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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일 22시 23분 등록
난중일기 - 이순신 著, 이민수 譯, 범우사

● 저자에 대하여

“하늘로 날을 삼고 땅으로 씨를 삼아 온 천하를 경륜하여 다스릴 인재요,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키는 공로를 가졌다(經天緯地之材 補天浴日之功)”
“그는 이기고 죽었으며, 죽고 이겼다. 조선 전쟁의 전후 7년 사이에 조선에 책사, 변사, 문사의 유는 많지만, 전쟁에 있어서 오직 한 사람 이순신 만을 자랑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조선 전쟁에 있어서 비단 조선의 영웅일 뿐만 아니라, 3국(조선 중국 일본)을 통하여 실로 제1의 영웅이었다.”
앞의 말은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이, 뒤의 말은 왜나라의 학자인 도쿠토미(德富猪一郞)가 이순신의 공적을 일러 평한 것이다. 외국의 장수와 적국의 학자가 극찬 했을 정도로 이순신이 조선에 그리고 역사에 남긴 족적은 너무 뚜렷하다.

이순신의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1545년(인종 1년) 3월 8일 서울 건천동(지금의 중구 인현동 1가 인근)에서 덕수 이씨의 12대 손으로 태어났다. 8세때 어머니의 고향인 충남 아산으로 이사하였고, 21세인 1565년(명종 20년)에 보성군수 진의 딸인 상주 방씨와 혼인했다. 23세에 맏아들 회, 27세때 둘째아들 울을, 33세에 셋째 아들 면을 얻었다.

▷ 관직생활 = 이순신은 선조 5년(1572년) 28세때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 별과 시험 도중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져 탈락하고 선조 9년(1576년) 32세에 식년무과 병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오른다. 첫 관직은 초급장교인 권관(權管)으로 함경도에서 국경경비를 맡는 임무로 시작했다. 36세에는 전라도 발포만호(鉢浦萬戶)가 되어 포구 수비를 맡았으나 모함으로 파직 당한다. 39세때 복직되어 다시 함경북도에서 근무하게 된다. 권관직책을 거쳐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로 녹둔도(鹿屯島)의 둔전관(屯田官)을 겸하던 중 호적(胡賊)의 침입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첫 번째 백의종군을 한다.
백의종군 처분 4개월뒤 시전부락 전투에서 세운 전공으로 처벌에서 풀려난 이순신은 45세때 전라도 정읍현감에 태인관을 겸하게 된다. 2년뒤인 47세때는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수사가 되고 여수로 부임한다. 왜적이 쳐들어 올 것을 예견한 이순신은 그때부터 전쟁에 대비한 각종 준비를 한다.
48세인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순신은 병선을 이끌고 옥포, 사천, 당포, 한산도, 부산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이러한 공적으로 49세에 삼군수군통제사가 되었으나 52세때 왜군의 음모와 원균의 시기로 서울로 압송 당한다. 정탁(鄭琢)의 상소로 석방된 이순신은 다시 백의종군의 길을 걷는다. 백의종군 중 원균의 잇달은 패전에 다시 통제사로 복직하게 되고 남은 병사 백여명과 12척의 전함으로 항전태세를 갖춘다. 울독목을 이용한 해전으로 유명한 명량에서 이순신은 적선 30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린다. 1598년 9월 왜장 풍신수길의 사망으로 왜군은 조선에서 철군작전을 편다. 이순신은 철군하는 적선 500여척을 추격하여 노량해전에서 큰 격전을 벌이던 중 밤새 전투를 독려하다가 날이 샐 무렵인 11월 19일 새벽 탄환을 맞아 전사한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는 유언을 따른 노량해전에서 왜적은 500여척의 전함 중 50여척만 남겨서 남해로 달아나고 7년 간의 임진왜란이 종식된다.

