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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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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8일 06시 23분 등록

『사기열전 12 of 2

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민음사

 

24주차 (9/11~9/17)

티올(윤정욱)

 

<INTRO>

 

# 사기(史記)의 매력은?

 

# 어떻게 하면 사기(史記)를 색다르게 읽을 수 있을까?

è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술” + “개인의 주관적 평가 그리고 역사의식

è 70, “태사공자서(太史公字序)”. 본문 구성의 원리 및 저작 의도 포.

 

# 사기(史記) 하면 떠오르는 단어들 :

è 사마천, 궁형, 역사서, ()나라, 삼국사기(三國史記), 역사(歷史) 기술(記述), 역사(歷史) 기록()

 

# 사마천은 어떻게 사기(史記)를 썼을까? 사마천은 사기를 집필하면서 어떤 고전 자료를 참조 했을까?

è 공자의 『춘추』

 

# 사마천의 사기(史記)가 담고 있는 역사는 언제부터 언제까지?

è 기전체 역사서인 『사기』는 고대 중국의 전설시대부터 한 무제 원수(元狩) 원년인 BC.122년까지 총 3천여 년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1. 작가 분석

 

가.   사마천은 누구인가? : 1주차 작성 분

 

나.   사마천이 『사기』를 쓴 목적은 무엇인가? : 1주차 작성 분

 

다.   사기의 구성 :

 

# 전체 #

 

√ 취지적 측면 : “하늘과 인간관계를 탐구하고, 과거와 현재의 변화를 꿰어 일가를 이루고자 한” 역사서. 《태사공서》 도합 130, 52 6500.

 

√ 내용 및 특징적 측면 : 「본기」(12), 「표」(10), 「서」(8), 「세가」(30), 「열전」(69), 「자서」(1)를 유기적으로 결합한 사마천 당대의 진보적 통사이자 세계사. 인간을 주체로 한 역사방법을 체계화한 당대의 가장 참신하고 혁신적인 역사서.

 

 

# 본기 (1~12, 12) #

 

√ 취지적 측면 : “흩어진 천하의 옛 일들을 수집 · 망라하여 제왕 행적들의 시말과 성쇠를 탐구 · 관찰한 다음, 사실에 근거하여 위로 3대의 역사를 간략하게 추구하고, 아래로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12본기를 서술.

 

√ 내용 및 특징적 측면 : 제왕을 중심으로 연 · 월에 따라 치적과 각 방면의 중요 사건을 기록하되, 유명무실한 제왕(한 혜제)은 본기에 편입시키지 않고, 한 시대를 풍미한 항우를 본기에 편입시켰으며, 실권을 휘둘렀던 여후를 본기에 편입시키는 등 계기적 · 합리적 · 진보적 · 파격적 · 거시적 · 역사관을 보여줌.

 

 

# (13~22, 10) #

 

√ 취지적 측면 : “사적에는 시대가 같은 것도 다른 것도 있어 연대치가 분명치 않으므로 10표를 만듦.” 「삼대세표」, 「십이제후연표」, 「육국연표」, 「진초지제월표」, 「한흥이대 제후왕연표」, 「고조공신후자연표」, 「혜경간후자연표」, 「건원리애후자연표」, 「건원이래왕자후자연표」, 「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

 

√ 내용 및 특징적 측면 : 시간을 축으로 삼고 표 형식으로 세계 · 인물 · 역사사실을 나열하여 맥락을 밝힘. 사료의 많고 적음, 사실의 신뢰도, 대상의 비중에 따라 연 · 월표로 나눔. 본기와 더불어 역사를 시 · 공간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

 

 

# (23~30, 8) #

 

√ 취지적 측면 : “시대에 따른 예악의 증감, 율력의 바뀜, 병권, 산천, 귀신, 하늘과 인간관계 등에 대해 그 득실과 폐단을 살피고 변화를 꿰는 내용.” 「예서」, 「악서」, 「월서」, 「역서」, 「천관서」, 「봉선서」, 「하거서」, 「평준서」.

 

√ 내용 및 특징적 측면 : 인물 중심의 기전체 역사서에서 부족하거나 없는 사회 · 문물제도에 대한 발전적 내용을 보완하기 위한 배려. 사회경제 기초(평준 · 하거), 정치제도(예악 · 율 · 역), 천문(천관), 종교(봉선)의 변화 과정이 일목요연하게 제시됨.

 

 

# 세가(31~60, 30) #

 

√ 취지적 측면 : “별들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 30개 수레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에 집중되어 무한히 굴러가듯, 신하들을 여기에 비유하여 그들이 충성으로 천자를 받드는 모습을 내용으로 삼음.” 「오태백세가」~「삼왕세가」.

 

√ 내용 및 특징적 측면 : 역사를 움직인 주체적 인물들에 대한 기록으로, 그들은 당시 역사의 중심이었음. 그 인물들은 어느 한 공간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시간을 지배한 역사의 동력들이었다. 농민봉기군 진섭, 유가의 창시자 공자를 세가에 편입한 파격도 돋보임.

 

 

# 열전(61~129, 69) #

 

√ 취지적 측면 : “정의롭게 행동하고 남에게 억눌리지 않는 기개로 세상을 대체하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천하에 공명을 떨친 사람들의 일들을 내용으로 삼음.” 「백이열전」~「화식열전」.

 

√ 내용 및 특징적 측면 : 다양한 인간상, 각계각층의 활약상, 주위 세계에 대한 인식 등을 합리적 분류와 의미심장한 배열과 대비로 총망라한 전기문학의 백미. 역사의 여러 측면을 생동감 넘치게 파노라마처럼 펼친 장쾌한 스펙터클 서사시.

 

 

# 태사공자서(130, 1) #

 

√ 취지적 측면 : “흩어져 있는 사적을 모으고 육경을 보완하여 일가의 말()을 이룬 것. 육경에 대한 다른 견해들을 모아 취사선택한 다음, 백가의 이런저런 말들을 다듬은 것.” 사마씨의 가계, 아버지 사마담과 자신의 생애 서술.

