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혜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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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이덕일에 관하여 >
역사학자, 작가, 언론인
1961년 10월 7일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읍(現 충청남도 아산시) 출신
숭실대학교 사학과 학사
숭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인문과학 석사
숭실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주의계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연구 논문인 '동북항일연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8년부터 사단법인 한가람문화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면서 활발한 연구, 저술, 대외 활동을 하고 있다.
저자는 <사도세자의 고백>에서 똑똑한 사도세자가 노론의 모함에 죽임을 당했고, 영조는 성군이 아니라 형과 아들을 죽인 폭군으로 규정해 기존 역사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통해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세력을 주자학을 앞세워 자주적인 임금을 독살하고 조선을 사대주의 나라로 전락시킨 주범으로 지목했다. 특히 그는 일제에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76명 중 80%인 57명이 노론 출신이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친일사관의 뿌리는 바로 이 노론사관이라고 주장했다. “나라를 집단적으로 팔아먹은 노론 당수가 바로 이완용이다. 일제 시대 발행된 <조선귀족열전>에 보면 출신을 노론이라고 다 명시했다. 일진회 송병준은 자칭 노론이라고 썼다. 노론 중에서 우당 이회영, 이상설 계열이 소론으로 갈라져 독립운동을 한 세력이다. 이상룡을 비롯한 남인계열도 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한다. 일제는 상놈만 독립운동을 하고 양반은 안 했다고 했는데, 이게 바로 노론적 관점이다. 노론의 친명 사대주의가 친일 사대주의로 이어진 것이다.”고 줄기차게 주장한다.
또 저자는 더 나아가 기존 학계를 노론·친일 사학이 장악했다고 주장한다. 기존 학계와 다른 주장을 펴면 무조건 사이비로 몰아붙인다는 얘기다. 또 중요한 건 사료 자체가 아니라 사료를 인용할 때 충분한 사료 비판 과정을 거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역사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다보니 일본에서 인정하는 한일 고대사 전문가라는 (한겨레 21) 김현구 (72) 고려대 역사교육과 명예교수에 의한 소송에 휘말렸고, 승소한 적이 있다.
이는 식민사관을 비판하고 한사군이 한반도가 아닌 현재 중국의 영토에 있었다고 주장해 학계에 논란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많은 부분에서 기존 역사학계와 다른 시각에서 우리나라 역사를 바라보고 해석한다. 2008년 조만식 숭실언론인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이덕일의 여인열전》, 《이덕일의 세상을 바꾼 여인들》.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우리역사의 수수께끼 1,2,3권》,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2권》,《조선 왕 독살사건》, 《사도세자의 고백》, 《누가 조선왕을 죽였는가》, 《조선 최대 갑부 역관》,《한국사로 읽는 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 (김춘추에서 노무현까지)》, 《조선 선비 살해사건 1,2권》,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
《유성룡》, 《살아있는 한국사 1,2,3권》, 《오국사기 1,2,3권》, 《침묵과 왜곡 속에 숨겨진 이야기》, 《성학십도·동국십팔선정》,《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1,2권》, 《정약용 선생님 다산 천자문 1,2,3권》, 《근대를 말하다》.《윤휴와 침묵의 제국》, 《우리 안의 식민사관》, 《조선 왕을 말하다 1,2권》 《이덕일의 고금통의 1,2》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 《한국 독립전쟁사의 재조명》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등 50여권 이상의 역사 비평서를 집필했다.
< 내 마음을 무찔러든 글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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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는 알량한 경험이 밑천의 전부인 그런 지도자가 아니다. 독서와 사색을 통해 한 사회의 문제점을 찾고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는 지식형 지도자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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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만 앞세우는 골목대장들이 득실댄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국가의 이익으로 포장해 사회를 갈가리 찢는 것을 정치로 착각한다.
못난 백성은 이 장단에 맞추어 서로를 적으로 여겨 싸우기 여념 없다. 그러니 세상은 온통 절망과 증오로 넘쳐난다.
---서로를 적으로 여기게 만든 주체가 있다. 못난 백성이라는 표현이 거슬린다. 못난 사람이라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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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은 노비들도 공을 세우면 자유민이 될 수 있고, 벼슬도 할 수 있는 면천법을 만들었다.
