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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6일 11시 21분 등록
나는 작년 말부터 돌멩이가 돌멩이로 보이지 않았다. 박경리의 <문학을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라는 책을 읽은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창조로서의 구성을 이야기하며 길가에 뒹굴고 있는 돌은 그냥 뒹굴고 있는 것 같지만 작가라면그것을 무심하게 배치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풍경은 필연적인 것이며 사람의 마음과 사건과 상황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다 함께 삶을 연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읽은 책이 우연하게도 <홍루몽>이었는데, 이건 풍경으로서 배치된 돌멩이가 아니라 아예 돌멩이가 주인공이었다. 동식물과 달리 돌멩이라는 무기물이 품을 수 있는 시공간의 스케일은 엄청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꿈 속의 꿈 이야기로 홍루몽은 시공간에 차원이 더해진 스케일의 소설이었다. 돌 하나에서 이러한 이야기가 창조될 수 있음에 놀라워하며 명상의 대상으로서 나의 돌을 가져야겠다 생각했고 문득 애완돌이라는 단어가 연상되어 검색을 했다. 놀랍게도 실제로 펫스톤(pet stone)’이라 하여 애완돌이 판매되고 있었다. 이건 무슨 현상일까. 그리고 칼 융의 자서전을 읽으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단지 우연일까.

 

돌멩이를 갖고 놀던 어린 융

많은 아이들이 돌을 갖고 놀았겠지만 융처럼 바위 위에 앉아 있는 것이 나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앉아 있는 바위가 나일까?”라는 생각을 하는 아이는 과연 몇일까? 더불어 융의 남다른 기억력은 단순히 기억력이 뛰어난 탓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깊은 내면의 자기자아와 만나기 위해 무의식을 뚫고 나오는 것이 남들보다 더 강한 까닭 아니었을까. 또한 타고난 내향적 감수성은 무의식으로 가라 앉은 기억을 의식 위로 떠오르게 하는 것을 수월하게 하지 않았을까. 돌에 대한 그의 애착은 깊은 내면에 있는 오래된 누군가에 대한 탐구가 수천 년의 세월을 품고 있는 바위에 투사가 된 까닭 아닐까. 영원을 품고 있는 바위처럼 내면에도 또 다른 나, 오래된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라는 그의 끈질긴 탐구는 자서전 프롤로그에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라고 쓸 수 있는 결실을 맺을 수 있게 한 게 아닐까. 유년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와 함께 한 을 살펴보는 과정은 그의 자기실현 건축과정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일 터다. 4를 완전한 숫자로 여겼던 그는 1923년부터 12년 간 4년마다의 증축을 통해 집을 완성한다. 이러한 증축은 그가 정신의 구조에 대해 이해하게 되는 것과 일치하여 일어났기에, 이 성탑은 융의 내면, 자아의 완성과정이라 할 수 있어 연도별로 정리해본다.

 

볼링겐 성탑으로 자기를 구현하다

어린 시절 바위 위에 앉아 자기의 존재를 어렴풋이나마 생각했던 융은 48세가 되던 1923년 취리히 호숫가 근처 볼링겐 마을에 집을 짓기 시작한다. 융은 물가에 살겠다는 생각을 어릴 적부터 해왔고 그에게 있어 물은 무의식으로 가는 통로를 상징한다. 처음에 지었던 집은 몽골의 게르(ger)같은 원시적인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융의 내향성을 반영하듯이 낮게 웅크린 모양이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품 속 같은 아늑한 느낌을 주는 인간의 원초적 감정에 어울리는 집 안에서 그는 깊은 휴식, 새로운 힘을 얻는다. 시기적으로 이 집은 육체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지어진  의식의 자궁과도 같은 공간으로 그에게 있어 정신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의미하기도 했다.

 

4년 후 1927년 성탑과 같이 생긴 중앙부가 덧붙여졌다. 그 과정에서 시체를 발견하는데 사실 시체의 존재는 그의 맏딸이 집을 짓기 시작한 1923년에 이미 감지한 바였다. 볼링겐 저택은 그렇게 죽은 자의 침묵과 더불어 죽은 자들과 소통하는 곳이자 융의 영적인 은신처였던 셈이다. 4년 후 1931,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생각한 그는 부속건물을 확장하여 혼자서만 있을 수 있는 방 하나를 마련한다. 반성과 상상력을 할 수 있는 공간. 영적인 단련을 위한 성소. 4년 후인 1935, 하늘과 자연을 향한 넓은 공간의 필요성을 느껴 호숫가에 뜰과 회상을 더 만들었다. 어떤 전기시설이나 급수시설도 없이 그 곳에 머물며 자연과 자신의 제 2인격과 접촉하며 살아간다

 

80세가 되던 1955, 융의 부인이 사망한다. 부인이 죽은 후 진정한 나 자신이 되어야겠다는 내적 책무를 느낀 그는 볼링겐에 있는 별장이 그의 자아를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음을 깨닫고 2층을 증축해야겠다는 자신감에 건물 한 층을 더 높이 세운다. 이는 주제넘은 자기 과장이 아닌 노년에 이루게 된 자아의 확장인 바, 조셉 캠벨의 표현대로 만개하는 노년의 시기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또는 ‘2층 증축은 노년에 생겨난 의식의 확장을 나타내는 것으로 자신의 자기성찰을 완성하고 죽음을 향해 나아감에 따라, '바위'에서 새로 태어나는 듯한 느낌을 표현한 것이라 볼 수도 있겠다. 1957년에 그가 쓴 저작물들은 아내가 죽은 (19551127일 사망)후에 돌을 다루던 작업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왜 이렇게 돌과의 애착이 형성되었을까? 아마도 돌이 품고 있는 무시간성으로 돌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오래된 자기인 죽은 자들과의 연결을 느끼며 마음의 평온을 찾은 것일까. 그에게 성탑의 완성은 자아의 완성이었다. 성탑에서 명상을 하며 몇 세기를 동시에 사는 듯 했고 끝없이 오가는 인생을 모든 각도에서 바라보며 그는 영원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게 시간을 초월한 엑스터시를 느꼈다는 표현에서는 시간을 거슬러 최초의 인류를 만나는 영화 <루시>의 장면이 오버랩 된다.


원시인의 돌, 현자의 돌, 융의 돌. 무덤 가에 비석에 새겨지는 글은 돌이 품고 있는 무시간성 또는 영원함에의 그리움이 아닐까. 융은 그렇게 돌 속에 가장 내밀한 생각들과 알게 된 지식들을 새겨 넣으며 내면의 무의식을 끄집어 내 영원한 돌에 새긴다. 1955-1956년 겨울 가족들의 족보도 아울러 석판에 새김으로써 그의 오래된 자기는 돌에 새겨져 영원히 존재하게 되었다.


lucy.jpg  


옮긴 이 서문자서전 문학의 백미

 

7 그 책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외국어 실력뿐만 아니라 그 분야에 소양이 있어야 하고 정확한 한글 문장을 구사할 줄 알아야 하며 융처럼 신에 대한 갈등 경험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바로 적임자라는 것이었다.

 

프롤로그 신화는 과학보다 정확하다

 

11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selbst: 인격의 가장 깊은 구심점) 실현의 역사다.

자아실현이 아니라 자기실현임에 주목. 자아=ego로 빛과 의식의 세계에 속해 있고, 자기=self로 어두움과 무의식의 세계에 속해 있다. ‘자기실현자아의 영웅여정 에 만날 수 있는 건가? 관문은 꿈이고?

