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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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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18일 19시 47분 등록

중학생이 되면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설레임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시간을 맞았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기에 아마도 들뜬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중학생이 되고 나니 어른과 한발자국 가까워진 탓에 뿌듯함과 대견함에 스스로 당당한 어깨를 갖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 중에 하나는 누구나 다 다짐하는 열심히 공부해보자는 것이었다.

특별히 좋아했던 과목은 없었지만 유달리 날 힘들게 한 과목은 있었다. 바로 국사시간이었다.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다짐을 번번히 좌절시키던 주범이었다. 선생님의 가르치는 스타일에 따라 과목에 대한 호감도가 많이 좌지우지 하기도 했지만, 국사선생님이 싫지 않았음에도 이 과목에는 정을 붙일 수가 없었다. 지독히도 따분하고 지루함의 연속이었기에 그 시간에는 선생님의 눈을 피해 창문 밖으로 시선을 내던지고 공상을 하거나, 여의치 않을 시에는 책에 얼굴을 고정시키고 다른 나라에 다녀 오기 일쑤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말썽을 피우지 않게 생긴 나는 한번도 걸려본 일이 없었다. 이런 소심한 땡땡이를 한 두 번 칠 때는 그나마 마음이 괴로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행동을 합리화 시키면서 싫지 않았던 선생님 탓을 하기 시작 했다.

하지만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시험이 코앞에 닥치면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만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책을 잡을 수 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과목이 처음에는 만만하다가 뒤로 갈수록 어려워졌지만 국사라는 과목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시대의 끝도 없는 유적지를 외우다 보면 다시 열심히 해봐야지라는 다짐은 저 멀리 줄행랑을 치기 일쑤였다. 공주 석장리, 연천 전곡리….공주가 어디인지, 연천이 어디인지 알지 못하면서 무조건 외워야 한다는 공부 방식에 대한 반발은 국사라는 과목이 최고였다. 한 번도 좋은 점수를 받아본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이 과목은 내 평균점수를 갉아먹는 과목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렇게 중.고등학생을 지내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일주일중 6일을 마시지도 못하는 술자리를 쫓아 다니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겼다. 역사에 관한 것은 교양 시간에도 어떻게든 피했다. 그 지루한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다시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역사에 관한 나의 지식은 중학생 때로부터 한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정지한 상태였다.

대학 생활은 나에게 첫사랑을 하게 해주었고, 술자리의 즐거움을 알게 해주었고, 전공과목에 대한 치열하지 않은 약간의 지식을 갖게 해준 시간이었다. 그런 시간들이 지난 후 사회인이 되었다. 처음으로 접한 사회는 정신이 없었다. 선배들이 던져주는 일을 하고 깨지기를 반복하다가 이어지는 회식자리에서는 중간에 자리를 일어나지 못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막내이기도 했기에 항상 막차를 타고 자정이 넘어서야 귀가하곤 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몰라도 사회생활을 잘 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한 번 직업을 바꾼 뒤 2002년도부터 해외 여행을 할 기회가 많이 주어졌다. 처음에 다른 나라의 문화들을 볼 때면 그저 신기하고 무조건 좋아 보였고, 심지어는 황홀함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여행에 대한 시간이 누적이 되면서 행복한 추억도 쌓였지만 또 한가지 우리나라의 문화와 다른 것이 눈에 들어왔고 그때부터 why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의문을 조금씩 해소시켜 준 것은 사진이었다. 취미로 사진을 시작하면서 시간만 나면 돌아다녔다. 각종 행사는 물론이고 사진 찍기 좋은 장소들을 계절별로 선정해서 장소와 시간에 상관없이 무조건 다녔다. 그때 알게 된 것이 우리나라의 한복과 건축물과의 아름다운 선의 조화는 단연 최고라는 것, 우리 가락을 현장에서 접하면서 나도 모르게 가슴이 방망이질 하는 것을 느끼며 내게도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삼천리 금수강산의 아름다움과 사계절의 뚜렷함이 얼마나 타고난 축복인지를 몸소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건축물을 볼 때는 사정이 달랐다. 무량수전의 배흘림 기둥의 의미를 알 수 없었고, 수덕사를 가던, 내소사를 가던 똑같아 보이기만 했던 고 건축이었기에 알지 못하니 보이지 않았고, 보지 못하니 표현할 수 없는 답답함이 느껴졌다.

