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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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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30일 09시 55분 등록
오쇼 라즈니쉬 자서전 [길은 내안에 있다]
오쇼 라즈니쉬 지음, 김현국 옮김, 태일출판사

I. 저자에 대하여

오쇼 라즈니쉬에 대해 나는 배꼽이란 책의 저자라는 것만 알았었다. 인도 출신의 철학자이며 명상가인 그에 대해 더 이상 아는바가 없었다. 그러던 중 그의 자서전을 읽어보면서 그가 대단히 논리적이라는 것을 느꼈다. 또한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상황을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는 것을 심심찮게 확인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때로는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당연시 해왔던 것들도 많았다. 이런 행동은 그를 더욱더 유명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행동의 대상은 대부분 소위 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강압에 못이겨 때로는 사회의 관념 때문에 일상화 된 불합리를 그는 두고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바꿔놓는 일을 많이 했다. 이런 상황은 많은 대중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는 그것을 명상으로 대중과 소통했다. 세계적으로 명상을 보급하는데 그가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우리나라에서 오쇼 라즈니쉬에 대해서는 류시화 시인이 많이 알렸다. 류시화 시인이 번역한 오쇼의 책 서문의 내용를 보면 그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는 우리가 그토록 자랑하여 마지 않는 철학자나 문학가가 아니었다. 외부적인 삶의 변혁을 선동하는 혁명가도 아니었다. 그는 내면으로부터의 혁명을 이야기하고 있었으며, 아울러 인간 역사 속에서 내면의 혁명을 성취했던 동서양의 여러 각자(覺者)들의 가르침을 그 신비의 영역에서 끌어내어 세상의 언어로 쉽고도 아름답게 풀이해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저 고타마 붓다가, 노자(老子)와 장자(壯者)가 예수가, 또 고대의 신비서들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가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기존의 종교의 낡아빠진 설교나 설법에 그야말로 일대 충격이고 도전이었다.

아울러 나와 나의 친구들은 그의 가르침을 통해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우리의 존재가 향해 가야 할 지점이 어디인가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러는 그를 만나기 위해 인도로 떠났다. 더러는 영적인 추구에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그를 알고 난 이후부터 우리의 삶은 결코 이전의 삶과 같아질 수 없었다. 그의 책을 한 권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아 버렸던 것이다. 어떤 것이 거짓임을 알고 나면 당분간은 그것을 참고 지낼 수 있어도 오래 가지 않아 그것은 저절로 시들어 떨어지는 법이다. 낡은 꽃잎이 비에 떨어지듯 그렇게......“

오쇼에 대한 자료를 찾던 중 그가 노자(老子)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낄수 있는 글을 만났다. 그 글도 소개하고 싶다.

“내가 노자(老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나는 노자에게 연결되어있지 않다. 왜냐하면, 연결되기 위해서는 어떤 거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노자를 사랑하고 잇지도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떻게 자기자신을 사랑할 수가 있겠는가?
노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마치 나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듯이 이야기 한다.
노자와 나의 실존은 완전히 하나이다. 노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것은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것과 같다. 나 자신의 얼굴이 비치고 있다. 노자에 대해서 이야기 할때 나는 완전히 그와 함께다.
‘완전히 함께다’라고 말하지만 그것조차도 사실이 아니다.
나는 노자이다. 노자는 나이다.

역사가들은 노자의 실존에 대해서 회의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노자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떻게 내가 나 자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 있겠는가? 내가 가능하게 된 그 순간 노자도 나에게 있어서 사실이 되었다.
만일 역사가 노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증명한다해도 나에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
내가 존재하는 이상 노자도 존재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내가 그 증거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노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누군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과 같다.
마치 노자가 하나의 다른 이름을 ‘나마루파(nama-rupa;이름과 모양)’를 다른 환생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위키 백과사전 발췌 내용 :
라즈니쉬 찬드라 모한 자인(1931년 12월 11일 ~ 1990년 1월 19일)
인도의 신비가, 구루 및 철학자이다. 1960년대 이후로 아차리아 라즈니쉬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으며,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자신을 브하그완 슈리 라즈니쉬라 불렀고, 1989년에 '오쇼'라는 이름을 새로 택하여 그 뒤로는 주로 오쇼 라즈니쉬로 불린다.

오쇼는 1960년대에 철학 교수로서 인도를 돌아다니며 대중을 상대로 강연했다. 그는 사회주의와 마하트마 간디 및 기성 종교에 반대하고 성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지지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1970년 오쇼는 제자를 받으며 정신 지도자로서의 삶을 시작했으며, 그 뒤로 세계의 종교적 경전이나 신비가 및 철학자들의 글을 재해석했다.



