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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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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19일 12시 39분 등록
친애하는 아나타

진정으로 사랑하는 분, 당신은 알고 계시며,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내가 당신과 함께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내가 생명과 영혼을 다 바쳐서 당신의 것임을 온 세상에 알릴 수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나의 이 낡은 겉 옷을, 그리고 나의 오랜 마음을/바칠 수 있습니다./…당신의 연인으로 불리는 일은 내게는 언제나 감미롭기 그지없는 일이었습니다/부디 화내지는 말아 주세요/당신의 정부,당신의 창녀라고 불려도 좋습니다...//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어주실 것이로되/만일 황제가 전세계의 지도자가 되어 내게 청혼하고 전세계를/영원히 내게 주겠다고 해도/나는 황후가 되기 보다는 당신의 창녀라고 불리고 싶습니다//…오직 한 분,가장 사랑하는 분/내게는 당신의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보다/더 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는 12세기 유명한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 엘로이즈가 그의 연인 아벨라르에게 보내는 시이다. 이들의 사랑은 전대미문의 비극이었다. 불처럼 다가온 정념에 온 몸을 바쳤다가 한 평생을 고통 속에 보내야 했던 이들의 러브 스토리는 중세 유럽을 발칵 뒤집었다. 듀런트는 '중세의 노래'를 소개하며 음유시인들의 노래들 뒤에 이 아름다운 두 연인의 이야기를 끼워 넣고 있다. 이렇다 할 설명이 없지만 듀런트가 이들의 이야기를 그곳에 넣은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최초의 근대 지성이자 교수였던 아벨라르는 1079년 프랑스의 부르타뉴 지역 낭트 가까이에 위치한 마을 르팔레에서 태어났다. 그 무렵 프랑스는 화폐경제가 시작되면서 기존의 기득권적 봉건질서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고, 지적인 각성도 곳곳에서 일어나 소위 12세기 르네상스의 예비 기운이 팽배할 즈음이었다. 더구나 11세기 말은 교회의 개혁이 있던 시기여서 지성을 갖춘 성직자가 어느때보다 필요했다. 그리고 이것이 배우고 싶어 하는 자나 가르치고자 하는 자에게 더 많은 기회를 열어 주었다. 소귀족 계급 출신인 아벨라르가 전통적인 군인 가족의 장자로서 좀더 유리한 군인의 길을 포기하고 스스로 문사의 길을 가게 된 것은, 이런 시대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타고난 기질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그는 언제나 강한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는 곳 어디서나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루아르 지방의 여러 학교를 전전하던 아벨라르가 파리에 입성한 것은 1100년이었고, 이로부터 15여 년 동안 그는 학업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아벨라르는 당대 파리의 가장 유명한 논리학 교수 월리엄(Willam)과 논쟁을 벌여 그를 곤경에 빠뜨리는 한편, 적대적인 행동을 일삼았기 때문에 파리를 떠나기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아벨라르가 강단에 서면 어느 곳이나 학생들로 가득 찼고 그의 명성은 당대 이름 높은 지식인들을 앞질렀다. 35세가 되던 해에 노트르담 주교 학교의 교수직에 올랐고 그는 모든 것을 다 얻은 듯했다.