이순신은 시문(詩文)에도 능하여‘난중일기’외에도 여러 편의 뛰어난 시조·한시를 남겼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이 되었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 되었으며 이어서 좌의정이 추증되었다. 1613년(광해군 5)에는 영의정이 더해졌다. 유품 가운데 ‘난중일기’가 포함된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는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었다.

▷ 백의종군 = 이순신은 관직생활 중 두 번의 백의종군을 하게 되는데 모두 모함에 의한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첫 번째 백의종군은 함경도에서 있었다. 이순신은 조산보만호로 부임한 이듬해(1587년, 선조 20년) 8월 녹둔도(鹿屯島)의 둔전관(屯田官)을 겸하게 된다. 녹둔도란 함경도 경흥에서 60리 떨어진 곳에 있는 섬이다. 이 섬은 두만강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어귀에 있었고 조산보에서는 20리 떨어져 있었다. 이순신의 맡았던 녹둔도 둔전관이란 이 섬의 농장을 관리하고 개척민을 보호하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녹둔도 둔전관을 겸하게 이순신은 지형을 조사하고 군사를 더 보내달라고 북병사(北兵使) 이 일(李 鎰)에게 공문을 여러 번 보냈지만 이 일은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이순신은 독자적으로 튼튼한 나무로 진을 세우고 그 곳에 10여명의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는 한편 백성들의 농사일을 도와주었다. 풍년이 든 것을 알고 곡식을 탐낸 오랑캐들이 쳐들어 올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섬 사람들이 논밭에 모두 나와 마을은 텅 비어있을 때, 오랑캐들이 몰래 쳐들어왔다. 그 때 마을을 지키던 진지에는 10명의 군사밖에 없었는데 오랑캐들이 많은 군사를 몰고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쳐들어왔던 것이다. 10여명의 군사들은 용감히 싸웠으나 엄청난 수의 오랑캐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추수를 돕고 있다가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군사들을 이끌고 마을로 달려와 오랑캐들에 잡혀 가던 백성 60여명을 구했다. 이 녹둔도 싸움에서 이순신의 군사는 크게 승리했지만 10여명의 전사자와 수십 명의 부상자를 내었고, 농민과 부녀자 수십 명이 오랑캐에게 끌려가는 피해를 입었다.
녹둔도 싸움 소식을 들은 북병사 이 일은 수비 군사를 더 보내달라는 이순신의 청을 거절하였던 것을 은폐하기 위해 이순신을 옥에 가두고 거짓으로 이야기를 꾸며 조정에 올렸다. 조정에서는 이 일의 보고를 받고 충무공에게 그 책임을 물어 백의종군하게 하였다.

두 번째 백의종군(두 번째 백의종군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고 논란도 적지 않다. 여기서는 인터넷에서 발췌한 일부 내용을 적었다)은 정유재란 중이었다.
정유재란때 부산에 먼저 도착한 ‘고니시유끼나가’(小西行長)는 후속 제2군 ‘가토교마사’(加藤淸正)군의 도착일시와 상륙장소를 알고 있었으므로 이를 이용해 이순신의 제거와 경쟁자인 ‘가토교마사’ 의 견제를 꾀하고자 했다. 간첩에게 “화평(和平)을 방해하는자는 가토교마사이다.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1월 15일 울산에 상륙하므로 이를 조선수군이 격파 해야 화평을 이룰수 있다” 라는 밀서를 경상도병사 김응서(金應瑞)에게 전하게 했다.
김응서는 곧 조정에 이를 알렸고 조정에서는 왕의 이름으로 수군의 출격을 명령했다. 명령은 행주산성에서 대승하여 도원사(都元師)가 된 권율(權慄)장군을 통해 한산도 이순신에게 전해졌다.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은 한산도에 통제본영을두고 왕명을 받았으나 믿을 수가 없었다. ‘고니시유끼나가’라는 왜장이 조기종전(早期終戰)을 원하고 있는것은 알고 있으나 그것 때문에 자국의 기밀을 누설하면서 동료 장군을 제거할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고이시유끼나가’가 조선수군을 유인해서 일거에 섬멸하려는 모략이라고 권율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왕명을 무시한 채 조선수군을 출동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가토교마사’는 ‘고니시유끼나가’의 밀서대로 1월 15일 울산에 상륙하여 이순신의 군령위반이 큰 문제가되었다. 그동안 이순신의 휘하에서 굴욕적인 충청도병사로 밀려났던 원균(元均)의 비방이 더해지고 이순신은 한성으로 이송되어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된다.
조정안에는 이순신을 지지하는 사람도 적지 아니하여 유성룡을 비롯해 동인파의 환관들의 구명운동으로 이순신은 사형죄를 감형받고 하나의 병졸로 백의종군케 되었다.


