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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6일 11시 52분 등록

열하일기 (熱河日記)

 

저자 연구

박지원(朴趾源: 1737.02.05 ~ 1805.10.20)

박지원은 1737(영조 13)에 한양의 서부 반송방 야동에서 태어났다. 박지원은 어린 시절 경기도관찰사를 지낸 할아버지인 박필균에게 글을 배웠다. 박지원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박지원에게 특별한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할아버지 박필균은 과거에도 급제하고 관찰사를 지내는 등 고위 관직에 있었으나 청렴했기에 집안은 가난했다. 가족은 십여 명이나 되었는데 마땅한 수입이 없었다. 관직에 있던 할아버지마저 물러나자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고, 이러한 대가족의 생계를 이끌어간 것은 형수 이씨였다. 가난이 계속되자, 박지원은 가족들과 상의하여 연암 골짜기로 이사했다. 박지원은 손수 잡목을 베어내고 돌부리를 캐내어 집을 짓고 지냈다.

이곳에서 형수 이씨와 함께 과일 나무를 키우고 연못에 고기를 키루는 등 살길을 모색했으나
이씨는 불과 일 년도 되지 않아 죽었다. 박지원은 탄식하며 이렇게 썼다.

선비 집안의 부인네들에게는 가난이 바로 병이요, 병이 바로 가난이다. 가난이라는 병이 단단히 엉겨 붙어 벗어내고 떼어버릴 길이 없어, 집집마다 똑같은 증세요, 사람마다 매한가지다.”

형수가 죽었을 때 박지원이 묘갈명에 쓴 기록을 보면, 그가 얼마나 가난했고 형수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 수 있다.

 

박지원은 16세가 되었을 때 이보천의 딸과 혼인했다. 가정을 이루었으나, 박지원은 가난을 면할 수 없었다. 이보천은 사위인 박지원에게 <맹자>를 가르쳤다. 16세에 『맹자』를 가르쳤다는 것은 이미 박지원의 학문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책 읽는 속도가 느렸다.

박지원은 책을 빠르게 읽지도, 외우지도 않았다. 그는 오로지 책의 내용을 심문하듯이 따지고 연구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자연히 책 읽는 속도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성리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실천한다는 뜻의 거경과 의미를 헤아리는 궁리를 합친 거경궁리의 방법으로 학문에 접근했다. 책을 느리게 읽는다며 타박하는 사람에게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책을 외우고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거경궁리(居敬窮理)라고 하지 않는가? 문장의 내용을 심문하듯이 연구하고 깨달아 실천해야 한다.'

박지원은 이양천에게 학문을 배울 무렵인 스무살 즈음에 우울증을 앓아 밤에 잠이 오지 않고 세상 모든 일이 귀찮아졌다. 박지원의 우울증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박지원은 영조 때의 인물이다. 숙종이나 경종 때처럼 당쟁으로 수많은 선비들을 한꺼번에 죽지는 않았으나 당쟁이 치열했다. 과거를 보고 조정에 나가 벼슬을 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가난으로 학문을 계속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이러한 환경이 우울증을 앓게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지원이 29세가 되었을 때홍대용이 작은아버지 홍억을 따라 연경에 들어갔다. 박지원은 연경에서 돌아온 홍대용의 이야기에 큰 충격을 받고 44세가 되었을 때 자신도 연경에 들어가 저 유명한 『열하일기』를 남긴다. 박지원은 『열하일기』도 교훈을 남기기 위해 썼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풍속이나 관습이 치란(治亂)에 관계되고, 성곽이나 건물, 경목(耕牧)이나 도야(陶冶)의 일체 이용(利用) 후생(厚生)의 방법이 모두 그 가운데 들어 있어야만 비로소 글을 써서 교훈을 남기려는 원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리라.”

 

연경에 도착한 박지원은 번화한 시가지와 문물을 살피고 청나라의 좋은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열하일기>에 담았다.

'청나라는 과연 대국이구나. 청나라의 문물이 이토록 번성하고 있는데, 어찌 우리 조선의 선비들은 명나라만 찾고 청나라를 배격하는가?'

열하일기는 기행문만은 아니다. 박지원은 호질에서 호랑이의 입을 빌려 이기적인 인간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대개 제것이 아닌 것을 취함을 도()라 하고, 남을 못살게 굴고 그 생명을 빼앗는 것을 적()이라 하니, 너희들이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쏘다니며 팔을 걷어붙이며 눈을 부릅뜨고, 함부로 남의 것을 착취하고 훔쳐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며, 심지어는 돈을 형이라 부르고 장수 되기 위해 아내를 죽이는 일까지도 있은즉, 이러고도 인륜의 도리를 논할 수 있을 것인가.”

 

호랑이는 북곽선생을 더러운 선비라고 질책하고 유학자의 위선과 아첨, 이중인격 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박지원 스스로도 절세기문(絶世奇文)이라 평가했을 정도로 조선 후기의 문학과 사상을 대표하는 걸작이 되었다.

그는 압록강을 건너면서 돌아올 때까지 전 과정을 26권에 이르는 방대한 양으로 기록하여 조선 선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조선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어 읽히기 시작했다. 정조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명나라와 청나라의 패사(稗史 : 사관이 아닌 사람이 이야기 형식으로 쓴 문장)와 소품에 지나지 않으면서, 조선의 국시를 뒤흔드는 불순한 잡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학이 공허한 공맹의 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18세기와 19세기 초의 조선 지식인들은 이러한 문체로 기록했다. 이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박지원은 34세가 되었을 때 생원과 진사시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했다. 박지원의 문명이 높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대과에 급제하게 하여 벼슬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박지원은 회시에 응하지 않았고, 회시에 응하더라도 노송이나 괴석을 그려 제출했다. 특히 그가 활약할 무렵은 홍국영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홍국영이 노론을 심하게 미워했기 때문에 박지원은 관직에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
관계에 나가면 굶주림은 면할 수 있다.'

박지원은 정치 판도가 바뀌면서 정치가 표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홍국영이 죽었으나 정조는 남인들을 발탁하고 있었고, 노론은 남인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박지원은 50세가 되어서야 유언호의 천거로 선공감역에 임명되었다. 노론 벽파인 심환지와 정일환 등이 찾아와 벽파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거절했다. 이후 박지원은 사헌부감찰, 한성부판관, 안의현감을 지냈다.

박지원은 1797년 면천군수, 1800년 양양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안의현감 시절에는 북경 여행의 경험과 목민관을 지낸 경험에 기초하여 <과농소초(課農小抄)>,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안설(按說)> 등을 남겼다. 그가 남긴 많은 저서 중에서 <열하일기>는 북학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어서 북학파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박지원은 청나라의 발전한 문명을 받아들이고 청나라를 통해 서구문명을 인식하여 상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다. 또한 신분제 혁파 등 사회 모순을 개혁하고 국가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지원은 서학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천문학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방경각외전(閣外傳)>을 지어 당시 세태를 풍자하고 실학적인 입장을 반영했다. 박지원은 1805(순조 5)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우리 고전 읽기의 즐거움

4 문학작품은 ~ 때로는 이야기로, 때로는 노래로, 혹은 다른 형식으로 갖가지 삶의 모습과 다양한 가치를 전해 주며, 읽는 이에게 기쁨과 위안을 주는 것이 문학의 힘이다.

어렸을 때는 이런 걸 알지 못하며 책을 읽었어도 책을 통해 기쁨과 위안을 받았다. 그런데 요즘은 알면서도 기쁨과 위안을 받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번에 <파우스트>, <열하일기> 등을 통해 기쁨과 위안, 영감까지 받았다. 읽기에 글쓰기까지 더하면 금상첨화라고 할 수 있겠다.

 

4 고전 문학 작품은 ~ 낡은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가치와 의미는 결코 낡은 것이 아니다. 시대가 바뀌고 독자가 달라져도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작품 속에는 인간 삶의 본질을 꿰뚫는 근본적인 가치가 담겨 있다. ~ 시대와 민족의 벽을 넘어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것이다.

 

5 고전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일상에서 벗어나 그 낯선 세계를 체험하는 기쁨을 얻게 된다. 몰랐던 것을 새롭게 아는 것이 아니라 잊었던 것을 되찾는 신선함이다. 처음 가는 장소에서 언젠가 본 듯한 느낌을 받을 때의 그 어리둥절한 생소함, 바로 그 신선한 충동을 우리 고전 작품은 우리에게 안겨 준다. 거기에는 일상을 벗어났으되 나의 뿌리를 이탈하지 않았다는 안도감까지 함께 있다.

 

저자 서문

18 장자의 저서 중에 나타난 제왕과 성현, 임금과 정승, 처사와 변객에 대한 일도, 더러는 정사에서 빠뜨린 일을 보충해야만 할 것이다. 도끼를 잘 쓰던 장석(匠石)이나 수레바퀴를 만들던 공인 윤편(輪扁)도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 외전이라면 참과 거짓이 서로 섞여 있겠고, 우언이라 하더라도 미묘함과 드러냄이 쉴 새 없이 변하여, 사람으로는 그 원인을 측량할 수 없으므로 이를 궤변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그의 학설을 끝내 없애 버리지 못한 이유는 진리에 대한 논평을 잘 전개하였기 때문이니, 그를 책을 짓는 사람으로서 영웅이 아니라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19 나는 이 책을 읽고서야 비로서 <장자>의 외전에는 참도 있고 거짓도 있지만, 연암씨의 외전에는 참은 있으나 거짓은 없음을 알았다.

 

도강록

들어가기

23 숭정 17년에 의종열황제가 나라를 지키다가 죽고 명나라가 망한 지 벌서 130여 년이 지났는데, 어째서 지금까지도 숭정이라는 연호를 쓰고 있을까? 청나라가 들어와 중국을 차지한 뒤에 선와의 제도가 변해서 오랑캐가 되었지만, 우리 동쪽 나라 수천리는 두 강을 경계로 나라를 이루어 홀로 명나라 왕들의 제도를 지켰다. 이는 명나라 황실이 아직도 압록강 동쪽에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힘이 비록 저 오랑캐를 쳐서 몰아내고 중원을 깨끗케 하여 선왕의 역사를 다시 비내지는 못할지라도, 사람마다 모두 숭정의 연호라도 높여서 중국을 보존하였던 것이다.

숭정 156년 계묘년(1783)에 열상회사 쓰다.

박지원의 조선 학자들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엿보이는 부분이라고 한다. 다른 학자들 뿐 아니라 본인에 대한 자아비판의식도 살짝 보이는 것 같다.

