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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0일 22시 45분 등록

사기열전

 

사마천지음/ 김원중옮김 / 민음사

 

저자연구 – 구우일모 사마천

"내가 법에 따라 사형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한낱 아홉 마리의 소 중에서 터럭 하나 없어지는 것과 같을 뿐이니 나와 같은 존재는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 무엇이 다르겠나?

 

사마천은 치욕적인 궁형을 당하면서까지 삶의 대한 의지를 친구인 임안에게 보낸 편지 속 글에 담았으며 이 일화는 구우일모 (九牛一毛)란 고사성어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본인이 하고자 하는 천명에 대한 의지, 그리고 억울한 죽임에 대한 반발과 이를 역사에 남기고하자는 강렬한 욕망이 사기로 표출되었다.

그러기에 사기(史記)는 어쩌면 사마천 그 자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그의 삶 그 자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궁형은 사마천에서 사기를 남기지 않으면 그 인생 자체가 무 의미하며 굴욕적인 생명의 대한 구걸로 손 가락질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필생의 모든 힘을 모아 사기를 완성한 것이 아닌가 싶다.

 

사마천  - 역사 집필의 기틀을 잡다.

사마천은 제6대 황제 경제(景帝) 중원(中元) 5(기원전 145. 다른 주장도 있음)에 오늘날의 섬서(陝西) 성 한성(韓城)현에서 태어났다. 10살 무렵 고문(古文)을 깨우치고 10대 초부터 강남, 강북의 여러 지방을 두루 편력한 뒤 산동과 하남을 거쳐 수도 장안에 들어가 낭중에 임명됐다. 이후 황제의 명으로 사천 지방에서 운남의 곤명까지 여행을 하는 등 중국 각지를 돌며 특히 역사의 무대가 되었던 많은 곳을 방문했다. 이러한 경험이 [사기] 편찬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는 결코 문헌자료만 파고드는 책상물림의 역사가가 아니었다.

 

사마천 인생의 전기를 맞이하다.

태사령에 임명된 지 10년째이자 47세가 되던 BC.99, 사마천은 인생에 중대한 전환이 되는 사건을 겪게 된다. ‘이릉(李陵) 변호 사건또는이릉의 화라 불리는 사건이다.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던 명장 이광의 손자로서 흉노를 토벌하여 빛나는 공을 세웠던 장수 이릉이 전쟁터에서 어쩔 수 없이 흉노에 항복하는 일이 벌어졌다. 얼마 전까지 이릉의 승리에 환호하던 조정 대신들은 하루아침에 일제히 이릉을 성토하고 나섰다. 패배를 책임질 희생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답답했던 무제는 사마천에게 의견을 물었다. 사마천은 황제의 심기를 풀어 주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밝히며 이릉을 변호했다. 그러나 사마천의 진심과 변호는 무제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사마천이 이릉을 변호하기 위해 언급한 작전상의 실수가 궁극적으로 대장군 이광리를 지목한 것 아니냐는 오해를 샀기 때문이다. 대장군 이광리는 무제의 처남이었던 것이다. 분노한 무제는 사마천을 옥에 가두었다. 사마천은 이릉과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다만 이릉이 전쟁에서 승리할 때는 칭찬을 아끼지 않다가 흉노의 포로가 되자마자 무제와 실권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이릉을 비난하는 조정 대신들의 행태가 못마땅했는데, 마침 황제의 하문이 있어서 이릉을 변호했던 것이다. 상황은 더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릉이 흉노에서 벼슬까지 받고 흉노 군대에 병법을 가르친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들려왔다. 이에 무제는 이릉의 가족을 몰살한 다음, 역적을 옹호했다는 죄목으로 사마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이자 필생의 사업인 『사기』 저술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상황에서 이런 일을 맞이하고 보니 어쩔 줄 몰랐다. 그는 이대로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지, 목숨을 부지할 방법은 없는지를 고민했다. 당시 한나라 법에 따르면 사형수가 죽음을 면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50만 전이라는 거금을 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궁형을 자청하는 것이다. 사마천에게는 50만 전이 거금이었지만 부자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사마천을 변호하지 않는 상황에서 돈까지 지불하며 그를 구할 사람은 없었다. 사마천에게는 할 일이 남아 있었기에 결국 그는 치욕을 감수하며 궁형을 자청했다. 그의 나이 49세 때의 일이다. 이듬해 사마천은 사면을 받아 감옥에서 풀려났다.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사형보다 치욕적인 형벌을 자청한 그는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모진 치욕을 당하기로는 궁형보다 더한 것이 없소이다. 내가 화를 누르고 울분을 삼키며 옥에 갇힌 까닭은 차마 다하지 못한 말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였소.” 사마천은이것은 나의 죄로다, 이것은 나의 죄로다! 아무 쓸모없는 불구의 몸이 되었구나.”라고 자책했다. 마음이 울분으로 가득 차서 미친 사람처럼 곳곳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치욕과 울분도 『사기』의 완성을 막지 못했다. 그는 곧 마음을 다잡고 남은 힘을 『사기』에 쏟았다.

 

사마천 역사 기술의 전형을 만들다.

사마천은 『사기』를 완성한 이후 중서령(中書令)이 되었고, 후세에 사천(史遷), 태사공(太史公), ‘역사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다. 『사기』를 저술할 때하늘과 사람의 이치를 연구하고, 고금의 변화를 통달하여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룬다라는 목표를 세웠다고 한다. 기전체 역사서인 『사기』는 고대 중국의 전설시대부터 한 무제 원수(元狩) 원년인 BC.122년까지 총 3천여 년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표면적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사기』의 내용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사마천은 『사기』 곳곳에서세상의 부조리를 개탄하고, “믿음을 보여도 의심하고 충성을 다해도 비방한다라며 자신의 억울한 심경을 솔직히 표출하고 있다. 부당한 억압을 딛고 통쾌하게 복수한 인물들을 대거 편입시켰고,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주거나 대세를 바꾼 사람이면 누구든 기록하여 그 역할과 작용을 각인시켰다. 부당한 권력을 비판하고 약자를 옹호했다. 『사기』는 보통사람을 중시했고, 역사의 주역이 따로 있지 않다는 역사 인식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겼다. 사마천의 죽음에 관한 사실들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대략 BC.90~87, 나이 55세 전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사인도 자연사, 자살, 처형 등으로 다양하게 추정된다. 사마천의 고향인 산시(陝西)성 한청시에 살고 있는 그의 후손들은 그가 『사기』를 완성한 후 또다시 황제의 심기를 건드려 처형당했다고 믿고 있다.

