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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9일 03시 23분 등록
얼마 전 연구원 과제 중에 '역사 속에서 가장 경이로운 떨림으로 다가온 장면'을 찾으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얼핏 듣기에도 어려울 것 같지 않나요? 전 도무지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 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덕분에 과제를 발표하는 전날 밤을 꼬박 새고도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해 불편한 마음으로 수업에 참석했습니다. 준비한 과제를 발표하기 전에 '어떻게 그런 장면을 찾았는가'하는 방법론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의견이 오고 갔는데, 저는 그 때 들은 한 가지 방법이 참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는 장면을 골라라."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때늦은 후회 같은 것이었지요. 제가 과제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이유가 순식간에 명확해졌습니다. '경이로운 떨림'을 찾는 그 순간에 전 '가슴' 대신 '머리'를 쓰고 있었던 때문입니다. 느끼기 보단 생각하고 있었던 탓입니다. 그 전날 밤을 꼬박 새우면서 마치 퍼즐을 풀듯이 과제를 이리저리 끼워 맞췄습니다. 비교적 그럴싸한 주제를 고르고 거기에 적절히 들어맞는 역사 속의 장면들을 찾았습니다. '가슴'으로 풀어야 할 문제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으니, 처음부터 제대로 될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울어본 것이 언제인지 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금방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도 최근엔 없었던 모양입니다. 전보다 행복해져서 그런 것도 같고, 가슴으로 생각하는 법을 잊어버려서 그런 것도 같습니다.

요즘 리얼리티 쇼(Reality Show)라는 것이 꽤나 인기인 모양입니다. 리얼리티 쇼란 연예인이 아닌 일반인이 실제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여러 가지 계획된 상황에 따라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지요. '백만장자와 결혼하기(The bachelor)'나 '도전! 슈퍼모델(America's Next Top Model)' 같은 프로그램들이 미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바 있고, 국내의 케이블 방송국들도 앞다투어 서바이벌 형식의 데이트 프로그램들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리얼리티 쇼의 자극적인 소재와 작위적인 감동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면 피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말은 하면서도 일단 보기 시작하면 중간에 멈출 수 없는 중독성도 이런 프로그램들을 꺼리는 원인 중에 하나입니다. TV 프로그램을 고르는 순간에도 전 가슴보다 머리가 앞서는 모양입니다. 이런 제 취향에 가끔 아내는 까다롭다며 눈을 흘기곤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인터넷에서 발견한 리얼리티 쇼의 동영상 한 조각이 머리가 아닌 가슴에 와서 박혔습니다. 'Britain's got Talent'라는 영국판 '전국 노래 자랑'의 한 출연자에 대한 것입니다. 별다른 마음의 준비 없이 보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펑펑 눈물을 흘리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가슴보다 머리가 앞서는 제 눈물을 쏙 빼놓은 그 감동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영국 사우스 웨일스 출신인 36살의 핸드폰 판매원, 폴 포츠(Paul Potts)의 이야기입니다.


후줄근한 양복을 입고 고개를 약간 비스듬히 기울인 채 어색하고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던 젊은이는 '무엇을 보여줄 것이냐'고 묻는 심사위원의 냉소 섞인 물음에 '오페라'라고 대답합니다. 당황한 심사위원들의 표정 사이로 음악이 흘러나오고 그의 노래가 시작됩니다. 어눌하고 자신감 없는 표정의 폴 포츠는 사라지고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에 등장하는 아리아 ‘공주는 잠못 이루고(Nessun dorma)'를 열창하는 또 다른 그가 무대를 가득 채웁니다.

노래가 계속되는 동안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의 과거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다지 내세울 수 없는 외모와 소극적인 성격의 그가 핸드폰 판매원으로 살아왔을 고단한 일상이 그려집니다. 또 그 척박한 일상의 사이를 채우고 그를 포기하지 않게 해주었을 그의 꿈과 노력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그의 노래가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그의 혼신을 다한 노래가 절정으로 달리고 객석에서 환호와 박수가 터져나옵니다. 냉소 섞인 질문을 던졌던 심사위원의 눈에도 눈물이 맺힙니다. 그의 목소리와 음악이 잦아들고 무대 위에 여전히 부끄러운 표정을 한, 그러나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폴 포츠가 서있습니다. 이제는 다시 이전의 그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아니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바싹 말랐던 가슴이 흘러 내린 눈물로 촉촉히 젖었습니다.

