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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2일 11시 46분 등록
난중일기 - 이순신/송찬섭 엮음/서해문집


1. 저자에 대하여

본관 덕수(德水), 자 여해(汝諧), 시호 충무(忠武), 1545년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1576년(선조 9) 무과에 합격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에 보직, 이듬해 발포수군만호를 거쳐 1583년(선조 16) 함경도 건원보권관 등 주로 함경도에서 관직 생활을 하였다.

1586년 조산보만호 때는 여진족의 침입을 맞아 적은 병력으로 선전했지만, 결국 여진족을 막아내지 못한 데 대해 병사 이일이 그를 나쁘게 평가하여 백의종군(1차)의 길에 올랐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이 되고, 1589년(선조 22) 선전관·정읍현감 등 미관말직만을 지내다가 임진왜란 전인 1591년(선조 24)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적선 30여 척을 격파하고 이어 사천에서 거북선을 처음 사용, 적선 13척을 분쇄하였다. 7월 한산도에서는 적선 70척을 무찔러 한산대첩의 큰 공훈을 세웠다. 이어 가토 요시아키[加嘉明]의 수군을 안골포에서 격파하고, 9월에는 적군의 근거지 부산에 쳐들어가 100여 척을 부수는 공훈을 세웠다.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격파, 남해안 일대의 적 수군을 완전히 일소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하자 죽도(竹島)에 진을 옮기고, 장문포(長門浦)에서 왜군을 격파,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적을 막아 왜군의 작전에 큰 타격을 가하였고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확충·난민구제·산업장려 등에 힘썼다.

1597년 원균의 모함으로 서울에 압송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감형되어 도원수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2차) 하게 되었다. 7월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한 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 되었다. 그 후 명랑해전에서 남아있던 전선 13척으로 적선 130척을 상대로 싸워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1598년 노량 해전에서 유탄을 맞고 선상에서 전사하였다.


이순신 장군. 그는 어떤 사람일까? 한 두 페이지로 그를 표현하는 게 어렵다 싶을 정도로 그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그의 가장 큰 특징을 두 가지로 요약하라고 하면 난 이렇게 쓰겠다.

그는 뛰어난 전략가이자 부하를 잘 다스리는 장수였다.
그는 임진왜란 7년 기간을 통해 벌어진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거의 대부분을 승리하는 불가사의한 전적을 일구어냈다. 더구나 이런 승리가 그를 시기하고 헐뜯는 음해 세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이루어 진 것이기에 더욱 이순신의 성과가 돋보인다.

그는 원칙에 충실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공적인 일에 있어서는 부하에게 냉정하고 엄혹하였다. 하지만 전쟁을 치루면서 부하들이 겪는 어려움을 조정에 적극적으로 알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자신의 부하들을 가슴으로 사랑하던 리더였다.

그는 어머님을 극진히 보살피려던 효자요, 아들을 지극히 사랑했던 평범한 아버지였다.
이순신 장군은 눈물이 아주 많고 가슴이 여린 사람이었다. 1593년 5월 4일 일기에서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지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오래 사시기를 축수하는 술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다.[94]” 라고 쓰고 있다.

1597년 10월 아들 면이 전투에서 죽었을 때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394]” 라고 쓰고 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1592년 왜적의 침략이 시작되다.

4월 15일 해 질 무렵 경상 우수사가 통첩을 보냈는데, 왜선 90여 척이 와서 부산 앞 절영도에 정박했다고 하였다. 또 이와 동시에 경상 좌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왜선 350여 척이 벌서 부산포 건너편에 도착했다고 하였다..... 경상 관찰사의 공문도 역시 같은 내용이었다.[42]

4월 16일 밤 10시께 영남 우수사(원균)의 공문이 왔는데, 부산과 같은 큰 진이 벌써 함락되었다고 하였다. 분한 마음을 이길 길이 없었다.[42]

4월 18일 오후 2시께 경상 우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동래도 함락되었고 양산, 울산의 두 수령도 조방장으로서 성을 지키다가 모두 패배하였다고 하였다. 분한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43]

