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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24일 08시 23분 등록
저자 : 신 영 복

출판사 : 돌베개




1.저자 소개

1941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서울대 경제학과 및 동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숙명여대 경제학과 강사를 거쳐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관으로 있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복역한지 20년 20일 만인 1988년 8월 15일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했다. 1989년부터 현재까지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2.인상 깊은 글

서론

[21p]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 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2p] 현대 자본주의 특히 그것이 관철하고자 하는 세계 체제와 신자유의적 질서는 춘추전국시대 상황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부국강병이 최고의 목표가 되고 있는 무한 경쟁 체제라는 점에서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24p] 이에 반하여 관계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승인합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배타적 독립성이나 개별적 정체성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관계성을 존재의 본질로 규정하는 것이 관계론적 구성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32p] 초국적 금융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전략이 말하자면 대립면을 상실한 질주입니다. 자기 증식을 운동 원리로 하는 존재론의 필연적 귀결입니다. 패권 주의적 세계 전략은 자기 증식 운동의 불가피한 선택이지만 그러한 전략은 결국 위기를 심화 할 뿐이라는 것이 모순이지요.

[34p] 현실주의란 한마디로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진실입니다.

[36p]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며,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현실이 곧 소중한 가치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37p] 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도재이道在邇, 즉 도는 가까운 우리의 일상 속에 있는 것입니다.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 과학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럼 점에서 동양 사상이 윤리적 수준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고 할 수 있지만 반면에 비종교적이며 과학과의 모순이 없습니다.

[39p] 어떤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하거나, 비대하게 되면 생성 과정이 무너집니다. 생기의 장이 못 되는 것이지요. 자연의 개념과 특히 자연을 생기의 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동양적 체계에서 과잉 생산과 과잉 축적의 문제는 바로 생성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41p] 인간주의적 관점에서 규정하는 인성이란 한 개인이 맺고 있는 여러 층위의 인간관계에 의하여 구성됩니다. 인성은 개인이 자기의 개체 속에 쌓아놓은 어떤 능력, 즉 배타적으로 자신을 높여나가는 어떤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성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成) 것이지요.


[42p] 따라서 인성을 고양시킨다는 것은 먼저 ‘기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자기自己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것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자기를 키우는 순서입니다. 예를 들어 나의 자식과 남의 자식, 나의 노인과 남의 노인을 함께 생각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는 것(成人之美)을 인仁이라 합니다.

자기가 서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세워야 한다는 순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46p] 동同은 이를 테면 지배와 억압의 논리이며 흡수와 합병의 논리입니다. 돌이켜보면 이것은 근대사회의 일관된 논리이며 존재론의 논리이자 강철의 논리입니다. 이러한 동同의 논리를 화和의 논리, 즉 공존과 평화의 논리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20세기를 성찰하고 21세기를 전망하는 일 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민족 문제를 세계사적 과제와 연결시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오래된 시 詩와 언 言

[52p] 우리의 삶과 정서가 진정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과 생각은 지극히 관념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3p] 「강둑에서」

저 강둑길 따라 나뭇가지 꺽는다.
기다리는 임은 오시지 않고 그립기가 아침을 굶은 듯 간절하구나.
저 강둑길 따라 나뭇가지 꺽는다.
저기 기다리는 님 오시는구나. 나를 멀리하여 버리지 않으셨구나.
방어 꼬리 붉고 정치는 불타듯 가혹하다.
비록 불타는 듯 가혹하더라도 부모가 바로 가까이에 계시는 구려.


[60p] 「산에 올라」

산에 올라 아버님 계신 곳을 바라보니 말씀이 들리는 듯.
오! 내 아들아. 밤낮으로 쉴 새도 없겠지.
부디 몸조심하여 머물지 말고 돌아오너라.
산에 올라 어머님 계신 곳을 바라보니 어머님 말씀이 들리는 듯.
오! 우리 막내야. 밤낮으로 잠도 못 자겠지.
부디 몸조심하여 버림받지 말고 돌아오너라.
산에 올라 형님 계신 곳을 바라보니 형님 말씀이 들리는 듯.
오! 내 동생아. 밤이나 낮이나 집단행동 하겠지.
부디 몸조심하여 죽지 말고 살아서 돌아오너라.

[63p] 「박달나무 베며」

영차 영차 박달나무 찍어내어 물가로 옮기세.
아! 황하는 맑고 물결은 잔잔한데
심지도 거두지도 않으면서 어찌 곡식은 많은 몫을 차지하는가.
애써 사냥도 않건만 어찌하여 뜨락엔 담비가 걸렸는가.
여보시오 군자님들 공밥일랑 먹지 마소.

[64p] 오늘날 문화적 환경은 우리 자신의 삶과 정서를 분절시켜 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상품미학, 가상 세계, 교환가치 등 현대 사회가 우리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한마디로 허위의식입니다.

[71p] 군자는 무일無逸(편안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 먼저 노동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여 살아가는가를 알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건대 그 부모는 힘써 일하고 농사짓건만 그 자식들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 채 편안함을 취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무례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업신여겨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한다.


[77p]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82p]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맑으면 발을 씻는다.

나는 굴원의 이 시를 ‘이상과 현실의 갈등’이라는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 오래된 주제에 대한 굴원의 결론은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가장 정갈하게 간수해야 하는 갓끈을 씻고 반대로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 것입니다. 비타협적 엘리트주의와 현실 타협주의를 다같이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획일적 대응을 피하고 현실적 조건에 따라서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굳이 이야기한다면 대중노선을 지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감옥에서 만난 노선배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론은 좌경적으로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좌경적이라는 의미는 ‘신목자 필탈관 新木者 신욕자 필진의 新浴者必振衣’처럼 비타협적인 원칙의 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경적이라는 의미는 맑은 물에는 갓끈을 씻고 흐린 물에는 발을 씻는다는 현실주의와 대중노선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오래된 과제를 마주하는 느낌입니다.