II.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편집자 서문
그는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신문기사 모음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진리가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또 그는 자신의 일대기는 자기가 행한 모든 작업들, 즉 수백 권에 달하는 강의집과 자신의 영향을 받아 변형된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드러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9p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가 누구냐’이다. 12p

오히려 그 글들은 ‘시간’ 뿐만 아니라 ‘무한’의 관점에서, ‘행위’ 뿐만 아니라 ‘존재’의 관점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길을 안내한다. 13p

서문
그대가 제일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사실(fact)과 진실(truth)의 차이이다. 14p

Part One 평번한 인간 : 전설 뒤의 숨은 역사
황금빛 어린시절의 일별들

그 마을에는 학교가 없었다. 그것은 무척 중요하다. 왜냐하면 나는 거의 9년 동안 교육받지 않은 채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기는 인격 형성에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그 이후에는, 설사 그대가 노력한다 할지라도 그대는 교육되어질 수 없다. 21p

rm 세 노인들은 모두 계속해서 서로 신호를 보내곤 했다. “방해하지 말아요. 이 아이는 지금 너무나 만족해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들은 나의 침묵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27p

따라서 7년 동안 내가 방해받지 않은 채 남아 있었던 것은 단지 우연이었다. 나를 성가시게 할 사람도, 거래와 술수와 책략이 판치는 세상에 대비하여 나를 준비시켜 줄 사람도 없었다. 나의 조부모들은, 특히 할머니는 나를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는데 더욱 관심이 있었다. 28p

그녀는 주장했다. “이 아이가 우리에게 영향 받지 않도록 해요. 우리가이 아이에게 무슨 영향을 끼칠 수 있겠어요? 기껏해야 우리처럼 만들 수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 아이에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해요.” 28p

명상은 마음을 넘어서 있는데 반해서 종교는 오직 마음뿐이다. 종교는 마음 안에 있다. 36p

만트라는 말한다. ‘나는 자신을 안 모든 사람들의 발밑에 절합니다.’ 내가 아는 한 이것은 절대적으로 비종파적인 유일한 만트라이다. 41p

"안다고요? 뭘 알지요? 앎의 대상이 무엇이죠?“ 앎의 대상은 없다. 알아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아는 자가 있을 뿐이다. 41p

사실 그땐 이런 사실들을 몰랐었지만, 어쨌든 나는 그 승려에게 말했다. “만약 다시 태어나기를 원치 않는다면 왜 살고 있지요? 단지 죽기 위해서? 그렇다면 왜 자살하지 않으세요?” 나는 그때까지 그에게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이 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살에 대한 질문은 모든 질문들 중에서도 가장 진정한 질문이다. 46p

할머니는 말했다. “그 사람은 저의 스승이 아니니까 저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게다가 당신이 타고난 말썽꾸러기라고 생각하는 그 아이는 씨앗이에요. 거기서 무엇이 나올지는 아무도 몰라요.” 53p

눈물을 글썽이며 할아버지가 말했다. “너에게 줄 것은 이것 밖에 없구나. 내가 가진 모든 것은, 그것이 나에게서 사라졌듯이 결국 너에게서도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안 사람에 대한 나의 사랑뿐이다.” 60p

믿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노래를 불렀다. 그때 나는 죽음이 축하되어져야 하는 것임을 배웠다. 그녀는 처음 할아버지와 사랑에 빠졌을 대 불렀던 그 노래를 불렀다. 61p

그녀는 말했다. “네 질문은 틀렸다. 사랑에 빠지는 데는 ‘왜’가 없다. 나는 그저 그를 보았고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그의 눈을 보았고 내 안에서 신뢰가 일어났다. 그리고그 신뢰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62p

그는 말했다. “나는 시인도 아니고 사상가도 아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여자를 알아볼 수는 있다.” 63p

반역적인 영혼

나의 관심은 언제나 똑같았다. 궁극의 진리가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인지, 그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대답을 발견하기 전에는 결코 휴식하지 않을 것이며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휴식을 허락하자 않을 것이라고 결심했다. 67-68p

오직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속에서만 죽음을 만날 수 있다. 68p

나는 웃었다. “잊으셨어요? 나나는 저에게 사랑을 주셨고 자유를 주셨어요. 어떤 아이도 나나가 저에게 준 것 같은 그런 자유를 누리지 못했을 거예요. 제게 더 이상 뭐가 필요하겠어요? 더 이상 뭘 주실 수 있겠어요? 저는 감사해요. 편안히 눈을 감으세요.” 70p

"저를 막으려는 것을 멈추신다면, 그때가 제가 그옷을 그만 입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계속 막으려 하시면 저는 끝까지 그 옷을 버리지 않아요.“ 84p

