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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6일 21시 26분 등록
2008. 07. 04

점심을 일찍먹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점심시간이 많이 남아서 얼마전부터 그 시간에 그림을 하나씩 그리고 있다. 그림을 빨리 잘 그리고 싶은데... 많이 그리는 것이 좋은 방법일 거란 생각이 들어서다. 선생님께서는 잘그리고 싶으면 즐기라고 하신다. 그래야 많이 그리고, 오래 그리고 해서 빨리 는다고 하셨다. 연습이 적은 사람이 생각하는 바는 똑같다. 실제로 하는 것보다 더 좋은 성과를 내는 것. 연습이 많은 사람은 자기가 연습한 만큼만 고대로 나와줘도 좋겠다고 하지만, 연습이 적은 사람은 괜한 욕심을 부려보는 거다.



옆 자리에 앉은 친구놈이 자식 자랑을 해댄데, 주말에 집에만 다녀오면 아들놈 사진을 찍어와서는 들여보다본다. 엄첨 귀엽다. 자랑할만큼. 하도 자랑을 헤대딜게, 그리고 또 귀여우니까 사진 몇장을 내게 넘기라고 했다. 핑계는 ‘아기도 그려봐야 하는데, 적당한 모델이 없다’이다. 사진을 넘기면서 그놈 하는 말이 ‘이상한 짓 하면 안돼.’ 그럴거다. 그놈 눈에는 내가 이상하지.

사진도 받았으니, 연습도 하고, 은혜도 갚아야지 해서 점심시간 1시간 동안 그려서 그놈에게 보여줬다. 작게 그리기에는 아쉬울만치 예쁜 놈이다. 작게 제대로 그릴 자신이 없다. 예전에도 아이를 그렸었는데, 아기의 특징이 잘 안나타나서 실제보다 훨씬 나이들게 그린 적이 있어서 시작부터 걱정이다. 세밀하게 그려야 할텐데... A4 사이즈도 안되는 종이로 연필로 잘 그릴 수 있을까 의심하면서도 할 수 있는 한 해보자였다.



역시나 다 그리고 나니 아기의 빵빵할 볼과 초롱초롱한 눈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5개월 조금 넘은 아이가 10개월쯤 된 아기가 되어버린 거다. 친구놈이 아기의 예쁜 눈이 제대로 안나왔다고 투덜댄다. 그럴만한다. 연필심 두껍다고 세부묘사 포기했으니, 반짝이는 눈이 반짝이게 나올리 없다.

같은 팀에 거의 같은 시기에 아기를 낳은 또 사람의 직원이 있는데, 그 직원의 자리에도 딸사진이 있다. 참 이쁘다. 다른 직원이 그 사진을 보고 ‘아기가 연구사님에게서 가장 예쁜 부분만을 뽑아서 모아서 만든 것 같아요.’라고 했다. 그렇다. 꼭 닮았다. 입술이 저렇게 이쁘게더 되는구나, 동글동글한 얼굴이 저렇게 귀엽게도 되는구나 하는 감탄이 나올 작품이다.
친구놈의 아기도 그렇다. 이쁜 것만 골라서 나온 것 같다. 친구놈은 그 아이가 누구를 닮았냐고 물었었다. 솔직히 친구놈은 닮지 않았다. 부인쪽을 닮았다. 그 친구놈은 미워도 그 놈의 새끼는 엄청 이쁘다. 친구놈은 자신을 닮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말하지만서도 그래도 자신을 닮았으면 하는 구석이 있을거다. 젖살이 있을 때와 그것이 빠지고 나면 아기 얼굴은 또 달리질테니, 엄마 아빠중 누구를 닮았느냐는 키우면서 더 지켜보라고 했다.

그 이쁜 아기를 내가 그림으로 망친거다. 가장 이쁜 부분만을 이쁘게 그려도 시원찮을 마당에 솜씨 없다는 이유로 귀여움이 싹 가시게 그림을 그렸다.
친구놈의 투덜대는 것에 화가난다. ‘난 지금 이것밖에 못그린단 말이다.’
그놈에게 화가 나는 것도 있고, 내 자신에게도 화가난다. ‘내가 연습 열심히 해서 꼭 잘그리고 만다. 누고보자 임마... 내가 꼭 이쁘게 그린다.’