● 마음에 들어 온 글귀

새벽에 아우 여필과 조카 봉과 아들 회가 와서 함께 이야기했다. 어머님을떠나서 두 번이나 남쪽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포를 이길 수가 없다. [15]

동헌에 나가서 공무를 보았다. 이날 거북선에 칠 범포 28필을 받았다. 낮이 되어 활을 쏘았다. [18]

늦게 떠나서 영주에 이르니 좌우 산의 꽃과 들가의 봄풀들이 그림 같다. 옛날 영주(삼신산의 하나. 진시황과 한무제가 불사약을 구하러 사신을 보냈다는 가상적인 선경)가 있었다더니 역시 이와 같은 경치였던가? [20]

여러 가지 전비가 부족한 것이 많아서 군관과 색리들에게 죄를 주고, 참사는 잡아들이고 교수는 내보냈다. 이곳 방비가 다섯 포구 중에서 제일 잘못 되었는데도 순찰사가 포상하라는 장계를 올렸기 때문에 죄상을 조사도 하지 못하니 가소로운 일이다. [22]

일찍 아침식사를 마치고 배를 타고 소포로 나가 쇠사슬 건너매는 것을 감독하면서 종일 기둥나무 세우는 것을 보고, 겸하여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했다. [26]

저물게 제포(薺浦 진해 앞바다) 서원포(西院浦 진해 앞바다)를 건너니 밤이 이미 2경(밤 9~11시 사이)인데, 서풍이 차게 불어 나그네 마음이 편치 않고, 꿈도 또한 몹시 어지럽다. [40]

새벽에 구름이 검더니 동품이 크게 불었다. 그러나 적을 무찌르는 일이 급하기 때문에 곧 떠나서 사화랑에 이르러 바람 멎기를 기다렸다. 바람이 좀 자는 것 같으므로 배를 재촉하여 웅천에 이르러 삼혜와 의능 두 승장과 의병 성응지를 제포로 보내어 곧 상륙하는 체하게 했다. 또 우도 여러 장수의 배들 중에서 시원치 않은 배들을 골라 동쪽 가로 보내어 역시 장차 상륙할 것처럼 속였다 이것을 본 적들은 당황하여 갈팡질팡한다. 이에 전선을 합쳐서 일시에 무찌르니 적들은 세력이 분산되고 약해져서 거의 섬멸되었다. 그런데 발포의 2호선과 가리포의 2호선의 명령없이 제 맘대로 돌입하다가 얕은 곳에 걸려 적에게 습격당했으니, 그 통분함에 가슴이 찣어지는 것 같다. 조금 있자니 진도 지휘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제할 수 없이 되었더니,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해냈다. 이때 경상 좌위장 우부장은 보고서도 못 본 체하고 끝내 구하지 않았으니 그 괘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통분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 때문에 경상도 수사(원균)에게 책망도 했지만,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모두 경상도 수사 때문이다. [51]

오늘이 어머님 생신이건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술잔을 드리지 못하니 평생 유감이다. 우수사 군관들과 함께 진해루에서 활을 쏘았다. 순천도 모여서 약속했다. [56]