주역의 관계론

[95p] 사회나 인간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 틀을 잘 관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우리의 인식 틀이 의외로 기계적이고 단선적인 논리 구조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대체로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 논리로 짜여져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101p] 어쨌든 개인에게 있어서 그 자리(位)가 갖는 의미는 운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처하는 경우 십중팔구 불행하게 됩니다. 제 한 몸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트리고 나아가서는 일을 그르치게 마련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리가 자기에게 어울리는 자리인지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궁금하지요? 이건 여담입니다만 나는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집터보다 집이 크면 그 터의 기(氣)가 건물에 눌립니다. 고층 빌딩은 지기地氣를 받지 못하는 건축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 땅에 건물을 너무 많이 쌓아놓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뉴욕이나 도쿄 역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터와 집의 관계뿐만 아니라 집과 사람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집이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집에 눌립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보다 조금 작은 듯한 집이 좋다고 하지요.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 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30 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30정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70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받는 자리에 앉을 경우 그 부족한 30을 무엇으로 채우겠습니까? 자기 힘으로는 채울 수 없습니다. 거짓이나 위선으로 채우거나 아첨과 함량 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게 되겠지요.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그 자리도 파탄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한 나라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잘못된 사람이 차지하고 앉아서 나라를 파국으로 치닫게 한 불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능력과 적성에 아랑곳없이 너나 할 것 없이 ‘큰 자리’ 나 ‘높은 자리’ 를 선호하는 세태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70%의 자리’가 득위 得位의 비결입니다.

여담이었습니다만 자기의 능력을 키우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동양학에서는 그것보다는 먼저 자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고 하는 생각이 바로 주역의 사상입니다. 어떤 사물이나 어떤 사람의 길흉화복이 그 사물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것이 주역 사상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득위得位와 실위 失位의 개념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서구의 존재론과 다른 동양학의 관계론 입니다.




[129p] 내가 붓글씨로 즐겨 쓰는 구절을 소개하지요.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은 서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선盡善하지 않으면 진미盡美할 수 없고 진미하지 않고 진선할 수 없는 법입니다. 목적과 수단은 통일되어 있습니다. 목적은 높은 단계의 수단이며 수단은 낮은 단계의 목적입니다.

나는 이 미제괘에서 우리들의 삶과 사회의 메커니즘을 다시 생각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바쁘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노동이 노동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될 뿐 아니라 생산 과정에 소외되어 있는 현실을 생각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면 우리는 생산물의 분배에 주목하기보다는 생산 과정 그 자체를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는 과제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130p] 「주역」 사상을 계사전에서는 단 세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역 易 궁즉변窮卽변즉통變卽通 통즉구通卽久”가 그것입니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가 궁극에 이른 상태, 즉 양적 변화와 양적 축적이 극에 달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질적 변화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통通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열린 상황은 답보하지 않고 부단히 새로워진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구久라고 할 수 있습니다.

[131p] 절제와 겸손이란 자기가 구성하고 조직한 관계망의 상대성에 주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법이 로마 이외에는 통하지 않는 것을 잊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논의를 불필요하게 확대하는 감이 없지 않습니다만 우리의 삶이란 기본적으로 우리가 조직한 ‘관계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택된 여러 부분이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과학 이론도 다르지 않습니다. 객관세계는 극히 일부분을 선별적으로 추출하여 구성한 세계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삶은 천지인을 망라한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 중심의 주관적 공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매트릭스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145p] 여러분도 각자 사회에 대하여 다양한 개념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개인의 집합으로 사회를 이해하기도 하고, 하나의 유기체 또는 건축적 구조로 규정하기도 하고 생산관계, 정치 제도, 문화기제, 소통 구조 등 여러 가지 개념으로 사회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회에 대한 이 모든 개념은 제도와 인간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제도와 인간이라는 두 개의 범주가 인간관계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통합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사회는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라 할 수 있으며, 이 인간관계의 사회적 존재 형태가 사회 구성체의 본질을 규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예제 사회, 봉건제 사회, 자본주의 사회가 바로 인간관계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지요.
사회 변화 역시 그것의 핵심은 바로 인간관계의 변화입니다. 인간관계의 변화야말로 사회 변화의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준거입니다. 「논어」에서 우리가 귀중하게 읽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입니다.


[146p~150p] 溫故而知新可以爲師矣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 - 「爲政」

“옛것을 익혀서 새로운 것을 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과거 현재 미래가 각각 단절된 형태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은 사유思惟의 차원에서 재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는 것은 결코 객관적 실체에 의한 구분일 수가 없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의 통일체입니다. 우리가 「논어」의 이 구절에서 읽어야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통일적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온고이지신’ 溫故而知新이란 구절은 어디까지나 진보적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와 미래를 하나의 통일체로 인식하고 온고溫故함으로써 새로운 미래(新)를 지향(知)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이 구절은 대체로 온고 쪽에 무게를 두어 옛것을 강조하는 전거典據로 삼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온고보다는 지신에 무게를 두어 고故를 딛고 신新으로 나아가는 뜻으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온溫의 의미를 온존溫存의 뜻으로 한정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단절이 온溫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옛것 속에는 새로운 것을 위한 가능성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변화를 가로막는 완고한 장애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가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신의 방법으로서의 온은 생환生還과 척결剔抉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가이위사의’ 可而爲師矣는 “스승이라 할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무난합니다.
스승이란 단지 정보만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지요. 더구나 과거지사過去之事를 전하는 것만으로는 스승이 될 수는 없지요. 스승이란 비판적 창조자여야 하는 것이지요.

[156p] 사회의 본질에 대하여 수 많은 논의가 있습니다만 나는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부끄로움을 느끼지 않는 사회란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성 자체가 붕괴된 상태라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