 

사기(史記)

史記는 중국 최초 문명시대인 黃帝시대에서 前漢 武帝시기까지 2,500 여년의 역사를 서술한 130권의 방대한 역사서이다. 사기가 씌어 지고 난 후 2천년 동안 중국의 모든 역사서 중에서 가장 널리 읽혔던 책 중의 하나였다. 그 체제는 후사에 正史의 모범이 되어 왔다. 사기는 전체적으로 기전체 형식으로 되어 있어 이후 중국 역대 왕조사의 편찬에 채용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기전체란 제왕의 즉위 연대에 따라 기록하는 단순한 역사편찬 방식이 아니라, 통치자를 중심으로 하여 여기에 속한 신하들의 전기, 통치제도, 문물 등을 분류, 서술하여 왕조 전체의 체제를 이해하기에 편한 역사서술로서 역사적 사실 뿐 아니라 역사적 시각의 다양성까지 표현할 수 있어 생동감 있는 역사를 재현할 수 있다. 즉 중국인의 時空에서 전개된 인간의 여러 활동 및 그 결과를 망라한 것이다. 따라서 '史記'는 한편의 운대한 通史이자 世界史이며, 동시에 종합사인 것이다. 이 때문에 史記는 시대의 繼起的인 변화와 여러 지역간의 상호 유기적인 관계, 그리고 그 안에서 진행된 인간의 삶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을 제시함으로써 역사의 인과적인 이해뿐 아니라 사건과 현상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보편적인 원리의 문에서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史記'는 사마천 자신이 당시 士人으로서는 가장 치욕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宮刑을 받고 좌절과 울분속에서 史記라는 大史書를 완성한 비극적인 생의 경험이 점철된 역사서이기도 하다. 그의 문장을 보면 많은 사람들의 삶의 역정을 냉철하게 관찰하고 추적하여 비판하면서 교훈을 주고 있다. 그러나 사마천은 개인의 비극을 극복하여 절실하고 냉철한 역사적 진실의 추구로 승화시켜 객관적으로 역사를 평가하고 있다는데 사기의 매력이 있다.

사기는「本記」「表」「書」「世家」「列傳」의 전 130권으로 되어 있다.
사기는 모두 52 6천여자로 이루어진 방대한 역사서다.

본기

30

역대 왕조의 변천을 서술한 연대기

10

각 시대에 대한 역사

8

국가의 제제도의 연혁과 변천을 기록

세가

30

봉건 제후의 연대기

열전

70

개인의 전기

일반적으로 우리가 史記라 함은 사기열전을 떠올릴 만큼 사기의 다섯부문 중 가장 잘 알려져 있고 또 분량이 가장 많다. 130권 중 70권이 개인의 구체적인 성공과 실패를 추척한 개인전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만큼 사마천은 역사를 개인의 능동적인 활동의 집적으로 보았고, 개인의 禍福과 역사의 흥망성쇠를 개인의 도덕과 능력, 이것을 바탕으로 한 개인의 능동적인 노력여하의 결과로 설명한다. 사기가 만들어진 지 2천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사람들에게 많이 읽히고 흥미를 주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기가 역사적이면서도 생생한 인간을 탐구하는 인간학의 백과사전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근세 경영학의 교과서인 것이다.
사기는 격동기에 산 인간과 온갖 인간관계를 설명한 책으로서, 그 속에 인간에 관한 모든 자료가 들어 있어 필요할 때마다 꺼내 보고 거울삼아 사는 방법과 지혜를 그 시대 인물들로부터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사기는 또한 문학적으로도 빼어난 작품이며 같은 문장이라도 읽는 사람의 소양과 처한 상황에 따라 달리 나타나고 해석되는 고전이다. 뿐만 아니라 사기는 아무리 읽어도 싫증나지 아니하고 읽을 때마다 새로운 맛을 느끼게 하는 삶과 지혜의 보고(寶庫)이고 철학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기는 생명력을 잃지 않고 날로 복잡해져 가는 오늘의 환경속에서 더욱 더 정채를 발하고 많이 읽히는 것이다.

 

김원중 사기 완역에 16년이 걸렸습니다.

 

역사서의 고전으로 꼽히는 사마천(司馬遷·기원전 145 ? ~ 86 ?)의 『사기(史記) 130편이 국내 처음으로 완역돼 나왔다. 완역의 주인공은 김원중(48·사진)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1995년 『사기 열전』 번역에 착수한 이래 『사기 본기』 『사기 세가』에 이어 최근 『사기 표()』와 『사기 서()』까지 마무리했다. 16년에 걸친 작업이다. 『사기 열전』 『사기 세가』 등은 여러 번역본이 있지만 『사기 표』가 한국어로 번역된 것은 처음이다.

 - 『사기 표』는 어떤 책인가
.

 문자 그대로 연표다. 인물 중심으로 『사기 본기』 『사기 세가』 『사기 열전』에 분산 서술된 역사적 사실 관계를 한 눈에 비교할 수 있도록 표를 만들었다. ··주 시대의 황제부터 한나라 무제 때까지 2500년 역사를 순서대로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청나라 학자 정초(鄭樵)『사기』의 공()은 십표(十表)에 있다고 했다. 10편으로 돼있어십표라고도 부른다. 함께 번역한 『사기 서』는 예악·군사·역법·천문 등 제도와 문물에 대한 기록이다
.”

 - 완역한 소감은
.

 아마 사마천이 가장 힘들었던 작업이 이 표 만들기 였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나 역시 가장 고통스러웠던 표 번역을 끝내 홀가분하다. 『사기 표』는 중국에서도 현대어로 옮겨지지 않았고, 일본에서도 2년전에야 번역됐다. 내 일생의 분기점이 될 것 같다
.”