7월 8일 아침 일찍 적선이 머물러 있는 곳을 향하여 넓은 바다에 이르렀다. 적의 큰 배 한 척, 중간 배 한 척이 선봉에서 나와 우리 수군을 탐색하더니 도로 진을 친 곳으로 들어갔다. 뒤쫓아 들어가니 큰 배 36척, 중간 배 24척, 작은 배 13척이 진을 치고 정박해 있었다. 견내량의 지형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선은 배끼리 부딪치기 쉬우므로 싸움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적이 만일 형세가 불리하면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갈 것이라 생각되기에 한산도 한바다로 꾀어내어 통째로 잡아버릴 전략을 세웠다. 한산도는 거제와 고성 사이에 있어서 사방에 헤엄쳐 나갈 길도 없다. 혹 육지로 오르더라도 굶어죽기 십상일 것이다.
먼저 판옥선 대여섯 척으로 적의 선봉을 쫓아가서 습격할 기세를 보였다. 그러자 배의 왜적들이 일제히 돛을 달고 쫓아왔다. 우리 배가 거짓으로 물러나며 돌아 나오니 적들도 줄곧 쫓아왔다. 바다 한가운데 와서는 다시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여 학의 날개처럼 진을 치고 일제히 진격하였다. 각각 지자․현자․승자총통 등을 쏘아서 먼저 두 세 척을 박살내니, 여러 배의 왜적들이 기가 꺾여 도망갔다. 여러 장수, 군사, 관원들이 승리할 기세로 앞을 다투어 돌진하며 화살과 총알을 퍼부으니 그 형세가 바람과 같고 우레와 같았다. 적의 배를 불사르고 적군을 한꺼번에 거의 다 쳐부수었다.[63]

9월 2일 싸우고 난 다음 날이다. 또 한 번 쳐들어가서 적들의 소굴을 불지르고, 배들을 전부 깨부술까 하였다. 그러나 위로 올라간 적들이 여러 곳에 꽉 들어 차 있는데, 그들이 돌아갈 길을 끊는다면 막다른 골목에 몰린 도적이 되어 버릴 게 걱정되었다. 부득이 수륙에서 함께 쳐야 섬멸할 수 있을 터였다..... 전선을 수리하고 군량을 넉넉히 준비한 다음에, 또 육전이 또 크게 벌어지는 날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경상 감사 등과 수륙으로 함께 진격하여 남김없이 쳐부수기로 약속했다.[75]

그동안 네 차례 출전하고 열 번 싸워서 모두 이겼다. 그러나 장수와 사졸들의 공로를 따진다면 이번 부산 싸움에 비길 것이 아니다. 전날의 싸움에서는 적선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70여 척에 불과하였는데, 이번에는 왜적의 소굴에 4백여 척의 배가 정박해 있었다. 그 속으로 돌진하여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루 내내 공격하여 적선 1백여 척을 깨뜨려 적으로 하여금 겁내어 떨게 하였다. 비록 목을 벤 것은 없었으나 힘껏 싸운 공로는 먼젓번보다 훨씬 더하였다. 전례에 따라 공로를 참작하여 등급을 마련하였다.[75]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2월 12일 새벽에 3도 군사가 한꺼번에 출발하여 바로 웅천현 웅포에 이르렀다. 적의 무리는 어제와 같았다. 배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꾀었으나 적은 끝내 바다에 나오지 않았다. 두 번이나 웅포까지 쫓아갔으나 그래도 잡아 무찌르지 못하였으니 어찌할꼬? 분하고 분하였다!

2월 22일 발포 2선, 가리포 2선이 명령도 없이 뛰어들었다가 얕은 곳에서 (좌초에) 걸려 적들에게 공격당하고 말았다. 분하고 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얼마 뒤 진도 지휘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해 내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그 모습을 보고서도 못 본 체하고 끝내 도와주지 않았다. 괘씸하여 말하기조차 싫다. 분하고 분하도다! 이 때문에 경상도 수사 원균을 꾸짖었지만 통탄스럽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모두가 경상도 수사 때문이다.[87]

5월 4일 맑다.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지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오래 사시기를 축수하는 술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다.[94]

5월 13일 밤에 달빛이 배에 가득하데 혼자 앉아 뒤척뒤척하였다. 온갖 시름이 가슴을 쳐서 자리에 들었으나 잘 수 없었다. 닭이 울 즈음에야 얕은 잠이 들었다.[97]

5월 16일 마음이 매우 불편하여 드러누워 끙끙 앓았다. 명나라 장수가 증도에서 머뭇거리는 게 다른 생각이 있는 듯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해 매우 걱정스러웠다. 일마다 이러하니 더욱 탄식이 나오고 눈물이 흘렀다.[98]

5월 21일 미시(未時, 오후 1시에서 3시)에 비가 와서 농사에 대한 희망이 조금 살아났다. 이영남이 보러 왔다. 원 수사가 거짓 내용으로 공문을 돌려 대군을 동요하게 하였다. 진중에서도 속임을 쓰는 것이 이럴 정도이니 그 흉악스러움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101]

5월 30일 남해 현령 기효근이 배를 우리 배 곁에 대었는데, 그 배에 어린 처녀를 싣고 남이 알까 봐 두려워했다. 우습다! 나라가 위급한 이때 배에 예쁜 색시를 싣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씀이가 꼴이 아니다. 그러나 그 대장이라는 원균부터가 이러하니 어찌 하겠는가?[105]