 

√ 내용 및 특징적 측면 : 『사기』를 서술하게 된 경위와 129권의 취지, 개략적 내용을 소개하는 동시에 사마천 자신의 역경을 비교적 상세히 소개한 기록. 울분과 비장함으로 가득 찬 『사기』 이해를 위한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안내문.

 

 

# 기타 #

 

사마천은 열전을 구상하게 된 취지를 마지막 권인 「자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의롭게 행동하고, 기개가 넘쳐 남에게 억눌리지 않으며, 세상에 처하여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명을 천하에 세운 사람들의 일을 내용으로 열전 70을 지었다.

 

사마천의 이 진술은 열전을 구상한 취지일 뿐만 아니라 열전에 소개된 인물들을 선정한 기준이기도 하다. 정의와 기개로 어떤 불의에도 굽히지 않고 행동한 사람들, 시세를 잘 살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의지와 사상을 드러낸 사람들, 천하에 공명을 떨친 인물들을 골라 열전을 구성한 것이다. 요컨대 특정한 시대에 나름의 역사적 역할을 수행한 인물들에 대한 기록으로서 열전을 남긴 것이다.

 

하지만 열전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사마천은 시대의 변화에 적응했는가, 역사가 던진 기회를 잡고 자신의 역사적 능동성을 발휘했는가에 더욱 비중을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열전은 역사라는 시 · 공간 속에서 한 인간의 행동을 추적하되, 그 행동이 시대의 요구와 변화의 흐름 속에서 얼마나 주동적이고 주체적이었느냐에 시종 초점을 맞추어 전개한 대하 역사 드라마라 할 수 있다.

 

 

라.   사기 열전 이란? : 1주차 작성 분

 

 

마.   열전이란 무엇인가? :

 

# 열전(列傳)이란?

 

열전이란 말을 풀이할 때 ()’이 배열이나 서술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데에는 의견이 대체로 일치하는 듯하다. ‘()’은 본래 경전의 주석을 가리키는 말로 스승과 제자 사이에 구두로 전해진 것을 의미하며, 전통적으로 전기로 받아들여져 왔다. 좀 더 구체화시켜 이야기 정도로 해석해도 큰 무리는 없다.

 

 

바.   사기 열전의 의의 : 1주차 작성 분

 

 

사.   사마천의 편지 (사기를 완성하고 나서), 보임안서

 

√ 저는 천하의 산실된 구문(舊聞)을 수집하여 행해진 일을 대략 상고하고 그 처음과 끝을 정리하여 성패흥망의 원리를 살펴 모두 130편을 저술했습니다. … 그러나 초고를 다 쓰기도 전에 이런 화를 당했는데, 나의 작업이 완성되지 못할 것을 안타까이 여긴 까닭에 극형을 당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진실로 이 책을 저술하여 명산(名山) 보관하였다가 내 뜻을 알아줄 사람에게 전하여 촌락과 도시에 유통되게 한다면 이전에 받은 치욕에 대한 질책을 보상할 수 있을 것이니 비록 만 번 주륙을 당한다 해도 어찌 후회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지혜로운 이에겐 말할 수 있지만 속인에겐 말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사마천, ‘임안에게 보낸 편지’(報任安書) 중에서

 

[네이버 지식백과] 사마천 [司馬遷] - 중국 역사학의 아버지 (인물세계사)

 

모진 치욕을 당하기로는 궁형보다 더한 것이 없소이다. ······ 내가 화를 누르고 울분을 삼키며 옥에 갇힌 까닭은 차마 다하지 못한 말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였소.

 

√ “대야를 머리에 인 채 하늘을 볼(대분망천(戴盆望天)) 수 없기에 빈객과의 사귐도 끊고 집안일도 돌보지 않고 밤낮없이 미미한 재능이나마 오로지 한마음으로 직무에 최선을 다해 주상의 눈에 들고자 했습니다.

 

√ 사마천은 “이것은 나의 죄로다, 이것은 나의 죄로다! 아무 쓸모없는 불구의 몸이 되었구나.”라고 자책했다. 마음이 울분으로 가득 차서 미친 사람처럼 곳곳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치욕과 울분도 『사기』의 완성을 막지 못했다. 그는 곧 마음을 다잡고 남은 힘을 『사기』에 쏟았다.

 

 

II.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문구들

 

< 9 : 소진(蘇秦) 열전>

 

√ 소진(蘇秦)은 누구인가? (p225) : 소진은 동주(東周) 낙양 사람으로 스승을 찾아 동쪽의 제나라로 가서 귀곡선생에게 배웠다. 세상에서는 소진을 나라를 팔아먹은 반역의 신하로 일컫지만, 합종에 성공하여 진()나라 병사가 15년 동안 동쪽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데 크게 공헌한 점은 부인할 수 없다.

 

√ 주요 내용 (p225) : 전국책(戰國策)에서 자료를 취한 이 편은 소진과 그의 두 동생 소대, 소려의 열전을 묶은 것이다. 내용상 이 편은 소진이 합종에 성공하여 잠시나마 여섯 나라의 재상이 되어서 혁혁한 사적을 세우는 부분과, 소대와 소려가 연나라를 위해 모사를 꾸며 제나라를 깨뜨리는 사적을 기록한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생각할 거리 : 소진에 의해 연결 된 여섯 나라의 합종이 깨어지게 된 이유는?

 

è 소진에 의해 여섯 나라가 합종을 맺은 지 15, () 나라는 제나라와 위나라를 속여 함께 조나라를 치게 하여 합종 약속을 깨뜨리려고 한다. 조나라 왕이 소진을 크게 꾸짖자, 제나라의 배신 행위에 보복하겠다며 소진은 조나라를 떠난다. 이로서 합종 약속은 완전히 깨져버렸다. (본문 p249 참조) 합종은 태생적으로 연합군들의 강력한 상호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멀리 있는 진나라를 치기 위해서 자신들의 성문을 비워두었을 때, 바로 옆 이웃나라에서 자신들의 성을 공격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한 신뢰의 담보를 소진이라는 정치가 한 사람의 세치 혀로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연합군의 합종은 언제 깨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적과의 동침이었다.

