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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gum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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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1일 11시 48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사마천

 

아버지 사마담은 한 무제 때 태사령(太史令)이었다. 태사령(太史令)은 역사를 관장하는 장관이라고 한다.

 

사마천이 살았던 시대는 한나라의 전성기이자 중국 역사상 몇 되지 않는 전성기였던 무제 때였다. 사마천은 어려서부터 고전을 공부했고, 스무 살 무렵에는 아버지 사마담의 권유로 견문을 넓히고 역사가로서의 자질을 기르기 위해 전국을 답사했다.

역시 자녀는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본인의 자질이나 능력도 중요하지만 부모로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그 자녀들이 달라지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다 서른여덟 살 때인 기원전 108,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만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관이 되어 역사서를 편찬하는 일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사마천은 사관 집안으로서의 자부심이 강했던 아버지 사마담이 죽기 전 남긴 유언, 즉 역사서의 완성을 필생의 사명으로 물려받았다. 아버지의 학문과 사상으로부터도 깊은 영향을 받았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나?

 

아버지 사마담은 천문과 역학은 물론 도가(道家)까지 두루 섭렵한 뛰어난 학자였다. 태사령의 벼슬에 있었던 사마담은 생전에 역사서 저술에 뜻을 두었으나 이루지 못하고 아들 사마천에게 물려주었다. 음양가 · 유가 · 묵가 · 명가 · 법가 · 도가 등 6대 학파의 특징과 득실을 논평한 논육가요지(論六家要指)는 사마담이 남긴 훌륭한 논문으로 아들 사마천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권유로 스무 살 무렵 전국을 답사했고, 벼슬살이를 시작한 후로는 무제를 수행하여 전국을 다녔다. 이러한 현장 경험은 사기저술에 막대한 도움이 되었다. () 나라의 애국 시인 굴원(屈原)이 자살한 멱라수(汨羅水)를 찾아 애도를 표했으며, 한신(韓信) · 소하(蕭何) 등 한나라를 세운 공신들의 고향을 찾아가서는 현지에서나 전해오는 그들의 과거 이야기를 모았다.

 

이 자료들은 사기곳곳에서 사기의 내용을 더욱 실감나게 한다. 현장답사와 문헌기록을 변증법적으로 소화해낸 사기의 실증적 정신은 오늘날 역사가들이 본받아야 할 큰 장점이 아닐 수 없다

 

40대에 접어든 사마천은 조정의 일과 사기저술이라는 두 가지 일을 열정적으로 해내며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그는 친구 임안(任安)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 자신의 생활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대야를 머리에 인 채 하늘을 볼[대분망천(戴盆望天)] 수 없기에 빈객과의 사귐도 끊고 집안일도 돌보지 않고 밤낮없이 미미한 재능이나마 오로지 한 마음으로 직무에 최선을 다해 주상의 눈에 들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가혹한 운명의 장난은 이런 사마천을 그냥 두지 않았다. 태사령에 임명된 지 10년째 되던 기원전 99, 마흔일곱 살이 되던 그해 사마천은 자신의 인생에 중대한 전환이 되는 뜻밖의 사건을 맞이한다. 이른바 이릉(李陵) 변호사건또는 이릉의 화라 부르는 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던 명장 이광(李廣)의 손자로 흉노 토벌에 빛나는 공을 세웠던 이릉이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어쩔 수 없이 흉노에 항복하자 불과 얼마 전까지 이릉의 승리에 환호하던 조정 대신들은 하루아침에 안면을 바꿔 일제히 이릉을 성토하고 나섰다. 패배를 책임질 희생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답답했던 무제는 사마천에게 의견을 물었다. 사마천은 황제의 심기를 풀어주기 위해 나름대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밝히면서 이릉을 변호하고 나섰다. 그러나 사마천의 진심과 솔직한 변호가 역으로 무제의 불편한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사마천이 이릉을 변호하기 위해 언급한 작전상의 실수가 궁극적으로 대장군 이광리(李廣利)를 지목한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샀기 때문이다. 대장군 이광리는 다름 아닌 황제의 처남이었다.

 

화가 난 무제는 사마천을 옥에 가둔다. 사실 사마천은 이릉과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다만 이릉이 전쟁에서 승리할 때는 모두들 있는 칭찬 없는 칭찬을 아끼지 않다가 흉노의 포로가 되자마자 무제와 실권자의 비위를 맞추려고 입을 모아 이릉을 비난하는 조정 대신들의 행태가 못마땅했는데 마침 황제의 하문도 있고 해서 이릉을 변호하며 자신의 견해를 밝혔던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 이릉이 흉노에서 벼슬까지 받고 흉노 군대에 병법을 가르친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들려왔다. 이에 이성을 잃은 무제는 앞뒤 가리지 않고 이릉의 가족을 몰살시킨 다음 역적을 옹호했다는 죄목으로 사마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마천은 앞이 캄캄했다. 억울함이 북받쳤다. 일이 왜 이렇게 되고 말았는지 답답했다. 더욱이 아버지의 간곡한 유언이자 필생의 사업인 사기저술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날벼락을 맞이하고 보니 어쩔 줄 몰랐다. 사마천은 고뇌했다.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죽음의 그림자가 사마천을 사정없이 휘감아 들었다.

 

사마천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대로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나? 목숨을 부지할 방법은 없을까? 당시 한나라 법에 따르면 사형수가 죽음을 면하는 방법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50만 전이라는 거금을 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궁형(宮刑)을 자청는 것이다.

사마천에게는 50만 전이 거금이었지만 돈 많은 사람에게는 별 것 아니었다. 그러나 조정 대신 누구 하나 사마천을 변호하지 않는 상황에서 돈까지 내가며 그를 구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사마천은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는 괘씸죄에 걸려 사형을 선고받은 자가 아닌가? 사마천은 암담했다. 죽음을 면키 힘들어 보였다. 그렇다면 두 번째 방법인 궁형을 당하는 길밖에 없지 않은가? 하지만 궁형이 어떤 형벌인가? 남성의 상징인 성기를 절단하는, 말 그대로 죽음보다 더 치욕스러운 형벌이 아니던가? 많은 사람들이 궁형을 당하느니 자결을 선택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에게는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사마천은 말할 수 없는 치욕을 감수하며 궁형을 자청했다. 그때 그의 나이 49세였다. 이듬 해 사마천은 사면을 받아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는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사형보다 더 치욕적인 형벌을 자청했던 것이다.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마천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모진 치욕을 당하기로는 궁형보다 더한 것이 없소이다. ····· 내가 화를 누르고 울분을 삼키며 옥에 갇힌 까닭은 차마 다하지 못한 말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였소.

 

치욕스러운 형벌을 받은 사마천은 이것은 나의 죄로다, 이것은 나의 죄로다! 아무 쓸모없는 불구의 몸이 되었구나라고 자책했다. 그의 마음은 온통 울분으로 가득 찼다. 어디 한곳에다 마음을 둘 수 없었다. 미친 사람처럼 쏘다니기도 했다. 이 모든 치욕과 울분도 그에게 마지막 남은 일, 사기의 완성이라는 대업을 막지는 못했다. 그가 궁형을 택한 것도 이를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그는 곧 마음을 다잡고 남은 힘을 모조리 사기의 완성에 쏟아 부었다. 궁형은 치욕스러운 형벌이었지만 사마천의 선택은 위대했다.

 

이렇게 해서 사기는 완성되었다. 하지만 사기의 완성이라는 표면적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기의 내용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해서 사기는 사마천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이 되었다. 사마천은 사기곳곳에서 세상의 부조리를 개탄하며, “믿음을 보여도 의심하고 충성을 다해도 비방한다며 자신의 억울한 심경을 솔직하게 표출했다. 부당한 억압을 딛고 통쾌하게 복수한 인물들을 대거 편입시켰고,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주거나 대세를 바꾼 사람이면 누구든 기록에 넣어 그 역할과 작용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부당한 권력을 비판하고 약자를 옹호했다. 사기는 영원히 보통사람의 편이 되었고, 역사의 주역이 따로 없다는 참으로 소중한 역사 인식을 사람들 마음 깊이 아로 새겼다.

- 이상 사마천, 인간의 길을 묻다, 역사의 등불 사마천, 피로 쓴 사기에서 발췌

사마천은 궁형(宮刑·거세)을 당한 치욕을 견디며 사기’(史記)라는 불후의 명작을 저술했다. 그가 대작을 탈고할 무렵 친구 임안(任安)에게 보낸 서신 보임서경서’(報任少卿書)에 나오는 대목이다. 그러면서 사마천은 임안에게 하루에도 창자가 아홉번씩 끊어지는 듯하고 집 안에 있으면 갑자기 망연자실하고 집 밖을 나서면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지 못합니다. 매번 이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땀이 등줄기를 흘러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라고 구구절절한 마음을 전했다. 궁형. 감히 상상할 수 있는가?

 

 

김원중

<논어>에 이어 두 번째이다. 중국관련 고전은 웬만하면 다 저자의 작품인 듯하다. 중국고전이 얼마나 많겠나. 전공이나 하고 싶은 일을 잘 선택한 것 같다.

 

성공포인트는 집념

사기 성공학에는 마흔여섯 명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밭갈이하던 머슴에서 왕이 된 야심가 진섭, 진시황을 살해하려다 실패한 형가, 잔인한 복수극을 벌인 악녀 여 태후, 인재 발굴의 귀재 여불위, 사람의 고집만은 고치지 못했던 명의 편작, 자신이 만든 법이 스스로 걸려든 상앙 등 다채로운 인간들의 성공과 실패담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새로운 생각의 길을 열어 준다.

이 책의 저자 김원중 교수는 개인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사기를 완역한 장본인이다. 매일 밤 10시에 잠자리에 들어 새벽 2~3시면 일어나 책상에 앉고, 주말도 명절도 없이 세월을 보낸 끝에 탄생한 완역판 사기. 이 같은 고통과 인내없이 무엇을 이룰수 있을까.

 

박사 논문을 쓰면서 사기에 매료되어 번역에 뛰어든 지 16, 사마천이 공들인 시간만큼 김원중 교수 또한 번역에 매달려 사기전체를 완역해 내는 쾌거를 이룬다. 김원중 교수의 이러한 성공은 사기 성공학에 등장하는 인물 중 집념을 상징하는 장건을 떠올리게 한다. 장건은 실크로드를 개척한 모험가이다. 한 무제의 명을 받아 서역으로 향한 장건은 흉노 땅을 지나던 중 그들에게 붙잡혀 10여 년을 머물게 된다. 흉노 땅에서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았지만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았던 장건은 끝내 탈출하여 13년 만에 한나라로 돌아온다. 이로써 실크로드가 우리에게 처음으로 펼쳐졌고 이 길을 통해 다양한 문화와 문명이 꽃피었다. 사기완역 또한 이러한 집념의 귀중한 성과물이 아닐까.

김원중 교수는 지난한 번역 작업 틈틈이 여러 기업과 공공 기관 강연을 통해 사기에서 얻은 지혜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힘써 왔다. 사기 성공학한국경제신문1년여간 연재하며 큰 호응을 얻었던 글들을 바탕으로 엮은 것으로, 김원중 교수가 완역 작업을 하는 동안 수십 번씩 들여다본 원전에서 얻은 지혜와 통찰을 전하는 책이다.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때 그래도 물러앉을 것인가 다시 일어서 나아갈 것인가 선택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이 책은 당신이 언젠가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좋은 안내자가 되어 줄 것이다.

 

문화융성위원회 인문특위 위원으로 인문학 활성화 방안을 연구하고 있는 김 교수는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인문학이 분명 위기인 것은 사실이다. 모든 것을 빨리빨리 하겠다고 하면서 우리 마음도 바빠졌고 이에 따라 인문학도 위기가 아닌가 싶다"고 진단했다.

 

그는 또 "인문학이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인문학자들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다""인문학의 위기 뒤에는 학자들의 소극적인 면모도 많이 작용되었으니 좀 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할 것 같다"고 제언했다.

 

김 교수가 내 놓은 인문학 진흥의 해법은 좀 느리게 살아보자는 것이다.

 

그는 "공부 뿐 아니라 학문적 성과에서도 너무 빨리빨리 뭔가를 내놓으려고 조급해 하지 말고 속도에 매몰되지도 말아야한다""좀 더 느리게 살아보자는 마음으로 천천히 읽고 쓰고 깊이 있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가 사기를 번역하기 위해 한 여정을 살펴보자

“16년 동안 매일 밤 10시에 잠들고 새벽 2~3시에 일어나 번역을 했습니다. 주말과 방학은 물론 명절 때도 오후에는 연구실로 출근했습니다. 웬만한 약속은 잡지도 않았고요. 그저 사기에 푹 빠져 지낸 세월이었습니다. 아시겠지만 사마천이라는 인물이 아주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가장 치욕적인 형벌인 궁형을 당하고 모진 삶을 견뎌내면서 살아 숨쉬는 인간과 권력에 대한 경전인 사기를 완성했으니 말입니다. ‘사기안에는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습니다. 모두가 잠재력을 지닌 역사의 주인공들이지요.”

 

김 교수는 번역 과정에서 중국 백화문(구어체로 쉽게 쓴 글)으로 쓰여진 책은 참고하지 않았다. 고전 원문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중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학창시절 유명한 문학평론가들의 글을 수백편씩 읽어가면서 되도록 쉽고 뜻이 잘 전달되도록 노력했다고 말한다.

 

김 교수는 스스로 사마천을 자신의 멘토라고 칭했다. 궁형을 당하면서도 후세에 남기고자 했던 그 마음, 그 정열이 가슴 깊이 새겨지는 까닭이다. 하여 재평가 작업 차원에서 번역 일을 했단다. 사기를 읽는 사람에게 어떤 대목을 권하고 싶은지 물었다.

