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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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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19일 10시 49분 등록

칼럼4 

이방(異邦)의 그녀에게


 

처음 견뎌야 했던 건 소리였다. 낯선 도시의 시가지도, 사람도, 향기도 아니었다.

 집을 옮긴 날부터 이른 저녁에 잠이 들거나 잠이 들지 않는 밤을 보냈다. 이르게 잠이 든 밤이면 한밤중에 깨어나 다시 잠들지 않았고 오로라도 없지만 스탠드불과 함께 보내는 불면의 밤들은 이어졌다. 그렇게 낯선 시간과 공간을 바라보다가 그 속으로 들어가는 일상을 만들어가기까지 낯설다는 말이 낯설어질 때까지.

 가족으로부터 떠나왔지만 또다른 가족 가까이에 머물며 낯섬과 익숙함을 서툴게 버무리고 있을 때 폭음과도 같은 소리들에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고 일상이 파괴되는 날들이 있다. 현실적인 언어로 말하자면 그것은 층간소음이라 불릴 것이다. 아파트라는 공간에선 그 소리들이 더 각인된다. 아파트니까 당연하고 아파트니까 참아야 한다는 전제가 튀어오는 까닭이다. 가로등이 줄줄이 불 밝히던 밤, 거리를 지나다니는 이들의 발소리, 폰 벨소리, 소곤이는 대화가 아무렇지 않았다면 여기서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왜 운치있는 정경을 그리지 못하고 있을까. 아이의 울음소리, 뛰어다니는 소리는 아니어도 내 방의 문여는 소리, 변기 소리, 물소리들은 그들 집에서도 같은 강도로 들릴 것이다. 생각하니 운치 없는 소리긴 하다. 

 그렇게 적응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낡은 아파트를 개조할 수도, 다시 이사를 갈 수도, 문득 찾아가 당신네 집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들을 참을 수 없다고 말할 일도 아니니 그 소리들이 고막 아래로 모여와 또아리를 틀고 자리 잡을 때면 이불을 둘러쓰고는 잠들기를 바랐다. 그리고 또다시 시간이 지났다…. 참을 수 없는 소음으로 자리잡은 것이 밤마다 뛰는 아이들의 발소리도, 황당하고 어이없게 저런 것도 들린다며 놀랐던 코고는 소리도, 밤마다 아이를 잡나하고 의심했던 경기들린 아이의 울음소리도, 막무가내로 화내는 소리도 아니었단 걸 알 시간이었다. 그 모든 것이 아니었다. 소리가 아니라 언어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처음엔, 할머니가 손주를 다그치네라고 생각하게 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없었다. 아이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베란다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쉴새없이 떠든다. 그녀 특유의 억양과 발성, 성조까지 첨가된 끝없는 쏼라쏼라. 그것이 언어였음을 알고 얼마나 허탈했던가. 그 어떤 시끄럽고 욕설 섞인 말이 이보다도 거북하고 이질적일까.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는 소음이구나 공해구나 생각했다. 나는 여전히 그 언어가 어느 나라인지 모르겠다. 그저, 베트남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아직까지 그녀가 전화기를 붙잡고 긴 시간을 떠들어댈때면 베란다문을 닫고 가끔 귀를 막는다.

 삼국유사를 읽는 밤. 바람은 몰아쳐 창문은 덜컹이고 나는 상념에 잠긴다. 감은사지에서 느꼈던 아련한 마음이, 사라진 나라의 이야기들을 읽으며 되살아난다. 머언 옛날 사라진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읽는 지점, 사라진 여인이 현재로 튀어나온다. 그 여인이 또 한 여인을 불러들여 우리가 만나는 지점엔 내 이웃 베트남 여인과 그녀, 인도의 공주 허황옥이 서 있다. 당신은 설화 속 이야기의 주인공일 뿐이다라고 말하려 해도 대가야국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왕후는 가벼웁고 여유롭게 존재를 증명한다. 굳이 연구결과1)를 들먹이지 않아도 그녀의 흔적이 묻어 있는 유적지를 제시하지 않아도 그녀가 이 지점에 나에게 온 이유를 충분히 짐작한다.

 그 옛날 알지 못하는 땅, 알지 못하는 이의 부인이 되기 위해 떠나왔던 인도 공주의 마음으로 그녀는 베트남 여인을 바라본다. 하늘이 점지해 줬다 하지만, 아버지의 명이었지만 마음으로부터의 거부와 두려움이 풍랑으로 나타나 먼 바닷길을 헤쳐 와서도 그 길을 되돌아가고야 만 그녀의 마음은 당연 고향땅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제 의지라고 말하겠지만 결국엔 온 가족이 먼 땅으로 시집가기를 바랐을 삶, 그 가족의 무게를 지고 이 땅으로 건너왔을 베트남 여인에게 그녀는 위로를 건네고 있으리라. 왕과 결혼하여 한 나라의 왕후가 되고 10여명의 자식을 낳고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는 데는 그녀가 공주의 신분이었던 점도 중요했을 터. 혈통주의, 순혈주의에 대한 고집을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 통할 위엄있는 혈통을 가졌기에 누릴 수 있는 호사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허황옥에겐 인도로부터 가져온 파사탑이 필요했다. 내 나라를 떠나온다는 것은 자의든 타의든 더할 수 없는 폭풍을 맘에 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저 베트남 여인에게 심어진 폭풍은 무엇으로 달랠 수 있을까. 알지도 못하는 땅, 청년이래도 낯설다 못해 두려울진대 하물며 중년을 지나는 이의 부인이 되어야 하는 삶. 그것으로 내 가족이 좀더 편안해 질 수 있다는 소망하나로 나를 버린 소녀의 삶과 꿈이여. 그녀의 폭풍을 잠재우는 것은 어머니의 목소리. 그녀는 그렇게 날마다 어머니의 목소리를 찾고 있었나. 베트남 여인에게는 그 어떤 신이한 목소리도 없었고 현실적인 금은보화 덩어리도 없이 이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허왕후가 신이한 이야기와 더불어 오늘날까지 역사책에 자리잡고 있는 것과 달리 베트남 여인의 삶은 녹록치 않을 것이다. 내가 알지도 못하면서 베트남 여인이라 부르듯 그녀가 가진 피부색과 언어로 그녀를 이방인으로 볼 것이며 그 시선은 아이에게도 이어질 것이다. 우리 속에 내재한 단일민족이라는 아집이, 현재 이뤄지고 있는 특정 국가와의 결혼제도가 만들어내는 편견이 그녀를 더욱 더 삶의 구석으로 몰아갈 것이다. 그녀가 그녀의 이름으로 살아갈지 허황옥처럼 새 이름으로 사는지는 모르겠다.