 

(244) 소진은 X나라 X왕에게 설득하며 말했다. “X나라는 천하에서 강한 나라이고 왕은 천하에서 현명한 왕입니다. (중략) ()나라는 X나라를 가장 방해되는 나라로 여기고 있습니다. X나라가 강해지면 진나라는 약해질 것이고, 진나라가 강해지면 X나라가 약해질 것이니 그 형세는 함께 설 수 없습니다.

 

è 아부의 왕, 소진(蘇秦).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변절자의 이미지가 강하다고 한다. 그러나 사마천은 그의 업적에 더 많이 집중하고 있는 듯 하다. 그는 어찌되었든 전국 시대 힘의 균형추가 상앙의 강력한 법제 정치를 통해 힘을 키운 진()나라로 집중되고 있을 때, 다른 여섯 나라 (, , , , , )를 돌며, 남은 나라들끼리라도 뭉쳐야 한다고 유세를 하며 각 나라의 왕을 만나 직접 설득하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러한 그의 노력은 빛을 받았고, 실제로 진나라를 제외 한 6개 나라가 약 15년 간 상호 협력 하에 진()과의 투쟁을 계속해 나간다. 바로 합종(合從)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소진이 각 지역의 왕들을 설득하며 유세할 때 사용했던 말들이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X 표시된 부분에 다른 다섯 개 나라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넣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상대방을 띄워주고, 기분 좋게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꼭 필요한 노하우임에 틀림 없다.

 

(248) 소진은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이 한 몸도 부귀해지자 친척들이 두려워하고 가난하고 천하면 업신여기는데, 하물며 뭇사람들임에랴!”

 

è 여섯 나라의 재상이 된 소진을 배웅하기 위한 수레가 왕의 행차와 견줄 만 했다고 한다.

 

(254) [연나라] 이왕의 어머니는 [연나라] 문후의 아내인데 소진과 사사로이 정을 통하였다. 연나라 이왕은 이 사실을 알았지만 소진을 더욱 잘 대우했다. 소진은 죽게 될까 두려워 연나라 왕을 설득 했다.

 

è 소진은 분명 상황을 파악하고 상대를 설득하는 능력은 탁월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런 그의 재능이 순간의 고비를 넘기는 데 낭비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의 꿈꿨던 합종을 통한 전국 시대의 힘의 균형은 어쩌면 그와 같이 모래 위에 쌓은 성과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268) 태사공은 말한다.

소진의 형제 세 사람은 모두 제후들에게 유세하여 이름을 드날렸으며, 그들의 술수는 권모와 변화에 뛰어난 것이었다. (중략) 소진이 보통 사람의 집에서 일어나 여섯 나라를 연합시켜 합종을 맺게 한 것은 그 지혜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는 사실을 뜻한다.

 

 

< 10 : 장의(張儀) 열전>

 

√ 장의(張儀)는 누구인가? (p269) : 소진과는 달리 장의는 연횡파의 대표 인물이다. 전국시대 중기무렵 진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나머지 여섯 나라가 합종으로 맞서자 진나라의 장의는 각 나라와 개별적으로 동맹을 맺어 합종을 깨뜨리고, 제나라와 초나라를 이간시키는 방법을 써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

 

(281) 신이 듣건대 깃털도 많이 쌓으면 배를 가라앉히고, 가벼운 물건도 많이 실으면 수레의 축이 부러지며, 여러 사람의 입은 무쇠도 녹이고, 여러 사람의 비방이 쌓이면 뼈도 녹인다고 합니다.

 

(285) 초나라 왕은 [진진의 말을] 듣지 않고 결국 군사를 일으켜 장군 굴개에게 진나라를 치도록 하였다. 진나라는 제나라와 함께 초나라를 공격하여 8만 명의 목을 베고 굴개를 죽였으며, 마침내 단양과 한중까지 빼앗아 갔다.

 

è 하루가 멀다 하고 전국 각지에서 사상가들이 나라를 찾아와 저들의 사상과 논리를 바탕으로 유세를 펼친다. 결국에는 오늘 날 취집을 앞두고 입사 면접을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각 나라의 왕의 입장에서는 그 수많은 지식인들 가운데 누구의 의견과 혜안을 대안으로 삼아야 할까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결국 사람이 문제고, 사람을 깊이 알기가 제일 어렵다.

 

(296) 왕께서 합종을 신뢰하신 것은 소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소진은 제후들을 현혹시켜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제나라를 등지려다가 저잣거리에서 거열형으로 다스려지는 결과를 자초했습니다.

 

è 진나라를 위시하여 사자로 파견 된 장의가 조나라 왕에게 소진이 주장한 합종책을 반대하며 한 말이다. 조나라는 장의의 이 말을 듣고 합종을 파기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로도 각 제후국들은 합종과 연횡 정책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계속하게 된다. 그 외줄 위로 여러 제후국들의 소진, 장의와 같은 많은 종횡가들은 무게 중심을 잡으려 기우뚱거려 보지만, 한 나라에서 그 힘겨운 외줄 타기를 죽을 때까지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었다.

 

 

< 11 : 저리자 감무 열전 >

 

√ 저리자와 감무는 누구인가? (p311) : 저리지와 감무는 전국 시대 진나라의 대표적인 종횡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진시황이 여섯 나라를 통일하기까지 매우 큰 공을 세운 자들이다.

 

√ 주요 내용 (p311) : 이 편에서는 지혜주머니라고 불린 저리자, 저리자를 통해 혜왕을 만나 천하의 일을 언급한 감무, 그리고 그 손자 감라의 전기를 다루었다. (중략) 진나라 속담에 힘은 임비요, 지혜는 저리자라는 말이 있듯이 저리자는 동쪽의 여섯 나라 사이에 싸움을 붙여 진나라가 가만히 앉아서 그 이익을 챙기도록 하였다. 책사 감무는 기지가 많고 권모술수로서 이름이 뛰어났지만 포부를 펼치지 못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였고, 이 점을 사마천도 아쉬워하고 있다.

 

(313) 진나라 혜왕이 죽고 태자 무왕이 즉위했다. 무왕은 장의와 위장을 내쫓고 저리자와 감무를 좌승상과 우승상으로 삼았다.