 

나는 이와 같은 형성과정을 표현하기 위해 과학적인 용어를 사용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과학적인 문제로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물의 변화 원리는 언어가 아닌 괘상으로 표현되는 것일까? 상징,기호는 언어보다 더 많은 뜻을 담을 수 있다.

 

신화는 훨씬 개인적이며, 과학보다 더욱 정확하게 삶을 말해준다.과학은 평균 개념들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으로, 그 개념들은 각 개인의 생애가 지니고 있는 주관적인 다양성을 제대로 다루기에는 너무 일반적이다.

양약은 근거중심이라고는 하지만 평균 개념을 가진 접근이기에 어떤 이에게는 맞지 않을 수도 있다.‘과학이 꼭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이 역시 일종의 미신.

 

13 언제나 나에게 인생은 뿌리를 통하여 살아가는 식물처럼 생각되었다. 식물의 고유한 삶은 뿌리 속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다. 지상에 드러나 보이는 부분은 단지 여름 동안만 버틴다. 그러다가 시들고 마는데 하루살이같이 덧없는 현상이다.

뿌리 속에 감추어진 것이 원형이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영원한 변화 속에서도 살아서 존속하는 그 무언가에 대한 감각을 결코 잃어버린 적이 없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사라져갈 꽃이다. 그러나 땅속 뿌리는 여전히 남아 있다.

영원한 변화, 사라져 갈 꽃, 땅 속 뿌리. ! 이미지들 좋다. 우리는 사라져 갈 꽃을 보고 있다. 변화와 뿌리에 대한 감각을 잃지 말자. 뿌리를 되짚어 보려고 하는 나의 마음은 그래서 변화의 원리라는 주역에 끌리는 걸까?

 

14 다른 기억들, 즉 여행과 사람들 그리고 주변상황에 관한 기억들은 내적 사건들 앞에서 빛이 바래고 말았다.

그래서 칼 융의 자서전은 당대만을 담고 있지 않다. 내적 사건들을 담고 있기에 칼 융의 시대보다는 집단무의식의 시대, 즉 여러 세기를 담고 있다 .꿈의 시간적 배경도 여러 세기다.

 

다른 실체와의 만남, 즉 무의식과의 충돌은 나의 기억에 생생하게 새겨져 있다.

융의 밝은 자아어두운 자기를 제대로 만나고 있다. ‘차가운 얼음’(의식, 분별)이 내면 깊은 곳에 흐르는 뜨거운 용암을 만나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그 충돌의 장면은 충격적이기에 생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보통은 의식과 무의식이 융처럼 대면하기 어려울 터.

 

15 나는 나 자신을 내적 사건들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그것들이 내 생애의 특이성을 이루며,나의 자서전은 그러한 내적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의 내적 사건을 영웅여정이라 생각해보자. 자아가 자기를 찾아가는 영웅여정을 통해 자아는 자기를 찾고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생을 사로 잡은 꿈 유년시절

 

25 그때 호수 근처에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내 마음에 깊이 박혔다. 물이 없이는 아무도 존재할 수 없을 것처럼 여겨졌다.

인터넷에서 호숫가의 집을 보고 꽤 괜찮아서 가봤는데 바다도 아닌 호수가 주는 압도적인 우울함이 있더라. 바라보고 있자니 여기에서 살면 호수 바라보다 우울해서 빠져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호수 근처에 살까 싶었는데, 나 같은 사람은 호숫가의 집은 우울한 기운이 있어 싫지만 융처럼 내면 깊이 탐험하는 사람은 호수 근처가 좋았나봐(물론 호수의 스케일이 다르겠다만). 결국 나중에 융은 볼링겐 호수 근처에 집을 짓고 산다. 융을 괘상으로 표현하자면 (연못).

 

27 그 젊은 아가씨는 나중에 나의 장모가 되었다. 그녀는 내 아버지를 존경했다. 스물한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이 행간의 의미들은 뭘까. 융은 아내와 어떻게 인연이 되었을까. 밀당 없이 순식간이지 않았을까.

 

33 그것이 의식을 행할 때 쓰이는 남근상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수십 년이 걸렸다.

어떻게 그런 이미지가 꿈 속에 나타날 수 있었을까.

 

34 그렇다면 이것은 기억의 흔적과는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다. / 요도의 입구를 눈으로 해석한 것이라든지 그 위에 있는 듯한 광원 같은 것은 남근상이라는 낱말의 어원을 시사하고 있다. 남근상(phallus)에 해당하는 헬라어와 비슷한 팔로스는 빛나는, 찬란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생의 기억이라면 말이 될 수도 있겠다. 융의 기억또는 기억력은 영적이다.

 

35 그것은 내가 구하지도 않았는데 나에게 주어진 무시무시한 계시였다.

 

37 누가 나의 내부에서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누구의 정신이 이런 체험을 고안해냈을까? 얼마나 빼어난 통찰이 여기에 작용한 것일까?

 

누가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함께 섞어, 나의 후반기 생애를 격렬하기 그지없는 폭풍으로 채운 그 모든 것의 기초를 제공했단 말인가?하늘과 땅 양쪽에서 온 그 낯선 손님 이외에 그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나는 그 일이 가능한 한 많은 빛을 어둠속으로 가져가기 위해 일어난 것임을 알고 있다. 그것은 어둠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그때 나의 정신적 삶이 무의식적인 출발을 한 것이었다.

어둠의 세계=내면 깊이 자리 잡은 무의식의 세계. 밝은 세계에 속한 자아가 어두운 자기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과의례로서의 ’. 융은 다른 의미에서 정신적 유목민이었으며 은 어둠의 세계(=자기)로 들어가기 위한 여권이었던 셈이다. 나도 그간 등한시 했던 꿈을 다시 한번 의식적으로기억해야겠다.

 

39 나는 종종 그 어둡고 외진 방에 몰래 들어가 그림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려고 몇 시간이나 그 앞에 앉아 있곤 했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아름다움이었다.

융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여러 세기가 등장하는 것이 흥미롭더라. 융은 외진 방의 그림이 아름다웠던 걸까, 19세기 초 바젤의 풍경화가 담고 있는 ‘19세기 초의 아름다움에 끌린 거였을까.

 

47 돌이 나인지 돌 위에 앉은 것이 나인지 알지 못한 채 돌 위에 앉아 있던 어린아이로 돌아갔다.문득 취리히에서의 내 생활이 떠올랐다.그것은 마치 다른 세계와 다른 시간으로부터 온 기별처럼 낯설게 여겨졌다.그것은 유혹적이면서 동시에 충격적이었다.내가 심취했던 유년시절의 세계는 영원한 것이었으며,나는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계속 굴러가며 점점 더 멀어져 가는 시간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만 것이었다. 나는 나의 미래를 잃지 않기 위해 그 장소에서 억지로 몸을 돌려야만 했다.

도대체 융에게 은 무엇이었을까. 돌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융에게 있어 은 어떤 의미였을까. 저자연구에서 파헤치고 싶다. 돌 위에 앉아 있던 어린 융은 40대가 되어 볼링겐 근처에 성탑을 짓고 돌기념비도 만들게 된다.

 

내 유년시절의 영원성이 번개와도 같이 내게 깨달아졌기 때문이다.

 

48 나는 안정감을 갖게 되었고 나 자신과의 불화로 인한 괴로운 감정은 사라졌다.

일종의 부적 같은 것이었을까? 아스퍼거 증후군을 겪고 있던 템플 그랜딘은 스스로 압박기계를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던데. 융과 템플 그랜딘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괴로움에 자신만의 처방을 내린다.목 마른 자가 우물 판다. 하지만 그 괴로움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노력한 점이 대단하다.