 - 역사서로서 『사기』의 특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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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중심 기전체(紀傳體)의 효시라는 형식 말고도, 내용상 한족(漢族)과 이족(異族)을 아우르는 통합의 역사관을 주목할 만하다. 예컨대 오나라는 중원문화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 변방에 있었지만 『사기 세가』의 첫머리에 놓였다. 사마천은 한무제의 이족 정벌에 비판적이었다.”

 - 『사기』의 매력이라면
.

 사마천은 『사기 본기』에서 현실의 패자였던 항우(項羽)를 승자였던 유방(劉邦)보다 앞에 뒀다. 『사기 열전』의 맨 앞자리도 현실의 패자였던 백이(伯夷)가 차지했다.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출처: 중앙일보] 사마천의 『사기』 국내 첫 완역  “16년 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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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무찔러 온 글귀

 

역자서문

 

P6 – 열전 70편은 수많은 인재들의 활약상이 돋보이는 명편이 특히 많은데, 삶을 어떻게 살 것인 것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통찰력을 던져 주기에 독자들에게 감동의 진폭이 더욱 크다.

 

P7 – [백이열전]에서 세상의 공정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마천의 문장은 슬픔과 한탄이 배어 있고, [손자 오기 열전]에서 손자가 오왕 합려와 만나 궁녀들을 호령하는 장면에서는 이국땅에서 장수가 되기 위해 치르는 혹독한 통과의례에서 겪어야만 하는 인간적 갈등이 문장에 묻어난다.

사기는 역사서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특히 사마천의 개인적 경험에서 나오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따뜻한 시선은 간접적의 그의 인생을 이해하게 해준다.

 

P13 – [사기 열전]은 이와 같은 격동과 파란의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 간 온갖 인물 군상의 결정체이다. 예를 들면 [자객열전]은 차라리 목을 내놓을지언정 지조를 꺾을 수 없는 충신과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홀로 적지에 뛰어들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나이들의 세계를 보여준다. 

 

P14 – 먼저 입고 먹는 것이 다스림의 근원이라는 관점 아래 물건과 돈을 흐르는 물처럼 유통시켜야 한다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원칙을 설파한다.

다스림의 근본은 백성들의 안정이다. 만고의 진리이다.

 

P17 – [사기]는 상고 시대부터 사마천이 살던 한 무제 때까지의 중국 역사를 다룬다. 여기에는 중국인들이 사이(四夷)라고 불렀던 주변 이민족의 역사가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은 중국 역사의 전범으로 일컬어지며,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의 역사서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사기]는 본기 12, 10, 8, 세가 30, 열전 70편 등 총 130, 52 6500자로 이루어져 있다. 본기는 고대 전설상의 오제부터 한나라 무제에 이르기까지 천하에 권력을 행사하던 왕조나 군주들의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대체로 왕자를 기준으로 하여 시대순으로 12편을 배열했다.

표는 [사기]가 다루고 있는 시공간을 재구성하여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으로 세표, 연표, 월표로 이루어져 있다.

서는 사회 제도에 주목하여 이상과 현실, 변혁과 민생 문제 등을 보여 주는 전문적 논술이다.

세가는 제왕보다 낮은 위치인 봉건 제후들의 나라별 역사를 다루고 있다.

열전은 주로 제왕과 제후를 위해 일한 인물들의 전기를 수록하고 있으며, 때로 계급을 초월하여 기상천외한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기도 하다.

 

P26 – 첫째, 발분 의식의 소산이다. 사마천이 궁형을 당한 것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구차한 행위가 아니라 글을 지어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둘째, 역사적 사실의 포펌과 직서이다. 이는 [태사공 자서]에서도 드러나듯, 공자가 [춘추]를 서술한 방식에 바탕을 두고 후세 사람들에게 하나의 도덕적 규범을 제시하여 미언대의 작은 말 속의 큰 의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사마천은 아버지와 함께 무제 곁에서 절대 권략자의 영토 확장 야욕과 그로 인해 야기되는 수많은 현실적인 문제점들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또한 무제를 수행하면서 각종 성대한 의전 장면이나 열병 의식 및 수렵활동 등을 통해 당시의 시대정신을 터득하기도 했다.

사마천의 사기는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치적을 드러내기 위해 저술한 다른 역사서와는 목적 자체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시대 정신을 담아 낼 수 있었고 사회 문제에도 고민하고 주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보다 가장 중요한 점은 사마천에게 사기의 저술은 삶의 목적 그 자체 였을 것으로 보인다.

 

P29 – 무제는 한나라의 제 5대 황제로서 고제, 혜제, 문제, 경제의 통치를 거치면서 중앙 집권 체제가 확고해졌을 때의 통치자다. 이 시기는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번영하면서 학술이 번성했다. 따라서 각 분야마다 대표적인 학자들이 탄생했으니 위대한 경학가요 징치 평론자인 동중서, 문장가 사마상여, 군사 전략가 위청과 곽거병, 그리고 천문학자 당도, 탐험가 장건, 음악가 이연년 등 걸출한 인물들이 무제의 수하에 있었다. 이런면에서 보면 [사기]가 후한의 무제 때 탄생한 것 역시 결코 우연이 아니다.

모든 것은 역사적 산물이다. 한 개인이 역사의 물결을 거스를 수는 없다. 사마천 역시 이런 시대적 상황이 잘 맞았기에 [사기]를 저술할 수 있었을 것이다.

 

P33 – 이처럼 [이사 열전]이나 [골계 열전] 등에서 볼 수 있는 주제에 대한 다양한 접근 방식, [자객 열전]에서 보이는 구도의 설정 능력, [여불위 열전]에서 볼 수 있는 구성 방식이나 희극적 효과의 운용은 중국인의 문사일체 관념을 보여 주는 구체적인 실례이다.

 

P35 – 사기 열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라는 물음에 대해 다양한 해답을 제시한다. 사마천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리고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겪는 고충을 거의 모든 인물이 똑 같이 겪었음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말해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시대에 맞선 자, 시대를 거스른 자, 그리고 시대를 비껴간 자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는 교훈 역시 적지 않다.