양반 사대부들이 내팽개친 대동법에 정치 생명을 건 잠곡 김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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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 출신이면서도 양반 사대부들의 숱한 반대를 꺾고 면천법을 만들었던 류성룡, 폐기된 대동법을 살려낸 김육, 이순신, 신분제 해체를 주장했던 윤휴 이런 사람들이 우리 역사에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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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망국을 맞은 요인 중 큰 것 두 가지만 말하면 하나는 시대 흐름에 역행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재 발탁에 실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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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은 나라를 되찾으려 동분서주하다가 1917년 망명지에서 천추의 한을 품고 쓸쓸히 순국한 반면, 을사오적은 계속 떵떵거리며 살다가 망국 후 일제로부터 자작, 백작의 작위를 받았다. 매국의 대가로 막대한 은사금도 손에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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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보다는 미래를 지향하고 병역 면제 부동산 투기 위장 전입등이 기본 스펙인 사람들 대신 보통 사람들이 긍정할 만한 인생을 산 사람들을 발탁한다면 설령 지금까지 다소 부진했다 하더라도 향후 오히려 약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의병장이었던 배용길이 인용한 대학전의 말처럼 선한 사람을 보고도 등용하지 않고 선하지 않은 사람을 보고도 멀리하지 않는 거만한 행태를 계속한다면 그 미래는 보지 않아도 훤하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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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병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가? 절반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는데 사실인가? 이것이 선조가 조선을 버리고 도주하려 했던 근본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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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은 임란 때 속오군을 조직했다. 양반과 양인들을 모아서 조직한 군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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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이 지배층이 더 많은 의무를 지고 부자가 더 많은 세금을 납부해야 하는 평범한 상식과 반대로 가서 발생한 인과응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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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신분제의 질곡에 시달리던 노비들은 임금 일행이 도주하자 대궐에 난입해 노비 문서에 불을 지른 것이다. 나아가 노비들은 일본군에 적극 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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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7년 전쟁을 진두지휘한 류성룡은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포상은커녕 파직 당했다. 각종 신분제로 백성을 옭아맸던 나라가 위기에 무너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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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원 대다수가 자신과 회사, 사회에 대한 자존감을 가질 때 개인과 회사 사회가 동시에 발전할 수 있다. 조선이 끝내 총 한 방 제대로 쏴보지도 못하고 망했던 근본 이유가 구성원들에게 ‘내 나라’라는 귀속감을 주지 못한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의병들, 독립 운동가들, 개혁가들을 생각해 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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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고종 8년 모든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받는 호포법을 강행했다. 대원군의 개혁정치는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조선을 구하기 위한 정면 승부였다. 그러나 대원군 식 개혁의 문제는 성리학적 질서의 회복이라는 복고를 목표로 삼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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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의 실패는 개혁에서 방향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말해준다. 역사상 퇴행적인 개혁이 성공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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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면서 몰래 팔고 간 무기들이 독립군 소유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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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은 무기를 목숨처럼 소중하게 다루면서 탄약 한 발도 아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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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군에게 주는 무기는 국내의 동포들이 피와 땀을 모아서 마련한 것이며 ...이 무기는 국내 동포들이 주는 것이며...무기를 생명같이 사랑하여 일 발의 탄환이라도 헛되게 쓰지 말고 1탄에 왜적 1명씩 잡기로 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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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한국군이 독립군의 정신을 계승했다면 군수 비리 따위는 저지를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독립군들 사이에서는 훈련 강도는 셌지만 구타 따위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독립군의 정신으로 군을 재무장하지 않으면 이런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 터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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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결정은 조선을 전화에서 벗어나게 하는 탁월한 전략이었다. 폐모라는 소모적 정쟁에는 목숨 걸고 싸우던 당파들이었지만 국익에 반할뿐더러 자칫 조선을 전화의 위기로 몰고 갈 조명군 파견에는 모든 당파가 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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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장수 마부대는 황제께서는 여러 왕자들과 매번 ‘조선은 아녀자의 나라인데 무엇을 믿고 저러는가라고 늘 웃으신다’ 라고 조롱할 정도로 조선 사대부들의 숭명 노선은 현실 정세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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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광해군의 길을 걸을 것인가 인조의 길을 걸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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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을 죽이고 부친을 내쫓은 이세민은 어떻게 중국 최고의 군주가 될 수 있었을까
한 마디로 쓴 소리가 주특기인 정적들을 포용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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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전 상승 장군이라고도 불렸던 당 태종의 유일한 패배는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연개소문에게 패한 것인데 이때는 위징이 사망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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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모 사건 이후 단독 정권을 수립한 대북은 서인들 대다수가 가담한 인조반정의 낌새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무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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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왕의 하루는 파루와 함께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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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성종 정조 등 경연에 열심이었던 임금들이 대부분 성공한 임금이란 점이다. 그만큼 성공한 국왕의 필수조건이 지식경영이라는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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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를 익히는 이유는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받는 요순 같은 임금이 되기 위해서였다. 이 정도로 노력해야 준비된 임금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요즘처럼 아무에게나 준비된 대통령 따위의 말들을 붙이는 것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난다.