 

개정판 역자 서문

 

5. 삽도 하나 없는 <사기 열전>이 큰 사랑을 누리게 된 것은 그만큼 독자들의 인문 고전에 대한 독서 수준이 높다는 뜻이리라. <사기> 130편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열전 70편은 수많은 인재들의 활약상이 돋보이는 명편이 특히 많은데,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근본적 문제에 대한 통찰력을 던져 주기에 독자들에게 주는 감동의 진폭도 더욱 크다.

 

6. 가능한 한 원문에 충실하도록 번역하는 데 공을 들였으나, 이전 번역에서는 독자의 편의를 고려해 의역한 부분이 더러 있었던 부분을 원전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할 수 있도록 수정했다.

 

7. <백이 열전>에서 세상의 공정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마천의 문장은 슬픔과 한탄이 배어 있고, <손자 오기 열전>에서 손자가 오왕 합려와 만나 궁녀들을 호령하는 장면에서는 이국땅에서 장수가 되기 위해 치르는 혹독한 통과의례에서 겪어야만 하는 인간적 갈등이 문장에 묻어난다.

 

7. <사마상여 열전>에서는 사마상여의 작품이 그대로 수록되어 있어 가장 난해한 문학 중 하나인 부()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데 공을 들였다. 그리고 매 편마다 붙어 있는 사마천의 평인 태사공왈에서는 사마천 특유의 이중 어법이 독특하게 나타나는데, 한 인물에 대해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드러내면서도 그 사잇길을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는 그 오묘한 문장력을 보여준다.

()는 글 쓸때의 문체의 일종이라고 한다. 자기 주장이나 경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문체라고 하는데, 사마상여는 이것을 독자적으로 발전시켜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문체로 만들어 글을 썼다. 상여는 백가지 미사여구와 좋은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풍유, 슬쩍 무언가를 비꼬거나 가르치는 것, 즉 글의 교훈과 같은 본질은 한 가지이다.

 

8. 가독성을 돕기 위해 주석 위치를 바꾸어 각주로 두었으며, 해당 편과 관련된 삽도를 첨부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했다.

 

8. 가진 것이 많았어도 성공하지 못한 자들이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거대한 족적을 남긴 자들도 적지 않았으며, 또 많은 이들이 수성에 성공하지 못하고 모래성 무너지듯 힘들게 쌓아 올린 탑을 무너뜨린 경우도 보면서 타고난 능력과 자질 못지않게 자신이 몸담은 세상에서 올바르게 처신하는 자세도 중요한 것임을 다시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이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아니겠나.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이유이기도 하고.

 

역자서문

 

11. 세계인의 고전 <사기>는 사마천이 사관인 아버지 사마담의 유언에 따르고자 궁형의 치욕을 딛고 저술한 통사체 역사서로서, 전설의 황제시대부터 한 무제때까지 2,000년을 아우르고 있다.

 

11. <사기>중에서도 열전 70편은 주나라 붕괴 후 등장한 50개 제후국 가운데 최후까지 살아남은 전국 칠웅, 즉 진(), (), (), (), (), (), ()의 흥망성쇠를 주축으로 하며,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 보인다.

춘추시대.gif 전국시대.gif


 

11. 물론 제후왕들만 야심을 품은 것이 아니었다. 이들에게는 이들의 야심을 구체화해 줄 능력 있는 실력자 집단이 필요했다. 통치 사상의 기반을 다질 사상가, 전쟁 경험이 풍부한 전략가, 전략을 실행할 장수등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제후들에게는 여러방면에 능력을 가진 인재들이 모여들었고, 각기 능력에 따라 활약했다. 개나 닭 울음소리를 흉내 내는 재주로 맹상군의 목숨을 구한 계명구도(鷄鳴狗盜)고사의 주인공이나, 3년이 넘게 방 한구석에서 밥이나 축내다가 자천이라는 형식을 통해 재능을 과시한 모수도 이들 중 하나이다.

계명구도(鷄鳴狗盜) : 비굴하게 남을 속이는 하찮은 재주 또는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을 이르는 말

()나라의 맹상군(孟嘗君)은 갖가지 재주 있는 식객(食客)이 많았다. 어느 날 진()나라 소왕(昭王)의 부름을 받아 호백구(狐白裘)를 선물했다. 소왕(昭王)은 맹상군(孟嘗君)을 임명(任命)하려 했지만 많은 신하(臣下)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한편 맹상군(孟嘗君)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음모(陰謀)를 알아차리고 소왕(昭王)의 애첩 총희(寵嬉)를 달래 나가게 해달라고 부탁하니 호백구(狐白裘)를 요구했다. 개 흉내로 도둑질에 능한 사람이 신이 능히 호백구(狐白裘)를 얻어 오겠습니다.하고 밤에 개 흉내를 내어 진()나라 궁의 창고(倉庫)로 들어가서, 바쳤던 호백구(狐白裘)를 취해서 그녀에게 주니 그녀의 간청(懇請)으로 석방되었다. 그 곳을 빠져 나와 밤중에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니 닭이 울어야 객을 내보낸다는 관법으로 객 중에 닭 울음소리를 잘 내는 자가 꼬끼오하니 모든 닭이 따라 울어 관문이 열렸고 무사히 통과하여 제()나라로 올 수 있었다. 나중에 소왕(昭王)은 맹상군(孟嘗君)의 귀국을 허락한 것을 뉘우치고 병사들로 하여금 뒤쫓게 했으나, 이미 관문을 통과한 뒤였다.

 

毛遂自薦(모수자천)

진나라 장군 백기는 장평에서 조나라군을 대패시킨 다음 승승장구로 진군하여 조나라 도성인 한단(邯鄲)을 포위했다. 상황이 위급해지자 조나라 왕은 평원군 조승(趙勝)을 초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해 구원병을 청해오게 했다. 평원군은 조나라의 승상이자 초나라 왕의 숙부였다. 명을 받은 평원군은 문무를 겸비한 문객 20명을 데리고 초나라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수천 문객 중에서 아무리 골라봤자 19명밖에 골라내지 못했다. 그래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문객 중에서 모수(毛遂)라는 사람이 찾아와, 자신이 가면 소임을 잘 완수할 수 있다며 스스로를 천거했다. 평원군은 모수를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물었다.

여기 온 지 몇 년이나 되오?”

“3년이 됩니다.”

 

그에게서 특별한 인상을 받은 적이 없는 평원군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재능 있는 사람은 주머니 속의 송곳과 같아서 그 뾰족한 끝이 보이는 법이오. 그런데 3년이나 되었는데도 사람들이 당신을 칭찬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니 내 생각엔 그냥 집에 남아 있는 것이 좋겠소.”

 

그러자 모수는 침착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오늘에야 처음으로 주머니 속에 넣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만약 일찍 주머니 속에 넣어주셨다면 송곳 끝이 아니라 송곳 전부가 보였을 것입니다.” 평원군은 모수의 재삼 간청에 마지못해 허락했다.

모수와 다른 문객들을 데리고 초나라에 이른 평원군은 초나라 왕에게, 연합해서 진나라에 저항하면 무엇이 좋은지 그렇지 않으면 어떤 악과가 생기는지를 반복적으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초나라 왕은 출병을 꺼리며 동의하지 않았다. 이렇게 담판이 어렵게 되자 모수는 회담 장소로 올라가 큰소리로 말했다. “합종을 하는가 안 하는가는 몇 마디면 결정날 일인데 이게 뭡니까? 아침부터 지금까지 결정을 못 짓고 입씨름만 하고 있으니 이래서 무슨 일을 해내겠습니까?”

이처럼 버릇없는 말을 들은 초나라 왕은 언짢아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평원군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오?”

저의 집 문객으로 있는 모수입니다.”

초나라 왕은 모수가 일개 문객이란 말을 듣고 큰소리로 꾸짖었다. “이런 무엄한 사람이 있나. 네 상관과 담판을 하는데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 않는가. 어서 썩 물러가지 못할까!”

그러자 모수는 허리에 찼던 보검을 손에 쥐고 초나라 왕에게 다가서며 엄하게 말했다. “왜 저를 꾸짖으십니까? 초나라군이 많다고 우리를 얕잡아 보시는 겁니까? 대왕님과 저는 지금 불과 열 걸음도 안 되는 거리에 있습니다. 지금 대왕님의 목숨은 저에게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군대가 많다고 해도 지금은 소용이 없습니다. 탕왕(湯王)70리 땅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임금이 되었고 문왕(文王)1백 리 땅으로 제후들을 복종시켰습니다. 그들이 천하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강한 병력이 아니라 덕이 있어서 제후들 사이에서 위신이 높고, 유리한 형세를 이용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초나라는 사방이 5천 리가 넘고 1백만 대군을 갖고 있습니다. 그 어떤 나라와도 비견할 수 없는 강한 실력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몇만밖에 안 되는 진나라 백기에게 패해 대왕님의 선조들 능묘까지 불타버렸습니다. 이는 몇백 년이 지나도 잊지 못할 국치(國恥)이며 나라의 원한입니다. 곁에 있는 우리 조나라 사람들도 보고 격분해 치를 떠는데 대왕님께서는 한 점의 부끄럼도 없으니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두 나라가 연합해 진나라를 막는 일이 어디 조나라만을 위하는 일입니까? 사실 조나라보다 초나라를 더 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저를 꾸짖으시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모수의 말에 초나라 왕은 끝내 수긍을 했다. 그리하여 초나라 왕은 초나라를 대표하고 평원군은 조나라를 대표해, 두 나라가 연합해서 진나라에 대항하는 맹약을 궁에서 맺게 되었다. 초나라는 맹약대로 조나라 도성 한단을 구원하기 위해 급히 군대를 출동시켰다.

 

12. 공자나 맹자가 지나친 이상주의를 설파하여 제후들의 외면을 받고 끝내 세상의 벼슬 한자리를 얻는데 실패했다면, 이들과 달리 세 치 혀 하나만으로 출세하여 천하를 제 손안에 굴리고 쥐락펴락한 세객도 있다. 설득의 귀재였던 책략가 소진은 육국을 동맹하여 진나라의 동방 진출을 막자는 합종책을 제안하여 15년간 육국의 재상을 역임했다.

 

12. 또한 진나라 장의는 육국의 동맹을 허물고 개별적으로 진나라와 횡적인 동맹을 구축하는 연횡책으로 대응하여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데 결정적인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공자와 맹자가 될 것인가? 소진과 장의가 될 것인가? 나라면 공자와 맹자와 같이 후대에 성인반열에 오

르는 것보다는 내가 살아 있는 순간에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대로 할수 있는 소진과 장의가 될 것이다.

 

12. 예나 지금이나 전쟁만큼 큰 죄악은 없다. 그러나 춘추 전국 시대에는 전쟁이 필요악이었다. 전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는 그 누구도 먼저 평화를 주창할 수 없었다. 모두들 강한 군대를 양성해 부국강병을 꾀하는데 골몰했다.

원시시대부터 전쟁이 없었던 적이 있었나. 나는 앞으로도 크고 작은 전쟁은 계속되리라 본다. 인간 본성은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리고 오히려 버튼 전쟁으로 죄책감은 더 없을 것이다. 컴퓨터 앞에서 버튼만 누르면 무기가 발사돼 많은 사상자를 낸다. 그 참상을 직접보지 않아도 됨으로 인해 그냥 일이 되어 버리지 않을까.

 

12. 모두들 강한 군대를 양성해 부국강병을 꾀하는 데 골몰했다. 법가인 상군은 진나라의 효공을 도와 변법을 성공적으로 단행하고 부국강병을 주창하면서, 전쟁을 통해서 전쟁을 없애는 이전거전以戰去戰의 이론을 제시했다. 이에 맞서 초나라와 위나라는 현장을 중시한 용병가 오기를 등용했고, 제나라는 사마양저와 손빈 등을 등용하여 세력확장을 모색했다.

혼돈의 시대였지만, 많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신분과 상관없이 자기의 뜻을 펼칠수 있는 황금기였을 것이다.

 

13. 이들과 반대편에 선 자들도 있었다. 왕도 정치를 주장한 맹자를 비롯하여 유가로 대변되는 공자의 제자들은 전쟁을 중단하고 성현의 말씀에 귀 기울이자는 주장을 폈다. 묵자는 전쟁 대비용 성을 구축하여 전비를 절감하자고 외친 평화주의자였다. 한술 더 떠서 도가 일파는 전쟁을 반대하고 무위자연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기에는 시대가 각박했고 혼돈에 차 있었다. 전쟁과 평화라는 서로 상반된 주장을 펴는 두 진영이 말이나 글을 통해 다투는 흥미진진한 광경도 이 책에서 엿볼 수 있다.

 

13. <사기열전>은 이와 같은 격동과 파란의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 간 온갖 인물 군상의 결정체이다. 예를 들면 <자객열전>은 차라리 목을 내놓을지언정 지조는 꺾을 수 없는 충신과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홀로 적지에 뛰어들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나이들의 세계를 보여준다. <회음 후 열전>은 남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간 굴욕을 딛고 일어나 초왕의 자리까지 올랐다가 결국 유방에 의해 제거된 희대의 풍운아 한신의 이야기다.

그 온갖 인물의 군상들은 오늘날의 인간 군상과 다를게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기는 오늘날에도 읽히는 는 것이다.

 

14. <화식 열전>은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가며 큰 돈을 버는 방법을 언급하고 있는데, 현대판 경영학 원론으로 삼아도 좋을만큼 놀라운 탁견으로 가득하다. 먼저 입고 먹는 것이 다스림의 근원이라는 관점 아래 물건과 돈은 흐르는 물처럼 유통시켜야 한다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원칙을 설파한다. 덧붙여 시세 변동에 따라 새처럼 민첩하게 사고팔라는 구체적인 지침까지 제시하고 있다. 제물을 축적하는 데에는 상업이 최상의 방법이며, 돈을 벌 수 있다면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그들의 주장은 정통 유가의 가르침과 상당 부분 배치되는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과거에는 돈을 많이 벌어도 쓸데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기껏 먹는 것, 보석을 사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오늘날이면 다르겠지만

 

14. <편작, 창공 열전>은 한의학의 역사와 임상 과정을 자세히 기록한 한의학의 필독 명편이다. 이 편에서는 의사가 갖추어야 할 자세, 병 고칠 시기, 고칠 수 없는 여섯가지 질병, 병에 따라 처방이 달라지는 이유 등을 정연하게 서술하고 있다. 편작의 명언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것이 아니라 살수 있는 사람을 살려낼 뿐이다.”라든지 질병은 징후가 나타날 대 고쳐야 한다.”혹은 사람들은 다병을 걱정하고, 의사는 의술이 적음을 걱정한다.”등은 오늘의 의학도들에게도 소중한 교훈일 것이다.