달빛은 배에 가득 차고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민다. 혼자 앉아서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닭이 울 때에야 겨우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 [58]

선전관 박진종과 영산령 복윤이 임금의 분부를 받들고 함께 왔다. 그들에게서 명나라 군사들의 한다는 짓을 들으니 참으로 통탄스럽다. 내가 우수사 이억기의 배에 옮겨타고 선전관과 이야기하면서 술을 두어 순배 돌리자 수사 원균이 나타나서 술주정을 하므로 모든 배 안의 장병들이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다. 그 망측한 꼴은 입으로 말할 수가 없다. [59]

오후 2시부터 비가 내려 농작물이 조금 소생하는 듯 하다. 이영남이 보러 왔다. 원 수사가 거짓말로 공문을 만들어 돌려서 대군이 동요했다. 군중에서도 이렇게 속이니 그 음흉하고 어지러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61]

저녁에 조붕이 와서 이야기했다. 남해 기효근의 배가 내 배 곁에 대었는데 배 속에 어린 아가씨를 싣고 남이 알까 두려워하니 가소로운 일이다. 이같이 국가가 위급한 때를 당해서도 심지어 예쁜 여자를 싣고 놀다니 무엇이라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대장이라는 원 수사조차 역시 이러하니 어찌 하랴? [64]

각 고을 아전 11명을 처벌했다. 옥과 향소에서 지난해부터 수군을 보내는 것이 성실치 못해서 도망하는 자의 수가 거의 100여 명이나 되건만, 번번이 거짓말로 대답하기 때문에 이날 목을 베어서 여러 사람들에게 보였다. [67]

새벽 2시쯤에 원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내일 새벽에 나가서 적을 치자는 것이다. 그의 시기와 흉모는 형언할 수가 없다. 이날 밤에는 회답하지 않았다. 단지 네 고을의 군량에 관한 공문을 만들어 보냈다. [67]

아침에 흰 머리털을 10여 개 뽑았다. 흰 머리털이 있으면 어떠오리마는 다만 위에 늙은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68]

남해에서 또 와서 전하기를 “광양 순천이 이미 전멸했다”하므로, 광양(어영담) 순천(권준)고 송희립 김득룡 정사립 등을 떠나보냈고, 이설은 어제 먼저 보냈다. 이 소식이야말로 뼛속까지 아픔이 스며들어 말을 못하겠다. 우수사 경상 수사와 함께 일을 논의했다. 이날 밤 바다에 달은 밝고 티끌 하나 일지 않아, 물과 하늘이 한빛인데 서늘한 바람이 잠깐 불어온다. 홀로 뱃전에 앉아 있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민다. [75]

새벽에 떠날 때는 역풍이 불더니 창신도에 이르자 바람이 순해졌다. 돛을 달고 사량에 이르니 다시 역풍이 불면서 비까지 쏟아진다. 만호(이여념)와 수사(원균)의 군관 전윤이 보러 왔다. 전윤이 말하기를, 수군을 거창으로 붙들어 왔다고 하여 도원수(권율)가 방해하려 하다 하니 가소로운 일이다. 예로부터 남의 공을 시기하는 것이 이 같은 것이니 무엇을 한탄하랴? [93]

새벽에 우후가 배 2 3척을 거느리고 소비포 뒤편으로 가서 띠풀을 베었다. 아침에 고성이 왔는데, 돼지를 가지고 왔다. 그에게 당항포에 적선 왕래하는 것을 묻고 또 백성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먹는다니 장차 어찌 살 것인가를 물었다. [99]

아침에 흥양과 순천이 왔다. 흥양이 암행어사의 비밀장계 초안을 가져왔는데, 임실(이몽상) 무장(이충길) 영암(김성헌) 낙안(신호)은 파면해 내보내고, 순천은 탐관오리로 의논이 되고, 그 밖에 담양(이경로) 진원(조공근) 나주목(이용순) 창평(백유향) 수령들은 잘못을 덮어주고 칭찬하여 장계했다. 임금을 속이는 것이 여기에까지 이르니, 국가 일이 이렇고서야 절대로 평정할 이치가 없다. 우러러 탄식할 뿐이다. [101]