  삼국유사엔 왕들의 이야기를 넘어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들이 엮어 있다. 물론 그들에게는 영험하고 신비로운 이야기가 둘러쳐져 있다. 허나, 지금 이 땅을 살고 있는 베트남 여인의 이야기가 신이하지 않다 말할 수 있을까. 나라의 힘이 개인을, 한 가족을 구하지 못하고 그녀의 나라가 그녀를 밀어내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얽혀 새롭게 나라 속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 나라의 문화가 그녀를 밀어내려 한다. 그녀가 숨쉴 곳은 어디인가. 그녀는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모국의 언어를 잊지 않고 쉴새없이 쫑알대며 어머니에게만큼은 소녀적 감성으로 이야기를 할 것이다. 내가 소리로만 인식하는 그녀가 또다시 이 땅에서 밀려나와 그녀의 조국을 찾는 시간. 여전히 그 쏼라쏼라의 소리는 낯선 언어일 것이다. 허나, 나는 그것을 여전히 낯선 언어로 인식하게 될까. 타국 땅에 자리잡은 한 여인의 외로움과 그리움의 통곡으로 듣게 될런가. 이것도 아닌 듯하다. 내가 무엇이라고 그녀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내려 하나. 그냥 요즘 현대인들은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않는 것처럼 전화기를 부여잡고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일상의 모습으로 생각하자.

 어쨌든 그녀도 타국에서 그녀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는데 이제는 타국이라 부를 일이 아니라 새로운 조국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그녀의 생애, 그녀도 김해 허씨 허왕후처럼 한 성의 시조가 될 수 있는 일 아닌가.




1) 서울대 의대 서정선 교수와 한림대 의대 김종일 교수는 한국유전체학회에서 “약 2,000년 전 가야시대 왕족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을 분석한 결과 인도 등 남방계와 비슷한 유전정보를 갖고 있었다”고 18일 밝혔다. 이번 연구결과는 우리 민족의 기원이 북방단일설이 아니라 북방·남방계가 합쳐진 이중기원설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이들 연구팀은 “허황후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김해 예안리 고분 등의 왕족 유골에서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해보니 인도인의 DNA 염기서열과 가까워 이들이 남방 쪽에서 건너왔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유골 4구 가운데 1구에서 이같은 결과를 얻었으며 나머지 3구의 유골을 더 연구하면 정확한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경향신문, “김수로왕 부인 인도인 가능성 매우 커”, 2004.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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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9 13:01:35 *.196.54.42

층간소음에 시달리다 이방의 여인을 발견하고 그녀와 허황옥을 대비시키며 사유를 풀어가시는 에뭄길님의 글발이 놀랍습니다.

나도 잠 못이루는 밤이 있어야 이런 글이 나오려나..생각해 봅니다 ㅎㅎ


잔차를 타고 시골을 지나치다보면 이방여인?(지금은 한국여인)들을 심심치 않게 봅니다.

간혹 헷갈려요 내가 저들 나라에 들어선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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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9 17:41:07 *.94.164.18

단일 민족이 깨진지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심정적으로는 단일 민족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 사회의  낯설움에 대한 태도나 경계가 그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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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9 18:55:40 *.104.211.186

아파트의 소음에 잠 못 이루는 에움길. 옛날 옛날 신라 시대였나요? 베트남의 왕족이 왕권 다툼을 피해 도망와서 우리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고 이민족의 침입에 공적까지 세웠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어요. 그러고보니 옛 직장에서 이국적인 외모로 늘 주목받던 선배가 술에 취해 실은 부모가 베트남에서 온 이민임을 고백하던 순간이 생각납니다. 되게 짠했어요. 그 당당하던 사람이, 어찌나 물에 젖은 듯 가라앉던지. 에효, 젊은 베트남 새댁들이 아니라도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함께 살고 있었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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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0 00:20:57 *.255.177.78

밀려나온다는 표현이 가슴을 콕 찌르네요. 이런 표현이 에움길님의 글에는 종종 보여요.

그 기저에 있는 것들이 에움길님에게 있나봐요. 술한잔 하면서 이야기 들려주세요.

그 밀려나온 것들의 이야기를. 큰 사랑이 그대 가슴에 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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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0 01:26:27 *.124.78.132

우와우와! 역시 늘 새롭고 늘 마음에 콕 박히는 에움길님의 글은 볼 수록 신비스러워요 ^^*

그녀의 매력의 끝은 어디인가!!! 매력파 시조라도 되심이...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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