사마천은 주로 시대에 맞선 자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는 것 같다. 시대에 맞선 다는 것, 그것은 개인에겐 대개 불행한 일을 가져온다. 물론 역사적으로는 꼭 필요하고 역사의 큰 물줄기를 만든 경우도 있다. 그러나 한 개인으로 본 다면 과연 그 것이 의미 있는 일인가?

 

1.백이 열전

P68 – 사마천이 이 편을 쓴 의도는 단순히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백이와 숙제의 행적을 기록하려 했다기 보다는 도도히 흐르는 역사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에 궁형을 당한 자신을 빗대어 쓴 것이다. 특히 하늘의 도에 대해 옳고 그름의 의문을 던지면서 세상 이치의 냉엄함에도 주목하고 있다.

왜 백이와 숙제가 열전에 첫 편일까? 그것부터 사마천이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것같다.

 

P75 – “하늘의 도는 사사로움이 없어 늘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

정말 과연 그럴까? 글쎄 그런 것 같지 않다.

 

P76 – 요즘 시대에 들어서면서 하는 행동은 규범을 따르지 않고 오로지 법령이 금지하는 일만을 일삼으면서도 한평생을 편안하게 즐거워하며 대대로 [부귀]가 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걸음 한 번 내딛는 데도 땅을 가려서 딛고, 말을 할 때도 알맞은 때를 기다려 하며, 길을 갈 때는 작은 길로 가지 않고, 공평하고 바른 일이 아니면 떨쳐 일어나서 하지 않는 데도 재앙을 만나는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나는 매우 당혹스럽다. 만일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라면 옮은가? 그른가?

 

1.관안 열전

 

P83 – 관중은 빈곤하여 언제나 포숙을 속였지만 포숙은 끝까지 그를 잘 대해 속인 일을 따지지 않았다.

포숙은 왜 그런 것일까? 군자이기 때문에? 성인이기 때문에?

 

P85 – “창고에 물자가 풍부해야 예절을 알며, 먹고 입는 것이 풍족해야 명예와 치욕을 알게 된다. 임금이 법도를 실천하면 육친이 굳게 결속하고, 사유가 펼쳐지지 못하면 나라는 멸망한다. 수원에서 물이 흘러가듯이 명령을 내리면 그 명령은 민심에 순응하게 된다.”

정치의 근본을 통찰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먹고 입는 것이 해결되어야 그 다음이 있는 것이다. 그것조차 해결 안된다면 무엇이 더 의미가 있겠는가?

 

3.노자한비 열전

 

P95 – 내가 듣건대 훌륭한 상인은 [물건을] 깊숙이 숨겨 두어 텅 빈 것처럼 보이게 하고, 군자는 아름다운 덕을 지니고 있지만 모양새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고 하였소. 그대의 교만과 지나친 욕망, 위선적인 모습과 지나친 야심을 버리시오.

 

P96 – 대체로 노자는 160여 살 또는 200여 살을 살았다고 하는데, 그가 도를 닦아 수명을 연장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를 닦으면 이렇게 수명 연장이 가능할까? 그 당시 돌아다니면 이야기일 뿐이 않을까?

 

P97 – 세상에서 노자의 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유가 학문을 내치고, 유가 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역시 노자를 내쳤다. “길이 다르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아마도 이러한 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P98 – “천금은 막대한 이익이고 경상이란 높은 지위지요. 그대는 어찌 교재를 지낼 때 희생물로 바쳐지는 소를 보지 못했습니까? 그 소는 여러 해 동안 잘 먹다가 화려한 비단 옷을 입고 결국 종묘로 [끌려] 들어가게 되오. 이때 그 소가 [몸집이] 작은 돼지가 되겠다고 한들 어찌 그렇게 될 수 있겠소? 그대는 빨리 돌아가 나를 욕되게 하지 마시오. 나는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스스로 즐길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들에게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오.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 뜻대로 즐겁게 살고 싶소.”

왕 밑에서 벼슬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 유능하면 유능한 대로 시기심에 견제 당하게 되고, 직언을 하면 직언을 하는 대로 왕의 눈 밖에 나서 말로가 좋지 않다. 그렇다면 그냥 왕의 비위만을 맞추면서 사는 것이 처세의 올바른 방식일까? 어려운 일이다.

 

P100 – 한비는 유가는 글로 나라의 법을 혼란스럽게 하고, 협객은 힘으로 나라의 금령을 어긴다고 생각했다. [군주는 나라가] 편안할 때에는 명예를 좇는 사람을 총애하고 위급할 때에는 갑옷 입고 투구 쓴 무사를 등용한다. [그러므로] 지금 이 나라에서 봉록을 주어 등용하는 자는 위급할 때에는 쓸 수 없는 자이고, 위급할 때에 쓰이는 사람은 봉록을 주어 등용한 자가 아니다. [한비는] 청렴하고 정직한 인물들이 사악한 신하들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고 옛날 왕들이 시행한 정치의 성공과 실패에 관한 변화를 살펴 [고분], [오두], [내저설], [외저설],[설림], [세난] 편 등 10여만 자의 글을 지었다. 그러나 한비는 유세의 어려움을 알고 [세난] 편을 매우 자세하게 지었음에도 결국은 진나라에서 죽어 자신은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자신은 잘 알고 있고 깊게 고민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조언했음에도 왜 본인은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

 

P104 – 이웃집 사람과 관기사가 한 말은 모두 옳으나 심한 경우는 목숨을 잃고 가벼운 경우는 의심을 받았다. 이는 안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아는 것을 어떻게 쓰느냐가 어렵다는 뜻이다.

 

P105 – 미자하의 행위는 처음이나 나중이나 다를 바가 없었지만 처음에는 현명하다고 칭찬을 받고 나중에는 죄를 입게 되었다. 그것은 군주가 그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완전히 바꾸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주에게 간언하고 유세하는 자는 군주가 자기를 사랑하는가 미워하는가를 살펴본 다음에 유세해야 한다.

군주에게도 거꾸로 난 비늘이 있으니, 유세하는 사람이 군주의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지 않아야 성공한 유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린이다. 군주의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면 무사할 수 없다는 뜻이다. 과연 그 당시 처세에 가장 기본은 군주였다.