아침에 장계를 봉해 올렸다. 오후에 원 수사가 와서 자기의 잘못된 일을 고백하므로 장계를 도로 가져다가, 원사진과 이응원 등이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왜인처럼 가장, 소위 가왜(假倭)를 목 잘라 바친 일은 고쳐 보냈다. [105]

아치에 해남 원인 현집이 와서 보았다. 늦게 충청 우후 웅천 거제 소비포가 모두 와서 만났다. 허정은도 왔다. 이날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몹시 중하다고하니, 이미 생사가 결정났는지 모르겠다. 나라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딴 일을 생각할 겨를이 있으랴? 그러나 세 아들과 한 딸이 어떻게 산단 말인가? 마음 아픈 일이다. [122]

봄날처럼 따뜻하다. 음양이 질서를 잃은 것 같으니 참으로 재변이다. 아버님 제삿날이어서 공무를 보지 않고 홀로 방 안에 앉았으니 슬픈 회포는 말할 수 없다. [129]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사직의 영험을 힘입어 겨우 조그만 공을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가 분에 넘친다. 장수의 직책을 띤 몸으로 티끌만큼도 보답하지 못하니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139]

잠깐 비가 내렸다. 나라 형세가 아침 이슬같이 위태로운데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기둥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니 나라가 장차 어떻게 될지 마음이 산란하다. 종일토록 누웠다 앉았다 했다. [140]

오정에 순찰사가 와서 활쏘기 내기를 하자고 하므로 내기하여 순찰사가 7푼을 졌다. 미안하다. [156]

옥문 밖으로 나왔다. 남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 가서 봉 분 울 사향 원경들과 오래도록 이야기 했다. 지사 윤자신이 와서 위로해준다. 비변랑 이순지도 보러 왔다. 울적한 마음 더 한층 이길 수 없다. 기헌도 왔다. 모두 정으로 위로하면서 술을 권하므로 사양치 못하고 억지로 마셔 취했다. [175]

일찍 아침을 먹고 어머님을 마주하려고 바닷가로 가는 길에 홍찰방의 집에 들러 잠깐 이야기하고 있는데, 울이 종 애수를 들여보내어, 아직 배가 온다는 소식이 없다고 한다. 또 들으니 황천상이 술병을 들고 홍백의 집에 왔다고 한다. 홍찰방과 작별하고 홍백의 집으로 왔더니 조금 있다가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음을 전한다. 뛰어나가 가슴을 치면서 뛰고 뒹구니 하늘의 해도 캄캄하다. 즉시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이미 와 있다. 길에서 배라보는 애통함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176]

박천 유해(柳海)가 서울에서 내려와서 한산에서 공을 세우겠다고 했다. 또 말하기를, “은진현(충남 논산)에 이르니 그 고을 원이 뱃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한다. 유(柳)는 또 말하기를 “중한 죄수 이덕룡을 고소했던 사람이 잡혀서 세 차례의 형을 받고 장차 죽을 것이다” 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또 과천 좌수 안홍제 등이 이상궁에게 말과 20세 되는 계집종을 바치고 석방되어 갔다고 한다. 안(安)은 본래 죽을 죄도 아닌데 여러 차례 형벌을 받고서 거의 죽게 되었다가 물건을 바치고서 석방된 것이다.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은 것에 따라서 죄의 경중을 결정한다니, 그 결말이 어떻게 될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바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영혼도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179]

