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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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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7일 21시 29분 등록

간만에 선을 보았다.

 

전남친과 헤어진 3년 전부터 선을 봤었는데 이 시장은 마이클 샌델이 말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돈으로 환산된 시장의 전형적인 예다. 남녀의 만남을 돈으로 사고 파는 회사의 등장! 그래서 결혼정보회사의 CEO들은 정장을 빼입고 팔짱을 끼고 45도 각도로 서서 여성잡지에서 폼을 잡을 기회를 얻는다. 그들은 점점 가속화되는 빈익빈부익부의 흐름 속에서 조금 모양은 빠지지만 그래도 부의 방향으로 가는 화살표를 잡아탔다고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러는 사이 그 시장밖에 없다고 믿는 시장을 사랑하는자유주의자들은 자신을 상품으로 거래하며 순순히 자신의 가치를 왜곡시킨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는 아니고 그냥 그들이 제멋대로 부르는 자유주의다.

 

뭐 왜곡이라고 할 건 없다. 이성생식의 교환가치를 시장가치로 치환하는 작업 정도야 약간의 사회적 이념을 페인트칠했을 뿐 그게 그것 아니려나? 제인 오스틴 시절부터 여자는 예쁜 게 장땡이고 남자는 돈 많은 게 장땡이라는 교환 가치의 도그마는 아직까지도 그리 깨지지 않았다. 거기에 조금씩 추가되는 스페시픽한 거래조건 역시 크게 변하진 않았지만 가령 남자도 잘생기고 키크면 좋다. 여자도 재력이 있으면 좋다. – 시장 산업의 객관화 속에서 모든 약간은 주관적일 여지가 있던 가치들마저도 기성복처럼 정형화되고 절대화된 가치 체계로 정립되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사람이 꽃이라면 팬지와 에델바이스, 민들레 홀씨 같은 것의 개념은 시적 가치는 있을지언정 결코 화훼시장에서 거래되지 않는다. 거기엔 온통 장미와 작약과 조금 떨어지는 무더기의 카네이션 등이 있다. 거기에 맞지 않는 푸른 꽃물을 들이고 금가루를 뿌려서 꽃다발을 하나 만들어 내는 요령이 우리네가 결혼 시장의 맞선 자리에서 해내는 짓이고 그 꽃은 받아 드는 순간부터 시들기 시작하는데 시들기 전까지는 괜찮다! 게다가 일단 도장을 찍으면 대개의 사람들은 그것이 최선이었다고 자위하며 합리화하고 남들에게는 아직 시들지 않았다고 말하기 좋아한다.

 

이게 바로 합리성이라는 것이다.

이게 바로 바쁜 현대인들, 특히 잘난 현대인들을 위한 자본주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가령, A는 미국 MBA 출신의 금융업계 종사자이고 둘째 아들이라 부모를 모실 burden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여자도 나처럼 burden이 없는 둘째딸 정도를 원한다거나 우리의 재산은 이 정도고 부모의 지위는 이 정도 수준이니 매우 정확하게 이 정도 이상 되는 사람을 원한다. 심지어 GPS로 설정하였을 때 우리가 속한 부촌 반경 10 km 이내에서 같은 조건으로 거래되는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고 내가 원하는 수준의 미모를 갖추었으며 내가 이러한 조건을 원하듯이 그녀도 나를 원하여야 한다 , 현실적인 여자를 원한다. 내 가치를 알아보고 나에게 순종하며 나와 비슷한 수준의 학력은 갖추었으되 나보다 학식은 뛰어나지 않으면서 여자로서의 자녀의 부양과 집안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으면서 거기서 즐거움을 느끼고 남자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으며 때때로 내가 필요로 할 때 장인 집안의 도움을 적절히 유도해낼 수 있는 그런 여자를 원한다.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다. 여자의 경우에는 자신의 능력보다는 외모를 통한 기가 막힌 반전을 꿈꾸는 경우가 많은데, 가령 자신의 외모가 그리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100명의 남자를 만났을 때 그 중 한 명이라도 자신의 외모에 순식간에 반할 가능성이 있고 그 남자가 자신보다 월등한 능력과 자산을 가지고 있을 때, 눈을 꼭 감고 그의 청혼을 받아 줄 의사(를 고민해 볼 의사)가 기꺼이 있는 여자들.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여자들의 맹점은, 아직도 탐미주의적인 남자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특정 여자에 대한 성적 욕구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만한 남자는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이제는 여자와 잠자리를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결혼 이 아닐뿐더러, 남자들도 살기가 팍팍하여 조금이라도 기왕이면 상당한 바람으로 자신을 구제해 줄 여자를 원한다. 최소한 자신의 짐이 되지 않을 여자를 원한다. 허나, 자신이 꽤나 약았다고 자부하는 남자들도 소위 the flying girl over the running girl로 평가되는 여우같은 여자들의 꼬임에 발이 꼬여 넘어지기도 하는데 일부러 속는 것인지 알고도 속는 것인지 (그걸 그네들은 자신들의 순정이라고 믿고 싶은 것인지?) 하여간 남녀간의 밀당이란 다른 게 아니라 이런 복잡다단한 욕망의 주판알을 의미한다.