6월 8일 각 고을의 담당 서리 11명을 처벌하였다. 옥과현의 향소(유향소)에서 지난해부터 군사를 동원하는 일이 부실하여 도망간 사람이 거의 1백여 명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매번 거짓말을 하기에 이날 목을 베어 매달았다. 모진 바람이 그치지 않고 마음도 어지러웠다.[107]

6월 12일 아침에 흰 머리털 여남은 오라기를 뽑았다. 흰 머리카락이 있다고 하여 어찌 싫어할 일이겠냐만 위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뽑은 것이다.[108]

7월 9일 오늘 밤 달빛이 맑고 밝아서 티끌 하나 일지 않네. 물과 하늘이 한 빛이 되어 서늘한 바람이 선듯 불어 온다. 뱃머리에 홀로 앉아 있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는구나.... 광양의 적들은 진짜 왜적이 아니고 영남의 피난민이 왜적처럼 차리고 광양으로 뛰어들어 민간의 집들을 분탕질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진짜 왜적이 아니라서 다행스러운 일이다. 진주성에 관한 소문도 또한 거짓말이라고 한다. 진주의 일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벌써 닭이 울었다.[117]

7월 15일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들어 나그네의 가슴이 어지럽다. 혼자 배의 뜸 밑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몹시 산란하다. 달빛이 뱃머리에 들고 정신이 맑아지네. 누워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어느덧 닭이 우는구나.[120]

7월 20일 명나라 장수의 보고서가 왔다. 그 보고서의 내용이 참으로 괴상하다. 두치의 적이 명나라 군사에 쫓겨 도망갔다고 하니 그 거짓됨을 말할 수가 없다. 큰 나라 장수가 이와 같으니 다른 사람들이야 어찌 따질 것인가? 한탄스럽다.[121]

8월 1일 새벽에 꿈에서 큰 대궐에 이르렀는데 마치 서울인 듯했다. 신기한 일들이 많았다. 꿈에 영의정이 와서 인사를 하기에 나도 답례를 하였다. 이야기가 왕이 피난 가신 일에 미치자 눈물을 흘리고 탄식하였다. 적의 형세는 벌써 사그라졌다고 말하며 서로 실정을 의논할 즈음 좌우의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드는데 꿈이 깼다.[124]

8월 28일 원 수사가 또 와서 영등포에 빨리 가자고 독촉하였다. 흉악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가 거느린 배 25척은 모두 내보내고 다만 일고여덟 척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 씀씀이와 일하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129]

1594년 명․일 간에 강화가 진행되다.

1월 12일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니께 돌아가겠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잘 가서 나라의 욕됨을 속히 씻어라.” 하고 말씀하시며 몇 번이고 거듭 타이르셨다. 헤어지는 데 대하여서는 조금도 슬픔을 나타내지 않으셨다.[140]

1월 19일 소비포 만호로부터 경상도 여러 배들의 사부와 격군들이 거의 굶어 죽을 지경이라는 말을 들었다. 참담하여 차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또 원 수사와 공연수, 이극함이 서로 좋아하는 여자들을 모두 다 사사로이 관계하였다고 한다.[141]

1월 20일 맑았으나 바람이 세게 불어 살이 에이는 듯 추웠다. 각 배에 옷도 제대로 못 갖춰 입은 사람들이 목을 움츠리고 추워서 신음하니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웅천 현감, 진해 현감이 왔다. 진해 현감은 명령을 어기고 빨리 오지 않아서 문책할 작정이었으므로 만나 보지 않았다. 바람이 조금 약해지는 듯했지만, 순천 부사가 들어올 일이 매우 걱정 되었다. 군량 또한 도착하지 않으니 이 또한 걱정이 되었다. 병으로 죽은 사람을 거두어 장사 지내는 일을 맡길 사람으로 녹도 만호를 정하여 보냈다.[142]

1월 21일 저녁에 녹도 만호가 와서, 병으로 죽은 시체 2백 14구를 거두어 묻었다고 보고하였다. 적에게 붙잡혔다가 도망쳐 나온 사람 둘이 원 수사의 진영에서 와서 적의 정세를 자세히 말하였다고 하나 믿을 수가 없었다.[142]

2월 5일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좋은 말을 타고 바위가 겹겹이 쌓여 있는 큰 고개를 바로 내려갔다. 봉우리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구불구불 동서로 뻗어 있었다. 봉우리 위의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순간에 잠에서 깨었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또 꿈에 미인 하나가 홀로 앉아 손짓을 했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다..... 원수(권율)의 답장이 도달하였는데, 명나라 심 유격(심유경)이 이미 화친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왜적의 간교한 꾀를 미리 알기 어려우니, 이미 술책에 빠져들었것만 또 이렇게 빠져드니 한탄스럽다.[147]

