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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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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30일 10시 35분 등록
1.저자소개

완전한 자유, 즉 지복에 이르는 길은 어떤 종교적, 철학적 이해나 학습에 의해 구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 내면의 각성으로부터 온다.

오쇼 라즈니쉬는 각성된 명상가이다.

그는 1931년 12월 11일 인도의 쿠츠와다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외조부님의 손에서 길러지면서 그는 최고의 육아환경 속에서 자라게 된다.
그의 외조부는 그를 어떤 제압도 어떤 간섭도, 어떤 교육도 시키지 않으므로 그가 온전히 자연속에서 자랄 수 있게 했고 자연의 울림을 읽어낼 줄 아는 마음을 갖을 수 있게 했다.
따라서 그는 독립적인 정신을 소유하게 되었고 남들로부터 주어지는 지식이나 신념에 기대기 보다는 스스로 진리를 탐구하고자 했다. 21세기에 깨달음을 얻은 오쇼는 사가르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자발푸르 대학에서 철학 교수로 지냈으며, 인도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자심의 신념을 역설하고 기성종교 지도자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했으며 전통젖ㄱ인 종교가치에 많은 의문을 제기했다.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오쇼는 독창적인 <다이나믹 명상법>을 개발하여 명상의 새 장을 열었다. 그는 현대인들은 과거의 낡은 전통과 현대 생활의 온갖 욕망에 짓눌려 있기 대문에 깊은 정화 과정을 통해 이완의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의식의 발전 단계를 규명하고, 현대인의 영혼에 진실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연구하고 설파했다. 그가 전 세계의 제자들과 구도자들에게 강의한 내용은 30개가 넘는 언어로 650권이 넘는 책으로 발간되었다.

그는 말한다.
“나의 메시지는 교의가 아니며, 철학도 아니다. 나의 메시지는 일종의 연금술이며 변환의 과학이다. 따라서 나의 메시지는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자들, 용기있는 자들ㄴ만이 들을 수 있다. 왜냐면 나의 메시지는 죽음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나의 메시지는 듣는 순간 그대는 다시 태어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1970년대부터 서구 젊은이들에게 열광적인 인기를 누리던 라즈니쉬는 1980년대 초에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서지현 스님과 무용가 홍신자에 의해서다.

1974년 서구에서 몰려든 젊은이들과 함께 인도 뭄바이 남쪽의 도시 푸나에 공동체를 세웠다. 이때부터 라즈니쉬는 영광과 함께 수난이 시작된다. 밀려드는 영혼의 탐구자들로 푸나는 축제의 두시가 되고 매주 열린 그의 강의는 새롲게 태어나는 정신들의 모태가 된다.
그러나 1980년 5월에 라즈니쉬 가르침에 극단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힌두교 1명이 강의중에 암살을 기도했다. 그 이후 제자들은 그를 미국으로 초대하고 미국에서 활동하던중 라즈니쉬는 체포되어 신문을 당하게 되다.

그는 미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미국식 민주주의를 지켜본 바로는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그들의 헌법은 단지 세계에 보여주기 위한 전시용일 뿐이다. 그 나라는 자유에 대해 이야기 하는 범죄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후 라즈니쉬 세계 가는곳마다 입국조차 거절되는 수난을 겪게 된다.

미국의 고문이후 악화된 건강은 1987년 말경 뼈와 관절의 통증, 시력의 악화, 빛에 대한 과민성, 식욕저하, 귀의 염증이 계속되고 1988년 12월 개인 주치의가 24시간 붙어 있어야 할 만큼 심각하게 앓는다.

1990us 1월 19일 오쇼는 자신의 몸을 떠났다. 푸나에 있는 그의 공동체에는 영젖ㄱ 성장을 위한 메카가 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명상, 치료, 창조적 프로그램 등에 참가하기 위해 전 세계로부터 해마다 지금도 수천명이 방문하고 있다.


2. 나 마음속에 들어 온 글귀

오쇼 라즈니쉬

오쇼가 그의 말대로 ‘마치 시골로 주말여행을 떠나기 위해 짐을 싸는 사람처럼 평화롭게’ 59년동안 그를 위해 봉사한 육체를 떠난 준비를 한지 10년이 흘렀다.

