 소식(양의 기운)을 다른 곳에 전해주는 사람으로 생각해도 좋겠다.  

 

간괘.jpg, 간괘/ 艮卦

1층과 2층에 있는 2개의 음 위에 양이 지붕처럼 덮고 있다. 이 괘는 을 나타내며 괘상의 이름은 간괘(艮卦)이다. 무언가를 덮고 있는 형상은 멈춤을 떠올리게 한다. 파멸을 향한 진보를 경고하는 하늘의 뜻에 따른 위대한 멈춤일 수도 있고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를 위한 전략적 멈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때를 보아가며 머물러 힘을 기르기 위한 멈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멈춤이 가능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지원하는 든든하는 자연의 산을 상상해보자.  

 

이렇게 주역의 기본 8가지 단어라 할 수 있는 8괘를 살펴보았다. 주역은 만물의 뜻과 성질을 괘상에 담아 표현한 것이기에 하나의 괘상에 수없이 많은 뜻이 담겨 그 함축성과 상징성의 농도가 매우 짙다. 그 어느 시()보다 더욱 진할 수밖에 없는 상징언어인 주역을 통해 이제 우리는 조상들이 들려주는 시를 읽고 들을 수 있는 눈과 귀를 갖게 된 것이다.

 

IP *.18.218.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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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16:04:08 *.100.195.104

4쾌. 오~ 그렇군요.

처음에는 좀 쌩둥맞은 주제라고 생각했는데...

책 출간여부를 떠나서... 많은 배움을 얻으실 것 같습니다.

결코 만만하지 않은 주제지만, 화이팅!

프로필 이미지
2017.12.24 22:13:37 *.18.222.45

에구 연대님, 우리 글 다 읽어주시고 댓글까지..감사합니다.

제가 제일 출간이 힘들 거 같은 각이죠? ㅎㅎ

말씀하신대로 쓰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쓰는 과정이 될 거 같아요.

습작수준의 글을 올리게 되어 민망할 뿐입니다.

응원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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