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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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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30일 11시 07분 등록
<오쇼 라즈니쉬 자서전: 길은 내 안에 있다>, 김현국 역, 태일출판사

1. 저자 소개

깨달음


살다가 어떤 작은 깨달음이 올 때, 책을 읽다가 내 생각을 기막히게 짚어주는 문장과 만날 때 나의 전(全)의식은 활짝 열리며 심오한 기쁨에 떨게 된다. 그런데 오쇼가 말하는 깨달음은 차원이 다르다. 그가 21살 되던 해 7일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존재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 깨닫게 되는 순간의 기쁨에 대해 묘사하는 것은 압권이다. 설명될 수 없는 그것을 언어에 담아야 하는 어려움을 감안한다면 그의 묘사를 통해 짐작해보는 깨달음이라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의 깨달음은 이 책을 관통하는 으뜸 메시지이다. 그는 이렇게 깨달음을 묘사하고 있다.

명상 7일 째 그것이 일어났다. 그 동안 나는 나 자신을 실험하며 할 수 있는 것은 뭐든 다 해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지 알게 되었다. 바로 그 얻으려는 노력이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구함을 놓아버려야 때가 오는 것이다. 찾기를 그만두는 날, 그날, 어떤 것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지 않은 그날, 그것은 일어났다. 새로운 에너지가 솟아났다. 그 에너지는 그 어떤 곳도 아니면서 또한 모든 것으로부터 오고 있었다. 내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순간, 내가 떨어져나가는 순간, 내 자신이 사라지는 순간, 나의 전존재가 나를 향해 들이닥쳤다. 전적으로 새로운 에너지의 현존, 새로운 빛, 새로운 기쁨이 너무도 강렬해서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마치 내가 폭발하는 것 같았다. 환희로 미쳐가는 것 같았다. 거세게 밀려오는 지복의 물결에 빠지는 것 같았다. 과거는 사라지고, 나는 과거에서 풀려나고 있었다. 나는 부처님이 아나타(anatta)라고 부르는 비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경계가 사라지고 구분이 없어졌다. 모든 경전은 죽었고 이런 생생한 체험을 표현하기에는 모든 말들이 시들하고 빈약했다.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나는 취해 있었다. 삼매(三昧)가 그런 것이었다. 잠들어 있으면서 동시에 깨어있었다. 몸은 자고 있었지만 나는 깨어있었다. 나를 둘러싼 방안의 현존은 거의 허리케인 같은 환희의 폭풍처럼 밀려왔다. 나는 고동치는 생명, 거대한 진동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의 몸은 비실재가 되었다. 그날 마야라는 말의 의미를 체험으로 이해했다. 하나의 깨어남이 있을 때 모든 실재는 비실재가 된다. 신, 진리, 도, 그것을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다. 그러나 그것은 거기에 있었다. 너무나 투명하게, 너무나 확실하게, 손에 만져지는 것처럼. 그것은 하늘보다 거대했다. 하늘도 그것을 담을 수 없었다. 온 대양이 나의 것이 되었고, 내가 대양이었다. 경계가 없었다. 그날 밤 나는 텅 비었고, 동시에 가득 찼다. 그날 밤 나는 죽었고 동시에 다시 태어났다. 그날밤의 죽음은 전체적이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나는 결코 다시 육체 안에 있었던 적이 없다.’

1990년 1월 19일 오후 5시, 오쇼는 육체를 떠났다. 주치의가 제안하는 처치들을 물리치고 ‘시간은 존재가 결정한다’는 말을 남기고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그의 육체는 가까운 화장터로 옮겨졌다. 이틀 뒤 재는 여러 해 동안 그가 강의를 하고 산야신들을 만났던 장자홀로 옮겨졌다. 재는 오쇼의 지지대로 ‘침대 밑’에 안치된다. 그리고 그 위로는 오쇼가 몇 달 전에 받아 적게 한 문구가 새겨진 명판이 덮여졌다. 그 문구는 이렇다.

‘오쇼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다. 단지 1931년부터 1990년 사이에 이 행성, 지구를 방문하다.’


그는 훌륭한 섹스 구루(?)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우리들이 그것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성적인 오르가슴이라고 오쇼는 주장한다. 깨달음은 명상을 통해 온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고 난 후, 그래도 열려 있는 채로 남아 있는 유일한 문이 있다면 그것이 명상이라고 그는 말한다. 다른 모든 문들은 이미 다 두드려보았다. 그리고 더 이상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오직 하나의 문, 명상만이 그대를 초대하며 아직 열려 있다. 그 문으로 들어간 사람은 아무도 좌절하거나 실망한 채 돌아오지 않았다. 인류 역사상 자기 존재의 중심에 도달한 사람이 실망하거나 비참함을 느끼거나 자살한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명상은 그대를 궁극의 지복으로 데려간다. 성적인 오르가슴은 그대에게 명상의 첫 번째 일별을 준다. 마음이 멈추고 시간이 멈추기 때문이다. 그 짧은 순간에는 시간도 마음도 없다. 전적인 침묵과 지복 속에 있을 뿐이다. 그것이 그의 책 <성으로부터 초의식으로>의 주제이다. 사람이 마음, 시간, 생각을 넘어선 영원한 침묵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어떤 문, 어떤 길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방법이 성적인 오르가슴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한 순간 동안만 지속되지만, 깨달음은 영원하다고. 그렇게 설명하니 정말 이해가 잘 간다. 성적인 오르가슴을 통해 우리 삶 속에 더 큰 무엇인가가, 더 높은 무엇인가가, 거 훌륭한 무엇인가가, 훨씬 더 행복하고 훨씬 더 큰 오르가슴을 주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유추해보는 것, 그래서 깨달음을 사모할 수 있다면, 라즈니쉬는 정말 훌륭한 섹스 구루다.