요쇼가 그의 메시지의 핵심으로 수없이 강조한 명상은 몇몇 꾀짜들만의 모호하고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회사 임원에서부터 암 환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더욱더 증가하고 있다. 10

중요한것은 ‘그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가 누구냐’이다. 사실지향적인 마음은 그들이 누구인지 보다는 그들이 무엇을 했느냐 를 가지고서 그들을 정의하려 한다. 그들이 죽을 때 어떤 이해를 지니고 있었느냐 보다는 그들이 삶에서 어떤 소유물을 얻었느냐로 그들을 정의하려 한다.12

오쇼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될 때에만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13

인간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주목한다. 인간은 시간 너머에서, 공간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에 다른 말로 하면 마음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목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14

나에게 있어서 영성은 순수한 개인성을 필여로 한다. 영성은 어떠한 종류의 의존도 하용하지 않는다. 영성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스스로에 대한 하나의 자유를 창조해낸다. 영성은 결코 군중속에 있지 않으며 언제나 홀로 있다. 19

나에게 있어서 영성은 단지 자신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누구에게도 나를 대신하여 이 일을 하도록 하지 않았다. 20

어린시절 동안 니는 너무나 외로웠고 그래서 나는 그 외로움을 즐기는 법을 베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하나의 즐거움이며 다라서 그것은 나에게 천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축복이었다. 25

침묵은 고유의 진동을 가지고 있다. 침묵은 전염성이 있다. 27

가르치지 않는 것, 무력한 아이에게 자신의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는 유혹 당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가장 큰 유혹이라 부른다. 그대가 어떤 식으로든 그대에게 의존하고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그대는 가르치기 시작한다. 35

그 아이는 씨앗이예요. 거기서 무엇이 나올지는 아무도 몰라요 53

나느 조르바붓다이다…(.인정할수 없음)

씨앗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나무와 그 꽃의 피어남 그리고 어쩌면 가지들 사이로 보이는 달까지도 놓치게 될 것이다. 54

나는 삶을 길고 긴 고문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반대한다. 55

헤어짐은 그 나름의 시(時)를 지니고 있다. 59

사랑에 빠지는 데는 ‘왜’가 없다. 나는 그저 그를 보았고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그의 눈을 보았고 내 안에서 신뢰가 일어났다. 그리고 신뢰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62

나의 관심은 언제나 궁극의 진리가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인지, 그것을 알고자 했다. 67

사랑 없이는 죽음은 그대에게 존재로 가는 열쇠를 주지 않는다. 사랑이 있을대, 죽음은 그대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을 통하는 열쇠를 건네준다.

나의 할아버지, 그는 어던 금지도 어떠한 억압도, 어떠한 계율도 없이 절대적인 자유 속에서 나를 키웟다.. 69

잘하고 못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나의 힘으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서히 그것은 나의 삶의 방식이 되었다. 81
그대가 흐르는 것들, 움직이는 것들과 사랑에 빠지게 될대 그대는 삶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된다. 100
나는 말했다 “넘어지게 뇌 두세요. 그 편이 나아요. 그런다고 죽지 않아요. 저는 어떻게 해야 넘어지지 않을지, 어떨게 깨어 있을지, 어떻게 돌들이 어디 있는지 기억할지를 배우게 될 거예요. 하지만 할아버지가 제 손을 잡고 있으면…언제나 함께 해 주실수 없으시잖아요…그렇다면 지금부터 배우는게 나아요. 언젠가 할아버지는 갑자기 저를 혼자두고 떠나가실 테니까요. 그러니 저를 혼자 내버려 두세요. 넘어지게 뇌 두세요. 저는 일어서려고 노력할 거예요. 할아버지는 기다리세요. 할아버지는 그냥 기다리세요. 그것이 저의 손을 잡는 것보다 더 자상한 일일 거예요.”

몇번쯤 다치고 일어서는 것은 좋다. 몇번쯤 길을 잃는 것은 좋다. 해가 될 것은 없다. 그대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돌아오라. 삶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원야 한다. 115-116

그대가 어떻게 죽는가 하는 것은 그대의 전 생애를 그대가 어떻게 살앗는지를 반영한다.