모든 일을 마치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문득 낮에 있었던 그 생각이 났다. 자기의 이쁜 새끼인데 안이쁘게 그려지면 신경질이 나는 친구놈이 옳다. 그릴 때 주의할 일이다. 거울을 보면서도 자신을 더 이쁘게 보고 싶은 게 사람의 심정인데, 실제보다 더 예쁘게 보이게 싶어하는 심정인데, 이쁜 자기 새끼가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혹은 실물보다 안이쁘다면 속이 상하겠지. 그럴걸로 미뤄보아 내가 그릴려고 하는 타인의 ‘꿈’이나 ‘비전’은 어떤 면에서는 상상한 것 이상을 보여줘야 할 것 같다. 그림으로 꿈을 꾸게 만들려면 말이다. 한번 더 보게 싶게 만들어야 할 것같다. 아름답게 만들어서 마음을 홀릴 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래도 되는 것인가?

하여간 열심히 그려서 돌잔치 때 선물하나 해야겠다. 그럴러면 열나게 연습해야겠지.
아기 사진을 달라고 한 내죄가 크다.

<2008.7.5 토요일>
어제의 일도 있고 하니... 그림 그리기 빼먹으면 안되지.
한편으로는 이해하지만, 그래도 열이 뻗친다.
하여간 못 그리는 죄가 크다.

그림사진보고 그림그리기 지루하다. 일부러 화실에 있는 물건들을 배치해서 그걸 그리는 연습을 한다. 실물을 보는 것과 그림을 보는 것은 다르니까. 그림을 그린 화가의 눈으로 보고 싶은 면이 있기는 하지만, 작은 그림에는 그게 잘 안타나서 싫다. 터치도 없고, 작아서 색의 혼합도 잘 안 느껴진다. 또 투명한 것을 그리는 연습하고 싶은데... 그림보고는 그걸 잘 할 수가 없다. 그게 그렇게 실제 보이는지 의심이 간다. 내 눈으로 봐야 직성이 풀린 것 같다.



미술교실 책에서도 그랬다. 되도록이면 사진이나 그림보지 말고, 사물을 직접보고 그리라고. 우리가 연습하는 것이 화가처럼 관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토마토를 먹을 때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시각으로 보지만, 그릴 때는 다른 방식으로 본다고 하지 않던가.... 그걸 배우려고 하는 거니까.

와인병에는 수많은 색이 있다. 종이가 붙어서 만드는 그림자의 색과, 유리들이 다른 부분보다 조금 더 두꺼워서 나타나는 진한 색, 반사 때문에 나타나는 밝은 색, 큰 덩어리로 보다가 세부로 들어가면 자잘하게 많은 색들이 있다. 파스텔 색연필로 과연 그릴 수 있을까, 파스텔로는 혼합이 어려운데... 정말 많은 색이다. 그림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색이다. 이래서 직접 자기 눈으로 확인하라고 했나보다. 직접 보면서 눈에 보이는 많은 색들을 내가 가진 한정된 색과, 한정된 혼합으로 만들 궁리를 하게 될테니까.

형광등의 불빛은 흰색이 아니었다. 흰색으로 찍으려고 보니, 그 밑에 연두색 불빛(반사광)이 있다. 병의 곡선을 따라서 불빛이 있다. 병의 광택은 내 시야가 조금만 달라져도 다른 위치에 생겼다. 손을 뻗으면 왼손이 얻혀질 병의 왼쪽 어깨의 광택은 특히나 보였다 안보였다 했다. 다 그렸다고 사진을 찍어놓고, 정물의 실제사진을 찍을 때, 왼쪽 어깨의 광택이 유난히 크게 보였다. 왜이러지하고 카메라를 내려놓고 보니, 내 시선의 높이에 따라서 크게 광택이 나오기도 하고 작게 나오기도 했다. 나의 시선 높이와 병의 둥근 선을 따라서 크게 혹은 작게도 보이는 것이었다.



그림의 진도가 웬만큼 되었다고 생각되면 그때부터는 뭘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바탕을 전체를 칠해야 하는 건지, 세부적으로 더 다듬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여기에서 끝내야 하는 것이지. 이런 고민이 있을 때 엉뚱한 짓을 하게 된다. 머리 속에서는 그동안 줏어들었던 것들에 대한 검색이 활발하고, 장난꾸러기가 깨어서 움직인다. ‘바탕에 일부러 무늬를 집어 넣을까?’ ‘병을 더 튀어 나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거야?’ ‘얘 네들 색은 제대로 들어간 거니?’ ‘그림자 이걸로 구별이 되나?’