[163p] 따라서 ‘군자화이부동’ 君子和而不同의 의미는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반대로 ‘소인동이불화’ 小人同而不和의 의미는 소인은 타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지배하고 흡수하여 동화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화의 논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논리이면서 나아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의 논리는 지배, 흡수, 합병의 논리입니다. 동의 논리 아래에서는 단지 양적 발전만이 가능합니다. 질적 발전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화의 논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168p] 마음(心) 좋다는 것은 마음이 착하다는 뜻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배려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이처럼 관계에 대한 배려를 감성적 차원에서 완성해놓고 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 이해하거나 좌우명으로 걸어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무의식 속에 녹아들어 있는 그러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9p] 변혁기의 수많은 실천가들이 한결같이 경구驚句로 삼았던 금언이 있습니다.
“낯선 거리의 임자 없는 시체가 되지 마라”는 것이었어요. 운동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중과의 접촉 국면을 확대하는 것, 그 과정을 민주적으로 이끌어가는 것 그리고 주민과의 정치 목적에 대한 합의를 모든 실천의 바탕으로 삼는 것, 이러한 것들이 모두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의 원리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관계로서의 덕이 사업 수행에 뛰어난 방법론으로서 검증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이며 가치이기 때문에 귀중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170p] 자공이 정치에 관하여 질문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정치란 경제(足食), 군사(足兵), 그리고 백성들의 신뢰(足信知)이다.” 자공이 묻기를, “만약 이 세 가지 중에서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하겠습니까?” “군사를 버려라(去兵). “만약(나머지)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버리지 않을 수 없다면 어느 것을 버려야 하겠습니까?” “경제를 버려라(去食). 예부터 백성이 죽은 일을 겪지 않은 나라가 없었지만 백성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나라가 설 수 없는 것이다.”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능력은 그가 맺고 있는 인간 관계에 있으며 이 인간관계는 신뢰에 의하여 지탱되는 것이지요. 신信은 그 글자의 구성에서 보듯이 ‘인人+언言’의 회의會意로서 그 말을 신뢰함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함부로 말하지 않는 까닭은 그것을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서라고 합니다. 신信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약속이라고 풀이되고 있지만 언言은 원래 신神에 대한 맹세로 보기도 합니다. 사람들간의 믿음이라는 뜻은 후에 파생되었다고 보지요. 그만큼 신信의 의미는 엄격한 것이지요.

[175p]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진정한 의미의 지知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인식의 혼란을 가져오는 엄청난 정보의 야적野積은 단지 인식의 혼란에 그치지 않고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폄하하게 할 뿐입니다. 더구나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사람이 ‘팔기 위해서’ 진력하고 있는 사회입니다. 모든 것을 파는 사회이며 팔리지 않는 것은 가차없이 폐기되고 오로지 팔리는 것에만 몰두하는 사회입니다. 상품 가치와 자본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이러한 체제에서 추구하는 지식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는 한 점의 인연도 없습니다. 지知는 지인知人이라는 의미를 갈같이 읽는다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회는 무지 無知한 사회입니다. 무지막지無知莫知한 사회일뿐입니다.

[181p] 경험과 실천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현장성現場性입니다. 그리고 모든 현장은 구체적이고 조건적이며 우연적입니다. 한마디로 특수한 것입니다. 따라서 경험지經驗知는 보편적인 것이 아닙니다. 학學이 보편적인 것(generalism)임에 비하여 사思는 특수한 것(specialism)입니다. 따라서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卽罔’의 의미는 현실적 조건이 사상捨象된 보편주의적 이론은 현실에 어둡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卽殆’는 특수한 경험적 지식을 보편화는 것은 위험하다는 뜻이 됩니다. 학교 연구실에서 학문에만 몰두하는 교수가 현실에 어두운 것이 사실입니다. 반대로 자기 경험을 유일한 잣대로 삼거나 보편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일을 처리하면 위험한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자신의 경험에서 이론을 이끌어내는 사람들, 즉 대부분의 현장 활동가들은 대단히 완고합니다. 자기 경험만을 고집합니다. 생산직 기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인匠人 적인 자존심으로 자기 방식을 고집합니다. 경험적 지식은 매우 완고합니다. 따라서 경험주의를 주관주의라고 합니다.

[187p] 세상 사람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당신이 먼저 말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98p]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도 이러합니다. 속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그저 거죽만을 스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표면만을 상대하면서 살아가지요.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이라고 표현합니다. 짧은 만남 그리고 한 점에서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만남입니다. 부딪침입니다.


[200p]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知, 호好, 낙樂의 차이를 규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 각각을 하나의 통합적 체계 속에서 깨닫는 일이 중요합니다. 지를 대상에 대한 인식이라고 한다면 호는 대상과 주체 간의 관계에 관한 이해입니다. 그에 비하여 낙은 대상과 주체가 혼연히 일체화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가 분석적인 것이라면 호는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낙은 주체와 대상이 원융圓融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낙은 어떤 판단 형식이라기보다는 질서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체와 대상, 전체와 부분이 혼연한 일체를 이룬 어떤 질서와 장場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는 역지사지하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호는 대상을 타자라는 비대칭적 구조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와 호를 지양한 곳에 낙이 있다고 생각하지요.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고전 강독의 관점에서 이를 규정한다면 “낙은 관계의 최고 형태”인 셈입니다. 그 낙의 경지에 이르러 비로소 어떤 터득이 가능한 것이지요.
세계 인식이 정보 형태의 파편적 분석지分析知에 머물거나 이데올로기적 가치판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낙의 경지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지요.
지에서 호로, 호에서 낙으로, 세계와의 관계를 높여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맹자의 의義

[232p] 궁술弓術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 글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활 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두 발을 딛는 자세와 어깨와 팔의 각도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흉허복실凶虛腹實이라 하여 가슴은 비우고 배는 든든히 힘을 채워야 하는 것이지요. 더 중요한 것은 활을 쏘는 동작 전체에 일관된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더 중요한 것은 활을 쏘는 동작 전체에 일관된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동작과 동작 사이에는 순서와 절차가 있으며 그 하나하나의 동작이 끊어지지 않고 서로 휴지休止 없이 정靜과 동動으로 유연하게 연결되어야 합니다. 전체적으로 종횡십자縱橫十字를 이루면서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궁도弓道에서 이러한 것들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것은 궁도란 것이 살을 과녁에 적중시키는 단순한 궁술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그 과정과 자세의 정진正眞 여부가 중中, 부중不中을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중했을 경우 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 찾는 반구제기反求諸己의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삶의 자세와 철학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42p] 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절망적인 것이 바로 인간관계의 황페화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라는 것은 그 뼈대가 인간관계입니다. 그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가 바로 사회의 본질이지요.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恥)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입니다. 지속적 관계가 전제될 때 비로소 서로 양보하게 되고 스스로 삼가게 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남에게 모질게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가치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243p] 맹자가 말하기를, 공자께서 동산에 오르시어 노魯나라가 작다고 하시고 태산太山에 오르시어 천하가 작다고 하셨다. 바다를 본적이 있는 사람은 물(水)을 말하기 어려워하고, 성인聖人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은 언言에 대하여 말하기 어려워하는 법이다. 물을 관찰할 때는 반드시 그 물결을 바라보아야 한다. (깊은 물은 높은 물결을, 얕은 물은 낮은 물결을 일으키는 법이다). 일월日月의 밝은 빛은 작은 틈새도 남김없이 비추는 법이며,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군자는 도에 뜻을 둔 이상 경지에 이르지 않는 한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249p]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로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는 노래가 있다. 공자께서 이 노래를 들으시고 “자네들 저 노래를 들어보게. 물이 맑을 때는 갓끈을 씻지만 물이 흐리면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다. 물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이와마찬가지로) 사람도 모름지기 스스로를 모욕한 후에 남이 자기를 모욕하는 법이며, 한 집안의 경우도 반드시 스스로를 파멸한 연후에 남들이 파멸시키는 법이며, 한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를 짓밟은 연후에 다른 나라가 짓밟는 것이다. 『서경』「태갑」편 太甲篇에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 길이 없구나.”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노자의 도와 자연

