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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7일 11시 55분 등록

Column 10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변명 1

강종희

2014. 7.07

 

아버지가 전시회를 준비 중이십니다. 10년 동안 한다 한다 말만 하시는 줄 알았는데, 결국은 하시는군요. 꾸준히 그려서 꼭 본인의 이름으로 전시회를 하시라며 격려 멘트야 늘 날려 드렸지만, 진짜 하실 줄은 몰랐어요. 아버지는 올해 만으로 일흔, 고희를 맞으셨고 이 뜨거운 칠월에 화가로 데뷔하십니다. 이 놈의 경어체가 왠지 목덜미를 자꾸 잡네요. 자꾸 엉키니 죄송하지만 존경은 말미가 아니라 문맥으로 보여드려야겠습니다. 이 글은 아버지의 전시회를 홍보할 임무를 부여 받았으나 미적미적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는 저를 몰아 부치기 위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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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그린 100여 점의 그림을 저도 다는 못 봤습니다.  원래 그는 건축가였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수유리 4.19탑 앞의 그 낡은 집에서도 가장 위풍 센 건넌방에 아버지의 위풍당당한 제도용 책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집 마당 구석의 어두컴컴한 광에는 아버지의 습작이었음이 분명한 수십 점의 그림들이 캔버스째 검은 연탄 무더기 옆에 차곡차곡 쌓여있었습니다. 많은 그림들이 있었는데, 제가 기억하는 것은 르노와르의 책 읽는 소녀를 모사한 그림입니다. 나는 그 그림들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느 날 그 아까운 그림들을 아무 얘기도 없이 몽땅 내다 버렸습니다. 저는 또 기억합니다. 아버지의 책장에는 일본어 설명이 달린 세계적인 화가들의 고급장정 화집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신비로운 화집을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하나씩 펼쳐보았습니다. 그 그림들은 늘 저를 다른 세상으로 데려갔습니다. 르노와르의 유려한 선, 그 부드러운 풍만함의 여인들, 햇살에 감싸인 듯 늘 나른한 풍광이 좋았고, 에른스트의 그 무시무시한 악몽의 초현실주의 그림들은 의미도 모른 채 매료되었습니다. 달리의 늘어진 시계와 불타는 기린의 이미지는 초딩의 눈으로 보아도 참 스타일리시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호러나 SF를 좋아하는 저의 취향은 사실 H.P 러브크래프트의 기괴한 세계를 연상시키는 에른스트의 영향도 꽤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샤갈, 그 따뜻한 색감, 소박한 동화 같은 마을, 커다란 눈의 아름다운 소가 하늘을 날고, 바이올린을 켜는 유대인 마을의 악사와 행복한 연인들. 저는 오랫동안 샤갈을 사랑했습니다. 아메바 같은 걸 그린다고 우습다 여겼던 미로와 벌거벗은 못생긴 여인들은 왜 그렇게 많이 그렸나 싶었던 고갱과, 잊을 수 없는 고흐. 왠지 저는 고흐를 옹호해야만 할 것 같았어요. 그 강렬한 별밤의 이미지. 춤추는 의지와 붕대를 칭칭 감고 당신을 응시하는 그의 모습. 왠지 거리를 둘 수 없는 것이 고흐의 그림이었고, 한때 나는 모든 사람들은 화가를 꿈꿔야 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사업으로 많이 바빴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는 늘 지방의 현장을 돌며 바쁘셔서 어느 해의 크리스마스에는 아버지가 있던 경주의 공사현장 가까이 있던 여관에서 보낸 적도 있었지요. 그 와중에도 딸내미 선물이라고 마론인형을 사오셨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인형에 붙은 찢어진 가격표를 보며 무슨 산타가 신세계에서 선물을 가져오냐며 핀잔을 주던, 조숙한 척 하는 딸내미였습니다. 저는 그 마론 인형을 닮은 여자 그림을 그리며 나만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으로 초등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다니던 건축회사의 직원들 앞에서 그림 실력을 자랑한답시고 비키니를 입은 채 허리와 목에 손을 얹은 섹시한 여자 그림을 그려 허헛, 어린애가 이런 그림을…”이라는 칭찬(?)을 들었던 기억이 문득 떠오릅니다. 그때 제 나이 여덟살. 그게 제 안에 숨겨진 관능의 첫 발현이었을지도? , 이번 주 읽은 데카메론과 저의 접점은 이것 정도군요.