아침식사 후 길을 떠나 옥과 지경에 이르니 순천과 낙안의 피난민들로 길이 가득 찼으며, 남자 여자가 서로 부축하고 가는 것이 차마 볼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들은 울면서 “사또가 오셨으니 인제는 우리가 살았다”고 했다. 길옆에 큰 홰나무가 있기에 내려앉아서 말을 쉬게 했다. [188]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정 뒤에 명량이 있는데 수가 적은 수군을 가지고 명량을 등지고서 진을 칠 수 없기 때문이다. 장수들을 불러모아 약속하기를 “병법에 이르기를 꼭 죽으려 하면 살고 꼭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했다. 또 한 사람이 길을 막으면 1000명의 적도 두렵게 할 수가 있다고 했다. 이 말들은 모두 지금의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날에는 즉시 군율에 의해서 다스려서 조금도 용서치 않으리라”하고 재삼 엄격히 신칙했다. 이날 밤 신인이 지시하기를 “이렇게 하면 이길 것이요, 이렇게 하면 질 것이다”했다. [193]

여러 장수들의 배를 돌아다보니 먼 바다에 물러가 있는데,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고자 해도 적들이 이 틈을 타서 더 대어들 것이어서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다. 이에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군령 내리는 기를 세우라 하고, 또 초요기(招搖旗 대장이 부하 장수를 부르고 지휘할 때 사용하던 기)를 세웠으니, 중군장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 가까이 왔고, 거제 현령 안위의 배는 그보다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친히 안위를 불러 “안위야,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가면 어디 가서 살 것이냐?”하니 안위는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한다. 나는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았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수 있느냐. 당장 처형할 것이나 적의 형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 했다. 이 두 배가 적진을 향해서 앞서 나가자,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2척에게 지휘하여 안위의 배에 마치 개미떼처럼 붙어서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한다. 이에 안위와 그 배위에 있던 사람들은 각각 죽을 힘을 다해서 혹은 모난 몽둥이로, 혹은 긴 창으로, 혹은 수마석덩어리로 무수히 어지럽게 치다가 배 위의 사람이 거의 힘이 다하게 되었다.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적에게 들어가서 비가 퍼붓듯이 마구 총을 쏘니 세 배의 적들이 거의 모두 쓰러진다. 이 때 녹도 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뒤따라 와서 힘을 합해서 쏘아 죽이니 적이 한 놈도 움직이지 못한다. [195]

새벽 2시쯤 꿈을 꾸니, 내가 말을 타고 언덕위를 가다가 말이 실족해서 내 가운데로 떨어졌으나 거꾸러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막내 아들 면이 나를 붙들어 안는 것 같은 형용을 하는 것을 보고 깨었다. 무슨 조짐인지 알 수가 없다. 늦게 배 조방장과 우후 이의득이 오고 배의 종이 경상도로부터 와서 적의 상황을 전한다. 황득중 등이 와서 보고하기를 “내수사의 종 강막지라는 자가 소를 많이 치기 때문에 12마리를 끌어갔다”고 한다. 저녁에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에서 온 편지를 전하는데, 떼어보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움직이고 정신이 황난하다. 겉봉을 대강 뜯고 아들 열의 글씨를 보니, 겉에 ‘통곡’이라는 두 자가 써 있다. 면이 전사한 것을 마음속으로 알고 간담이 떨려 목놓아 통곡했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한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만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올바른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이것은 이치가 잘못된 것이다. 천지가 어둡고 저 태양이 빛을 잃는구나! 슬프다, 내 어린 자식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특한 기상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는데 하늘이 너를 머물게 하지 않는가? 내가 죄를 지어서 그 화가 네 몸에까지 미친 것이냐? 이제 내가 세상에 있은들 장차 무엇을 의지한단 말이냐? 차라리 죽어서 지하에 너를 따라가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리라. 네 형과 네 누이와 너의 어머니도 또한 의지할 곳이 없으니 아직 목숨은 남아 있어도 이는 마음은 죽고 형용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오직 통곡할 뿐이로다. 밤 지내기가 1년처럼 길구나. 이날 밤 9시경에 비가 내렸다. [199]