 

P106 – 나는 다만 한자가 [세난]편을 짓고도 스스로는 재앙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 슬플 뿐이다.

알면서도 그 굴레를 벗어 날 수 없음이 서글프고 애달프다.

 

5.손자오기 열전

 

P130 – “그렇지 않습니다. 예전에 오 공께서 우리 애 아버지의 종기를 빨아 준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용감히 싸우다가 적진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오 공이 지금 또 제 자식의 종기를 빨아 주었으니 소첩은 이 아이가 [어느때 어디서] 죽게 될지 모릅니다. 이 때문에 소리 내어 우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마음이 안타깝다. 혹 장군들은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서 이용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P131 – 이렇게 보면 [나라를 다스리는데 중요한 것은 임금의] 덕행에 있지 [지형의] 험준함에 있지 않습니다. 만일 임금께서 덕을 닦지 않으시면 배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적국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6.오자서 열전

 

P146 – 합려는 초나라의 수도 영까지 쳐들어가려고 하였으나 장군 손무가 말했다. “백성이 지쳐 있어 안 됩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P152 – 가볍게는 코를 베고 무겁게는 목을 베어 이 땅에 악의 씨가 자라지 못하게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상나라가 흥성하게 된 까닭입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제나라를 치려는 마음을 접어 두고 먼저 월나라를 처리하십시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P154 – “내 무덤 위에 가래 나무를 심어 왕의 관을 짤 목재로 쓰도록 하라. 아울러 내 눈을 빼내 오나라 동문에 매달아 월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하라.”

한 나라의 명 재상들이 왜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간 것일까? 군왕의 역린을 건드려서 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인가?

 

P156 – “원한의 해독이 사람에게 끼치는 것은 심하구나! 왕이 된 자도 신하에게 원한을 사서는 안 되거늘, 하물며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끼리야! 일찍이 오자서가 오사를 따라 함께 죽었다면 어찌 땅강아지나 개미와 차이가 있었겠는가? 작은 의를 버리고 큰 치욕을 씻어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겼으나 슬프구나! 바야흐로 오자서는 강수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이고, 길에서 빌어먹을 때도 마음속에 어찌 잠깐인들 [초나라의 수도]영을 잊었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것을 참고 견뎌 내어 공명을 이룰 수 있었으니 강인한 대장부가 아니면 어느 누가 이런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백공도 만일 스스로 왕이 되려고만 하지 않았던 들 그 공적과 계책도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리라!”

 

P159 – 사마천은 [공자 세가] [화식 열전]에서도 자공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공자의 이름이 후세에 알려지게 된 이유가 자공 덕분이라는 사마천 특유의 관점이 반영된 것이다.

  

7.중니 제자 열전

 

P163 – 덕행으로는 안연과 민자건과 염백우와 중궁이 있고, 정치로는 염유와 계로가 있으며, 언변으로는 재아와 자공이 있고, 문학으로는 자유와 자하가 있다.

 

P164 – “안회는 [배울 때 듣고만 있어] 어리석은 것 같지만 물러가 행동하는 것을 살펴보면 [내가 해 준 말들을] 완벽하게 실천하고 있었다. 안회는 어리석지 않구나!”

 

P167 – [한편] 염구가 [공자에게] 물었다.

[의로운 일을]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

공자가 말했다.

행해야 한다.

자로가 물었다

[의로운 일을]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아버지와 형이 계신데 어찌 들은 것을 바로 행하겠느냐?

자화가 이를 의아해했다.

김히 여쭙겠습니다. 어째서 같은 질문에 달리 대답하십니까?

공자가 말했다.

염구는 머뭇거리는 성격이므로 앞으로 나아가게 해 준 것이고, 자로는 지나치게 용감하므로 물러나게 한 것이다.

스승이라면 새겨 들어야 할 말이다.

 

P173 – “재여는 참으로 인하지 못하구나! 자식은 태어 나서 3년이 지나야 부모 품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삼년상이 세상에 널리 통하는 의식인 것이다.”

유교의 허례허식과 지나침에 대해서 늘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 중에서 하나이다. 효는 중요하다고생각 하나 과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P174 – 재여가 오제의 덕을 묻자 공자가 말했다.

나는 그것을 물을 자격이 없다.’

그 뒤 재여가 [재나라 도성] 임치의 대부가 되었는데, 전상과 난을 일으켜 그 일족이 모두 죽음을 당하게 되었으므로 공자는 매우 부끄러워했다.

과연 공자답다. 그런데 제자에게 이렇게 답을 하는 것도 군자로서의 모습은 아니지 않은가?

 

P176 – “부유하지만 교만하지 않고 가난하지만 아첨하지 않는다면 어떻습니까? “

공자가 말했다.

괜찮다. 그러나 가난하지만 도를 즐기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

 

P177 – “제가 듣기에 나라 안에 걱정거리가 있으면 강한 적을 공격하고, 나라밖에 걱정거리가 있으면 약한 적을 공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의 골칫거리는 나라 안에 있습니다. 저는 당신이 세 번이나 봉해지려 했지만 세 번 모두 이뤄지지 않는 것은 대신들 가운데 반대하는 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지금 당신이 노나라를 쳐서 제나라 땅을 넓히게 된다면 전쟁에서 이긴 것으로 제나라 왕은 더욱 교만해질 것이고, 나라를 무너뜨린 것으로 대신들의 위세는 더욱 높아질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공을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왕과 사이가 날로 소원해질 것입니다.

 

P184 – 즉 자공이 한 번 뛰어다니더니 각국의 형세에 균열이 생겨 10년 사이에 다섯 나라에 각기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자공은 또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일을 좋아하여 때를 보아서 돈을 잘 굴렸다. 그는 남의 장점을 칭찬하기를 좋아하였으나 남의 잘못을 덮어 주지는 못하였다. 그는 일찍이 노나라와 위나라에서 재상을 지냈으며 집안에 천금을 쌓아 두기도 하였다.

 

P185 – “닭을 잡는 데 어찌하여 소 잡는 칼을 쓰느냐?”

 

P187 – 공자가 말했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

공자는 자하에게 말했다.

너는 [도에 힘쓰는] 군자의 선비가 되어야지, [명성을 좇는] 소인의 선비가 되어서는 안된다.”