그리고 나는 주먹으로, 물론 작은 소년의 주먹으로 그의 책상을 쳤다. 그리고 말했다. “교육 따위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어요. 하지만 저의 자유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을수 없어요. 아무도 이유 없이 저를 괴롭힐 수 없어요. 저에게 교육법전을 보여주세요. 저는 읽을 수가 없으니까 모든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데도 창 밖을 내다보는 게 법에 어긋나는지 알려주세요.” 93p

그 다음에 나는 자치의회의 의장을 만나러 달려갔다. 그는 단지 소똥에 불과했다. 그는 내가 말했다. “나도 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너는 견뎌야 한다. 참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한 말을 정확히 기억한다. “저는 양심에 어긋나는 일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참지 않을 거예요.” 95p

인간은 명사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창조해냈고 스스로 만든 세상 속에 갇혀버렸다. 인간은 나무들의 세상을, 강들의 세상을, 산과 별의 세상을 잊었다. 나무나 강은 명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무나 강은 명사에 대해서는 들어 보지도 못했다. 그들은 오직 동사만을 안다. 모든 것은 과정이다. 신은 사물이 아니라 과정이다. 100p

나 역시도 그대가 들었던 것과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아주 어린시절부터 나는 결과가 어찌되었든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옳든 그르든 나는 나 자신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설사 내가 결국 지옥으로 가고 만다고 해도 적어도 나만의 삶의 길을 따랐다는 만족감만은 가지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충고와 이상, 수행을 따른다면 설사 내가 천국에 도달한다 해도 나는 그곳에서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나는 나의 의지에 반하는 것들을 강요당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105p

종교는 종교적인 특질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몇 가지 특질이 빠져 있다.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유머감각이다. 108p

"나는 사람들이 웃기를 바래요. 오래된 이야기를 매년 반복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러니 모든 사람들이 졸고 있지요. 모두 그 이야기를 알기 때문이에요. 그들은모든 대사를 다 알아요. 그것은 절대적으로 무의미한 일이에요.“
그러나 늙은 전통주의자들, 진부한 사람들로서는 웃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어렵다. 그대는 교회 안에서 웃을 수 없다. 112p

그들은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들은 모두 내게 물었다. “네가 철학을 공부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뭐냐?”
나는 말했다. “저는 일생 동안 철학자들과 싸울 것이기 때문이에요. 저는 그들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야 해요.” 125-126p

불멸을 찾아서

만약 내가 그대의 죽음만 볼 수 있다면 나는 그대의 모든 전기를 쓸 수 있다. 왜냐하면 그 한순간 속에 그대의 전 생애 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한순간 속에서 마치 섬광처럼 그대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 129p

먼저 시신과 함께 장례 행렬이 마을을 빠져나가고, 그리고 나서 화장용 장작더미 위에 그 시신을 올려놓고 태운다. 그리고 그대는 인도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알것이다. 그들은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 장작더미에는 불이 잘 붙지 않는다. 마지못해 간신히 불만 붙어 있을 뿐 시신은 타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온갖 노력을 다한다. 그들은 가능한 빨리 그곳을 떠나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은 사람들 또한 교활하다. 그들은 가능한 오래 사람들을 그들 곁에 붙잡아두려고 최대한 애쓴다. 133p

선생님이 죽을 때 선생님의 아내가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세요. 그녀가 누구와 놀아날까요? 무얼 할까요? 그것에 대해 무엇이든 준비해둔 게 있으세요? 그리고 그 어리석음을 보지 못하세요? 죽음이 눈앞에 있는데 선생님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것을 회피하려고 하고 있어요.“ 그러나 모든 종교들이 그렇게 해왔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단지 특정 종교들의 특정한 전통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뿐이었다. 136p

유치했지만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그의 죽음을 흉내냈다. 나는 3일 동안 먹지도 않았고, 마시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먹는 것은 하나의 배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일부였다. 그는 그와 함께, 그의 사랑과 함께 자라났다. 137p

만약 그대가 죽음을 받아들였다면 두려움은 없다. 만약 그대가 삶에 집착한다면 그때는 모든 두려움이 거기있다. 140p

물론 육체적으로 언젠가 죽을 것이다. 그러나 점성술가의 이 예언은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왜냐하면 그는 매우 일찍부터 내가 죽음을 자각하도록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명상할 수 있었고 나에게 다가오고 있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141p

깨달음 : 과거와의 단절

시간이 전혀 없었다. 단지 하룻밤뿐이었다. 그리고 법화경은 긴 경전이다. 그러나 제정신이 아닌 사람은 뭐든지 할 수 있다. 그들은 서둘러 돌아가서 최선을 다했다. 다음날 세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은 그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다. 143p