 

내가 어제 만난 남자는 38살이었다.

남자에 관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실례겠으나, 픽션이라 생각하며 읽어 주길 바란다. 세상에 이 남자와 비슷한 사람이 100명 정도는 있지 않겠는가?

 

남자는 못생겼었다. 그 남자는 청담동의 야외 테라스가 딸린 카페에서 넓은 원목 원형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단연코 그 공간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존재였다. 그 카페에 나와서 브런치를 먹으며 한가롭게 연인이나 지인들과 만담을 나누는 그 모든 인구를 통틀어서 가장 못생겼다. 50명의 인구가 존재했다면 하위 2%인 셈이다. 어쩌면 그도 나를 보면서 그리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못생긴 남자일수록 여자를 못생겼다고 평가할 확률이 더 높다는 것도 최근에 알게 되었다. 그의 미간은 불독 같고 눈은 야쿠자 같고 눈 아래는 씨름꾼 같았다. 그렇다고 겁을 먹을 것은 아니다. 나는 협상을 하려고 온 게 맞긴 하지만 이 경우엔 외모도 협상의 주요한 카드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월감을 느꼈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나 자리에 앉는 순간, 그 이후의 벌어질 일들이 그리 기대된다거나 흥미롭지 않다는 것 즈음은 이미 알았다. 나는 웃었다. 힘없이.

 

남자는 예의상 피식-에 가깝게 웃었다. 억지스러워 보이진 않지만 엄청난 호의도 아니다. 테이블은 너무 넓고 높았다. 탁자에는 네 명 분의 식기가 세팅되어 있었다. 우리가 만난 시간은 오후 2시였고 이런 애매한 시간의 만남은 주선자의 트릭임을 알고 있었기에 한국의 남녀 맞선 문화 상, 식사 시간에 만나면 남자가 밥을 사야 하므로 꼭 차나 한 잔 살 수 있는 시간에 약속을 잡아 준다 그가 메뉴판을 내게 내밀며 강조하듯 음료!”라고 말할 때 약간 빈정이 상했다. 귀에 쓸데없이 연락폰을 꽂은 정장 차림의 웨이터가 네 개의 식기 세트를 기이익 소리를 내며 천천히 치워갔다. 이러한 리튜얼이 의미하는 바가, 이 자리가 메마르고 합리적인네고시에이션의 현장임을 상기시켰다. 차라리 돈 반반씩 내고 밥이나 먹었으면 좋겠다. 남자는 잊혀지지만 대개의 경우 맛집은 남기에! 하지만 어제 과음한 탓도 있고 해서 나는 별로 고르지 않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남자는 아이스 라떼를 시켰는데 유리잔 속에서 커피층과 크림층이 구분되면서 초콜릿 시럽이 녹아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저걸 시킬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이제 남들이 보기엔 뻔하디 뻔한 선자리를 공연할 차례다. 나는 부끄러워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최대한 원래 알던 남자인 척 자연스러운 미소를 연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번 선에서 내가 이루고자 했던 실현 가능한 목표는 이것이었다.

 

똑똑해 보이지 않는 것.