 

도강록

27 돌이켜 고향을 생각하니 구름과 산이 아득해, 이제는 서글퍼지며 집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싹트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 가는 것을 평생의 장유(壯遊)라고 하여 툭하면 꼭 한 번 구경해야지.” 하며 펑소에 벼르던 것도 이제는 둘째가 되었다. “오늘은 강을 건너야지.” 하며 떠드는 것도 결코 좋아서 하는 말은 아니다.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청나라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고향이 그리워진 건가? 아마도 별 볼 것 없는 국경 근처에서 어쩔 수 없이 묵느라 그랬던 것 같다. 청나라에 가서 새로운 문물, 신기한 것들 보다 보면 금방 생각이 달라질 거다.

 

28 왼쪽에는 벼루를 넣고, 오른쪽에는 거울과 붓 두 자루, 먹 한 장, 조그만 공책 네 권, <이정록(里程錄)> 한 권을 넣었다. 행장이 이같이 단출하니, 아무리 엄하게 짐을 뒤진다고 해도 걱정할 게 없었다.

참 간소하다. 그래도 몇 달 동안 여행할 건데라고 생각했는데짐꾼들이 따로 있지. 스스로 짐을 많이 지고 갈 필요가 없었다.

 

29 깃대 셋을 세워 문을 만들고 금지된 물품이 있는지 뒤졌는데, 황금, 진주, 인삼, 초피와 팔포(八包)를 넘는 은자(銀子)가 중요 물품이었다. ~ 말구종들에게는 웃옷을 풀어 헤치게도 하고, 바지 아래도 내리훓어 보며, 비장이나 역관의 짐 보따리도 풀어 본다. ~ 김 보따리를 뒤지지 않으면 나쁜 짓을 막을 수 없고, 뒤지면 이같이 체모에 어긋난다. 그러나 이것도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의주의 장사꾼들은 짐 보따리를 뒤지기 전에 남몰래 강을 건너가니, 누가 그를 막을 수 있으라.

그때나 지금이나 국경을 건너는 건 큰 일이었다. 사람뿐 아니라 물건도

 

30 잠시 아찔하는 순간 하룻밤이 지난 듯 싶었다.

하룻밤 뿐이랴. 지금까지의 삶도 그런 것 같다. 앞으로도 그렇겠지.

 

명나라 장수 강세작이 조선에 귀화한 이야기

32 강홍립은 결국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 청나라 병사들은 홍립의 군사를 두어 겹이나 에워싸고, 명나라 병사들 중 도망쳐 온 자들을 샅샅이 뒤져내어 바로 묶어 모조리 목을 베었다. 세작도 붙들려서 묵인 채 바위 아래에 앉았는데, 책임자가 어쩐 일인지 잊고 가 버렸다. 세작이 조선 군사에게 풀어 달라고 눈짓을 하였지만, 그들은 모두 서로 기웃거리기만 할 뿐, 손 하나 까딱하는 이가 없었다. 세작은 할 수 없이 스스로 등을 돌 모서리에 비벼 줄을 끊고 일어서서, 죽은 조선 군사의 옷으로 바꿔 입고 조선 군사들 가운데 들어가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33 사신들의 행차가 있을 때마다 미리 가산에 알려서, 득룡이 귀찮아서 따라가지 않을까 봐, 가족을 가둬 놓고 그가 달아나는 것을 막았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가 중국어 통역을 얼마나 잘했는지 알 수 있다.

 

청나라 첫 고을 책문의 모습

34 마두와 쇄마 구종들이 나귀에서 내리라고 호통치자, 앞서 가던 두 사람은 바로 내려서 한쪽으로 비켜 가는데, 뒤에 가던 세 사람은 내리기를 싫어했다. 마두들이 일제히 소리치며 꾸짖자, 그들이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쏘아보면서 말했다.

당신네 상전이 우리랑 무슨 상관이 있지?”

마두가 왈칵 달려들어 채찍을 빼앗아 그의 맨종아리를 때리며 꾸짖었다.

우리 상전께서 받들고 온 물건이 무엇이며, 싸 갖고 오는 것이 어떤 문서인 줄 아느냐? 저 노란 깃발에 황제 어전상용(御前上用)’이라고 써 있지 않으냐? 너희 눈이 성하다면 황제께서 친히 쓰실 물건인 줄도 모른단 말이야!”

그제야 그들은 바로 나귀에서 내려 땅에 엎드리며 말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

그들이 진흙 바닥에 꿇어 머리가 땅에 닿도록 조아리니, 이마가 전부 흙투성이가 되었다. 일행이 모두 크게 웃으며 호통을 쳤다.

어서 물러가라.”

내가 다 보고 나서 말했다.

너희가 중국에 들어갈 때마다 여러 가지로 말썽을 일으킨다더니, 이제 내 눈으로 보기에도 정말 그렇구나. 아까 한 일은 부질없는 짓이니, 앞으로는 괜한 장난으로 말썽이나 일으키지 마라.”

그러자 모두 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먼 길에 날마다 무엇으로 심심풀이를 합니까?”

이런 갑질이라니

갑질의 역사가 오래도 됐구나. 그때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진리는 평소에 별볼일 없었던 사람이 갑의 위치에 있는 경우에 진상 갑질을 한다는 거다. 여기서도 진짜 갑이라고 할 수 있는 박지원 보다는 그 아래의 마두와 쇄마 구종들이 갑질 중이다.

갑질의 이유? 심심해서란다. 이들의 후손들이 요즘 갑질 중인건가?

 

37 “한 상공과 안 상공도 오시오?”

이들은 모두 의주에 사는 장사꾼이다. ~ 사신들이 갈 때는 으레 정관(正官)에게 팔포를 내렸다. ~ 예전엔 나라에서 정관에게 출장비를 주지 않고 인삼을 몇 근씩 주어 중국에서 팔아 쓰게 했는데, 이 짐 보따리를 팔포라고 한다. 지금은 나라에서 주지 않고 각자 은을 가지고 가게 하는데, 다만 짐 보따리의 액수를 제한하여 당상관은 3,000, 당하관은 2,000냥을 허락하였다. 이 은을 가지고 북경에 가서 여러 물건으로 바꿔 이익을 남기는 것이다.

가난해서 제 돈으로 은을 가지고 갈 수 없으면 그 포의 권리를 파는데, 송도, 평양, 안주의 장사꾼이 포의 권리를 사서 그 사람 대신 은을 넣어 가지고 간다. 그러나 이들은 스스로 북경에 들어가지 못하므로, 포의 권리를 의주 장사꾼에게 검겨주어서 물건을 바꿔 오는 것이다.

 

38 한씨나 안씨 같은 장사꾼은 해마다 북경에 드나들어, 북경을 제집 마당처럼 여긴다. 저쪽 장사꾼과도 서로 마음이 맞아서, 물건 값이 오르내리는 것도 모두 그들의 손에 달려 있다.

우리나라에서 중국 물건의 값이 점점 오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도 온 나라 사람이 이를 모르고, 사신들을 따라다니며 물건을 팔아 이익을 남기던 역관만 나무란다. 그러나 역관들도 이 권리를 장사꾼에게 빼앗겼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른 지방의 장사꾼도 이런 현상이 의주 장사꾼의 농간인 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직접 보지 못했으므로 신경질만 낼 뿐 뭐라 말하지는 못한다. 이렇게 된 지 벌써 오래되었다. 요즘 의주의 장사꾼이 잠깐 몸조심하고 나타나지 않는 것 역시 흥정하는 술책이다.

 

39 “쇤네가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 두 곳을 구경할 때는 제 두손으로 눈알을 꽉 잡고 있겠습니다. 그러면 어느 놈이 빼어 갈 수 있겠습니까?”

표현이 재미있다. 박지원의 표현으로 보면 좀 무식한 사람 같은데재치도 있고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한다.

 

39 중국의 동쪽 변두리인 책문도 이러한데 북경으로 갈수록 더욱 발전될 것으로 생각하니 갑자기 한풀 꺾였다. 여기서 그만 발길을 돌릴까 하는 순간 온몸이 화끈거렸고 나는 깊이 반성하였다. ‘이는 하나의 시기하는 마음이다. 내 본래 성미가 맑아 남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는데, 이제 한 번 다른 나라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아직 만 분의 일도 못 보고 벌써 이런 나쁜 마음이 생기니 어찌 된 까닭일까. 아마도 보고 들은 것이 좁은 탓일 게다. 만일 밝은 눈으로 세계를 두루 살핀다면, 어느 것 하나 평등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평등하다면, 시기와 부러움도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40 “네가 만약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떨 것 같으냐?”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중국은 되놈의 나라라서 저는 싫습니다.”

이때부터 되놈 -> 떼놈 이라는 표현을 썼구나. 조선이 뭐가 그리 대단하고 좋아서 중국은 되놈의 나라라서 싫다고 했을까

 

41 만일 그가 일처리에 서툰 풋내기라든지, 중국말이 시원찮다든지 하면, 그자들과 시비를 따지지 못하고 달리는 대로 줄 수밖에 없다. 올해에 이렇게 하면 내년엔 어느새 전례가 되기 때문에, 끝까지 아귀다툼을 해야 한다. 사신들은 이 내막을 모르고 다만 책문에 들어가기에만 급급하여 반드시 역관을 재촉하고 역관은 또 마두를 재촉한다. 그러니 그 폐단이 오랫동안 계속된다.

 

벽돌과 기와

42 청나라 사람들은 대개 집을 지을 때에 벽돌만 쓴다. 벽돌의 길이는 한 자이고 너비는 다섯 치여서, 둘을 가지런히 놓으면 이가 꼭 맞는다. ~

기와를 이는 법은 본받을 만한 점이 많다. 기와 모양은 마치 동그란 통대를 네 쪽으로 쪼개 놓은 것 같고, 그 크기는 두 손바닥만 하다. ~

아무튼 집을 세우는 데는 벽돌의 공덕이 가장 크다. 높은 담장을 쌓는 일 뿐 아니라 집 안팎 할 것 없이 벽돌을 쓰지 않는 데가 없다. 저 넓고 넓은 뜰 눈 가는 곳마다 번듯번듯하게 바둑판을 그려 놓은 것처럼 보인다. ~

많은 흙이나 나무도 들이지 않고, 못질이나 흙손질을 할 필요도 없다. 벽돌만 구워 놓으면 집은 어느새 만들어진 것과 다름없다.