 

(317) 감무는 하채 사람이다. 그는 하채의 사거 선생을 모시면서 백가의 술책을 배우고, 그 뒤 장의와 저리자를 통해 진나라 혜왕을 만났다.

 

(327) 감라는 감무의 손자이다. 감무가 죽은 뒤, 감라는 열두 살에 진나라 재상이던 문신후 여불위를 섬겼다.

 

è 훗 날 진나라의 재상이 되어, 날아가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무소불위의 권력과 일자천금의 일화로도 유명한 여씨춘추를 제작하게 되는 바로 그 여불위다.

 

(331) 태사공은 말한다.

저리자는 골육지친이니 중용되었던 것은 진실로 이치이다. 그러나 진나라 사람들이 그의 지혜를 칭찬하였으므로 그 사적을 많이 실었따. 감무는 하채의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몸을 일으켜 그 이름을 제후들 사이에 떨치고 강한 제나라와 초나라에서 중용되었다. 감라는 나이가 어리지만 한 가지 기묘한 계책을 생각해 내어 후세에 이름이 일컫어지게 되었다.

 

 

< 12 : 양후 열전 >

 

√ 양후는 누구인가? (p33) : 진나라 무왕이 죽고 소왕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선 태후가 섭정하고, 선 태후의 동생 양후가 실권을 휘둘렀다. (중략) 그러나 양후의 공과 권력이 커지면서 범저의 비방을 받고 소왕과 사이가 멀어지더니 결국 울분에 차 살다가 죽었다.

 

(343) 태사공은 말한다.

 

양후는 소왕의 친외삼촌이다. 진나라가 동쪽으로 땅을 넓히고 제후의 세력을 약화시키면서 한 때 천하에서 제()라 일컫고, 천하의 제후들에게 서쪽을 향해 머리를 숙이게 한 것은 양후의 공적이다. 그러나 그는 부유하고 존귀함이 최고에 이르렀을 때, 한 남자가 유세를 펼치자 신분이 꺾이고 권세를 빼앗겨 근심과 번민 속에서 살다가 죽었다. [왕족의 한 사람이 이렇거늘] 하물며 [진나라 벼슬아치가 된] 객경이야 어떠하겠는가?”

 

è 기원전 288년에 진나라 소왕과 제나라 민왕이 서로 앞 다투어 ()’라 일컬었다고 한다. 진나라는 서제(西帝), 제나라는 동제(東帝)라 했다. 그러나 곧 제나라가 라는 호칭을 버렸고 진나라도 취소했다고 한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멈추는 것이 어렵다. 바라는 것()을 이루는 것()는 것 보다 만족하고() 멈추는 것()이 더 어렵다.

 

 

< 13 : 백기 왕전 열전 >

 

√ 백기와 왕전은 누구인가? (p345) : 백기는 전국 시대 진나라의 유명한 장수로 공손기라고도 불렸다. 소왕 29년 초나라 수도 영을 쳐서 무안군으로 봉해졌으나 나중에 상국 범저의 시기를 받아 죽게 된다. 왕전은 진시황 때 장수이다. 그는 아들 왕분과 함께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는데 큰 몫을 했다.

 

√ 주요 내용 (p345) : 사마천은 이 편의 말미에 ()에도 짧은 데가 있고, ()에도 긴데가 있다라는 말을 인용한다. 백기와 왕전은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재능을 갖추어 천하를 무찔렀지만 진나라를 위해 천하를 지킬 수는 없었고, 심지어 자기 몸조차 온전하게 지키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 편에서는 진나라 통치자들의 잔혹한 모습과 군주와 대신들 간의 긴장 관계도 드러나 있다.

 

(349) 7월에 조나라 군대는 보루를 쌓아 지켰으나 진나라 군대가 다시 그 보루를 공격하여 도위 두 명을 사로잡고 그 진지를 깨뜨렸으며 서쪽 보루를 빼앗았다. 염파 장군은 보루를 더욱 튼튼하게 쌓고 진나라 군대에 대비했다. 진나라 군대가 여러 차례 싸움을 걸었지만 조나라 군대는 보루에서 나가 싸우지 않았다. 그러자 조나라 왕은 염파에게 나가 싸우지 않는다며 꾸짖었다.

 

è 조나라 왕은 부덕함이 아쉽다. 스스로가 장군으로 임명한 염파를 믿지 못하고, 결국 이간질에 속아 장군을 조괄로 교체하게 된다. 물로노 조나라 왕의 부덕함만을 아쉬워해서도 안 된다.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염파 장군 역시 조나라 왕에게 왜 자신이 보루를 쌓아두고 나아가 진나라 장수들과 싸우지 않는 것에 대해 미리 조나라 왕에게 아뢰고 보고 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보고는 항상 타이밍이 중요하다. 조나라 왕이 진나라의 첩자로부터 염파 장군에 대한 이간질을 듣기 전에 염파의 의중에 대해 미리 들었더라면 아마 이간질에 흔들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351) 마침내 조괄의 군사가 패배하니 병졸 40만 명이 무안군에게 항복했다. 이 때 무안군은 말했다. “(중략) 조나라 병사들은 마음을 잘 바꾸기 때문에 모두 죽여 버리지 않으면 뒤에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백기는 사람들을 속여 모조리 산 채로 땅속에 묻어 죽이고, 남은 어린 아이 240명만을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머리가 베이거나 포로로 사로잡힌 자가 이 때를 전후로 하여 45만 명이나 되었다.

 

(357) 왕전은 병사 60만 명을 이끄는 장수가 되었다. 시황제는 몸소 파수 가까지 나와 왕전을 전송했다. 왕전은 가는 도중에 훌륭한 논밭과 택지와 정원과 연못을 내려 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358) 그러자 어떤 사람이 말했다. “장군의 요청은 너무 지나칩니다.”

왕전이 말했다. “그렇지 않소. 진나라 왕은 포악하고 다른 사람을 믿지 않소. 그런데 지금 진나라 군사를 모두 나에게 맡겼고. 내가 자손을 위한 재산을 만들려고 많은 논밭과 정원과 연못을 요청함으로써 다른 뜻이 없음을 보여 스스로를 안전하게 하지 않는다면 진나라 왕은 가만히 앉아서 나를 의심할 것이오

 

è 뛰어난 군사는 병법에만 능통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줄 알아야 한다. 왕전은 시황제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60만 명의 군졸들을 통솔하고 있었음에도 끊임없이 물욕이 많은 사람인 것처럼 보여 시황제의 의심을 피했다.