[256p] 자본주의 역사는 자본 축척의 역사이고 자본 축적은 모순의 누적 과정입니다. 현대 자본주의는 이 누적된 모순으로 말미암아 축적 과정 그 자체의 작동이 불가능하게 되는 전반적 위기의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과 위기는 패권 국가들의 집단적 담합과 폭력적 개입에 의하여 그것이 억제된 상태일 뿐입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물리적 억압과 간섭이 그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문화와 의식구조에 있어서 엄청난 허구와 비인간적 논리가 구촉됩니다. 이러한 허위의식은 믈리적 강제를 은폐하고 유화宥和하기 위한 것임은 물론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있어서 현대 자본주의는 그 어떤 체제보다도 강력한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습니다. 고도의 대중 조작 체계를 장악하고 이성의 포섭뿐만 아니라 감성의 포섭까지 완성해놓고 있습니다. 엄청난 건축을 완성해두고 있는 것이지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해체주의로서의 노자가 생환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노자의 언어와 담론이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 구조를 조명해내고 자본주의 문화와 허구와 총제적 낭비 체제를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 때 비로소 노자가 생환될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

[263p] 도道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무無는 천지의 시작을 일컫는 것이고, 유有는 만물의 어미를 일컫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로서는 항상 그 신묘함을 보아야 하고, 유로서는 그 드러난 것을 보아야 한다. 이 둘은 하나에서 나왔으되 이름이 다르다. 다 같이 현玄이라고 부르니 현묘하고 현묘하여 모든 신묘함의 문이 된다.

[270p] 『노자』의 제 1장은 무 無와 유 有가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관계론 關係論의 선언입니다. 무와 유는 그것에 접근하는 접근로에 따라서 구본될 수 있는 개념상의 차이일 뿐입니다. 따라서 노자의 무 無는 ‘제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을 초월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무입니다. 우리의 인식에서 있어서 무라는 것이지요. 도는 천지 만물의 생성과 변화 그 자체를 의미하며 그런 의미에서 근원적 법칙성입니다. 인간의 인식이 그것을 담아낼 수 없지요. 도리어 인간의 인식이 그것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노자의 철학적 체계입니다. 도가 작용하여 만물이 생성 변화 발전하는 것 그것이 유有입니다. 형이상학적 體는 무이지만 형이학적 용 用은 유 有라는 것이지요. ‘道母水有’가 바로 그것입니다. 도는 없고 물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무형인 도체 道體가 유형인 도용 道用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자 철학을 물의 철학이라고 하는 까닭을 보이는 것 중에서 도에 가장 가까운 것이 물이기 때문에 물의 비유로써 도를 설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결론적으로 무의 세계든 유의 세계든 그것은 같은 것이며, 현묘한 세계입니다. 유의 세계가 가시적이기 때문에 현묘하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무의 작용이며, 현상 형태이며, 그것의 통일체이기 때문에 현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아이는 단순할지 모르지만 그 어머니 때문에 복잡한 경우와 같은 것이지요.

[278P] 현명함을 숭상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해야 하고,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이 도적질하지 않게 해야 하며, 욕망을 자극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인의 정치는 그 마음을 비우게 하고 그 배를 채우게 하며, 그 뜻을 약하게 하고 그 뼈를 튼튼하게 해야 한다. 언제나 백성들로 하여금 무지무욕 無知無慾하게 하고,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무엇을 벌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무위 無爲의 방식으로 정치를 하면 혼란이 있을 리 없다.

[281p] 지식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지식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접속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는 그것이 지식 상품의 CF라고 생각합니다. 지식도 상품입니다. 상품으로 생산되고 상품으로 유통됩니다. 상품의 운동 원리를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비가 미덕이 되고 부단히 새로운 상품이 생산됩니다. 그리고 대량 생산, 대량 소비의 형태로 진행됩니다. 상품 이외의 소통 방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상품 형태를 취하지 않은 것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시장이 허용하지 않는 것은 설자리가 없는 것이지요. 모든 것이 상품화된 거대한 시장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언어도 상품이 됩니다. 지식의 도구인 언어 그 자체가장 이윤 폭이 큰 첨단 상품이 되고 있습니다. ‘지식을 위한 지식’도 생산되고 유통됩니다. 도무지 무욕無慾 할 수 없고 무지無知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구조와 현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 『노자』의 현대적 재조명이라고 생각하지요.

[282p] 노자 정치학의 압권이 바로 ‘생선 굽는’ 이야기입니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작은 생선 굽듯이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생선을 구울 때 생선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집다가 부스러뜨리는 것이 우리들의 고질입니다. 생선의 비유는 일상 생활의 비근한 예를 들어서 친근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모습이나 소위 국가와 사회를 경영하는 방식을 반성할 수 있는 정문일침頂門一鍼의 화두가 아닐 수 없습니다.

[285p] 물은 결코 다투는 법이 없습니다. 산이 가로막으면 멀리 돌아서 갑니다. 바위를 만나면 몸을 나누어 비켜 갑니다. 곡류曲流 하기도 하고 할수割水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가파른 계곡을 만나 숨 가쁘게 달리기도 하고 아스라한 절벽을 만나면 용사처럼 뛰어내리기도 합니다. 깊은 분지를 만나면 그 큰 공간을 차곡차곡 남김없이 채운 다음 뒷물을 기다려 비로소 나아갑니다. 너른 평지를 만나면 거울 같은 수평을 이루어 유유히 하늘을 담고 구름을 보내기도 합니다.


[296p] 정치가는 진심으로 백성들을 신뢰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정치적 목표는 백성들이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그러한 지혜와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지요. 백성들의 생각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집단적인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 도달한 결론입니다. 충분히 임상학적 과정을 거친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결론인 셈이지요.