그의 섹스관을 조금 더 살펴보자. 섹스란 단순하고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만약 두 사람이 에너지를 나누고 싶어한다면 그것은 누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섹스는 모든 사람이 타고난 권리다. 그것은 즐겁다. 그 안에 심각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내가 프리섹스를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불쌍하다. 그들은 성적으로 억압된 사람들이다. 사랑을 나눈 후에는 잠시 동안 앉아서 좌선을 하라. 그대는 섹스의 주인이었나 노예이었나. 나는 결코 프리섹스를 가르치지 않는다. 내가 가르치는 것은 섹스의 신성함이다. 나는 섹스가 사랑의 영역에서 법의 영역으로 떨어져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아, 뜬금없이 왜 이 대목에서 바울의 로마서 강해가 떠오르는가.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 손에 쥐어준 은혜의 법을 바리새적인 율법의 영역으로 떨어뜨리지 말라고 가르친다).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를 들어 섹스를 한다면 그것은 매춘이다. (아내이기 때문에, 남편이기 때문에 하는 섹스도 매춘인가? 그는 그렇다고 한다. 합법적이든 아니든 그것은 마찬가지라고.) 만약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한다면 서로 사랑하는 한 함께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이 사라지는 순간 그들은 감사하며 헤어져야 한다(매우 이상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어디 현실이 그럴 수 있나. 사랑이 식어도 언약에 대한 성실과 신뢰로 관계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결혼이 아닌가. 결혼하지 않은 커플들에게만 하는 말이 아닌 이상, 그의 이런 발언은 논쟁의 여지가 많다). 나는 결코 프리섹스를 주장한 적이 없다. 내 책 400권 중에 섹스에 관한 것은 단 한 권의 책에서만 다루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399권의 다른 책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섹스에 관계된 그 책(그 책마저 섹스를 지지하는 것이 아닌, 성 에너지를 어떻게 영적 에너지로 변형시킬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에만 관심을 가지고, 나의 철학을 오직 두 단어 프리 섹스’로 한정해버렸다. 언론 역시 진실에는 관심이 없고 선정성에만 관심이 있다.

1990년 이후

1974년 3월 21일, 오쇼가 깨달은 지 정확히 21년이 지난 후 인도 푸나의 코레곤 파크로 이사한다. 그 자리에 오쇼 코뮨 인터내셔널(Osho Commune International)이 세워졌다. 이 코뮨은 현재 그의 비전에 따라 전 세계 사람들을 위한 명상과 자기 발견을 위한 리조트로 사용되고 있다.

오쇼는 푸나 코뮨의 발전 방향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나의 길, 흰구름의 길>에 밝혀두었다. ‘흰구름의 길이란 갈 곳도 없고, 어디로부터도 오지 않으며, 단지 지금, 여기 이 순간에 머무르는 것, 그것으로 완벽하다’고 가르친다.

이 책 에필로그에 담겨진 코뮨에 대한 그의 비전은 이렇다.

이 아쉬람은 속세의 한 부분으로 운영된다. 나는 이 코뮨이 절대적으로 속세 속에 있기를 원한다. 나는 나의 산야신들이 산으로 들어가기를 원치 않는다. 명상은 세상 속에서 성장해야 한다. 그들의 명상은 현실 도피가 되어서는 안된다. 존재에 대한 나의 신뢰는 절대적이다. 나의 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단지 그 횃불을 들고 가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이 스스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사랑과 같은 특질, 그 주위에는 어떤 교회도 생겨날 수 없다. 깨어있음과 같은 특질, 그것은 그 누구의 독점물이 될 수 없다. 나는 나의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에 따라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그들이 그들 자신을 알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길은 안에 있다.”


2. 마음에 들어오는 글귀

그렇다. 나는 새로운 시작이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종교의 시작은 아니다.
나는 어떠한 형용사도, 어떠한 경계도 모르는,
오직 영혼의 자유만을,
오직 그대 존재의 침묵만을,
오직 그대 잠재력의 성장만을,
그대 밖의 신이 아닌 오직 그대 자신으로부터 흘러넘치는
신성(神性)만을,
그대 안에 존재하는 그 신성의 경험만을 아는
나는 완전히 새로운 종교성(religiousness)의 시작이다.

9. 그는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신문기사 모음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진리가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12.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가 누구냐'이다.

14. 역사학은 진실에 대해 다루지 않는다. 진실은 물질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의식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아직 의식의 사건들을 다루기에 충분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 인간은 확실히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주목한다… 인간은 시간 너머에서, 공간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에 다른 말로 하면 마음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목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고 그 만큼 통찰력을 갖추지 못했다.

20. 나에게 있어 영성은 단지 자신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누구에게도 나를 대신하여 이 일을 하도록 하지 않았다.

25. 어린 시절 동안 니는 너무나 외로웠고 그래서 나는 그 외로움을 즐기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하나의 즐거움이며 다라서 그것은 나에게 천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축복이었다.

28. ..이 아이에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해요.

35. 가르치지 않는 것, 그것이 대단한 점이다. 무력한 아이에게 자신의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는 유혹 당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가장 큰 유혹이라 부른다. 그대가 어떤 식으로든 그대에게 의존하고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그대는 가르치기 시작한다.

40. 그대는 스승과 선생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알고 있다. 스승은 그 스스로 알았고 자신이 안 것을 나누어 준다. 선생은 알게 된 사람으로부터 받은 것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41. ‘안다고요, 뭘 알지요. 앎의 대상이 무엇이죠. 앎의 대상은 없다. 알아야 할 것은 없다. 오직 아는자가 있을 뿐이다.

51. 지식은 그대를 매우 교활하게 만든다. 나는 교활하지 않았다. 나는 교육받지 않은 어린아이라면 누구나 물을 수 있는 질문을 했을 뿐이다. 교육은 인간이 불쌍한 어린아이들에게 저지른 가장 큰 범죄다.

53. 당신이 타고난 말썽꾸러기라고 생각하는 그 아이는 씨앗이예요. 거기서 무엇이 나올지는 아무도 몰라요.