2월 7일 이 경복으로 하여금 격군을 잡아오도록 내보냈다. 군대를 다시 편성하고, 격군을 각 배에 옮겨 실었다. 방답 첨사에게 도망한 자를 붙잡아 오라는 명령을 전하였다. 새 군수 김준계가 내려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에게도 명령을 전하여 도망자를 잡아 오도록 하였다.[148]

2월 16일 아침에 호양 현감과 순천 부사가 왔다. 홍양 현감이 암행어사 밀계 초본을 가지고 왔다. 임실, 무장, 영암, 낙안의 수령을 파면하고, 순천 부사는 탐관오리의 으뜸으로 거론하고, 기타 담양, 진원, 나주목, 장성, 창평 등의 수령은 나쁜 짓을 덮어 두고 상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임금을 속이는 것이 이렇게 갈 데까지 갔다. 나랏일이 이 모양이니 나라가 평정될 리가 없다. 천장만 올려다볼 뿐이다. 또 그 가운데 ‘수군을 친척 가운데서 뽑는 일과 장정 넷 가운데서 장정 둘을 전장에 내 보내는 일’을 논하고 있는데 이를 심하게 비난하고 있었다. 암행어사 유몽인은 국가의 위급한 난리를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일을 꾸며 갈 것에만 힘써서, 남쪽의 헛된 소리에만 귀 기울인 것이다.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진회가 무목을 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나라 때문에 겪는 아픔이 더욱 심하다.

3월 15일 하루 내내 끙끙 앓았다.
3월 16일 몸이 몹시 괴로웠다.
3월 18일 몸이 몹시 불편하였다.
3월 19일 몸이 몹시 불편하여 하루 내내 끙끙 앓았다.
3월 20일 몸이 불편하였다.
3월 21일 몸이 불편하였다.
3월 23일 몸이 여전히 불편하였다.

5월 9일 비가 계속 내렸다. 하루 내내 빈 정자에 혼자 앉아 있었더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고 머릿속이 매우 어지러웠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가슴이 막혀 취한 듯, 꿈꾸는 듯, 바보가 된 듯, 미친 듯하였다.[167]

5월 13일 검모포 만호가 보고하기를 “경상 우수사에 속한 포작들이 격군을 싣고 도망하다가 붙들렸는데, 포작들은 원 수사가 있는 곳에 숨어 있습니다.” 하였다. 사복들을 보내어 붙잡으려 하였더니 원 수사가 크게 화를 내면서 사복들을 결박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노윤발을 보내어 풀어주게 하였다.[168]

6월 4일 저녁에 겸사복이 왕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그 글 가운데 “수군 여러 장수와 경상도의 장수가 서로 화목하지 못하니, 이제부터 예전의 나쁜 습관을 모두 바꾸라.”는 말씀이 있었다. 통탄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는 원균이 취하여 망발을 부렸기 때문이었다.[172]

7월 12일 순변사에게 유 정승(유성룡)이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이 왔다고 한다. 이는 필시 유 정승을 질투하는 자가 말을 만들어 그를 훼손하려는 것이리라. 분한 마음을 이길 길이 없다. 저녁에 마음이 매우 어지러웠다. 혼자 빈 동헌에 앉아 있으니 마음을 걷잡을 길이 없고 걱정이 더욱 심해져서 밤 깊도록 잠들지 못하였다. 유 정승이 만약 돌아가셨다면 나랏일을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180]

9월 3일 새벽에 비밀 교지가 들어왔는데 “수륙 여러 장수가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볼 뿐, 계책이라도 하나 세워서 토벌하려고 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3년 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그런 적이 없다. 여러 장수와 맹세하여 목숨을 걸고 복수할 뜻으로 날을 보내고 있지만, 험한 소굴에 웅크리고 있는 적을 가볍게 나아가 공격할 수가 없을 뿐이다. 하물며 자기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크게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루 내내 바람이 불었다. 초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나랏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데도 안으로는 구제할 방책이 없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195]

11월 27일 밥을 먹은 뒤 대청에 나가 앉아서 좌우도에 나누어 보낸 항복한 왜적들을 모두 모아서 총을 쏘는 연습을 시켰다.[210]

1595년 휴전 상태가 계속되는 속에서

1월 1일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서 나랏일을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또 팔순의 병든 어머니를 생각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213]

3월 11일 주부 조형도가 와서, 좌도에 있는 적의 형세와 항복한 왜적이 보고한 내용을 전하였다. 내용은 풍신수길이 침략한 지 3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성과가 없으므로, 군사를 더 끌어 모아 부산포에 진영을 설치하려고 3월 11일에 바다를 건너오기로 이미 정했다고 한다.[221]