장자의 소요

[313p] “내가 듣기로 초나라에는 신령스런 거북이 있는데 죽은 지 이미 3천년이나 되었다 합니다. 임금은 그것을 비단으로 싸고 상자에 넣어 묘당에 보관한다 합니다.
당신이 그 거북의 입장이라면, 죽어서 뼈만 남기어 존귀하게 되고 싶겠소, 아니면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고 싶겠소?”

[321p] “사물은 어느 것이나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동시에 이것 아닌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대적 관점에서 서면 보지 못하고 주관적 관점에서만 본다. 그래서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은 저것으로부터 말미암는다고 하여 이것을 ‘저것과 이것의 모순 이론’이라고 하는 것이다. 생生과 사死, 사와 생 그리고 가 可와 불가不可, 불가와 가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 조건이 되는) 모순 관계에 있다. 가가 있기에 불가가 있고 불가가 있기에 가가 있는 법이다. 그러기에 성인은 특정한 입장에 서지 않고 하늘에 비추어 본다고 하는 것도 역시 이 때문이다.”


[324p] 포정이 칼을 놓고 대답했다.
“제가 귀하게 여기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도道 입니다. 기술을 넘어선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3년이 지나자 소의 전체 모습은 눈에 뛰지 않게 되었지요. 지금은 마음으로 소를 대할 뿐 눈으로 보는 법은 없습니다. 감각은 멈추고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입니다. 천리天理에 의지하여 큰 틈새에 칼을 찔러 놓고 빈 결을 따라 칼을 움직입니다. 소의 몸 구조를 그대로 따라갈 뿐입니다. 아직 한 번도 인대를 벤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야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훌륭한 포정은 1년에 한 번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살을 베기 때문이며 보통의 포정은 한 달에 한 번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뼈에 칼이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의 칼은 19년 동안 사용하였고 잡은 소가 수천 마리에 이릅니다만 칼날이 날카롭기가 방금 숫돌에 간 것 같습니다. 저 뼈에는 틈이 있고 이 칼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으로 틈이 있는 데다 넣으므로 넓고 넓어 칼날을 휘둘러도 반드시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19년이나 사용했지만 방금 숫돌에 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뼈와 심줄이 엉긴 곳에 이르러서는 저도 조심하여 눈길을 멈추고 천천히 움직이며 칼 놀리는 것도 매우 미묘해집니다. 그러다가 쩍 갈라지면서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듯 고기가 와르르 헤집니다.”

[328p] 사실은 머리보다는 가슴이 먼저 알고 있습니다. 교실과 책과 시험으로 채워진 학교 시절을 끝내고, 싱싱한 삶의 실체들과 부딪히며 살아가기 시작하면 이 말이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으리라고 생가합니다.

[346p] 모든 물物, 즉 사물은 운동합니다. 정지도 운동의 한 형태입니다. 모든 사물은 변화 발전하는 동태적 형식으로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물은 원인이며 동시에 결과입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지요. 직접적 원인을 인因이라 하고 간접적 원인을 연緣이라 한다면, 즉 친인소연親因疎緣이라 한다면 모든 사물은 시간과 공간을 매개로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지요. 불교의 연기설緣起說이 모든 존재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해체적 체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존재를 꽃으로 보는 화엄華嚴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357p] 고기는 이를 테면 하나의 현상입니다. 고기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그물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망라하고 있는 천망天網인 것이지요. 고기는 잊어버리든 잃어버리든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물입니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건과, 모든 사태가 그 위에서 생성 변화 발전하는 거대한 관계망을 잊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지요. 한 마리의 제비를 보고 천하의 봄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관계망이지요. 중요한 것은 한 마리의 제비가 아니라 천하의 봄이지요. 남는 것은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동료들의 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는 것은 그물입니다. 그리고 그물에 관한 생각이 철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373p]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혼란의 원인을 알아야 다스릴 수 있으며 그 원인을 알지 못하면 다스릴 수가 없다. 비유하자면 병의 원인을 알지 못하면 고칠 수 없는 것과 같다. 사회의 혼란을 다스리는 것 역시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사회의 혼란은 모두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378p] 지금 여기 한 사람이 남의 과수원에 들어가 복숭아를 훔쳤다고 하자. 사람들은 그를 비난할 것이고 위정자는 그를 잡아 벌할 것이다.
왜? 남을 해치고 자기를 이롭게 했기 때문이다. 남의 개, 돼지, 닭을 훔친 사람은 그 불의함이 복숭아를 훔친 사람보다 더 심하기 때문이다. 남을 더욱 많이 해치면 그 불인不仁도 그만큼 심하게 되고 죄도 더 무거워지는 것이다. 남의 마구간에 들어가 말이나 소를 훔친 자는 그 불의함이 개, 돼지나 닭을 훔친 자보다 더욱 심하자. 남을 해친 정도가 더욱 심하기 때문이다. 남을 해치는 정도가 크면 클수록 불인도 그만큼 심하게 되고 죄도 무거워지는 것이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옷을 뺏거나 창이나 칼을 뺏는 자는 그 불의함이 말이나 소를 훔친 자보다 더 심하다. 이러한 것에 천하의 군자들이 모두 그것의 옳지 못함을 알고 그것을 비난하고 그것을 불의라고 부른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복숭아를 훔치는 것보다 죄가 더 무겁다. (그래서) 한 사람을 죽이면 그것을 불의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크게 나라를 공격하면 그 그릇됨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칭송하면서 의로움이라고 한다. 이러고서도 의와 불의의 분별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388p] 묵자가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탄식하여 말했다. 파란 물감에 물들이면 파랗게 되고 노란 물감에 물들이면 노랗게 된다. 넣는 물감이 변하면 그 색도 변한다. 다섯 가지 물감을 넣으면 다섯 가지 색깔이 된다. 그러므로 물드는 것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단 실만 물드는 것이 아니라 나라도 물드는 것이다.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406p] 하늘에는 변함없는 자연의 법칙이 있다. 요순 같은 성군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걸주와 같은 폭군 때문에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바르게 응하면 이롭고 어지럽게 응하면 흉할 뿐이다.농사를 부지런히 하고 아껴 쓰면 하늘이 가난하게 할 수 없고, 기르고 비축하고 때맞추어 움직이면 하늘이 병들게 할 수 없으며, 도를 닦고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으면 하늘이 재앙을 내릴 수 없는 것이다.