고등학생 때 교과서에 나와있던 부분 같다. 낯설지가 않다. 이 부분만 보면 기행문이 아니라 무슨 기술 분석서 같기도 하다. 그래서 <열하일기>가 재미없다는 편견이 있었던 걸까?

 

안시성과 요동 땅의 평양성

45 “안시성 성주 양만춘이 당나라 태종의 눈을 쏘아 맞추었다. 그러자 태종이 성 아래에 군사를 집합시켜 시위하고, 양만춘에게 비단 100필을 하사하였다. 그가 자기 나라 임금을 위하여 성을 굳게 지켰다고 칭찬한 것이다.”

처음에 읽고 무슨 말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아니 자기한테 활을 쏴서 눈을 맞춘 사람한테 왜 비단 100필을 하사하지?? 말이 안 돼서 잘못 쓴게 아닐까하고 검색을 해 봤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해서 싸우다가 겨울이 되고 군량이 떨어지자, 당나라 군대가 포기하고 퇴각할 때 양만춘이 성위에 올라가 당나라 군대에게 송별의 예를 했다고 한다. 그 때 당나라 태종이 그에게 비단 100필을 주면서 성의 방어를 하례하고 왕에 대한 충성을 다하도록 격려했다고 한다. 적의 장수지만 그의 용맹함과 충성을 인정한 거다. <사기열전>을 읽으면서 수천, 수만명의 목을 베고 땅에 묻어 죽이는 전투만 보다가 이런 전투를 보니까 뭔가 낭만이 있는 것도 같고 인간적이기도 하다. 양만춘도 뛰어나지만 당 태종도 참 도량이 넓은, 큰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전쟁에서 지고 퇴각하는 와중에 비단 100필은 어디서 났을까?

 

46 당태종이 천하의 군사를 징발하여 탄알만 한 작은 성 하나를 떨어뜨리지 못하고 창황히 군사를 돌이켰다는 데는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 김부식은 옛글에서 그의 이름이 전하지 않는 것을 애석히 여겼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지을 때에 다만 중국의 역사책에서 한 번 골라 베끼면서 모든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였고, 유공권의 소설을 끄어와서 당태종이 포위되었던 사실까지도 입증하였다. 그러나 <당서>와 사마광의 <통감>에는 이런 사실이 기록되지 않았으니, 이는 아마도 그들이 중국의 부끄러움을 감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우리 본토에서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실을 단 한마디도 감씨 쓰지 못했으니, 그 사실이 믿을 만하건 아니건 간에 다 빠뜨리고 말았다.

 

47 그런데 우리나라 선비들은 지금의 평양만 알기 대문에, “기자(箕子)가 평양에 도읍했다.”하면 이를 믿고 평양에 정전이 있다.” 하면 이를 믿으며 평양에 기자의 무덤이 있다.” 하면 이를 믿는다. 그래서 만일 봉황성이 바로 평양이다.” 하면 크게 놀랄 것이다. 더구나 요동에도 또 다른 평양이 있었다.”고 한다면 해괴한 말이라고 나무랄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요동이 본시 조선 땅이며, 숙신, , 맥 등 동이(東夷)의 여러 나라가 모두 위만조선에 예속되었던 것을 알지 못한다. 또 오라, 영고탑, 후춘 등이 땅이 본래 고구려의 옛 땅임을 알지 못하고 있다.

글만 잘 쓰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도 능했구나. 책을 많이 읽었으니 우리 나라 역사에 관한 책도 많이 읽었겠지. 역사를 잘 아는 것이 당연하다.

 

48 나는 일찍이 한사군의 땅은 요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마땅히 여진 땅까지 들어간 것이다.” 무슨 근거로 그런 사실을 알았는가 하면 <한서> [지리지]에 현도나 낙랑은 있지만 진번과 임둔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48 발해의 무왕 대무예(代武藝)가 일본의 성무왕(聖武王)에게 보낸 편지 중 바해는 고구려의 옛ㅌ를 회복하고, 부여가 남긴 풍속을 물려 받았다.”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한사군의 절반은 요동에, 절반은 여진에 거쳐 있어서 서로 감싸 안았으니, 이는 본래 우리의 영토 안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한나라 이후로 중국에서 말하는 패수가 어디인지 일정하지 못한데다, 우리나라의 선비들도 반드시 지금의 평양으로 표준을 삼아 이러니저러니 패수의 자리를 찾는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옛날 중국 사람들이 요동 이쪽의 강을 모두 패수라고 불렀으므로, 그 거리가 서로 맞지 않아 사실과 어긋난다.

 

50 고려는 안으로 삼국을 통일했다고는 하지만, 그 강토와 무력이 고씨의 강성함에 결코 미치지 못했다. 후세의 옹졸한 선비들은 부질없이 평양의 옛 이름을 그리워하여, 다만 중국의 역사책만 믿고 흥미롭게 수나라와 당나라의 옛 자취를 이야기한다. “이곳이 패수요, 이곳이 평양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과 어긋난다. 그러니 이 성이 안시성인지, 봉황성인지 어떻게 분간하겠는가?

 

중국의 구들과 조선의 온돌

52 우리나라 사람들은 집이 가난해도 글 읽기를 좋아해 겨울이 되면 수백 명의 형제 코끝에는 항상 고드름이 달릴 지경이니, 이 방법을 배워 가서 삼동(삼동)의 고생을 덜었으면 좋겠다.

우리 조상님들이 글 읽기를 좋아했구나. 그런데 글 읽기만 좋아해서 가난했던 건 아닐까? 백성의 고생을 덜 방법을 생각하는 뜻이 갸륵하다.

 

52 “이 곳의 벽돌 장판이 우리나라의 종이 장판보다 못하다는 말은 그럴듯하네. 그러나 이 구들 놓는 방법을 배워 가서 우리나라 온돌에 쓰고, 그 위에 기름 먹인 장판지를 깐다면 누가 말리겠는가. 우리나라 온돌 제도에 여섯 가지 흠이 있으나 아무도 이를 말하는 사람이 없다네. 내가 한번 설명할 테니, 자네는 떠들지 말고 조용히 들어 보게. ~”

그냥 슬쩍 보기만 하고 구들장의 구조와 장단점에 대해서 파악한다. ‘기와와 벽돌편도  역사 뿐 아니라 기술, 과학에도 재능이 뛰어났던 것 같다.

 

꿈속에 고향집을 찾아

55 시냇물이 약간 줄었으므로 길을 떠났다. 나는 정사의 가마에 함께 타고 건넜다. 하인 서른 명이 알몸으로 가마를 메고 가다가, 강 한가운데쯤 물살이 센 곳에 이르러 별안간 왼쪽으로 기울어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다. 참으로 위급했는데, 정사와 서로 부둥켜 안고서 물에 빠지는 것을 겨우 면했다.

참 이런 글을 읽으면 박지원이 아무리 시대를 앞서가는 학문과 사고를 했던 사람이라 해도 시대의 벽은 어쩔 수 없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맨몸으로 건너가기도 힘든데, 사람이 탄 가마를 메고 가다니사진을 보니 덩치도 장난 아니던데가마를 타고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만 안 빠지면 돼.’?? 가마 안에 타고 있는 게 더 불안하고 힘들지 않았을까?

 

56 “여기가 이처럼 장관일 줄 몰랐네 그려. 집에 돌아가면 자랑해야지.” 하고 훌훌 날아가는데, 산이며 물이 모두 내 발꿈치 밑에 있어 마치 날아가는 솔개처럼 날쌨다. ~

그러고는 그 아름다움을 수없이 자랑하였다. ~

일어나 형님께 절하고 말했다.

제가 심양 이야기를 자세히 해드리려고 잠시 집에 돌아왔습니다. 이제 갈 길이 바빠서 하직 드립니다.”

귀엽다. 얼마나 신기하고 자랑하고 싶었으면 꿈속에서 형님을 찾아가서 자랑했을까. 그런데 가위는 왜 눌렸던 걸까?

 

말꼬리를 붙들고 강물을 건너

58 내 몸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른편으로 기울어지며, 하마터면 물에 빠질 뻔했다. 마침 앞에 말꼬리가 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보고, 재빠르게 그것을 붙들고 몸을 가누어 고쳐 앉아서 겨우 떨어지기를 면했다. 내 자신이 이토록 재빠를 줄 몰랐다.

 

한바탕 울어 볼 만한 요동 벌판

60 “, 참 좋은 울음 터로다. 가히 한번 울 만하구나.”

 

60 “그래그래, 아니아니, 천고의 영웅이 잘 울었으며, 미인도 눈물이 많다 하오. 그러나 그들은 소리 없는 눈물을 몇 줄 흘렸을 뿐이니, 소리가 천지에 가득 차서 금이나 돌에서 나오는 듯한 울음은 듣지 못했소. 사람이 다만 칠정(七情) 중에서 슬플 때에만 우는 줄로 알고, 칠정 모두가 울 수 있음을 모르는 모양이오. 기쁨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며, 즐거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사랑이 사무치면 울게 된다오. 욕심이 사무쳐도 울게 되는 것이오. 불평과 억울함을 풀어 버릴 때에 소리보다 더 빠른 것이 없으니,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서 우레와도 같은 것이라오. 정에 이르러 우러나오면 저절로 이치에 맞으니 울음이 웃음과 무엇이 다르겠소. ~”

남자의 울음을 금기하던 시대에 이런 감성을 갖고 있다니 좀 놀랍다. 마음껏 우시오.

 

61 “저 갓난아기에게 물어보시오. 그가 처음 날 때 느낀 것이 무슨 정일까. 그는 먼저 해와 달은 보고, 다음에는 부모와 친척들이 앞에 가득한 것을 보았으니 어찌 기쁘지 않았겠소. 이러한 기쁨이 늙도록 변함없다면 본래 슬퍼하고 노여워할 리가 없으며, 마땅히 즐겁고 웃어야 할 정이 있어야지요. ~ 인생이란 신성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마침내는 죽어야한 하고, 태어나고 죽어 가는 중에도 모든 근심 걱정을 골고루 겪어야 하기 때문에, 그 아기가 태어난 것을 후회하며 저절로 울음보를 터뜨려 자신을 위로하는 것은 아닐까요? ~

그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캄캄하게 막히고 걸려서 갑갑하게 지내다가, 갑자기 넓고 훤한 곳에 터져 나와 손과 발을 펴자 그 마음이 시원해졌으니, 어찌 한마디 참된 소리를 내어 제멋대로 외치고 싶지 않겠소? 그러니 우리도 저 갓난아기의 꾸밈없는 소리를 본받아 비로봉 산마루에 올라 동해를 바라보며 한바탕 울 만학, 황해도 장연 바닷가 금모래밭을 거닐며 한바탕 울 만하지 않겠소. ~”

 

구요동

66 아아! 슬프다. 명나라가 망할 때가 되어 인재를 쓰고 버리는 것이 거꾸로 되었고, 공과 죄가 밝지 못했다. 웅정필과 원숭환의 죽음을 보면 조정 스스로 만리장성을 허물었다고 하겠으니, 어찌 후세의 놀림을 받지 않겠는가.