 

52 사람들은 우선 행동을 하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거기에 대해 숙고해보는 것이다.

내가 특히 그렇다. 먼저 행동부터.

 

이제 반항아가 가까이 오도다 학창시절

 

71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저것이다!저 마차는 분명히 나의시대에서 온 것이다.” 그 마차는 마치 내가 직접 타고 다녔던 것과 똑 같은 종류이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다시 알아보는 것 같았다! 그러자 누군가가 나에게서 무언가를 훔쳐간 것처럼, 혹은 속임을 당하여 나의 사랑하는 과거를 빼앗겨버린 듯 메스꺼운 느낌이 들었다. 마차는 그 시대의 유물이었다! 그때 무엇이 나의 내부에서 일어났는지, 무엇이 나에게 그토록 강한 인상을 주었는지 표현할 수가 없다. 동경이라고 해야 할지,향수라고 해야 할지, 재인식이라고 해야 할지. ‘그래, 저거였어! 그래, 저거였어!’라고 말이다.

융은 홍루몽의 가보옥이다! 언제가 융과 홍루몽에 대해 써보고 싶다. 융은 내면의 꿈과 외면의 돌을 통해 여러 세기를 체험한다.

 

72 어찌하여 내가 18세기에 속하는가? 그 무렵 나는 종종 1886년을 1786년이라고 쓰곤 했다. 그런 일은 항상 설명하기 힘든 향수가 동반되면서 일어났다.

융은 임사체험만이 아니라 전생체험도 했을까? 참고로10년 전이긴 하지만 1876년은 피터 드러커의 부친이 태어난 해.

 

, 나는 두 시대에 살고 있고 서로 다른 두 개의 인격이라는 것이었다.

두 도시 이야기. 두 시대 이야기. 나는 과거와 미래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조부모와 아이들의 유전자를 통해.

 

73 소위 조부가 괴테의 서자였다는 불쾌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괴테는 그러고도 남을 거 같다. 그런데 이게 불쾌한가? (참고로 괴테는 1749년생)

 

76 누가 나로 하여금 나 자신도 알지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은 어떤 것을 생각하도록 강요하고 있는가? 이 무서운 의지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왜 내가 거기에 복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마치 신내림처럼 융도 선택 받은 게지.

 

77 그들은 선택의 여지 없이 하느님이 창조한 대로 존재해야만 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그들이 다르게 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하느님의 완전한 피조물이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오로지 완전한 것만 창조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그들 안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심어놓았기 때문에 그들이 죄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죄를 짓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자유의지의 역할은 그럼 뭐야?

 

78 ‘그러므로 그들이 죄를 지어야만 하는 것이 하느님의 의도였다.’

요샛말로 신의 빅 픽쳐.

 

하느님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를 이러한 곤경으로 밀어 넣고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은 채 방치했다.

원죄는 어릴 때도 지금의 나에게도 잘 이해되지 않는 개념이다. 많은 지적인 사람들도 이 문제로 신과의 갈등을 빚어 온 거 같다. 도대체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덫을 놓고, 그 죄를 속죄하기 위해 보낸 독생자를 보낸 하느님의 계획 아니 속셈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느님의 의지가 무엇이며 하느님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전에는 복종할 수 없었다. 나는 이제 하느님이야말로 이런 절망적인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80 보좌 밑으로 거대한 똥덩어리 하나가 화려하게 채색된 새 지붕에 떨어져 지붕을 산산조각내고 대성당의 벽들을 모조리 부수고 있다.

내게는 어려운 상징이다. 일단 기록하고 나중에 맥락 속에서 다시 파악할 것.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엄청난 안도감과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저주를 예상했는데 그 대신 은총이 나에게 임하고, 그와 동시에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형언할 수 없는 축복이 임했다. 나는 행복감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울었다.

 

81 사람이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한다면 그는 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파우스트>에서 주님은 메피스토텔레스에게 말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것이라고, 착한 인간은 비록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알고 있다고. 융의 자서전과 괴테의 <파우스트>는 여러 번의 접점이 있다.

 

82 내가 하느님에게 맡겨졌다는 것과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체험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무의미한 일에 나 자신을 넘겨주는 셈이 된다.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과 자기 실현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느님의 의지=자기(selbst)?

 

복음서에서 바리새인과 세리들에 관한 부분을 읽고는 그 타락한 자들이 선택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나는 다소 만족감을 느꼈다.

타락=방황이라 볼 때 노력하는 이의 방황은 죄가 아니라 노력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축복이라는 것, 따라서 그들은 선택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인가?

 

84 오늘날에도 나는 외롭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 대부분 도통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들을 내가 알고 있고 그것을 암시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역을 의인화한다면 이런 속내를 갖고 있지 않을까. 내가 말이야, 늬들한테 많은 것을 알려주고 싶은데 늬들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나는 그저 이렇게 암시만 해야 하니 답답할 뿐이야!하면서. 나는 이제 그 암시를 파악하려고 한다. 행간, 맥락, 상징에 주목할 것이다.

 

85 내가 돌이라고 생각하자 갈등은 멈췄다.돌은 불확실한 것도 없고 자기를 알려서 전하려는 욕구도 없다.돌은 영원하며 수천 년 동안 살아 있다.’ 나는 생각을 이어갔다. ‘이에 반해 나 자신은 단지 지나가는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다.급히 타올랐다가 꺼지는 불꽃처럼 가능한 온갖 종류의 감정에 불살라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내 감정들의 집합이었으며,내 안의 다른 존재는 시간을 초월한 돌이었다.

돌돌돌! 융의 돌. 시간을 초월한 돌. 그 안에 서린 집단무의식. 마치 사리처럼 그 모든 것이 응집된 돌. 융 자서전 읽다가 나까지 돌 보고 명상할 판. 여하튼 돌에 대해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87 “, 이런! 너는 항상 생각하려고만 하는구나. 사람은 생각해서는 안되고 믿어야 해.” 나는 생각했다. ‘아니다. 사람은 체험을 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알아야 한다.’ 그러나 말로는 나에게 그런 믿음을 주십시오라고 했다.

나도 어릴 적 이런 이야기 많이 들었다. 믿음은 선물이라고.믿음은 주어지는 것이라고. 나는 잘 믿어지지 않아서 힘들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는 성경구절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도마같은 인간이었다. 지금은 보지 않고 믿는다는 것의 의미를 어렴풋하게나마 알겠다.

 

하지만 내 아래에서 나를 시샘하면서 따라잡으려고 기회를 노리는 학우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그것이 나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나는 모든 경쟁을 싫어했다.누가 놀이까지도 경쟁적으로 하게 되면 나는 그 놀이를 그만두었다. 그 후 나는 학급에서 2등에 머물렀는데 그것이 훨씬 마음을 편하게 했다. 학교 과제는 몹시 성가셨다. 나는 그것 역시 경쟁심으로 부담이 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랑 비슷하다. 2, 2인자가 마음 편하다. 나는 킹 메이커 스타일이다. 그래서 agency에서 일하는 것이 맞았다. 경쟁심, 승부욕이 어떤 건지 잘 모른다. 경쟁심과 승부욕이 있으면 스스로 피곤할 거 같은데 그게 자신에게 맞는 옷인 사람은 피곤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되는 것 같더라. 나에게는 다른 동력이 있다.

 

89 그 중에서도 특히 밤과 꿈, 그리고 하느님이 내 마음속에 직접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과 가까웠다. 여기서 나는 하느님을 따옴표로 묶어놓았다.