우리들은 쉽사리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그렇고, '돈이 없어서' 또 그렇습니다. '학벌이 부족하기 때문에' 원하는 직업을 가질 수 없다고, '타고난 재능이 모자라서' 도전해볼 필요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36살의 핸드폰 판매원이 꾸었던 오페라 가수의 꿈에 대해선 뭐라고 이야기하시겠습니까?

세계의 정복자라 불리는 칭기즈칸의 어린 시절은 말 그대로 불행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그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지만 거친 벌판에서 끈질기게 하루하루를 살아냈고, 결국 세상의 중심에 스스로를 세웠습니다. 이순신은 늦은 나이에 벼슬길에 올라 두 번의 백의종군을 묵묵히 이겨냈습니다. 다산은 18년의 고통스러운 유배생활을 통해 세계가 기억하는 학자로 자신을 빛냈습니다. 고통 없는 성취가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진 상태에서 꾸는 꿈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고된 하루는 물려받은 재산이나 요행으로 성공한 누군가가 자서전을 위해 힘겹게 꾸며내야 하는 아름다운 과거 같은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고달픈 현실이 여러분 인생의 클라이맥스를 더욱 눈부시게 빛낼 것입니다. 폴 포츠가 노래를 시작하기 전에 했던 이야기가 계속 귓가에 맴돕니다.

"제 꿈은 제가 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느껴지는 그것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꿈 꾸기를 멈출 수 있을까요? 보통 사람의 위대한 드라마, 바로 당신의 이야기입니다.


IP *.227.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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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윤
2007.07.02 11:16:59 *.227.22.57
폴 포츠는 올해 나이가 36세로 평범한 휴대폰 판매원입니다. 대회에 참가하기 8년전에 노래를 부르는 게 너무나 즐겁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남보다 훨씬 늦은 28세의 나이로 자비를 들여서 이탈리아까지 건너가 두 차례, 단기과정 오페라 교육을 수료했습니다. 그런 그는 어린 시절부터 쟁쟁한 교육을 받고 자라온 화려한 테너들이 수없이 경쟁하는 프로의 세계로 뛰어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충수파열, 종양 그리고 결정적으로 2003년에 쇄골을 부러뜨려 성대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오토바이 사고를 겪으며 쓰러졌습니다. 그 이후로 폴은 음악가로 살아가는 대신 생계를 위해 휴대폰 판매원으로 일하며 평범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는 꿈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재능 있는 사람을 뽑는 'American Idol'의 영국판인 'Britain’s Got Talent'이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에 출연하기로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최후의 우승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꿈이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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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
2007.07.02 12:00:46 *.211.61.150
이 동영상에 어떤 합성이나 조작이 들어간 것 아니지?
정말 소름이 끼친다.
어떻게 저런 목소리가 나올 수 있지?
정말 믿을 수 없다.

나는 우리나라의 프로그램중에 '인간극장'을 좋아하지.
그것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삶의 진실을 느낄 수 있어서 그래.

월요일날 감동적인 이야기를 선사해주어 고맙다. 종윤아.
한 주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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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궁
2007.07.02 12:41:42 *.109.100.198
처음봤을때보다, 두번째봤을때보다, 오늘 세번째 보면서 눈물이 더 많이 그렁거리는건 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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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07.02 13:20:25 *.249.167.156
어제 리뷰를 쓰다 잠시 나가보니 아내가 눈물이 그렁그렁하더군요.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이 동영상을 보고 있었습니다. 저도 덩달아 다시 보았더랬습니다. 역시 'You'의 시대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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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윤
2007.07.02 13:25:48 *.227.22.57
창용이형~ ㅎㅎ 동영상 보고 전화를 주실줄은 몰랐네요. 위에 올린 동영상은 예선전 화면이구요. 인터넷을 찾아보면 준결승, 결승 동영상도 있습니다. 제가 저 동영상 발견했던 인터넷 글 제목도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면 안된다.'였으니 다들 느끼는건 비슷한 모양입니다. 한주 힘내십쇼~