이제 그는 어리둥절해졌다. 어찌된 일인가? 그는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정원도 없었고, 집도 없었고, 여자의 부모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다시 보았다. 신발도 사라졌고, 강도 사라졌다. 거기 있는 모든 것은 공(空) 뿐이었다. 그리고 커다란 웃음뿐이었다. 그리고 그 역시 웃었다. 그는 결혼한 것이다. 145p

그대가 처음으로 무심(無心)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때, 그것은 광기처럼 보인다. 영혼의 어두운 밤, 영혼의 미친 밤처럼 보인다. 모든 종교들은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때문에 모든 종교들은 그대가 무심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전에 스승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 스승이 그대를 돕고 그대에게 힘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153p

시크교도들은 그들의 사원을 ‘구루드와라’, 즉 ‘스승의 문’ 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바로 정확하게스승이 의미하는 바이다. 스승은 문이다. 예수는 끊임없이 말한다. “나는 문이요, 길이요, 진리이니 나를 따르라. 나를 통해 지나가라. 그대가 나를 통하지 않고는 도달하지 못하리라.”
그렇다 때로는 어떤 사람이 스승 없이 작업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만약 스승이 가능하지 않다면 그때는 스승 없이 작업해야 한다. 그러나 그때 그 여행은 매우 위험하다. 155p

노력이 멈춘 그날, 나 또한 멈췄다. 노력 없이는 그대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욕망이 없이 그대는 존재할 수 없다. 애씀이 없이 그대는 존재할 수 없다. 에고나 자아라는 현상은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다. 그것은 그대 안에 있는 물질이 아니다. 그대는 매순간 그것을 창조해야 한다. 그것은 자전거의 폐달을 밟는 것과 같다. 폐달을 밟으면 자전거는 계속 달리지만 폐달을 밟지 않으면 멈춘다. 달리던 관성으로 조금 더 달릴 수도 있지만 폐달 밟기가 멈추는 순간, 사실 자전거는 멈추기 시작한다. 더 이상 에너지가 없다. 더 이상 달릴 수 있는 힘이 없다. 자전거는 넘어져버릴 것이다. 165p

그대는 욕망을 멈출 수 없다. 그대는 오직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바로 그 이해 속에서 욕망은 멎는다. 기억하라. 누구도 욕망을 멈출 수는 없으며 실재는 오직 욕망이 멎었을 때에만 드러난다는 것을....... 166p

깨달음의 길은 하늘을 나는 새와 같다고 한다. 그것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아무도 새의 발자국을 따를 수 없다. 모든 새는 스스로 자기 발자국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새가 계속 날아감에 따라 그 발자국은 즉시 사라진다. 상황은 이와 비슷하다. 그것이 바로 선도자(leader)와 추종자(follower)라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이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단지 나를 믿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하는 예수, 모세, 마호메트, 크리슈나와 같은 사람들은 깨달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다. 186p

칼날을 세우며

나는 단지 이렇게 물었다. “당신의 ‘절대’는 완전합니까? 그것이 완전히 마침표를 찍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성장하고 있습니까? 만약 그것이 아직도 성장하고 있다면 그것은 ‘절대’가 아닙니다. 그것은 불완전합니다. 오직 그때에만 성장할 수 있습니다. 만약 더 이상의 무언가가 가능하다면 더 많은 가지, 더 많은 꽃들이 가능하다면, 완전히 완성되었다면....... 그것이 바로 절대라는 단어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때 성장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205p

그리하여 나의 전 생애는 맨 처음부터 두 가지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어떤 우둔한 일도 나에게 강요되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 결과가 어찌되도 모든 종류의 어리석음에 대항해서싸우고, 끝까지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남아 있는 것, 이것이 그 한가지 측면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접촉하고 있었던 모든 사람들을 이런 태도로 대했다. 그리고 두 번째 것은 완전히 개인적인 것,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점점 더 깨어 있게 되는 것, 그래서 단지 지적인 사람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었다. 213p

나는 나의 일생을 통해서, 만약 조금만 체면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아주 쉽게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회는 그대와 게임을 해왔다. 사회는 그대의 마음 속 높은 자리에 체면을 놓고, 그 반대편에는 사회가 그대로 하여금 하지 않기를 바라는 모든 것들을 놓았다. 그래서 만약 그대가 그것들을 행하면 그대는 체면을 잃는다.“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때 사회는 그대의 의지에 반대되는 어떤 일도 그대에게 강요할 힘이 없다. 226p