 

14. <조선 열전>을 읽어보면 고대사에서 우리나라와 중국의 관계를 짐작하게 하는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일자열전><귀책 열전>은 고대 중국 점술의 실상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일자열전>에는 점치는 자에 관한 내용이 있고, <귀책 열전>에는 복서의 역사와 효험, 시초와 명귀의 조건, 점을 금하는 날, 점을 치는 원칙, 징조를 보고 판단하는 법 등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사마상여열전>은 한부 연구의 소중한 자료이며, 사마천이 문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15. 나는 기본적으로 번역은 원전의 뜻을 자구 하나하나 따져 가며 번역하고 안 다음 그에 수반되는 전고(典故)나 논의의 근거를 찾아 다시 그것을 원전의 문맥에서 구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각주는 독자가 원전을 읽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것은 물론, 원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관심을 갖는 데 장애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본다. 각주가 사족이 되지 않으려면 그 활용이 적절해야 하므로 원전의 단어 하나 자구 하나를 우리말로 표현하는 데 온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그의 열정과 노력이 느껴진다.

 

16. 최근 중국에서 200명의 학자가 힘을 모아 번역 출간한 <이십사전역> 가운데 <사기> 2권은 해제에서 사마천이 마르크스의 유물론 사상의 실천자임을 전제로 하고 번역에 임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번역에 이념성이 개입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감히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제목은 달라져야지. <사기>가 아니라 <사기와 마르크스>, <사마천의 마르크스 주의>로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해제

 

17. <사기>는 상고시대부터 사마천이 살던 한 무제 때까지의 중국역사를 다룬다. 여기에는 중국인들이 사이(四夷)라고 불렀던 주변 이민족의 역사가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은 중국 역사의 전범(典範)으로 일컬어지며, 중국뿐 아니라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역사서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사마천은 중국역사를 기록하기에는 벅찼을 것인데 이민족의 역사까지 포함했을까? 중국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가. 그의 능력과 사물을 보는 깊은 통찰이 느껴진다.

 

17. <사기>는 본기 12, 10, 8, 세가 30, 열전 70편 등 총 130, 526500자로 이루어져 있다.

사마천이 얼마나 치밀하고 세심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냥 무작위로 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역사를 써야 할지를 아는 사람이다. 덕분에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17. 본기는 고대 전설상의 오제부터 한나라 무제에 이르기까지 천하에 권력을 행사하던 왕조나 군주들의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대체로 왕조를 기준하여 하여 시대순으로 12편을 배열했다.

 

17. 표는 <사기>가 다루고 있는 시공간을 재구성하여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으로 세표, 연표, 월표로 이루어져 있다.

 

18. 서는 사회 제도에 주목하여 이상과 현실, 변혁과 민생 문제 등을 보여주는 전문적 논술이다. 즉 정치, 사회, 문화, 과학 등과 같은 전장을 기록하고 있어 문화사나 제도사의 성격을 갖는다.

 

18. 세가는 제왕보다 낮은 위치인 봉건 제후들의 나라별 역사를 다루고 있다. 제후들 외에 황제의 친척과 공훈을 세운 신하 등이 포함되어 있다. 무관의 제왕인 공자와 왕을 칭한 지 여섯 달 만에 망한 진섭이 포함되어있는 점이 이채롭다.

저자 표현대로 무관의 제왕이라 넣은 것이 아닐까. 진섭은 그 유명한 왕후장상이 씨가 있느냐?”말을 남겼다. 농민으로 태어나 오광과 함께 진승오광의 난을 일으켜 왕이 된자이다. 한나라의 유방이 진승에게 은왕(隱王)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사마천은 어쩌면 난을 일으킨 자의 최후를 알리기 위해 썼을수도 있고 누구나 큰 뜻을 품을 수도 있다는 양극의 뜻을 보여주려고 한 것일까.

 

18. 열전은 주로 제왕과 제후를 위해 일한 인물들의 전기를 수록하고 있으며, 때로 계급을 초월하여 기상천외의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기도 하다. 각양 각층의 인물들의 삶이나 그들과 관련된 사건들을 서술하고 평가하여 사마천의 역사의식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19. <사기>의 이런 분류방법은 일반적으로 천지자연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본기 12편은..... 역법으로 볼 때 12간지와 관련된다. 10편은 ..... 10간과 관련된다. 8편은 ..... 사방, 팔방 등 방위개념과 관련이 있다. 세가 30편에서는 사마천의 독창성이 엿보이는데 이 가운데 열전에 넣어도 그다지 무리가 없는 <공자세가><진섭세가>를 뺀다면 28편으로 28수와 일치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열전 70편은 맨 마지막의 <태사공 자서><태사공 열전>으로 볼 수 있으니, 열전에 들어갈수 도 있는 <공자 세가><진섭세가>를 합치면 72편의 열전이 되어 천지와 음양의 성수관념에서 생각하면 역법에 기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사마천이 천문에 정통한 가계의 후손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고대 중국인의 우주관과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이십팔수(二十八宿)는 고대로부터 동아시아에서 사용되어 온 황도와 천구의 적도 주변에 있는 28개의 별자리

 

20. <사기> 이전의 중국 역사서는 매년 매달 매일의 역사적 사건을 연대순으로 기록하는 방식을 취했으니, <춘추><서경>등 거의 모든 역사서가 유사한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다만 <춘추> 다음에 씌어진 <국어><전국책>은 순수한 연대기에서 벗어나 국가별 서술 원칙에 의하고 있는데, 역시 연대기적 배열이라는 큰 틀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래서 한 사건이 분절되고 시간적 비약이 생겨나 읽으면서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20. 동양 역사서의 세 가지 편찬 체제인 편년체, 기사본말체, 기전체 가운데 기전체의 효시가 <사기>이다. 기전체는 본기와 열전을 중심으로 구성되는데, 먼저 제왕의 언행과 행적을 중심으로 당시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외교 등 중대한 사건을 시대 순으로 서술하고, 제왕이나 제후를 보좌한 개인들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구성 방식을 취하고 있다.

* 편년체 : 사서의 편집방법에 따른 분류법 가운데 하나. 기전체와 대비된다. 실질적으로 연대기와 의미가 같다. 편년체는 연도에 따라서 각 연//일에 일어난 사건과 그 전말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서 오래된 사건에서 새로운 사건 순서대로 계속해서 늘어놓아 기록하는 방법이다. 대표적인 편년체 역사서로 자치통감이 있고, 고려사절요도 편년체 사서이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조선왕조실록도 기본적으로는 편년체를 썼는데, 세종실록처럼 임금의 재위 기간이 길고 사료가 너무 방대해서 편년체로는 도저히 다 수용할 수 없을 경우에는 다른 방식을 조금씩 혼합하긴 했다.

 

* 기사본말체 : 역사책의 편찬 방법 하나. 편년체가 시간 순의 사건을 묘사하는 연대기 중심, 기전체가 인물을 중심으로 묘사하고 있다면 기사본말체는 '사건'을 중심으로 묘사한다.

 

기사본말체가 나타나는 것은 기전체와 편년체의 맹점 때문이다. 어떤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역사를 파악하려고 할 때, 기전체는 그 사건에 관계된 인물의 전기를 모두 찾아보아야하고, 편년체는 해당 시기를 중심으로 앞뒤를 뒤져서 관련된 기사를 모두 찾아보아야 한다. 그런데 그 사건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 애초에 그 사건과 관계된 인물은 어떻게 찾아볼 것이며, 그 사건이 언제 일어나서 언제 완전히 끝나는지는 어떻게 또 알 수 있는가. 또한 기사가 중복되거나 흩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사건을 중심으로 편찬한 기사본말체가 유용하게 여겨진 것이다. 따라서 대상 사건을 체계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 역사서를 쓰는 것이 쉽지는 않구나. 선조들의 고민이 많았겠구나. 아무튼 기록으로 남긴 덕분에 우리는 그 현장에 있진 않지만 생생한 이야기들을 상상할 수 있다.

 

20. 사마천은 사료 해석에 충실하면서도, 역사의 발전적 흐름과 사물의 본질을 통찰하는 날카로운 안목을 보여 주었기에, 이 책이 오늘날까지도 지혜로운 삶의 지침서로서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것이다.

 

20. <사기>라는 명칭은 사마천이 스스로 붙인 것은 아니다. 사마천이 세상을 떠난 뒤 이 책은 태사공서또는 태사공기로 불렸는데, ‘태사공기의 약칭이 바로 사기.

 

21. <사기>는 세상에 나오고도 오랫동안 왕실과 역사가들에게 소외된 채 몇 세기를 보내야 했다. 더욱이 한 무제는 사마천이 <사기>에서 자신의 아버지인 경제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 신랄하게 비판한 것을 두고 매우 노여워하며 두 인물을 다른 <효경본기><효무본기>를 폐기하도록 했다고 했을 정도니 말이다. 무제의 영토 확장 정책에 대한 사마천의 신랄한 비판은 <봉선서>, <평준서>등을 비롯하여 열전 곳곳에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역사서는 항상 승자의 입장에서 쓰여지는 것이 보통이고 왕의 치부를 드러내고 쓰기는 더욱 어렵다. 그런데 자신에게 궁형을 내린 무제에 대해 그렇게 신랄하게 비판하고 그의 치부를 적는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사기>가 오늘날까지 사랑받고 있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21. 게다가 <사기>가 그보다 90년 뒤에 나온 반고의 <한서>와 달리, 도가와 병가, 잡가 등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여 한나라의 국가 이념인 유학에 배치된다는 점도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 배척되는 요인이 되었다. 예컨대 사마천은 <자객열전>, <골계열전>, <일자 열전>, <귀책 열전>에서 93교 등 당시 사회의 세세한 부분까지 담아내려고 애썼다.

유가(儒家)도가(道家)음양가(陰陽家)법가(法家)묵가(墨家)종횡가(縱橫家)잡가(雜家)농가(農家) 9종으로 대별한다. 이것이 9(九流). 3교는 무엇일까? 유교, 불교, 도교?인가. 이 물음은 책을 읽으면서 찾아보고자 한다.

 

21. 반고는 <한서>에서 <동방삭전>을 제외하면 유가 이외에는 모두 비정통파나 하류 문화로 취급하여 언급조차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22. 그러나 <사기>가 소외의 시간만 보낸 것은 아니었다. 도가적 분위기가 강한 당대부터 관리 임용 과목에 들어가면서 점차 주목받기 시작했다.

 

22. 구양수는 <사기> 애호가로서 즐겨 읽으면서 글을 지을 때 이용하기도 했다.

한시미학산책에서 봤던 그 구양수

 

22. 중국 근대화의 공헌자 양계초는 사마천을 역사계의 조물주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23. 프랑스의 중국학자 샤반도 이 책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1895년부터 1905년 사이에 <사기>의 앞부분 47편을 번역하고 해제를 붙여 서구인들에게 소개했다. 근대 중국의 위대한 문학가 노신은 역사가의 빼어난 노래요, 운율이 없는 <이소>”라고 극찬했다.

 

23. 물론 사마천의 기술 방식이나 자료 선정 방법 등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2,000년 전이라는 시간적 의미로 볼 때, 정말 이 정도로 완벽한 체제를 갖춘 역사서가 어떻게 가능했는가 하는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오게 된다.

완벽성을 떠나 나는 역사책을 쓰겠다는 그 생각과 발상이 대단하다. 물론 아버지의 소원이라고 하지만 어디 그게 그것만으로 할수 있는 일이겠는가.

 

23. 개인적으로 기록한 역사 <사기>가 후대에 24()의 필두로 거론되게 된 것은 중국 전설 시대부터 춘추 전국 시대를 거쳐 한 무제까지 이르는 유일한 통사이기 때문이라는 점이 일차적인 이유이다. 또 기전체라는 형식에 바탕을 둔 역사 서술의 정확도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절대 군주 위주로 재편되는 과정에 있던 엄혹한 현실과 인간에 대한 성찰, 즉 사마천의 역사를 보는 태도가 다른 역사서와 아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더하여 <사기>가 뛰어난 문장력으로 문학서로서의 색채를 유발하고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사성(史聖) 사마천은 누구인가?

 

24. 아버지 사마담은 한 무제 때 태사령에 임명되었고 도가를 충실히 받들었다.

 

24. 스무 살 때 여행을 시작하여 중국 전역을 두루 돌아다녔으며 돌아온 후에는 낭중에 올랐고 또다시 무제를 따라 순행하면서 거의 온 나라를 주유하였다. 어디를 가든지 고적을 탐방하고 자료를 수집하였다.

여행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사람들에게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은 분명하다.

 

24. 사마천은 태사령이 되어 무제를 시종하면서 천제에서 제사 드리는 봉선에 참여하기도 하고 역법을 개정하기도 하였다.

현재에도 중국에서는 이 봉선의식을 한다고 한다. 죽기전에 한번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

 

25. 그런데 사마천은 생각지 못한 시련을 맞게 된다. 천한 2년 전한의 명장 이광의 손자 이릉이 군대를 이끌고 흉노와 싸우다가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 사마천은 이릉이 어쩔 수 없이 투항했다고 여겼고 홀로 무제 앞에 나아가 적극적으로 변호했다.

 

25. 1년 후 그에게 세 가지 형벌 중 하나를 고를 권리가 주어졌다. 첫째 법에 따라 주살될 것, 둘째 돈 50만전을 내고 죽음을 면할 것, 셋째 궁형을 감수할 것이 그것이었다. 사마천은 두 번째 방법을 취하고 싶었으나 중인에 불과했던 그가 그런 거액을 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결국 마지막 것을 선택하게 되었다. 목숨만이라도 부지하여 부친의 유지를 받들기로 한 것이다.