4월 29일 해남 현감과 공사례(公私禮)를 마친 뒤 두 번이나 약속한 날짜를 어긴 하동 현감은 곤장 90대를 때리고, 해남 현감은 곤장 20대를 때렸다.[228]

5월 29일 비바람이 그치지 않고 하루 내내 주룩주룩 내렸다. 사직(社稷)의 위엄과 영령(英靈)의 도움으로 겨우 형편없는 공밖에 세우지 못했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쳤다. 장수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티끌만 한 공로도 바치지 못하였으니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으나 군사를 거느리기에는 부끄러울 뿐이다.[233]

7월 1일 나라의 제삿날이어서 관청에 나가지 않았다. 혼자 수루에 기대어서 나라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았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재목이 없고, 밖으로 나라를 바로잡을 기둥이 없으니 이 나라가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239]

9월 3일 우산과 울, 유헌이 돌아갔다. 강응호도 도양장의 추수 때문에 같이 돌아갔다. 정항, 우수, 이섬이 정탐하고 들어왔는데, 영등포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의 진영이 어제 텅 비었고 누각과 여러 소굴은 모두 불타 버렸다고 한다. 웅천에서 적에게 항복하였던 공수복 등 17명을 데리고 왔다.[249]

1596년 왜적이 드디어 철수하다.

2월 26일 늦게 대청에 나갔더니 여도 만호와 홍양 현감이 와서 수영의 서리들이 백성을 괴롭히는 폐단을 털어놓았다.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양정언과 수영 서리 강기영, 이득종, 박취 등에게 큰 벌을 주었다. 곧바로 전령을 내려 경상도와 전라우도의 수사에게 수영 서리를 잡아들이라고 명령하였다.[281]

2월 28일 늦게 나갔더니 장흥 부사와 체찰사의 군관이 같이 왔다. 장흥 부사는 체찰사의 종사관이 군령을 가지고 자기를 체포해 가려고 왔다고 했다. 또 전라도 수군 가운데 우도의 수군은 좌도와 우도를 왔다갔다 하면서 제주와 진도를 도와주라는 명령도 있다고 한다. 참 어이가 없다. 조정의 계책이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체찰사로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이렇게 무작정할 수 있는가. 나라의 일이 이렇고 보니 어떻게 할 것이가.[281]

3월 11일 저녁 때 방답 첨사가 화낼 일도 아닌데 화를 내면서 지휘선에서 물 깉는 일을 하는 군사에게 곤장을 때렸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서 방답의 군관과 이방을 붙잡아들여 군관은 20대, 이방은 50대의 곤장을 때렸다.[285]

4월 19일 아침에 남여문을 통하여 풍신수길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기쁘기 그지없었으나 다만 믿기 어려웠다. 이 소문이 일찍부터 퍼졌는데 아직 정확한 기별은 오지 않았다.[294]

5월 13일 부산 허내은만이 보낸 고목이 도착하였는데 “가등청정이란 왜적이 벌써 10일에 제 군대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갔고, 각 진에 있는 왜적들도 장차 철수할 것이며, 부산의 왜적들은 명나라 사신을 모시고 건너가려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298]

5월 14일 아침 김해 부사 백사림이 급히 보고를 올렸는데 역시 허내은만의 고목과 같았다. 그래서 순천 부사에게 알려서 이를 차례로 다른 고을과 진포에 두루 알리도록 지시하였다.[298]

7월 13일 해가 진 뒤에 항복한 왜인들이 광대놀이를 벌였다. 장수 된 사람으로서 그냥 두고 볼 일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마당놀음 한 번 하기를 간절히 바라므로 금하지 않았다.[308]

윤8월 12일 하루 내내 노를 저어 밤 10시쯤 어머니가 계신 곳에 당도하였다. 백발이 성성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숨이 끊어지는 듯하시는 모습이 하루하루를 지탱하시기도 어려운 듯하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서 밤새 위로하여 어머니의 마음을 풀어 드렸다. (이어서 13일) 어머니를 모시고 옆에 앉아 아침 진지를 올리니 대단히 즐거워하시는 빛이었다. 늦게 작별 인사를 드리고 본영으로 돌아왔다.[319]

1597년 백의종군에 나서다

[ 이순신, 당쟁의 희생물이 되어 : 번역자 해설 ]
1597년 1월 28일 원균이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겸 경상도 통제사가 되고, 이순신은 전라 충청 통제사가 되었다.
2월 6일 이순신을 체포되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 좌수사가 되었다. 26일에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체포되어 원균에게 업무를 인계하고 서울로 출발했다.
3월 4일 이순신이 서울 의금부 옥에 갇혔다. 그리고 12일에 이순신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었다.[332]

