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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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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1일 23시 02분 등록

직장생활 14년 동안 여러 명의 보스를 모셨다. 직속상관도 있었고 대표이사도 있었다. 말단사원에서 시작해 자수성가한 보스도 있었고,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 황태자로 평생을 살아온 이도 있었다. 재주는 뛰어나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보스도 있었고, 사람은 좋은데 재주가 부족해 더 크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푼돈을 아끼다 인재를 잃는 보스도 있었고, 믿고 밀어주다 발등 찍히는 이도 있었다. 세치 혀로 모든 일을 다하는 보스도 있었고, 부하직원 모르게 힘든 일을 홀로 처리하는 이도 있었다. 떠났어도 두고두고 마음에 남는 보스도 있었고, 살면서 다시는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는 이도 있었다.

 

전국시대 한나라의 한비(韓非)세난(說難)’편에서 유세의 어려움에 대해서 자세히 논하고 있다. 그 시절의 군주가 요즘 직장인에게는 보스고, 유세는 보스와 함께 논의해 일을 도모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한비의 말대로 유세의 어려움은 아는 것이 부족하거나 말솜씨가 없거나, 또는 할 말을 자유롭게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군주의 마음을 잘 살펴 내 주장을 그 마음에 들어맞게 하는데 있다. 보스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명확히 말하지 않는다. 아랫사람이 그 마음을 읽고 알아서 일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무당이 아닌 다음에야 그 마음을 읽어 내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첫 직장에서 만난 보스는 필드 엔지니어로 시작해 회사를 코스닥 황제주로 키운 이였다. 그는 직원들을 선수라고 불렀다. 맡은 영역에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는 업계 최고의 플레이어가 되라는 의미였다. 나는 그에게 혹독한 트레이닝을 받았다. 전화벨이 세 번 넘게 울린 후 받았다고 혼나고, 중요한 고객의 이름을 잘못 말했다고 혼나고, 아침 9 30분에 보스를 찾는 고객의 전화에 외부 회의 중이십니다라고 해야 할 것을 곧이곧대로 아직 출근 전이신데요라고 했다고 혼났다. 세상 물정 모르는 사회초년생 시절, 나는 보스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그에게 고객은 현재의 자신을 만들어준 은인이고 스승이고 부모형제와 다름 없었다. 그런 고객의 전화를 늦게 받고, 이름을 외우지 못하고, 고객에게 사장이 게으른 사람이란 생각이 들게 했으니 나는 얼마나 한심한 직원이었나?

 

내가 모신 보스 중에는 처세에 매우 능한 이가 있었다. 그의 보스들는 그를 좋아했지만 그를 보스로 모신 이들은 하나같이 그를 반기지 않았다. 재주가 없지는 않았지만 일을 모두 로 하려 했고 은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이였기 때문이다. 그가 나의 보스로 부임했을 때 나는 직감했다. 그가 그리 오래 이 자리에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무엇이든 빨리 만들어 그것을 발판으로 더 높은 곳으로 재빨리 올라가리라는 것을. 얼마 되지 않아 그는 꿈에 그리던 임원으로 승진해 그 자리를 떠났다. 그를 보내고 새로운 보스를 환영하는 자리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혼자 가면 빨리 가고, 함께 가면 멀리 간다했는데 혼자만 너무 빨리 가신 것 같아 아쉽습니다. 새로 오신 분은 조금 늦더라도 여기 있는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함께 멀리 갔으면 합니다.”

 

한비는 유세에서 중요한 것으로 상대방의 장점을 아름답게 꾸미고 단점을 덮어 버릴 줄 아는 것이라 했는데 나는 그 반대로 했다. 단점을 드러내 비난하고 장점은 모른 척 했으니 이 무슨 오만 방자함이었던가? 모든 것을 다 갖춘 보스가 어디에 있을까? 장점은 취하여 배우고 단점은 타산지석 삼아야 했는데 참으로 어리석었구나! 또 그 어리석음을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언중유골로 호기를 부려 주절거렸으니 참으로 부끄럽구나!

 

대대손손 귀족으로 살아온 보스가 있었다. 자신의 취향을 잘 알고 입 안의 혀처럼 처신하는 이들을 등용했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는 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년 가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정도로 저력이 있었으니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평가를 받는 이였다. 그의 조직에서는 귀족 가문이 아니면 성공가도를 달릴 수 없었고 어쩌다 그의 눈에 든 평민은 그를 위해 충성 서약을 해야 했다.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외국에서 공부도 했고 배경으로 보자면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일할 수 있을 텐데 그는 아들을 자신의 회사에 두고 싶어 했다. 그는 아들이 회사의 요직을 두루 거치게 하면서 경영수업을 받게 하고 출세의 동아줄을 쥐어주고 물심양면 보살피고 있다.

 

한비는 이렇게 말한다. ‘용이라는 동물은 잘 길들이면 그 등에 탈 수도 있으나, 그 목덜미 아래에 거꾸로 난 한 자 길이의 비늘이 있어 이것을 건드린 사람은 죽는다고 한다. 군주에게도 거꾸로 난 비늘이 있으니, 유세하는 사람이 군주의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지 않으면 거의 성공적인 유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아들은 거꾸로 난 그의 비늘이다. 용을 길들여 타기 위해서는 그 비늘을 건드리지 말아야 하듯이, 그와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아들과 함께할 마음가짐이 되어 있어야 했다.