사마천의 머리정도면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 냈을 것인데 그게 아직 의문이다. 그가 발한대로

 

25. 그로부터 5년 후 사마천은 다시 직책을 맡아 무제의 곁에 있게 되었다. 이때는 <사기>의 집필이 대체적으로 마무리되는 시점이었다. 아버지의 유언을 받든 지 대략 20년 만이었다. 집필을 완성하고 몇 년 후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자신에게 궁형을 내린 한 무제를 다시 모신다는 것. 그에게도 쉬운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참아내며 자기의 목표를 달성한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사마천이 <사기>를 쓴 목적은 무엇인가?

 

26. 첫째, 발분 의식의 소산이다. 사마천이 궁형을 당한 것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구차한 행위가 아니라 글을 지어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26. 또한 치욕을 견디고 세인들에게 이름을 떨친 관중이나 오자서, 경포 등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그들의 전기를 따로 마련한 것도 마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26. 둘째, 역사적 사실의 포폄과 직서이다. ...... 공자가 <춘추>를 서술한 방식에 바탕을 두고 후세 사람들에게 하나의 도덕적 규범을 제시하여 미언대의微言大儀 작은 말 속에 큰 의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 포폄 : 옳고 그름이나 선하고 악함을 판단하여 결정함

 

27. <춘추>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사마천의 생각은 부친 사마담의 견해와 일치되는 것이며, 공자가 세상을 떠난 지 500년이 지난 당시에 공자의 사상을 누군가 계승해야 한다는 당위에서 비롯되었다.

 

27. 사마천이 태사령이라는 자기 직분을 충실히하면서 순수하게 개인의 자격으로 저술에 임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태사령이란 본래 궁중의 예의 제도를 관장하고, 천문 역법에 따라 해가 끝나면 새 역법을 바치며, 나라에 큰 행사가 있으면 길일과 기일을 가려 올리는 직책이다.

 

27. 그렇지만 사마천은 태사령으로 있으면서 궁궐에 소장된 모든 자료를 쉽게 접할 수 있엇고, 또 마음이 먹으면 자료 수집을 위하여 유적을 답사할 수 있었으며,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을 취재할 기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27. 사마천은 아버지와 함께 무제 곁에서 절대 권력자의 영토 확정 야욕과 그로 인해 야기되는 수많은 현실적인 문제점들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또한 무제를 수행하면 각종 성대한 의전 장면이나 열병의식 및 수렵 활동 등을 당시의 시대정신을 터득하기도 했다.

 

<사기열전>은 어떻게 서술되었는가?

 

28. 또한 유림, 혹리, 자객, 유협, 골계 등 유사한 직업군을 한데 묶어 차례로 배치함으로써 인물을 체계적으로 분류했다.

 

28. 이렇듯 사마천은 열전에서 인물에 대해 나열식으로 정보를 제공하기보다 그 인물을 제대로 보여 줄 수 있는 특징을 제시하는 데 주력했다. <중니 제자 열전>처럼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들은 후반부에 이름만 나열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했다.

 

29. 사마천은 자신이 입수한 문헌 가운데에서 될 수 있는대로 도덕적 기여도가 높은 인물들을 먼저 고르고 거기에 평가를 더했다. 독자로 하여금 선을 행하는 자는 복을 받고, 그렇지 않은 자는 화를 입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도록 하려는 것이다.

 

29. 사마천은 인물들의 개별적인 유형에 입각해서 자신을 포함하여 당대를 움직인 인물들을 재구성하고, 그런 근거를 그 이전의 경서와 제자서뿐 아니라 민간의 구전에서도 취하는 유연성을 보여 주었다.

 

30. 상고 문헌은 전적으로 경전에 기댔고, 당대 자료는 대체로 문헌검증과 현지답사 등을 통한 체험에서 나왔다. <사기열전> 32 <회음후 열전>의 경우를 보면, 사마천은 이 열전을 쓰기 위해 한신의 고향을 방문했고, 마을 사람들이 제공한 소재를 토대로 한신을 새로운 각도에서 그렸다.

치밀한 현장검증까지 한 셈이다.

 

<사기 열전>에 기록된 시대의 인물들은 누구인가?

 

30. <사기열전>의 독특한 인물의 선택, 서술 방식은 역사는 결코 지배자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30. <백이열전>은 지조와 소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 안 열전>에는 진정한 우정을 다룬 관포지교 고사가 담겨 있고, 창고가 차야 예절을 안다는 관중의 정치관도 배어 있다..... 전국 시대에 활약한 병법가들을 다룬 <사마 양저 열전>, <손자, 오기열전>, <오자서 열전>등도 있다.

 

31. <상군 열전>에서는 법과 원칙의 소유자 상군, 즉 상앙에게서 냉철한 개혁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소진 열전><장의열전>은 합종과 연횡이라는 전략으로 천하를 빼앗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 사이의 처절한 두뇌싸움을 보여 주는 명편이다. 두사람은 같은 문하에서 배웠지만 나중에 정치적 라이벌 관계가 된다.

 

33. 일반 역사서와 달리 <사기열전>에는 주관적 서술이 적잖이 드러나 있는데, 그럼에도 사마천 자신의 사료 비판 능력과 어우러져 탄탄한 역사 서술 체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사마천의 혼이 담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사기열전>의 서술 방식에는 냉정한 이성과 처절한 열정을 갖고 살아간 시대적 거장들의 숨결이 행간마다 녹아 있다.

 

34. <사기열전>이 폭넓은 독자층을 끌어들이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사기열전>은 궁형을 당한 사마천의 세계관과 인생관 위에 개인적인 비극을 역사의식으로 승화시켜, 시대를 살다 간 인물을 조망해나갔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무관의 제왕 공자와 시대에의 저항을 택한 백이와 숙제를 등장시키면서 자신의 논지를 펼쳐 나간다.

글을 쓰기 위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결핍, 분노, 집착 등 그런 감정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34. 격동의 시대를 약 120여 명이라는 비운의 인물을 통해 그려 냈으니 결국 사마천에게는 비극이야 말로 아닌게 아니라 시대의 표징이었던 셈이다.

 

34. 재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여 일생을 고민한 비극적인 인물들도 있다. 굴원, 조조, 위 공자 등이 그들이다. 굴원은 직언을 거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자살했고, 어질고 능력이 있는 위 공자 무기는 폭음으로 죽었다. 조조는 종묘의 담을 뜯어 문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저작서리에서 죽었다.

 

35. <사기 열전>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라는 물음에 대해 다양한 해답을 제시한다. 사마천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리고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겪는 고충을 거의 모든 인물이 똑같이 겪었음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말해 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시대에 맞선 자, 시대를 거스른자, 그리고 시대를 비껴간 자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는 교훈 역시 적지 않다.

나는 시대에 대해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생각해본다. 나는 아마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는 이중적인 사람이라는 걸 부정은 못하겠다.

 

35. 이러한 열전을 구성하는 데 있어 사마천은 인간 사회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대립과 갈등, 배반과 충정, 이익과 손실, 물질과 정신, 도덕과 본능, 탐욕과 베풂 등 양자 택일의 기로에 선 인간을 제시하고, 그런 갈등 자체가 인간이 사는 모습임을 강조한다. <사기열전>을 생명력이 꿈틀거리는 산 역사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본위의 역사를 서술해 낸 작가의 각고의 노력 덕분이다. 사마천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간 인물들을 현재에 생동하는 것처럼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에게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1편 백이열전

 

67. 사마천은 백이와 숙제가 굶어 죽은데 대한 공자의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들이 세상에 대한 원망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공자의 칭찬에 덕이었음을 언급하면서 70열전의 인물이 자신의 붓끝을 빌려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됨을 암시하고 있다.

 

67. ‘백이 열전이지만 백이에 대한 기록은 겨우 215자에 그칠 뿐이고 나머지 4분의 3은 저자 자신의 논설이다. 그의 관점은 이렇게 요약된다. 사마천은 천도(天道)에 대한 의문을 표시하면서 인간사의 불공정한 여러 형태에 대해 회의를 품는다. 천도의 기본은 권선징악이지만 사회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적지 않아 착한 사람이 재앙을 입고 나쁜 사람이 복을 누리는게 세상의 이치라는 것이다.

 

67. 이 두 사람이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죽은 것으로 볼 때 원망으로 가득 차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굶어죽는다는 것에 난 칭송보다는 반감이 생긴다. 오히려 잘먹고 잘살면서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하지 안을까.

 

68. 수양산에서 굷어 죽은 백이와 숙제의 행적을 기록하려 했다기보다는 도도히 흐르는 역사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에 궁형을 당한 자신을 빗대어 쓴 것이다. 특히 하늘의 도에 대해 옳고 그름의 의문을 던지면서 세상 이치의 냉엄함에도 주목하고 있다.

 

왜 유가 경전에는 허유와 무광 등의 사적이 없을까?

 

72. 공자는 옛 인자, 성인, 현인들을 차례로 언급하면서 오태백, 백이 같은 무리들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나는 허유와 무광이 절개와 의리가 지극히 고결하다고 들었다. 그러나 <><>의 문장에는 그들에 관한 대략적인 기록조차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백이와 숙제는 정말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을까?

 

74.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도 치르지 않고 바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효라고 할 수 있습니까? 신하 신분으로 군주를 죽이는 것을 인이라 할 수 있습니까?

나는 이런 류의 사람들을 썩 좋아하진 않는다. 문제가 보이면 도려내야 되는 것이 맞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마냥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한번 타락에 빠진 왕은 돌아오지 못한다. 누구도 그에게 말을 못하기 때문이다. 사마천도 가만히 있으면 될 것을 괜히 말하였다가 큰 봉변만 당했다.

 

74.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건만 그 잘못을 모르는구나.

 

75. 이 가사로 본다면 원망한 것인가? [원망하지] 않은 것인가.

나는 개인적으로 원망한 가사로 보인다.

 

착한 이가 곤경에 빠지는 것이 하늘의 도인가?

 

76.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답으로 베풀어 준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 잔인한 짓을 하며 무리를 모아 제멋대로 천하를 돌아다녔지만 끝내 하늘에서 내려 준 자신의 수명을 다 누리고 죽었다. 이는 어떠한 덕을 따르는 것인가? 이러한 것들은 그러한 사례 중에서도 가장 두드려진다.

 

76. 그런가 하면 걸음 한 번 내딛는 데도 땅을 가려서 딛고, 말을 할 때도 알맞은 때를 기다려 하며, 길을 갈 때는 작은 길로 가지 않고, 공평하고 바른 일이 아니면 떨쳐 일어나서 하지 않는데도 재앙을 만나는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나는 매우 당혹스럽다. 만일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라면 옳은가? 그른가?

사마천의 물음이 곧 내 물음이었다. 오늘날도 똑같다. 돈없고 착하게 사는 사람은 아파서 힘들고 불행한 일들도 더 많이 일어난다. 그렇지 않은 악독한 사람들은 오히려 떵떵거리며 더 잘산다. 누구는 이것이 다 시험이라 했다. 왜 그 시험조차 동일하지 않은 것인가 하고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결론은.....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야 1000리 길을 갈 수 있다.

 

77. 공자가 말한 길이 같지 않으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또한 저마다 자기의 뜻을 좇는다는 말이다.

길이 같지 않아도 자신을 위해 도모해야 살아남는 세상이다. 공자의 말은 이해는 되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78. “구름은 용을 따라 생기고 바람은 범을 따라 일어난다. 성인이 나타나야 만물도 다 뚜렷해진다.”

주공이 세상을 떠난 지 500년이 되어 공자가 나타났고, 공자가 세상을 떠난 지 500년만에 사마천 자신이 나타났으니, <사기>를 지어 성인의 뜻을 이어받겠다는 의지의 표출

 

78. 백이와 숙제가 어질기는 했지만 공자의 칭찬이 있고 나서부터 그 명성이 더욱더 드러나게 되었다. 안연이 학문을 돈독히 했지만 천리마의 꼬리에 붙었기에 행적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바위나 동굴 속에 [숨어사는]선비들은 때를 보아 나아가고 물러나지만 훌륭한 명성이 묻혀 거론되지 않는 것이 슬프구나! 시골에 묻혀 사는 사람 중에 덕행을 닦아 명성을 세우고자 하는 사람이라도 지고한 선비를 만나지 못한다면 어떻게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그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노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데 죽었을 때 자신을 남길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것일 것이다. 나의 이름으로 된 책이 한권이라도 남아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욕심을 가져보자. 백이와 숙제와 같은 삶을 살수도 없고 그를 치켜세웠던 공자도 내게는 없다. ! 그러고 보니 동기생들이 있네. 그들 중 한명은 우리 8명에 대해 그들의 책 속에 한 줄이라도 넣어주면 좋겠다.

 

숙 단상

백이와 숙제의 삶을 인()하다고 할 수 있을까. 공자사상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내게 그들은 어리석게 보인다. 내가 나이가 더 들면 그들이 이해가 되려나. 아직 나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오히려 사마천처럼 이 공평하지 못한 세상에 대한 한스러운 외침이 아닐까.

 

2편 관안 열전

 

79. 환공은 옛 원수인 관중을 재상으로 삼았다. 관중은 40여년 동안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방면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고 환공이 춘추 시대의 첫 번째 패자가 되는 데 크게 기여하여 춘추시대 최고의 군사로 꼽힌다. .... 출신이 보잘것없었던 그가 재능을 펼치고 제나라의 뛰어난 재상이 된 것은 전적으로 포숙의 추천 덕분이다. 따라서 사마천은 사람을 알아보는 포숙의 능력을 부각시키고 있다.

 

79. 안영은 2인자 행동 미학의 귀감을 보여 적절한 자존심을 갖추어 보였으며 결단력과 슬기와 해학이 넘쳤다. 때때로 군주에게 간언을 서슴지 않았던 명재상으로서 내치에도 뛰어났다. 그는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고 하여 30여 년 동안 옷 한 벌로 생활할 만큼 검소했다.

