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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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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9일 02시 06분 등록
 

궤도수정(4)


  선생님은 나를 포함한 여덟 명의 이력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 써본 이력서다. 이름과 생년월일, 주소, 호주와의 관계, 호주성명을 쓰고 나니 학력 및 경력사항을 써야했다. 난감했다. 중학교 졸업과 고등학교 졸업예정을 쓰고 나니 더 이상 쓸 것이 없다. 친구들은 자격증이며 기능경기대회 입상경력까지 화려하게 칸을 채워 넣기도 했지만 나는 그런 것도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자격증 하나는 어떻게라도 따 놓는 건데 쪽팔림의 연속이다.


  선생님은 내 이력서를 검토하다 말고 입맛을 다셨다. 역시나 하는 일은 항상 벌어진다. 이 대목에서 그냥 넘어갈 선생님이 아니다. 직격탄이 날라 올 것이다. 선생님은 훼이크 같은 잔 수는 쓰지 않는다.

  “어떻게 고등학교 졸업 예정이 전부냐. 홍스! 이력서가 뭐 동양화 그리는 화선지냐. 여백의 미 하나는 기가 막히다 기가 막혀.”

  선생님이 나를 바라보는 순간 내 얼굴은 홍당무가 됐다. 다행이 더 이상 공격은 자제하려는 눈치다. 어제 선생님의 심금을 울리는 조언이 없었다면 난 취업을 심각하게 다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뭐 기왕 끼워 팔기로 했으니까. 일단 가보자. 어쩌겠냐.”

  내 이력서를 마지막으로 모두에게 이력서를 돌려줬다. 선생님의 마지막 당부가 이어졌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화도전산이란 회사는 아마 아주 작은 회사일 것이다. 캐드는 니들이 배운 드라프타로 하는 제도와는 다르긴 하겠지만 컴퓨터를 이용하는 신기술이니 만큼 잘 배우면 앞으로 괜찮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고 아직 학생신분이니 만큼 행동거지에 각별히 신경써주기 바란다. 건투를 빈다.”


  ‘화도전산’은 지하철 신촌역에서 20분은 걸어가야 했다. 우리는 거기까지 가면서 거의 말이 없었다. 긴장했던 탓인지 입 싸기로 소문난 경관이도 아무 말이 없었다. 상기된 표정이 역력하다. 찾아가는 길을 묻기 위해 기능반 출신인 서경수가 대표로 전화를 했다. 경수는 친구들 중에서 경력이 가장 화려하다. 1학년 때부터 기능반에 들어가 닦은 제도 실력은 정말 출중하다. 이 녀석은 공부도 잘해서 마음만 먹으면 큰 회사를 갈 수 있었는데 왜 여기까지 껴서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우린 경수를 따라가야만 했다.


  우리 일행은 ‘샬롬빌딩’이라고 쓰여 진 흰색의 작은 건물 2층으로 들어갔다. 의외로 깨끗하다. 바닥이 카페트로 깔려있는 곳은 처음 밟아본다. 그리고 처음 보는 컴퓨터다. 나는 이 상황에서 사람보다 컴퓨터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학교 컴퓨터 실습실에서 본 구닥다리와는 차원이 다르다. 기대된다. 회사에 대한 첫인상 무척 맘에 든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우리를 맞이하는 분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생각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언제 그랬냐는 듯 바뀌기에 충분했다. 사장님의 인상은 ‘산적’으로 표현하면 이보다 더 확실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짙은 눈섭에 더벅머리, 시장에서 파는 모자는 맞는 것이 없을 것 같은 머리 싸이즈가 보통 이상이다. 180은 족히 되어 보이는 키에 저 정도면 몸무게가 108번뇌는 느꼈음 직 하다. 더군다나 손은 내 손의 두 배는 되 보였다. 거기에 검으스름한 얼굴빛을 더하면 ‘산적’으로 표할 수밖에 다른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서들 와!”