 

관제묘

68 앉아서 <수호전>을 읽는 자가 있었는데 여러 사람이 빙 둘러 앉아서 듣고 있었다. 그가 머리를 흔들며 코를 벌름거리는 꼴이, 눈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읽는 부분을 보니 바로 화소와관사의 문단인데, 외는 것은 뜻밖에 <서상기>였다. 까막눈이건만 익숙하게 외워서 입을 매끄럽게 내려갔다. 꼭 우리나라 네거리에 서 국문소설 <임장군전>을 외는 것 같았다.

책을 다 외워서 얘기해주고 있는 거였구나. 글을 제대로 배웠더라면 뛰어난 문장가가 되었을 수도아니 이미 훌륭한 배우라고 할 수 있겠다.

 

요동백탑

71 탑 아래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모두 만주 사람인데 약을 사러 영고탑에 가는 길이었다. 땅에 글자를 써서 문답하자, 한 사람이 <서경>이 있는지 물었다. ~ 두 사람은 아직 청년인데, 처음으로 이곳을 지나며 탑을 구경하러 온 것이다. ~

길이 바빠서 그의 이름을 묻진 못했지만 과거를 치르는 수재(秀才)인 듯싶다.

 

성경잡지

77 “~ 사람을 만난다 한들 쫓겨나기 밖에 더하겠습니까?”

 

78 “하늘 위엔 술별(酒星) 하나가 반짝반짝 빛나고, 인간 세상엔 주천(酒泉) 고을이 부질없이 알려졌네.”라고 쓰였다. 술집은 붉은 난간에 파란 문, 흰 벽과 그림 그린 기둥이 있는데, 시렁 위에는 나란히 놓고 붉은 글씨로 술 이름을 써 붙인 층층이 똑 같은 놋술통이 이루 다 셀 수 없이 많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행지에서는 술이 빠질 수 없는 것 같다.

하늘 위엔 술별이 하나 반짝…” 어떻게 이런 표현을 생각했을까? 나도 한번 써먹어 봐야 겠다.

 

80 한참 뒤에 큰 소리로 치라고 호통하자, 사령이 손에 들었던 곤장을 던지고 죄인 앞으로 달려가서 손바닥으로 따귀를 네다섯번 때리고, 다시 예전 자리로 돌아가 곤장을 들고 섰다. 다스리는 법이 아무리 간단하다지만, 따귀 때리는 형벌은 옛날부터 들어본 적이 없다.

 

일신수필

들어가기

83 남이 말한 것을 들은 것만으로 말하는 자들과는 서로 학문을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평생 동안 생각지 못한 것에 대해서야 더 말할 것이 있으랴. 만일 어떤 이가 성인이 태산에 올라서 천하를 작게 생각하였다.”고 한다면, 마음속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도 입으로는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 서양 사람이 큰 배를 타고 지구 밖을 돌아다녔다고 하면, 그는 괴상하고도 허황한 이야기라고 꾸짖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누구와 함께 크나큰 세상 구경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중국의 큰 볼거리

90 참으로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된다면, 천하를 위해 일하는 자는 그 법이 오랑캐에게서 나온 것일지라도 이를 거두어 본받으려고 한다. 더구나 삼대 이후의 거룩한 황제와 현명한 왕, , , 명 등 여러 나라의 고유한 옛 제도야 어떻겠는가. 물론 성인 공자가 <춘추>를 지을 대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내쳤지만, 그렇다고 오랑캐가 중화를 어지럽힌 것을 분하게 여겨 중화의 숭배할 만한 진실까지 내쳤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나라 사람이 진실로 오랑캐를 물리치고자 한다면 중화가 끼친 법을 모두 배워서 우리나라의 유치한 문화부터 먼저 열어야 한다. ~ 남이 열을 하면 우리는 백을 하여, 먼저 우리 백성에게 이롭게 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회초리를 마련해 두었다가 저들의 굳은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를 매질할 수 있도록 한 뒤에야 중국에는 볼만한 게 하나도 없더라.”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같이 미천한 선비도 한마디 할 수 있다면 그들의 장관은 기와 조각에 있고, 똥 부스러기에도 있다.”고 하겠다.

박지원은 청나라를 여행하면서 정말 큰 감명을 받았나보다. 기와 조각 하나, 똥부스러기까지도 다 장관이라고 할 정도니하긴 조선 땅에만 40년을 넘게 살다가, 청의 문물뿐 아니라, 상상도 못한서양 문물까지 보게 됐으니 그 감동이 짐작이 간다. 나도 처음 외국에 나갔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풍광과 새로운 문물들을 보며 저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큰 감명을 받았었다. 그런데 점점 방문하는 곳의 숫자가 늘고 비슷한 곳을 보게 되면서 감동의 정도가 작아지고 있다. 그리고 그 전에 봤던 뛰어난 곳과 비교를 하며 별거 아니라는 생각도 한다. 감수성을 리셋할 때가 된 것 같다.

 

91 똥은 아주 더럽지만 이것을 밭에 내가기 위해 황금처럼 아끼니 길가에 내버린 똥이 없다. 말똥을 줍는 자가 삼태기를 들고 말 뒤를 따라다닌다. 말똥을 주워 모을 때에도 네모반듯하게 쌓고, 혹은 여덟 모로 혹은 여섯 모로 하고, 또는 누각이나 언덕 모양으로 만든다. 이렇게 모은 똥 무더기만 보아도 모든 규모가 벌써 만들어졌음을 짐작할 수 잇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저 기와 조각이나 똥 무더기가 모두 장관이다. 반드시 성곽, 궁실, 누각, 시장, 절간, 목축이라든지, 또는 저 광막한 들판이나 안개 어린 나무가 기이하게 바뀌는 모습만 장관은 아니다.”

 

수레 제도

95 “수레는 무엇보다 궤도를 똑같이 만들어야 하네. 궤도를 똑같이 만들어야 한다는 게 무슨 뜻이겠나. 두 바퀴 사이에 일정한 본을 어기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라네. 그렇게 하면 수레가 천 대고 만 대고 간에 바퀴 자리는 하나로 통일되니, 이른바 천하의 수레가 같은 궤도로 달린다.’는 뜻의 거동궤(車同軌)라는 말이 바로 이걸세. 만일 두 바퀴 사이를 마음대로 넓히고 좁힌다면, 길 가운데 바퀴자리가 한 틀에 들 수 있겠는가.” ~

우리나라에도 전혀 수레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바퀴가 온전히 둥글지 못하고 바퀴 자국이 틀에 맞지 않으니, 이는 수레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사람들이 늘 우리나라는 길이 험하여 수레를 쓸 수 없다.”고 하니, 이게 무슨 말인가. 나라에서 수레를 쓰지 않으니까 길이 닦이지 않을 뿐이다. 만일 수레가 다니게 된다면 길은 저절로 닦일 테니, 어찌하여 길거리가 좁고 산길이 험하다고 걱정하랴.

조선 후기에도 아직 수레를 많이 쓰지 않았나? 많이 놀랍다. 중국은 2,000년도 더 전인 공자 시대에도 수레 타고 다녔던데... 사람이 타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수레 대수로 군사력을 가늠했으니 꽤 발달했겠다. 이상하다. 다른 중국의 문물은 많이 들어왔는데 어째서 수레는 그 때까지 안 들어왔던 걸까? 상류층은 어차피 가마 타고 다닐 거니까 수레가 필요 없었던 건 아니었을까?

 

96 마천, 청석의 고개와 장항, 마전의 언덕이 어찌 우리나라의 고개나 언덕보다 덜 위험하겠는가. 가파른 곳, 막힌 곳, 험한 곳, 높은 곳을 우리나라 사람도 모두 복격햇지만, 그렇다고 수레를 없애고 다니지 않는 곳이 있던가. 그러므로 중국의 재산이 풍족할 뿐만 아니라. 한곳에 쌓이지 않고 골고루 유통되는 것이 모두 수레를 사용할 때 생기는 이익이다. ~

이곳에서 천한 물건이 저곳에서는 귀할뿐더러 그 이름은 들었지만 실제로 보지 못하는 것은 어찌 된 까닭일까. 이는 멀리 보낼 힘이 없기 때문이다. 사방이 겨우 몇 천 리박에 되지 않는 나라에서 백성의 살림살이가 이다지 가난한 이유를 한마디로 설명한다면, 수레가 나라 안에 다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97 “수레가 왜 다니지 못하는 거요?”

어떤 사람이 내게 묻는다면, 나 역시 한마디로 대답할 것이다.

이는 사대부들의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평소에 글을 읽으면서, “[주례(周禮)]는 성인이 지은신 글이야.” 하며 윤인(輪人), 여인(與人), 거인(車人), 주인(輈人)과 같이 수레를 맡았던 벼슬 이름은 외웠지만 수레를 만드는 기술이 어떠하며 움직이는 방법이 어떠한지는 도무지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한갓 글만 읽을 뿐이었으니, 참된 학문에 무슨 유익이 있으랴.

역시 지배계층의 잘못이구나. 이런 비판을 하기 쉽지 않았을텐데박지원이 참 많이 답답했었던가 같다.

 

97 그들의 연구가 정미하고 행하기도 간편한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야. 이는 참으로 민생의 살림에 이익이 되고, 나라의 큰 그릇이 되지 않겠는가. 이제 날마다 내 눈에 놀랍고 반가운 것이 나타나는데, 수레의 제도로 미루어 모든 일을 짐작할 수 있겠다. 어렴풋하게나마 몇 천 년 동안 모든 성인이 고심한 것도 이해할 수 있겠다. ~

뜻있는 이가 잘 연구하여 그 제도를 본받는다면, 극에 달한 우리나라 백성의 가난병도 얼마쯤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내가 보았던 불 끄는 수레의 제도를 대략 적어서, 우리 나라에 돌아가 이를 전하고자 한다.

 

관내정사

7 28일 일기

107 “선생님께서는 이걸 베껴서 무엇하시려오?”