 

사실 나는 그리 똑똑한 편이 못 된다. 정말로 똑똑한 여자라면 남자들은 똑똑한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간파해서 자신을 한없이 낮추었을 텐데, 나는 되려 최선을 다한다는 마음으로 나의 지적 수준을 마음껏 뽐내고 돌아오기 일쑤였다. 이런 후 차차 주선자의 피드백을 전해듣게 되었는데 남자들이 나를 얼마나 거만하고” “오만하며” “못생긴 주제에” “프라이드가 너무 강하다고 평가해 왔는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분노하였으나 내가 거만하다는 부분보다 못생겼다라는 평가에 더욱 분노하였다. 나를 그렇게 평가한 남자야말로 내가 세상에서 보기 드문 추남이라고 생각했던 자기 때문이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그의 얼굴은 온통 커피 & 계피빵처럼 휘몰아치는 무정부주의적인 얼굴이었다. 마음은 착하지만 참으로 얼굴이 부족하여 안타깝다 라고 심지어 그를 불쌍히! 여기며 맞선을 마쳤었는데 그런 남자가 나를 못생겼다고 평가했다니! 할렐루야. 그 후로 나는 못생긴 남자들을 더욱 미워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거만하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분노보다는 상처를 좀 받았다. 그건 나의 인격과 관련된 부분이므로 혹시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번 선자리에서는 나대지 않고 발언의 점유율을 좀 줄여보자고 다짐했다. 신중하고 공손한 말만을 하자고 선을 보기 며칠 전부터 마인드 컨트롤을 수시로 했다.

 

몇 월 생이세요?”

 

남자가 뜬금없이 생일을 물어 왔다.

 

“4월 생이요.”

 

그럼 양자리겠네요?”

 

남자는 난데없이 별자리 이야기를 했고 나는 황당함에 웃었다. 설마 별자리를 믿는 건가?

 

아뇨, 황소자린데요.”

 

남자는 열심히 재치 있는 입담을 곁들여 별자리 운세를 봐주었다. 4 20일에 가까운 생일이군요. 이런 경우 양자리와 황소자리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어요. ... 황소 자리의 경우에는 현실적이고 손재주가 많구요 고집이 세고 (전 고집이 세진 않은데요)... 아 네... 어쩌고 저쩌고...

 

그럼 @@씨는 별자리가 뭔가요?”

 

아 네, 제 별자리는 처녀 자리입니다.”

 

정말 어울리지 않는 별자리라고 생각했다.

 

이 별자리는 황소 자리와 궁합이 잘 맞아요.”

 

그렇군요. 그럼 처녀 자리의 성격은 어때요?”

 

남자는 고민을 좀 하는 것 같더니 천천히 말했다.

 

온화하면서도 계산적이고, 이해심이 많으면서 냉정한 면이 있죠. 전 지금 장점과 단점을 다 말씀드리는 겁니다.”

 

남자는 매우 진지하게 말했다.

 

모순적이네요. 이해심이 많으면서 동시에 냉정하다면? 이해는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된다 라는 거네요.”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웃겼는데 상대는 웃기지 않은 듯했다. 침묵이 돌았다. 그의 셔츠는 푸른 줄무늬가 짜잘한 크기로 쪼개진 체크 남방이었다. 어쩜 저리도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고 나왔는가? 아니다. 어쩌면 자신이 가진 셔츠 중에서 가장 어울리는 옷일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과해서 우스꽝스러워보이는 것을 피하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셔츠. 이 생각은 나중에 하게 된 것인데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좀 미안해졌다. 여름용 원피스가 단벌이라 하등의 고민 따윈 하지 않은 여자와 그나마 있는 셔츠를 이리 저리 갈아입었을 남자의 조우. 사실 난 새 원피스를 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별자리라니 가당치 않았다. 이쯤 되면 과거의 나는 아마도 리처드 도킨스를 좋아한단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죄송하지만 저는 별자리를 믿지 않습니다. 미신을 믿다니요.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이군요(이 이야기는 칼 세이건이 한 거지만). 비과학적 사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사고력의 부재를 의미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 물론 이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았겠지만 종교라거나 미신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면 나는 나의 무신론과 무신론을 뒷받침하는 몇 가지 근거를 구술하곤 했다. 리처드 도킨스에 의하면 미국에서는 동성애자보다 무신론자에 대한 반감률이 더 높다던가? 게다가 무신론 이외의 종교주의자들은 죄다 정신적 박약이다 라는 급진주의자에 대한 혐오와 경악은 상상 초월이겠지.