그 뒤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시간이 날 때마다 궁금한 분야의 책을 사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여행을 할 때, 역사를 알고 갔을 때의 즐거움이 배가 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 후 우리나라는 물론 다른 나라의 역사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지금은 그렇게 늘어난 책들이 나의 책꽂이의 한 부분을 채우고 있다. 물론 아직 시절인연이 닿지 않아 읽지 못한 책들이 즐비하지만 역사에 대한 무지의 부끄러움은 그런 식으로 표현이 되었다.

역사를 모른다고 해도 일상생활에 불편할 것은 거의 없다. 역사보다도 영어를 더 잘해야 실생활에 누릴 수 있는 편리함이 더 많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터인가 역사는 찬밥신세가 되었다. 내 공부에서 밀려난 것처럼 어떤 계기가 있지 않는 한 학창시절을 빼놓고는 다시 생활의 일부분으로 들어오기가 쉽지 않다. 언젠가 아들이 던진 질문겸 한 비난이 잊혀지지 않는다. “엄마는 고대 로마사는 알면서 국사는 왜 몰라?”

나의 뿌리와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나의 기록을 남기고 싶은 사람이 나라의 기록을 몰라서야 되겠는가? 하는 부끄러움이 스며든다. 뒤 늦게 온 후회는 하나하나 알아가는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하다. 의무적으로 해야 했던 때와는 질적으로 다른 기쁨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시험을 보지 않는다는 이유로 당연한 것을 너무 경시하고 살았던 지난 시간에 대한 부끄러움은 없어지지 않는다. 몇 년 전 혼자 경주로 여행을 떠났을 때 쉴 새 없이 돌아다녔으면서 하나도 보지 못하고 온 그 시간의 부끄러움을 일연이 일깨워준다. 그래서 늦은 만큼 더 풍부하고 충실하게 채워나가야 한다는 숙제를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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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8 23:16:21 *.113.77.122

이게 이과생의 특징 ^^


나도 역사는 년도와 사건외에는 별 의미없이 보다가 여행을 하게 되면서 그 가치를 알게된것 같아. 

늦게나마 역사의 중요성, 그를 통한 나의 주체성을 찾아가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

그것을 같이 해나가는 참치가 있으니 더 든든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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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9 10:58:05 *.94.164.18

ㅋㅋ 그래서 이과를 선택했지요. 수학과 과학이 좋아서가 아니라 문과 과목 중에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어서...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여행이 참 많은 것을 일깨워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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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9 10:31:13 *.196.54.42

나도 역사가 취미인 아들에게 판판이 깨지고 있슴다 ㅎㅎ

여행을 가서도 역사나 인문지리에 대한 지식이 없다보니 보아도 보이지않아 볼게없더라고 말하는 자신을 봅니다.

고운기의 삼국유사를 들고 여행을 떠나고픈 생각이 문득 듭니다.

이제나마 역사의식을 가졌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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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9 10:55:50 *.94.164.18

우리 한번 갈까요?

이 책을 보며 경주로 향하는 제 마음이 파도처럼 일렁입니다.


하림이와 저희 아들은 비슷한 취미를 가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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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9 13:30:23 *.50.21.20

듣고보니 아이들이 괜찮다고 한다면 경주 여행에 같이 와도 좋을 것 같네요! 

역사를 좋아하는 아이들이라니 간지가 넘치네요. 

연구원 엄마, 연구원 아빠의 위력을 확인하고 갑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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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9 13:33:55 *.50.21.20

문과생으로서의 경험을 공유하면, 스스로 찾아서 읽고 공부하고 배워 늘 새롭게 하지 않으면 

역사 같이 디테일이 중요한 학문은 언제나 가물가물하게 망각의 베일 너머에 남아있습니다. 

꾸준히 읽고 또 읽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물론 기억력 좋은 문과생, 역사 매니아 문과생들은 예외로 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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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9 15:10:43 *.7.52.39
그게 문제네 기억력...요즘 문학적 건만증이 점점 심해지고 있으니....찾아 읽고 늘 새롭게 하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며...어니언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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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0 00:10:14 *.255.177.78

고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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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0 01:11:28 *.124.78.132

어린 시절부터 역사를 좋아해서 선택과목도 세계사를 했던 문과인이었는데 ^^;;;

이제는 어느덧 다 까먹고 ㅋㅋ 말았어요. 역시 뭐든지 꾸준히~ 늘 새롭게~ 해야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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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0 12:05:41 *.94.164.18

꾸준히~, 늘 새롭게~ 라는 말이 이렇게 어려운 말인지 몰랐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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