돌아가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번 읽혀서 모두 허리를 잡고 한바탕 웃게 하려는 거지요. 아마 이걸 읽는다면 입 안에 든 밥알이 벌처럼 날아가고, 튼튼한 갓끈도 썩은 새끼줄처럼 끊어질 거요.”

그때도 아주 재미있으면 입안에 든 밥알이 날아가도록 웃었던가 보다.

 

호질

108 범이 사나운 용을 만나면 눈을 꼭 감고, 감히 뜨지도 못한다. 그런데 사람이 사나운 용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범은 두려워하니, 범의 위풍이 얼마나 엄한가.

 

108 범이 한 번 사람을 먹으면, 그 창귀가 굴각(屈閣)이 되어 범의 겨드랑이에 붙어산다. 굴각이 범을 남의 집 부엌으로 이끌어 솥전을 핥게 하면 그 집주인이 갑자기 배고픔을 느껴 한밤중이라도 아내에게 밥을 지으라고 시키게 된다.

요즘 굴각이 붙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TV에도 인터넷에도 미친 듯이 먹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113 “어이쿠! 그 선비가 구리구나.”

북곽 선생이 머리를 조아리며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 나와, 세 번 절하고 꿇어앉았다. 고개를 쳐들고 이렇게 여쭈었다.

범님의 덕이야말로 참으로 지극하십니다. 대인은 변화를 본받고, 제왕은 걸음을 배웁니다. 남의 아들 된 자들은 효성을 법으로 사모하고, 장수는 위엄을 취합니다. 거룩한 이름이 신룡(神龍)과 짝이 되어, 한 분은 바람을 일으키고 한 분은 구름을 일으키니 저처럼 하토(下土)의 천한 신하는 감히 그 바람 아래 서옵니다.”

그러나 범은 이 말을 듣고 꾸짖으며 말했다.

앞으로 가까이 오지 마라. 지난번에 내가 들으니 (: 선비)는 유(: 아첨)이다.’ 하던데 과연 그렇구나. 네가 평소에 천하의 나쁜 이름을 모두 모아서 망령되게도 내게 덧붙이더니 이제 다급하니까 낯간지럽게 아첨하는구나. 그 말을 누가 곧이 듣겠느냐? 대개 천하의 이치가 한가지이니, 범의 성품이 악하다면 사람의 성품도 악할 것이요 사람의 성품이 선하다면 범의 성품도 선할 것이다. ~”

 

114 “~ 너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쏘다니면서 팔을 걷어붙이고 눈을 부릅뜨며 남의 것을 빼앗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더구나. 심지어 돈더러 형이라 부르고, 장수가 되기 위해서 자기 아내를 죽이는 일까지도 있었으니, 이러고도 인륜의 도리를 논할 수 있겠느냐? 그뿐만 아니라 메뚜기에게서 그 밥을 빼앗고, 누에한테서 옷을 빼앗으며, 벌을 막질러 꿀을 긁어먹고, 심한 경우에는 개미의 알로 젓 담아서 그 조상께 제사하니, 너희보다 더 잔인하고 덕이 적은 자가 있겠느냐? ~”

그러게. 벌에게는 꿀이 생명의 양식인데 인간은 아무런 미안함 없이 벌의 양식을 먹고 누에의 옷을 빼앗는다. <사기열전>을 읽고 난 직후라 그런지 인간만큼 잔인하고 덕이 적은 자가 있겠느냐는 말에 100% 동의한다

 

115 “~ 너희는 이()를 말하고, ()을 논하면서 걸핏하면 하늘을 일컫지만, 하늘이 명한 바로 본다면 범이나 사람이 다 한가지 동물이다. 하늘과 땅이 만물을 낳아서 기르는 인()으로 논하더라도 범과 메뚜기, 누에, , 개미와 사람이 모두 함께 길러졌으므로, 서로 거스를 수가 없다. 그 선악(善惡)으로 따지더라도 뻔뻔하게 벌과 개미의 집을 노략질하고 긁어 가는 놈이야말로 천지의 거도(巨盜)가 아니겠으며, 함부로 메뚜기와 누에의 살림을 빼앗고 훔쳐가는 놈이야말로 인의(仁義)의 대적이 아니겠느냐?

범이 사람 먹는 것을 헤아려도 사람이 저희끼리 서로 잡아먹는 것만큼 많지는 않을 것이다. ~

그러나 서로 잡아먹기로는 어찌 저 춘추시대(春秋時代) 같은 적이 있었겠느냐? 춘추시대에 은덕 세운다는 싸움이 열일곱 번이요, 원수 갚는다는 싸움이 서른 번이었다. 그들의 피가 천 리에 흘렀고, 엎어지니 시체가 백 만이나 되었다.”

아무래도 범이 <사기>를 읽었나 보다.

 

115 범의 집에선 홍수와 가뭄 걱정을 모르므로 하늘을 원망할 것도 없고, 원수와 은혜를 모두 잊고 살므로 다른 생물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다. 천명을 알고 순종하므로 무당이나 의원의 간교한 술수에 미혹되지 않고, 타고난 바탕을 그대로 지녀서 천명을 다하므로 세속의 이해에 병들지 않는다.

 

116 “~ 보드라운 털을 빨아서 아교를 녹여 붙여 칼날을 만들되, 끝이 대추 씨처럼 뾰족하고 길이는 한 치도 못 되게 하여, 오징어 거품에 담갔다가 꺼낸다. 종횡무진 멋대로 치고 찌르되 세모창처럼 굽고 작은 칼처럼 날카로우며, 긴 칼처럼 예리하고 가지창처럼 갈라졌으며, 살처럼 곧고 활처럼 팽팽해서 이 병장기가 한 번 번뜩이면 모든 귀신이 밤중에 곡할 지경이다. 그러니 너희보다도 가혹하게 서로 잡아먹는 자가 있겠느냐?”

펜이 칼보다 강하다란 말을 박지원은 알고 있었던 듯

 

호질 뒤에 쓴다

119 사람이 보면 중화(中華)와 오랑캐의 구별이 뚜렷하겠지만, 하늘이 본다면 은()나라의 우관이나 주()나라의 면류관(冕旒冠)도 제각기 때를 따라 변했으니, 어찌 반드시 청나라 사람들의 홍모(紅帽)만을 의심하랴

 

혹정필담

들어가기

125 어제는 윤공과 이야기하느라 해가 저무는 줄도 몰랐다. 윤공이 가끔 졸며 머리로 병풍을 들이받곤 하였다.

어렸을 때 엄마가 졸면서 벽에 가끔 머리를 들이받는 걸 보며 이해가 안 됐었다. 아니 졸리면 방에 들어가서 누워서 주무시지, 왜 앉아서 졸고 계실까? 들어가서 주무시라고 깨우면 가끔 화도 내셨기에 그냥 두는 경우가 많았다. 요즘 내가 그렇게 졸고 있다. 빨리 닦고 방에 들어가서 자면 되는데 잠깐 소파에 앉았다가 닦자고 생각하다가 새벽까지 그렇게 소파에 앉거나 때로 누워서 자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 자도 잔 것 같지 않고 피곤하다. 이런 건 정말 닮지 말기를 바랐는데

 

달에서 이 지구를 바라보면

127 “저 윗방에 든 기안사(奇按司)고려 박공자는 기하에 정통합니다. 그가 말하기를, 달 가운데 한 세계가 있다면 마땅히 이 땅과 같을 것이고, 지구가 공중에 걸려 있으니 작은 별 하나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또 지구 자체에서 빛이 생겨 달 가운데에 가득 들었다고 하더이다.’ 합니다. 이 이야기는 모두 기이한 이론인 동시에 천지를 다룰 만한 재주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28 “마치 꿈결에 푸른 글씨로 쓴 부적을 읽은 것처럼 되어서, 지금은 벌써 잊어버렸습니다.”

 

132 “~ 내가 말한 달 속의 세계란, 참으로 한 개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애당초 지구의 빛을 설명하려 하였으나 어떤 곳에도 나타낼 수 없으므로, 이러한 달 속의 세계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달과 지구를 바꿔서 보자는 것이니, 만약 우리가 달에서 지구를 쳐다본다면, 역시 이 땅에서 저 달빛을 바라보는 것과 똑같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135 “서양 사람들이 기록한 것을 믿는다면, 아마 구국(狗國: 개나라), 귀국(鬼國:귀신나라), 비두국(飛頭國), 천흉귝(穿胸國: 가슴에 구멍 뚫린 사람들의 나라), 기굉국(奇肱國), 일목국(一目國: 눈이 한 짝인 사람만 사는 나라) 등의 열 기이하고 괴상한 나라가 있는 모양입니다. 이는 보통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도대체 뭘 읽고 이런 나라를 말하나 했는데 마지막 일목국(一目國)을 보니 <아라비안 나이트>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언젠가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눈이 하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 이야기를 읽었던 것 같다.

 

136 지정이 곧 별계 망상에다 동그라미를 치며 말했다.

당신 두 분이 별세계로 떠나신다면 저도 팔짝팔짝 뛰는 토끼나 펄쩍펄쩍 뛰는 두꺼비 노릇을 할지라도 사양하진 않겠소.”

 

지전설

137 “저는 하늘이 만든 것 중 모난 물건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기 다리, 누에 궁둥이, 빗방울, 눈물, 침 같은 것까지 둥글지 않은 게 없지요. 산과 강, 큰 땅덩이, 해와 달, 별들도 모두 하늘이 창조한 것이었으나 아직 모난 별을 본 적이 없으니, 지구가 둥근 것은 의심할 게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만일 태공으로 하여금 이 땅덩이를 편안히 한곳에 정착시켜 놓고 움직이지도 못하며 구르지도 못한 채 공중에 매달려 있게만 한다면, 이는 썩은 물이나 죽은 흙과 마찬가집니다. 잠깐 사이에 지구가 썩어 버릴 것입니다. ~”

 

138 “그런데 서양 사람들이 벌써 땅덩어리를 구()로 인정하면서도 지구가 구르는 데 대해서는 말한 적이 없으니, 땅덩어리가 둥근 줄 알면서 둥근 것이 반드시 구를 수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땅덩어리가 한 번 구르면 하루가 되고, 달이 한 번 땅덩어리를 돌면 한 달이 되며, 해가 한 번 땅덩어리를 돌면 한 해가 되고, 세성(歲星)이 한 번 땅덩어리를 돌면 1(12)가 되면, 항성(恒星)이 한 번 땅덩어리를 돌아가면 1(10,800)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배우지도 않고 어떻게 이런 걸 알았을까? 난 지구과학 시간에 배우면서도 잘 모르겠던데

문학, 역사, 기술에 이어 지구과학까지. 박지원도 괴테,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못지 않는 르네상스형 인물에 천재였던 것 같다.