조회 늦을까 침실 근처에 닭 기른 정조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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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초인적 의지로 국정을 수행하던 정조가 정작 강조한 것은 자기 반성이었다. 정조와 규장각 신하들이 편찬한 국왕의 일기가 일성록이다. 공자의 제자 증자의 일일삼성은 남을 위해서 일하는데 정성을 다했는가? 벗들과 사귀는 데 신의를 다했는가? 배운 가르침을 실천했는가? 라는 것이다. 국왕의 일상에는 늘 승지와 사관이 함께 했다. 임금은 숨기는 것이 없음을 보이고 모범과 감계를 밝히려는 이유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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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 내쫓은 양반들, 병역 면제 성역 되다
조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법치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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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득권 앞세우기 급급했던 양반 사대부, 망국을 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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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발언하면 다른 모든 것은 침묵한다’ 김영란 법을 만든 당사자인 국회의원들은 정작 이 대상에서 빠져나가 비판을 자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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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의 본질은 숭명사대와 폐모를 구실삼아 정권을 탈취한 서인의 대북에 대한 무자비한 정치 보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직도 극도의 사대주의와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정당에 대한 가혹한 공격과 탄압이 끊이지 않고 있는 이 땅의 정치 현실에 인조반정은 큰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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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백성들 위에 군림하게 되면서 생기는 중요한 문제는 크게 두 가지다. 조세 형평성의 문제와 세금 징수 관리들의 부패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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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에 가득 찬 벼슬아치 대다수가 광대한 농지를 소유한 양반 사대부들이었기 때문에 대동법의 확대 실시는 쉽지 않았다. 양반 사대부들에게도 당연히 군역의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양반 사대부들은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군역을 회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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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외면하고 가난한 서민들에게 증세하려니 SNS에 ‘새가 날아든다 온갖 잡새가 날아든다’는 세금 별곡이 떠돌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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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에 나경언에 대해 사람됨이 불량하고 남을 잘 꾀어냈다고 전하고 있고, 대궐에 하인으로 있던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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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통공 하루 만에 물가가 반으로 뚝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조선의 상업질서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킨 혁명적인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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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노론은 남인들을 절멸시키고 다시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노론 일당 독재는 정조 사후 노론 소수 벌열이 정권을 독차지 하는 세도 정치로 퇴행했고..
---작금의 정치와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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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은 모두 노론이었다. 권중현, 박재순, 이근택, 이완용, 이지용
이완용이 마지막 노론 당수인 데서 알 수 있듯이 노론은 당론으로 나라까지 팔아먹었다. 정치공작으로 다른 당을 절멸시킨 노론 일당 독재가 결국 나라까지 팔아먹는 극단으로 치달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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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미국과 영국이 일본과 싸워서 한국을 독립시켜줄 것이라는 생각은 그야말로 순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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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은 외교로 시작해서 혈전으로 마치는 것으로서 이는 특별히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더라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라고 답했다. 외교독립론은 선택한 임정의 노선을 직접 비판하지 않으면서도 독립은 혈전으로 마친다는 무장투쟁론의 방침을 전명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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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입었던 사대주의라는 작은 옷을 성인이 되어서도 입고 있으니 우스꽝스러운 모양새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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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친 인척 관리를 가장 잘한 임금은 태종 이방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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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의 신문고로 불법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은 이들을 내쳤고 끝내 사형시켰다. 백성들이 태종에게 보답한 것이 태종우 고사였다. 태종은 공신들이 이익과 백성들의 이익이 충돌할 때 백성들의 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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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권력은 내부에 다툼이 있게 마련이다. 권력투쟁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조직이 나아갈 방향을 둘러싼 다툼은 필요하다. 