 

종교 있으세요?”

 

남자가 물었다.

 

아뇨, 전 종교 없는데요.”

 

나는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그냥 바빠서 교회를 못다닌다고 말할 걸 그랬나? 남자는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기독교인!” 아마도 자신의 38년 인생 동안 숱한 선자리에서 만난 여자들은 이처럼 별자리 이야기와 기독교인이라는 옵션에 그마나 p value <0.05로 반응성을 보인 모양이다.

 

> 주말에는 쉬심?

> 그렇다.

> 그럼 주말에는 뭘 하나?

> 주말에는 책 읽는다.

> 책을 읽는다고? (남자는 진심 놀란 듯했다. 너 왕따거나 사회 적응력에 문제 있는 것 아님?)

 

그럼 무슨 책을 주로 읽으세요?”

 

“(신이 나서) 과학책이나, ... 사회과학책 읽어요.”

 

, 저도 사회과학책 좋아합니다. 과학책두요.”

 

남자는 이제서야 코드가 맞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빅뱅 이론을 다룬, 자신이 미국에서 캔자스 어딘가를 지나가는 길에 본 프로그램 (아마도 코스모스)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나게 해주었다.

 

그 있잖아요 상대쪽 입자들이 와서 같이 꽝 부딪쳐서 다 없애버렸대요. 그래서 지금 남아있는 물질들은 그 테이블에 나와 있는 물질들만 남았다는 거예요.”

 

남자는 영어권에서 제법 지냈고 반물질을 계속 상대쪽 입자라고 불렀다. 나는 입에서 반물질이요? 라는 말을 할까 하다가 그냥 고개만 주억거렸다. 그렇군요. 이런 꿰임에 넘어가 아는 체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나는 자연과학을 좋아한다고 말한 주제에 멍청한 눈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런 이야기 좋아하세요?

 

...”

 

“...사회과학책은 어떤 책 좋아하세요?”

 

아 저는 말콤 글래드웰 좋아하구요, 마이클 샌델 요즘 읽고 있어요.”

 

말콤 글래드웰이요?”

 

나는 그가 영어권자라는 것이 신경쓰여 수줍게 발음을 고쳐 말했다. 네 말콤 글래드웰이요... 한국에서는 그렇게 부르는데... 그냥 대중을 대상으로 한 대중서들 읽어요(나는 이 말을 하면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어떤 책이든 따뜻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책은 다 좋아요. 그들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던 간에. 그래서 글래드웰 좋아하구요... 마이클 샌델은, 글쎄요. 요즘 다양하게 읽어보려고 노력하고는 있는데 진보주의와 자유주의... 사실 둘을 양분한다는 건 의미가 없고 (지금은 포스트 에이지로 봐야 한다고 보는데 아무튼) 일단은 마이클 샌델 쪽 진영의 글들을 읽어볼까 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그래요.”

 

이 정도면 충분히 겸손하지 않은가?

 

남자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다고 했다. 남자와 나는 책 이야기를 제법 하였다. 나는 계속 들었고 남자는 제법 사회과학 분야에서 들은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우리 남자들도 이런 분야에 관심이 많아서 대화들을 곧잘 합니다. 이제 사회의 부는 상위 2%가 전체 부의 50%를 차지하고 있대요. 이제 점점 더 심화되는 거지요.’ 나는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에 대해서 말하진 않았다. 자칫 빨갱이로 몰리게 될지도 모를뿐더러 심지어 그런 구조에 대해 사업가인 당신의 노선은 무엇인가? 비판인가, 아니면 순응인가? 라는 질문은 더더욱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런 사업가를 만나 우주 팽창의 속도만큼 빠르게 벌어지는 빈부 분리의 마지막 부의 열차 999를 타보려는 나의 입장을 곰곰이 되새김질했다. 이젠 세습 이외의 부는 없다. 그나마 마지막은 결혼이다. 하지만 내 인생의 노선에 그리 심각하게 응용시켜본 적은 없는데... 역시 남에 대한 비판의 날만 세우고 자신은 돌아보지 않는 이 뻔뻔함은 내가 최고인 건가?

 

이런 이야기를 친구들이랑 주로 하세요?”

 

남자는 하세요?”에 삑사리를 심었다. “하세요?” 그럼 안해요? 나는 카톡창에 노랗게 바글바글한 내 친구를 생각했다. 우린 이런 이야기 맨날 하는데요?

