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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1일 10시 57분 등록

 

도서관에 갔다가 눈에 띄는 책이 있었다.

만화 <원미동 사람들>. 소설가 양귀자가 1980년 대에 부천시 원미동에 살면서 겪었던 이웃 주민들과의 삶의 교류, 소시민들의 일상 등을 초라하지만 비루하지 않게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한 소설, <원미동 사람들>을 만화로 옮긴 책이다.

원미동에서 살았던 적은 없지만 원미동에 위치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6년이나 다녔으니 나도 반쯤은 원미동 사람이라 할 수 있겠. 소설의 무대가 되었던 동네가 학교에서 걸어서 15분도 안 되는 거리인데 막상 그 동네에 가본 적은 몇 번 없다. 소설이 발표되었던 1987년에는 원미동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도 그 때는 그런 소설이 있는 줄도 몰랐다가, 한참 후에 드라마와 연극으로 만들어진 후에야 소설 속 원미동이 내가 아는 그 원미동임을 깨닫고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오랜만에 원미동을 보니 또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만화책을 읽기 시작했다. “원미(遠美)”멀고 아름다운이란 의미인 줄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만화책이라 그런지 페이지가 잘 넘어갔다. 서울에서 전세집을 전전하다가 원미동에 작은 연립을 사서 이사 온 은혜네가 주인공이지만 형제슈퍼 김반장, 강남부동산 박씨, 땅부자 할아버지 등이 낯설지 않다. 예전 우리 동네에 살았던 사람들 같기도 하고, 언젠가 원미동에 갔다가 만난 적이 있었던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친근하다.

좀 더 읽다보니 왜 낯설지 않은지 알 것 같았다. 서울에서 전세 살다 오르는 집값을 감당 못하고 부천으로 떠밀리듯 이사오는 사람들. 탈서울 엑소더스”가 요즘에 나타난 현상인줄 알았는데 30년 전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구나. 동네 슈퍼 옆에 새로운 할인슈퍼가 생기면서 제살 깎기 경쟁을 하다 결국 망하고 마는 자영업자의 에피소드도, 하루 종일 일해도 최저 임금 밖에 못 받고, 공장도 지하, 집도 지하 단칸방이라 지하생활을 벗어나지 못하는 공원(工員)의 하루 이야기도 요즘에 나온 책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현재의 삶과 닮았다. 하긴 30년 밖에 안 됐으니 당연히 그럴지도 모르겠다.

200년 전에 쓰여진 <파우스트>를 읽으면서, 2,000년도 더 전에 쓰여진 사마천의 <사기>를 읽으면서도 낯설지 않은 장면들을 대하면서 깜짝 놀라곤 했다. 삶의 규모는 달라졌지만 사람들의 본질은 현재와 너무나도 비슷해서다.

 

한편으로 인간은 발전하지 않는건가라는 생각에 절망스럽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더 나빠지지도 않을 것 같다는 희망이 생긴다. 30년 쯤 전에 원미동에 위치했던 학교에서 자원의 매장량과 앞으로 사용 가능한 기간이 얼마나 짧은지등을 배우면서 두려움에 떨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지금도 우리는 그때보다 훨씬 더 많은 자원을 소비하면서도 잘 살아가고 있다. 다른 매장지나 보다 효율이 높은 발굴 방법을 찾아내기도 하고, 대체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등 어떻게든 살아갈 방도를 찾고, 만들어 가는 것. 이것 역시 인간의 본능이자 재능이다. 그래서 2,000년 전 관중과 백리해가 살아남았고, 200년 전 파우스트도 결국 구원을 받았다.

현재도 그렇지만 빈부의 격차가 더 심각해지고, 인간의 노동력이 점점 가치를 잃는 미래는 더욱 살기 어려워질 거라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번 생은 틀렸다고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인류는 우리가 처음도 아니고 우리 나라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몇 천년 전에도 요즘은 예전에 비해 살기 힘들다며 현세를 비관하고 그 이전 시대를 황금시대라며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미래를 낙관하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살아서는 안 되겠지만, 절망하고 불안에 떨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수천년의 역사 동안 인간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어려움을 극복하며 살아왔다. 앞으로도 인간은, 그리고 나는 방법을 찾아서 살게 될 거라고 믿는다.

 

IP *.222.25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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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1 17:20:17 *.18.187.152

이야기의 형태와 시대는 다를지라도 거기에 담긴 삶의 모습은 다 똑같은데

그걸 만화책에서 사기열전까지 이번에도 너무 잘 풀어주셨네요 ^^
에세이스트 수정씨~ 이번 주도 글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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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5 20:53:40 *.223.36.249
그런 종류의 "인류"가 되지않기 위해ᆢ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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