바람직한 미래를 둘러싼 다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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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 인물들은 앙녕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불법도 서슴치 않았다. 태종은 양녕을 쫓아내기 얼마 전인 재위 15년에 잡인들이 들락거린다는 말을 듣고 이래와 변계량 등을 불러 ‘경들은 무엇을 꺼려 세자를 바른 길로 보도하지 못하는가’ 라고 꾸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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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은 18년 동안 호랑이를 탔으니 이미 족하다 며 권력을 호랑이등에 탄 것으로 여겼기에 자신과 집안 그리고 국가의 마래를 위한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최소한 권력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는 권력의 공적 개념 정도는 갖고 운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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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은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남을 도우려다 도리어 벌을 받는 것보다 더 큰 화는 없으며, 마음이 상심한 것보다 더 괴로운 고통은 없으며, 선조를 욕되게 하는 것보다 더 추한 행동은 없으며, 궁형을 받는 것보다 더 큰 치욕은 없다’고 한탄했지만 살아남아 사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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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가 지정 기록물 지정 권한을 중립성이 보완되는 객관적인 기구를 설치해 맡기지 않고 대통령 자신에게 준 것은 큰 실책이다. 조선의 실록은 국왕도 보지 못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를 두고 있었는데 대한민국의 지정 기록물 제도에서는 30년 동안 대통령 자신만 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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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는 미완의 개혁 과제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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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의 목적이 왕권 강화에 있었다면 조광조의 목적은 성리학적 사회의 수립에 있었으므로 동상이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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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구세력의 전횡에 시달리던 백성은 조광조를 주인으로 여겼다.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은 학문으로 쌓은 정당성을 목숨을 걸고 실천했다. 그래서 백성은 조광조의 정치를 자신들의 것으로 여겼다. 이것이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이 현실에서는 패배했어도 역사에서는 승리한 근본원인이었다. 현실에서는 패배자의 길이었지만 그 길이 정당하면 역사에서는 승자가 된다는 사실을 조광조는 온 몸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지금 야당에는 손톱만큼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계산법만 난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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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의 자질은 위기 때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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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을 죽이려는 왕, 이순신을 지킨 재상. 이 순신을 천거해서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삼은 당사자도 류성룡이었다. 그런데 이순신이 연전연승하면서 백성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떠오르자 선조는 이순신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유부승지 김흥미에게 내린 비망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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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익은 이순신 같은 공신을 죽이면 나라가 망한다는 생각에 이 문제에서는 시종일관 이순신을 옹호했다. 류성룡은 혁명에 가까운 개혁이 아니면 망한 나라를 살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는 양반 사대부의 기득권을 타파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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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를 천거하고 보호하며 핵심 정책을 장기적으로 입안하고 유 불리를 따지지 않고 실천할 수 있는 참 재상감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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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상의 자유를 억압했던 중심세력은 이미 망한 명나라의 연호를 고집했던 극도의 친명 사대주의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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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주자와 다른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주륙을 당할 것이라는 지경이니 이런 상황에서 자신과 다른 사상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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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학자들은 양반들의 기득권을 독점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주자를 신으로 떠받들었다.
지금 우리 사회도 1950년대로 되돌리려는 세력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과거, 그것도 닫힌 과거를 지향했던 정권이나 사회치고 성공한 사회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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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학을 직접 비판한 학문은 양명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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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인생과 세상의 본질을 고민하다보니 주자의 시각에서 벗어나 양명학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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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주자학 이외의 모든 사상을 이단으로 몰아가던 유일사상의 시대였다. 공론의 결정은 옳고 그름에 달린 것이지 세력의 강하고 약한 것으로 정할 것이 아닙니다.