 

아 네... 해요.”

 

...”

 

남자는 아이스라떼를 마셨다. 나는 그 남자의 병이 비어가는 속도를 맞출 정도로만 커피를 마셨다. 고래밥 이야기가 생각났다. 의국에서 선생님들이 알려주었다. 남자를 만나서는 절대로 똑똑한 것과 같은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냥 생각이 안나면 고래밥 이야기를 해라. 나는 고래밥 속에 있는 별모양이 좋아요. 나는 고래밥 속의 고래가 좋아요. ... 고래밥 ... 여기서 고래밥 이야기를 어떻게 하란 말인가?

 

A > 플필 사진에서 핑크 플로이드의 프리즘 봤습니다. 핑크 플로이드 좋아하세요?

B > , 사실 핑크 플로이드를 좋아한다기 보다는 그 문양을 좋아합니다. 프리즘은 집중과 분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그 가역성의 대칭도 보여주죠. 저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요.

 

...

 

사실 프리즘 하면 뉴튼이죠.

 

개뿔.

 

A > 어떤 음식 좋아하세요?

B > 다 잘 먹어요.

A >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다 먹죠?

B > 네 그럼요.

A > 혹시 도축하는 것 보셨어요? 그런 것 보고 나면 사실 먹기가 힘들어요.

B > 동물 해방론자 피터 싱어의 책을 읽어보세요...

 

안됨.

 

............................................................................................................침묵

 

나는 아메리카노의 얼음이 녹아 무너지는 모양을 내려보았다.

 

그리고 또 좋아하는 것 뭐가 있으세요?”

 

나의 물음에 남자는 무성의를 느낀 듯했다.

 

아까 말했듯이 과학책이나 사회과학책 읽는 것, 나도 좋아하고... 그리고 음악 좋아합니다.”

 

그는 힙합, 트롯트, 국악을 빼고모든 음악을 듣는다고 했다. 힙합이 싫은 이유는 흑인이 싫어서고... 그의 생각에 아시잖아요.’ 어쩔 수 없어요. 백인이 흑인보다 우월해요. 제일 우월한 건 유대인, 그 다음 백인, 그 다음 황인, 그 다음 흑인이죠. 어쩔 수 없어요. 그는 아시아인 중에서 가장 흑인과 비슷한 용모임에도 불구하고 흑인이 싫다고 말했다. 오바마가 대통령을 하는 시대에 흑인이 열등하다는 우생학을 설파하는 그의 말에 나는 저게 웃기라고 말한건지 동의해달라고 말한거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총,,쇠를 보면 왜 흑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부족 국가를 이루고 일부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을 텐데요? – 라는 말 따위는 역시 하지 않았다.

 

그는 음악에 재능이 있어서 악상이 떠오르면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작곡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기획사를 알아봐 주겠다는 분이 있어요.’ 그는 두서 없이 작곡하지만 대중 음악을 작곡해서 파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음감이라곤 전혀 없이 오로지 추종하기만 하는 나로서는 그런 그가 부럽고 존경스러웠다. 마치 헤파이토스를 보듯이. 헤파이토스의 비너스가 아니라 그의 견습생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선 시장의 낭비성은 다시금 증명된다. 이처럼 훌륭한 사람들을 다른 자리에서 만났더라면 분명히 멋진 인연을 이어갈 수 있었을텐데... 나는 이 남자에게 오빠, 오빠 거리며 작곡하는 법 좀 알려 달라고 생떼를 쓰는 친한 동생이 될 수 있었을지도? 남녀 매칭이라는 이름으로 만나 권투링에서 잽만 훅훅 날리다 땡 종이 울리면 두 사람은 씁쓸히 가슴에 상처만을 남기고 영원히 헤어져야 한다.

 

저는 클래식 좋아해요.”

 

, 저도 클래식 엄청 좋아합니다!”

 

남자가 반색했다.

 

지금 나오는 곡 있죠? 이거 G 선상의 아리아네요.”

 

나는 가는 귀가 먹었는지 잘 들리지 안았다. 애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자 남자는 나의 진심을 의심하는 듯했다.

 

무슨 곡 좋아하세요?”

 

, 저는 연주가 위주로 들어요.”