그대는 침묵을 느낄 것이다. 슬픔이 아니라 침묵을 느낄 것이다. 심지어 어던 사람이 지복 속에 죽었을대 그대는 갑자기 그대 곁에 깃드는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129

그대가 죽을 때 그대는 그대의 에너지를 풀어놓고 그 에너지와 함께 그대 일생의 경험을 풀어 놓는다. 그대가 어떠했든지…슬펐든지…행복했든지..사랑이 넘쳤든지..분노했든지..열정적이었든지..그대가 어떠했든지 그 에너지는 그대 일생의 진동을 담고 있다. 137

아주 어린시절부터 침묵을 사랑했다. 가능할때면 언제나 나는 그저 조용히 앉아 있곤 햇다.146

붓다가 이렇게 말했다. “스승을 빌견힌 사람은 운이 좋다. 154

욕망은 이해 되어야 한다. 그대는 욕망을 이해할 수 있고 바로 그 욕망의 덧없음을 볼 수 있다. 직관이 필요한다. 즉각적인 통찰이 필요하다. 167

욕망은 다리이다. 꿈의 다리이다. 168

모든 깨달은 사람은 깊은 침묵을 거의 만져질 듯한 침묵을 지니게 될 것이다. 열려잇고 수용적인 사람들은 그의 현존 안에서 침묵하게 될 것이다. 그는 엄청난 만족을 지니게 될 것이다. 193

비올때 산책 나가기가 가장 아름답다. 왜냐하면 길이 완전히 텅 비어 있다. 그리고 비가 오는 동안 우산을 쓰지 않고 산책을 하는 것은 너무나 아름답다. 너무나 시적이다. 199

나의 전 생애는 맨 처음부터 두가지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어떤 우둔한 일도 나에게 강요되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 결과가 어지되든 모든 종류의 어리석음에 대항해서 싸우고, 끝까지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남아 있는 것, 두번재 바로 점점 더 깨어 있게 되는 것, 그래서 단지 지적인 사람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213

나의 수업은 가능한 가장 깊이 있는 방법으로 모든 각도, 모든 관점에서, 모든 것이 토론되어져야 햇고 모든 것이 검토되어야 했다. 219

그대가 누군가를 신뢰하면 그들이 그대를 속이는 것은 무척 어려워진다220

인도에는 이슬람교도의 옷이 있고, 힌두교의 옷이 있고 뻔잡 사람들의 옷이 있고 뱅갈 사람들의 옷이 있고, 남인도 사람들의 옷이 있다.222

선생은 자연스럽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다. 따라서 선생은 존경을 요구할 수 없다. 233

마은은 참으로 섬세하고 복잡한 컴퓨터이다. 인간은 대단한 컴퓨터를 만들어 냈지만 아직 어떤 컴퓨터도 인간의 마음에 비교 될 수는 없다. 239

깨어난 사람은 인간을 너무나 깊이 이해한다. 241

조지 버나드쇼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 “ 사람이 평생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단지 즐기기만 하면서 게으르게 사는 것이 가능할까요? 조지 버나드쇼가 말했다 “ 가능합니다. 단 그 호주머니가 남의 호주머니라면요” 279

깨달음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고 똑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이며 유일한 경험이다. 281

명상은 침묵을 가져오려는, 기쁨을 가져오려는, 침묵을 가져오려는, 지복을 가져오려는 노력이다.

의식은 오직 침묵속에서만 성장할 수 있다. 침묵은 의식을 위한 올바른 토양이다. 그대의 머리가 소란스러울 때 그대는 그다지 깨어 있거나 의식적이 될 수 없다. 그대가 의식적이고 깨어 있을 때 그대는 소란스러울 수 없다. 그 둘은 공존할 수 없다. 285

대양은 그대를 공격하지 않는다. 비는 그대를 공격하지 않는다. 나무들은 그대를 공격하지 않는다. 방어할 필요는 전혀 없다. 삶 그 자체 앞에, 존재 그 자체앞에 그대의 모든 것을 엶으로써 그대는 이러한 순간들을 끊임없이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먼지않아 그것은 그대의 삶 자체가 될 것이다. 289

영적임 독립은 독립이라고 부를 가치가 있는 유일한 독립이다. …진정한 독립은 그대가 그대의 내적인 성장을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306

나는 철학자가 아니다. 나는 언제나 시인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삶을 향한 나의 접근은 시적인 접근이고 연애소설과 같은 것이다. 323

가난한 사람은 계속해서 희망한다. 가난한 사람은 부유함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햇다.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부유함에 대해 좌절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것을 넘어설 수 있겠는가? 329

현자(賢者)는 그대가 통찰력을 가짐으로써 그대 자신의 등불을 가지기만을 바란다. 368

과학이 계속해서 성장하고 모든 천재 과학자들이 과학의 성장에 기여하듯이, 갠지즈강이 계속해서 더 크고 넓어져 대양에 이르듯이 마찬가지로 내명의 세계에도 과학이 필요하다. 374