168
조선은 벼슬아치들의 부정부패를 강력하게 처벌한 국가였다. 공직자의 부정부패 처벌은 당대에 끝나지 않고 그 후손들의 벼슬길까지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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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조선이 벼슬아치들에게 채찍만 휘둘렀던 것은 아니다. 장리안에 이름을 적어 자자손손 벼슬길을 막는 것이 ‘채찍’이라면 청백리에 녹선하는 것이 ‘당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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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날 우리 사회는 청백리 성향의 전문가보다는 장리안에 기록되면 딱 알맞을 비전문가들을 주로 들어 쓰는 게 현실이다. 숱한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잇단 낙하산에, 각종 0피아로 얼룩진 현재의 우리 사회 상황을 조선 시대의 판서 이익이 본다면 무어라 한탄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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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간은 또한 대신은 물론 임금에게도 모든 정사 현안에 대해 옳고 그름을 시비할 수 있는 간쟁권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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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림은 집권 후 자신들이 야당 시절 주창했던 개혁의 길을 가기보다 자신들이 맞서 싸웠던 훈구의 길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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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종희는 신하란 무릇 군주 개인을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천하 만민을 위해서 벼슬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동법의 경세가로 불리는 김육. 그는 대동법을 실시하려면 나를 쓰고, 그렇지 않을 거면 쓰지 마시오 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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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육이 세상을 떠나자 효종은 ‘국사를 맡아서 김육처럼 굳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라고 탄식했다. 대동법은 대기근 극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육이라는 재상한 명의 소신이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낸 것이다.
188
인사가 국사에 가장 중요하다는 ‘인사는 만사’라는 사상의 반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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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는 탕평을 내세웠으면서도 속으로는 그 자신이 편당심을 버리지 못하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노론만을 중용했다. 인상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국왕의 탕평심인데 영조에게는 이것이 부족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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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을 발탁하는 것도 능력은 있지만 줄이 없어서 적체된 인사들이 아니라 정권에 줄 대는 것이 유일한 능력인 인물들만 골라서 발탁하니 고위공직 자체가 희화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하자가 없으면 고위 공직을 할 수 없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이니 공직의 권위가 얼마나 추락했는지 짐작이 간다.
숨어 있는 인재를 발탁할 능력이 없으면 조선처럼 시스템에 의지한 인사를 하는 것이 그나마 나라의 체면을 조금은 유지할 수 있는 방도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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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자기 중신적인 성향이 강한 인물로서 정상적인 판단 능력이 부족했고 또 당쟁을 왕권 강화에 이용했다. 그 결과 왕권은 일부 강해졌는지 몰라도 국사는 엉망이 되고 사방에서 도적이 날뛰었던 것이다.
200
한탄 노비 소송에 임금을 연루시키는 법이 어디 있는가 라고 불같이 화를 냈다. 문제가 있으면 국가의 공식 조직을 통해 해결해야지 사적 로비를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201
이 순신 전사, 선조는 울지 않았다.
노론, 쿠데타 위해 경종에게 후사 다그쳐
경종 독살설 이어 사도세자 죽음 이어져
선조의 눈물은 자신만을 위한 ‘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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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가 못 나면 백성이 눈물을 흘리게 되어 있다. 선조가 도망갈 생각을 내비치자 대신 이하 모두가 눈물을 흘리면서 부당함을 극언하였다.
206
백성들은 이 비운의 영웅의 고통을 자신들의 것으로 일체화시켰다.
이순신의 노량해전 전사하자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선조실록. 그러나 선조는 예외였다.
207
지금 툭하면 눈물을 쏟는 정치인들은 왜 국민이 함께 울지 않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국민은 울지 않는데 혼자 우는 눈물은 부끄러운 눈물일 수 밖에 없다.
209
노론은 경종을 끌어내릴 여러 방책을 마련했는데 이 계획에 청나라까지 동원했다.
노론은 끝까지 청나라를 부인하고 이미 망한 명나라를 임금의 나라로 섬기던 정당인데 왜 자신들의 정체성까지 부인하면서 청나라고관들에게 뇌물을 주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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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이천해는 24번의 압슬형을 받았으나 아프다는 소리도 하지 않고 죽었는데 이천해의 말도 경종 독살설과 관련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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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말과 달리 이후에도 노론의 당론을 선택했고 그 결과는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사상 초유의 비극으로 나타났다. 이 모두가 헌정 질서를 무시한 택군이 낳은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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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검찰의 이미지는 민초들 앞에서는 추상같이 엄하면서도 권력 앞에서는 양같이 순하다는 데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216
대간의 자기 처신도 이에 못지 않았다. 조정 회의 때 먼저 들어가고 회의가 끝나면 다른 관료들이 모두 나간 후에 따로 나가는 것이 전통이었다. 다른 관료들과 어울려서 회의에 드나드는 동안에 청탁을 받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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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추상 같은 권력은 가난과 동의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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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는 석담 일기에서 ‘조광조가 백성들의 신망을 받은 이유에 대해 대사헌 조광조가 법을 공정하게 시행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동해서 매양 저자에 나가면 사람들이 모여들어 말 앞에 엎드려 ’우리 상전 오셨다‘ 라고 말했다’ 고 회고했다.