 

독립한 아버지는 처음엔 집안에 빨간 딱지도 좀 붙여주시고 고군분투를 좀 하셨으나 곧 사업이 안정되기 시작하면서 그림을 본격적으로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시작은 하고 싶었던 그림 공부를 포기해야 했던 가난한 장남이었던 자신에 대한 한풀이였을 겁니다. 고등학교 때 꽤나 그림을 잘 그려 국전에 나가 입상한 경험이 있었던 아버지는 존경하던 스승께서 설날 세배를 드리러 찾아온 제자들에게 떡국 대접은 커녕 온기 없이 차가운 구들장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계셨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하셨습니다. 뛰어난 화가였다는 그 스승은 너무도 빈곤한 살림에 대접할 것도 없어 어린 제자들과 눈물을 안주로 소주를 나눠 마셨답니다. 그래서 포기하셨다지요. 화가에서 건축가로 아버지는 노선을 변경하였습니다. 6.25가 발생하기 전 이미 시작된 숙청을 피해 피난을 온 우리 집은 공부 잘 하는 장남을 화가가 되라 지원할 만큼 넉넉하진 못 했으니까요. 그렇게 건축가가 된 아버지는 처음엔 자신과 달리 화가의 꿈을 쫓았던, 그래서 예외 없이 가난해진 친구들의 그림을 사주는 데서 시작해, 점점 컬렉션을 늘려 나갔습니다. 아버지는 사업을 하셨지만 술도 안 하셨고, 접대 따위 하지 않으셨습니다. 골프도 치지 않았고, 오로지 듣고 싶은 음악, 보고 싶은 그림, 읽고 싶은 책을 듣고 보고 읽는 데만 돈을 쓰셔서 꽤 많은 그림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선언하셨지요. 나는 미술관을 지을거다. 너희들은 각자 공부하고 싶은 데까지 공부해. 나는 거기까지 도와줄 수 있다. 나는 미술관을 짓겠다. 너희들에게 물려줄 건 없을 거야.  한두 점인 줄 알았던 그림이 수백 점이 되고, 열심히 땅을 보러 다니던 아버지는 오십이 되던 해에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하고 진짜 미술관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경기도 일대를 십 년간 바닥산악회라는 이름으로 주말이면 친구들과 가족들을 동원하여 땅을 보러 다니더니 경치 좋은 강변 비탈진 땅에 수천 톤의 흙을 쏟아 부어 멀쩡한 대지를 조성하였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오십 중반이 되어 자식들은 대부분 공부를 마쳤고 자기 일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IMF도 터졌지요. Cash cow였던 사업을 정리하고 나서 아버지의 줄타기는 시작됐습니다. 돈이 생길 때마다 흙 한 트럭, 벽돌 한 트럭 하는 식으로 자재를 모으고 이토록 느릴 수 없는 튼실한 건축의 나날이 지속되어, 오십 대의 마지막 해에 미술관은 마침내 완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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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저는 서른 세살의 직장인이자 두 아이의 엄마였습니다. 부모님의 노후를 책임질 모든 재산을 털어 넣은 미술관은 어떤 기업의 후원 없이 개인이 운영할 시설치곤 규모가 있었습니다. 저는 제 살림을 시작한 성인이었음에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지대로 고생문이 열린 거였죠. 구구절절, 말해 모하겠습니까. 미술관은 돈 먹는 하마였습니다. 전시회를 열고 두어 달에 한번 음악회를 열고 하는 모든 과정이 자리를 잡기까지 그리고 어느 정도는 자리를 잡고 나서도 아버지는 갖고 있던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총동원해야 했고, 부모님의 노후는 마치 서커스를 구경 온 관객이 얼떨결에 공중 그네를 타게 된 듯 예측불허로 변해갔습니다.