선생들은 시인들 만큼이나 타고난다. 그것은 하나의 위해한 예술이다. 누구나 선생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광범위한 교육 때문에 수많은 선생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시를 배워야하고 시는 시인들에 의해서만 가르쳐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회가 있다고 생각해보라. 이제 수많은 시인들이 필요해질 것이다. 물론 그때는 시인 양성학교가 생겨날 것이다. 그 시인들은 사이비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요구할 것이다. “우리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라! 우리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왜 너희는 우리를 존경하지 않느냐? 이것이 선생들에게 일어난 일이다.” 234p

길 위에서

나는 종교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언제나 싫어했다. 그러나 나는 종교에 대해 이야기해야 했다. 그러나 내가 종교라는 포장 아래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이해하는 종교와는 다른 것이었다. 이제 이것은 단순히 하나의 전략이었다. 나는 신, 종교, 해탈, 모크샤와 같은 그들의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단어들에 나만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사람들을 찾기 시작할 수 있었고, 사람들이 나엑 오기 시작했다. 249p

나는 말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당신을 돕겠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종교 지도자들을 보았지만 당신처럼 진실한 가슴을 가진 사람은 없었기 대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이 속박 속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위험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게다가 직접 나를 불렀습니다.” 266p

표현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다 : 단어들 사이의 침묵들

나의 목적은 참으로 독특하다. 나는 단지 침묵의 간격들을 창조하기 위해 말을 이용하고 있다. 말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때문에 나는 모순적이고 불합리하고 관계 없는 어떤 말도 할 수 있다. 나의 목적은 단지 간격들을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들은 부차적이다. 그 말들 사이의 침묵들이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단지 그대에게 명상의 일별을 주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그리고 일단 그대가 그 일별이 그대에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대는 이미 그대 자신의 존재를 향해 많이 온 것이다. 276p

종교는 행동을 강조해왔다. 내가 강조하는 것은 의식이다. 그리고 의식은 오직 침묵 속에서만 성장할 수 있다. 침묵은 의식을 위한 올바른 토양이다. 그대의 머리가 소란스러울 때 그대는 그다지 깨어 있거나 의식적이 될 수 없다. 그대가 의식적이고 깨어 있을 때 그대는 소란스러울 수 없다. 그 둘은 공존할 수 없다. 285p

Part Two 빈 거울에 비친 그림자들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한 인간의 여러 얼굴

섹스 구루
컬트 교주
사기꾼
‘자칭 바그완(Bhagwan)'

부자들의 스승

종교는 사치품이다. 최후의 사치품이다. 나는 종교를 그렇게 부른다. 왜냐하면 종교는 가장 높은 가치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배가 고플 때 그는 음악에 신경쓰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다. 만약 그대가 그의 앞에서 시따르(sitar)를 연주하기 시작한다면 그는 그대를 죽여 버릴 것이다. 그는 말할 것이다. “나를 모욕하는 거요? 나는 배가 고픈데 당신은 시따르를 연주하다니! 나는 너무 배가 고파서 음악을 이해할 수가 없소. 나는 죽어가고 있단 말이요!” 사람이 배가 고파서 죽어가고 있을 때 반 고흐의 그림이 무슨 소용인가? 아니면 붓다의 설법이나 아름다운 우파니샤드나 혹은 음악이 무슨 소용인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는 빵이 필요하다. 330p

농담꾼

웃음은 사념없는 상태로 가는 아름다운 전주곡이 될 수 있다. 344p

만약 그대가 정말로 깨어서 듣고 있다면 농담은 필요 없을 것이다. 나는 직접 진리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렵다. 그대는 하품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하품을 하는 것 보다는 웃는 편이 낫다. 345p

롤스로이스 구루

사람들은 슬퍼하고 질투한다. 그리고 롤스로이스가 영성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서 어떤 모순점도 보지 못한다. 롤스로이스 속에 앉아 있을 때 나는 충분히 명상적이었다. 사실 소달구지에 앉아있을 때는 명상적이 되기가 상당히 어렵다. 롤스로이스는 영적 성장에 최고로 좋은 차이다. 355p

스승

스승의 역할은 그대를 부르는 것이다. “나라로야, 동굴에서 나오너라! 너의 무덤에서 나오너라! 너의 죽음에서 나오너라!”
스승은 그대에게 진리를 줄수 없다. 그러나 그는 진리를 불러낼 수 있다. 그는 그대 안의 무언가를 휘저을 수 있다. 361p