4월 1일 옥문을 나왔다. 남대문 밖에 있는 윤간의 종의 집에 이르러 봉, 분, 울, 사행, 원경 등과 한 방에 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사 윤자신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가 보러 왔다. 울적한 마음을 한층 이기기 어려웠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을 먹은 뒤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영의정(유성룡)이 종을 보냈고, 판사부 정탁, 판서 심희수, 찬성 김명원, 참판 이정형, 대사헌 노직, 동지 최원, 동지 곽영 등이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술에 취하여 땀으로 몸이 흠뻑 젖었다.[331]

4월 13일 일찍 아침을 먹고 어머니를 마중하려고 바닷가로 가는 길에 홍 찰방 집에 들렀다.... 조금 있자니 배에서 달려온 종 순화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곧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니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모두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 대강 적으리라.[337]

5월 8일 이경신이 한산도에서 와서 음흉한 원균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많이 말하였는데 “그가 데리고 온 서리를 곡식을 팔아 오라는 구실로 육지로 보내 놓고, 그 처를 겁탈하려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여자는 악을 쓰면서 말을 듣지 않았는데 밖으로 나와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는 이야기도 전했다.
원균이 온갖 계략을 써서 나를 모함하려고 하는데 이 역시 운수다. 뇌물로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에 잇닿아 있으며, 헐뜯는 것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니, 스스로 때를 못 만난 것만 한탄할 따름이다.[344]

5월 21일 박천 군수 유해가 말하기를 중한 죄수 이덕룡이란 자를 고소한 사람이 갇혀서 세 차례 형장을 맞고 다 죽어간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과천 좌수(座首) 안홍제 등이 이 상공(尙公)에게 말과 스무살 먹은 계집종을 바치고 풀려나 돌아갔다고 하였다. 본시 안홍제는 죽을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여러 번 맞아 거의 죽게 되었다가 뇌물을 바친 다음에야 석방되었다는 것이다. 나라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으로서 죄의 무겁고 가벼움을 결정하니, 이러다가는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바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는 것이리라.[348]

6월 16일 하루 내내 혼자 앉아 있었으나 아무도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었다.[357]
6월 22일 아침에 초계 현감이 연포를 끓여 가지고 와서 권하였는데 오만한 빛이 역력했다. 그의 처사가 예를 잃었음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359]

7월 18일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함께 와서 “16일 새벽 어둠이 걷히기 전, 수군이 기습을 당하여 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호 그리고 여러 장수들이 많이 피해를 입었으며 수군은 크게 패배하였습니다” 하였다. 듣고 있으니 울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조금 있다가 원수가 와서 “일이 이미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소.” 하였다. 내가 “직접 해안 지역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방책을 정하겠습니다.” 하고 말했더니 원수가 매우 반가워하였다.[369]

7월 21일 우후 이의득이 찾아왔기에 패했던 상황에 대해 물었다. 모든 사람이 울며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자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으로 달아나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또한 대장의 잘못은 말로 다 할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371]

8월 12일 늦게 거제 현령, 발포 만호가 들어와서 나의 명령을 들었다. 그들에게서 배설이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모양을 전해 들었다. 괘씸하고 한탄스럽기 짝이 없다. 이런 자들이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 아첨이나 해서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지위에 올라가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치고 있건만, 조정에서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377]

8월 19일 여러 장수들에게 왕이 내린 교서와 유서 앞에 엎드려 절하게 하였다. 배설은 교서와 유서에서도 예를 올리지 않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그 아래 딸린 이방과 영리들을 붙들어다가 곤장을 때렸다.[379]

9월 15일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과 함께 진을 우수영 앞 바다로 옮겼다. 그것은 벽파정 뒤에 명량이 있는데, 수가 적은 우리 수군으로서는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서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는 말이 있다.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이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하고 엄하게 약속하였다. 밤에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 하였다.[385]

9월 16일 이른 아침에 망을 보던 자가 와서 보고하기를 “수도 없이 많은 적선이 명량으로부터 곧바로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을 향해 달려옵니다.” 하였다. 곧 모든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갔더니 적선 1백 30여 척이 우리 배들을 둘러쌌다. 여러 장수들은 양쪽의 수를 헤아려 보고는 모두 도망하려는 꾀만 내고 있었다.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벌써 2마장 밖에 나가 있었다. 나는 노를 빨리 저어 앞으로 나아가며 지자, 현자 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았다. 탄환이 폭풍우같이 날아갔다. 군관들도 배 위에 총총히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 댔다. 그러자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쳐들어왔다 물러갔다 하였다. 그러나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 형세가 어찌 될지 헤아릴 수 없으니 온 배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돌아다보며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385]
나는 조용히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 맞혀라.” 하였다. 여러 장수의 배를 돌아다보니 이미 1마장 정도 물러났고,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멀리 떨어져 가물가물하였다. 배를 돌려 바로 중군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목을 베어다가 내걸고 싶지만,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가 점점 더 멀리 물러나고 적들이 더 덤벼들 것 같아서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 되었다.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기를 세워 군령을 내리도록 하고 또 초요기를 세웠더니, 중군장인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 가까이 왔으며, 거제 현령 안위의 배가 그보다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였다. 그러자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뛰어들었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처형하고 싶지만 전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하였다.