[413p]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다. 선이란 인위적인 것이다. 사람의 본성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추구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쟁탈이 생기고 사양하는 마음이 사라진다. 사람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질투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있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남을 해치게 되고 성실과 신의가 없어진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감각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음란하게 되고 예의와 규범이 없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본성을 따르고 감정에 맡겨버리면 반드시 싸우고 다투게 되어 규범이 무너지고 사회의 질서가 무너져서 드디어 천하가 혼란에 빠지게 된다.

[415p] 우리가 본성을 선악 판단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얼마나 저급한 논의인가를 반성하자는 것이지요.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담론 환경에서 가장 빈번하게 만나는 것이 바로 인간 본성 문제입니다.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는 것이지요. 시장 원리를 뒷받침하고 사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제도가 바로 ‘역사의 종말’이라는 주장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종말’이라는 어감에 다소 문제가 있습니다만 종말은 최고라는 의미입니다. 자본주의를 자유민주주의 등식화하고, 그것이 인류가 도달하였고 앞으로 도달할 수 있는 사회 제도의 최고 형태라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담론은 이기심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개인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대단히 철학적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인간 본성을 이기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동구 사회주의의 붕괴라는 환경에 편승하여 재빠르게 신자유주의를 합리화하는 논리를 구성하는 것이지요.


[422p] 나는 말한다. 학문이란 중지할 수 없는 것이다. 푸른색은 쪽에서 뽑은 것이지만 쪽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이 얼어서 된 것이지만 물보다 더 차다. 먹줄을 받아 곧은 나무는 그것을 구부려서 둥근 바퀴로 만들면 컴퍼스로 그린 듯 둥글다. 비록 땡볕에 말리더라도 다시 펴지지 않는 까닭은 단단히 구부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무는 먹줄을 받으면 곧게 되고 쇠는 숫돌에 갈면 날카로워지는 것이다. 군자는 널리 배우고 날마다 거듭 스스로를 반성하면 슬기는 밝아지고 행실은 허물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높은 산에 올라가지 않으면 하늘이 높은 줄 알지 못하고 깊은 골짜기에 가보지 않으면 땅이 두꺼운 줄 알지 못하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선비는 선왕의 가르침을 공부하지 않으면 학문의 위대함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법가와 천하통일

[432p] 송나라 사람이 밭을 갈고 있었다. 밭 가운데 그루터기가 있었는데 토끼가 달리다가 그루터기에 부딪혀 목이 부러져 죽었다. 그 후로 그는 쟁기를 버리고 그루터기만 지키면서 다시 토끼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랐지만 토끼는 다시 얻지 못하고 송나라 사람들의 웃음거리만 되었다. 지금 선왕先王의 정치로 오늘의 백성들을 다스리고자 하는 것은 모두가 그루터기를 지키고 있는 부류와 같다.

[434p] 유가나 묵가는,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백성은 임금을 부모와 같이 여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법관이 형벌을 집행하면 음악을 멈추고, 사형 집행 보고를 받고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 선왕의 정치라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자식은 부모를 따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할 수는 없다. 눈물을 흘렸다면 그것은 임금이 자기의 인仁은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좋은 정치를 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해내海內의 모든 사람들이 공자의 인仁을 따르고 그 의義를 칭송했지만 제자로서 그를 따른 사람은 겨우 70명에 불과했다. 임금이 되기 위해서는 권세를 장악해야 하는 것인지 인의를 잡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금의 학자들은 인의를 행해야 임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임금이 공자같이 되기를 바라고 백성들이 그 제지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439p] 나는 법가의 법치法治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공개 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법치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막연한 생각을 분명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의 법치란 무엇보다 권력의 자의성恣意性을 제한하고 성문법에 근거하여 통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상앙이 강조한 행제야천行制也天입니다. 법제를 행함에 있어서 사사로움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점에서 본다면 법가의 차별성을 개혁성에만 찾는 것은 법가의 일면만을 부각시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 법의 공개성이야말로 법가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43p] 현재 우리 사회에는 범죄와 불법 행위라는 두 개의 범죄관이 있습니다. 절도, 강도 등은 범죄 행위로 규정되고, 선거사범 경제사범, 조세사범 등 상류층의 범죄는 불법 행위로 규정됩니다. 전혀 다른 두 개의 범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소위 범죄와 불법 행위는 그것을 처리하는 방식이나 그것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각도 전혀 다릅니다. 범죄 행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매우 가혹한 것임에 반하여,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더없이 관대합니다.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그 사람과 그 인간 전체를 범죄시하여 범죄인으로 단죄하는 데 반하여,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그 사람과 그 행위를 분리하여 불법적인 행위에 대해서만 불법성을 인정하는 정도입니다.


[446p] 임금이 신하를 제어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의 수단(자루)이 있을 뿐이다. 두 가지 수단이란 형形과 덕德이다. 형과 덕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형이라 하고, 상을 주는 것을 덕이라 한다. 신하 된 자는 형벌을 두려워하고 상 받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임금이 직접 형과 덕을 행사하게 되면 뭇 신하들은 그 위세를 두려워하고 그 이로움에 귀의한다.
그런데 세상의 간신들은 그렇지 아니하다. 자기가 미워하는 자에게는 임금의 마음을 얻어서 즉 임금을 움직여서 죄를 덮어씌우고, 자기가 좋아하는 자에게는 역시 임금의 마음을 얻어서 상을 준다. 상벌이 임금으로부터 나가지 않고 신하로부터 나가면 임금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하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신하를 따르고 임금을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임금이 형덕을 잃은 환란이 그와 같다. 호랑이가 개를 굴복시킬 수 있는 것은 발톱과 이빨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발톱과 이빨을 개에게 내어주어 그것을 쓰게 한다면 호랑이는 반대로 개에게 굴복당할 것이다.

[449p] 나라는 작은데 대부의 영지는 크고, 임금의 권세는 가벼운데 신하의 세도가 심하면 나라는 망한다. 법령을 완비하지 않고 지모와 꾀로서 일을 처리하거나, 나라를 황폐한 채로 버려두고 동맹국의 도움만 믿고 있으면 망한다. 신하들이 공리공담을 좇고, 대부의 자제들이 변론을 일삼으며, 상인들이 그 재물을 다른 나라에 쌓아두고, 백성들이 곤궁하면 나라는 망한다. 궁전과 누각과 정원을 꾸미고, 수레 의복 가구들을 호사스럽게 하며, 백성들을 피폐하게 하고 재화를 낭비하면 나라는 망한다. 날짜를 받아 귀신을 섬기고, 점괘를 믿으며 제사를 좋아하면 나라는 망한다.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의 말만 따르고 많은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으며 한 사람만을 요직에 앉히면 나라는 망한다.