 

연주가요? 누구요?”

 

나는 참지 못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폭발하듯 쏟아 놓고 말았다. 기돈 크래머, 벤게로프, 장영주, 피아노는 아르헤리치, 리히터, 그러다 좋아하는 국내 피아니스트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임동혁이요? 그 친구 내 후배의 친군데?”

 

진짜요?”

 

나는 진심 놀랐다.

 

, 내 후배애는 그 친구가 별 것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던데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어요?”

 

남자는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요, 전 그 사람 팬미팅 때도 갔었는걸요.”

 

나는 신이 나서 말했다.

 

잘생겼어요?”

 

“... ...!”

 

나는 머뭇거렸다. 그 피아니스트를 잘생겼다고 말해야 하나? 물론 그가 여자였다면 그토록 좋아하지 않았겠지만 ... 그렇지만 그를 잘생겼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빠순이로 전락하게 되고 더욱 큰 문제는 잘생겼냐 잘생기지 않았냐에 대한 나의 호불호가 이 선자리에 나온 헤파이토스와의 관계에 치명적일 것 같은 어떤 느낌 때문이었다.

 

잘생기지 않았어요, 피아노를 잘 치니까...”

 

남자는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무엇인가를 검색했다.

 

잘생겼네요...”

 

“... ...”

 

남자는 커피를 마저 마셨다.

 

제가 사실은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요.”

 

남자와 나는 2시에 만났는데 남자는 3시에 나가야 한다고 했다. 시계를 보니 2 57분이었다.

 

지금 일어나야겠네요?”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예 그러네요.”

 

남자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어정쩡하게 웃었다. 그 남자는 그가 말했던 대로 계산이 빠르고 냉정한 처녀자리였던 것이다.

 

다시 또 먼 길을 가셔야 되겠네요.”

 

남자는 자신이 주차장에서 빼올 차가 있다면서 자신은 화장실을 들렸다 가겠다며 날더러 먼저 가라고 했다. 나는 7 3시의 땡볕에 눈을 찌푸리며 손바닥을 눈썹에 직각으로 붙여 그늘을 만들었다.

 

, 그래요. 안녕히 가세요.”

 

심지어 역까지 태워주지도 않는다는 거였다. 이럴 거면 나도 차를 가져오는건데.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화를 했다. 엄마였다.

 

선 봤어.”

 

어땠어?”

 

못생겼어.”

 

그리고 끝이었다.

IP *.49.66.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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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8 08:26:49 *.39.145.123

하하하.

나도 선보고 나면 남자가 못생겨서 다음번엔 안만난다고 한다. 진짜 이유는 절대로 말 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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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8 09:54:23 *.50.21.20

나의 이중성을 대면해야해서 소개팅은 늘 불편했어요. 

내가 처음 보는 사람이 사랑을 고백할만큼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으면서도,

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 계산기를 내려놓을 수 없는 이성

이런 것들 때문에 오히려 혼란스러웠던 경험이 새록새록 나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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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8 21:15:34 *.175.14.49

재미있어요. 레몬^^ 정말 그래요. 개인적으로 만났으면 알고 지냈을 것 같은 사람들이 상처만 안고서 물러나곤 해요. 그냥 편하게 만나봐도 좋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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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8 21:57:31 *.124.78.132

아. 옛 기억들이 새록새록 피어오르네요 ^^* 

소개팅을 끝내고 늘 돌아오는 길은 늘 발이 무거웠던 것 같아요~

때로는 저의 자신감을 시험 당하면서 슬퍼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선자를 봐서 그저 최선을 다하기도 하고..

좋은 친구로 지내고 싶은 사람도 많았는데 너 아니어도 친구 많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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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9 10:00:39 *.50.21.20

너 아니어도 친구 많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으앜ㅋㅋ 얼굴이 화끈화끈 ㅋㅋㅋㅋ 

좋았어! 내 무덤은 내가 파야 제맛이지!! 그래! .....



... 흑흑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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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5 09:47:06 *.94.41.89

니언이가 재밌어하니 조으다 ㅋㅋㅋㅋㅋ

여자친구가 필요하지, 여자인 친구는 필요없댁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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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9 18:03:31 *.232.32.24

ㅎㅎㅎㅎㅎ. 고생했다, 레몬~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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