 

야소교

141 “천주는 어릴 때부터 네 가지를 서약했는데 첫째 색념(色念)을 끊을 것, 둘째 벼슬 생각을 버릴 것, 셋째 사방을 돌아다니며 선교하되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지 말 것, 넷째 헛된 이름을 꿈꾸지 말 것이었지요.”

이렇게 간략하게 정리하니까 매우 쉽다. 그런데 왜 그렇게 복잡하고 어렵게 꼬아서 서로 자기가맞다며 싸우는 걸까?

 

141 “서방의 모든 나라가 이 교를 믿은 지 이미 천여 년이 되었으므로 나라가 아주 편안해졌답니다. 그러나 그 말이 너무 과장스럽고 황당한 편이어서 중국 사람은 믿는 이가 없답니다.”

 

제왕과 신하

145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바둑 두는 것과 같아서 임금은 바둑을 두는 당국자(當局者), 신하들은 옆에 앉은 구경꾼입니다. ‘옆에서 구경하는 것이 당국자보다 낫다.’는 선생의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둑을 두는 자가 잘 판단하지 못할 때에 어찌 구경꾼의 훈수를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문묘의 십일철

148 “평생에 학식이 노둔해서 아직까지 몇 권도 저술하지 못했습니다.”

주공같이 아름다운 재주가 있더라도, 교만하고 인색하면 말할 거리가 못 되지요. 선생이 만일……”

정말 겸손하셨구나.

 

지전설을 받아들이니 혹정

149 기이한 생각도 밤을 지나면 모래나 벌레, 원숭이나 학으로 바뀌는데, 이튿날 다시 높은 산을 쳐다보면 뜻밖의 기이한 봉우리가 떠오르고, 또 바람 돛을 따라서 포갰다 펴졌다. 했다. 이야말로 먼 길에 좋은 길동무가 되고, 멀리 가는 데 아주 즐거운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역시나 밤에 창의적이 되는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서 잊지 않도록 잘 기록해두자. 비록 아침에 보면서 이게 뭐냐!!!’고 오글거리고 비웃음이 날 지라도그러다가 한 가지쯤 건질 게 있을지도 모르지.

 

환희기

들어가기

154 “중국 땅이 커서 넉넉하고 끝이 없어 이런 것도 길러 내므로, 정치에 병이 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만일 천자가 소심하게 이런 것을 자로 재고 깊이 추궁한다면, 도리어 깊숙한 곳에 숨어 살다가 때때로 나와서 세상을 흐려 놓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천하의 근심이 더 커질 겁니다. 날마다 사람들이 장난삼아 구경하게 하면, 아낙네나 어린이까지도 이것을 요술로 알게 되어 마음과 눈이 놀라지 않을 테니 이게 바로 임금 된 자가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이 아니겠소.”

 

스무 가지 요술 이야기

156 우리 일행인 역부(驛夫)가 눈을 모아 자세히 보다가 마음속으로 노해서, 분한 얼굴로 주머니를 털어 돈을 냈다. 큰 소리로 요술쟁이를 불러 먼저 돈부터 주고는, 다시 한 번 자세히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요술쟁이가 원망하듯 말했다.

내가 당신을 속이지 않았는데 당신이 나를 믿지 못하지 나를 마음대로 묶어 보시오.” ~

역부가 크게 웃자, 구경꾼이 더욱 많아졌다. 푸는 것을 볼 틈도 없이 요술쟁이는 벌써 기둥을 떠나 서 있고, 묶은 데는 아직도 풀어지지 않았다. 이런 신통한 요술을 세 번이나 보였으니, 이해할 수가 없다.

알고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모르고 보면 세상에 없는 신기함. 마술 뿐 아니라 많은 재주들이 그런 것 같다. 실체를 알고 보면 별 것 아닌데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너무 대단해 보일 때가 많다. 신비함을 유지하는 게 마케팅의 힘일 수도 있겠다.

 

161 “당신이 항상 말똥으로 사람을 희롱한단 말을 전에 들었거든.”

요술쟁이가 웃으면서 변명하지 않는데도, 중국 사람들은 다투어 사서 먹었다. 그제야 우리나라 사람이 사려고 청하자, 요술쟁이가 처음에는 아끼는 듯 하다가, 얼마 뒤에 한 개를 집어 주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한 입 베어 먹고는 바로 토했는데, 말똥이 한입 가득 차서 시장 바닥의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166 본래 세상의 몽환(夢幻)이 이와 같고, 거울 속의 염량(炎凉) 변천도 현저히 다르다. 인간 세상의 가지가지 일이 아침에 무성하다가 저녁에 시들고, 어제 부자가 오늘은 가난하다. 잠깐 젊었다가 갑자기 늙는 것이 꿈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슬쩍 죽었다가 바야흐로 산다.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으며,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모를 일이다.

세상에 착한 마음을 지닌 사내와 보살 형제들에게 말하노니, 사람은 헛된 세상에 꿈 같은 몸과 거품 같은 금과 번개 같은 비단으로 큰 인연을 맺어 기운에 따라 잠시 머물 뿐이다. 바라건대 이 거울을 표준 삼아 덥다고 나아가지 말고 춥다고 물러서지 말며, 있는 돈을 흩어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지어다.

그냥 관객을 놀리고 웃기는 마술이 아니라 인생의 깊은 철학이 담겨 있다. 박지원이니까 그런게 보였겠지.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

 

166 요술쟁이가 큰 동이 하나를 탁자 위에 놓고, 수건으로 깨끗하게 닦았다. 붉은 옷감으로 위를 덮고서 장차 무슨 요술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품속에서 접시 하나가 쩽그렁하고 땅에 떨어지면서 붉은 대추가 흩어졌다. 여러 사람이 모두 웃자, 요술쟁이도 웃었다. 그러고는 그릇과 도구를 주워 담은 뒤에, 이내 놀음을 끝냈다. 이는 재주가 없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날이 저물어 어차피 끝내려고 했으므로, 일부러 들통을 내어 여러 사람에게 본래 이 놀음이 거짓임을 보여 준 것이다.

떠날 때를 잘 아는 똑똑한 요술쟁이다. 정말 넋을 잃고 봤을 듯

 

산장잡기

밤에 고북구를 나서면서

170 옛적에 몽염 장군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내가 임조에서 일어나 요동에 이르기까지 성을 만여 리나 쌓았는데, 그 과정에서 지맥을 끊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보니 그가 산을 헤치고 골짜기를 메운 것은 사실이었다.

아아! 슬프다. 이곳은 옛날부터 백 번이나 싸움이 있었던 전쟁터이다. ~

긴 바람 소리가 숙연해서 숲과 골짜기도 울었다. 짐승 같은 언덕과 귀신 같은 바위가 창을 세우고 방패를 벌여 놓은 것 같았다. 큰물이 산 틈에서 쏟아져 흐르는 소리가 마치 군사가 까우는 소리나 말이 뛰고 북을 치는 소리와도 같았다.

지난주에 읽었던 몽염 장군을 여기에서 또 보는구나. <사기열전>을 읽지 않았더라면 느낌이 좀 덜했겠지. 서양 고전을 읽을 때 성경과 그리스.로마 신화를 알아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듯이 동양의 고전도 <사기><수호지> 등을 읽어야 더 잘 이해가 될 것 같다.

 

<밤에 고북구를 나서면서>에 붙여 쓰다

172 지금 내가 이번 열하 여행을 더욱 다행스럽게 생각한 것은 장성을 나와서 사막 북쪽까지 이르렀던 선배가 일찍이 없었기 때문이다. ~

나는 어려서부터 배짱이 없고 겁이 많아서 어쩌다 낮에 빈 방에 들어가거나 밤에 조그만 등불을 보더라도 머리털이 움직이고 핏줄이 뛰었다. 올해 내 나이 마흔네이 되었건만, 무서움을 타는 성질은 어릴 때나 마찬가지다. 한밤중에 홀로 만리장성 밑에 서 보니, 달은 떨어지고 강물은 울며 흘렀다. 바람은 처량하고 반딧불이가 날아다녀서, 부딪치는 모든 경치가 놀랍고 두려우며 기이하고 이상했다. 그렇지만 두려운 마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173 그러나 본국으로 돌아가는 날, 동네 사람들이 다투어 술 한 병으로 위로하며 열하의 여정을 물을 테니, 이 기록을 내보여서 머리를 모아 한 번 읽고 책상을 치면서 리이하다고 떠들어 보리라.

 

하룻밤에 한 강물을 아홉 번이나 건너면서

174 모래 위에는 커다란 바윗돌이 우뚝우뚝 늘어서 있고, 강둑에는 버드나무들이 어두컴컴한 모습으로 서 있다. 마치 물귀신들이 다투어 나와 사람 앞에 자랑하며, 좌우에서는 이무기들이 움켜잡기라도 하는 듯했다.

어떤 사람은 이곳이 옛날 전쟁터였기에 강물이 그렇게 운다고 한다.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강물 소리는 어떻게 듣느냐에 달려 있다.

 

174 한번은 내가 문을 닫고 드러누워서 냇물 소리를 나누어 가며 들은 적이 있었다. 깊은 솔숲에서 울려 나오는 솔바람 소리는 청아하게 들린다.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는 격분한 소리같이 들인다. ~ 종이 바른 창문에 바람이 우는 듯한 소리는 의아스럽게 들린다. 모든 소리를 똑바로 들은 것은 아니다. 다만 내 가슴속에 지닌 뜻이 있어서, 이에 따라 귀가 받아들여 그런 소리로 만들어 주었을 뿐이다.

외모는 호랑이도 때려잡을 장수처럼 생기셨는데, 그 안에 소녀 감성이 있었던 듯 하다. 어쩜 이런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175 물을 건너는 자가 물이 소용돌이 치기도 하고 용솟음치기도 하면서 콸콸 흘러내리는 것을 보면, 몸은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고 눈길은 흐름을 따라 내려가는 것 같아서, 문득 현기증이 나서 물에 빠지게 됙 때문이다. 그들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보는 까닭은 하늘에 기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예 물을 외면하고 보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176 낮에는 물을 볼 수 있으므로, 눈은 위험함을 보는 데만 쏠린다. 벌벌 떨면서 도리어 눈 가진 것을 걱정해야 할 판에 무엇이 들리겠는가. 지금은 밤중에 강물을 건너기 때문에, 눈으로 위험한 상황을 보지 못한다. 위험한 생각이 오로지 귀로만 쏠려, 귀가 벌벌 떨면서 두려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야 도()를 알았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자는 귀나 눈에 얽매이지 않고, 귀나 눈으로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자세할수록 더욱 병이 되는 법이다.