[450p] 문제는 세계화 논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실물적 관점이 없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에 투자된 외국 자본은 우리 자본이라는 논리가 그 전형입니다. 그러한 논리라면 해외에 투자된 자본은 우리 자본이 아닌 것이지요.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것이 옳지요. 우리 자본이든 외국 자본이든 자본은 결국 우리 편이 아닌 것이지요. 실물적 관점이 중요하다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대부분의 제조업은 해외로 이전되고 제조업의 국내 기반은 공동화될 것입니다. 국제 금융자본이 국내로 유입된다고 하더라도 이 국제 금융자본이 투기 목적의 단기자본이라면 그것은 한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점에서 한국 자본주의는 산업자본과 금융자본 모두 토대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재물을 다른 나라에 쌓는 일은 2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경제적 의미가 다른 것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453p] 서적을 쌓아놓고 변론을 일삼으며 제자를 모아놓고 학문을 닦고 논설을 펴면, 임금은 반드시 이들을 예우하여 말하기를, 어진 선비를 존경하는 것은 선왕의 도라고 한다. 무릇 관리가 세금을 거두는 것은 농민들로부터이고, 임금이 세금으로 기르는 것은 학사學士들이다. 농민은 무거운 세금을 내고 학사는 많은 상을 받는다. (이렇게 하고서도) 백성들로 하여금 열심히 일하고 언담言談을 삼가라고 요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의리義理를 내세워 도당을 모으고 지조를 내세워 조금도 침해받지 않으려 하며 듣기 싫은 말이 귓전을 스치면 반드시 칼을 들고 따라가 해치는 무리들에 대하여, 임금은 반드시 이들을 예우하여 말하기를 명예를 중히 여기는 선비라고 한다. 무릇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적의 머리를 벤 병사는 상을 받지 못하고 사사로운 싸움을 한 자는 대접받늗다. 이렇게 하고서도 백성들로 하여금 목숨을 바쳐 전쟁터에서 적을 막고, 사사로운 싸움을 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455p] 자어가 상商나라 재상에게 공자를 소개했다. 공자가 재상을 만나고 나오자 자어가 들어가서 재상에게 공자를 만나본 소감을 물었다. 재상이 말하기를 “내가 공자를 보고 나니 자네가 마치 벼룩이나 이처럼 하찮게 보이네그려. 나는 공자를 임금께 소개해드리려고 하네.” 자어는 공자가 임금에게 귀하게 여겨질까 두려워서 재상에게 말했다. “임금께서 공자를 보시고 나면 장차 임금께서 재상님을 벼룩이나 이처럼 여길 것입니다.” 그러자 재상은 다시는 공자를 임금께 소개하지 않았다.


강의를 마치며

[504p] 모든 사회적 변화는 사상 투쟁에 의하여 시작되는 것이며 사회적 변화는 사상 체계의 완성으로 일단락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연속과 단절, 계승과 비판이라는 중층적 과정을 경과하는 것이 사상사의 가장 보편적인 형식이지만 이처럼 복잡한 전개 과정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주체적 입장과 실천적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경우의 새로움이란 단지 이론에 있어서의 새로움이 아니라 입장과 자세에 있어서의 ‘새로움’이라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창신創新의 자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모든 지적 관심은 우리의 현실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실천적 과제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경우 특히 주의를 요하는 것은 이러한 창신의 실천적 과정이 보다 유연하게 설정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창신이 어려운 까닭은 그 창신의 실천 현장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은 우리의 선택 이전에 주어진 것이며 충분히 낡은 것입니다. 현실은 과거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지요. 과거가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현실을 창신의 터전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이 유연한 대응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과거란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과거는 흘러가고 미래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는 다 같이 그 자리에서 피고 지는 꽃일 따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한 그루 느티나무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서서 과거, 현재, 미래를 고스란히 맞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역사의 모든 실천은 무인지경無人之境에서 새집을 짓는 것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창신은 결과적으로 온고창신溫故創新이라는 보다 현실적인 곡선의 형태로 수정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교조와 우상을 과감히 타파하는 동시에 현실과 전통을 발견하고 계승하는 부단한 자기 성찰의 자세와 상생의 정서를 요구하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 입니다.




[509p] 시와 산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몇 가지 부언해둡니다.
첫째,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사상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감성적 정서에 담겨야 하고 인격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성과 인격은 이를 테면 사상의 최고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상은 그 형식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의 육화肉化된 사상이 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경우에도 그 사회의 문화적 수준은 법제적 정비 수준에 의하여 판단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회 성원들의 일상적 생활 속에서 매일매일 실현되는 삶의 형태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가합니다.
둘째,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단지 주장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의 사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말이나 글로써 주장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사상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자기의 사상이 아닌 것도 얼마든지 주장하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삶 속에서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된 것은 검증된 것 이기도 합니다. 그 담론의 구조가 아무리 논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인격으로서 육화된 것이 아니면 사상이라고 명명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책임이 따르는 실천의 형태가 사상의 현실적 존재 형태라고 하는 것이지요. 사상은 지붕 위에서 던지는 종이 비행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상의 최고 형태는 감성의 형태로 ‘가슴’에 갈무리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성은 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일차적이고 즉각적인 대응이며 그런 점에서 사고思考 이전의 가장 정직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성적 대응은 사명감이나 정의감 같은 이성적 대응과는 달리,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마음의 움직입니다.