 

(359) 진나라 군대는 승기를 잡고 형나라 땅의 성과 읍을 공략하여 평정했다. 1년 남짓해서 형나라 왕 부추를 사로잡고 끝내 형나라 땅을 평정하여 군현으로 만들었다. 또한 이곳을 발판으로 해서 남쪽으로 백월의 군주를 정복했다. 왕전의 아들 왕분은 이신과 더불어 연나라와 제나라 땅을 평정했다.

 

 

< 14 : 맹장 순경 열전 >

 

√ 맹자와 순경은 누구인가? (p361) : 맹자는 공자 학설의 단순한 계승자라기 보다는 유가 사상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유가 사상을 더욱 드러내고 발전시킨 인물로 평가 된다. 순자는 전국시대 말기 사람으로 맹자를 이어 유가 사상을 더욱 체계화시킨 대표 인물이지만 맹자의 사상과는 다른 각도에서 이해해야 한다. 순자가 내세운 학설은 기본적으로 가 계층 간의 불화와 갈등을 조정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 주요 내용 (p361) : 사마천은 음양가와 도가의 학문이 사실상 근본이며 기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가의 위대한 스승 맹자와 순자의 사적에 관해서는 짧게 다루고 음양오행가와 도가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다루었다.

 

(363) 태사공은 말한다.

나는 <맹자>라는 책을 읽다가 양나라 혜왕이 맹자에게 어떻게 하면 우리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 구절에 이르러 일찍이 책 읽기를 멈추고 ! 이익이란 진실로 혼란의 시작이로구나라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è 사마천의 맹자와 그의 학문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볼 수 있다.

 

(370) 추연의 학설은 광대하며 변론에 뛰어났고, 추석의 문장은 매우 완벽하지만 실행하기 어려웠으며, 순우곤과는 오랫동안 같이 지내면 때때로 좋은 말을 들을 수 있었다.

 

 

< 15 : 맹상군 열전 >

 

√ 맹상군은 누구인가? (p373) : 맹상군은 제나라 종실 대신인 전영의 서자로 빈객과 선비들을 좋아했다. 그는 조나라 평원군 조승, 위나라 신릉군 무기, 초나라 춘신군 황헐을 비롯 해 선비를 기르기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는데, 각기 식색 3000여명을 거느려 흔히 전국 사공자라고 불렸다.

 

√ 주요 내용 (p373) : 맹상군이 풍환을 비롯해 개 짖는 소리와 닭 울음소리를 흉내 내던 무리를 빈객으로 불러들였을 때, 그들이 맹상군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점에서 맹산군의 인물 평가 능력을 엿볼 수 있다. 사마천이 맹산군을 냉소적으로 보는 면이 없지 않으나 맹상군이 선비를 우대하는 모습에 대해서만은 꽤 우호적이다. 이는 사마천이 하층 인물의 능력과 재능에 대해서도 좋은 인식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378) 맹상군은 손님과 앉아 이야기할 때 늘 병풍 뒤에 시사(기록하는 사람)를 두어 손님의 친척이 있는 곳을 묻고 그 내용을 적어 두도록 했다. 손님이 나가면 맹상군은 바로 심부름꾼을 보내 그의 친척을 찾아가 예를 갖추고 선물을 주곤 했다.

                        

è 손님을 대하는 마음이 아주 극진한 맹상군.

 

(394) 풍환이 말했다.

살아 있는 것이 반드시 죽게 되는 것은 만물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부유하고 귀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가난하고 지위가 낮으면 벗이 적어지는 것은 일의 당연한 이치입니다. (중략) 이제 당신이 지위를 잃자 빈객이 모두 떠나가 버렸다고 해서 선비들을 원망하여 일부러 빈객들이 오는 길을 끊을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빈객들을 대우하십시오.”

 

è 3,000여명의 식객을 모아 대접한 맹상군은 그 가운에 자신을 진나라 소왕의 위협으로부터 목숨을 구해준 천한 신분은 사람도 있었고, 그가 제나라 왕으로부터 모든 지위를 박탈 당했을 때 다시 그의 신분과 직위를 복원시켜준 풍환 같은 사람도 있었다. 사마천은 호의적인 태도로 그에 대해 기술 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인재를 등용하여 거두려고 했던 그의 모습에 대해서는 우호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16 : 평원군 우경 열전 >

 

√ 평원군과 우경은 누구인가? (p397) : 평원군 조승은 전국 시대의 네 공자 중에서 비교적 평범한 인물이다. 사마천은 그를 평원군은 혼탁한 세상에서 새가 하늘 높이 날듯이 재능과 지혜가 있는 훌륭한 공자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우경은 당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 나라 저 나라를 주유하며 유세하던 다른 종횡가들과는 달리 끝까지 합종을 지키며 진나라에 대항하여 조나라에 충성을 다하였다. 이에 사마천은 그를 찬미하는 내용의 글을 많이 짓기도 하였다.

 

 

< 17 : 위공자 열전 >

 

√ 위공자는 누구인가? (p419) : 신릉군 무기(無忌)는 전국 시대 네 공자 중 가장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서 걸출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는데, 이는 그가 선비를 대하는 남다른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신릉군의 일생에서 가장 두드러진 공적은 조나라를 도와 진나라를 무찌른 일인데, 이는 빈객들의 도움이 있기에 가능했다. 또한 그는 빈객들로부터 충성과 존경을 얻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이었다.

 

√ 주요 내용 (p419) : 이 열전에 함께 나오는 후영, 주해, 모공, 설공도 평범한 인물이 아니다. 사마천은 신릉군이 예의 바르고 어질며 나랏일을 중시한 것을 이상적으로 평가하여 높이 존경했다. 이 편에는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라는 유명한 말이 등장하는데, 선비를 예우하는 위 공자의 자세와 의기투합된 인물들의 활약상이 재미있는 일화와 함께 그려지고 있다.