물을 건너며 도()를 깨치셨구나. 이런 걸 뭐라고 할까? 하나 만들어 보자.

도강도도(渡江)

 

176 마음속에 살고 죽는 결단이 먼저 분명해진다면, 용이라고 해서 크게 보일 것도 없고, 도마뱀이라고 해서 작게 보일 것도 없다.

소리와 빛은 사람의 바깥에 있는 사물이다. 그런데 사람의 바깥에 있는 사물이 항상 이목에 누가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제대로 보거나 듣지 못하게 한다. 게다가 인생을 살아 나가려면 강물보다 더 험하고 위태로운 곳이 있지 않던가? 보고 듣는 것들이 자주 병통(病痛)이 되지 않던가? 나는 조선으로 돌아가는 즉시 내가 살던 산속으로 가서 다시 그 시냇물 소리를 들어 보면서 시험하겠다. 그래서 교묘하게 처신하며 스스로 그 총명함을 믿는 자들에게 경고하리라.

 

코끼리

178 내가 예전에 새벽 무렵 동해안을 지난 적이 있었는데, 물결 위에 말처럼 선 것이 수없이 많이 보였다. 모두가 집채처럼 덩그렇게 커서, 고기인지 짐승인지 알 수 가 없었다.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가 환해지면 보려고 했더니, 해가 바다 위로 솟아오르자 물결 위에 말처럼 섰던 것들은 벌써 바다 속으로 숨어 버렸다. 지금 코끼리를 열 걸음 밖에서 보면서 예전 동해안 생각이 났다.

뭐였을까? 혹시 집채만한 고래??

 

179 코끼리의 다리가 다섯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코끼리의 눈이 쥐의 눈 같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코끼리를 볼 때 코와 어금니에만 정신이 빠져 버리기 때문이다. 몸 전체를 통틀어 가장 작은 부분에 대해서는 이처럼 엉뚱한 생각을 할 만하다. 코끼리의 눈은 아주 가늘어서 마치 간사한 사람이 아양 부릴 때에 웃음 치는 것과도 같지만, 코끼리의 어진 성품은 바로 눈에 있다.

 

181 그들의 머리로 생각하는 범위가 소나 말, 닭이나 개 정도에서 머물고, 용이나 봉, 거북이나 기린 정도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코끼리가 호랑이를 만나면 코로 때려눕히니, 그 코야말로 천하무적이다. 그러나 코끼리가 쥐를 만나면 코를 둘 데가 없어 하늘만 쳐다보며 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쥐가 범보다 더 무섭다고 말한다면, 앞서 주장을 내세웠던 사람들의 이치와는 맞지 않다.

코끼리를 눈으로 보면서도 이처럼 이치를 알 수가 없다. 하물며 코끼리보다 만 배다 더 큰 천하의 사물에 대해서는 어떠하랴. 성인이 <주역>을 지을 때에 코끼리 상()’ 자를 따서 지은 까닭도 코끼리 같은 형상으로 만물이 변하는 이치를 궁구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던가.

 

구외이문

조선 진주

185 “이 진주는 토산이 아니군요. 이따금 홍합을 먹다가 입 안에서 진주가 발견되는데 이를 육주라고 하지요. 그런데 너무 가늘어서 보물로 치지는 않습니다. 아낙네들의 머리꽂이와 귀이개 따위에 꾸민 것은 대체로 일본 것인데, 붉은 빛깔 나는 게 제법 보배롭지요.”

그러자 기풍액이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오. 이건 조개껍데기를 둥글게 간 것이지, 진주가 아니라오. 우리가 그대 나라의 진주를 보배롭게 여기는 까닭은 조개 기운이 없이 천연적으로 보배로운 빛깔이 나기 때문이지요.”

요즘은 미키모토 같은 일본 진주가 훨씬 비싸고 유명한데, 예전에는 우리나라 진주가 더 좋았구나. 언제부터 바뀌었을까?

 

조조의 물속 무덤

양귀비의 사당

188 구외 길가에 양귀비의 사당이 있는데, 안녹산의 소상도 있다고 한다. 마부들이 들어가 보니, 양귀비의 상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요염하고, 안녹산의 상은 뚱뚱보에다 흰 배가 드러난 채 갖은 추태를 보이더라고 하였다. 이같이 음란한 사당을 헐어 버리지 않는 까닭은 뒷사람들을 경계하려는 뜻이 아니겠는가.

 

입정한 스님

189 그의 육신은 아직까지도 허물어지지 않았고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으며 부드러운 윤기가 흐른다. 다만 눈을 감은 채로 숨을 쉬지 않을 뿐이다.

 

고린내와 뚱이

젊다고 늙은이를 업신여기다니

191 1품 벼슬인 찬성 민형남이 칠십이 넘은 뒤에도 과일나무에 손수 접을 붙이자, 같은 마을에 살고 잇던 젊은 벼슬아치들이 웃으면서 물었다.

공께서는 아직도 백년 계획을 하십니까?”

바로 그대들에게 선물할 것이라네.”

나도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며 늙고 싶다.

 

신라호

 

 

옥갑야화

옥갑 여관방에서 돌아가며 이야기하다

202 “~ ‘내가 일찍부터 공경들을 섬긴 적이 많은데, 그 가운데 나라의 권세를 잡고서 사사로운 이익을 꾀한 사람치고 권세가 3대를 이은 사람이 없더란 말이야. 그리고 온 나라 사람 가운데 재물을 늘리는 이들이 으레 우리 집 거래를 표준 삼아서 오르내리는 것이 국론인 만큼, 이 재물을 흩어 버리지 않는다면 장차 재앙이 미필 거야.’

그러므로 그의 자손들이 지금 번창하고도 모두 가난한 까닭은 승업이 만년에 재산을 많이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허생

203 “당신이 밤낮으로 글을 읽었다더니 겨우 어찌할 수 있겠소?’라는 말만 배웠구려. 글쟁이 노릇도 못하고 장사치 노릇도 못한다면, 도둑질은 왜 못하시나요?”

왠지 안스럽기도 하면서 찔리기도 한다. 왜 그럴까, 내 얘기도 아닌데정말?

 

203 “아아! 안타깝구나. 내가 처음 글을 읽기 시작할 때에 10년을 채우려고 했었는데 이제 겨우 7년 읽었구나.”

계획을 이루지 못하게 되어 나도 안타깝다. 그런데 10년을 글을 읽은 뒤에는 뭘 하려고 했을까? 10년간 어떻게 살지는 아내와 미리 논의했던 걸까? 별게 다 걱정이다.

 

211 “~ 그러므로 나를 쓸 줄 아는 자는 복이 있는 자이니, 반드시 더욱더 부자가 될거야. 이는 하늘이 명하신 것이니, 어찌 안 줄 수 있겠나? 이미 만 냥을 얻은 뒤에는 그의 복에 의지해서 행하기 때문에, 움직였다 하면 바로 성공하는 법이지. 내가 만약 사사롭게 일을 시작했다면 성패 또한 알 수 없겠지.”

처음에는 웬 근거 없는 자신감.?? 했는데, 뒤에 말을 들어보니 수긍이 간다. 사사로운 욕심이 없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을 거다.

 

<허생> 뒤에 붙여 쓰다 1

217 “네가 관찰사의 몸으로 천하에 이런 큰일이 있는 것을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큰 소리만 쳐서 벼슬자리를 얻었구나.”

 

<허생> 뒤에 붙여 쓰다 2

222 “허생의 아내 말이야. 참 가엽더군. 결국 다시 굶주릴 거야.” ~

세상에는 물론 이름을 숨기고 몸을 깊이 간직하여 속세를 유희하는 자들이 없지 않다. 어찌 허생만 의심할까 보냐.

 

황도기략

서관

천주당

228 이 사람들은 달력도 잘 만들고, 자기 나라의 건축 방법으로 집을 지어서 산다. 그들의 학설은 부화와 거짓을 버리고 성실을 귀하게 여기니, 하느님을 밝게 섬기는 것을 으뜸으로 삼고 충효와 자애를 의무로 여긴다. 허물을 고치고 선을 닦는 것을 입문으로 삼고, 사람이 죽고 사는 큰일에 준비하여 걱정이 없는 것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래서 저들이 근본이 되는 학문의 이치를 찾아내었다고 자칭하고 있다. 그러나 뜻을 세우는 것이 너무 고답적이고 이론이 교묘한 데만 쏠려서, 도리어 하늘을 빙자하여 사람을 속이는 죄를 범하였다. 제 자신이 저절로 의리를 배반하고 윤리를 해치는 구렁으로 빠지고 있음을 모르는 것이다.

이를 두고 주자학을 신봉하던 조선 지식인의 한계라고 하는데 한편 이해가 되기도 한다. 믿기 어려웠겠지.

 

서양화

231 천주당 가운데에 있는 바람벽과 천장에 그려져 있는 구름과 인물들은 보통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었고, 보통 언어나 문자로는 형용할 수도 없었다. 내 눈으로 이것을 보려고 하자, 번개처럼 번쩍이면서 내 눈을 뽑는 것 같은 무엇이 있었다. 나는 그림 속에 있는 그 인물들이 내 가슴속을 꿰뚫고 들여다보는 것이 싫었다. 내 귀로 무엇을 들으려고 하자, 굽어보고 쳐다보고 돌아보는 그들이 먼저 내 귀에 무엇인가 속삭였다. 나는 그들이 내가 숨긴 것을 꿰뚫고 맞힐까 봐 부끄러웠다. 내 입이 장차 무엇을 말하려고 하자, 그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갑자기 우렛소리를 내는 듯하였다.

혹시 성령의 은총을 받으신 게 아닐까? 스탕달 신드롬 같기도 하다.

 

232 또 사람 머리와 몸뚱이에 새 날개가 돋아난 자도 있었다. 온통 기괴망측하여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할 수도 없었다.

천사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 그 사랑스러운 형상을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 기괴망측이라니미안하다 천사야.

 

유리창

 

알성퇴술

순천부학

학사

241 한인은 비록 벼슬하여 공경에 이르더라도 성안에는 집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서울에 유학하는 선비도 감히 거처할 수가 없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으면 중화족 스스로 되놈의 종자와 한 책상에서 공부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인가?