 

나는 결국 군주를 떠나 홀로 있게 되었다. 군주와 일하며 명성을 얻어 천하를 호령하고 싶었지만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내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옛말에 남의 수레를 타는 자는 남의 우환을 제 몸에 지고, 남의 옷을 입는 자는 남의 근심을 제 마음에 품으며, 남의 것을 먹으면 그의 일을 위하여 죽는다고 했다. 나는 남의 옷을 입고 남의 것을 먹으며 남의 수레에 앉아 있으니 자유롭지 못했다. 노중련의 심정과 같이 부귀로우면서 남에게 얽매여 사느니 차라리 가난할망정 세상을 가볍게 내 맘대로 살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 홀로 있게 되었지만 한없이 가볍게 살고 있으니 이 또한 나쁘지 않다.

 

여러 보스와 일했지만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모신 보스는 손가락에 꼽기 힘들다. 목숨을 바쳐 섬길만한 보스를 만나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그런 보스를 내가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것인가? 하늘 아래 어찌 완벽한 보스가 있을까? 나는 그들에게서 배우려 하지 않고 부족한 점만 애써 찾아 비난을 일삼지는 않았는가 반성해본다.

 

마지막으로, 나는 어떤 보스였나? 진정 마음을 다해 모시고 싶은 보스였나? 나의 비늘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아랫사람을 압박하지는 않았나? 그들의 으로 출세하려는 야심 가득한 보스로 보이지는 않았던가? 그들의 마음을 진정으로 살피며 장군 오기처럼 종기 고름을 빨아줄 상사로 비춰줬던가? 얼굴이 부끄러워 하늘을 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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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
2011.05.01 23:27:02 *.23.188.173
정말 보스열전으로 쓰셨군요~
책의 내용과 언니의 글을 보자니 내가 책을 제대로 읽었는지 의문스럽다~
정말 책에는 많은 내용이 담겨 있네요
음...... 난 많은 건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언냐가 웨버가 되기 전부터 내가 모시고 싶어했던 보스라는 거야
언냐같은 보스라면 조직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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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경
2011.05.01 23:34:20 *.35.19.58
루미야, 넌 이 책의 내용을 다 이해하기에는 아직 어리단다. ㅋㅋ
생각해보면 옛날에는 한심한 보스였어.
올해 수련하면서 마음을 다해 섬길만한 보스로 거듭나고 싶다.
역시 나는 읽는대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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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2 12:26:14 *.111.51.110
누님의 글은 깔깔 웃게 만드는 구절이 있어요.
유머를 안 섞으면 안되는 사람. ㅎㅎ
땡7이들의 리더로서 그 빛을 발하고 있는 사람.

몸살로 힘들었을 지난주의 노고를 털고 신나는 월요일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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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경
2011.05.02 19:01:15 *.35.19.58
와, 그게 바로 내가 지향하는건데. 읽다가 풋하고 웃음이 나는 글.
이번주는 몸이 좀 나아져서 열심히 놀고 있다. 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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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2 14:05:55 *.124.233.1
조직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자산이 바로 사람경험인데,
그 사람경험, 특히 보스에대한 경험을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누나의 재능에 감탄!

용의 그 비늘을 건드리지 않고 용을 탄다는 게 정말 쉬운일이 아니에요 누나. 그쵸?
결국엔 나를 한 없이 낮추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주어야만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거겠지요?
어디까지 낮추고 얼마나 주어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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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경
2011.05.02 19:02:42 *.35.19.58
그래, 나도 그게 참 어렵더라.
그 용의 비늘이라는 게 참으로 가당찮아도 나를 낮추고 때를 기다려야하는 것인지 말이야.
군주의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수레를 타느니 그냥 가볍게 살고 싶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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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3 09:24:58 *.160.33.89
넌 그렇게 가볍게 살 것 같지 않구나.   홀로 떠나 있어도 땡칠이들이 너를 홀로두지 않지 않더냐 ? 
가만있어도 웨버가 되었으니 그동안 악덕 보스들에게 단련된 탓일껄, 아마?    언중유골없이 제동이가 되지 않을 것이니 생긴대로 그리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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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
2011.05.03 10:38:03 *.138.118.64
14년동안. 정말 많은 보스를 만났구나. 언니는..(하긴 당연한거겠지만..;;)
난 몇명 못만났지만, 그래도 대체로 좋은 사람을 만난 것 같아요.. (난 정말 인복이 많은가봐..ㅋㅋ)
그래도 앞으로 변화무쌍할 내 인생에 어떤 사람들을 만날지 기대 반, 두려움 반..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모실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능..^^
언니 담주부터 회사를 옮기게 되는데, 내 인생 세번째 직장.. 함께 할 사장님이 이런 보스면 좋곘어요. 약간 걱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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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훈
2011.05.03 11:49:19 *.219.84.74
근사하고 새롭다.
종과 횡이 어우러지며 섞이는 이야기가 재미있다. 너답다.
건강해야 멀리 갈수 있다.
재경아, 항상 건강 잘 챙기고, 좋은 웃음 넉넉한 웃음을 기대한다.
 
마음 씀씀이를 보면 너는 좋은 보스이다. 나와 땡7이들을 봐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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