53-54 나는 조르바 붓다다. 나는 동양과 서양, 높은 것과 낮은 것, 남자와 여자, 선과악, 신과 악마를 나누지 않는다. 나는 이제까지 나누어졌던 것을 다시 합친다.

54. 씨앗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나무와 그 꽃의 피어남 그리고 어쩌면 가지들 사이로 보이는 달까지도 놓치게 될 것이다.

54. 나는 모든 종류의 자기 학대에 대해 알레르기가 있다. 나는 모든 인간이 한껏 살길 바란다. 최소한은 나의 길이 아니다. 최대한도로 살아라.

55. 나는 삶을 길고 긴 고문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반대한다.

56. 바꾸기에 너무 늦는 법은 없어요. 당신의 선책이 옳지 않았음을 알았으면 바꾸세요.

57. 헤어짐은 그 나름의 시(時)를 지니고 있다. 사람은 단지 그 헤어짐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한껏 그 깊이를 체험해야 한다.

60.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안 사람에 대한 나의 사랑 뿐이다.

62. 사랑에 빠지는 데는 ‘왜’가 없다. 나는 그저 그를 보았고 그것이 전부였다.

68. 오직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속에서만 죽음을 만날 수 있다.

69. 사랑 없이는, 죽음은 그대에게 존재로 가는 열쇠를 주지 않는다. 사랑이 있을 때, 죽음은 그대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 통하는 열쇠를 건네준다.

69. 자유가 함께 하는 사랑, 만약 그대가 그것을 갖는다면 그대는 왕이나 여왕이다. 사랑은 그대에게 땅으로 통하는 뿌리를 주며 자유는 그대에게 날개를 달아준다.

76. 저는 제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랑자가 되기를 선택한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겠어요. 능력이 있으면서도 말이에요. 그렇다면 방랑자라고 해도 존경받을 만해요. 존경은 직업과는 아무 관계도 없으니까요. 존경은 그 사람의 행동이 힘과 명료함, 지성으로부터 나오고 있느냐와 관계가 있어요.

86. 인도에서는 감옥과 학교가 같은 색으로 칠해져 있고 모두가 붉은 벽돌로 지어져 있다.

93. "교육 따위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어요. 하지만 저의 자유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어요. 아무도 이유 없이 저를 괴롭힐 수 없어요. 저에게 교육법전을 보여주세요. 저는 읽을 수가 없으니까 모든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데요 창 밖을 내다보는 게 법에 어긋나는지 알려주세요."

100. 그대라 흐르는 것들, 움직이는 것들과 사랑에 빠지게 될 때, 그대는 삶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된다. 현대인은 아스팔트길, 시멘트와 콘크리트 건물들과 함께 산다. 이러한 것들은 명사들이다. 기억하라. 이러한 것들은 동사들이 아니다.

100. 신은 사물이 아니라 과정이다.."

115. 몇 번쯤 넘어지고, 다치고, 다시 일어서는 것은 좋다. 몇 번쯤 길을 잃는 것은 좋다. 해가 될 것은 없다. 그대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돌아오라. 삶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워야 한다.

119. 저는 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를 거예요. 저는 기꺼이 실수와 잘못을 저리를 거예요. 그것만이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요.

123. 만약 어떤 신이 있어서 언젠가 내가 그를 만난다면 그는 나에게 화를 낼 수 없어. 오히려 내가 그에게 화를 낼 것이야 '왜 당신은 세상을 이렇게 창조했소?'라고, 나는 두렵지 않다.

125. "저는 결코 생각하지 않아요. 잘 아시잖아요. 저는 단지 볼 뿐이에요. 그리고 선택의 문제는 없어요. 저는 제가 뭘 공부하게 될지 알아요. 그것은 어떤 직업이 더 유리할지 저울질해볼 문제가 아니에요. 거지가 될지라도 해도 저는 철학을 공부할 거예요."

127. 괜찮아요. 왜냐하면 저는 그 모든 조언들을 결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저는 결코 신경 쓰지 않았어요. 제가 하려는 일이 무엇이었든지, 저는 누가 뭐래도 그것을 했을 거예요. 그러니 죄의식을 느끼지 마세요. 저는 결코 여러분들의 조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여본 적이 없어요. 그 말들을 듣고 있기는 했지만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어요. 저는 제 속에 하나의 결정을, 확신을 가지고 있었어요."

129. 만약 내가 그대의 죽음만 볼 수 있다면 나는 그대의 모든 전기를 쓸 수 있다. 왜냐하면 그 한순간 속에 그대의 전 생애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한 순간 속에서 마치 섬광처럼 그대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

140. 만약 그대가 죽음을 받아들였다면 두려움은 없다. 만약 그대가 삶에 집착한다면 그때는 모든 두려움이 거기 있다.

141. 내가 파리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기로 결정한 순간, 짜증은 사라졌다. 파리들은 여전히 몸 위에 있었지만 나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파리들이 마치 다른 누군가의 몸 위를 움직이고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즉시 하나의 거리가 생겼다.

147. 나는 그들이 나를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여준 것이 한없이 행복했다. 그것은 나에게 엄청난 자유를 주었다. 아무도 나에게서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대에게서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을 때, 그대는 침묵에 빠진다. 세상이 그대를 그대의 모습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제 그대 쪽에서도 아무런 기대가 없다.

159. 마음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돈을 원하고, 권력을 원하고, 명성을 원한다. 그리고 마침내 외적인 일들에 질리게 되면 마음은 깨달음을, 해탈을, 니르바나를, 신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똑같은 욕망이 돌아온 것뿐이다.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다.

168. 그대는 그대와 그대의 희망 사이의 거리를 줄일 수 없다. 희망은 지평선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과 지평선 사이에, 희망 사이에, 투영된 욕망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 한다.

238. 나의 통찰 속에서 과학, 종교, 예술, 그것은 하나의 삼각형이다.

240. 나는 모든 독서를 통해 배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독서는 다른 목적을 위한 것이었고 그 목적은 나의 메시지가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하는 것, 지역적인 한계들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었다.