하지만 그의 불행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노트르담의 참사회원인 풀베르(Fulbert)의 조카 엘로이즈를 만나자 이 기고만장했던 문사가 사랑의 뜨거움 앞에 촛농처럼 녹아 내렸기 때문이다. 당시 17세의 귀족가문 출신의 엘로이즈는 수려한 미모 못지않게 학식과 교양이 뛰어나 프랑스 전역에 이름이 날 정도였다. 그 둘이 만난 건 1117년, 당시 아벨라르는 38살, 엘로이즈는 17살이었다. 아벨라르는 풀베르(부모가 없던 엘로이즈의 숙부, 그리고 후견인)의 초청으로 이 똑똑한 아가씨의 개인 선생이 되었던 것이다.두 사람은 겉잡 수 없이 사랑에 빠져 들었고 머지 않아 엘로이즈는 임신하였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곧 밖으로 드러났다. 아벨라르는 그녀를 부르타뉴에 있는 자신의 친가에 맡겨 아이를 낳게 한 다음 파리로 돌아와 풀베르의 허락을 받아 결혼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결혼을 완강히 반대한 것은 오히려 엘로이즈 쪽이었다. 그녀가 결혼을 반대한 것은 아벨라르가 성직자 신분이어서가 아니라 당시의 아벨라르의 상황 때문이었다. 그들이 결혼을 하게 된다면 아벨라르는 교수로서 노트르담에서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할 것이고 속인과 다를 바 없는 성직자로 학계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고 또 당시는 마리아 숭배가 매우 성행하던 시기여서 귀족계층이나 학자 사회에서 결혼을 불신하는 사회풍조가 만연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은 결혼은 하되 비밀에 붙이기로 하고 아벨라르의 장래를 위해 서로 떨어져 살기로 타협을 보았다. 그러나 이 결혼에 불만이 많았던 풀베르는 폭도들을 시켜 아벨라르의 남성을 거세하기에 이른다. 결국 두 사람은 헤어져 아벨라르는 여기저기 수도원을 전전하였고, 엘로이즈는 파라클레 수도원장으로 은둔해 평생 고독하게 살아야 했다.

그들의 2년 여에 걸친 사랑의 행각이 그쯤에서 끝났다면 이 얘기는 아마 영원히 망각 속에 묻혀졌을 것이다. 그러나 부르타뉴의 한 수도원에서 극한의 고통 속에 지내던 아벨라르는 1132년 위안 삼아 <나의 불행한 이야기>라는 책을 썼고 이 책이 두 사람 사이의 잠들었던 사랑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책을 읽은 엘로이즈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간의 절망 속에서도 자신의 내면에는 여전히 아벨라르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숨쉬고 있음을 확인하게된 엘로이즈는 그와의 감미로운 사랑의 기억을 떨쳐 버리지 못해 절규했다. 이후 그들은 서로 서신을 주고 받게 되었고, 둘 다 성직자 신분으로 서로 만날 수는 없었지만 변치않는 사랑을 키워갔다. 그 서간문이 12편 전해지고 있다.

신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주며, 이단은 폭력이 아니라 이성에 의해 억제되어야 한다는 등의 자유주의적 신학론으로 아벨라르는 1140년 상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 받고 늙고 병든 몸을 클뤼니 교단의 한 지원에 의탁한 채 여생을 보내야 했고 1142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을 전해 들은 엘로이즈는 클뤼니 대수도원장인 존자 피에르에게 그의 유해를 보내 줄 것을 간곡히 청하여 자신의 수도원에 안치하였고, 20년 후에는 자신도 그곳에 함께 묻혔다. 영원한 연인이자 남편이며 아내인 두 사람은 세상이 만들어 놓은 장벽을 넘어 죽음으로 함께 하게 된 것이다. 그들이 묻혔던 수도원은 프랑스 혁명으로 파괴되었ㄱ고 그들의 무덤도 훼손되었다. 결국 이들의 유해는 현재 파리의 페르 라셰즈 공립 묘지로 이장되어, 현재 파리를 방문하는 숱한 연인들이 즐겨 찾는 방문지가 되었다.

