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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8월 6일 11시 21분 등록
어린 시절의 한 장면. 아마도 초등학교 5학년, 혹은 6학년 때의 일이다.
운동화 하나를 사 주시겠다며 아빠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르까프 대리점이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아이들에게 최고의 운동화는 나이키 농구화였다. 당시 내가 나이키 운동화가 갖는 브랜드의 매력을 알고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이키 운동화를 좋아했었더라도 나는 아버지를 따라 르까프에 갔을 것이다. “아빠, 난 나이키가 더 좋아요. 나이키 운동화 사 주세요.” 라고 말하지 못하는 소심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내게 아빠는 퍽 무서운 분이셨고, 아빠 말에 대꾸를 한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크게 한 번 혼났기 때문이었나? 아무튼 나는 아빠 앞에서 나의 좋고 싫은 감정을 잘 말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대리점 선택에 이어, 운동화 선택까지 해 주셨다. 다른 기억은 희미하지만, 아버지가 어떤 운동화를 좋아하실까, 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살피려 애썼던 장면만은 분명히 떠오른다. 나는 내 마음에 드는 운동화보다는 아버지의 눈치를 살펴 운동화를 샀다. 어린 아이였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당신의 마음에 드는 운동화를 골라주셨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아버지가 고르셨던 운동화를 들고 대리점을 나왔다. 이렇듯, 나의 좋고 싫은 감정을 숨겼던 기억은 몇 장면이 더 있지만, 당시의 내가 이런 일들로 힘들어하거나 불만을 가졌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 르까프 운동화를 신고 처음 학교에 가던 날, 기분 좋게 날아서(!) 학교 앞 수성교를 건넜던 장면이 기억나는 걸 보니 말이다.

서른 살이 되고 난 후의 한 장면.
나는 노래를 잘 하지 못한다. 실제로도 스스로 내가 노래를 잘 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들에게 노래 실력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실제 나의 수준보다 조금 더 낮은 수준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분명, 의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의 부족한 실력을 살짝 가리는 것은 내 마음을 퍽 편하게 해 주었던 것 같다.
얼마 전, 연구원 수업에서의 일이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약하다고 느낀다. 이런 나에게 선생님께서 주시는 연구원 과제는 퍽 도움이 되었다. 종종 선생님의 과제가 참 좋아서 혼자 감탄하기도 한다. 그래서, 선생님의 과제는 언제나 대환영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의 과제 발표가 끝나고 내가 덧붙인 말은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저는 사고력이 약한 편입니다. 책을 읽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편이고, 비판력이 약해서 다시 곱씹거나 회의하지는 못하지요. 하지만, 선생님의 과제는 제게 많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그러니, 저의 부족한 부분이 발견되면 언제나 특별 과제라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말은, 사고력에 대하여 스스로 느끼는 부족함 정도보다 과하게 표현된 것이었나 보다. 연구원들은 비판력이 부족하다는 나의 말에 ‘그건 아니다’라는 표정을 부여주셨고, 선생님께서도 나의 과장된 표현 때문에 나를 파악하시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셨나 보다. 그 날 밤, 사고력이 부족하다는 말이 무슨 의미냐고 내게 다시 질문하셨던 것이다.