241. 나는 어떠한 형용사도 없는 단지 나 자신이 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너무나 큰 통합과 개인성, 진정함, 그리고 충족감에서 오는 엄청난 지복을 주었다.

275.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이야기한다. 나 자신도 다음 단어가 무엇이 될지 알지 못한다. 때문에 나는 어떤 실수도 범하지 않는다. 사람은 준비를 할 때 실수를 범한다. 나는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은 어떤 것을 기억할 때에만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그 어떤 강연자도 누리지 못하는 자유를 가지고 이야기한다.

280. 왜 내가 고타마 붓다나 보디다르마, 예수 그리스도에 의존해야 하는가?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이해와 통찰에 따라 그들의 삶을 살았다. 나는 나의 이해와 나의 통찰에 따라 나의 삶을 산다.

281. 깨달음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고 똑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이며 유일한 경험이다.

300.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대의 아내이기 때문에 한 여자를 사랑해야 하게 되는 그 순간, 그것은 매춘이다.

303. 나는 종교성을 하나의 특질로 본다. 그것은 조직의 회원권이 아닌 자신의 존재에 대한 내적인 경험이다.

315. 신은 없다. 그러나 모든 꽃 속에, 모든 나무 속에, 모든 돌 속에 신성이라고 밖에는 부를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그러나 그대는 오직 그대 자신 안에서 그것을 보았을 때에만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그 언어를 모른다.

329. 부유한 자가 종교적이지 않다면 그는 어리석은 것이다. 가난한 자가 종교적이라면 그는 엄청나게 총명한 것이다.

333. 지성이 가난하고 돈이 가난한 사람이 종교적이 되는 것을 결코 본 적이 없다.

337. 정말로 명상적인 사람은 장난스럽다. 그에게 삶은 재미다. 그에게 삶은 하나의 놀이이다. 그는 심각하지 않다. 이완되어 있다.

346-347. 모든 물질적 욕구들이 충족되었을 때, 이제 그대는 무엇을 할 것인가? 명상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것만이 아직도 열려 있는 채로 남아 있는 유일한 문이다. 다른 모든 문들은 그대가 이미 두드려보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오직 하나의 문만이 그대를 초대하며 아직 열려 있다. 그 문으로 들어간 사람은 아무도 좌절하지 실망한 채 돌아오지 않았다. 인류 역사상 자기 존재의 중심에 도달한 사람이 실망하거나 무의미함과 비참함을 느끼거나 자살한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명상은 그대를 궁극의 지복으로 데려간다.

363. 현자들이 설명해온 모든 가르침은 다름 아닌 ‘아, 이것!’이라는 그대의 갑작스런 외침에 대한 주석들에 지나지 않는다.

365.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배추벌레와 나비의 관계이다. 배추벌레와 나비의 우정이다. 나비는, 배추벌레가 나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논리적인 방법은 없다. 그러나 나비는 배추벌레 안에 하나의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368. "지금의 내가 무엇이든 그것은 나의 선택이다. 과거가 아닌 현재의 선택이다. 그것은 이 순간의 나의 선택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것을 바꾸고 싶다면 그것을 바꾸는 것은 절대적으로 나의 자유이다.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다. 어떤 사회적 강요도, 어떤 국가도, 어떤 역사도, 어떤 경제도, 어떤 무의식도 나를 막을 수 없다. 만약 내가 그것을 바꾸기로 결심했다면 나는 그것을 바꿀 수 있다."

384. 진정한 종교는 이름이 없다. 결코 어떤 이름도 가질 수 없다.

386. 과학은 객관적 세계 안에서의 진리에 대한 탐구이며 종교는 주관적인 세계 안에서의 진리에 대한 탐구이다.

386. 물질의 차원 안에서의 앎을 그대는 객관적인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그대의 내면성의, 그대의 내면의 존재의, 그대의 의식의 차원 안에서의 앎, 그것을 그대는 주관적인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종교라는 말은 필요치 않다.

387. 믿지 말라. 물어라. 그대가 믿는 그 순간 질문은 멈춘다. 그대의 마음을 열어두라. 믿지도 말고 믿지 말지도 말라. 단지 깨어 있는 채로 모든 것을 탐구하고 의심하라, 그대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지점에 이를 때까지.... 그것이 진리이다.

393. 이제 나의 노력은 그들이 신을 해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종교 또한 해체하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잊혀질 수 없는 것으로서 오직 명상만을 남겨두는 것이다. 명상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신도 없고 종교도 없다. 내가 종교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은 조직화된 교리, 교의, 제식, 성직자들이다. (무척 정확한 통찰이다. ?조직화된 종교는 권력에 의지하면서 정치적인 현상으로 변질된다).

397. 물고기는 대양의 일부이며 떨어져 있을 수 없다. 모든 고통은 그대가 존재와의 교감 속에 있지 않는다는 것을, 물고기가 대양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397. 명상은 생각, 감정, 감상과 같은 그대와 존재 사이의 벽을 만들어낸 모든 것들을 치우는 것에 불과하다...이슬 방울이 연잎에서 미끄러져 대양 속으로 떨어질 때 이슬방울은 자신이 대양의 일부라고 느끼지 않는다. 바로 대양자체라고 느낀다 그리고 그것이 깨달음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궁극적인 깨달음이다.

398. 나는 그 누구도 개인과 존재 사이에 서기를 바라지 않는다. 기도도, 성직자도 필요치 않다. 그대 혼자서도 충분히 일출을 바라볼 수 있다.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해줄 사람이 필요치 않다. 그대가 거기 있고 전 존재가 그대의 것이다.

399. 그대에게 필요한 건 단지 침묵하고 존재의 소리를 듣는 것 뿐이다. 어떤 종교도 필요하지 않다. 어떤 신도 필요하지 않다. 어떤 성직자도 필요하지 않다. 어떤 조직도 필요하지 않다. (밑줄 친 부분은 2008년 9월 11일 아침에 다시 읽다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와서 여기 첨부한 것이다. 나는 크리스천이지만 기독교에서의 교리가 오쇼가 말하는 깨달음과 근본적인 것에서는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게 되었다. 물방울과 대양, 대양을 떠난 물고기, 전존재(신),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우리 인생의 번뇌... 신에게서의 분리를 의미하는 금단의 사과 사건, 에덴에서의 추방...)