● 내가 저자라면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전라좌수사가 된 임진년(1952년) 1월부터의 일기다. 이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는데,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전사하기 전날인 1598년 11월17일까지 7년간을 기록하고 있다. 이순신의 손으로 기록한 일기는 전쟁 중의 삶을 옆에서 들여다보듯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책은 이름에 쓰인 그대로 ‘전쟁 중의 일기’다. 이순신의 개인적 기록이라는 말이다. 다른 책들과 달리 독자를 위해서 쓰이지 않은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난중일기는 다른 책과 명백히 상이한 부분이 있다. 이순신 개인의 생각이 숨김없이 담겨 있으며 삶의 숨결 또한 생생하게 느낄 수 있고 꾸미지 않은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은 장점 이다. 그러나 애초부터 의도한 목적 없이 쓰인 일기형식의 글이고 중간에 기록이 일부분씩 끊어져 책이라는 형태로 읽는 독자에게는 또 다른 한계를 보여주는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갖고 있다.

난중일기에서 가장 생생한 부분은 성웅으로 불리는 이순신의 인간적 냄새를 그대로 맡을 수 있는 글 들이다. 무엇보다 어머니에 대한 효성을 표현한 부분이 눈에 뜨인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어머니에 대한 걱정과 안위에 대한 마음 씀씀이는 시대를 뛰어넘어 감동을 준다. 아들 면의 죽음을 맞아 써내려간 글 또한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심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애간장을 끊는 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살아있는 표현이다. 한 나라의 운명을 맡고 있는 장수가 아니라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의 아픔이 그대로 전달된다. 전란의 와중에 피난을 다니는 백성들을 돌아보며 가슴 아파하는 마음 씀씀이도 돋보이는 부분이다. 전투에서 군사를 잃었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이라든가 ‘통분하기 짝이 없는’ 등의 표현은 군사들의 생사를 맡고 있는 지휘관으로서의 심정이 어떠한가를 보여준다.

흥미 있는 것은 일기에 나타난 이순신의 속마음이다. 특히 원균에 대한 표현이 그러한데, 생각 이상으로 거친 표현을 하고 있어 눈에 뜨인다. ‘모두 경상도 수사 때문이다’ ‘원 수사의 음험함은 이를 길이 없다’ ‘음흉하고 어지러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 흉계가 실로 우습다’ ‘원 수사의 흉측함은 볼 수가 없다’ ‘하는 짓이 이렇게 몹시 흉악하다’ ‘모두 흉인(원균)에 대한 일 이었다’ 등이 원균에 대한 것이다. 쓰인 표현들을 보면 아무리 개인적 기록인 일기라고 할지라도 쓰기가 쉽지 않은 어휘들이다. ‘흉인’ 운운 하는 것은 완곡히 표현한 것이겠지만 그 말 자체로도 거칠기 이를 데 없다. 마음 내키는 대로라면 어떻게 말하고 싶었을지 쉽게 상상이 된다. 이순신과 원균의 관계는 역사적으로도 끊임없이 이야기되어 왔지만, 성웅이라 불린 이순신의 마음속에 이러한 부분이 있었다는 것은 의외이다.