나는 솔직한 마음 숨기는 것을 좋아하는가?
아니다. 분명히 나는 누군가를 기분좋게 만드는 말들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성격상 그저 듣기 좋은 소리는 잘 하지 못한다. 정말 기분좋은 아침이 아니면, “Good Morning~"이라는 인사를 하지 않는 편이다. 좋은 아침이구나, 라는 생각이 스스로에게 들지 않는 날에는 경쾌한 어조로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로 대체한다. 이런 성격으로 근거없는 말들은 잘 하지 않는 편이지만, 분명 누군가에 대한 긍정적인 마음을 표현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난 분명 솔직한 마음을 숨길 때가 있다. 두 가지 이유가 떠오르는데, 첫 번째는 바로 이런 때다. 나의 말로 인하여 상대방과 갈등이 생길 소지가 있을 때.
나는 갈등을 힘겨워하는 것 같다. 일시적인 갈등은 그다지 나쁘지 않음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지만, 내가 갈등을 이겨내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심지어 갈등이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역할을 할 때도 있음을 인식하고 있지만, 이 역시 도움이 되지 못했다. 갈등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솔직한 내 마음을 숨겼던 일들 중 많은 경우는 다른 사람들은 갈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일도 더러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는 갈등이 아니라, 작은 의견 차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분명 나는 이 사소한 의견의 차이가 빚어내는 갈등을 피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그리고, 합의된 상황을 편안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무언가를 잘 한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다. 특히, 회사에서 강연을 잘 한다고 생각할 때가 더욱 그렇다. 나는 회사에 입사하기 전에 대학교 등에서 강연을 하곤 했지만, 입사하고 난 후에는 강연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회사에서는 종종 나의 원래 모습과는 다르게 행동하고 있음을 느낀다. 거짓말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지만, 나의 가장 잘 하는 면에 대해서는 늘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분명 솔직함이 필요한 순간이다.

잭 웰치는 이러한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는 것이 비즈니스에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직성이라는 단어를 선택하여 그의 책에 이렇게 적었다.

“정직성의 결여란 악한 의도를 가지고 거짓말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너무 많은 수의 사람들이 너무나도 자주,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화를 직설적으로 하지 않으며 진정한 논쟁을 이끌어 낼 목적으로 아이디어를 제시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마음을 열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비평이나 비판도 자제한다.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혹은 갈등을 피하기 위해 입을 다물고 체면을 차리느라 나쁜 소식도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해서 전한다. 간혹 정보를 입수하고도 혼자만 알고 있기도 한다. 바로 이런 것이 조직에 크게 해가 되는 정직성의 결여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거의 모든 비즈니스에 이런 정직성이 결여되어 있다.”
참 다행이다. 나처럼 정직성이 부족한 사람들이 또 있다는 사실에 위로가 된다. ‘너무 많은 수의 사람들이 너무나도 자주’ 나처럼 행동한다고 생각하니 약간의 힘이 나기도 한다. 잭 웰치의 책에 의하면, 사람들은 말하지 않는 것이 더 편하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진심을 말하지 않는다. 나 역시 불편한 진실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가능하면 갈등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온갖 다른 생각을 하면서 입으로는 듣기 좋은 말을 했던 것은 아니다. 나의 경우는 생각이 풍성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고, 나의 선호도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은 적이 더 많은 것 같다. 또 한 가지 고무적인 것은 한 살, 두 살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면서 자신감은 계속 커졌고, 점점 솔직해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솔직함(정직성보다 솔직함이라는 표현이 더 좋다)에 대하여 어렴풋이 생각만 하다가, 잭 웰치의 책을 통해 나를 돌아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의 언어를 빌어 사고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아직 명쾌하지는 않지만, 나의 솔직함의 결여에 대하여 생각을 시작한 것만으로도 기분좋은 느낌이다. 오늘따라, 잭 웰치의 조언이 퍽 우호적으로 들린다.
“무엇보다도 당신 스스로가 열광적으로, 조금 과장스럽다고 느낄 정도로 정직성을 드러내야 한다. 비록 당신이 상사의 위치에 있지 않다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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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8.07 09:16:34 *.72.153.12
뭐 먹을래? 밥하고 찌게요.
뭐 마실래? 소주
안주는? 과일요.

누가 내게 원하는 게 뭐냐고 물으면 나는 그냥 편하게 답한다. 그거 먹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정직성, 그거 자신에게 솔직하고, 그것을 타인이 곱게(이성적으로) 보아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믿음. 그거 아닐까?
그럼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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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2007.08.07 13:01:00 *.99.242.60
잭웰치의 정직성에 대하여 100% 동감이 들기는 하나,
우리나라 정서에는 조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 같아.
사람대 사람으로 만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것 같은데,
돈문제, 상하관계, 인간관계 등등 끼에게 되면 어려울 것 같아.