 

세상에, 매사 모든 일에 빈틈이 없는 줄만 알았던, 계획과 신중의 화신인 줄 알았던 아버지가 완전 대책 없는 인생에 뛰어들었음을 깨달은 것은 미술관을 오픈하고 좀 지나서였습니다. 우선 어머니의 불안과 불만이 어마어마했습니다. 갑자기 일상생활에서 마치 공인이 된 듯 프라이버시가 사라졌습니다.  미술관장님과 사모님이란 타이틀은 멋졌지만, 집과 전시공간이 한 대지에 있는 특성 상 미술관은 오가는 손님들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젊은 날의 고생을 보상받을 줄 알았던 안락한 노후가 풍전등화가 되었음을 깨닫고 힘겨워 했고, 저는 어머니의 불안을 너무 뒤늦게 이해했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아빠 딸이었거든요. 엄마의 입장에서 상황을 냉철하게 보게 된 것은 요 근래 들어서입니다. 그리고 자식들은 점점 불편해졌습니다. 이건 뭐, 손주나 봐주면서 넉넉한 할아버지 할머니의 역할을 기대할 시점에 갑자기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셨으니, 한창 일하고 아들 딸 키우는 자식들보다 더 바쁘고 더 정신이 없으신 겁니다. 가족 행사나 명절, 기념일 따위도 오붓한 가족만의 시간을 보낼 수 없었고 마치 가족과 친척들은 손님맞이를 위한 들러리가 된 듯 이상한 소외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철마다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하는 미술관의 시설들은 당연한 듯 즐겼지만, 그로 인해 감수해야 할 불편함과 포기할 부분들이 더 커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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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이 세워진 초반, 이런 저런 일들로 아버지를 도우려던 저는 시간이 갈수록 죽도록 바쁜 워킹맘인 딸에게 지원은 커녕, 오히려 일거리만 안기는 부모님의 상황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저런 사회생활의 네트워크를 동원하여 아버지께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부분도 있었건만, 제 개인사정으로 아쉬운 소리를 하기 싫고 제 머리를 못 깎는 중 같았던 딸은 ‘인생 각자 사는 거’라며 이것도 아버지를 닮아서라며, 아버지의 고군분투를 외면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불만들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사업할 때는 1 8가르마에 완벽한 수트 차림을 유지하며 술 한잔 안 하던 양반이 이젠 동네 유지는 물론 철철이 들르는 오토바이족, 심지어 동네를 관리하시는 형님들 사이에서 큰 형님으로 추앙 받으며 낮술을 즐기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변해갔습니다. 가족들은 아버지의 변화가 참 낯설었습니다. 역시나 그러던지 말던지, 이제 아버지는 텅 빈 미술관 지하실을 아지트 삼아 한 점 두 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림이 쌓여갔고 언젠가는 전시회를 하시겠다는 아버지를, 저는 반신반의하며 건성건성 격려해드렸습니다. ‘그런데 진짜 언제까지 하실 건데요? 미술관 어떻게 유지하실래요?’라는 추궁을 속으로 삼키면서요. 아버지가 혼자 많이 답답해 하시는 건 알았지만, 저는 자업자득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니, 젊어서 그리 죽도록 일했고 돈도 벌었으면 고생한 마누라 호강도 시켜주고 자식들에게 가끔 인심도 쓰며 사실 일이지, 대체 언제까지 그리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하시려고요? 저는 그렇게 아버지의 변신을 줄곧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았습니다.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지만 매해 올해가 마지막일 것만 같았던 미술관은 이제 개관 십 주년을 맞았습니다. 실제로 기업이나 공공소유가 아닌 개인미술관의 존립기간은 대개 7-8년을 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가족들과 둘러 앉아 재미난 구상을 한번 해봤더랬습니다. ‘개인미술관을 십 년간 망하지 않고 운영하는 법으로 책 한 권 써볼까? 그 과정에서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던 지, 관련된 모든 식구들과 직원들의 증언을 모으면 신랄한 블랙 코미디성 수기가 한편 나올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그 책이 출판되기까지 미술관이 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을 것 같아, 일단 접어뒀습니다. 