시대의 장벽을 넘을 순 없었지만, 평생 서원으로 아벨라르에 대한 사랑을 지켜간 엘로이즈의 단호하고 주체적인 행동은 당시에는 매우 희귀한 것이었다. 엘로이즈가 살던 시대는 여성의 지성이 대접받지 못하는 시대였다. 그런 의미에서 듀런트가 고대 그리스의 여성 시인 사포를 엘로이즈와 함께 자신의 영웅 리스트에 올렸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녀들은 당대의 가장 솔직하고 용감한 연인들이었고, 당대 가장 아름다운 선율로 노래한 시인이었다. 사포는 당시 가장 유명했던 가수 알케우스를 능가하는 시인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훌륭한 시인이었다.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아서 오히려 아름답게 후대의 사람들 기억 속에 저장되었다. 성취되지 않은 욕망과 사랑은 언제나 간절하고 낭만적인 언어로 그려지는 법이다. ‘방해가 없으면 문학도 없다'(266p)는 말은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사랑에 관한 한 진실이다. 그들은 사랑을 추상적인 그 무엇이 아닌,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언어로 그려냈다. 사랑에 대한 이런 솔직한 표현은 당시 사회에 커다란 논란과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후대의 많은 작가과 예술가에게 영감을 불어넣었고 많은 문학가들의 러브콜을 받았다. 실제로 화가들은 그들의 사랑을 열심히 화폭에 옮겼고, 루소는 <신 엘로이즈>를, 호르스트는 <중세 최대의 연애사건>을, 제임스 버지는 <내 사랑의 역사>를, 그리고 미드는 <하늘을 훔친 사랑>이란 책을 썼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 인용된 17세기 영국 시인 알렉산더 포프의 시 제목도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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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
2008.05.19 14:42:46 *.84.240.105
그래서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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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5.19 14:48:04 *.244.220.254
매번 느끼는 거지만, 가슴뜨거운 로망을 꿈꾸는 소녀같아요~
조교님은 '사랑'이라는 단어와 떨어질 수 없는 분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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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19 18:23:28 *.123.204.215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 아름다운것은 보는 사람만 그렇지 않을까요
행복하게 잘 살았더라~~ 하는게 더 아름답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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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5.19 22:34:19 *.36.210.11
나도 윌 듀런트의 역사속의 영웅들을 읽으며 이 두 연인의 로맨스에 깊이 감동했었다오. 소녀 같은 그대라면 더욱 더 하였겠네.


숙! 전문가에게서 한 편의 감상 평을 듣는 것 같아.
그대에게는 이렇게 서술해 가는 재능이 아주 뚜렷하고 눈부시게 좋다.
그대가 하는 일과 잘 어울리고 이런 책을 내는 것이 바람직해 보여.

지금부터 서서히 준비해 가며 써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너무 많은 다른 것에 힘 분산하기 보다 말이지.
이 말은 욕심을 좀 줄여도 좋을 것 같다는 말도 될지 모르겠네.

음악, 독서, 영화, 그림, 여행, 와인 등에 대한 비평... 그리고 그대의 몸 움직임과 마음 꿈틀거림까지를 어떻게 버무리면 좋을까?
올 한 해 당신에게 꼭 맞는 근사한 수료식을 기대해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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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2008.05.20 09:41:00 *.97.37.242
캬! 좋다.
"사랑의 뜨거움 앞에 촛농처럼 녹아 내렸기 때문"
나도 한번 녹아 내리고 싶당~~... ㅎㅎ

잘 읽었어요
책 읽다 갑자기 "남성을 거세"하는 내용이 나오길래 ?? 해서 ___ 쳤는데,
소은님의 친절한 해설을 들으니 감정이 찐하게 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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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8.05.20 10:19:51 *.247.80.52
소은님으로 인해 책을 다시 읽는 느낌입니다.
작년에 내가 본 책에 이런 구절이 있었던가 싶었는데....
이야기가 살아있어요.

작년에... 책을 읽어야한다는 강박에 싸여서 버거워하다가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친게 아닌가 싶네요.
양적으로 채워지지 않아서 어렵게 느껴졌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생소한 이야기에서 저 자신과 연결시키지 못하고, 시대상을 몰라서 그게 당시에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인지도 모르고...

하여간 새로 읽는 느낌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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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20 23:06:12 *.41.62.236

본디 로미엣과 줄리엣형의 사랑은 바로 절대 안 이루어질 것 같은 그 구조가 그들이 로맨스라고 생각하는 사랑을 지속하는 힘.

때문에 어쩌다 어렵게 이루어진다해도 계속적인 자극구조가 사라지면 바로 맨정신으로 돌아와서 상대의 눈꼽 발톱이 다 보여 바이바이 하게 된다나. 위의 두사람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저렇게 전해지지 않을까 사료됨.

순전히 심리학적 측면의 풀이라고나 할까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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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박
2008.05.21 07:59:01 *.218.202.52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 아름답다...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아름다운 것인가요?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너무 지나친 비약일 것 같아요. 오히려
이루어져야만 했던 사랑이었기에 아름다울'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침부터 뭔 헛소린지... 에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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