 

P188 – 자장은 [이 말을 잊지 않기 위하여] 허리띠에 적어 두었다.

이 정신만은 배워두어야 겠다.

 

P192 – “내가 듣건대 재물이 없는 것을 가난이라고 하고, 도를 배우고도 실행하지 못하는 것을 병들었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가난하기는 하지만 병들지는 않았습니다.” 자공은 수치스러워하며 좋지 않은 마음으로 떠났다. 그는 평생동안 자신의 말을 지나쳤음을 부끄럽게 여겼다.

 

8.상군 열전

 

P210 – 백성은 일을 시작할 때에는 더불어 상의할 수 없으나 일이 성공하면 함께 즐길 수 있습니다. 가장 높은 덕을 논의하는 자는 세속과 타협하지 않으며, 큰 공을 이루는 자는 뭇사람과 상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나라를 강하게 할 수 있으면 구태여 옛것을 본뜨지 않고,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으면 옛날의 예악 제도를 쫓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마치 마키아밸리가 오히려 이를 후에 벤치마킹한 것은 아닐까?란 생각까지 든다.

 

P217 – “과인이 공숙좌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한스럽구나.” 위앙이 위나라 군대를 쳐부수고 돌아오자, 진나라에서는 앙을 오와 상의 열다섯 읍에 봉하고 봉호를 상군이라 했다.

 

P223 – 태사공은 말한다.

상군은 그 타고난 성품이 각박한 사람이다. 그가 효공에게 벼슬을 얻고자 제왕의 도로 유세한 것을 보면 내용이 없고 화려한 말을 늘어놓은 것이지 마음속으로 하려던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일찍이 상군이 지은 [상군서]에서 [개색], [경전] 편을 읽었는데 [그 내용도] 그가 행동한 궤적과 비슷하였다. 결국 상군이 진나라에서 좋지 않은 평판을 얻게 된 데는 까닭이 있구나!

사마천의 상앙에 대한 평가는 박하기만 하다.

 

9.소진 열전

 

P227 – “주나라 사람들의 풍속에 따르면 농사를 주로 하고 물건을 만들고 장사에 힘써서 10분이 2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임무인데 지금 당신은 본업을 버리고 입과 혀끝만을 놀리고 있으니 곤궁한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소진은 이 말을 듣고 부끄럽고 절로 슬퍼졌다. 그는 그길로 문을 걸어 잠그고 방에 틀어박혀 책을 꺼내 두루 훑어보다가 말했다.

 

P234 – 여섯 나라가 하나가 되어 힘을 합쳐 서쪽으로 진나라를 치면 진나라는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왕께서 서쪽으로 진나라를 섬기면 진나라의 신하 노릇을 하는 것이 됩니다. 대체로 다른 사람을 깨뜨리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 깨지는 것, 다른 사람에게 신하라고 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신하로 거느리는 것을 어떻게 한날에 애기 할 수 있겠습니까!

 

P235 – ,,,,, 조나라가 하나가 되어 합종하여 함께 진나라에 대항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천하의 장수와 재상들로 하여금 원수 근처로 모이도록 하여 인질을 맞바꾸고 백마를 죽여 맹세하고 이렇게 약속해야 합니다.

이렇게 들으면 이 말이 맞는 것 같고 또 달리 들으면 다른 주장이 맞는 듯하다. 그래서 유세객으로 불리운 것 같다.

 

P238 – 신이 듣건대 항간의 속담에 차라리 닭의 부리가 될지언정 쇠꼬리가 되지 말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서쪽으로 팔을 모아 복종해 신하로서 진나라를 섬긴다면 쇠꼬리가 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P241 – 위나라 왕은 대답했다.

과인은 어리석어 일찍이 훌륭한 가르침을 들은 적이 없었소. 지금 당신은 조나라 왕의 조칙을 가지고 나를 깨우쳐 주었으니 삼가 나라를 받들어 [당신 의견을] 따르겠소.”

 

P247 – 이렇게 하여 여섯 나라는 합종하여 힘을 합치게 되었다. 소진은 합종 맹약의 우두머리가 되고 아울러 여섯 나라의 재상을 겸하였다.

대단한 유세객이다.

 

P248 – 소진은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이 한 몸도 부귀해지자 친척들이 두려워하고 가난하고 천하면 업신여기는데, 하물며 뭇사람들임에라! 만일 나에게 낙양성 주변에 밭이 두 이랑만 있었던들 어찌 여섯 나라 재상의 인수를 찰 수 있었을까?”

인생의 아이러니이다. 가족들을 먹여살릴 수 있는 밭 하나 없기에 소진은 여섯 나라의 재상을 겸하는 대 유세객이 된 것이 아닌가.

 

P267 – “진나라가 만든 재앙은 이렇게 큽니다. 그런데도 진나라에 갔던 연나라와 조나라의 유세가는 모두 다투어 자기 나라의 군주에게 진나라를 섬겨야 한다며 설득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이 가장 걱정하는 바입니다.”

연나라 소왕은 [진나라로] 가지 않고, 소대는 다시 연나라에서 중용되었다. 연나라는 소진이 활동하던 때 처럼 제후들과 합종의 약속을 맺으려고 하였다. 제후 중에는 합종하는 자도 있고 하지 않는 자도 있지만 천하는 이 일로 인하여 소대의 합종책을 믿고 받들게 되었다. 소대와 소려는 모두 타고난 수명을 누리며 제후들 사이에 이름을 드 날렸다.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일이었던 것 같다.

 

P268 – 소진이 보통 사람의 집에서 일어나 여섯 나라를 연합시켜 합종을 맺게 한 것은 그 지혜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래서 나는 시대 순서에 따라 그의 경력과 사적을 서술하여 유독 그만이 나쁜 평가를 듣지 않도록 하였다.

 

10.장의 열전

 

P271 – 장의는 위나라 사람이다. 처음에는 일찍이 소진과 함께 귀곡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종횡술을 배웠는데, 소진은 스스로 장의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본인의 한계와 미진함을 인정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P271

장의의 아내가 말했다.

! 당신의 글을 읽어 유세하지 않았던들 어찌 이런 수모를 겪었겠습니까?”