 

(426) 공자는 ()왕의 허락을 얻을 수 업삳고 보고, 조나라를 망하게 하고 자기 혼자만 살아남을 수는 없다는 결심을 했다. 그래서 빈객들에게 청하여 수레와 기마 100여승을 마련하고 빈객들을 이끌고 진나라 군대와 부딪쳐 조나라와 같이 죽기로 했다.

 

è 자신을 믿어준 조나라 평원군과의 맹약을 지키고자 했으나, 위나라 왕은 조나라를 치고 있는 진나라의 협박이 무서워 군대를 출정시키는 척만 하고 함께 싸우지는 못한다. 다급한 마음에 자신들을 믿고 따르는 빈객 일부와 함께 자신이라도 힘을 보태어 싸우다 죽고자 하는 심정으로 위공자 무기는 출정을 떠난다. 선비는 자신을 믿어준 사람에게 목숨이라도 내 놓을 수 있다는 의지의 발현이다. 그에게 많은 빈객들과 선비들이 모여 힘이 되고자 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428) 후영이 말했다.

제 친구 백정 주해를 데려가십시오. 그는 힘이 센 장사입니다. 진비가 이쪽 요구를 들어주면 다행이지만 들어주지 않으면 주해를 시켜 쳐 죽이십시오.”

 

이 말을 듣고 공자가 울먹거리자 후영이 물었다.

공자께서는 죽는 게 두렵습니까? 어째서 울먹이십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진비는 용맹스러운 노장이니 내가 가도 명령을 듣지 않을 테고, 그러면 그를 반드시 죽여야 하기 때문에 우는 것이지 어찌 죽음 따위를 두려워하겠소?

 

è 갈수록 신릉군의 매력이 넘쳐난다. 모든 사람을 애틋하게 대하고 사랑하는 그의 인품이 느껴진다.

 

(430) 공적에 대해 교만한 마음이 생긴 위공자에게 빈객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세상일에는 잊으면 안 되는 것이 있고, 또 잊어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남이 공자에게 베푼 은덕은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공자께서 다른 사람에게 베푼 은덕은 잊으시기 바랍니다

 

(433) 공자는 다섯 나라 (, , , , )의 군사를 이끌고 진나라 군사를 하외에서 깨뜨려 (진나라 장수) 몽오를 달아나게 했다. 이 승세를 타고 진나라 군대를 뒤쫓아 함곡관에 이르러 진나라 병사를 압박하니 진나라 병사들은 감히 함곡관에서 나오지 못했다. 이때 공자는 천하에 위세를 떨쳤다. 제후의 빈객들이 공자에게 병법을 올리자 공자가 그것에 모두 이름을 붙였는데, 세상에서는 이것을 위공자병법이라 불렀다.

 

 

< 18 : 춘신군 열전 >

 

√ 춘신군은 누구인가? (p437) : 춘신군은 초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헐이고 성은 황이다.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며 배워서 보고 들은 것이 넓었으며 초나라 경양왕을 섬겼다. 경양왕은 그가 변론에 뛰어남을 알고 진나라에 사자로 보냈다.

 

 

< 19 : 범저 채택 열전 >

 

√ 범저와 채택은 누구인가? (p455) : 범저는 위나라 사람이고 채택은 연나라 사람이다. 이들은 고향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불우하게 살다가 서쪽 진나라로 들어가 재사이 되어 공을 세우고 이름을 떨쳤다. 사마천은 범저와 채택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들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자신들의 뜻을 잃지 않았고 공을 이룬 뒤에는 물러나 어진 사람을 따랐기 때문에 특별히 이들에 관한 열전을 만든 것이다.

 

√ 주요 내용 (p455) : 전국시대 말기에 범저는 진나라 소왕을 도와 멀리 있는 나라와 우호관계를 맺어 가까이 있는 나라를 공격하는 계책을 세웠다.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데 장애가 되던 강국 조나라를 장평 싸움에서 무너뜨리고, 또한 주변의 한나라와위나라와 초나라를 멸망시켰다.

 

(462) “주나라에는 지액이 있고, 송나라에는 결록이 있으며, 양나라에는 현려가 있고, 초나라에는 화박이 있다. 이 네 가지 보옥이 흙 속에서 나온 것으로 뛰어난 장인들도 그 가치를 놓쳤지만 결국은 천하에서 이름난 기물이 되었다

 

 

< 20 : 악의 열전 >

 

 

< 21 : 염파 인상여 열전 >

 

 

< 22 : 전단 열전 >

 

< 23 : 노중련 추양 열전 >

 

 

< 24 : 굴원 가생 열전 >

 

 

< 25 : 여불위 열전 >

 

 

< 26 : 자객 열전 >

 

 

< 27 : 이사 열전 >

 

 

< 28 : 몽염 열전 >

 

 

< 29 : 장이 진여 열전 >

 

 

< 30 : 위표 팽월 열전 >

 

 

< 31 : 경포 열전 >

 

 

< 32 : 회음후 열전 >

 

 

< 33 : 한신 노관 열전 >

 

 

< 34 : 전담 열전 >

 

 

< 35 : 번역등관 열전 >

 

 

III.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하여 (독자의 눈으로) : 목차의 좋은 점, 아쉬운 점, 잘못된 점을 분석

 

# 본문 시작 전에 역자의 요약 #

 

매 본문 시작 전에는 역자의 요약이 항상 실려 있다. 각 열전과 그 열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소개가 있는 장면이다. 분량을 떠나 앞으로 소개 될 열전과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핵심을 잘 집어냈다고 생각한다.

 

 

2) 보완이 필요한 점 (독자의 눈으로)

 

# 전체 사기 속의 열전이 가지는 의미를 조명해 본다면? #

 

전체 사기의 구성을 간단히 언급하고, 그 속에서 사기열전이 갖는 의미를 간략하게 나타내면 어땠을까?