검찰이 지금처럼 처신하는 한 수사권 독점은 성역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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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승지는 아뢰면 밖으로는 남과 원한을 맺는 일이 많고 위로는 성상의 위엄을 범하는 일이 많아 매우 황공합니다만 말하지 않으면 일신에 죄가 있을 분만 아니라 조정을 더럽히고 욕되게 하는 지경에 이를 것이므로 감히 아뢰는 것입니다- 고봉집
이것이 바로 지근거리에서 임금을 보좌하는 승지들의 자세였다.
윤국형, 왕자들 횡포 지적하고 좌천당하다
227
성공한 임금들은 쓴 소리를 하는 승지를 마다하지 않은 반면 용렬한 군주들은 쓴 소리하는 승지들을 싫어했다.
228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역대 청와대 비서실 비서진 중에서 기대승이나 김덕함, 윤국형같은 처신을 한 인물들을 찾을 수 있을까. 내시 식 처신을 하는 사람들이 득세를 하니 청와대 비서관을 사칭하는 사건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는 왜 그리도 종은 많고 사우는 찾기 힘든 것일까.
241
공작정치에 물든 사대부들, 정상적 정치는 실종되다
242
정치공작이라는 후진적 정치 행태를 근절시키고 문명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치 시스템으로 복원시킬 의무는 집권 세력에게 있다.
248
명나라는 임진왜란 후 조선을 구해줬다는 명목으로 이전과는 달리 왕위 계승 분제까지 직접 관여하는 등 조선을 지배하려는 뜻을 노골화했다.
255
광복군은 3개 지대를 빠른 시일 내에 3개 사단으로 발전시켜 연합군의 교전단체로 참가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258
조선 후기 당쟁은 서인 대 남인의 대결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은 상복 착용 기간을 두고 조정 대신들이 싸운 것을 두고 폄하하기도 했지만 이는 조선의 전통을 비하하기 위한 비난에 불과했다.
265
조선이 선택했던 조공 외교란 게 있다. 이는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세계 질서 시스템으로서 이 경우 조선은 내용적으로는 독립국이지만 형식적으로는 제후국 형태를 취한다. 조공 시스템은 조공이 있으면 사여가 있다는 것으로서 조공을 받은 대국은 사여를 내리는데 사여품이 조공품보다 많은 것이 원칙이었다.
270
마음속으로는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는다던 노론은 자국의 임금을 내쫓기 위해서 청나라 요로에 막대한 뇌물까지 뿌렸다. 조선 초기 태종의 사대외교가 평화를 유지하기위한 수단이었다면 조선 후기 노론의 사대주의는 당익과 사익을 위한 명분론에 불과했다.
지금 대한민국 외교가 국민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는 근본 원인은 국익과 특정 집단의 이익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272
조선 시대 의정부의 정승이 세 명인 것은 고대 청동 솥이었던 정의 발이 셋인 데서 딴 것으로 균형을 잡기 위한 것이었다.
274
세종의 ‘윗 몸은 성하고 아랫몸이 허한데 이는 과로 때문’이라고 말할 정도로 과중한 업무에 시달렸다. 황희는 재상의 자리에 20여년 간 있으면서 지론이 너그럽고 후한 데다 분경을 좋아하지 않고 나라 사람들을 잘 진정시키니 당시 사람들이 진정한 재상이라고 불렀다.
황희는 재상의 자리에 20여 년간 있으면서 지론이 너그럽고 후한 데다 분경을 좋아하지 않고 나라 사람들을 잘 진정시키니 당시 사람들이 진정한 재상이라고 불렸다고 말할 정도로 황희는 임금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았다.
275
황희는 이는 내가 김종서를 옥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로 라면서 김종서는 성격이 강하고 날카로워서 일을 과감하게 하니 훗날 우리 자리에 앉아서 일을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그르칠 염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나중에 황희가 자신의 자리에 김종서를 추천했다고 지소록은 전한다.
277
왕조 국가에서도 정승들은 임금 개인의 사신처럼 행동하지는 않았다. 임금의 私臣이 아니라 국신 즉 나라의 신하라는 것이었다.