그러자 장의는 자기 아내에게 말했다.

내 혀가 아직 붙어 있는지 보아 주시오.”

장의의 아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혀는 남아 있네요.”

장의가 말했다.

그럼 됐소.”

사마천이 이런 글을 남겼다는 것이 참 신기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역사서에 이런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글이 남겨져 있단 말인가.

 

P273 – 나는 그가 작은 이익을 탐내어 큰 뜻을 이루지 못할까 염려스러워서 일부러 그를 불러다 모욕을 주어 그의 뜻을 북돋운 것일세. 자네는 나 대신 은밀히 그를 도와주게

 

P274 – 장의가 말했다.

! 이것은 내가 배운 유세술에 있던 것인데 알지 못했구려! 내가 소진만 못한 것이 분명하오. 이렇게 하여 내가 등용되었는데 어찌 조나라를 칠 계책을 꾸미겠소? 나 대신 소선생에게 소군이 살아 있는 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며, 소 군이 있는 한 내가 감히 무엇을 할 수 있겠소.”라고 전해주시오.

 

P276 – 따라서 촉나라를 치는 것은 군사를 지치게 하고 백성을 고달프게 할 뿐 명분을 얻기에는 부족합니다. 설령 땅을 손에 넣는다 하더라도 실질적인 이익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신이 듣건대 명분을 다투는 자는 조정에서 다투고, 이익을 다투는 자는 저잣거리에서 다툰다고 합니다.

오히려 조정에서 이익을 위해서 다툰 것들이 아닌가.

 

P281 – 신이 듣건대 깃털도 많이 쌓이면 배를 가라앉히고, 가벼운 물건도 많이 실으면 수레의 축이 부러지며, 여러 사람의 입은 무쇠도 녹이고, 여러 사람의 비방이 쌓이면 뼈도 녹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잘 살펴서 계책과 의논을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신은 잠시 휴가를 얻어 위나라를 떠나 있고 싶습니다.

 

P287 – 또 합종에 참가하는 나라들은 양떼를 몰아 사나운 호랑이를 공격하는 꼴과 다르지 않습니다. 호랑이와 양은 서로 적수가 될 수 없음이 명백한데도 왕께서는 사나운 호랑이와 손잡지 않고 양 떼 편에 섰습니다. 신은 왕의 계책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한 사안을 두고도 완전히 달리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본인이 처한 위치에서 보기에 같은 사안도 소진과 장위의 경우와 같이 180도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무엇이 진실인가? 유세객들 또한 과연 진실은 무엇인지 고민하는가? 본인을 알아준 왕에게만 충성하는 것이 우선인가?

 

P296 – 왕께서 합종을 신뢰하신 것은 소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소진은 제후들은 현혹시켜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제나라를 등지려다가 저잣거리에서 거열형으로 다스려지는 결과를 자초했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의 힘으로 천하가 하나로 묶일 수 없음은 명백한 일입니다.

 

P299 – 연나라 왕이 말했다.

과인은 오랑캐처럼 벽지에 살고 있는 탓에 허우대는 다 큰 어른이지만 생각은 어린아이나 다름없소. 게다가 올바른 계책을 얻기에는 [주위] 여론이 부족하였소. 이제 다행히 상객께서 가르쳐 주었으니 서쪽으로 진나라를 섬기기 바라며, 항산의 끝에 있는 다섯 성을 바치겠소.”

 

P300 – 제후들은 장의와 무왕 사이에 틈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연횡 약속을 어기고 다시 합종하였다.

 

P303 – 그러므로 노비가 그 마을을 벗어나기 전에 팔리면 좋은 노비입니다. 소박맞고 쫓겨 온 여자가 그 마을에서 다시 결혼한다면 좋은 아내입니다. 지금 신이 자기 임금에게 충성스럽지 않다면 초나라도 어떻게 신을 충성스럽다고 여기겠습니까? 충성을 다해도 버림받으려 하는데 신이 초나라로 가지 않으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P309 – 태사공은 말했다.

삼진에는 권모술수와 임기웅변에 능한 유세가가 많았다. 합종과 연횡을 주장하여 진나라를 강하게 만든 자들은 모두 삼진 사람이다. 장의가 일을 꾸민 것은 소진보다 더 심한 데가 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이 소진을 더욱 미워하는 까닭은 그가 먼저 죽었기 때문에 장의가 그의 단점을 부풀려 들추어내고 자신의 주장을 유리하게 하여 연횡론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두 사람은 참으로 나라를 기울게 하는 위험한 인물이었다고 하겠다!”

 

11.저리자감무 열전

 

P313 – 저리자의 이름은 질이고 진나라 혜왕의 배다른 동생으로, 어머니는 한나라 여자이다. 그는 우스갯 소리나 행동을 잘하고 지혜도 풍부하여 진나라 사람들이 지혜주머니라고 불렀다.

 

P316 – 진나라 속담에 힘은 임비요, 지혜는 저리이다.”라는 말이 있다.

 

P321 – “짐승도 궁지로 몰리면 수레를 뒤엎는다고 합니다. 공은 한나라를 깨뜨리고 공중치를 욕보이려 합니다. 공중치는 지금 한나라를 들어 다시 진나라를 섬기고 봉토를 받으려 생각하고 있습니다.

 

P324 – 못사는 여자가 나는 초를 살 돈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다행히 당신의 촛불에는 남는 빛이 있으니 그 남는 빛을 나에게 나눠 주십시오. 당신의 밝음에 해를 끼치지 않고 나도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저는 곤궁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바야흐로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길입니다. 제 아내와 자식은 진나라에 있습니다. 부디 당신의 남는 빛으로 그들을 구제해 주십시오.”

 

P332 – 이들은 행실이 성실한 군자는 아니지만 전국 시대의 책사였다. 바야흐로 진나라가 강성해졌을때 천하는 더욱 권모와 술수로 치달으려 했던 것이다.

그 시대에는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정신과 능력이 있다. 그때는 책사들의 아이디어와 기획력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군자의 덕과 예가 필요한 때는 아니었던 것 같다.