 

자연은 나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에 의해 하느님의 자기표현으로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성하지 않은 것처럼 하느님에게 외면당하고 있는 듯이 여겨졌다.

하느님의 자기표현이라. 우리의 형상만이 아니라 자연은 하느님의 자기표현이란 말이지. 형상=하느님의 자기표현이고 그 형상 안에 있는 것은 하느님의 의지란 말이지. 하느님의 자기표현으로이 모양 이 꼴로 태어났고 그 꼴 안에 담긴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이 자기실현이란 말인가?

 

90 마치 인간의 영혼이 하느님과 함께 똑같이 창조의 과정을 바라보는 것과도 같았다.

 

즉 제 2의 인격의 방해 받지 않는 평온과 고독을 추구했다.

 

91 무엇보다 종교는 오래 전부터 인간의 제 2의 인격, 내적 인간에 대해 말해왔다.

내적인간=神인가? 결국 신나게(神나게)’ 살라는 것은 자아자기를 찾아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하라는 것인가. ‘너의 이름은이라는 영화에서 만날 수 없는 시공간의 어떤 차원에서 서로가 애타게 이름을 부르며 찾아 헤매는 장면이 떠오른다.

 

2의 인격은 전형적인 형상인데도 대개 의식이 가진 이해력으로는 사람이 제 2의 인격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왜냐하면 나는 체험을 통해, 은총은 오직 하느님의 의지를 철저히 실현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걸 좀 더 이해하고 싶다.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요? ‘자기실현을 말하는 건가요?

 

93 내게 일어난 바와 같이, 하느님은 자신의 압도적이고 충격적인 의지를 무력한 인간들에게서 철저히 실현되도록 할 수 있는 존재다.

 

96 나로서는 결코 증명할 수 없었던 어떤 내적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내게 증명되었다.나는 확신을 붙든 적이 없었으나 확신이 나를 붙들어주어 그와 반대되는 모든 신념에 종종 대항하게 했다. 내가 바라는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바라는 것을 내가 행하도록 정해져 있다는 확신을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었다.

 

내가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그곳에 있을 때면 언제나 나는 시간을 초월해 있었다. 나는 수백 년의 세월 속에 있었으며, 그때 답을 준 자는 이미 항상 있었고 지금도 항상 있는 존재였다. 다른 인물과의 대화는 나의 가장 심오한 체험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피흘리는 전투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극도의 황홀경이었다.

여기에서 영화 <루시>의 장면이 떠올랐다!루시가 있던 공간에서 시간이 과거로 흘러 주인공은급기야 원시의 인류와 만나게 된다.융은 이런 체험을 했던 건가?

 

104 셋이면서 동시에 하나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적 모순을 지니고 있는 문제였는데, 그 모순이 내 마음을 끌었다.

() 3개가 모이면 하나의 괘()가 된다.

 

109 그러므로 하느님은 위대한 위험이다. / 예수도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이건 정말 새로운 해석이네. 신을 이해 또는 믿는데 있어서 우리는 신의 어두운 면을 생각하지 못했다.

 

111 나는 그로부터 종교란 인간이 하느님과 자립적인 관계를 맺는 영적인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12 나는 비더만의 <하느님의 본질>이라는 장에서, 하느님은 인간 자아와 유사하게 상상될 수 있는 인격으로서, 그리고 또한 세계를 포괄하면서 세계를 전적으로 초월하는 고유의 자아로서 스스로를 나타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느님은 인격을 가지고 있으며 우주의 자아였다.

 

그런데 하느님이 모든 것이라면, 그는 구분이 가능한 성격을 어떻게 가질 수 있단 말인가?

everything, something

 

113 자아는 또한 온갖 자기기만과 오해, 기분, 감정, 열정 그리고 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자아는 성공보다는 실패를 훨씬 많이 겪었다. 자아는 유치하고 허영심이 강하며, 이기적이고 고집이 세며, 애정결핍이며, 탐욕스럽고 공정하지 못하며, 민감하고 게으르며, 무책임하며 그 외 나쁜 것들 투성이였다. 유감스럽게도 자아는 덕과 재능이 많이 결여되어 있었다.

 

114 하느님은 그 전능한 힘으로 피조물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알고 있음이 틀림 없다. 그런데 하느님은 피조물을 시험할 욕심이 생겼다. 실험결과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도 피조물을 시험대 위에 세웠다. , 그럼 이런 하느님의 성격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와 같이 행동하는 인간적인 인격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도 그것이 궁금하다. 도대체 그 심보가 궁금하다.

 

하느님이 스스로 만족하여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세상을 창조했다는 구절과 자연세계는 그의 선함으로 채웠고, 도덕세계는 그의 사랑으로 채우기를 원한다는 구절을 읽었다.

 

115 하느님은 기껏해야 낙원에 대해 만족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하느님은 자신이 해로운 독사, 즉 악마를 들여다 놓음으로써 낙원의 영광이 너무 오래 지속되지 않도록 스스로 대비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도 하느님이 만족을 느꼈을까?

 

하지만 하느님이 대극의 세계를 창조하여 하나가 다른 것을 잡아먹도록 하고 인생이 죽음으로 향한 탄생이 되도록 의도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결코 무의미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116 그런데 하느님이 지선이라면, 그가 창조한 세계와 피조물이 왜 이토록 불완전하고 부패하고 비참하단 말인가?

나도 한 때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에 반감을 품었던 것 같다. ‘이처럼사랑한 세상이 겨우 이따위인가 하고.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도 마찬가지.

 

그러나 어딘가에서, 어떤 시간에, 나처럼 진리를 탐구하는 자들이 있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자신과 남들을 속이려 하지 않으며, 고통으로 가득한 이 세상의 현실을 부정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일 것이었다.

 

그 무렵 어머니, 어머니의 제 2의 인격이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너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한번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융의 어머니는 영적으로 남달랐던 거 같다. 융은 414페이지에서 나의 딸은 그 시체가 거기 있다는 것을 감지했던 것이다. 그녀의 감지능력은 내 외가 쪽 할머니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다.’라고 밝힌다. 사촌동생 중에 영매도 있었던 것 같은데 외사촌인가?

 

117 ‘드디어 여기에 악마를 진지하게 다루고, 완전한 세계를 창조하려는 하느님의 의도를 방해하는 힘을 가진 적대자와 피로 계약을 맺기까지 한 자가 있구나.’

이런 대극의 관계를 괘상으로 표현한다면?

 

118 드디어 나는 악과 그 세계장악력을 알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인간을 어둠과 고통으로부터 구원하는 데 악이 맡은 신비로운 역할을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고 여태껏 있어왔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괴테는 나에게 예언자라 할 만했다.

<파우스트>의 무대는 지상과 천상이라는 차원이 있고 악으로 인해 지상에서 죽은 그레첸과 파우스트의 영혼은 천상에서 구원을 받는다. 악이 본의 아니게구원으로 이끈 것이다.

 

철학으로부터 진리를 위한 개방성을 분명히 배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21 이와 반대로 그것은 나에게 밀려온 것이었고, 그것을 생각하도록 나는 아주 잔혹하게 강요당했다. 하지만 그런 후에 형언할 수 없는 은총을 받았다.

책 주제도 이렇게 밀려와야 한다. 알고 싶어야 하고 급기야 쓰고 싶어야 한다. 고여야 넘치듯이 써댈 수 있다. 나는 지금 담고 있는 과정 속에 있다.

 

하느님의 어두운 행위는 특별히 철학적 관심을 기울이고 숙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다.