스승들은 진리를 가르칠 수 없다. 그것을 가르칠 방법이 없다. 그것은 경전을 넘어선, 말을 넘어선 전이이다. 그것은 전이이다. 그것은 그대 안의 에너지를 자극하는 에너지이다. 그것은 일종의 동시성이다. 364p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배추벌레와 나비의 관계이다. 배추벌레와 나비의 우정이다. 나비는, 배추벌레가 나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논리적인 방법은 없다. 그러나 나비는 배추벌레 안에 하나의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잇다. 그것은 가능하다. 365p

스승은 그대를 말로부터 해방시킨다. 그는 온갖 상상의 철학들로부터 그대를 해방시킨다. 그는 말없는 침묵의 상태로 그대를 인도한다. 366p

스승은 그대의 의사이다. 일반적인 병이 아닌 그대의 존재적인 갈등을 치유하는 의사이다. 366p

현자는 그대가 통찰력을 가짐으로써 그대 자신의 등불을 가지기만을 바란다. 368p

성장하는 유일한 길은 좋고 나쁘고, 즐겁고 슬픈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대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 그것에 대해 그대는 책임이 있다. 그것이 그대에게 커다란 자유를 준다. 371p

과학이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왜 진리에 대한 탐구가 특정한 사람의 것이 되어야 하는가? 왜 고타마 붓다의,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혹은 나의, 혹은 그대의 것이 되어야 하는가? 374p

나는 그대에게 진리를 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달을 가리켜 보여줄 수 있다. 부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집착하지 말라. 이 손가락은 사라질 것이다. 달은 남을 것이다. 그리고 탐구는 계속될 것이다. 지구상에 단 한 사람의 인간이라도 남아 있는 한, 산야스의 꽃들은 계속해서 피어날 것이다. 376p

깨달음 이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일어남이 멈춘다. 사라진다. 그는 단순히 존재한다. 태양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밤이 별들로 가즉하지 않다는 것이다. 꽃들이 더 이상 피어자니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은 계속된다. 그러나 그대 안에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잔잔하고 고요하게 남아 있다. 깨달음 후에는 더 이상 일대기가 없다. 377p

Part Three 유산
종교 아닌 종교

진정한 종교는 이름이 없다. 결코 어떤 이름도 가질 수 없다. 붓다는 그것을 살았다. 예수는 그것을 살았다. 그러나 기억하라. 예수는 기독교도가 아니었으며, 붓다는 불교도가 아니었다. 384p

기억하라. 그대는 어떤 종교에 입문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단지 종교성 속으로 입문하는 것이다. 그것은 거대하고 광대하며 무한하다. 그것은 온 하늘과 같다. 385p

진짜 문제는 성직자이다. 그리고 신은 성직자의 날조물이다. 성직자를 버리지 않는다면, 그대가 신을 버린다 해도 성직자가 언제나 새로운 예식들을 찾아낼 것이다. 그는 새로운 신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396p

나는 절대적으로 개인을 신뢰한다. 이제까지 아무도 이런 식으로 개인을 신뢰하지 않았다. 따라서 모든 것이 제거될 수 있다. 이제 그대에게 남은 것은 명상의 상태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저적인 침묵의 상태를 의미할 뿐이다. 명상이라는 말은 무거워 보인다. 단지 단순한, 순수한 침묵이라고 부르는 편이 났다. 그러면 존재는 그 모든 아름다움을 그대에게 열어줄 것이다. 399p

21세기를 위한 명상

명상은 도박이다. 다른 모든 도박에서는 어떤 물건을 내건다. 그러나 명상에서는 우리 자신을 내건다. 명상은 분명히 도박꾼의 행위이지 사업가의 행위는 아니다. 417p

10분 동안은 강렬한 호흡이다. 그대의 모든 전체성이 그 안에 쏟아 부어져야 한다. 그리고 나서, 10분 동안의 강렬한 호훕 후에 에너지가 깨어났을 때, 그 에너지는 밖으로 내던져져야 한다. 418p

명상은 무엇에 ‘대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425p

제3의 심리학 : 붓다의 심리학

붓다의 심리학은 분석도 아니고 종합도 아니다. 그것은 초월이다. 그것은 마음을 넘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 안에서의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를 마음 밖으로 데려가는 작업이다. 그것이 바로 영어의 무아경(ecstasy)이라는 단어가 나타내는 의미이다. 428p

명상, 각성, 주시...... 그것이 바로 제 3의 심리학만이 가진 뛰어난 점이다. 심리분석가는 필요치 않다. 그대 스스로 그것을 할 수 있다. 433p

문제는 분석이나 종합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자각하게 되느냐의 문제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 동양 사람들이 프로이트학파나 융학파, 아들러학파와 같은 심리치료요법을 전혀 발전시키지 않은 이유이다. 434p