 

 

3) 이 책의 장점 (독자의 눈으로) : 이 부분이 이래서 좋았다, 이런 점이 이 책의 미덕이다 등등

 

# 본문 마지막에는 저자의 논평 #

 

각 열전의 마지막에는 태사공(사마천)의 논평으로 마무리가 된다. 열전 또는 열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평가에 대한 부분이다. 서슬 퍼런 낫으로 가차 없이 내리치는 사마천의 평가는 그 대상이 당대에 받았던 평가와 다른 부분도 많다. 이러한 점은 기존의 역사서들이 당시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들을 단순히 나열해 놓았다면 사기(史記)는 생동감있는 문체로 역사적 사실과 그것에 대한 의미까지 재조명하는 의의가 있다. 아래의 예를 보면 더욱 잘 알 수 있다.

 

(115) 태사공은 말한다.

내가 <사마병법>을 읽어 보니 그 개략이 넓고 크며 깊고 원대하여 설령 삼대(, , )의 제왕들이 전쟁에 나서도 그 의미를 다 이해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장을 보면 과장된 점도 없지 않다. 양저는 보잘 것 없는 작은 나라를 위해서 군대를 움직였으니, 어느 틈에 <사마병법>에서 말하는 겸양의 예절을 지킬 수 있었겠는가? 세상에는 이미 <사마병법>이 많이 있으므로ㅗ 거론하지 않고 양저의 열전만을 지었다.

 

 

4)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저자의 눈으로) : 내가 저자라면 이 책에서 아쉬웠던 점을 이렇게 해결하겠다

 

# 사마천과 사기에 대한 역대 논평 수록 #

 

사마천과 그의 사기(史記)는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한 사기에 대한 후대 사람들의 논평을 함께 싣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역자가 모은 에필로그의 형식만으로도 충분하리라고 생각 된다. 아래는 후대 사람들의 평가로 흔히 알려진 내용들을 시대 순으로 정리한 자료다.

 

* 그 논리가 정연하고 정확하여 꾸임 없고 실제적이며, 야비하지 않은 점에 탄복하고 있다. 문장은 곧고 그 사실은 핵심을 찔러, 헛되이 칭찬하지 않았으며 말하기 어렵다고 숨기지 않았으니 ‘실록(實錄)’이라 할 만하다. - 한서』를 남긴 역사가 반고

 

* 경전을 꿰뚫었고, 과거와 현재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서 바로 잡았다. - 『사기』에 대한 대표적인 주석서인 『사기색인』을 남긴 당나라 때 사람 사마정(司馬貞)

 

* 사마천의 말은 두루 통하여 참으로 저술가 중에서도 깊은 못, 넓은 바다와 같은 존재다. - 당나라 때의 역사비평가유지기

 

* 한 왕조 사람으로 문장을 못한 사람은 없었으나 오직 사마상여와 태사공(사마천) · 유향 · 양웅이 단연 최고였다.······(사마천의 작품은) 씩씩하고 깊고 우아하고 힘차다. - 당나라 때 고문운동의 선구자 한유

 

* 자연스럽게 문장이 조화되어 물이 떨어지는 것 같지만 결코 새지 않으며, 단 한 글자도 보탤 것이 없다고도 했다. 글자의 선택은 고심을 거듭하여 한 글자도 뺄 수 없다. - 당나라 때 고문운동의 대표적 인물 유종원

 

* 문장은 호탕하고 기이한 기운이 넘쳐난다. - 북송의 시인 소식(소동파(蘇東坡))

 

* (문장은) 격랑이 몰아치듯 사납고 호탕하며, 동정호의 물결처럼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봄날의 짙은 향기처럼 여유롭고 맵시가 넘친다. 용과 호랑이가 뛰고 날 듯 천군만마를 호령하기도 하는가 하면 천지만물의 변화를 포착하여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도 슬프게도 만드는 변화무궁하다. - 북송의 문장가 마존(馬存)

 

* 제자백가의 저서들은 공허한 말들이 많아 역대로 실질적 자취를 남긴 것으로 기록할 만한 것이 없지만, 사마천 부자는 대대로 전적을 관장하며 사서 저술에 공을 들여 위로는 황제로부터 아래로는 진한에 이르는 역사책을 제대로 완성했다. 『사기』는 다섯 체제로 이루어져 있는데, 본기는 시간을 기록하고, 세가는 세대를 전하고, 표는 날을 바로 잡고, 서는 일을 분류했으며, 열전은 사람을 드러냈다. 백 세대가 지난다 해도 사관은 그 법을 바꿀 수 없고 학자는 그 책을 버릴 수 없다. 육경이 나온 뒤로 이 책(『사기』)이 있었을 따름이다. - 남송 시대 역사 평론가 정초

 

* 『사기』는 산천을 유람한 기록과 같다. 어떤 곳의 경치를 말하면서 앞에는 어떤 산이 있고 뒤에는 어떤 물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이것이 대가의 글이다. 다른 사람의 글은 밋밋하거나 작은 그림을 보는 정도인데, 사마천의 문장은 ‘장강만리도’ 같다. - 명나라 때 산문가 귀유광

 

* 오늘날 『사기』를 읽을 때 독자들은 「유협열전」에서는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게 될 것이고, 「굴원가생열전」을 읽으면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고, 장자 노중련의 열전을 읽으면 속세를 떠나고 싶을 것이다. 이광의 열전을 읽으면 자신이 전쟁에 나가고 싶어질 것이며, 석건의 열전을 읽으면 예절을 극진히 지키고 싶어질 것이며, 신릉군이나 평원군의 열전을 읽으면 인재를 기르고 싶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될까? 모든 내용이 각각 사물의 실정에 들어맞아 독자의 마음속 깊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몇몇 구절이나 글자가 독자들을 격발시키는 것은 결코 아니다. - 미상

 

* 예로부터 사마천은 문선이요, 이백은 시선이요, 굴원은 사부선이요, 유완은 주선이요, 한신은 병선이라 했는데 맞는 말이다. - 명나라의 정치가이자 문장가 모곤

 

* 사마천은 타고난 재능, 폭넓은 지식, 천년을 꿰뚫는 안목으로 『사기』를 창조했다. - 미상

 

* 『사기』의 체제는 역사서를 쓰는 역사학자들의 표본이자 새로운 예를 만든 태양과 별처럼 빛나는 것이다. - 명말청초의 문학가 전겸익

 