 

80. 이 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제 환공의 포용력으로 인재를 발탁하는 능력과 나라를 위해 기꺼이 현명한 사람을 추천하는 포숙의 대범함에 있다. 또한 안영이 월석보라는 인물을 알아보는 능력을 부각시키면서 주군에 대한 안영의 충성심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83. 관중은 빈곤하여 언제나 포숙을 속였지만 포숙은 끝까지 그를 잘 대해 주고 속인 일을 따지지 않았다.

이런 친구가 있는 관중이 부러울 뿐이다. 그의 복이다. 나는? 글쎄.

 

83. 관중이 등용되고 제나라에서 정치를 맡게 되지 제나라 환공은 천하의 우두머리가 되어 제후들을 아홉 차례나 모아 천하를 바르게 이끌었다. 모두 관중의 지모에 따른 것이었다.

 

83. “주군께서 장차 제나라만 다스리고자 하면 고해와 저 포숙아면 충분할 것입니다만 주군께서 패왕이 되려고 하신다면 장차 관이오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관이오가 그 나라에 머물면 그 나라는 강성해 질 것이니, 놓치면 안 됩니다.”

이 말을 듣고 누가 관중을 등용안하겠는가.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친구를 높이는 누구나 할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요즘과 같은 시대에.

 

84. 포숙이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던 것는 내가 가난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포숙이 나를 어리석다고 하지 않았던 것은 유리할 때와 불리할 때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포숙이 나를 모자란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던 것은 내가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포숙이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던 것은 내가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졌을 때, 소홀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나는 붙잡혀 굴욕스러운 몸이 되었으니 포숙이 나를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던 것은 내가 자그마한 절개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천하에 이름을 날리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자이다.

관포지교(管鮑之交)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네.

 

84. 포숙은 관중을 추천하고 자신은 그의 아랫자리에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관중의 현명함을 칭송하기보다는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포숙을 더 찬미하였다.

깎아내리거나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 보통인데 포숙은 추천하고 물러날 줄 알았다.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안다

 

85. 창고에 물자가 풍부해야 예절을 알며, 먹고 입는 것이 풍족해야 명예와 치욕을 알게 된다.

그 자신이 가난해봤으니 없다는 것이 무엇인줄 안다. 나라역시 마찬가지 아니겠나.

 

86. 제후들이 이 일로 해서 제나라로 귀의하게 되었다. 그래서 주는 것이 곧 얻는 것임을 아는 게 정치의 보배이다.”라는 말이 생겨났다.

 

86. 관중의 재산은 공실의 재산에 버금가고 삼귀와 반점을 갖고 있었으나 제나라 사람들은 사치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공자의 비난을 받은 부분이다. 좀 과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정도는 괜찮지 않나. 오히려 인간적인 미가 느껴진다.

 

군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에게 뜻을 드러낸다

 

87. [안영은] 제나라 재상이 된 뒤에도 밥상에 고기반찬을 두 가지 이상 놓지 못하게 하고 첩에게는 비단옷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

고기반찬을 2개는 올리는 건 괜찮은 것인가. 첩에게 비단옷을 입지 말라기 보다는 첩을 두지 않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88. 제가 듣건대 군자는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자에게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만 자기를 알아주는 자에게는 [자신의 뜻을] 펼친다고 합니다. ..... 저를 알아주면서도 예의를 갖추지 않는다면 진실로 죄인의 몸으로 있는 편이 낫습니다.

 

89. [군주가] ‘잘한 점은 좇아 더 잘하게 하고 그 잘못된 점은 바로잡아 주어야만 군주와 신하가 서로 친해질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관중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89. 패도란 인()과 의()를 가볍게 보고 권모술수와 무력을 숭상하는 것으로서 왕도와 상반되는 뜻이다. 춘추전국시대에 여러 제후국 간에 전쟁이 끊이지 않은 것도 제후들이 대부분 패도를 숭상했기 때문이다.

 

90. ‘의로움을 보고도 실천하지 않은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 ‘조정에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물러나서는 허물을 보충할 것을 생각한다.’ ... 오늘날 안자가 살아 있다면 나는 그를 위해 채찍을 드는 마부가 되어도 좋을만큼 흠모한다.

 

안 단상

친구는 그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 포숙같은 친구 1명만 있다면 그는 성공한 사람이다. 관중의 사치함은 비난하기보다는 능력에 맞게 사는 것이다. 안영의 마음가짐은 깊이 새겨둘만 하다.

 

3편 노자한비 열전

 

91. 한나라 초기를 지배하던 사상은 겉은 도가요 안은 법가였으며 <사기> 집필 당시 왕인 무제도 겉은 유가요 안은 법가였으니, 실상 법가를 숭상한 진()나라의 사상적 맥락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어쩌면 지금 시대도 법가의 시대 아닌가.

 

91. 도가사상은 군주 권력의 전제 정치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저항을 나타낸 것이라고도 한다.

 

91. 노자에 관한 사마천의 관점은 이러하다. 노자는 공자와 동시대인으로 나이가 공자보다 많고 ()’에 밝아 공자에게 가르침을 주었고 공자에 의해 극찬을 받았다는 것이다.

 

91. 사마천은 장자의 우언을 당시 유가와 묵가를 공격하는 탁월한 무기로 본다.

 

91. 사마천은 법가 인물에 대해 비우호적이었음로 오기나 상군 등에 대해서도 각박하다고 하면서 그들의 공적 뒤에 가려진 지나친 성과주의를 비판했다.

그 당시에는 성과주의가 최고일 수밖에 없다. 성과 없이는 나라가 없어질 판인데.

 

91. 법치를 내세운 한비는 전국 시대 한나라 명문 귀족의 후예로서 눌변이지만 논리력을 필요로 하는 글에는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한나라는 전국 칠웅 가운데 가장 작고 약했다. 전란이 계속되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 약소국의 비애와 고통, 모욕과 굴욕, 굶주림 등은 한비에게 가혹한 고통이었다. 그래서 한비는 한나라 왕에게 해결책을 자주 간언했으나 불행히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훌륭한 상인은 물건을 깊숙이 숨겨둔다.

 

95. 그대의 교만과 지나친 욕망, 위선적인 모습과 지나친 야심을 버리시오. 이러한 것들은 그대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소. 내가 그대에게 알려주는 까닭은 이와 같기 때문이오.

공자라는 인간에 대해 알 수 있는 한 대목. <논어>에서도 보았던 내용. 제자가 책을 만들었지만 어쩌면 스승을 욕되게 할 수 있는 부분까지 실었다는 것 자체는 칭송받을 만하다.

 

95. [그러나] 용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지 아는 알 수 업삳. 내가 오늘 만났던 노자는 아마도 용 같은 존재였구나!

 

97. 세상에서 노자의 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유가 학문을 내치고, 유가 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역시 노자를 내쳤다. “길이 다르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아마도 이러한 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이이는 하지 않는 것(無爲)으로써 저절로 교화되게 하고, 맑고 고요하게 있으면서 저절로 올바르게 되도록 했다.

 

관리가 되느니 더러운 시궁창에서 놀리라

 

98. [그는] 책을 지음에 빼어난 문사로 세상일을 살피고 인간의 마음에 어울리는 비유를 들어 유가와 묵가를 예리하게 공격했따. .... 그의 말은 거센 물결처럼 거침이 없이 생각대로 펼쳤으므로 왕공이나 대안들에게 그릇감으로 여겨지지 못했다.

그의 사상도 좋기는 하지만 그 당시는 채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을 것이다.

 

98. 나는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스스로 즐길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들에게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오.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 뜻대로 즐겁게 살고 싶소.

어떻게 보면 그 어려운 시기에 어려움에 처해있는 백성들은 보지 않고 오로지 자기 안위와 행복만을 위해 사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성향의 인물이다.

 

형명지학의 대가 신불해

 

99. 신자의 학문은 황로에 근본을 두고 형명을 내세웠다.

황로 : 노자 철학 중의 평상심을 잃지 않는 허정(虛靜)을 흡수하여 사물이 극단에 이르면 반드시 돌아온다는 사상. 여기서 황로는 황제와 노자를 말함.

형명 : 순명책실, 신상명벌

 

용의 비늘을 건드리지 말라

 

99. 한비는 한나라의 여러 공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형명과 법술의 학술을 좋아했으나 그의 학문은 황로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한비는 말을 더듬어 유세는 잘 못했으나 책을 잘 썼다.

 

100. 한비는 [한나라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 법과 제도를 닦아 바로 세우고 권세를 잡아 신하들을 부리며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병력을 튼튼하게 하며 인재를 찾아 쓰고 어진 사람을 임명하는 일에 힘쓰지 않고, 도리어 실속 없는 소인배를 등용하여 그들을 [전투에서] 공로와 실적이 있는 것보다 윗자리에 앉히는 것을 싫어하였다.

 

100. 한비는 유가는 글로 나라의 법을 혼란스럽게 하고, 협객은 힘으로 나라의 금령을 어긴다고 생각했다. [군주는 나라가] 편안할 때에는 명예를 좇는 사람을 총애하고 위급할 때에는 갑옷 입고 투구 쓴 무사를 등용한다. [그러므로] 지금 이 나라에서 봉록을 주어 등용하는 자는 위급할 때에는 쓸 수 없는 자이고, 위급할 때에 쓰이는 사람은 봉록을 주어 등용한 자가 아니다.

 

101. 한비는 유세의 어려움을 알고 <세난> 편을 매우 자세하게 지었음에도 결국 진나라에서 죽어 자신은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101. 그는 <세난>편에서 말하였다.

대체로 유세의 어려움은 내 지식으로 상대방을 설득시키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고, 내 말솜씨로 뜻을 분명히 밝히기 어렵다는 것도 아니며, 또 내가 감히 해야 할 말을 자유롭게 모두 하기 어렵다는 것도 아니다. 유세의 어려움은 군주라는 상대방의 마음을 잘 파악하여 내 주장을 그 마음에 꼭 들어맞게 하는 데 있다.

 

101. 상대방이 속으로는 큰 이익을 바라면서 겉으로는 높은 이름을 원할 때 높은 이름을 얻는 방법으로 설득한다면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척하겠지만 속으로는 멀리할 것이며, 만약 큰 이익을 얻는 방법으로 설득한다면 속으로는 의견을 받아들이면서도 겉으로는 그를 꺼릴 것이다. 유세자는 이러한 점들을 잘 새겨 두어야 한다.

 

101. 대체로 일이란 은밀히 함으로써 이루어지고 말이 새어 나가면 실패한다..... 또 군주에게 허물이 있을 때 유세자가 주저없이 분명하게 바른말을 하고 교묘한 주장을 내세워 그 잘못을 들추어 내면 그 몸은 위태로워진다.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는 슬픔을 나는 안다. 이건 아닌데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못했다.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102. 말을 꾸미지 않고 간결하게 하면 아는게 없다고 하찮게 여길 것이고, 장황하게 늘어놓으면 말이 많다고 할 것이며, 사실에 근거하여 이치에 맞는 의견을 말하면 소심한 겁쟁이라 말을 다 못한다고 할 것이고, 생각한 바를 거침없이 말하면 버릇업고 오만한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이런 것들이 유세의 어려운 점이니 마음속에 새겨 두어야 한다.

 

102. 유세의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장점을 아름답게 꾸미고 단점을 덮어 버릴 줄 아는 것이다.

 

103. 이렇게 하여 오랜 시일이 지나 군주의 총애가 깊어지면 큰 계책을 올려도 의심 받지 않고 군주와 서로 다투며 말하여도 벌을 받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이론은 거의 따라올 사람이 없는 그였으나 결국 죽임을 당한다. 군주에게 어떻게 보여야 함을 알면서도 허무하게 죽었다. 이론과 실제의 괴리!

 

103. 재상 이윤이 요리사가 되고, 백리해가 포로가 된 것은 모두 군주에게 등용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 두사람은 모두 성인이면서도 이처럼 자기 몸을 수고롭게 하고 천박한 일을 겪은 뒤에 세상에 나왔다. 그러므로 재능 있는 인재라도 이러한 일을 부끄러워할 것이 없다.

 

104. 이웃집 사람과 관기사가 한 말은 모두 옳으나 심한 경우는 목숨을 잃고 가벼운 경우는 의심을 받았다. 이는 안다는 것이 어려운 일 아니라 아는 것을 어떻게 쓰느냐가 어렵다는 뜻이다.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지식을 하나씩 알아가면서도 우리는 불의를 보고 너무 쉽게 지나친다. 정말 뭘 안다는 것은 행동을 해야하는 것인데 머리로만 받아들인다.

 

105. 미자하의 행위는 처음이나 나중이나 다를 바가 없었지만 처음에는 현명하다고 칭찬을 받고 나중에는 죄를 입게 되었다. 그것은 군주가 그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완전히 바꾸었기 때문이다. ..... 따라서 군주에게 간언하고 유세하는 자는 군주가 자기를 사랑하는가 미워하는가를 살펴 본 다음에 유세해야 한다.

 

105. 용이라는 벌레는 잘 길들여 가지고 놀 수도 있고 그 등에 탈 수도 있으나, 그 목덜미 아래에 거꾸로 난 한 자 길이의 바늘이 있어 이것을 건드린 사람은 [용이] 죽인다고 한다. 군주에게도 거꾸로 난 비늘이 있으니, 유세하는 사람이 군주의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지 않아야 성공한 유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06. 신자와 한자는 모두 책을 지어 후세에 전했으므로 배우는 자들이 많았다. 나는 다만 한자가 <세난>을 짓고도 스스로는 재앙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 슬플 뿐이다.

이래서 사람은 책을 내야 하는 것인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게 자기 운명이니 남는 것은 책이다.