 

12.양후 열전

 

P341 – 이듬해에 양후는 백기, 객경 호양과 함께 다시 조나라, 한나라, 위나라를 치고 망묘를 화영성 밑에서 쳐부숴 10만명의 목을 베고 위나라의 권, 채양, 장사, 조나라의 관진을 빼았다.

그 당시 10만명이라 함은 지금으로 환원해 보아도 큰 숫자일 것 같은데 중국이란 나라는 참 대단한 것 같다.

 

P344 – 그는 부유하고 존귀함이 최고에 이르렀을 때, 한 남자가 유세를 펼치자 신분이 꺾이고 궨세를 빼앗겨 근심과 번민 속에서 살다가 죽었다. [왕족의 한 사람이 이렇거늘] 하물며 [진나라에서 벼슬아치가 된] 객경이야 어떠하겠는가?

권력과 부귀영화를 뒤 쫓던 모든 자들의 말로가 다 좋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또 많은이들이 뒤 쫓음은 무엇에 기인하는가? 사마천이 묻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13.백기왕전 열전

 

P354 –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잠시 동안 그렇게 있다가 말을 이었다.

나는 죽어 마땅하다. 장평 싸움에서 항복한 조나라 병사 수십만명을 속여서 모두 산 채로 땅속에 묻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죽어 마땅하다.”

인생은 인과응보란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를 죽음에 이르러서야 꼭 깨닫는다.

 

P360 – 태사공은 말한다.

속담에 자에도 짧은 데가 있고, 치에도 긴 데가 있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진나라를 보필해서 덕을 세워 천하를 근본을 튼튼하게 하지 못하고, 그럭저럭 시황제에게 아첨하여 편하게 있을 곳을 구하다가 늙어서 죽음에 이르렀다. 손자 왕이 때에 이르러 항우에게 사로 잡힌 것도 마땅하지 않은가! 그들에게는 각기 단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14.맹자순경 열전

 

P368 – “그렇소. 내가 전에 왕을 만났을 때 왕은 말을 쫓아가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고 그 다음ㅇ 만났을 때는 왕이 음악에 정신이 쏠려 있었소. 그래서 나는 말없이 있었소.” 식객이 이 말을 왕에게 보고하니 왕은 크게 놀라면서 말했다. “! 순우 선생은 정녕 성인이오.”

 

P370 – 이사는 일찍이 순경의 제자였는데 훗날 진나라 재상이 되었다. 성인의 기본적인 도리를 닦아 몸으로 실천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순경은 유가, 묵가, 도가의 학설이 펼쳐진 결과 이룬 것과 실패한 것을 살펴 차례로 정리해서 수만 자의 책을 남기고 죽었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난릉에 묻혔다.

15.맹상군 열전

 

P373 – 제나라 맹상군 전문, 조나라 평원근 조승, 위나라 신릉군 무기, 초나라 춘신군 황헐은 선비를 기르기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는데, 각기 식객 3000여명을 거느려 흔히 전국 사공자라고 부른다. 사마천은 사공자 각자의 전을 만들어 전국 시대에 각국에서 다양한 개성을 지닌 인재를 초빙하던 모습과 정치적 싸움이 벌어진 면모를 날카로운 시각에서 평가하고 있다.

 

P377 – “사람의 운명을 하늘에서 받는다면 아버님께서는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그렇지 않고 운명을 지게문에서 받는다면 지게문을 계속 높이면 그만입니다. 어느 누가 그 지게문 높이를 따라 계속 클 수 있겠습니까?”

과연 어떤 시각으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새로운 면에서 다른 시각이 나온다.

 

P378 – 지금 아버님의 후궁들은 아름다운 비단옷을 질질 끌고 다니지만 선비들은 짧은 베옷 하나 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버님의 하인들과 첩들은 쌀밥과 고기를 실컷 먹고도 남아돌지만 선비들은 쌀겨나 술지게미조차 마다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아버님께서는 쌓아 둔 것이 남아돌지만 더욱 많이 쌓아두려고만 할 뿐 나라의 힘이 날로 쇠약해지는 것은 잊고 계십니다. 저는 이 점이 이상합니다.

 

P381 – 맹상군이 이것을 진나라 소왕의 첩에게 바치니, 소왕의 첩이 맹상군을 위해 소왕에게 말하자 소왕은 맹상군을 풀어 주었다.

역사적 사건 속에서 위기에서 벗어날 때 남자의 여자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읽을 때마다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할까? 궁금했었다. 권력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그 권력자의 여자란 것이다. 언뜻 보면 이해가 안되지만 또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현실, 우리가 사는 세상이란 이렇게 이성적이지 않다.

 

P381 – 처음 맹상군이 좀도둑과 닭 울음소리를 잘 내는 사람을 빈객으로 삼았을 때, 다른 빈객들은 모두 같은 자리에 앉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런데 맹상군이 진나라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결국 이 두사람이 그를 구하였다. 그 뒤 빈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맹상군을 따르게 되었다.

인생은 알 수 없는 것 같다. 그 사람들이 생명을 구해 줄지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래서 이렇게 사기에까지 사례로 실린 것일 것이다.

 

P387 – 전문이 죽으니 시호를 맹상군이라고 했다. 여러 아들이 자리를 다투고 있는 동안 제나라와 위나라가 함께 설 땅을 멸망시켰다. 맹상군은 후사가 없어져서 대가 끊겼다.

천하의 맹상군도 자식 관리는 제대로 못했나보다. 인생이 완벽할 수 없고 누구나 장단점이 있는것 같다.  

 

P394 – 살아 있는 것이 반드시 죽게 되는 것은 만물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부유하고 귀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가난하고 지위가 낮으면 벗이 적어지는 것은 일의 당연한 이치입니다. 당신은 혹시 아침 일찍 시장으로 가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습니까?  새벽에는 어깨를 맞대면서 앞다투어 문으로 들어가지만 날이 저물고 나서 시장을 지나는 사람들은 팔을 휘저으면서 [시장은]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이제 당신이 지위를 잃자 빈객이 모두 떠나가 버렸다고 해서 선비들을 원망하여 일부러 빈격들이 오는 길을 끊을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빈객들을 대우하십시오.

세상의 이치이다. 이를 야속하다 원망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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