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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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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10일 09시 30분 등록

비 오는 날씨를 참 좋아한다. 하지만 등산을 계획했던 지난 주 토요일의 비는 반갑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 담소를 나누며 하룻밤 자고 오기로 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토요일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순번을 돌아가며 모임을 준비하다 보니, 어느덧 나의 차례가 되었다. 모임 장소 선택부터 기본적인 음식 준비까지 맡아서 해야 한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라 부담감은 내려 놓고 즐겁게 준비 했다. 하지만 모임의 장소를 정하는 것은 조금 어려웠다. 지금 살고 있는 창원과 가깝고, 가급적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이면 더 좋겠다는 생각에 진작부터 거제도를 생각했지만, 마땅한 숙소를 찾기가 어려웠다. 고민 끝에 내가 가장 편하고, 제일 만만한 곳으로 모두를 초대하기로 했다. 나의 고향 청송이었다.

 

청송은 내가 태어나고 열 살 때까지 자란 곳이다. 올해 여든 다섯인 큰아버지는 아직도 청송에서 살고 계신다. 동네가 크지 않아 읍내(시내라는 표현도 쓰지 않는다) 한 바퀴를 도는 데 30분이면 충분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청송은 나에게 많은 추억이 있는 곳이다. 특히 제사를 지냈던 기억은 아직도 나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은 더 이상 명절에 다 함께 모여 제사를 지내지 않지만, 내가 갓 초등학교를 들어갔을 때까지만 해도 한 번 제사를 지내면 큰 집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여 집집 마다 제사를 같이 지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많이 연로하시지만 장손인 큰 아버지는 명절 때면 정갈한 한복에 갓끈을 고쳐 메고, 그 많은 인원을 진두지휘 하셨다.

 

지방(紙榜)을 쓰는 것은 항상 아버지의 몫이었다. 학교를 오래 다니지는 못하셨지만 항상 꼼꼼하고 글씨를 특히 잘 썼던 아버지는 제사가 있는 날 아침이면 항상 정갈한 옷을 입고 붓으로 정성스레 지방에 글을 쓰셨다. 항상 맨발로 천지를 모르고 뛰어다니던 나도 제삿날만큼은 항상 긴 바지에 양말을 갖춰 신었다. 제사가 시작 될 아침 무렵부터 큰 집은 마을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한다. 방 안을 틔우고 마루 끝까지 아슬아슬하게 서서 절을 하는 사람들은 물론 그래도 자리가 모자라 마당까지 내려와 자리를 깔고 절은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특별히 방안 한 구석을 차지하고 아버지와 함께 절을 할 수 있었다.

 

큰 아버지가 알아듣기 힘들지만 근엄한 목소리로 축문을 시작하면 많은 사람들이 모두 엎드려 절을 했다. 당시 나는 제사를 지내는 동안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조상님들의 혼이 어디선가 날아와 실제로 제삿밥을 드신다고 믿었다. 실제로 제사를 지내는 동안에는 문을 활짝 열어 두었기 때문이다. 나는 절을 하느라 엎드려 있는 동안 혼자서 속으로 할아버지, 할머니께 무수히 많은 말을 걸었던 기억이 난다. 혼자 묻고 혼자 답하는 식이었지만, 나름 진지했고 그 시간이 즐거웠다. 물론 대화의 마지막은 항상 당부의 말로 끝을 내곤 했다. 두 눈에 힘을 꼭 주면서 소원도 빌었다. 공부 잘하게 해주세요, 가족들 안 아프고 건강하게 해주세요, 그렇게 소원을 빌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실제로 소원을 들어 주신다고 믿었다.

 

큰 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처음 한 두 번 들리면, 그것은 절을 마치고 일어나라는 신호였다. 그러면 다른 연장자들이 그 기침 소리를 두어 번 따라 하고 그 뒤로 모두가 일어난다. 매번 절을 할 때 마다 이 패턴은 반복 된다. 그렇게 몇 차례의 절을 마치고 나면, 마지막으로 지방을 태운다. 지방을 태우는 것 역시 큰 아버지의 몫이었다. 지방에서 타오른 불길이 한참이나 손에 닿았는데도 뜨겁지도 않으신지 계속 들고 있다가 지방이 거의 다 탔을 무렵에서야 향로 위로 살짝 내려 놓으셨다. 지방을 태우고 나면 마지막으로 절을 두 번 더 하고 제사는 모두 끝이 났다. 제사가 끝나고 나면 상을 물리고 제사 음식으로 아침을 먹었다. 조상들이 먹었던 음식을 후손들이 다 함께 모여 나눈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나약했던 유인원이 지구 상의 지배자로 거듭나게 된 배경으로 직립 보행과 불의 사용 그리고 언어 사용을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호모(인류)의 공통된 특징이며, 호모의 여러 종들 가운데 유독 호모 사피엔스 종만이 지금껏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첫째는 언어적 유연함이다. 유연한 언어를 통해 좀 더 많은 구성원들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더욱 유연한 협력이 가능했다. 둘째는 뒷담화의 능력이다. 구성원들에 대한 결속을 강화하고 사회적 행동을 위해 뒷담화는 필수적이었다. 마지막으로 가상의 실재를 믿는 능력이었다. 거짓말과는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미신 또는 종교 등)을 믿게 하는 힘을 통해 처음 만난 인간 누구와도 공통의 목적 또는 가상의 실재에 대한 믿음을 통해 서로 신뢰하고 협력을 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가상의 실재를 믿는 사피엔스들은 서로 직접 만나서 쓰다듬고, 함께 사냥을 나가고, 함께 음식을 나눠 먹지 않아도 무리로 받아들일 줄 알았고, 때문에 조직 가능한 구성원의 수는 무한에 가까웠다.

 

나누고 구분하고 쪼개는 것에 익숙한 요즘 사람들에게 어쩌면 제사는 귀찮거나, 의미는 사라지고 거추장스러운 요식행위만 남은 인습(因習)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피엔스가 지구의 지배자가 힘을 가지게 된 배경은 서로의 힘을 한데 모을 줄 알았고, 한 세대의 경험이 다음 세대로 이어져 그것이 축적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키운 것의 팔 할이 부모님의 수고와 눈물 덕분이었다면, 그 부모님을 당신의 수고와 눈물로 키워낸 조부모 역시 나에게는 부모와 마찬가지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며 걸어갈 힘은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를 돌아보는 힘에서 나온다. 일 년에 하루 정도는 그들을 추억하고 내 안에 흐르는 그들의 흔적들을 떠올려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IP *.75.253.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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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0 15:07:33 *.226.22.184

소소한 행복과 마음을 보고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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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0 15:35:58 *.18.218.234

'내 안에 흐르는 그들의 흔적'이라는 표현 좋다. 잘 보관해놔요. 안그러면 훔쳐간다.


그나저나 청송이 작아요? 김서방 찾으면 알 수 있는 곳인가요?

제가 좀 찾고 싶은 분이 있어서...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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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1 11:12:35 *.106.204.231

이 나이가 되니 제사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정욱 말대로 그 분들을 추억할수 있고 그리고 잘 못보던 형제자매들을 볼수 있는 날이죠.

제사준비를 같이하고 제사를 같이 지내고 그 뒤에 맛있는 음식을 같이 나눠먹죠. 아무리 형제자매라지만  떨어져 있으면 먹고살기 바빠서 잘 못보고 지내죠. 어쩌면 제사는 우리 형제자매를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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