서양인의 마음은 매우 급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조건화에 따르면 삶은 단 한번, 70년뿐이고 할일은 많기 때문이다. 그대 인생의 3분의 1은 잠을 자는데 들어가고 또 3분의 1은 교육에, 배우는데 들어간다. 뭐가 남는가?
그중 많은 부분은 밥벌이에 들어간다. 만약 그대가 모든 것을 계산해본다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70년 가운데 그대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은 7년도 되지 않는다. 당연히 급할 수밖에 없다. 미친 듯이 달려갈 수밖에 없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미쳐서 달려갈 수 밖에 없다. 그대가 염두에 두는 것은 그대가 빨리 가고 있느냐는 것뿐이다. 수단이 목적이 된다. 448p

사람들은 절반의 가슴으로 살고 있다. 사람들은 미온적인 방식으로 살고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강렬하게 살지 않는다. 건강한 향기를 지니고 살지 않는다. 그들은 병든 마음을 가지고 산다.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산다.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이것을 해야 하고 저것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한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존재로부터 나오는 의욕은 전혀 없다. 457-458p

그러나 마음은 그대를 속일 수 있다. 마음은 그 안에 비치는 것이 실재라는 관념을 그대에게 줄 수 있다. 다라서 마음이 치워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바로 그것이 명상이다. 명상은 무심의 상태이다. 명상은 마음을 가져간다. 그리고 명상은 그대에게 거울에 비친 그대 존재의 보물이 아닌, 보물 그 자체를 볼 기회를 준다. 460p

조르바 붓다 : 완전한 인간

삶을 아주 즐거운 태도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그대는 양쪽 세상을 함께 가질 수 있다. 그대는 케익을 먹기도 하고 동시에 가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예술이다. 이세상과 저 세상, 소리와 침묵, 사랑과 명상, 사람들과 관계 속에 함께 있는 것과 홀로 있는 것, 그대는 동시에 이 모든 것들을 함께 겪어야 한다. 오직 그때에만 그대는 그대 존재의 가장 깊은 곳과 가장 깊은 곳을 알게 될 것이다. 461p

서양인들은 전 인류가 오랜 세월 동안 갈망해왔던 그 모든 풍요로움을 이루는데 성공했다. 서양은 물질적으로 부유해지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제는 너무나 지치고 피곤해 있다. 그 여정은 서양의 모든 영혼을 앗아가 버렸다. 그 여정은 서양의 사람들을 파멸시켜 버렸다. 외적으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더 이상 인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소유는 있다. 그러나 주인은 사라졌다. 커다란 불균형이 일어났다. 부(富)는 있지만 사람들은 전혀 부유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반대로 가난함을, 커다란 빈곤함을 느끼고 있다. 463p

동양도 부유했을 때는 명상에 관심이 있었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부에 반대하지 않으며 가난함에 어떤 영적인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나는 가난함에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왜냐하면 한 나라가 가난해질 때면 언제나 그 나라는 모든 명상과의, 모든 영적인 노력과의 접촉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464p

동양은 아직 명상을 할 수 없다. 먼저 물질적으로 좀 더 나아지기위해 과학기술을 필요로 한다. 서양이 종교적인 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동양은 과학기술을 필요로 한다. 473p

나는 자유를 가르친다. 이제 인간은 모든 종류의 구속을 파괴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감옥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더 이상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 인간은 개인이 되어야 한다. 인간은 반역적이 되어야 한다. 482p

나는 그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죽는 것은 잘된 일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죽음으로부터 새것이 스스로의 탄생을 알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483p

나는 붓다를 이야기한다. 나는 예수를 이야기한다. 나는 크리슈나를 이야기 한다. 나는 자라투스트라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과거의 모든 훌륭한 사람들, 최고의 사람들이 잊혀지지 않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단지 몇몇 예외들에 불과하다. 전 인류는 거대한 노예상태 속에, 속박 속에, 분열 속에, 광기 속에 살았다. 486p

인간은 나무이다. 종교는 오직 꽃들만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 꽃들은 철학적이고 추상적으로 남게 된다. 그 꽃들은 결코 실체화되지 못한다. 그 꽃들은 땅의 도움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실체화되지 못했다. 그리고 과학은 오직 뿌리에만 마음을 쓰기 때문에 실패했다. 뿌리는 추하고 거기에 꽃은 피지 않는다. 487p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오직 예술만이 다리가 될 수 있다. 시, 음악, 조각..... 일단 우리가 이 신인간을 세상에 내놓고 나면 지구는 처음으로 마땅히 되었어야 할 모습이 될 수 있다. 지구는 천국이 될 수 있다. 바로 이 몸이 붓다이며 바로 이 땅이 천국이다. 487p



III. 내가 저자라면

6월 한 달을 인류 선각자들의 자서전을 읽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내용은 개인 사정으로 읽지 못했다. 그 후 백범 김구 선생님, 칠레의 영웅이자 시인인 파블로 네루다 그리고 인도의 명상가이며 철학자인 오쇼 라즈니쉬에 대한 글 을 읽었다.