* 무릇 사마천의 빼어난 학식은 『춘추』 이후 유일했다. - 미상

 

* (『사기』는) 수천 년의 역사를 틀에 아우르고 백가를 울타리에 가두었다.······인간과 하늘의 관계를 시공 속에서 구명함으로써 일가를 이룬 책이다. - 청나라가 배출한 가장 뛰어난 학자 장학성

 

* 사마천은 과거와 현재를 참작하여 범례를 만들어 완전한 역사를 창조했다. 본기는 제왕을 기록했다. 세가는 제후국을 기록한 것이다. 10표는 시사를 연계했으며 8서는 제도를 상세히 고찰한 것이다. 열전은 인물에 뜻을 둔 것이다. 그런 다음 한 시대의 군주와 신하의 정치 그리고 득실을 한 편에 종합적으로 서술했다. 이로부터 범례가 정해졌고, 역대 사학자들 치고 그 범위를 벗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믿을 만한 역사가들이 지극히 떠받드는 원칙이 되었다. - 청나라 때의 걸출한 사학자 조익

 

* 사마천은 역사학계의 태조 대왕과 같은 존재다. - 미상

 

* 사마천은 정말 역사학의 조물주다. - 미상

 

* 『사기』 이전의 역사서는 사건만을 다룬 것이거나, 각 지방의 기록이거나, 한 시대의 기록에 지나지 않았다. 『사기』는 사마천이 알고 있는 시간 내에서 인류 전체가 자신의 문화를 가진 이래 수천 년의 총체적 활동을 한 용광로에 녹여낸 것이다. 이로부터 역사를 전체로 인식하고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진 · 한 통일 이후 문화가 상당한 정도로 발전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관념이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마천이 이러한 기운을 타고 나타난 것이다. 『사기』는 실로 중국통사의 창시자다. - 중국 근대 개혁사상가 양계초

 

* 무제 때 문인으로 부()라면 사마상여를 따를 자 없었고, ()이라면 사마천이 단연 으뜸이다. - 미상

 

* (사마천의 문장은) 역사 서술법에 얽매이지 않았고, 자구에 갇히지 않았다. 감정에서 출발하여 마음 가는 대로 문장을 구사했다. - 미상

 

* (『사기』는) 사가의 절창이요, 가락 없는 『이소』다. - 중국의 위대한 문학가 노신

 

*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나 죽음의 의미는 다 다르다. 중국 고대의 문학가 사마천은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이 있는가 하면 새털보다 가벼운 죽음도 있다’고 했다. 인민의 이익을 위해 죽는다면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며, 파시스트에게 몸을 팔고 인민을 착취하고 인민을 박해하는 사람의 죽은 새털만도 못하다고 할 것이다. - 모택동

 

* 사마천이라는 이 위대한 사학자는 실로 우리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남긴 『사기』는 중국 고대의 서사시에 부끄럽지 않으며 역사소설집으로도 부를 수 있다. - 역사학자이자 문학가인 곽말약

 

* 중국의 역사학이 독립된 학문으로 성립하게 된 것은 서한 때부터이며, 이 학문의 개산조는 위대한 역사학자 사마천이다. 『사기』는 중국 역사학의 출발점에 남은 불후의 기념비다. - 미상

 

* 『사기』는 기전체 사서이긴 하지만 사회를 중심으로 역사라 할 수 있다. - 미상

 

* 역사상 사회의 모든 계층 구석구석 각 방면의 동태에 주목하여 구체적이고도 생동감 넘치게 그려냈다. 그래서 나는 『사기』가 중국 최초의 방대한 사회사라고 생각한다. - 역사학자 전백찬

 

* 사마천 이후 역사를 시대의 백과전서로 보게 되었다. 따라서 사마천의 자료 취재는 지극히 폭 넓었다. 정치에서 경제까지, 전쟁에서 학술에 이르기까지 포함되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 그것이 쳐놓은 그물은 지극히 넓었다. 소위 문학사라는 것도 늘 이 포함하지 못할 것 없는 ‘시대의 백과전서’의 그물에 걸려든다. - 현대 작가이자 문학사가 정진탁

 

* 평소 한성을 문사의 고향이라 부르는 것은 한성이 유구한 역사의 문화명성이기 때문이며, 또 세계적인 역사문화의 명인 사마천의 고향으로 문화가 비교적 줄곧 발달했기 때문이다.······역대 왕조가 많은 명인을 배출했지만 그중에서 서한시대의 위대한 사학자이자 문학가이며 사상가였던 사마천이 가장 유명하다. 그리고 그의 굉장한 저서 『사기』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그 영향도 깊고 멀다. - 사마천의 고향 출신 작가 두붕정(杜鵬程)

 

* 1940 3월 내가 소련에서 연안으로 돌아온 그 다음 날, 주은래가 나를 데리고 모 주석을 만나러 갔다. 모 주석은 내게 악수를 청한 다음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다. 내가 한성 사람이라고 대답하자 모 주석은 ‘아! 사마천이 용문에서 태어나 하산지양에서 농사짓고 가축을 길렀다’고 했지. 이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생각했다. 모 주석이 전국 인민을 이끌고 밤낮으로 혁명에 여념이 없는데 『사기』를 잊지 않고 읽고 있고, 게다가 사마천의 고향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니 정말 대단하다. 사마천은 강직하여 아부하지 않았으며, 곧은 붓을 휘둘러 왜곡하지 않고 저술했다. 그래서 봉건 통치자 계급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제 천하는 인민의 천하다. 노동 인민이 집주인인 시대다. 우리는 깃발을 높이 쳐들고 씩씩하고 힘차게 사마천과 그의 책, 그리고 그의 정신을 선전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역사 본래의 면목으로 사마천에게 받아야 할 응분의 역사적 지위를 주어야 할 것이다. 그가 인류 역사문화에 공헌한 것처럼 세계가 그를 공인해야 할 것이다. 역사문화의 명인이 전국에 몇이나 되겠는가? 우리는 그의 책을 잘 읽고 그 사람을 배우고 그 정신을 드날려야 할 것이다. - 한성이 낳은 유명한 소련 전문가이자 러시아어 번역가 사철(師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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