정화말대로 정직하게 말하고 받아주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 정직한 말이 상처를 줄수도 있고 말은 화자의 판단도 있지만,
청취자의 판단도 있는 쌍방향이니..

또한 정직성이라는덕목에 대하여 사회구성원들의 전반적인 인식이
전환되기 전에 정직성으로 가치로 말한다면 엉뚱한 오해를 사는일이
많을 것 같고..

이런 내 자신이 처세술이라고 정직성에 대하여 폄하하는 것이
바보같고, 말 한마디에 달리는 꼬리표가 겁나서 제대로 말 못하는
내가 조금 찔리지만 그래도 정직성은 말이 아닌 꾸준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좋을때가 더 많은 것 같아.

아마 잭도 정직성에 대하여는 GE의 회장이 되어서 추진했을 것 같은데, 세상을 탓하는 것은 아니고 사람들의 판단이나 행동이 100% 정직하지는 않은 것 같은 불길한 예감도 들고 그런 벽을 깨기가 쉽지 않네.

특히 다른 사람의 잘못된 행동이나 조언에 대하여는 거의 하지 않는 편임. 내가 그정도로 행동을 잘하는 사람도 아니고, 또 그런 행동을 하고 난후에 내가 아니더라도 좀 소란스럽기는 하지만, 누군가가 꼭 말을 해주더군..내가 너무 이기주의자에다 기회주의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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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곤
2007.08.07 16:12:31 *.176.99.201
희석아~ 부담느끼지 마라.
갈등을 힘겨워하고 잘한다는 칭찬을 부담스러워하는 것은 희석이의 기질적 특성을 말하는 것이다. 정답은 없다. 강점도 아니고 약점도 아니다. 잭 웰치같은 사람도 있고 희석이같은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 특성을 잘 활용해라. 이도 저도 아니면 그저 빙그레 웃어줘도 좋다.

솔직하다는 것은 거침없이 말하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영훈이가 말한 것처럼 우리나라 같이 유교문화가 강한 곳에서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너도 언젠가는 조직인간의 껍질을 벗고 자유로운 너만의 세계를 만들어내겠지. 진실을 무기로.

때론 불편한 진실을 말해야 할 때가 있고, 묵묵히 지켜보야야 할 때도 있다. 솔직함이란 진실을 외면하거나 속이지 말자는 것이다. 대화에 담긴 진정성, 그것이 솔직함이 아닐까? 그 감정은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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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운
2007.08.08 03:22:27 *.134.133.182
와우~ 조금 용기내어 제 고민을 글로 털어놓으면, 이렇게 애정어린 조언을 들을 수 있네요! ^^ 정화 누나의 관심은 제게 위로가 되고, 영훈형의 통찰은 잭 웰치에게 휘둘린 제 견해에 균형감각을 불어넣어주신 것 같아요. 그리고, 병곤 형님의 조언은 힘이 되고 더 큰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다시 나를 돌아볼 수 있게 된 게지요.

"갈등을 힘겨워하고 잘한다는 칭찬을 부담스러워하는 것은 희석이의 기질적 특성"이라는 말씀에 공감하며, 결국엔 나의 특성과 강점을 딛고 일어서야 함을 상기합니다. ^^ 고마워요. 병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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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자
2007.08.16 14:47:52 *.102.141.213
저는 희석님 글에서 저를 많이 발견해요.
특히 '갈등을 힘겨워 하고 잘한다는 칭찬을 부담스러워 하는...'
저도 그런 경험 많거든요~
왜그런걸까 생각하는데 답이 안나와요.
역시 그건 기질적 특성일까?

그리고 희석님께 메일 두통 보냈는데 확인이 안돼요.
몽골다녀와서 이글 보면 얼른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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