융은 무의식과 그림자에 주목한다. 어두운 무의식은 하느님의 어두운 행위인가?

 

따라서 우리는 악마도 원래 선한 것으로 창조되었으나 그의 오만 때문에 타락하게 되었다고 가정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악마도 易의 원리에 따라 선한 것이었다가 타락하여 악이 되었나? 하느님도 밝았다가 어두워졌다 변덕을 보이고?

 

125 나는 평균점수로 슬그머니 통과했는데 그 정도가 나에게는 딱 어울렸다. 그것은 주목을 받지 않으려는 나의 일반적인 성향과 맞아떨어지기도 했다.

 

최고점수를 받으면 주목을 받게 될 것이므로 1등 말고 그 다음 성적을 기대했다.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2등이 좋다. 주목 받고 싶지 않다. 또한 내가 나아갈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도 다른 사람이 1등인 것이 좋다.

 

126 아주 잘 썼기 때문에 나는 융의 작문에 최고점수를 주어야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작문은 거짓이다.너는 이것을 어디서 베꼈느냐?진실을 자백해라!

이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나도 비슷한 경우로 교무실을 간 적이 있다. 나는 과목에 대한 호불호가 커서 결과물의 기복 역시 큰 편이었는데 선생님들은 평균으로 학생의 능력을 파악한다. 학창시절의 경험으로 미루어 점수나 자격증, 학위 등으로 학습능력, 지적능력을 판단한다는 것이 별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성실성의 판단 척도로는 의미가 있다.

 

128 나는 단지 저 흐릿한 세계를 오늘날의 방법으로 밝혀보고자 시도할 뿐이다.

 

131 돌은 존재의 끝없는 신비, 영혼의 진수를 내포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그 자체이기도 했다. 그 점에서 나는 돌과 나 자신이 서로 유사하다고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다시 말해 죽은 것과 살아 있는 것 그 양쪽에 다 신성이 깃들어 있는 것이었다.

또 돌 이야기.

 

또한 수세기에 걸친 노인의 영역으로 수용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름다운 시간들 대학시절

 

나의 꿈을 지원해줄 후원자를 찾을 가망도 없을 것이었다.

 

167 깊은 내적인 본질로는 세상에 등을 돌린 반계몽주의자였다.

 

168 2의 인격은 파우스트 속에 인격화된 바와 같이 중세와 은밀한 일체감을 느꼈고, 아마도 괴테의 심금을 깊이 울렸을 흘러간 시대의 유산과도 그러한 일체감을 느꼈다.

 

169 나는 괴테가 그 시대에 제공한 해답이 바로 파우스트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시대라는 키워드는 나에게는 어렴풋하고 희미하지만 내가 붙잡아야 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고 있다. 9월 오프수업 과제를 준비하며 시대작가에 대해 더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 작가라면 시대정신, 시대, 자신이 살고 있는 당대, 동시대인 등에 대한 민감함이랄까 질문이랄까 그런 것이 있어야 할 것 같다.

 

파우스트의 비열한 불손, 무엇보다 필레몬과 바우키스의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170 이 꿈은 나에게 심오한 계시와도 같았다. 그때 나는 1의 인격이 빛을 운반하는 자이며 제 2의 인격은 그림자처럼 제 1의 인격을 따라온다는 것을 깨달았다.나의 과제는 그 빛을 지키고 그 투철한 생명력(2의 인격-옮긴이)’뒤돌아보지 않는 것이었다. 그 쪽은 다른 종류의 금지된 빛의 영역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폭풍을 거슬러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으며, 폭풍은 끝없는 어둠의 세계로 나를 떠밀어 넣으려고 기를 썼다. 그 어둠의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의미심장한 비밀의 표피만을 지각할 뿐이었다.

 

나는 제 1의 인격으로서 공부, 돈벌기, 책임, 분규, 혼란, 과실, 복종, 패배들을 헤쳐나가며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나를 향해 밀려오는 폭풍은 시간이었으며, 그것은 끊임없이 과거로 흘러가면서도 동시에 쉼없이 나를 바짝 따라 붙었다. 그것은 강력한 흡인력으로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자기 속으로 탐욕스럽게 끌어들인다. 우리는 단지 앞으로 돌진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잠깐 동안 벗어날 수 있을 뿐이다. 과거는 무서울 정도로 바로 여기에 실재하며, 충분한 해답으로써 몸값을 치르고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자들을 모두 잡아서 끌고 가버린다.

명문이다! 시간의 흐름에 대해 긴장감 있게 정말 잘 썼다. 나도 올 해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알파의 차원을 더듬거리고 있다. 시간과 차원이 품고 있는 그 비밀을 융은 돌에서 찾은 거 같다.나는 아직도 더듬거리고 있다. ‘시간이 없으면 존재도 없다’. 이번 주말에는 예전에 봤던 영화 <루시>를 한번 더 봐야겠다. 그리고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

 

나는 나의 길이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외부로, 제한된 세계 속으로, 삼차원의 어둠 속으로 이끌려가고 있음을 인식했다. 아담이 일찍이 이런 방식으로 낙원을 떠난 것으로 여겨졌다. 낙원은 아담에게 유령이 되어 버렸고, 이마에 땀을 흘리며 돌밭을 경작해야만 하는 그곳에 빛이 있었다.

 

진정한 문제는 왜 이러한 과정이 일어났으며 왜 그것이 의식을 뚫고 나왔는가 하는 점이다.

 

172 그러므로 어떤 것이 배후에서 비밀리에 작용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어떤 지적 존재, 아무튼 나보다는 지능이 높은 무언가가 말이다. 의식의 관점에서는 내적인 빛의 영역이 거대한 그림자라고 하는 천재적인 생각은 나에게 떠오르지 않았다.

내적인 빛의 영역=거대한 그림자란 말이지? 배후에서 비밀리에 작용하는 어떤 지적 존재는 소위 말하는 영감(靈感)’, ‘그 분일까? 의식을 뚫고 유레카!’를 외치게 하는 발견, 깨달음, 번득임 등은 어떤 과정을 통해 오는가?

 

173 이러한 혼과 관련하여 오직 분명한 것은 그 역사적인 성격, 즉 시간성의 확장 내지 무시간성이었다. / 그것의 공간적인 존재성에 관해서도 상상을 하지 않았다.

해와 달은 만날 수가 없고 낮과 밤도 함께 있을 수 없거늘, 시간과 공간은 떼어놓을 수 없기에 우리는 시공간이라 한다. 시공간과 차원이라는 키워드로도 생각할 것이 많으나 물리학까지 건드리기에는 용량초과, 역량초과로 과부하에 걸린다. 일단 여기까지만. 여하튼 주역에서는 시공간이 없는 상태를 태극(太極)이라 표현하더라.

 

개성적인 기질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며, 무엇보다 먼저 부모의 환경과 그들의 정신세계를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의 개성 때문에 부모의 정신세계와는 제약된 범위 안에서만 일치할 뿐이다.그런데 가족정신은 다른 한편으로는 그 나름대로 시대정신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는다. 시대정신 그 자체는 대개 무의식적이다.

 

174 , 어린아이 마음 가운데 보상적인 성격의 상호작용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175 그러한 계시는 어제오늘에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이미 그 그림자를 던져온 것이었다.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개인적인 삶을 가지로 있다고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수세기에 걸친 집단정신의 고도로 수준 높은 대변자요 희생물이요 후원자인 셈이다.

 

적어도 우리 존재의 일부는 수세기에 걸쳐서 살아온 것이다. 그 부분을 나의 개인적인 용어로 2의 인격(원서에는 ‘Nr.2로 표기되어 있음 옮긴이)’이라고 일컬었다.