안위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해서 몽둥이를 들거나 긴 창을 잡거나 또는 돌맹이를 가지고 마구 후려쳤다. 배 위의 사람들이 거의 기운이 빠지게 되자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쫓아 들어가서 빗발치듯 마구 소아 댔다. 적선 세척이 거의 다 뒤집혔을 때 녹도 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뒤쫓아와서 서로 힘을 합쳐서 적을 쏘아 죽여 적은 한 놈도 살아남지 못하였다.[386]

왜인 준사는 이전에 안골포의 적진에서 항복해 온 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바다에 빠져 있는 적을 굽어보더니 “그림 무늬 놓은 붉은 비단옷을 입은 자가 바로 적장 마다시입니다.” 하고 말했다. 내가 물 긷는 군사 김돌손을 시켜 갈구리로 낚아 올려 토막토막 잘랐더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꺽였다.

우리 배들이 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일제히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쫓아 들어갔다... 적선 31척을 깨뜨리자 적선은 도망하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명량해전 대첩비 (1688년에 전남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에 세운 비로 비문에는 이순신이 진도 벽파정에 진을 설치하고 우수영과 진도 사이의 빠른 물살을 이용하여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적을 무찔렀다고 쓰여 있다.)[387]

10월 14일 저녁에 천안에서 온 어떤 사람이 집에서 보낸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온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거칠게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痛哭)’ 두 자가 쓰여 있었다. 면이 적과 싸우다 죽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리하기가 보통을 넘어섰기에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서 지하에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목숨을 이을 수밖에 없구나!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394]

12월 5일 도원수의 군관이 왕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이번 선전관 편에, 통제사 이순신이 아직도 권도(權道)를 좇지 않아서 여러 장수들이 걱정스럽게 여긴다고 들었다. 사사로운 정이야 비록 간절하지만 나랏일이 한창 바쁘고, 옛사람의 말에도 ‘전쟁에 나가 용맹이 없으면 효(孝)가 아니다.’ 라고 하였다. 전쟁에 나가 용감하려면 소찬(素饌)이나 먹어서 기력이 떨어진 자로서는 능히 하지 못하는 일이다. 예에도 원칙을 지키는 경(經)이 있고 방편을 취하는 권(權)이 있는 것처럼 꼭 원칙만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다. 경은 내 뜻을 잘 깨달아서 소찬을 먹는 것을 그만두고 권도를 좇도록 하라.”
아울러 고기 반찬을 내려주셨다. 비통하고 비통하였다.[405]

1598년 마지막 싸움에 나서다

2월 17일 이순신은 강진 고금도로 진을 옮겼다.
7월 16일 명나라 수군 도둑 진린이 5천의 병력을 끌고 왔다.
7월 18일 적선 1백여 척이 녹도를 침범했다.
8월 18일 풍신수길이 죽으면서 조선에서 철병할 것을 명령했다.[412]

11월 18일 조․명 연합 함대가 노량으로 진격하였고, 19일 새벽부터 싸움이 시작되어 왜적을 크게 쳐부수고 선두에서 싸움을 지휘하던 이순신이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418]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임진왜란 7년간에 걸쳐 씌여진 난중일기를 완역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나는 난중일기의 전체 내용을 일자순으로 완역해 놓은 책을 처음 접하고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일단 의미있는 책이란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는 일자별로 구성된 난중일기에 연도별 월별로 제목을 달아서 각 시기별로 이순신의 활동 가운데 중요한 내용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좋게 요점정리 해주고 있다.

각주를 많이 활용하여 다양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고, 난중일기에서 유실된 부분은 『이충무공전서』과 장계를 통해 보충한 점도 독자를 위한 신중한 배려라고 생각된다.
곳곳에 책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지도와 사진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다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다만, 이순신에 관한 책이 이미 시중에 많이 나와 있으므로, 다른 책들과 비교 하게 되면 이 책의 여러 가지 부족한 면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몇 년전 읽었던 “이순신의 두얼굴(김태훈 지음/창해)”이 비교적 일반 독자들이 이순신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려는 노력을 많이 기울였다. 따라서 “이순신의 두얼굴”과 비교하여 이 책의 문제점을 몇 가지 짚어본다.