아니 다음 달 운영도 어찌 될 지 모르겠는데, 수년 뒤를 어찌 내다보란 말입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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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아버지는 노년을 한치도 예측할 수 없는 모험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그것도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요. 미술관을 세울 땅을 찾는 데서 시작해 미술관을 완성하기까지 꼬박 십 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미술관을 세우고 다시 본인의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하게 되기까지도 꼬박 십 년이 걸렸습니다. 한 가정을 책임진 가장이자 성공한 건축가라는 안정적인 현실에서, 일흔의 나이에 데뷔하는 신인 화가로 변신하는데 약 이십 년의 세월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미술관장이라는 허울 좋은 타이틀보다, 아버지에게 진정으로 의미 있는 타이틀, 새로운 정체성으로 아버지를 채워줄 이름이 화가, 아마 맞을 겁니다. 건강 상의 이유로 이제 남은 세월이 얼마나 될 지 모른다 하시지만, 아마도 그래서 가진 모든 것을 쓰고 가려는, 또 만들어가려는 꿈꾸는 이의 모습을 저는 아버지에게서 봅니다. 그러니 이제 또 십 년이 지나면, 어떤 모습이 되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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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경이롭게 바라봅니다. 그간 얄미운 소리만 해가며 철없는아버지를 구박하던 딸로서 반성도 합니다. 아버지의 지하 작업장에 볼품없이 포개져 있던 그림들이 전시장에 하나 하나 걸리는 것을 보며 자문합니다. ‘그 어려웠던 한 해 한 해가 차곡차곡 쌓여 새로운 길이 만들어졌구나. 그렇게 갈 수도 있는 거구나. 뭐 느끼는 거 없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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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의 그는 참 용감했고, 예순의 그는 정말 대책 없었고, 일흔이 된 아버지는... 많이 자랑스럽고, 이제서야 미안합니다. 저는 늘 닮은 구석 하나 없이 참 각자 생겼고 각자 사는 우리 가족들을 돌아보며 나는 대체 어디서 온거야라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내심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그 욕심 어디 가나요? 일흔이 된 지금에도 새로운 책과 음악을 접하면 주위사람들과 나누고 싶어하고, 지적인 교류를 할 수 있는 스터디 그룹을 만들고 싶어하는 울 아버지. 저는 가족 내에서 종손이자 맏어른으로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군림하는 우리 아버지를 유일하게 구박하는 딸내미였습니다만, 이제 좀 착해지렵니다. 그리고 반성합니다. 하루를 쌓고 일년을 쌓아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조금씩 보이지 않게 갔던 그 걸음이 이런 생각지 도 못했던 멋진 길을 만들었음을 인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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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버지가 준 숙제로 돌아가서 전시회의 기획의도를 담은 보도자료를 써야 합니다. 젠장, 이렇게 변명을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았는데도 이건 시작조차 못하겠네요. 일단 건축가 출신인 아버지가 원하는 전시회의 제목은, 이상 시인의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을 인용하고 싶으시답니다. 주역의 궤와 수학적인 사차원입방체를 주요 모티프로 활용하셨다는 아버지의 매우 건축적인 그림을 보면 어디서 이걸 풀어내야 할 지대략 난감이지만서도, 여튼 그림들은 꽤 예쁘답니다. 다 필요 없고, 팔리는 그림, 뜨는 전시회를 만들자는 일흔 살 데뷔작가 강건국화백의 전시회 오프닝은 7 19일 경기도 가평군 가일미술관에서 열립니다. 뜨거운 칠월, 시원한 북한강변에서 일생의 꿈을 펼쳐보려는 노화가를 응원해주실 분은 누구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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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7 14:47:27 *.7.57.204