인류에 큰 족적을 남기신 분들의 글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라는 경외감이 먼저 든 것은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영웅은 시대가 만들어 낸다고는 하지만 그들 앞에 놓였던 사회는 적어도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사회와는 너무나 달랐다.

오쇼 라즈니쉬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처음 도입 부분을 넘기기가 참 어려웠다. 이건 내 책 읽는 습관인지도 모른다. 여러 책을 읽어오면서 도입 부분에서 나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것은 책을 보는 시간보다 졸거나 다른 생각을 하는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이런 현상이 나를 지배했다. 그래서 중간에 책읽기를 포기하고 칼럼을 먼저 쓰기도 했다. 왜였을까? 아마도 이건 내가 오쇼 라즈니쉬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의 자서전을 읽어 나가면서 생긴 문제였을 것이다. 공감대는 대화에서도 필요하지만 작가와 책 읽는 사람과도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또 알게 되었다.

책의 전체적인 구성은 그의 유년시절과 청년시절 그리고 그가 세상에 이름을 많이 알리던 시절로 구성되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발자취를 편집자가 따로 엮은 내용도 꽤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나는 그의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을 재미있게 봤다. 그가 어린 시절 그의 할머니 품에 자라면서 겪었던 많은 일화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 크다. 특히 교육에 있어서 가정교육이 얼마나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세상을 보는 눈높이를 제공하는 가도 특수한 경우겠지만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교육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꼭 볼 것을 추천하고 싶어지는 대목도 많았다. 특히 저자가 스승에 대해 쓴 글은 매우 날카로웠다. 스승을 양산하는 교육 속에서 찍혀져 내듯 길러낸 스승이 과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를 그는 물었다. 이 부분에서 책장을 뚫어져라 다시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오쇼 라즈니쉬의 종교관은 명확했다. 그는 신의 존재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붓다의 사상을 존경하였으며 그의 다른 책을 보면 노자(老子)와 같이 무위자연의 자유스러움을 쫓았던 것 같다. 그는 명상을 통해 이러한 것을 추구하려는 시도를 대중에게까지 전파시켰다.

예수가 있었을 때 기독교라는 것은 없었다. 붓다가 있었을 대 불교라는 것 또한 없었다. 무슨무슨 교라고 만들어지는 것은 그들이 죽고 난 이후에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요즘 종교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의 글이 충격적이었다.

몇 권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나는 여러 가지을 느꼈다. 어떤 문장에서는 나도 이렇게 문장을 써봐야겠다고 문체에 매료되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 내가 알고 있던 사건이 책속에서 더욱더 생생한 글의 울림으로 전해올 때는 전율을 느끼기도 했다. 특히 오쇼 라즈니쉬의 자서전을 통해서는 ‘질문’에 대한 물음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련의 일들에 대해 나는 나에게 어떤 질문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봤다. 나무로 만든 쐬기로 바윗돌을 쪼개는 장면이 생각났다. ‘질문’은 그런 것이 아닐까?

나는 저자가 좀더 ‘질문’에 대한 심도 깊은 이야기를 해줬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의 전반부는 그의 유년과 청년 시절의 일대기를 읽는 것이었다. 중반을 넘어서면서 부터는 그의 사상이 이곳저곳에서 나타났다. 사건을 위주로 펼쳐나가면서 대부분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것의 중심에는 항상 그의 ‘질문’이 거기 있었다. 그의 질문은 무척이나 단순했다. 그러나 그 질문은 질문 받는 사람의 정곡을 찔렀다. 찔린 질문자는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할 정도로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했고 이내 저자에게 가르침을 청하게 된다.

오쇼의 자서전을 그가 직접 편집하지는 않은 것 같다. 책의 전체적인 구성에 연결성이 덜하기 때문이다. 첫 장과 둘째 장은 자서전적인 색체가 물씬 풍긴다. 그러나 셋째 장은 좀 덜했다. 그리고 넷째 장은 그가 살아있었다면 아마도 편집에서 제외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저자라면 난 넷째 장을 포함하지 않겠다.

마치며
노자는 도덕경의 첫 문장에서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건 도가 아니라고 했다.
‘명상’ 이 두 글자의 여운이 깊이 베인 책이었다. 말이 필요 없다.
IP *.117.68.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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