일기를 바탕으로 해서 번역해 옮긴 책은 무엇보다 단편적이라는 느낌이 준다. 이순신이 아들로서 지휘관으로서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나,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것들 그리고 수군에 관련된 사료적 가치가 있는 부분을 제외 한다면 특별한 내용이 없는 개인적 일정에 그치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히 가치가 있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연구적 위치에서이고 독자라는 위치에서는 그다지 책읽기의 재미를 꾸준히 제공하지는 못한다.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이순신이 벌였던 해전에 대해 상세히 알 수 없다는 것도 아쉬움 중의 하나이다. 일기에 해전과 관련된 내용이 자세히 쓰이지 않아 어쩔 수 없기는 하지만, 책을 만들 때는 관련된 내용의 해제를 충분히 실어 독자의 흥미를 배가시키는 것이 좋아 보인다. 독자로 하여금 해전이 벌어진 시기, 전술, 행로, 임진란 전체의 상황을 함께 조망하며 난중일기를 읽게 했으면 훨씬 분석적인 책읽기가 가능했을 것이다.
일기만으로는 이순신 개인의 행적을 제대로 알기 힘들다는 것도 아쉽다. 시기별로 달라지는 관직의 변화, 당시의 개인적 상황, 일기가 끊어진 부분의 행적, 백의종군이 시작된 시기와 진행과정 등에 관한 설명을 부가해 주면 독자에 대한 좋은 배려가 될 것이다.

▷ 난중일기 중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32일치의 일기 내용이 최근에 밝혀져 관심을 끌고 있다. 새로 밝혀진 일기 내용은 현충사에 소장된 고서 ‘충무공유사(忠武公遺事)’를 판독·번역해서 확인한 것이다.
이번에 해독된 일기에는 가족에 대한 애틋한 심정, 권율 원균 등 다른 장수들과의 갈등, 관리들의 행태에 대한 한탄, 병사들에 대한 연민 등 충무공의 인간적인 면모와 전란 당시의 상황이 적혀 있다. 또 실체가 명확하지 않았던 1598년 7월 ‘절이도(현재의 전남 거금도) 해전’에 대한 기록도 있다.
이순신이 자신의 솔직한 술회를 담은 이 내용들이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것에 대해 노승석 순천향대 대우교수는 “충무공 사후의 편찬자들이 ‘너무나 개인적이고 민감한 기록’이어서 후세에 전하기에 부적절하다고 여겨 의도적으로 삭제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새로 밝혀진 일기의 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1595년(을미년) 정월 10일
순천 부사(=이순신의 부하 장수인 권준·權俊)도 공사간의 인사를 하려는 것을 잠시 보류했다가 조금 뒤에 불러들였다. 이들과 함께 좌석에 앉아 술을 권할 때 말이 매우 잔혹하고 참담했다.

정월 12일
삼경(자정쯤)에 꿈을 꾸니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오셔서 분부하시기를 “13일에 회( ·이순신의 맏아들)를 초례(醮禮·전통 혼례)하여 장가보내는데 날이 맞지 않는 것 같구나. 비록 4일 뒤에 보내도 무방하다”고 하셨다. 이에 완전히 평소와도 같은 모습이어서 이를 생각하며 홀로 앉았으니, 그리움에 눈물을 금하기 어려웠다.

정월 27일
오늘이 바로 (맏아들) 회가 혼례를 올리는 날이니, 걱정하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장흥 부사가 술을 가지고 왔다. 그의 서울에 있는 첩들을 자기의 관부(官府)에 거느리고 왔다고 하니, 더욱 놀랍다.

3월 24일
(전라)우수사(右水使=이억기)는 앉을 대청을 개수(改修)해 세우는 것을 나쁘게 여기고 헛소리를 많이 하며 보고해 왔다. 매우 놀랍다.

4월 30일
아침에 원수(元帥=도원수 권율·權慄)의 계본(啓本·임금에게 제출하는 문서 양식)과 기(奇)·이(李)씨 등 두 사람의 공초(供招·죄인의 진술)한 초안을 보니 원수가 근거 없이 망령되게 고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 반드시 실수에 대한 문책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데도 원수의 지위에 둘 수 있는 것인가. 괴이하다.

11월 1일
조정에서 보낸 편지와 원흉(元兇·경상우수사 원균을 매우 낮춰 표현한 것)이 보낸 답장이 지극히 흉악하고 거짓되어 입으로는 말할 수 없었다. 기만하는 말들이 무엇으로도 형상하기 어려우니 하늘과 땅 사이에는 이 원균처럼 흉패하고 망령된 이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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