DNA자체가 그 흔적이지 않나. 도도히 흐르는 유전자의 힘. ‘遺傳이라는 말 자체에 수세기에 걸친 흐름을 알 수 있다.

 

176 밖으로 나가지 말라. 진리는 내적 인간에 깃들어 있다.

밖으로 나갈 때가 있고 나가지 말아야 할 때가 있는 건데, 지금의 나는 밖으로 나갈 때가 아니라 안으로 들어갈 때.

 

178 나는 일련의 암시들을 통해 그것이 종교적인 회의라는 것을 확신했다. 필요한 체험이 아버지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여겨졌다.

융은 체험도 중요시 한다. 영웅여정의 필수조건인 시련처럼 사건으로서의 체험이 중요하다.

 

180 그러나 이러한 접근방식은 그때마다 투우에게 내보이는 붉은 천과도 같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는데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지극히 이성적인 논의가 어떻게 그와 같은 정서적인 저항에 부딪히게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182 내가 보기에 신앙의 가장 큰 죄는 경험을 앞지르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신학자들은 하느님이 어떤 사물들은 의도를 가지고 배치하고 다른 어떤 사물들은 그냥 방임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정신의학자들은 물질에도 인간정신의 특성이 부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185 한번은 어머니가 나를 향해서인지 주변 공기를 향해서인지2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너를 위해서 지금 돌아가셨구나.” 그 말은 나에게 이런 의미로 들렸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고 ,아버지는 너에게 방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견해는 나로서는 어머니의 제 2의 인격에 어울리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진지하게 썼을 텐데 웃기게 읽힌다. 융 어머니 매력 있다. 융도 어머니의 기질을 받아 독특한 유머감각을 지니게 된 것 같다. 나름의 유머코드가 있어. 허공에 대고 말하는 어머니의 제 2의 목소리라. 평범한 아버지가 독특한 아내와 아들 사이에서 힘들었을 수도 있었겠다 싶다. 하필 목사였으므로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가정을 지키느라 안간힘을 쓰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187 칸트와 쇼펜하우어에 대해서도 논쟁을 했고, 키케로의 다양한 문체에도 정통했으며, 신학과 철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우리는 무엇보다 소위 고전적인 교양과 세련된 정신적 전통이 어떤 것인지 추측해볼 수 있었다.

의미 있는 교류였겠다. 나는 어제 전성수 부사장님과 나눈 그간의 메일들을 보며 울었다. 어쩌면 그렇게 수년 간 딱딱한 질환 관련 질문과 답을 주고 받았을까 싶으면서도 그 자체가 값지고 멋진 교류였더라. 괴테와 쉴러의 관계처럼 공통의 관심사로 이어진 경우는 한 쪽을 상실했을 때 그 슬픔이 너무 크다. 융이 대학시절을 회고할 때 정신적으로 활기를 띠었고 또한 우정을 나누는 시기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외리와의 이런 풍요로운 교류 덕이었겠구나.

 

엄밀히 말하면 우리의 관계는 우리 자신들보다 20년가량 오래된 것이었다. 그 관계는 이미 지난 세기의 60년대 말에 우리의 부친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운명이 해가 지나면서 두 사람을 차츰 갈라놓은 것과는 달리, 외리와 나는 함께 나아갔을 뿐만 아니라 신의의 결속으로 끝까지 함께 견디었다.

나는 왜 이걸 읽고 눈물이 날까.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된 관계’. 해가 지나며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아가고 끝까지 함께 견디는 관계라. 알버트 외리가 융과의 첫 대면을 떠올리며 쓴 글이 있어 여기 옮겨 본다.

 

내가 융을 처음 본 것은 우리 둘 다 어린아이였던 시절이었다. 나의 부모님이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였는데 부모님들은 우리가 서로 어울려 놀기를 바랐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카를은 방 한가운데 앉아 구주희핀을 아홉 개 세우고 일정한 거리에서 공을 굴려 쓰러뜨리는 놀이를 하느라 바빠서 나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약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첫 만남을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비사회적인 괴물과 마주친 것이 난생처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활기차게 북적이는 유아원에서 자랐는데, 그런 곳에서는 함께 놀든 치고 받고 싸우든 끊임없이 사람들과 섞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완전히 혼자였다. 그때는 그의 여동생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였다.”

 

외리는 그 비범한 인간의 외적 특성의 어떤 부분을 그의 용모 어딘가에서, 그의 동작과 말투에서 전해주고 있었다.

 

188 동시대 인물들의 특징을 짚어내는 그의 기지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외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크의 큰 조카라고 했지? 419페이지를 보면 부르크하르크는 황제가 베르사유에서 대관식을 한다는 보도를 접하고는, ‘저것은 독일의 몰락이다라고 외쳤다는 예를 언급한다. 외관상의 특징이나 성격만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어떤 것도 유전이 되나 싶다.

 

우리는 태양 아래서, 기울고 차는 달 아래서 한 잔의 마르크그레플러산 포도주를 마시며 바일의아들러를 논하고, 할팅겐의 히르첸을 논하며 온갖 것을 토론했다. 이런 대화는 내 학창시절의 잊을 수 없는 정점을 이루었다.

최근의 기억으로는 작년에 동네 이웃이자 대학 후배 영미와 중국 작가한한(韓寒)의 책을 원문으로 해석하며 나눴던 대화들이 뜻 깊었다

 

직업과 주거지가 달라 서로 떨어져 있었으므로 우리는 그 다음 세기에는 그리 자주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중년의 장중한 시간이 동년배인 외리와 나, 두 사람에게 다가왔을 때 운명은 우리를 더욱 함께 있도록 인도해주었다.

이것도 표현 너무 좋다. 나도 그 다음 세기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시대를 살아왔네. 유선이와 20세기와 21세기를 함께 했다. 직업, 주거지, 결혼과 육아로 서로 연락을 취하지 못하다가 중년 이후 (또는 노년의 경우 배우자와의 사별 이후)다시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중년의 장중한 시간이라

 

189 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내적인 대화가 오고 갔는데, 그가 나에게 드문드문 던진 어떤 질문들을 통해 나는 그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런 관계. 이런 대화. 구구절절 해명이 필요한 관계가 아닌.

 

193 아무튼 어느 시대나 세계 어느 곳이나 이와 같은 이야기들이 반복해서 보고되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 이 시점에서 캠벨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어 <신화와 인생>을 다시 펼쳤다. 172-173 페이지에 걸쳐 캠벨과 융이 나눈 대화를 지금 다시 읽어 보니 재미 있다. ‘굳이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할 필요도 없이 이런저런 것들을 즐길 수 있었다에 주목하였다. 이런 관계가 맺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저절로 이해 되는 관계가 있는가 하면 자꾸만 오해가 쌓이는 관계도 있다.

 

195 아무튼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관계의 한정된 범주를 넘어서는 사건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전대미문의 일도 아니요 세상을 뒤흔들 만한 것도 아니었다.날씨나 지진을 미리 알아차리는 동물들도 있고,어떤 사람의 죽음을 일러주는 꿈, 임종시에 멈춰버린 시계, 결정적인 순간에 부서진 컵들도 있었다. 그것들은 그때까지의 나의 세계에서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일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그러한 일들에 관해 들은 유일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2차원의 인간을 생각해보자. ‘이 세상의 전부인 그에게는 위에서 무엇인가 떨어지면 그의 범주를 넘어서는 사건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에게는 이해 불가이겠지만 3차원의 세계에서는 아무 일도 아니다. 그저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을 뿐. 4차원, 다차원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3차원에서 사는 우리는 그저 있을 수 없다고만 한다. 다차원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의 가능성을 인정할 때 나의 세계는 깊이와 배경을 획득할 수 있다. ~오늘부터 꿈 일기를 써야 하는겐가?