예수는 기독교가 아니었으며, 붓다는 불교가 아니었다.384

단지 깨어있는 채로 모든 것을 탐구하고 의심하라, 그대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지점에 이를 때까지 …그것이 진리이다. 387

명상은 붓다의 기여이다. 중요한 것은 몸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더 고요해지고, 더 이완되며, 더 평화로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의식의 중심에 도달하기 위란 내면으로의 여행이며 자기 자신의 의식의 중심은 전 존재의 중심이다. 391

마음은 하나의 기계장치이다. 어는 정도 휴식을 필요로 한다. 403

명상은 존재하는 것이다 명상은 행위가 아니라 상태이다. 407

동양의 드야나, 그것은 마음의 모든 내용물을 버리고 단지 존재하는 것이다.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목적도 없고 만족도 없는 의식의 상태이다.408

어떤 종류의 시적도 좋다. 하지만 시작하라. 그대가 있는 곳에서 꼼짝않고 있지 말라. 중심믈 향해 움직여라. 명상하라. 그것이 그대를 집으로 데려갈 것이다411

우리 안에는 무수히 많은 광기들이 축적되어 있다. 그대는 그것이 완전히 미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완전히 미친다는 말은 두려움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419

명상은 무엇에 ‘대해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425

치유는 그대가 더 이상 마음에 붙잡혀있지 않을 때 찾아온다. 그대가 마음으로부터 분리될 때, 비동일시될 때 , 완전히 벗어날 때 속박이 끝날 때, 그때 치유가 일어난다. 434

동양에서는 사람들이 너무나 공동체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영적인 공간 속에 있고 싶을때면 그들은 히말라야로 가고 싶어한다. 사회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그들은 자신에 싫즐이 난 것이 아니라 사회에 싫증이 나 있다.

서양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싫증이 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다리를 원한다. 사회와 교통할 수 있는 , 타인들과 교통할 수 있는 법을 원한다. 다리를 창조하는 법을, 타인에게 움직이는 법을 원한다. 그래서 그대 자신을 잊을수 있게 말이다.442

세상속에 살아라. 그러아 세상의 것이 되지 말아라. 관계하라. 그러나 여전히 홀로 남아라. 사랑하고 명상하라. 444

사람들은 절반의 가슴으로 살고 있다. 미온적인 방식으로 살고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강렬하게 살지 않는다. 건강한 향기를 지니고 살지 않는다. 그들은 병든 마음을 가지고 산다.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산다.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457

모험적이지 않고서는 사람은 건강하지 않다. 모험이 기준이다. 미지에 대한 탐구가 기준이다. 사람들은 젊지 않다. 어린시절에서 그들은 바로 노년으로 간다.458

삶 자체는 양극으로 이루어져 있다. 양극과 음극, 탄생와 죽음, 만자와 여자, 여름과 겨울, 삶 전체는 반대 극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거나 그 반대극들은 상호보완적이다. 그것들은 서로를 돕는다. 서로를 뒷받침한다.
그것은 아치를 이루고 있는 벽돌과 같다. 아치를 이루는 벽돌들은 서로를 밀어내도록 놓여져야 한다. 하지만 아치가 세워지고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그 밀어냄을 통해서다. 아치의 힘은 서로를 밀어내도록 놓여져 있는 벽돌들의 양극성에 의존한다. 475

신인간은 ‘조르바 붓다’가 될 것이다. 그는 감각적이면서 영적일 것이다. 뮥체적이면서 육체속에서, 감각속에서, 모든것들을 즐기며 동시에 엄청난 의식, 엄청난 주시가 있을 것이다.483

그대가 꽃을 내면 깊은 곳의 존재의핵을 소홀히 한다면 삶은 모든 의미를 잃는다. 나무는 뿌리를 필요로 한다. 인간도 뿌리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뿌리는 땅 속에서만 존재한다. 나무는 자라기 위해 하늘을 필요로 한다. 486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오직 예술만이 다리가 될 수 있다. 시, 음악, 조각,…일단 우리가 이 신인간을 세상에 내놓고나면 지구는 처음으로 마땅이 되었어야 할 모습이 될 수 있다. 487



3. 내가 저자라면...