407. 마음은 주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인이 되어야 한다. 하인으로서 마음은 아주 훌륭하다. 주인으로서 마음은 위험하다. 그대가 마음의 주인이어야 한다.

410. 신 때문에 그대의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단지 이 한 단어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시간을 낭비한다. 어떤 사람을 신을 증명하려 하고 어떤 사람은 신이 없음을 증명하려고 한다. 위대한 논문들이 쓰여지고, 신에 관한 책은 다른 어떤 책보다 많다. 그대의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방법은 있다.

412. 매일 하루 60분 동안만 세상에 대해 잊어라. 세상이 그대에게서 사라지게 하라. 그리고 그대도 세상으로부터 사라져라. 방향을 180도 돌려 단지 안을 보아라. 처음에는 구름들만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 그 구름들은 그대의 억압이 만들어낸 것들이다. 그대는 분노와 미움, 탐욕, 온갖 종류의 블랙홀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거들을 억압했다. 때문에 그것들이 거기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의 소위 종교들은 그런 것들을 억압하라고 가르쳐왔다. 그래서 그것들은 상처처럼 거기 있는 것이다. 그대는 그것들을 숨겨왔다.

416. 모든 사람들의 100도가 각각 다르다. 사람 또한 100도에서만 수증기로 변하지만 모든 사람의 100도는 서로 다른 것이다.

425. 명상은 무엇에 '대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중심 밖에서의 어떠한 움직임도 없다. 조금의 움직임도 없다. 한 점의 흔들림도 없을 만큼 전적으로 그대 자신이 될 뿐이다. 내면의 불꽃은 움직임이 없다. 타인은 사라졌다. 오직 그대만이 있다. 단 하나의 생각도 거기 없다. 온 세상이 사라졌다. 마음은 더 이상 거기 없다. 그대의 절대적인 순수 속에 오직 그대만이 있다.

429. 그대의 마음과 존재 사이에 거리를 창조할 때 그 때 기적이 일어난다. 그대가 마음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때, 마음의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 마음 그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마음은 그대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다. 정신분석은 집을 수리하는 것과 같다. 사람의 의식을 변형시키지 못한다.

430.붓다의 심리학은 마음 안에서 작업하지 않는다. 붓다의 심리학은 단순히 그대가 마음으로부터 나올 수 있도록, 그래서 바깥으로부터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바로 그 바라봄이 곧 변형이다.

432. 그대가 더 이상 마음에 에너지를 주고 있지 않을 때, 이것이 진짜 명상이다. 명상은 초월의 기술이다.

433. 그대의 마음을 더 자각하라. 그러면 마음을 자각하는 가운데 그대는 그대가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혁명의 시작이다. 그대는 높이 더 높이 솟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대는 더 이상 마음에 붙잡혀 있지 않다. 마음은 바윗덩이와 같은 작용을 하여 그대를 아래로 끌어 내린다. 마음은 그대를 중력의 장(場) 안에 붙잡아 둔다. 그대가 어 이상 마음에 붂여 있지 않게 되는 순간 그대는 붓다장(buddhafield)으로 들어간다.

434. 우리는 심리치료요법으로는 치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심리치료요법은 그대가 그대 자신의 상처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울지는 모른다. 그러나 치유할 수는 없다. 치유는 그대가 더 이상 마음에 붙잡혀 있지 않을 때 찾아온다. 그대가 마음으로부터 분리될 때, 비동일시 될 때, 완전히 벗어날 때, 속박이 끝날 때, 그때 치유가 일어난다.

443 .이제 동양과 서양이라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동양은 서양을 향해 돌아서고 서양은 동양을 향해 돌아서고 있다. 머지않아 동양도 서양도 없어질 것이다. 하나의 세계만이 있을 것이다.

446. 오직 죽음이 앗아갈 수 없는 것만이 진짜다.

448. 그대의 인생의 3분의 1은 잠을 자는데 들어가고 또 3분의 1은 교육에, 배우는데 들어간다. 뭐가 남는가?그 중 많은 부분은 밥벌이에 들어간다. 만약 그대가 모든 것을 계산해본다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70년 가운데 그대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은 7년도 되지 않는다. 당연히 급할 수밖에 없다. 미친 듯이 달려갈 수밖에 없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미쳐서 달려갈 수밖에 없다. 그대가 염두해 두는 것은 그대가 빨리 가고 있느냐는 것뿐이다. 수단이 목적이 된다.

463. 그대가 외적으로 부유할 때, 그때에만 그대는 그 대비를 통해 그대의 내적 가난을 깨닫게 된다. 그대가 외적으로 가난할 때, 대비될 것이 없기 때문에 그대는 결코 그대의 내적 가난함을 깨닫지 못한다.

474. 나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인류, 그리고 궁극적으로 양쪽 모두를 다루는 하나의 과학을, 종교와 과학의 만남을 지지한다. 내면과 외면 모두를 다루는 하나의 과학을 지지한다..명상과 사랑, 이것이 삶의 양극이다..

483. 나의 신인간 개념은 그리스인 조르바도 되고 고타마 붓다도 될 것이다…구인간의 이상이 세속의 포기였다면 신인간의 이상은 기쁨일 것이다.

487. 서양은 지나친 과학으로 고통 받고 있다. 동양은 지나친 종교로 고통 받아왔다. 이제 우리는 종교와 과학을 하나의 인간 안의 두 가지 측면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새로운 인류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다리는 예술이 될 것이다.