 

107. 노자가 귀하게 생각하는 도는 허무이고, 무위에서 변화에 호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지은 책은 글이 미묘하여 알기 어렵다. 장자는 [노자가 말한] 도덕의 의미를 미루어 풀어서 자유롭게 논했는데, [] 요지 또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신자는 스스로 힘써 명분과 실질에 적용시켰다. 한자는 먹줄을 친 것처럼 법규를 만들어 세상의 모든 일을 결단하고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였지만 그 극단에 치우쳐 각박하고 은혜로움이 부족하였다. [이들 셋은] 모두 [노자의] 도와 덕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니 노자의 사상이 깊고도 먼 것이다.

어쩌면 가장 다른 길을 추구하는 것 같은 법가가 노자의 근원이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엄격한 원칙과 법을 중시하면서, 동시에 왕이 된 자는 꾸미지 않고 의도적으로 행하지 말아야 신하들이 각자의 일을 알서 한다니 말이다.

 

한 단상

어쩌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을 한 편에 넣었다는 자체가 이상했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한비자는 예()를 군주중심의 정치 도구적 법으로 전환시켜 법치사상을 정립하고, 그 실천방법론에는 도가적 사유방식을 도입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도가의 깊이가 도대체 얼마이길래 이렇게 영향을 끼쳤을까. 그리고 하나의 학문을 고집하기 보다는 통섭의 개념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것도 필요하다.

 

4편 사마 양저 열전

 

109. 사마천은 사마 양저에 대한 경공의 신임과 장가와의 갈등 양상을 그려나가면서 문무를 두루 겸비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109. 전쟁만큼 큰 죄악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춘추 전국 시대에 전쟁은 필요악이었다. 법가에서는 부국강병을 주장하면서 전쟁을 통하여 전쟁을 없애는 이전거전以戰去戰이론을 제시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병가들도 어떻게든 승리하여 적을 소멸시키고 자신을 보존하는 일에 주요 관심을 두었다.

 

109. 사마천은 여기서 사마 양저야말로 이론과 실천 면에서 <사마법>을 계승 발전시키면서도 대의와 예절을 아는 유가의 풍모를 지닌 장수라고 평가하며 양저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고 있다.

 

약속은 생명과도 같다

 

111. 양저는 비록 전씨의 서출이지만 그의 들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무예는 적군을 위협할 만하니, 원컨대 군왕께서 그를 시험해 보십시오.

춘추 전국 시대이니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혼란의 시기가 있었다면 계급 때문에 자기의 능력을 펼치지 못한 많은 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했을텐데.

 

111. 신은 본래 미천한 신분인데, 군왕께서 이러한 저를 백성 가운데서 뽑아 대부의 윗자리에 두셨습니다. 그러나 병졸들은 복종하지 않고 백성은 믿지 않으니, 저는 권세가 미미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군왕께서 총애하고 온 백성이 존경하는 신하를 감군으로 삼으면 될 것입니다.

 

113. 양저는 경공에 갔던 사람이 돌아오기 전에 장가의 목을 베어 전군에 돌려 본보기로 삼았다.

사람 하나를 베어 자기의 지위와 권력을 가진 양저는 옳은 것인가. 죽은 장가는 억울하지 않을까. 그러나 양저는 단시간에 확실하게 군을 통제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병사들을 감동시킨 용병술

 

113. [양저는] 병사들이 머무는 막사와 우물, 아궁이, 먹을거리, 질병을 물어보고 약을 챙겨 주는 일도 몸소 보살폈다. 또한 장군에게 주어지는 물자와 양식을 모두 병사들에게 누리게 하였는데, 자신은 병사들 중에서도 몸이 가장 허약한 병사의 몫과 똑같이 양식을 나누었다.

군을 어떻게 이끌어 나가야 하는지를 가장 잘 알고 있다. 가장 쉬우면서도 어려운 것이다. 나는 어떻게 했냐고? 글쎄.

 

115. 내가 <사마병법>을 읽어 보니 그 개략이 넓고 크며 원대하여 설령 삼대 제왕들이 전쟁에 나서도 그 의미를 다 이해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장을 보면 과장된 점도 없지 읺다. 양저는 보잘 것 없는 작은 나라를 위해서 군대를 움직였으니, 어느 틈에 <사마병법>에서 말하는 겸양의 예절을 지킬 수 있었겠는가? 세상에는 이미 <사마병법>이 많이 있으므로 거론하지 않고 양저의 열전만 지었다.

 

양저 단상

앞으로도 계속 나오고 있지만 병법은 이런 혼란의 시대에 꼭 필요한 것이고, 벼슬에 나아가기 위한 필수 요소였다. 공자의 안타까움은 이런 것이다. 유가라는 큰 사상을 남겼지만 공자의 더 큰 뜻을 펼치기 위해서는 병법이었는데.

 

5편 손자오기 열전

 

117. 손무, 손빈, 오기 세 사람은 춘추 전국 시대의 저명한 군사가이자 병법가로서 그들의 저작은 후세에까지 전해진다.

 

117. 오기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안목을 바탕으로 하여 용병 방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사마천은 오기의 각박함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다. 이 점은 치욕을 참아 내며 발분의 세월을 보내고 성취를 이룬 손빈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는 확실히 대비된다.

 

군령을 따르지 않는 병사에게는 죽음뿐이다.

 

123. 손자는 결국 대장 두 사람을 베어 [모두에게] 보여 주었다. 그러고는 그들 다음으로 왕의 총애를 받는 후궁을 대장으로 삼고 다시 북을 쳤다. 부녀자들은 모두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앞으로, 뒤로, 꿇어앉기, 일어서기 등을 자로 잰 듯 먹줄을 긋듯 정확하게 하며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이순신도 목을 베어 군령의 위엄을 알렸다. 군대에서 이 같은 상징은 꼭 필요하다. 사미 양저도 장가의 목을 베어 단시간에 군을 장악했다.

 

아내를 죽여 장수가 되다.

 

128. 오기는 그리하여 이름을 얻기 위해 자기 아내를 죽여 제나라 편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이 정도이면 이름을 얻는데는 성공하겠으나 자기 아내를 죽일만큼의 비정함 때문에 진정 그를 따르는 사람을 얻을수 있겠나.

 

병사를 위해 고름을 빨다

 

129. 오기는 장수가 되자 병사들 가운데서 가장 낮은 자와 똑같이 옷을 입고 밥을 먹었다. 누을 때에도 자리를 깔지 못하게 하고 행군할 때도 말이나 수레를 타지 않고 식량은 직접 가지고 다니면서 병사들과 함께 수고로움을 나누었다.

 

131. 이렇게 보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 중요한 것은 임금의] 덕행에 있지 [지형의] 험준함에 있지 않습니다. 만일 임금께서 덕을 닦지 않으시면 배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적국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왕에게 이런 직언을 하기는 쉽지 않은데 왕의 됨됨이를 보고 유세를 해야 할 것이다.

 

135. 세상에서 군대를 말하는 자들은 누구나 <손자> 열 세편과 <오기병법>을 거론하는데 세상에 많이 전해지므로 논하지 않고 그들이 활동한 사적과 독창적인 계책만 논하였다. 속담에 말하기를 실천을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말을 잘하는 것은 아니며, 말을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행동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손자가 방연을 해치운 책략은 영명하였으나, 일찌감치 [다리가 잘리는] 형벌을 당하는 재앙을 피하지는 못하였다. 오기는 무후에게 형세가 [임금의] 덕행만 못하다고 말했지만, 초나라에서 그의 행실이 잔혹하며 인정이 적었으므로 그의 목숨을 잃었으니 슬프구나.

 

오 단상

같은 무인으로서 특히 정이 가는 인물들이다. 군인은 오로지 결과로서 보여줘야 하는 숙명이다. 장수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군대. 이를 만들어 놓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그들은 단순히 병법뿐만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법에 대해서도 정통했다. 하나도 이루기가 어려운데 대단한 인물들이다.

 

6편 오자서 열전

 

137. 어찌 보면 사마천도 궁형을 받고 인고의 세월을 살았으니 오자서의 입장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래서 사마천은 비분강개한 필치로 오자서를 위한 열전을 만들어 오자서야말로 작은 의를 버리고 큰 부끄러움을 씻었다고 칭찬했다. 그리하여 이 편에는 오자서의 안목과 직언을 마다하지 않은 강직한 성품, 죽을 때까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은 비분강개한 심정 등이 간신 백비와 대비되어 잘 묘사되고 있다.

 

어찌 100금의 칼이 문제이겠는가

 

145. 오자서는 공자 광이 오나라 왕을 죽이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려는 속셈이 있어, 아직은 [나라] 밖의 일을 이야기할 때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공자 광에게 전제라는 사람을 추천하고 물러나 태자 건의 아들 승과 함께 초야에 묻혀 밭을 갈았다.

 

때가 아니니 기다리십시오

 

145. 공자 광이 전제에게 오나라 왕 요를 암살하도록 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니 이 사람이 바로 오왕 합려이다. 합려는 이미 자리에 올라 뜻을 이루고자 곧 오자서를 불러 행인으로 함께 나랏일을 꾀하였다.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

 

148. 오자서는 소왕을 잡으려고 하였으나 잡을 수 없었다. 그 대신 초나라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그 시신을 꺼내 300번이나 채찍질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얼마나 원한이 사무쳤으면 이렇게까지 했을까 싶다가도 죽은 시체에다 이런 짓을 해봤자 무엇이 달라지나, 오히려 보는 사람들에게 있어 한없이 공포감을 주기 딱 맞는 조건이다.

 

149. 나를 위해서 신포서에게 사과하고 나는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어 이 때문에 도리어 순리에 거스르는 행동을 했소라고 말해 주게

자신의 행동이 지나침에 대한 반성인가.

 

149. 이때 오나라는 오자서와 손무의 계책을 받아들여 서쪽으로는 강한 초나라를 깨드리고, 북쪽으로는 제나라와 진나라를 누르며, 남쪽으로는 월나라 사람들을 복종시켰다.

 

악의 씨가 자라지 못하게 하라

 

151. ‘옳고 그른 것을 거스르고 공손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가볍게 코를 베고 무겁게는 목을 베어 이 땅에 악의 씨가 자라지 못하게 하라

 

152. 나는 왕께 여러 차례 간언했으나 왕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이제 곧 오나라가 망하는 날을 보게 될 것이다. 네가 오나라와 함께 죽는 것은 덧없는 일이다.

 

153. 참소를 일삼는 신하 백비가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는데 왕은 도리어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나는 그의 아버지를 제후의 우두머리로 만들었고, 그가 임금이 되기 전 공자들끼리 태자 자리를 놓고 다툴 때 죽음을 무릅쓰고 선왕에게 간해 그를 후계자로 정하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는 태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왕위에 오르고 나서 내게 오나라를 나누어 주려고 하였을 때도 나는 바라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는 간사한 신하의 말만 듣고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156. 원한의 해독이 사람에게 끼치는 것은 심하구나! 왕이 된 자도 신하에게 원한을 사서는 안되거늘, 하물며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끼리야! 일찍이 오자서가 오사를 따라 함께 죽었다면 어찌 땅강아지나 개미와 차이가 있었겠는가! 바야흐로 오자서는 강수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이고, 길에서 빌어먹을 때도 마음속에 어찌 잠깐인들 [초나라의 수도] 영을 잊었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것을 참고 견뎌 내어 공명을 이룰 수 있었으니 강인한 대장부가 아니면 어느 누가 이런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백공도 만일 스스로 왕이 되려고만 하지 않았던들 그 공적과 계책도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리라.

 

오자서 단상

복수를 꿈꾸는 남자 오자서. 사마천과 다른 것이 무엇이랴. 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 오랜 시간을 참고 견디며 살아온 오자서. 그리고 마침내 명성을 얻고 복수를 했지만 결국은 스스로를 목숨을 끊어야 했던 비운의 남자. 죄짓고 살지 말자.

 

7편 중니 제자 열전

 

159. 그는 정치가로서의 삶에는 실패했지만 무관의 제왕으로 불릴 만큼 교사로서의 역할에서는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공자는 교육의 중요성을 부르짖고, 그의 나이 서른 살을 전후로 하여 제자를 모아 수업을 했는데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핵심 제자들이 여기에 수록된 자들이다.

공자에 대한 이야기는 <공자 세가> 편이 따로 있건만 그의 제자를 위한 독립적인 열전까지 넣는 것을 봐서는 정말 중국에서는 공자를 추앙하는 것이 맞나보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얘기인데.

 

159.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바로 후반부에 상당한 편폭으로 서술되어 있는 자공에 관한 내용이다. 공자가 매우 아꼈던 제자는 자공이 아니라 안회이었음에도 안회에 대한 내용은 별로 없고 자공이 남긴 업적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자의 제자들과 공자가 존경한 사람들

 

163. 내 문하에서 학업에 힘써 [육예에] 통달한 사람은 일흔일곱명이다.

 

163. 공자가 존경한 인물로는 주나라의 노자, 위나라의 거백옥, 제나라의 안평중, 초나라의 노래자, 정나라의 자산, 노나라의 맹공작이 있다.

 

밥 한 그릇과 물 한 바가지로 즐거워하는 안회

 

164. 어질구나! 회여! 밥 한 그릇과 물 한 바가지로 누추한 뒷골목에 살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견뎌 내지 못할 텐데, 안회는 자기가 즐겨하는 바를 바꾸지 않는구나!

<논어>에서 보고 오랜만에 다시 본다. 감회가 새롭다. 그런데 사실 그때 읽었던 감정과 별로 다르지가 않다. 공자에 대한 시선은 여전히 좋지 않다.

 

164. 벼슬에 나가게 되면 도를 실행하고 물러나면 조용히 도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와 너뿐이구나.

 

얼룩소 새끼라도 털이 붉고 뿔이 곧으면 제물로 쓸 수 있다

 

166. 중궁의 아버지는 미천한 사람이었으나 공자가 말했다. “얼룩소 새끼라도 털이 붉고 뿔이 곧다면 사람들이 그것을 제물로 쓰지 않으려고 하여도 어찌 산천의 신들이 내버려두겠는가?”

쓰임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스로를 쓸 수 있으면 더 좋겠지만.