3.내가 저자 라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통해 신영복 선생님의 책을 접했다. 당시 이 책을 읽고 적지 않은 충격을 갖게 됐다. 무죄가 명백한데 20년을 수감 생활을 해야 한다면,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신영복 선생님의 글에는 그러한 분노가 없다. 난 이 점이 매우 놀라웠다. 선생님 특유의 단아한 문체는 나 자신을 되돌아 보게 한다.
「강의」를 처음 읽었을 때는 어려워서 읽기 힘들었다. 지금 정리하려고 다시 읽고 있는데, 매 구절이 가슴을 친다. 책을 통해 내 자신을 점검해 본다. 협소한 인식의 틀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 인식의 틀을 적자면, 자유의지론, 원인론(인과론), 조건론, 숙명론, 환경론 정도 될 것이다. 그 인식의 틀은 '나'를 넘지 못한다. 에고(ego)를 넘지 못하는 극히 자기 중심적 세계관이다. 결론을 내리면 이분적 사고思考를 넘지 못한다. 아니면 복합적 시각이 좀 더 낫다면 나을까. 획일적 사고를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내가 인식하는 세계는 주관적 현실이다. 경험주의 한계는 내가 보는 대로 존재 할 뿐이다. 이 점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
많은 책을 읽고, 공부를 계속해서 학위를 높이면 넘어 설 수 있을까?
실천을 통해 현실에 실현하면 넘어 설 수 있을까?
어쩌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이 지독한 관념일지 모른다. 인간이 존재는 그 자체가 한계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존재로서 한 인간을 볼 것이 아니라 관계의 장(범주)으로써 인식해야 객관적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사람은 그 자신의 존재가 아니라 관계의 형성에 근거해 자리매김 지어진다. 그러나 현대의 존재론적 질서는 극한 경쟁 체제를 만든다. 경쟁을 부정하지 않는다. 경쟁은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보장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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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2008.06.24 08:30:07 *.67.52.200
반면에 획일화를 가속시킨다. 우리나라의 입시 구조가 그러하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조화와 균형의 관점에서 해결해야 한다. 경쟁의 가속화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심리적 낭패감(실패감)을 야기시킨다. 개인의 존재 양식의 발현이 개개인의 극한 경쟁으로 변질되면 이것의 해결은 관계론적 관점에서 고쳐야 한다. 존재 양식의 확장이 아닌 문화, 사회적 인식의 변화, 제도적 뒷받침으로 수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홀로 존재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가 있는 것은 “너”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존재의 확장은 “너”라는 존재의 축소와 소멸을 가져 올 수 있다. 결국에는 “나”도 존재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혹은 “나”와 “너”라는 투쟁과 대립을 발생시킬 소지가 충분히 있다. 어느 한 존재의 증식은 다른 존재의 축소를 가져온다면, 투쟁은 피할 수 없는 귀결이다.
이런 점에서 관계론은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완화 시킬 수 있는 해결책이 될 수 있다. 과학의 발전이든, 사회의 발전이든, 문화의 발전이든 그 원류는 철학과 종교이다. 한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수 있는 근본적 관점은 사회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인식의 틀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 한국인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고도 경쟁 사회에서 살고 있다. 우리 한국인은 각개 약진(각개 전투)의 삶을 살고 있다. 개인의 문제는 개인과 가족 단위에서만 해결 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해결책밖에 안된다. 그러한들 존재의 증식 밖에 안된다. 미봉책에 불과하다. 고로, 관계론적 철학은 매우 유용하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수요와 공급의 관계에서 보면 어느 것이 먼저 일지 궁금해진다. 수요가 있어 공급이 있을까, 공급이 있어 수요가 만들어 질까. 아니면 인간의 욕망이 수요와 공급을 만들까. 자본주의는 말 그대로 자본이 근본이 되는 주의이다. 그런데 난 이 말이 정말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자본의 시각으로 봐야 하는 것은 끔찍하다.
인간의 감각기관은 정보의 바다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이제는 찾는 능력 보다는 선별해서 받아들이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 쏟아지는 수 많은 상품(재화)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한다. 인간은 그러한 가치를 자신의 가치라 착각할 수 있다.
욕망을 자극하고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며 그것들과 자신을 동일시 한다. 이러한 상품과 서비스의 발전은 다시 욕망을 자극하고 재구매하게 만든다. 관계론적 관점에서 봐도 이 사이클은 어느 한 고리가 끊어져야 멈출 수 있다. 아니면 자신이 세상을 통찰할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어느 정도 자유로워 질 수 있을 뿐이다. 소비가 아닌 근검 절약이 미덕이 되는 사회, 한 사람의 구매력(경제력)으로 평가 받지 않는 사회는 지나친 이상일까? 모든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노동을 제공해 경제력을 획득하고 그 경제력으로 다시 소비하고 이러한 삶의 방식을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면 이것은 가혹한 형벌이다. 현대 사회를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동일한 행위를 반복한다면 교도소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현대 사회는 표면적으로 매우 다양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매우 획일화 되어 가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느 누구도 우민화 정책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정한 방향으로 흘러 가고 있다. 문제는 주체가 없는 데 주체가 형성되어 힘을 발휘하는 자본주의의 무서운 힘이다. 어느 누구도 이것을 거스를 수 없을 것 같다. 자본주의 막강한 추진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새삼 공자님이 그리워 지는 것은 왜일까? 공자는 왜 그렇게 세상을 주유했을까?
「강의」를 읽으며 공자님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같다면 내가 지나친 것일까?
공자는 어느 나라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맹자는 노년에 쓸쓸하게 살았다. 부처님 조차 인연 되지 않는 중생은 자신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하셨다. 나이가 들면서 인식하는 불합리함과 얼굴 없는 폭력 앞에서 아무런 저항 할 수 없고 그저 어떻게든 직업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내가 싫기도 하면서 가련하다. 사회적 기준에 맞추지 못해 어떻게든 사회적 조건을 갖추려는 내가 싫으면서 그 한계성을 뼈저리게 느끼는 내가 밉다. 한 인간이 한 사회의 영향력 앞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것을 보며 나의 덧없음을 뼈저리게 자각한다.
관념(인식)의 한계는 그것이 사유 자체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철학과 종교적 가르침 또한 현실은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나의 철학과 종교적 신념을 실천한다면 그것은 현실적(실천적)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삶은 그러므로 모순이다.
모순이어서 고통스럽다. 끌어안고는 가지만 때로는 놓아 버리고 싶다. 그저 흐르는 대로 살고 싶다. 그러나 나의 기질적 특성이 이러한 삶을 거부한다. 그래서 힘들다.
이제는 무엇이 현실인지, 아니 내가 정말 현실을 올바로 보고 있는지 조차 모르겠다.
철학적 사유와 종교적 신념은 답이 없는 문제를 푸는 것과 같다. 오로지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지혜를 갖기 희망 한다.
이 시대에 신영복 선생님이 계시는 것이 우리에겐 희망이다. 개인적인 삶은 너무나 가혹하게 사셨지만, 그 학문과 가르침으로 한번쯤은 이 시대를 다시 보게 하는 가르침을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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