바탕에는 책상의 무늬를 조금 넣었다. 엷게. 바탕인 책상이 병과 사과보다 더 진하게 두드러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집중해야 할 대상은 그게 아니니까. 그 촘촘한 나이테 무늬를 일일이 다 그리고 싶지도 않았다. 벽도 그렇다. 벽이 너무 아름다우면 주인공인 와인병과 사과에 눈길이 안갈 것 아닌가. 핑계 치고는 괜찮다. 와하하.
사과와 병이 만드는 그림자는 좀더 풍성하게 하고 싶었다. 자세히 들어다보니, 그림자가 여러개의 불빛 덕분에 여러개가 겹쳐져 있고, 겹쳐진 부분에서 밝기의 변화 때문에 선이 보였다. 물체와 가까운 쪽의 그림자와 먼 쪽의 희미해진 그림자를 어떻게 하면 풍성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여지껏 칠하고 문지르면서 매끈하게 했으니 그림자는 선으로 거칠게 다루어 보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유쾌하게 장난을 쳤다.

깔끔한 마무리는 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 선이면 어느 정도 완성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연필을 놓았다. 화실이 마칠 시간도 다 되었다. 6시... 토요일 문닫는 시간이다. 한 장을 그리기에는 예전의 연습시간보다 아쉬운 시간이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그 시간안에 짧게 한 장 그린다고 시작한 것이니... 그 시간 안에서 놀았으니 되었다.

사진을 찍었다. 사진 찍으면서 그림 그릴 때는 못 보던 것들을 보았다. 와인병의 광택.
같은 사물을 봐도 달리 보는 것 때문에...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화실 동료들의 사진도 찍었다. 화실 동료들의 그림을 보면, 같은 그림을 보고 배껴 그렸는데도 조금씩 다르다. 사슴을 좀더 풍부하게 그리는 사람이 있나하면 뚜렷하지 않은 무늬가 엉킨 바위를 더 풍부하게 그린 사람도 있다. 여인을 섬세하게 그리는가 하면, 대비효과를 극렬히 내는 사람도 있다.


(화실 동료그림 사진1)
흑백으로만으로도 이렇게 나타낼 수 있다니 놀랍다.
묻고 싶다. 어느쪽이 더 나은 그림인지. 실제 그린 사람에게 물어볼까. ' 사슴을 이렇게 그렸어요?' '바위는 자세하게 그런 것 같지 않은데 이유가 있나요?'


(화실 동료그림 사진2)
처음 유화를 배울 때 연습하는 그림


(화실 동료그림 사진3)
내가 연습했던 것과는 분위가가 너무 다르다. 셈난다. 난 이렇게 자세하게 보이지도 않았는데... 대체 이 사람은 그걸 어떻게 본 걸까? 그림도 쪼끄마하던데... 어떻게... 이건 연출인가?


(화실 동료그림 사진4)
아기와 노인을 칼라로 그리면 이런 분위기인가.... 이 그림 그린 사람 여럿인데, 이걸 그린 사람의 그림성향은 어떨까?

IP *.72.15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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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gie
2008.07.07 08:57:50 *.193.194.22
그림을 그려본 사람이 해 준 말인데, 인물중에서 아가 얼굴 그리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왜냐. 아직 윤곽이 뚜렷하지 않아서 특징 잡아내는 것이 매우 힘들다고. 와인병의 투명함이 좋다. 어서 개이고 이렇게 투명한 날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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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7.07 11:49:48 *.36.210.11
솔직히 말하라면 할 수 있다. 과정 없이 결과 없을 것이고 욕심도 중요하지만 너그러움도 중요할 듯 싶다.

친구의 그림은 전체적으로 선이 부드럽고 살아있고 이해가 보인다.

그림이든 춤이든 글이든 자기 내면에 대한 탐색도 같이 기울여져야 하는 게 아닌가 나를 통해서 그리고 네 질문을 통해서 다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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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8.07.08 08:42:25 *.247.80.52
두명의 선이~ 항상 응원해 주어서 고마워요.

선이야... 친구놈의 아이가 개구리같더라. 개구리 왕눈이에 나오는 그 왕눈이 처럼 볼은 빵빵하고...

써니 언니.
언니는 계속 응원해 주는 군. 같이 길을 가는 사람.
난 어떻게 언니를 응원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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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8.11.24 10:53:14 *.247.80.52
나는 흰색에서의 그림자를 청색으로 보여도 보라색을 사용한다.
이번 그림에서는 무심코 혹은 보라색을 그랬을 텐데... 나중에 설경 그림에서도 그렇다. 나는 청색으로 보이는 부분에서 보라색을 많이 쓴다. 보라색에 대한 동경이 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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