490. 나의 내면 깊은 곳의 존재에 있어서 만큼은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다만 똑같을 뿐이다. 외부상황은 변할지 몰라도 그대의 의식은 한 치의 변화도 없이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나의 가르침의 전부이다. 외부상황은 변한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다…그러나 그대 안의 무엇인가는 언제나 그대로이다. 그리고 바로 그 무엇인가가 그대의 실체이다. 나는 나의 실체 안에 살 뿐이다. 나는 실체를 둘러싼 모든 꿈과 악몽들 속에 살지 않는다.

493. 세상엔 오직 해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명상이 그것)

495. 첫 번째 금언은 현재에 살라는 것이다…두 번째 금언은 자연스럽게 살라는 것이다….세 번째 금언은 홀로 살라는 것이다.

496. 사랑과 명상은 성적인 에너지의 변형에서 일어나며 성이 억압되면 그 에너지는 변형될 수 없다.

502. 남성의 길은 각성의 길이다. 그리고 각성은 그대가 자신의 존재의 주인이 되는 지점으로 그대를 데려간다. 그것이 '스와미'의 의미이다. 여성의 길은 사랑의 길이다. 그리고 사랑은 그대가 전 존재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 궁극적인 지점으로 그대를 데려간다. 그리고 그것이 '마'의 의미이다.

505. 그대 안에 하나의 혁명을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음을 넘어 의식의 세계 속으로 가는 것이다. 그것 외에는 어떤 것도 종교적이지 않다.

508. 부디 내가 그대에게 말해왔던 것들에 집착하지 말라. 오히려 내가 그대에게 행하도록 설득했던 것들에 집착하라. 그것을 하라. 그러면 언젠가 그대는 내가 말했던 것들이 모두가 의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내가 말했던 것들에만 계속 집착한다면…그대는 앎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말했던 모든 것은 심지어 방해가 될 수도 있다.

511. 록, 재즈, 그 밖에 혼돈스런 음악들은 그대 안의 무언가가 밖으로 나오도록 돕는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바로 억압된 성욕이다…그대 자신을 풀어 놓아라. 사회가 그대에게 강요해온 것들, 상황이 그대에게 강요해온 것들을 모두 끄집어내라. 그것들을 끄집어내라. 그대 자신을 그러한 것들로부터 풀어놓아라.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라.

512. 만약 내가 그대에게 한 시간을 준다면 그대는 쓰레기 같은 소리들을 지껄인다. 만약 내가 그대에게 일 분을 준다면 그대는 정확히 필요한 그것을 이야기한다. 그것이 마음이 작용하는 방식이다.

514. 흰구름은 갈 곳도 없으며, 어디로부터도 오지 않으며 단지 바로 이 순간에 머무는 것, 그것으로 완벽하다.

517. 오직 그대가 나의 부재를 느낄 때에만 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다.

518. 그대는 그대 자신을 길을 찾아야 한다. 각자가 그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한다. 나는 그대 앞에 모든 길들을 펼쳐놓아 그대가 보고 느낄 수 있게 할 것이다. 올바른 길이 나타날 때면 그대는 즉시 그대 안에 커다란 기쁨이 일어나는 것을 알 것이다. 그것이 신호이다.

520. 나는 결정하지 않는다. 나는 그대를 들여다보고, 그대를 느끼고, 그대가 볼 수 없는 그대 자신의 가슴을 보고, 그리고 그 가슴이 결정하게 한다. 따라서 나는 기껏해야 그대의 가슴을 그대 자신에게 해석해 주는 것뿐이다. 나는 산파이다.

521. 그대에게 어떤 문제가 일어난 것을 발견했을 때, 그것은 하나의 좋은 기회이며, 도전이며, 결정적인 순간이다. 그 순간을 창조적으로 이용하라. 수단과 방법을 찾아내라. 조용히 그대 자신의 가슴의 소리를 들어라.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의 확신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좋다.

523. 그대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마라. 나누라. 그러나 강요하지 말라. 나눔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나눔은 타인을 매우 존중하는 것이다. 나눔은 폭력적이지 않다. 그러나 강요는 폭력적이다.

543. 욕망 없이 살아라. 모든 욕망은 그대를 삶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현재를 희생시키기 때문이다. 탐욕스러워지지 말라. 왜냐하면 탐욕은 그대를 미래로 데려가기 때문이다. 소유욕에 사로잡히지 말라. 왜냐하면 소유욕은 그대를 과거에 집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현재 속에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탐욕과 소유욕, 야망, 욕망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572. "나는 결코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을지를 계획하지 않소. 나는 약속을 할 수 없소. 그리고 내가 뭔가 잘못된 것을 본다면, 그때는 그것이 힌두교인지, 기독교인지, 이슬람교인지는 문제가 아니요. 나는 그것에 반대하는 이야기를 할 것이오."

574. 그들(그의 방문을 저지하는 미국)은 죽은 것을 위해 싸우고 나는 태어나지 않은 것을 위해 싸운다. 그리고 존재의 결정은 언제나 생명을 향해 있다.

590. 어떤 종류의 의존도 노예상태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영적인 의존은 노예상태 중에서도 가장 나쁜 노예상태이다.

593.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종교만이 있으며 그것은 사랑이라는 종교이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신만이 있으며 그것은 축하라는, 삶이라는, 기쁨이라는 신이다. 이 모든 지구는 하나이며 모든 인류는 하나이다. 우리가 모두가 서로의 일부분이다.

601. 그대 안에 존재하는 두 개의 층을 깨뜨려야 한다. 억압된 웃음과 울음이 그것.

605. 그 중심에서 그대는 붓다이다.

614. 붓다의 마지막 말은 사마사티(sammasati)였다.그대가 붓다라는 것을 기억하라, 사마사티.

615. 일단 그대가 죽고나면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그대는 막을 수 없다. 무지한 자들에게는 그일을 맡기는 것 보다 올바른 지침을 주는 것이 낫다.