그러나 여기서도 오히려 본받을 일이 없지는 않다. 이곳의 서재와 학사들이 텅텅 비어 있다면 응당 먼지에 파묻히고 잡풀이 돋아났을 터인데, 어디든지 씻고 닦아 맑게 정돈했으며 탁자들이 가지런했다. 창호도 비록 종이를 바른 지는 오래되었지만 밝았으며, 찢어지거나 떨어진 곳이 하나도 없었다. 이것은 비록 한 가지 조그만 일이지만, 중국 법도를 짐작할 수가 있겠다.

 

문승상의 사당

문승상의 사당을 참배하고서

244 천하를 얻을 수 잇는 위엄과 무력이라도 지사의 절개를 꺾지 못한다. 지사 한 사람이 버티는 절개는 백만 명의 군대보다도 강하고, 만대를 통하는 떳떳한 도덕규범은 일시에 한 나라를 차지하는 것보다 더 소중하다. 이 역시 천도로 볼 수가 있다.

 

245 후세에 와서 천하를 차지한 사람은 모두 하늘로부터 명령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들은 확실한 자신이 없었기에 하늘을 믿지 않았고, 하늘을 믿지 않았기에 사람을 꺼릴 수밖에 없었다.

아전인수는 그때나 지금이나

 

관상대

248 때로는 머리를 흔들다가, 고개를 끄덕였는데, 나누는 이야기가 모두 까마득하여 알아듣기 어려웠다.

 

248 “우리나라 전라도 강진현 북쪽 끝에 나온 곳은 북극 몇 도인데, 회수가 황하에 들어오는 어구와 직선으로 되어 있으므로, 제주도의 귤이 바다를 건너 강진에만 오면 탱자가 된다.”

이 말이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시원

조선관

251 얼마 지난 뒤에 불을 다 껐는데, 아무런 소리도 없이 조용하였다. 흐트러진 물건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이를 보아서도 중국의 법도가 엄격한 것을 알 수 있으니, 매사에 구차하지 않은 게 이와 같다고 한다.

 

앙엽기

들어가기

홍인사

258 밥이 없으면 죽고, 군사가 없으면 망하지만, 성인은 죽고 망한 뒤에까지도 오히려 신의를 지키려고 하였다. 하물며 당시 문승상은 밖에서 군사를 맡아보고 등광천은 안에서 군량을 감독하고 있던 때이니만큼 배 가운데 든 천하라도 법도만은 먼저 회복하는 것이 참된 이치가 아니겠는가.

 

백운관

법장사

융복사

263 온갖 물건이 뜰에 가득 찼으며, 구슬과 보물이 이리저리 발길에 채이다시피 굴러다녀서 걷는 사람의 발길을 조심스럽게 하고, 사람의 마음을 송구스럽게 했으며, 사람의 눈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가난한 자신의 조국과 비교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264 그들은 친구를 찾아 고향 소식을 묻기도 하고, 그릇 등속과 의복을 사기도 한다. 그들이 찾는 물건들은 대개 골동품이나 새로 발간된 서적이며, 법서, 명화, 관복, 염주, 향랑, 안경 등이다. 남을 대신 시켜 군색스러운 일을 하는 것이 자기 손으로 유쾌하게 골라내는 것보다 못하기에 직접 장터에 나가서 흥정하는 것이다. 자기들 마음대로 물건을 선택하면서 오가는 모습만 보더라도 그들의 소박하고 솔직한 면을 볼 수 있다. 이래서 중국 사람은 저마다 물건을 감상할 줄 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관제묘

숭복사

이마두의 무덤

 

작품 해설

270 박지원은 [도강록] 서문에서 후삼경자라는 연호를 일부러 쓰면서 명나라 왕조가 망한 지 200년이 되도록 망한 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는 비현실성을 풍자했다. 청나라를 야만시하는 풍조 속에서, 그는 노론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명분론에서 벗어나 현실을 곧바로 보았던 것이다.

실학자라 노론과 거리가 먼 줄 알았는데, 노론 학자였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분론에서 벗어나 현실을 곧바로 봤다고 한다. 이 한 줄 만으로도 그의 삶이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271 20세부터는 친구들과 어울려 산속의 절간이나 시골집을 찾아다니며 글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우울증이 생겨, 사나흘씩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이야기꾼들을 불러다 밤새 시중의 이야기들을 들었는데, 이러한 이야기들이 뒷날 그의 소설의 소재가 되었다.

 

272 벼슬에 관심 없던 그가 팔촌형 박준원을 따라 연행에 자제군관으로 따라나선 까닭은 벼슬을 얻고 싶어서가 아니라 평생 소원이었던 중국 유람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며, 그를 계기로 해서 천하의 명문장을 써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273 대부분의 조천록이나 연행록은 한양에서 북경까지 정해진 길을 따라가며 보고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체재나 내용이 비슷한데, 박지원은 처음부터 청나라가 여진족이 세운 오랑캐의 나라가 아니며, 그래서 우리가 극복해야 할 나라가 아니라는 것, 우리가 오히려 앞서 간 문물을 배워 와야 할 나라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

 

275 과거 시험에 박지원의 문체를 흉내 낸 답안지가 제출될 정도로 젊은 지식인들은 <열하일기>에 환호했지만, 정조가 문체반정책을 내세우며 박지원의 문장이 순정하지 못하다고 비판한 것은 문체 자체보다도 <열하일기>의 파괴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열하일기>가 출판되지 못한 사실만 보더라도, 기득권층이 얼마나 <열하일기>를 두려워했는지 알 수 있다.

정조는 나름 오픈 마인드의 왕인줄 알았는데, 이 정도도 이해하지 못했구나. 물론 정조만의 문제는 아니었겠지만

 

280 서양 문물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기독교도 도덕적으로는 훌륭하다고 판단하였다. 다만 유일신 천주를 내세운 신앙만은 용납하지 않았으니, 주자학을 신봉하던 조선 지식인의 한계라고 할까.

 

281 박지원은 조선 후기의 병폐를 치료하기 위해 <열하일기>를 썼다. 그러나 그의 후배들만 열심히 읽었을 뿐, 집권층에서는 애써 외면하였다. 그를 이해한다는 후배까지도 <열하일기>를 조선 후기의 병폐를 치료하기 위한 교과서로 읽지 못하고 이야기 책으로 읽었다. 이러한 이야기책을 읽다가는 자신의 문장까지도 더럽혀지고 출세 길이 막히기 때문에, 후배 박남수는 <열하일기>를 불태우려 했다.

 

박지원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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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경제에 밝고 똑똑하여 할아버지 박필균(연암이 다섯 살 때부터 스물두 살 때까지 경기도 관찰사, 사헌부 대사헌, 예조 참판 등의 요직을 잇따라 역임)의 사랑을 받음. 그러나 재산 축적에 관심이 없는 할아버지와 별다른 벼슬을 하지 못한 아버지 아래 집안 형편이 어려워 글공부를 하지 못함.

할아버지가 정말로 청렴하고 재물에 욕심이 없으셨나 보다. 저 정도 벼슬이면 웬만큼 먹고 살 수 있었을 것 같은데본인은 청렴하다 칭송받았겠지만 가족들은 참 힘들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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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여읨. 이십대 무렵에 우울증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여 사나흘씩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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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여름,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서 개인 수행원의 자격으로 중국에 다녀옴.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장이 있는 열하까지 여행하고 돌아와서, 다시 연암 골짜기에 들어가 <열하일기> 25편을 지음.

 

286 <열하일기>는 새로운 문체를 선보여 젊은이들에게 널리 읽혔으며 심지어는 과거 시험 답안지에까지 영향을 줌. 그러자 기성 문단에서 반발하여 연암의 문체가 글공부하는 젊은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규탄함.

 

287 18056910 20일에 세상을 떠남. 제자 박제가가 문병하러 갔다가 연암의 운명을 보고 몹시 슬퍼하였으며 그 충격으로 병을 얻어 박제가도 이듬해 세상을 떠남.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병을 얻어 따라 죽기도 한다. 박제가에게 박지원은 스승 이상의 존재가 아니었을까?

 

 

내가 저자라면

 

l  목차에 대하여

저자가 이동한 경로에 따른 순서다. 각 지역의 모습, 전설이나 역사 등 지역에 관한 정보나 이야기, 보고 들은 새로운 문물, 지역인가의 대화, 느낌 등의 구성이다. 요즘의 여행기도 보통 이런 구성을 보인다. 저자와 같이 여행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좋은 목차이자 구성이라고 본다.

 

l  보완이 필요한

-       각 지역의 현재 모습에 대한 사진이 좀 더 있었다면 박지원이 봤던 것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할 수 있어서 좋았을 것 같다.

-       특히 벽돌과 기와부분에서 박지원이 상세하게 설명한 벽돌과 기와로 지은 집의 사진을 보여줬더라면 어땠을까? 매우 상세하게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하는 벽돌과 기와가 조선 것에 비해서 왜 그렇게 월등한지, 뭐가 그리 좋은지 이해가 잘 안 된다.

-       의도는 알겠지만 페이지를 숫자가 아닌 글자로 하니 매우 불편했다. 그냥 숫자로 하는 게 날 것 같다. 정 아쉽다면 차라리 한자로 하는게 이해하기 빠를 것 같다.

 

l  책의 장점

-       전체 여정에 대한 지도와 각 장에 해당하는 지도를 따로 보여준 것이 좋다. 마치 박지원을 따라 실제로 이동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       각 지역의 자연과 문물에 대한 묘사가 매우 상세해서 나도 그 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기행문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내가 여행한 곳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한 꼭지를 썼다. 마음과 몸을 움직이게 하는 책이 가장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 나를 움직이게 한 책이라는 점이 내가 꼽는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l  내가 저자라면

당시에는 사진을 찍을 수 없었으니 최대한 자신이 본 기록을 글로 자세하게 남겼을 거다. 그런데 나라면 그림으로도 남겼을 것 같다. 그림에 재주가 없다면 일행 중 재주가 있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기와와 벽돌’, 요술쟁이의 몇몇가지 요술, 유리창 등은 그림으로 남겨서 조선의 다른 사람도 최대한 비슷한 감흥을 받게 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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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8 01:08:51 *.18.218.234

응? 혹시 수정했어요? 어제 읽었던 거랑 좀 다른 거 같은데.

덕분에 양만춘과 당태종 이야기 보완하며 잘 읽었어요. 

도강도도(渡江) --> 이거 괜찮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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