짝꿍~ 그래? 나도 벌써 며칠째 수도 없이 봤는데도 매번 가슴이 찡하네.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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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윤
2007.07.02 13:28:28 *.227.22.57
도윤~ 꽤 유명했던 동영상인가본데 난 며칠전에서야 알았네. 평범한 사람의 비범한 재능, 그리고 노력!~ 이제 나를 발견하는 7월이 되었구나. 좀 깊이 내려가서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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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7.02 20:42:06 *.72.153.12
너무 감동이다. 동영상도 너의 글도. 종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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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7.07.03 01:39:53 *.48.41.28
나도 이거 봤는데 우느라고 화장 다 지워졌었지. 저런 것이 인간승리겠지? 감동감동.. 이런 거 자주 좀 올려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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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7.07.03 10:41:02 *.128.229.230
좋구나.

재동아. 종윤이 글과 이 동화상 메인에 올릴 수 있으면 좋겠다. '뉴스와 공지사항'에 띄울 수 있느냐 ?

종윤이 올린 동영상의 youTube 를 클릭하면 이 친구 결승전 장면과 인터뷰도 나온다네. 훨씬 더 세련된 복장으로 나온다네. 그러나 이 장면이 제일 멋지다. 그의 일생 중 최고의 날.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던 한 남자가 자신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하나 발견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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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2007.07.03 12:45:52 *.99.241.60
잘 보고 간다.
어쩜 요즘 인물책을 보다 보니
뭔가 조건이 맞고 상황이 맞아서 꿈을 이룬 사람은 없더란
생각이 들더라구.
그래도 시대가 원해서 살아남은 사람은 그 이름이라도 남았지만,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그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도 보이고,
다시 에너지 200% 충전하고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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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윤
2007.07.05 14:14:59 *.227.22.57
정화~ 감동이야? 난 이거 볼 때 마다 계속 눈물난다. 사실 동영상의 감동이 너무 강해서 거기에 글을 더하는게 많이 망설여졌었는데, 그냥 써버렸네. 고맙긴~ 내가 고맙쥐~

향인 누나~ 이런거 자주 올라오면 감동이 덜하지 않을까요? ㅎㅎ 누나는 전화를 해도 꼭 타이밍이 안맞네~ 다시 걸께요.

영훈이형~ 그러게요. 쉬운 조건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기억에 안남는 것도 같고... 그나저나 연구원 과정을 더 열심히 하기 위해 매달 2권씩 더 읽으시겠다는 결심! 대단해서 박수를 보냅니다만 가족들의 윤허는 득하셨나 모르겠네요. ㅎㅎ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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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윤
2007.07.05 14:18:18 *.227.22.57
부지깽이님~ 그쵸? 다른 동영상들도 좋지만 이것처럼 눈물이 저절로 흐르진 않네요. 보고 또 봐도 자꾸만 눈물이 나요.

이 동영상을 소재로 글 쓰면서 사부님이 좋아하실 것 같았어요. 우리 변경연이 꾸는 꿈이랑 잘 맞는 이야기 같아서요. 좋은 동영상에 글을 더하면서 많이 망설여졌습니다. 특히 앞부분에 쓴 연구원 수업에 대한 이야기는 빼야 칼럼의 모양이 좋아질 듯 싶었는데요. 연습할 때는 길게 써야 한다는 말씀이 떠올라서 그냥 올렸습니다.

연구원 한명한명, 또 꿈벗들 모두가 이처럼 놀라운 드라마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자꾸 게을러지려고 하는 마음 추스리고 더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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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07.06 22:33:46 *.142.243.87
전 이제 봤네요.
감동적입니다.
한 번만 보고 말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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