622. 나는 나의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에 따라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들이 그들 자신을 알기 바란다. 그리고 그 길은 안에 있다.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전통적인 의미의 자서전은 아니다. 오쇼가 살아생전 쓴 자서전이 아니라는 얘기다.그는 자서전을 비롯, 일체의 자기 흔적을 남기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사람들이 ‘역사’라고 부르는 갇힌 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는 진리’에 있었다. 이 자서전은 오쇼와 그가 행한 일에 대해 분분하게 엇갈리는 주장과 몰이해, 심지어는 비난들에 대해 의미있는 정황을 제공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고 판단한 후세 사람들의 자각에 의해 제작되었다. 그것은 오쇼가 자주 얘기했던 국경과 종족, 종교, 성, 교의의 구분이 없는 세계가 아직은 현실이 되지 못했다고는 해도, 적어도 그런 세계에 대한 전망이 점차 확산되고 있고, 오쇼의 독특한 선견과 통찰력을 더 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이 책은 시대와 과학기술에 힘입어 탄생했다. 오쇼의 광대한 저작들(현재 약 600여권)은 5천 시간의 영어 강의와 수백 편에 이르는 힌디어 강의 번역물로 디지털화되어 있고, 그런 자료들은 이 책의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이 지향하는 바는 오쇼가 평생 중요하게 생각해온 대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독자들 스스로가 자신에게 묻게 하는 일일 것이다. 오쇼는 ‘현자들이 설명해온 모든 가르침은 다름아닌, ‘아, 이것!’ 이라는 당신의 갑작스런 외침에 대한 주석들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그는 기쁘게 그의 가르침이 당신의 깨달음의 주석이 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의 전 존재가, 당신의 몸과 마음과 영혼의 세포 하나하나가 춤을 추게 되기를, 오든(Auden)이 노래하듯이 ‘불현듯 서까래에서 별이 떨어지기를’(363) 바랄 것이다.

‘춤을 추어라, 서까래에서 별이 떨어질 때가지!
춤을 추고, 춤을 추고, 춤을 추어라, 그대가 떨어질 때까지.’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서의 깨달음

이 책은 오쇼가 직접 쓴 책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자서전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오쇼의 강의록에서 발췌한 주요 내용들과 그의 회고를 자서전 형태로 연결하고 있기 때문에 오쇼의 가르침의 큰 줄기를 일목요연하게 잘 파악할 수 있다. 오쇼의 주장들은 매우 파격적이다. 명상에 대한 배경 지식마저 없이 읽는다면 쇼킹하게 다가올 만한 내용들이 많고, 기존 제도권 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이 책은 경악을 금치 못할 책이다. 그러나 그런 독특함과 파격이 이 책의 내용을 흥미롭게 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단순히 파격만 있는 책도 아니다. 여기저기 주옥같은 통찰들로 가득해서 머리 속에 주워담을 것들이 많은 책이다. 특히 '21세기 명상'과 '붓다의 심리학' 장에서 다루는 내용들은 더욱 그러하다. 기존 종교들이 조직화되면서 권력으로 정치화되는 현상이 가져오게 된 병폐라든가 기존 종교와 심리치료, 정신분석학 같은 테라피들이 갖는 한계에 대한 통찰, 그리고 명상에 대한 물흐르듯 통쾌한 설명과, 동양과 서양의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비교, 파시즘과 나치즘의 집단적 광기 등에 대한 그만의 독특한 해석 등은 등줄기를 시원하게 해준다.

그러나 정확한 기록에 의거한 것이 아닌, 오쇼의 회고에 의지하여 서술한 어린 시절의 일들에 대해서는 상당히 미화된 느낌이다. 간간히 사(詐)자 냄새가 나는 것 같은 곳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그는 처음부터 매우 종교적이고 영적인 인물로 태어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인식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매우 특이한 일이다. 자이나 교도인 외할아버지의 스승에게 ‘당신은 경험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믿지 말라고 했는데, 7번째 지옥(자이나 교도들은 일곱 개의 지옥을 믿는다)엔 가보셨나요?’ 라고 질문하는 것이나, 학교에 처음 간 날, 산수를 가르치는 칸타르 선생을 무시하고 창밖을 보다 적발되자 ‘산수 시간에 창밖을 보는 일이 왜 법에 어긋나는지를 설명해달라’고 요청하는 당돌함은 다섯살이나 일곱살 짜리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영화에서나 가능할 법한 일이다. 그의 삶은 그런 일들의 연속이다.

내가 필리핀에서 살 때 사람들은 대부분 두 가지 취미에 몰두했다. 골프와 스킨 스쿠버 다이빙. 내 친구 스쿠버 다이버들은 못보고 산 반쪽 세상의 아름다움에 찬탄을 금치 못하며 내게 스쿠버 다이빙을 권했었다. 그들에게 나는 물 밑 세상에 관한 한 장님과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종교의 세계는 어떤가. 우리는 그동안 또 하나의 반쪽 세상에 살았다. 서양 문화가 공급한 세계 종교의 반쪽인 기독교 속에서 말이다. 그런 우리에게 불교와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는 이해할 필요 조차 느끼지 못하는 먼 이방의 종교였다. 종교에 관한 한 우리는 매우 일방적이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이 리뷰를 쓰기 전에 티브이 다큐 프로그램을 보았다. 마침 ‘예수는 신의 아들인가, 사람의 아들인가’ 하는 이슈로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담은 내용이 방송되고 있었다. 예전에 나는 그런 프로그램은 아예 보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어느 매체든 제작하는 사람의 입장이 일단 서 있으면 그들이 상정한 입장을 지지하는 쪽으로 얼마든지 프로그램을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객관적인 진리는 왜곡되고 사람들은 진실 아닌 것을 진실처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에서 주장하는 것들은 매우 낯이 익은 내용이었다. 그 동안 읽은 캠벨 책의 주장과 너무 비슷했다. 기독교의 이야기들은 신화로 읽혀야 한다는 것과, 예수가 이룬 기적이나 동정녀 탄생설 등은 상징으로 읽혀야 한다는 것, 예수는 현존한 인물이었지만 신의 아들은 아니었다는 것들을 많은 역사적 사료들과, 상반된 입장의 성서 신학자들의 주장을 모아 매우 객관적으로 조명하고 있었다.