 

사람의 성격에 따라 조언도 달라야 한다

 

168. 염구는 머뭇거리는 성격이므로 앞으로 나아가게 해 준 것이고, 자로는 지나치게 용감하므로 물러나게 한 것이다.

사람을 봐가면서 같은 대답이라도 달리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역시 한 수 위의 공자.

 

좋은 말은 듣고 실행하지 못했는데 또 좋은 말을 들을까 두렵다

 

169. “군자는 의를 가장 소중히 여긴다. 군자가 용맹함만을 좋아하고 의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세상을 어지럽히게 되고, 소인이 용맹함만을 좋아하고 의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도적이 된다.” 자로는 [좋은 말을] 듣고 아직 실행하지 않았는데 또다시 [좋은 말을] 듣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다. 나도 많이 느낀 것이지만. 그래서 자로가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170. 몸가짐을 겸손하게 하면 그 지방의 힘센 자들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고, 너그럽고 올바르면 그곳 백성을 따르게 할 수 있을 것이며, 공손하고 바르게 정치를 하여 그곳을 안정시키면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 것이다.

 

170. “세상이 알아주지 않으면 그만둘 일이다. 물이 깊으면 벗고 건너고, 얕으면 걷고 건너라고 했는데라고 하며 공자가 세상을 돌아다니며 유세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딱 내 시선이 삼태기 노인과 같구나.

 

군자는 죽더라도 갓을 벗지 않는다

 

172. “군자는 죽을지언정 갓을 벗지 않는다.” ..... “내가 자로를 제자로 삼은 뒤로 남의 험담을 듣지 않았거늘.”

 

자식은 태어난 지 3년이 지나야 부모 품을 벗어난다

 

173. 자식은 태어나서 3년이 지나야 부모 품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삼년상이 세상에 널리 통하는 의식인 것이다.

재여가 꼭 나같구나. 3년 아니 평생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썩은 나무로는 조각할 수 없다

 

174. 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 없고, 더러운 흙으로 쌓은 담장은 흙손질을 할 수 없다.

예전에는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하는 말만 듣고도 그 사람을 믿었는데, 이제는 그 말을 들어도 행동까지 보고서야 그 사람을 믿게 되었다. 모두 재아 덕분에 바뀐 것이다."라며 매도에 가깝게 제자인 그를비난한다. 공자의 십대제자인 공문십철 중 한 명이면서 관련 내용이 순 비난밖에 없다. 제자를 아끼는 안타까운 마음일까. 정말로 비난하는 것일까.

 

174. 그 뒤 재여가 [제나라 도성] 임치의 대부가 되었는데 전상과 난을 일으켜 그 일족이 모두 죽음을 당하게 되었으므로 공자는 매우 부끄러워했다.

실리주의자인 재여와 공자는 자주 부딪혔을 것이다. 그래도 난 재여 쪽에 한표를

 

종묘의 제사 그릇 같은 자공

 

175. “너는 그릇이다.” “호련이다.”

기분이 좋았을까. 좋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제사때라도 쓰이는 그릇이면 괜찮은 평가다.

 

176. “선생님께서는 온화하고 선량하며 공경하고 검소하며 사양하는 미덕을 갖추고 계셨기에 그것을 얻은 것이니 선생님께서 그것을 구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구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한 번 움직여 세상의 판도를 새로 짠다

 

178. 위로는 왕의 마음을 교만하게 만들고 아래로는 여러 신하들을 방자하게 만들면 당신이 뜻하는 큰일을 이루기 어려워집니다. 무릇 왕이 교만해지면 제멋대로 하고 신하들이 방자해지면 권력을 다투게 됩니다. 그러면 당신은 위로는 왕과 틈이 벌어지고, 아래로는 대신들과 권력을 다투게 될 것입니다.

 

181. 남에게 보복할 뜻이 없으면서도 그런 의심을 받는다면 이는 어리석은 일이고, 남에게 보복할 뜻이 있는데 이것을 알아차리게 한다면 이는 위태로운 일입니다. 또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기도 전에 새어 나간다면 이는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이 세가지는 일을 꾀하는 데 큰 걱정거립니다.

 

184. 월나라는 오나라를 깨뜨린지 3년 뒤에 동방 제후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처럼 자공은 한 번 나서서 노나라를 보존시키고 제나라를 어지럽게 했으며,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진나라를 강국이 되게 하였으며, 월나라를 제후들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였다. 즉 자공이 한번 뛰어다니더니 각국의 형세에 균열이 생겨 10년 사이에 다섯 나라에 각기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184. 자공은 또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일을 좋아하여 때를 보아서 돈을 잘 굴렸다. 그는 남의 장점을 칭찬하기를 좋아하였으나 남의 잘못을 덮어 주지는 못하였다. 그는 일찍이 노나라와 위나라에서 재상을 지냈으며 집안에 천금을 쌓아 두기도 하였다.

돈이 있어야 권력에 대한 탐욕이 없어지고 제 뜻을 온전히 펼칠수 있는 것이다. 돈을 좋아하고 돈을 좇는 일은 나쁜일이 아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취한다면.

 

많이 듣고 삼가면 실수가 적다

 

187. 많이 듣되 의심나는 것을 버리고 그 나머지를 신중하게 말한다면 실수가 적을 것이다. 많이 보되 의심나는 것을 버리고 그 나머지를 신중히 실행한다면 뉘우치는 일이 적을 것이다. 말에 실수가 적고 행동에 뉘우침이 적으면 녹은 그 가운데 저절로 얻어진다.

 

188. 말은 진실 되고 미더우며, 행동은 독실하고 공경스러우면 비록 오랑캐의 나라에서도 통용될 것이다. 말에 진실과 믿음이 없고 행동에 독실함과 공손함이 없다면 비록 자기가 태어난 마을이라 하더라도 통용되겠는가? 서 있을 때는 그러한 말이 눈앞에서 보이는 듯하고, 수레를 탈 때도 그러한 말을 수레 끌채의 가로목에 새겨 놓고 보아야 한다. 그렇게 된 이후에 통용될 것이다.

 

명망과 달()의 차이

 

189. 그것은 소문이지 달이 아니다. 대체로 달한 사람은 질박하고 정직하여 의를 좋아하고, 남의 말을 잘 듣고 표정을 잘 살피며, 깊이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낮춘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반드시 달하게 된다. 그러나 소문 난 사람은 겉으로는 어진 척하지만 실제 행동은 완전히 어긋나면서도 그러한 것에 물들어 조금도 의심없이 행동한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반드시 소문이 나게 된다.

 

사람은 말과 생김새로만 평가하면 안 된다

 

190. 그는(자우) 매우 못 생겨서 공자는 그가 가르침을 받으러 왔을 때 재능이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가르침을 받은 뒤 물러나면 덕행을 닦는 일에 힘쓰고, 길을 갈 때는 절대로 사잇길로 가지 않으며, 공적인 일이 아니면 경대부들을 만나지 않았다.

 

190. 나는 말 잘하는 것으로 사람을 골랐다가 재여에게 실수하였고, 생김새만을 보고 사람을 가리다가 자우에게 실수하였다.

흔히 우리는 사람을 평가할 때 신판서언(身判書言)으로 한다. 그 사람의 외모, 옷차림, , 말로. 그러나 한 사람을 온전히 안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재능은 빼어난데 몸담고 있는 곳이 작다

 

191. 안타깝도다. 부제가 다스리는 곳이 너무 작구나! 다스리는 것이 컸더라면 이상적인 정치를 펼칠 수 있었을 텐데.

말만 하지 말고 그를 다른데 천거해주면 될 것 아닌가. 제자를 진정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배우고 실행하지 않으면 부끄러운 일이다

 

191. 나라에 도가 있을 때 [자리를 차지하며] 녹봉을 받고, 나라에 도가 없는데도 [물러나지 않고] 녹봉을 받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192. “내가 듣건대 재물이 없는 것을 가난이라 하고, 도를 배우고도 실행하지 못하는 것을 병들었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가난하기는 하지만 병들지는 않았습니다.자공은 수치스러워하며 좋지 않은 마음으로 떠났다. 그는 평생 동안 자신의 말이 지나쳤음을 부끄럽게 여겼다.

이런 말이 예전에는 듣기 좋았는데 이제는 싫다. 가난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노력했는지를 봐야 한다.

 

자식을 위하는 마음은 똑같다

 

194. 그를 위해 곽을 만들어 주면 될 터인데 그러지 않은 것은 나도 대부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어서 걸어서 다닐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한 공자의 마음이지만 그래도 제일 아끼는 안회가 죽었는데 그깟 수레를 못 내어주나. 이럴 때는 꼭 옹색한 늙은이같다.

 

예와 의를 좋아하면 사람들이 몰려든다

 

198. 윗사람이 신의을 좋아하면 백성은 감히 성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만 한다면 사방의 백성이 자식을 포대기에 싸서 업고 찾아올 텐데 농사짓는 법을 배워 어디에 쓰겠는가?

농사를 천하게 여기는 공자의 사상을 볼 수 있다. 공자는 과연 손에 흙을 묻혀본 적이 있을까? 그렇다면 이런 얘기는 못할텐데

 

신하는 임금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다

 

202.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내가 잘못을 저지르면 다른 사람들이 반드시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하는 임금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것을 숨기는 것이 예이다.

 

204. 학자들 중에 공자의 70여 제자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기리는 사람 가운데에는 실제보다 지나친 사람도 있고, 헐뜯는 사람 중에는 진실보다 덜한 이들도 있다. 이를 가른 것은 용모를 본 것이 아니라 공자 제자들의 서적들에서 논한 말로, 이는 공 씨의 벽 가운데서 나온 고문에 근거한 것이다. 나는 제자들의 이름과 글을 모두 <논어>에 있는 공자 제자들의 문답에 의거하여 함께 엮어서 만들었으며 의심나는 것으 싣지 않았다.

 

중니 열전 단상

<공자 세가>에서 공자에 대한 부분이 있음에도 이렇게 열전에서 그의 70여명의 제자들에 대해 언급했다. 그만큼 공자가 그 당시 사회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모든 사람이 진리인 줄 알고 지켜야 할 줄 알지만 실제에 있어서 지켜지기 어려운 부분을 공자는 항상 얘기한다. 지금의 우리도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 하지만 그 진리대로 우리가 실천을 하고 있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좋은 일만은 아니다. 비겁해지는 나 자신을 목격하는 것은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니다.

사마천은 어쩌면 춘추 전국 시대 가장 혼돈의 시대 속에서 힘들고 채택하기는 어렵지만 종국에는 우리가 가져야 할,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8편 상군 열전

 

205. 상군은 법가를 대표하는 정치가 상앙을 말한다. .... 상앙은 법가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잇는 이회의 영향을 깊이 받아서 개혁적인 성향이 강했으나 위나라에서는 중용되지 못하였다.

 

205. 상앙은 사회 개혁법을 통하여 봉건적인 옛 제도를 철저히 없애고 군주의 절대 권력 확립에 필요한 혁신적인 조치를 강구하였다. 그는 특히 귀족들의 세습적 특권을 박탈하고자 했을 뿐 아니라, 절대 군주의 존재를 위험시하는 지식인들의 자율적이고 비판적인 사상 논의를 엄금하도록 요청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강압적이고 전제주의적 조처로써 상앙은 진나라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부강하게 만들고 뒷날 천하를 통리할 수 있는 기초를 다졌다.

 

205. 법가 사상 자체가 지식인을 탄압하는 전제주의적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상앙의 사상은 지식인과 관료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 유교 사회에서는 거의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사마천도 그의 인물됨에 대해서는 혹평을 했다. 그러나 사마천이 <태사공 자서>에서도 밝혔듯 효공을 강대한 패자로 만들고 훗날 통일 진나라의 기초를 다진 것은 무시할 수 없는 공적이다.

 

등용하지 않으려면 죽이십시오

 

208. 나는 군주가 먼저이고 신하가 나중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왕께서 당신을 기용하지 않으시려면 죽여야 한다고 하였소. 왕은 나에게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였소. 그대는 빨리 떠나시오. [그렇지 않으면] 곧 붙잡힐 것이오.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야 성공적인 유세를 할 수 있다

 

210. ‘나는 너무나 길고 멀어서 나는 기다릴 수 없소. 그리고 어진 군주는 자기가 자리에 있을 때 세상에 이름을 나타내는데 어찌 수십 년 또는 수백 년 뒤에 제왕의 사업을 이루기를 기다릴 수 있겠소?‘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강한 나라를 만드는 방법을 주군께 말씀드렸더니 주군께서 기뻐하신 것 뿐입니다. 하지만 은, 주 시대 임금의 덕행에 견주기는 어렵습니다.

 

옛 것을 따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210. 백성은 일을 시작할 때에는 더불어 상의할 수 없으나 일이 성공하면 함께 즐길 수 있습니다. 가장 높은 덕을 논의하는 자는 세속과 타협하지 않으며, 큰 공을 이루는 자는 뭇사람과 상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나라를 강하게 할 수 있으면 구태여 옛것을 본뜨지 않고,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으면 옛날의 예악 제도를 좇지 않았습니다.

 

211. 지혜로운 자는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자는 통제를 받으며, 현명한 자는 법을 고치고, 평범한 자는 얽매입니다.

 

211. 이로움이 백 배가 되지 못하면 법을 바꿀 수 없고, 효과가 열 배가 도지 못하면 기물을 바꿔서는 안 됩니다. 옛것을 본받으면 허물이 없고 예법을 따르면 사악함이 없게 됩니다.

 

212. 세상을 다스리는 데는 한 가지 길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 나라에 편하면 옛날 법을 본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탕왕과 무왕은 옛법을 따르지 않았지만 왕 노릇을 하였고, 하나라 걸왕과 은나라 주왕은 예법을 바꾸지 않았지만 멸망하였습니다. 옛날 법을 반대한다고 해서 비난 할 것고 아니고 예법을 따른다고 하여 칭찬할 것도 못 됩니다.