젊은이들은 인도로 몰려간다. 나 역시 한창의 나이에 인도땅을 밟은적이 있다. 인도로 가는 길은 붐빈다. 인도하면 떠오르는 것은 명상과 정신문화이다. 나 역시 인도를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인도라는 나라는 신의 나라, 세상에서 하늘과 제일 가까운 나라인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왜 이땅의 많은 젊은 이들은 인도에 열광할까?
인도와 명상에 대한 우리의 관심의 정점에는 삶에 대한 끝없는 질문이 자리잡고 있다.
살아가면서 해답없는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경우가 많은데 특이; 삶에 대한 의문이 그렇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이며 결국 무엇을 남길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오쇼는 이러한 궁금증과 의문을 가진 사람들에게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명상이라는 도구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하나의 길을 제시한다.

그의 종교적 관점에 반대한다.
그는 기종의 종교에 대해 매우 독하게 비판한다.
그의 주장은 이렇다
“영성은 순수한 개인성을 필요로 한다. 영성은 어떠한 종류의 의존도 허용하지 않는다. 영성은 결코 군중속에 있지 않으며 언제나 홀로 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홀로서기를 반대한다는 것이다. 항상 의지 하기만을 바란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종교성이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종교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종교를 가지고 있는 개인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 옳다.
나는 대부분의 종교의 목적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의식있는 신앙’ ‘순수한 진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맹목적인 믿음, 스스로 자신을 노예회 시키는 개개인의 신앙에 대한 테도가 문제인 것이다.

저자는 궁극의 진리가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관해 평생동안 연구한 그의 깨달음의 과정, 침묵, 진리, 명상, 죽음에 대한 그의 철학은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어느 한 개인이 어떻게 죽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전 생애를 어떻게 살았는지 말해주는 것이며 우리는 죽을 때 우리의 에너지를 풀어놓게 되는데 그때 인생의 경험도 함께 풀어놓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떠했든지…슬펐든지, 행복했든지, 사랑이 넘쳤든지, 분노했든지, 열정적이었든지, 어떠했든지 이 모든 에너지는 우리의 인생의 진동을 담게 된다는 그의 철학은 우리가 자신의 삶에 얼마나 책임감엤게 살아야 하는지 돌아보게 한다.

“깨달음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고 똑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길이며, 유일한 경험이라는 그의 주장은 깨달음이 예수 혹은 부처처럼 어느 특별한 성인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니며 평범하기 그지 없는 나 역시 명상과 침묵을 통해 삶에 대한, 내 자신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진정성’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의 명상프로그램조차 명상은 침묵을 가져오려는, 기쁨을 가져오려는, 침묵을 가져오려는, 지복을 가져오려는 노력이다라고 했다.
그는 스스로 오랫동안 침묵했고 침묵을 통해 성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조금 더 침묵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라즈니쉬의 취미는 어린 사내아이가 미니카를 모으듯이 롤스로이스 자동차 모으기 였다고 한다. 아침마다 그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즐겼다고 한다. 그때 반대하는 자들은 힘을 얻었다. “정신적인 지도자가 웬 사치를 그렇게 하는가? 사기꾼이다”라는 비난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깨달은 사람에 데헤 일종의 편견을 가지고 있다. 청빈하고 검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자이면서 깨달은 사람이 될 수 있고 깨닫고서 부자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그에 관한 이러한 비난은 사람들의 오래된 편견으로부터 생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내가 접수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면 전세계를 접수했을 것이다’라거나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태도,들에서 나는 그가 조금더 겸손했더라면 아쉬움을 갖는다.
그는 세상에 반역적인 모습을 보였다. 도덕성에 이의를 제기했고 세상의 틀에 갖히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나는 자유와 방종은 다른것이다.
그의 수많은 주장에도 불구하고 ‘절제’가 따르지 않는 자유는 방종이다 그것은 더 이상의 자유가 아니다. 그가 조금더 자신의 삶에 ‘절제’할 수 있었다면,그의 말들이, 그의 삶이 조금은 덜 공허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자신을 내려놓는 순수함이 보고 싶다.

라즈니쉬는 다른 명상가들과 달리 삶의 세속적인 즐거움을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세속적인 즐거움과 붓다의 경건함을 모두 겸비한 ‘붓다 즈르바;를 새로운 인간형, 완잔한 인간형으로 규정했다. 스스로 자신이 완전한 인간형 ‘붓다 조르바’라 칭하기도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의 삶이 내게 감동을 주지는 않지만, 그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을 떨칠 수는 없지만 한 개인이 평생을 바쳐 자신의길을 찾아내고 그 길을 걸었다는 것, 그러므로 자기를 최대한 발현시켰다는 점에서 훌륭하다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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