 

얼마 전 천안의 숙모 할머니를 찾아 뵈었다. 기억력이 남다른 분인데, 이사를 앞두고 할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신 거다. 집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던 중에 할아버지가 꿈에 나타나 벽지를 보라고 하셨단다. 이튿날 꿈에서 할아버지가 가리켜준 벽지를 뜯어 보니 거기에 할아버지가 은행계좌와 비밀번호 등을 적어 놓으신 걸 발견했단다. 이런 걸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197 동물들에 대한 나의 연민은 쇼펜하우어 철학의 불교적인 몸짓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보다 깊은 원초적인 정신적 태도의 바탕, 즉 동물과의 무의식적인 동일시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융은 연민을 넘어선 동일시다. 공감과는 또 다른 차원과 깊이를 가졌다. 동식물만이 아니라 돌과의 동일시를 갖고 있으니.

 

208 나는 예민한 지성이 어떻게 문제를 파악해서 이미 반쯤 해답이 들어 있는 질문들을 만들어내는가를 보았다.

반쯤 해답이 들어 있는 질문들을 만들어 내는 예민한 지성=유발 하라리. 유발 하라리를 보고 질문하는 아이로 아이들을 키워야겠다 싶더라니까. 물론 나 역시 질문을 잘해야겠다. 질문을 잘하려면 문제를 잘 파악할 줄 알아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관찰통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210 나는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나에게 정신의학 외에는 다른 목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전격적으로 계시처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정신의학에서만,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두 흐름이 합류하여 그 합해진 물의 힘으로 스스로 물길을 내어 흘러갈 수 있을 것이었다. 여기에 내가 사방으로 찾아 헤매었으나 발견하지 못했던, 생물학적 사실과 정신적 사실에 관한 공동경험의 장이 있었다. 정신의학은 정신의 충돌이 실제 사건이 되는 결정적인 분야인 셈이었다.

심호흡을 해야만 할 정도의 흥분, 깨달음, 계시! 그런데 나도 올 해 일련의 책들을 읽으면서 일관된 흐름으로 내가 인도되는 느낌을 받는다. 조셉 캠벨에서 칼 융까지. 구본형 소장의 빅 픽쳐인가.

 

211 소외자가 되는 느낌/내가 이런 동떨어진 세계에 흥미를 가지리라고는 그 누구도, 아니 나 자신까지도 상상하지 못했다.

나도 주역에 관심을 가지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변경연 선배들의 북리뷰를 읽어보면 주역에 관심을 갖게 된 이들이 적지 않은 것 같더라. 결국 이 과정의 책들을 읽다 보면 그렇게 이끌려지는 걸까.

 

213 정신의학은 아주 넓은 의미에서 병든 정신과 정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의사의 정신 간의 대화이며, ‘병든인격과 치료자 인격 간의 대결이다.

오늘 <데인저러스 메소드>라는 영화를 봤다. 병든 인격과 치료자 인격 간의 대결을 왜 dangerous method라 한 지 알겠더라.전이현상과 저항현상.

 

216 그리하여 나는 그 후 몇 년에 걸쳐 스위스 동료들의 유전적 배경에 대한 은밀하면서도 교육적인 통계자료들을 작성했다.

어떤 통계자료였을까? 나 역시 저자연구를 하면서 저자의 부모를 먼저 알아보려고 한 까닭은 성장환경이나 학력배경보다 유전적 배경이 저자를 파악하는데 더 의미 있을 거라 생각한 까닭이다.내가 지금 개인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나와 남편 집안의 인물 조사는 우리 아이들을 위함이다. 아이들에게는 뜻 깊은 자료가 될 것이다. 내가 물려줄 수 있는 정신적 유산이다.

 

217 소위 정상적인 것의 병적인 변형들은 내 마음을 강력하게 사로잡았다.

 

결국 인간이란 스스로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좋든 나쁘든 다른 사람들의 판결에 맡겨진 하나의 사건인 셈이다.

인간=사건이라는 관점이 신선하다.

 

상처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225 정신의학 사례 중 많은 경우 환자는 말하지 않은 사연을 가지고 있으며 대개 그것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

 

226 그것은 환자의 비밀이며 바로 거기서 좌절하고 만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치료의 열쇠를 지니고 있다. 의사는 단지 그 비밀스러운 사연을 어떻게 알아내는가를 터득해야만 한다. 의사는 증상만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를 꿰뚫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문제를 파악해야 대답이 반은 나온 질문을 할 수 있듯이, 사람 전체를 꿰뚫는 질문을 하려면 그 사람을 잘 관찰해야 한다. 다만 보이지 않는 것,말하지 않는 것,들리지 않는 것 그러나 드러나는 것을 관찰해야 한다.

 

또한 꿈의 해석을 통해서나 환자와 오랫동안 끈기있게 인간적으로 접촉함으로써 그 일이 가능할 수도 있다.

 

233 여기서 나는 보통 같으면 의사의 양심으로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만 셈이었다.그러나 환자를 위해서는 그 책임을 내가 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과잉진료도 문제지만 방어진료도 문제다. 하지만 적지 않은 의사들이 방어진료를 하고 있다. 오직 환자의 치료에만 집중하는 의사야말로 이런 책임, 위험부담을 안고 치료에 임한다. 그런 점에서 융은 진정한 의사라 할 수 있겠다.

 

236 결정적인 점은 환자 사연의 문제다. 그것이 인간적인 배경과 인간적인 고통을 드러내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의사의 치료는 시작되기 때문이다.

융은 참 인간적인 의사였던 것 같다. 그 시대만 해도 그저 미친 사람정도로 치부하고 가두는 게 전부였을 수도 있는데. 환자의 사연을 분석하려 들지 않고 배경을 파악하여 그 고통을 공감하려는 모습이란.

 

238 그 구두수선공 같은 동작은 연인과의 동일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녀가 죽을 때까지 계속된 것이었다. 그 때 나는 조발성치매의 심리적인 기원에 관해 처음으로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 후로 나는 모든 주의를 정신병에서 의미 있는 관련성들을 찾는 데 돌리게 되었다.

예전에는 상사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사람들도 제법 되었던 거 같은데. 요새 마음의 병은 우울증이라면 예전에는 상사병이었던 것 같다. 그 이유가 뭘까.사랑이 자유롭지 못하고 억압적이라 그랬을까?

 

240 나는 이런 일을 14일에 한 번씩 7년가량 했다.

세상에! 진짜 융 할배 보통 사람이 아니다. 한 달에 2* 7년이라니!!

 

248 사람들이 문헌에서 환자의 저항에 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어 환자에게 뭔가 가용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치료는 환자로부터 자연스럽게 진전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 나는 환자들을 될 수 있는 한 모두 개별적으로 다루는 편이다. 문제의 해결은 항상 개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원칙은 다만 최소한으로 설정되어야 한다.

 

249 나는 의도적으로 체계적인 것을 멀리하고 있다. 나에게는 각 개인에 대한 개별적인 이해만이 있을 뿐이다.모든 환자에게 각각 다른 언어가 필요한 법이다.