  역시 처음부터 반말로 나올 줄 알았다. 하긴 그게 더 자연스럽긴 하다. 저 모양새에서 새파란 애들한테 존대는 영 아니다.

  “근데. 꽤 많이 왔네. 취업 못한 애들이 많은가보다.”

  ‘못한 것이 아니 구요. 아직 안한 거거든요.’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나를 포함해서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는 못했다. 아이들 모두 아무런 대답을 못했다. 그러자 곧바로 질문으로 이어졌다.

  “컴퓨터 다뤄본 사람?”


  아. 이런 시추에이션 정말 맘에 안 든다. 아무리 어린 애들 여덟 명이 한꺼번에 들어왔다고 다짜고짜 시험하려드는 이런 상황. 어거 정말 짜증이다. 내가 컴퓨터를 다뤄봤으면 이러지도 않겠지만. 순간 담임선생님이 해준 말이 생각났다.

  ‘홍스야. 끝까지 남아라.’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라고 하던데. 어찌 그 한걸음이 이런 가시밭길이더냐. 나는 순간 오늘로 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 했다.

  나를 포함한 여덟 명중 세 명이나 손을 들었다. 이경관 이 녀석은 말도 많지만 이것저것 여러모로 많은걸 해본 넘이다. 허승욱은 딱 한번 있었던 컴퓨터 실습시간에 ‘베이직’으로 뭘 어떻게 했는지 화면에 사과가 그려질 때 알아봤다. 나는 그때 키보드에 있는 알파벳 찾느라 볼 장 다 봐서 보고 쓰는 것도 제대로 못했었다. 그러나 구만회까지 손을 들 줄은 몰랐다. 이 녀석은 거의 나와 같은 종족인데 언제 컴퓨터를 해봤지. 그래도 다행인 것은 서경수는 컴퓨터를 못한다는 거다. ‘기계제도의 신’이 컴퓨터까지 할 줄 알면 세상이 너무 불공평한 거다.


  다행히 더 이상 최신식 질문은 이어지지 않았다. 왜 컴퓨터에 관해 물어봤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러더니 사장님은 컴퓨터가 있는 곳으로 갔다. 우린 서로 눈치만 보며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을 눈치 챘는지 사장님이 눈과 머리로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모니터 잘 봐.”

  하나로도 자판 두게는 눌려질 것 같은 굵은 손가락으로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화면에 ‘DIR', 'MD HH', 'CD HH', 'RD HH' 'COPY' 뭐 이런 글자들이 차례로 써지면서 뭔가가 나타났다 없어졌다. 그리고 똑 같은 것을 세 번 반복됐다.

  ‘이게 뭘 하는 걸까?’ 컴퓨터라고는 컴퓨터 실습시간에 구닥다리 애플 컴퓨터가 어떻게 생겼는지 본 것이 전부인 나에게 이건 암호나 다름없었다.

  의자를 돌려 앉으면서 사장님은 속내를 드러냈다.


  “앞으로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 4일 동안 회사로 출근해라. 돌아가면서 컴퓨터 사용하고 도스(DOS3.0) 공부해.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방금 한 것이 전부다. 그리고 다음 주 월요일엔 반포에 있는 학원으로 출근하는 거다. 그때 시험을 보겠다. 회사에 필요한 인원은 세 명이다. 세 명이 정해지기 전까지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너희들에게 컴퓨터를 쓸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전부다. 그동안은 점심식사도 알아서 하도록. 불만 있는 사람은 그냥 나오지 않으면 된다.”

IP *.64.7.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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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2008.12.30 19:24:13 *.5.98.153
지난번 컬럼에 썼던 내용을 리메이크했구나.
부담없이 잘 읽힌다. 근데, 요즘 애덜은 DIR', 'MD HH', 'CD HH' 이런거 뭔지 모를껄?
난 ROM BIOS를 공부하며 즐거워하곤 했다.
DIR', 'MD HH'를 만드는 기본 루틴들이지. 옛날 생각이 울컥 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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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31 02:19:29 *.41.62.204

  이이야기  하던 모습이 생각나.  재미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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