278
정권의 입맛이 아니라 국민들 눈높이에 맞는 인재를 지명해서 여러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지위의 권위가 되살아나기 바란다. 사람 찾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사람을 외면하기 때문에 인사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279
나라 무사하다면 어찌 몸 하나를 아끼겠는가
281
마부대가 임경업에게 청나라 황제께서 ‘조선은 아녀자의 나라인데 무엇을 믿고 저러는가라고 말하면서 웃는다’ 고 조롱할 정도로 척화는 비현실적이었다.
284
반대파도 칭찬한 정승의 일생
285
반청 인사로 몰려 죽음 문턱까지 여러 번 갔다 온 이경석을 청나라로부터 곤욕을 치른 적이 없는 송시열이 공격하는 것은 모순이었다. ‘집안에서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조정에서는 청렴 검소하였다. 아랫 관리에게도 겸공하였고 옛 친구들에게 돈독하였다. 수상으로서 앞장서서 일을 맡아 먼 변방에 유배되었으므로 사론이 대단하게 여겼다’ 라는 졸기가 그의 일생을 대변한다.
현재 대한민국에 필요한 총리는 이경석 같은 인물이다. 이 경석이 왕조와 명운을 같이하면서 국정에 무한 책임을 진 것처럼 국정에 무한 책임을 지는 총리가 필요한 것이다.
대통령이 부리기 편한 총리란 그동안 여러 차례 목도한 것처럼 장삼이사만도 못한 도덕성에 개인의 출세만을 인생의 목표로 여기는 인물들일 것이다.
287
류성룡은 이런 장치를 잘 이용한 인물이었고, 충무공 이순신을 발탁하여 조선을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구해냈다.
288
강가의 낚시꾼도 성을 쌓는 인부도 인재다.
291
류성룡의 이순신 천거가 임란의 전세를 바꿔놓았을 만큼 인재 천거는 국사의 요체였다.
292
징비록에서 이순신을 천거한 사람은 나이므로 나와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들은 원균과 합세하여 이순신을 몹시 공격했다고 적고 있는데 임금이 인재를 신뢰하기는커녕 시기심으로 죽이려고 했으니 그때 조선이 멸망하지 않은 것 자체가 하늘의 도움이었다.
293
어린 학생들이 그런 처신을 따라 배울까 두려운 사람들만 고위직에 올라 청문회 자리에서 쩔쩔매거나 배 째라는 식으로 맞대응하니 국가 기강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그릇된 인물을 천거한 사람도 처벌하는 것으로 재발 방지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294
군인 이순신에게 가장 큰 불행은 선조 같은 용렬한 인물이 생사여탈권을 쥔 군통수권자였다는 점이다. 선조에게는 君의 엄격함도 父의 자애로움도 부족했다. 오히려 능력 있는 아랫사람을 시기하는 옹졸한 모습을 보였다.
297
수군 해체 명령한 선조, 피를 토하듯 반대한 이순신
300
전승축하연에서 도고 헤이하치로는 ‘나를 영국의 넬슨에 비유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이순신 제독에 비유하는 것은 감히 받아들일 수 없다’ 고 사양했다. 자신과 넬슨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전투에 나갔지만 이순신은 음해하는 세력이 숱한 상황에서도 승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일본 해군까지 신으로 모시는 이순신의 후예를 자처하는 오늘날 대한민국 해군의 상황은 길 잃은 난파선을 보는 듯하다.
303
왕좌를 빼앗긴 단종의 쓰라린 심정은 안중에도 없이 흥이 무르익자 세조까지 일어나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305
이 연회 장면은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 정권의 자기파탄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309
대통령 중심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수준이 떨어지는 인물이 대통령이나 국왕이 되었을 때 제어 장치가 없다는 점이다.
311
검소함은 제왕의 미덕이지만 임금에게는 그보다 중요한 덕목이 있다. 새로운 어젠다를 제시하고 그 방향으로 사회를 이끌고 가는 능력이다.
316
현 정권도 마찬가지다. 이제 한국 사회는 그 누구도 1970년대로 다시 끌고 갈 수 없다.
우리 사회가 엄청나게 변했고 엄청나게 발전했다. 이 평범한 사실을 인정하고 대선 공약처럼 대통합의 길을 걷는 것만이 예견된 실패를 막는 유일한 길임을 역사는 말해준다.