 

1909년에 나는 이미 잠재적 정신병의 상징적 표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병을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신화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조셉 캠벨의 <신화와 인생>을 다시 열었다. ‘융은 1909년에 이르러서야 신화와 꿈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했지만, 인도에서는 그런 사실이 영원으로부터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한 사실은 옴 또는 아움(A-U-M)이라는 철자에 함축되어 있다. (P. 173)

 

250 환자를 실제로 충동질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불필요한 저항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252 우리는 우리의 무의식이 이 상황을 어떻게 체험하고 있는가?”하고 항상 자문해 보아야 한다.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꿈을 이해하도록 노력하고 세심한 데까지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자기 자신을 환자와 마찬가지로 관찰해야 한다.

그래, 나를 관찰해야 한다.나의 꿈을 관찰해야 하고 나의 원형이 무엇인지 파악하자. 그런데 나의 괘상원형의 표현이 될 수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든다.

 

253 꿈은 의식적인 태도에 대한 보상 바로 그것이다.

보어의 상보성원리도 같은 이야기가 될 수 있겠다. 그래서 꿈은 현실과 반대라고 하는 건가?

 

여성들은 대개 뛰어난 직관과 정확한 비판력을 지니고 있으며, 남자의 비밀스러운 의향을 간파할 줄 알고, 경우에 따라서는 남자의 아니마가 꾸미는 음모까지 꿰뚫어볼 줄도 안다. 여자들은 남자가 보지 못하는 측면을 본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이 초인이라고 확신하는 부인은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저번에 끄적거렸던 마눌님 말씀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비밀의 심리적 근거라 할 수 있겠는데? 남편을 초인이라고 확신하기는커녕 다들 우리집 큰아들이라고 하지.

 

256 어린 아이들은 똥이 색깔이 있고 냄새가 나기 때문에 그것에 호기심을 가지기 마련이다!

아이들은 똥과 공룡에 관심이 있다. 거의 예외 없이 아이들은 공룡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신기하더라. 저기에 어떤 무의식의 작용이 있는 건가 싶던데. 똥은 색깔과 냄새 때문에 그렇다 치자. 공룡은? 나는 거의 모든 아이들이 공룡을 좋아하는 이유가 정말 궁금하더라.

 

260 다음날 그 환자가 자살했다는 전보를 받았다. 그는 총으로 자살을 했다. 나중에 나는 탄환이 그의 뒷머리에 박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러한 경험에서 중요한 점은 원형적인 상황(이 사례에서는 죽음이라는 상황이지만)과 관련하여 종종 관찰되는 전형적인 동시성 현상이다.무의식에서 시간과 공간을 상대화함으로써 나는 전혀 다른 곳에서 실제로 일어난 어떤 일을 지각할 수 있었다.

지금은 캐나다로 이민간 대학친구 주미가 이랬다. 범죄현장을 꿈 속에서 미리 갔었다. 주미가 이야기 한 범죄현장이 다음 날 뉴스에 나왔었다. 법의학자가 되겠다며 관련 서적을 잔뜩 읽고 움베르트 에코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을 특히나 좋아했던 친구인데. 융의 동시성 이론에 대해서도 추후에 좀 더 알아보고 싶다. 무의식에서 시공간을 상대화 할 수 있다니.

 

267 내적 체험의 모험, 영적인 모험은 많은 사람에게는 친숙하지 않다.정신적인 실재가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파문에 해당한다.

 

269 그러나 이러한 재능이 기묘하고도 꺼림칙한 정신적인 기질 속에 뿌리박고 있어, 우리는 그것이 천재성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단편적인 발달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사회적 평지에서 사람들이 만나게 되리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영혼의 자원들이 사실 같지 않은 황당한 상황에서 꽃을 피우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우와~ 표현 봐라.

 

272 심리적 수준이 다른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의 만남은 나로서는 유명인사들과의 단편적인 대화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가 있었다. 나의 생애에서 가장 아름답고 큰 성과가 있었던 대화들은 이름없는 사람들과의 대화였다.

 

프로이트와의 만남

 

277 나중에 나는 그러한 사례들을 프로이트에게 제시했으나, 그는 성욕 외의 다른 요인들은 원인으로 여기려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프로이트는 기승전성()이 너무 강했다.

 

281 내가 아는 바로는 과학적 진리는 얼마 동안만 만족스러운 가설이지 모든 시대에 걸친 교리는 아니었다.

우리 융 할배 융통성 있으시네. 마음에 든다.

 

285 그는 한쪽 면에만 치우쳐 있어, 바로 그러한 이유로 나는 그에게서 비극적인 모습을 본다. 그는 위대한 인물이었으며, 더 나아가 그 무엇에 홀린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어딘가에 너무 꽂혀 있으면한계가 있고, 극단이라는 비극으로 이끌려진다. 따라서 대극으로서의 통합이 중요한 것이다. ‘평형추가 있어야 한다.

 

288 모든 것은 지나간다.

=모든 것은 변한다.

 

289 마치 나의 횡격막이 철판으로 되어 있고 그것이 벌겋게 뜨거워져 한껏 달아오른 둥근 천장처럼 변해가는 느낌이었다. / “이것은 소위 촉매에 의한 외면화 현상의 한 가지 예가 될 것입니다.”

이게 동시성 현상을 말하는 건가?

 

294 최고의 분석가들에게도 꿈의 수수께끼를 풀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일 수 있는데 작년에 <홍루몽>을 읽으면서 등불 수수께끼 놀이 장면에서 감탄했었다. 옛날 사람들은 이런 수수께끼를 어떻게 만들어내고 어떻게 풀었을까. 분석하는 머리로는 고안하기도 풀기도 힘든 수수께끼. 수수께끼를 풀려면 상징에 강해야 하고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것 사이에 연결된 보이지 않는 끈을 볼 줄 알아야 한다.

 

295 “하지만 나의 권위를 위태롭게 할 수는 없어!” 그 순간 그는 권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때의 그 말이 나의 기억에서 영 잊혀지지 않았다. 그 말 속에 이미 우리 관계의 종말이 예시된 셈이었다. 프로이트는 개인적 권위를 진리보다 더 내세웠다.

융은 294페이지에서 나는 진리탐구에 관심이 있는 것이지 개인적인 명성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라고 한다. 이게 올바른 태도일 것. 프로이트도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을 건데. 진부함이 없는 그의 도발적 태도는 개인적 명성에의 집착을 버렸다면 더 의미 있게 발전했을 건데.

 

296 그 뒤에서 지하실로 통하는 돌계단을 발견했다.

융의 꿈은 어릴 때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종종 등장하는 것 같다. 내면으로 내려가는 것이겠지. 그리고 예의 그 돌!

 

300 꿈도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어떤 것을 표현하려고 한다.

꿈의 표현과 드러냄. 상징이 말을 거는 것이다. ‘자아는 응답하라.

 

309 프로이트는 문자주의 해석에 집착하여 상징으로서의 근친상간의 영적인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프로이트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의 해석자라고 한다면 융은 행간을 읽는 자라 하겠다. 결국은 평행선을 달리다 이별하게 되는구나.

 

310 사람들은 나의 책을 쓰레기라고 내놓고 말했다. 나는 신비주의자로 간주되었고, 이것으로 사태는 끝장을 보게 되었다. 오직 리클린과 메더 둘만이 내 곁에 머물렀다.

 

나는 희생장이 나 자신의 희생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통찰로 나는 다시 집필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도 나의 견해를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예상했지만 말이다.

 

311 그가 우리 문화에 준 충격은 무의식으로 통하는 길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는 꿈을 무의식과정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정보원으로 인정함으로써, 잃어버려 이제는 어쩔 수 없다고 여겨진 가치를 과거와 망각으로부터 되찾아왔다. (1주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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