5번째 사진에 나오는 사차원 입방체 그림에 대한 단상.

사실 저 그림은 초타원 곡선(hyperelliptic curve)의 구조를 이용한 암호체계의 효율향상을 위한 설계를 할 때 제가 고안한 그림입니다. 타원곡선의 함수구조는 이차원 평면에 묘사할 수 있지만 초타원곡선은 4차원이어서 어떻게 눈에 보이게 할지 고민하다가 4차원 큐브 그리는 것을 응용하여 매트매티카로 그린 것입니다. 이런 큐브를 이진법으로 묘사하면 주역의 괘와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있어서 웬지 신비로운 느낌을 주게 됩니다. 그런 부분 때문에 동양사상과 맞물려 그림으로 표현해 내신 듯 합니다.


하지만 지금 저 그림을 보는 마음은 좀 착찹한 느낌이 듭니다. 저걸 이용해서 다차원 진법전개로 이론을 확장해서 뭔가 더 해보려다가 금융공학으로 방향을 틀어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 물론 금융공학에서 확률미분방정식에 대한 몬테 카를로 시뮬레이션을 할 때 효율향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는 느낌은 있지만 이제는 시들은 양상치 같이 열정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려서 마음만 있고 하지는 않는 상태입니다. 저 그림을 변경연 칼럼에서 다시 보게 되는 군요. 뭔가 결과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은 열정이 빠져버린 상태에서는 마음속에 깊은 우울감과 자괴감을 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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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7 16:00:35 *.104.212.108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긴 해설 감사합니다. 착잡해하지 말아요. 내 보기엔 금융공학자가 더 폼나는구만. 여튼 밥과 열정 사이에서 내 아버지나 나나 당신은 모두 선택을 했습니다. 그게 결국은 어떤 길로 이어질 지 벌써 말할 수 있겠어요? 일흔에 데뷔하는 화가를 목도하려는 이 마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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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7 16:18:18 *.196.54.42

종종님, 무엇보다도 감동적인 아버지의 일생을 이렇듯 통통튀는 님의 특유의 필치로 들려주심에 무지 감사^^

7.19.토. 아버님의 전시회에 갈까해요, 찬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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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7 16:35:45 *.104.212.108

역시 자전차로!!!! 서울 부산도 가셨으니 가평 쯤이야~ ㅋㅋㅋ 구달님을 격하게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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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7 16:44:40 *.252.144.139

아웅, 울 아부지보다 훨 낫구만요.

울 아버지 쉰즈음부터 지금까지 줄곳 집에만 계셔요.

엄마는 노래교실에 평생교육원에 다니느라 바쁘신데 아버지는 하루 종일 소파에 앉아 TV리모콘만 눌러 댑니다.

아부지, 뭐라도 하세요. 운동이든 취미생활이든. 하면 이 나이엘 뭘 이러십니다. 아버지 많이 응원해 드리세요.

 

이 글을 읽다보니 울 딸들이 저를, 종종님이 아버님 보듯 생각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마흔 즈음부터 작가가 되겠다며 이러지러 뛰어 다니는 저를 딸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저 역시 20년이 지난 예순 즈음에는 꽤 유명해진(?) 작가가 되어 꿈을 이루길 기원해 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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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7 16:52:01 *.104.212.108

전 사실 '아직도' 의욕에 불타는 아버지가 십여년간 참 버거웠는데, 요즘 와서야 내 욕심이 이 양반과 별 다를 바 없구나. 그런 내가 아버지를 이해 안하면 누가 하리...라는 생각을 간신히 하게 되었습니다. 피는 못 속인다니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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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7 17:57:26 *.223.11.212
거대한 나무 한그루가 느껴집니다.
꿈이란 것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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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7 18:10:47 *.104.212.108

끝없는 확장의 욕구에 충실하신... 나무지요. ^^ 칠순의 부친께서도 저리 사시는데, 이렇게 머물러선 안 되겠다며 저는 이번 주 완전 반성 모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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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7 18:48:02 *.50.21.20

항상 딱 수습 가능한 열정만큼만 품고 살아왔어요. 

다행히 내 몫의 열정은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고, 그저 시간이 많이 드는 것이었지요.

그러고보면 제 주변의 열정적인 사람들은 대단히 평화적으로 주변에 녹아 들었습니다. 

만약 열정이 많은 것을 포기한 채 선택해야 하는 것이라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그것이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그것을 기쁜 마음으로 지켜봐줄 수 있을까. 

쉽게 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렇게 여러군데에 발을 걸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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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7 21:14:16 *.104.212.108

수습가능한 만큼의 열정, 제게도 익숙한 개념이예요. 