옳고 그름을 견주어 바꾸면 될 것을 이리 왈가왈부하는지. 그러나 법 제정은 신중해야 한다. 그 법으로 인해 파급되는 효과는 엄청나기 때문이다. 법안을 만든 상앙조차 나중에 자기가 만든 법의 폐해를 몸소 느끼게 된다.

 

새로 만든 법은 믿음 속에서 꽃필 수 있다

 

212. 법령에 따르면 백성을 열 집 또는 다섯 집을 한 조로 묶어 서로 잘못을 감시하도록 하고, [한 집이] 죄를 지으면 [그 조가] 똑같이 벌을 받는다.

무슨 북한도 아니고 이런 법안 때문에 상앙이 욕을 먹는거구나. 법은 상식과 같은 눈높이를 가져야 한다.

 

법은 위에서부터 지켜야 한다

 

214. 태자 태부로 있던 공자건을 처벌하고 태사 공손가의 이마에 글자를 새기는 형벌을 내렸다. 그다음 날부터 진나라 백성은 모두 새로운 법령을 지켰다.

군기를 잡는 것처럼. 공포정치 느낌. 그러나 아랫사람에게 윗사람을 따르게 하려면 모범을 보이는 것이 상식이다. 자기는 하지 않으면서 남은 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많은 상사들이 욕먹는 것이다.

 

215. 실시한 지 4년이 지난 어느 날 공자건이 또 법령을 어겨 의형을 받았다. 그 뒤 다시 5년이 지나자 진나라 백성은 생활이 넉넉해지고 병력이 강해졌다.

공자건 덕분에 법령이 잘 지켜진 셈이다. 어찌됐든 결과는 좋았네

 

사람의 마음을 잃는 자는 망한다

 

218. 돌이켜 귀 기울이는 것을 총이라 하고, 마음속으로 볼 수 있는 것을 명이라고 하며, 자신을 이기는 것을 강이라고 합니다. 순임금도 스스로 자신을 낮추면 더욱더 높아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220. 당신은 왕의 명령보다도 깊게 백성을 교화시키고 백성은 왕이 명령하는 것보다도 빠르게 당신이 하는 일을 본받습니다. 지금 당신이 세운 제도는 도리를 등지고 당신이 고친 국법은 이치에 어긋나니 이것을 교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못 됩니다. 당신은 또한 임금처럼 남쪽을 향하여 앉아 과인이라 일컬으며 날마나 진나라 공자들을 핍박하고 있습니다.

 

221. <>에서는 사람을 얻는 자는 흥하고 사람을 잃는 자는 망한다라고 했습니다. .... 당신은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은데 아직 목숨을 연장하여 더 오래 살기를 바라십니까?

 

222. [당신의] 파멸은 한 발을 들고 넘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다가올 것입니다.

 

222. ! 법을 만든 폐해가 결국 이 지경까지 이르렀구나.

 

223. 진나라 혜왕은 상군을 거열형을 처해 본보기를 보이고는 말했다. “상앙처럼 모반하는 자가 되지 말라!”

단지 나라를 부강하기 위해 만들 일인데 이 지경까지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223. 상군은 그 타고난 성품이 각박한 사람이다. 그가 효공에게 벼슬을 얻고자 제왕의 도를 유세한 것을 보면 내용이 없고 화려한 말을 늘어놓은 것이지 마음속으로 하려던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유세를 하는 것 아닌가. 이건 사마천의 의견에 반대. 오늘날의 정치도 마찬가지 아닌가.

 

223. 게다가 군주의 총애를 받고 있던 신하를 이용하고, 자리에 오른 뒤에는 공자건에게 형벌을 가하고, 위나라 장군 앙을 속이고, 조량의 충언을 따르지 않은 것도 상군이 은혜가 적은 것을 밝히기에 충분하다.

 

223. 나는 일찍이 상군이 지은 <상군서>에서 <개색>, <경전> 편을 읽었는데 [그 내용도]그가 행동한 궤적과 비슷하였다. 결국 상군이 진나라에서 좋지 않은 평판을 얻게 된 데는 까닭이 있구나!

 

 

상군 열전

사실 제자 백가 중에 마음에 드는 것 중에 하나가 법가이었다. 그러나 그 법의 내용을 접하고는 내가 생각한 법과는 좀 다른 것이었다. 상식과 견주어 차이가 없는 법이 가장 좋은 법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법은 항상 누군가에는 불리하고 누군가에게는 유리한 법이다. 상앙이 없었다면 진나라가 이렇게 커지고 나중에 통일할 수 있었겠나. 임금의 한마디에 의해 좌지우지 되지 않는 나라. 제대로 된 법이 세워지고 지켜지는 나라가 강한 나라가 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9편 소진 열전

 

225. 앞부분은 소진이 계속 유세에 실패하여 실의에 빠진 모습과 뒷날 유세에 성공하여 득의한 모습을 생동감 있게 대비시킴으로써 문학적 색채를 더했다.

 

225. 세상에는 소진을 나라를 팔아먹은 반역의 신하로 일컫지만, 합종에 성공하여 진나라 병사가 15년 동안 동쪽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데 크게 공헌한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소진의 뒤를 이어 소대와 소려가 잇달아 연나라를 위해 세운 계책도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이 때문에 사마천도 소씨 형제들이 지혜와 역량 면에서 다른 사람을 능가했음을 인정하고 이 열전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새도 깃털이 자라지 않으면 높이 날수 없다.

 

227. “대체로 선비가 머리를 숙여 가며 배우고도 높은 벼슬과 영화를 얻을 수 없다면 [책을] 많이 읽은 들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주나라 책 <음부>를 찾아내어 머리를 파묻고 읽었다. 1년쯤 되어서야 [유세할] 상대방의 심리를 알아내어 설득하는 방법을 터득하고는 말했다. “이 방법만 있으면 이 시대의 군주들에게 유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캠벨이 느껴진다. 5년에 견줄만한 시간은 아니지만 1년만에 방법을 터득한 그가 부럽네. 2년이라는 시간인데.

 

228. 새도 깃털이 자라지 않으면 높이 날 수 없소. [우리 나라는] 다스리는 이치가 밝혀지지 않았으니 천하를 통일할 수 없소.


1000리 밖의 근심을 버리고 100리 안의 근심부터 해결하라

 

230. 이런 까닭 때문에 왕께서 조나라와 합종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천하가 하나로 통일되면 연나라에는 반드시 걱정거리가 없을 것입니다.

연합작전인데. 아주 훌륭한 계책이다. 이 계책을 수립하기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은 지형 연구를 했을 것이며 머리 속으로 그림을 그려봤겠나.

 

어찌 어두운 곳에서 큰일을 결정하랴

 

231. 주군을 위한 계책으로는 백성이 편안하고 나라에 일이 없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니 새로운 일을 만들어 백성을 수고롭게 해서는 안 됩니다. 백성을 편안히 하는 근본적인 계책은 교류할 만한 나라를 고르는데 있습니다. 교류할 만한 나라를 알맞게 고르면 백성은 편안할 수 있고, 교류할 만한 나라를 잘못 고르면 백성은 죽을 때까지 편안할 수 없게 됩니다. 우선 나라 밖의 걱정거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달변이다. 달변

 

234. 여섯 나라가 하나가 되어 힘을 합쳐 서쪽으로 진나라를 치면 진나라는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대체로 다른 사람을 깨뜨리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 깨지는 것, 다른 사람에게 신하라고 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신하로 거느리는 것을 어떻게 한날에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235. 신이 듣건대 군주는 의심을 끊고 비방을 버리고 떠도는 말의 흔적을 사라지게 하며 붕당의 문을 막는 데 뛰어나다고 합니다. .... 잠시 대왕을 위해서 계책을 세워 보면 한, , , , , 조나라가 하나가 되어 합종하여 함께 진나라에 대항하는 것이 낫습니다. 천하의 장수와 재상들로 하여금 원수근처로 모이도록 하여 인질을 맞바꾸고 백마를 죽여 맹세하고 이렇게 약속해야 합니다.

 

닭 부리가 될지언정 쇠꼬리가 되지 말라

 

238. 이런 한나라가 강대한 병력과 대왕 같은 현명함으로 서쪽으로 진나라를 섬겨 팔을 맞잡고 복종한다면 그것은 사직을 부끄럽게 만들고 천하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는 일이니 이보다 더 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상대를 한없이 칭송하여 기분을 좋게 만드는 기술은 예나 지금이나 대화의 기술 1원칙이다.

 

238. 항간의 속담에 차라리 닭부리가 될 지언정 쇠꼬리가 되지 말라.’

 

싹이 돋아날 때 베지 않으면 결국 도끼를 써야 한다

 

241. <주서>에서는 ‘[초목이] 실처럼 끊어지지 않다가 무성해지면 어떻게 하나? 터럭같이 작을 때 치지 않으면 장차 도끼를 써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미리 깊이 생각하고 결정하지 않으면 나중에 큰 재앙이 이르게 되는데 앞으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왕께서 만일 신의 의견을 받아들여 여섯 나라가 합종으로 친교를 맺고 힘을 합쳐 뜻을 하나로 한다면 강력한 진나라를 근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과장된 몸짓 속에 가려진 진실을 보라

 

243. 진나라가 제나라를 칠 수 없음을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서쪽을 향하여 진나라를 섬기려고 하니 이는 신하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다. 지금 신하가 되어 진나라를 섬긴다면 아무런 명분이 없고 나라를 튼튼하게 하는 실제적인 이익도 없으므로 신은 대왕께서 이 문제를 마음에 두어 헤아리시기를 바랍니다.

 

우환이 닥친 뒤에는 걱정해도 소용없다

 

245. 신이 듣건대 [모든 일은] 혼란스러워지기 전에 다스리고 [해로운 일은] 일어나기 전에 대책을 세워 막아야 한다고 합니다. 우환이 닥친 뒤에 걱정하면 미칠 수 없습니다.

 

부귀하면 우러러보고 가난하면 업신여긴다

 

248. 이 한 몸도 부귀해지자 친척들이 두려워하고 가난하고 천하면 업신여기는데, 하물며 뭇사람들임에랴! 만일 나에게 낙양성 주변에 밭이 두이랑만 있었던들 어찌 여섯 나라 재상의 인수를 찰 수 있었을까?

결핍이 있어야 하고 부족함이 있어야 사람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248. 합종 약속 문서를 진나라로 보냈다. [그로부터] 진나라 군대는 15년 동안 감히 함곡관 밖을 넘보지 못했다.

문서를 보낼 때 소진의 얼굴이 흐뭇하게 떠오른다.

 

원수를 버리고 든든한 친구를 얻어라

 

250. 신이 듣건대 굶주린 사람이 굶주리면서도 오훼라는 독초를 먹지 않는 까닭은 그것으로 배를 채울 수는 있지만 굶어 죽는 것과 똑같은 해독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무거나 덜컥 잘못 먹었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무서운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충신만이 죄를 짓는가?

 

251. [소진은] 여기저기에 나라를 팔아먹고 다니면서 이랬다저랬다 하는 신하이니 앞으로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항상 사람이 잘 되면 그를 시기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늘 행동과 말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 적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253. 어찌 충성스럽고 신실하다고 해서 죄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신의 허물은 불행하게도 이러한 것과 비슷합니다.

 

소진이 남긴 사업을 이은 소대와 소려

 

255. 소진의 동생은 소대이고, 소대의 동생은 소려이다. 이 두사람은 형의 성공을 보고 모두 학문에 정진하였다.

나도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256. 현명한 왕은 자기 허물을 듣는 데 힘쓰고 자신의 뛰어난 점에 관한 칭찬을 듣기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257. 자주 싸우면 백성이 피로해지고 오래 싸우면 병사들이 지친다고 들었습니다.

 

258. 대체로 교만한 군주는 반드시 이()를 좋아하고 멸망하는 나라의 신하는 반드시 재물을 탐한다고 합니다.

 

259. 제나라는 연나라를 치고 연나라 왕 쾌와 자지를 죽였다. 연나라에서는 소왕을 세웠다.

그런데 난 좀 이상한 생각이 든다. 왕까지 죽였는데 그 땅을 왜 차지 안하고 새로운 왕을 세우는 거지. 결국은 제후로 삼겠다는 것인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싸우고 땅을 차지하고 왕을 죽이고는 다른 왕이 들어선다. 계속되는 싸이클이다. 내가 왕이었다면.....

 

정의로운 행동만이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267. 진나라 왕이 남을 꾸짖는 말은 둥근 고리처럼 돌고 돌며,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나는 새처럼 재빠르므로 태후도 막을 수 없고 양후도 말릴 수 없었습니다.

 

268. 소진의 형제 세 사람은 모두 제후들에게 유세하여 이름을 드날렸으며, 그들의 술수는 권모와 변화에 뛰어난 것이었다. 소진이 제나라에서 반간의 혐의를 받고 죽으니 천하 사람은 모두 그를 비웃고 그 술수를 배우기를 꺼려했다.

 

268. 진이 보통 사람의 집에서 일어나 여섯 나라를 연합시켜 합종을 맺게 한 것은 그 지혜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래서 나는 시대 순서에 따라 그의 경력과 사적을 서술하여 유독 그만이 나쁜 평가를 듣지 않도록 하였다.

   

 소진열전 단상

소진이라는 사람이 무섭게 느껴진다. 진나라라는 하나의 강대국을 위세를 막아내기 위해 여섯나라의 합종을 생각한다는게 쉬운 일은 아니다. 판을 읽을 수 있는 그의 능력이 대단하다. 계획을 세운 합종을 성사시키기 위해 그가 다닌 길을 지도에서 보노라면 역시 그의 계획에 대한 믿음과 실현시키기 위한 그의 강인한 의지가 느껴진다. <사기 열전>에 충분히 실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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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1 14:16:56 *.18.187.152

월욜에 기상씨 북리뷰 읽으며 나름 복습(?)을 하는데

이번 리뷰는 진짜 물샐 틈이 없네요. 각 인물의 단상까지!

궁금했던 점도 다 정리가 되어 있어 도움 많이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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