TV에 가까이 다가 앉아 그런 프로그램을 주의깊게 시청하는 것이나, 오쇼의 책을 무리 없이 읽고 있다는 것은 내게는 일단의 진보다. 관심이 별로 없었던 세계에 대한 관심이며, 그런 관심과 함께 새롭게 다가오는 세상에 대해 편견 없이 바라보려는 노력이다. 이 책은 다른 종교(종교라기 보다는 종교적 지향, 혹은 종교성이라고 해야 옳겠지만)에 대한 내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었다. 21세기는 그 어느 시대보다 문명 간 교류가 확대되고 나라 간 경계가 빠르게 허물어지고있는 시대다. 종교 또한 다르지 않다.

니체는 말했다.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는 한 병이 낫지 않는다’고. 이 말을 나는 언제부터인가 나의 변화의 모토로 삼고 있다. 소소한 작은 것들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만족하는 한 내 삶은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경험으로 알았다. 작은 변화도 삶의 방식의 변화라는 커다란 목표 안에서만 의미있는 것이다. 제도 교육권에서 벗어나 있는 내게 배움이라는 것은 주로 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내게 배움이란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 책 읽기란 바로 ‘삶의 방식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통찰을 건져내는’ 간접적인 학습 수단인 것이다.

책은 내게 크게 두 가지 정도로 분류되는 것 같다. 당장 실천할 수 있는 매뉴얼을 제공하는 책과, 오래 음미하면서 곱씹어 보고 싶은 책, 오쇼의 책은 일단 후자의 목록에 분류되었다. 그가 소개하는 깨달음의 경험을 한 번쯤은 해보고 싶다. 그러나 아직은 내 때가 아닌지, 그가 제시하는 방법이 그다지 현실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삶의 지복에 관한 그의 통찰에 대해선 오래 기억하며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그가 유일하게 깨달은 사람이라고 인정한 모래 조각상의 이야기다. 그는 모래조각상을 만드는 한 가지 재주 밖에는 없는 사람이다. 대리석 작품을 만들면 영원히 남을텐데 왜 모래조각을 만드는냐는 오쇼의 질문에 그는 대답한다.

‘아무 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 존재는 순간적이다. 나는 그것을 만드는 일이 즐겁다. 그리고 만약 대양의 파도가 그것을 부수는 것까지 즐길 수 있다면 바다와 나는 함께 즐긴 것이다. 그러니 존재 계 안에는 두 배의 기쁨이 있었던 것이다’.

깨달음을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본다면, 조각상이라는 결과물 보다는 그것을 만드는 일의 내적인 의미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

어제 우연히 읽게 된 사부님의 책, <나, 구본형의 변화이야기>에서 발견한 프란츠 카프카의 글 하나가 이 글을 마치는 내 뇌리에 그대로 떠오른다. 삶의 황홀 속에 녹아버리고 픈 욕망과 함께.

인디언이 되었으면!
질주하는 말에 잽싸게 올라타,
비스듬한 공기를 가르며 진동하는 대지 위에서
거듭거듭 짧게 전율해보았으면,
마침내는 박차를 내던질 때까지,
실은 박차가 없었으니까,
마침내는 고삐를 집어던질 때까지,
실은 고삐가 없었으니까,
그리하여 눈 앞에 보이는 땅이라곤
매끈하게 풀이 깎인 광야일 뿐일 때까지,
그리하여 말 모가지도 말 대가리도 없이.'

- 카프카 <인디언이 되려는 소망>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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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터
2008.07.03 21:00:24 *.246.146.170
점점 산으로 갈 사람이 많아진다.

써니 누님 말을 빌자면 불목하니들이 되겠다.

우리 집에는 TV가 없는 관계로 보지 못했지만 다큐 얘기는 이슈가 되어 잠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사이비 크리스찬인 나와 독실하였다가 세상 일에 지쳐 3개월째 교회에 못 나가고 있는 여직원, 그리고 이런 중생들을 안타까이 바라보는 독실한 직장 선배 셋이 모인 자리에서 자연스레 흘러 나왔다. 신화 얘기를 하길래 나 역시도 캠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중독성이 강하다 여기.

평소에도 날건달 같았던 내 종교생활이 한 달째 파경(?)을 맞고 있는 것은 편식하던 독서습관이 바뀌면서 쌓여온 몇 가지 고민 때문이다. 고민이 심했던 것은 나에게 상담가의 가능성을 가르쳐 준 선배님이 같은 교회를 다니고 있고, 어줍잖게 교회에서 고등부 상담과 더불어 반 하나를 덜컥 맡고 있었던 때문이다. 진리나 깨달음과는 별개로 인연이란 것은 쉽게 놓아지지가 않는다. 특히나 내게 맡겨졌던 아이들에게서 등을 돌리는 일은 정말 힘들다. 그러나 내가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지금은 전화도 받지않고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다. 주역을 봐도, 도덕경을 읽어도 늘 성경과 예수가 겹쳐진다. 어찌 이리 닮은 꼴들인가? 아~ 미치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스트레스를 즐긴다. 변태에 다름 아니다.

그나저나 오쇼 라즈니쉬는 참 매력적인 인물이다. 한 20년 전쯤 한국에 "道", "丹" 이런 붐이 일 때 명상서적들도 많이 출간되었고 그 즈음에 이 양반을 알게 된 것 같다.

오늘 소은 님을 통해 오쇼 라즈니쉬를 다시 생각해 본다. 그저 고마울뿐. 사실 약간의 어설픈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번 book review를 읽어 볼 생각이 없었는데, 낯익은 이름을 지나칠 수가 없어서 클릭했다. 물론 덕분에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었고, 독특하고 거침없는 소은님의 글 덕분에 행복했다. 남는 장사했다. 일 그만하고 집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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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8.07.05 20:13:36 *.51.218.166
뉘신지,,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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