317
비명에 간 부친에 대한 정조의 한은 이처럼 극심했다. 그 한은 부친을 죽인 노론 벽파와 배일같이 얼굴을 맞대고 정치를 해야 한다는 현실 때문에 배가 되었다.
320
정조는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이란 정체성을 분명히 했지만 이를 빌미로 14년 전인 과거로 돌아가겠다는 과거 지향의 정치를 하지는 않았다.
대리청정하는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독단의 정치, 증오의 정치로는 미래로 갈 수 없다고 여겼다.
--작금의 문 정권은 극에 달한 독단과 증오정치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의 미래가 걱정된다.
322
이 때 정조는 수원 화성 축성에는 단 한 사람의 억울한 백성도 없게 하겠다고 선언했다. 수원화성 축성에는 단 한 사람도 강제 부역을 시키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324
정조는 조선에서 성공한 마지막 임금이었다. 그의 시대에는 미래가 있었고 그래서 희망이 있었다. 미래대신 과거를 지향하는 정권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은 수도 없이 검증된 역사적 사실이다. 미래 지향의 정치는 힘들고 과거 지향의 정치는 쉽다. 정조의 지난했던 삶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비극적 교훈이다.
< 내가 저자라면 >
이 책은 대체로 글의 앞부분에 저자의 결론이나 결론에 가까운 글을 먼저 써놓고, 그 글을 뒷받침하는 인용을 역사서에서 찾아,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 후, 글의 결론 부분에서는 현실에서의 적용을 권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책 전체에는 머리말에도 나와 있듯이 ‘답은 언제나 역사에 있다’는 저자의 확고한 인식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현실에서의 꼬인 문제의 해결책을 역사에서 찾아보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드 배치 문제에 후금과 명나라의 관계를 참고하여 중국과 미국의 관계를 생각해보고 거기에 저자의 생각을 넣어 놓는 식이다.
총 325페이지에 42개의 글로 구성되어 있고 참고도서로는 역사학자답게 62권의 사료와 단 5권의 단행본이 있다. 62권의 사료에는 감찰청벽기, 사가집비, 기재잡기문소만록, 존현각일기, 죽창한화, 책중일록, 송화잡설, 명이대방록 등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저자의 글을 따라 읽다보면 그 시대로 돌아가 같이 흥분하고 답답해 하기도 하고, 새로 알게 된 일들도 있었다.
그러나 <칼날 위의 역사>란 제목이 말해주듯이 책 속에는 칼날 같은 글도 종종 있었다. 저자의 ‘자유란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을 허용하고, 또 그렇게 말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뜻이다.’ 란 말에 의거해볼만한 문장이 곳곳에 있었다.
예를 들어 44쪽에 ‘이명박 정부가 실패한 정권이 되었던 핵심 이유는 과거 지향적이었다는 데 있다.’는 문장을 보면 한 사람의 학자가,
아주 칼같이 말하자면 일개 학자가 한 정권의 실패여부를 단정 지을 수 있는가 란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그 과거 지향적이었다는 근거가 무엇인지 써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적폐청산을 한다며 과거에 매달리고, 우리를 무시하고 공격했던 중국에 그 옛날 사대주의처럼 눈치를 보는 듯한 문 정권 역시 이미 실패한 정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235쪽의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놓고 ‘과거 왕조 체제에서도 정당은 엄연히 존재했다’고 하는데 현재는 현재의 법으로서 해결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또 44쪽 말미에 ‘형식적 민주주의를 달성한 현 사회에서 성공한 정권이 되기 위한 길은 갑질이 성행하는 한국의 사회구조를 乙 중심으로 바꾸는 내용적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길일 것이다’ 는 글이다. 사회 전체를 갑과 을로 양분하는 일은 통합을 저해한다.
갑질은 대체로 인격의 문제로 나타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또 때로는 상황에 따라 갑과 을이 바뀌기 때문이기도 하다.
도대체 갑은 누구이며 을은 누구인가.
또 52쪽에 ‘일본군의 폐습이 남아서 이런 일(군수비리)이 발생하는 것이다’. 라는 글은 도무지 인정할 수 없었다.
부정직하고 비도덕적인 자들의 소행이지 제 잘못까지 일본의 탓으로 돌리는 저자에 대해서는 적이 실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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