그러다 인생도 딱, 수습가능한 범위 내에서 맴돌겠구나라는 생각에 두려워진 마흔의 언니들이 어니언은 낯설지 않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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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7 22:52:50 *.219.223.18

아버님의 삶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멀리서 보는 것과 가까이서 보는 것은 아름다움과 불안의 차이만큼 거리가 있군요.

그 불안을 넘어 더 큰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아버님의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뒤만 잘 따라 가면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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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8 06:32:59 *.104.212.108

가까이서 보면 속터진다는 생각으로 지내왔으나 이제 와 돌이켜보니 그래서 뭐...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 길을 갈 사람은 어차피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는 거지요.  갈거냐 말거냐... 선택은 둘 중 하나뿐이지요. 격려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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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7 23:17:42 *.202.136.114

아버님 향한 사랑 가득한 종종님의 응원 감동적이에요~~

남편을 꼬드겨 기필코 19일 전시회를 다녀올 참입니다^^ 파주에서 가평 그리 멀지 않네요. 가일 미술관까지 차로 1시간 15분 거리!!

울 시아버님도 화가시랍니다. 고교 시절 국전에 두 번 입상하시고, 초상화 그려 팔며 결국 서양화를 전공하셨지요....

여고 미술쌤을 하시며 그림만 그린 세월이 어언 60년.... 가족들 너무 고생시켜, 지지자는 저 며느리 하나 뿐이라지요....

'좋은 그림 그리기'가 60년 내내 한결같이 삶의 목적이신 시아버님을 전 엄청 존경한답니다!! 종종언니 아버님도 완전 멋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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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8 06:39:07 *.104.212.108

우와, 동병상련! 잘 알고 있겠군용....^^  이 고집스런 그림쟁이 아버님들의 욕망이란~  아무도 못 말리지요!

울 아부지는 가족들 고생 안시킨다고 자식들 다 키워놓고서야 본인의 꿈을 쫓으셨는데도 저는 제대로 아버지를 지지해드리지 못했어요. 이제서야 반성 중입니다.


형선님이랑 오시면 너무 반가울 거예요! 구달님도 오신다니 기대 만발~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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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8 20:59:53 *.175.14.49

아버님 대단하시네요. 일흔에 화가로 탄생하심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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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8 23:36:18 *.104.212.108

일흔에 등단... 저도 상상도 못 했던 일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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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8 21:02:00 *.223.8.206
꼭 가서 축하도 드리고 장시간 덕담도 듣고 맛있는 피자도 먹고 오고 싶다만 강연이 잡혀서 아쉽네. 내 꼭 한번 가마. 아니면 가을에 거기서 수업해도 좋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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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8 23:38:24 *.104.212.108

안그래도 데카상스들과 함 거기서 off  회동하자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강연 잘 다녀오시고 젤 날씨 좋을 때 다 함께 함 출동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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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8 21:58:29 *.124.78.132

저도 가능하면 19일 동참 ^^!! 정말 멋지신 아버님이세요~ 열정없는 요즘의 저, 그리고 늘 욕심만 많지 노력도 하지 않는 저를 되돌아보게 된다는... ㅠㅠ

다시 한 번 추카 추카 드립니다. 그리고 감동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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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8 23:41:18 *.104.212.108

우와, 녕이도!  격하게 환영해엽~~~~   나도 왕반성모드로 이번 주를 경건히 보내는 중이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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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9 11:35:25 *.23.235.60

아름다운 날 강건국 관장님 지대루 멋있으시군요. 이상형이 건축간데. ㅎㅎ

음, 아버님에게서 종종님을 발견합니다...

그림은 저도 문외한인지라 모르겠지만 색감은 참 예쁘네요.

왜 제가 뿌듯하고 기분이 좋을까요. 그림을 떠나 모두 예쁘고 좋습니다. 삶이 뭐 별거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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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9 12:06:06 *.182.72.208

내 말이~  그림이고 인생이고 뭐 별 거 있어?  재미있으면 그만~  

근데 에움 보는 눈 날카로운데용? 아버지가 원래 인테리어 전공이신지라 색감에 되게 신경쓰신다는. 실내에 걸어뒀을 때 색감이 어떨지 미리 생각하고 그리는 편이라 칙칙한 그림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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