먼저, 난중일기의 완역본을 원문 그대로 읽는 것은 별로 재미난 일이 아니다. 전쟁이 소강상태를 보이던 몇 년간의 일기는 읽기에 따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적어도 이순신을, 그 당시의 시대상황(정치, 경제, 사회 일반 등)을 잘 모르는 일반 독자들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특히 이순신의 짧고 간결한 문체는 그런 부가적인 설명을 더더욱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 책에는 그런 설명을 기울이려는 노력이 별로 보이질 않는다(김태욱의 책에는 이런 노력이 돗보인다)

역자(송찬섭)은 이 책을 통해서 이순신의 인간적인 면모, 진 면목을 볼 수 있다고 말하는데, 그 진면목의 깊이가 깊지 못하다. 어디까지나 이순신 자신이 쓴 일기는 본인의 입장에서 당시 상황을 기술한 것이다. 따라서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이를 좀 더 객관적으로 통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다른 역사서들을 참고 할 필요가 있다. 송찬섭은 『이충무공전서』과 장계를 이용하였는데, 김태훈은 『이충무공전서』,장계 외에도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임진장초』, 유성룡의『징비록』, 루이스 프로이스의『일본사』, 게이넨의『일일기』 등 다양한 역사서들을 참조하여 이순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풍부한 정보를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김태훈의 “이순신의 두얼굴”에서는 조선의 함선, 거북선, 화포, 일본의 조총 등을 자세히 설명하여 해전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또한 이순신의 해전을 스페인 무적함대, 트라팔가 해전 등과 비교하여 세계사 속의 영웅들과 이순신을 비교하는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이런 부분이 송찬섭의 책에서는 부족하거나 보완되었으면 좋을 부분이란 생각이 든다.

기타 여러 부분에서 이 책은 보완될 여지가 많은 책이다. 다만 난중일기 원본을 완역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으므로, 이 책을 이순신에 대해 분석을 잘 해 놓은 다른 책과 함께 읽으면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9월 2일 싸우고 난 다음 날이다. 또 한 번 쳐들어가서 적들의 소굴을 불지르고, 배들을 전부 깨부술까 하였다. 그러나 위로 올라간 적들이 여러 곳에 꽉 들어 차 있는데, 그들이 돌아갈 길을 끊는다면 막다른 골목에 몰린 도적이 되어 버릴 게 걱정되었다. 부득이 수륙에서 함께 쳐야 섬멸할 수 있을 터였다..... 전선을 수리하고 군량을 넉넉히 준비한 다음에, 또 육전이 또 크게 벌어지는 날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경상 감사 등과 수륙으로 함께 진격하여 남김없이 쳐부수기로 약속했다.[75]

5월 4일 맑다.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지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오래 사시기를 축수하는 술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다.[94]

1월 12일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니께 돌아가겠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잘 가서 나라의 욕됨을 속히 씻어라.” 하고 말씀하시며 몇 번이고 거듭 타이르셨다. 헤어지는 데 대하여서는 조금도 슬픔을 나타내지 않으셨다.[140]

1월 1일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서 나랏일을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또 팔순의 병든 어머니를 생각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213]

5월 29일 비바람이 그치지 않고 하루 내내 주룩주룩 내렸다. 사직(社稷)의 위엄과 영령(英靈)의 도움으로 겨우 형편없는 공밖에 세우지 못했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쳤다. 장수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티끌만 한 공로도 바치지 못하였으니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으나 군사를 거느리기에는 부끄러울 뿐이다.[233]

4월 13일 일찍 아침을 먹고 어머니를 마중하려고 바닷가로 가는 길에 홍 찰방 집에 들렀다.... 조금 있자니 배에서 달려온 종 순화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곧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니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모두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 대강 적으리라.[337]

6월 16일 하루 내내 혼자 앉아 있었으나 아무도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었다.[357]
6월 22일 아침에 초계 현감이 연포를 끓여 가지고 와서 권하였는데 오만한 빛이 역력했다. 그의 처사가 예를 잃었음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359]

8월 12일 늦게 거제 현령, 발포 만호가 들어와서 나의 명령을 들었다. 그들에게서 배설이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모양을 전해 들었다. 괘씸하고 한탄스럽기 짝이 없다. 이런 자들이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 아첨이나 해서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지위에 올라가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치고 있건만, 조정에서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377]

나는 조용히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 맞혀라.” 하였다. 여러 장수의 배를 돌아다보니 이미 1마장 정도 물러났고,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멀리 떨어져 가물가물하였다. 배를 돌려 바로 중군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목을 베어다가 내걸고 싶지만,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가 점점 더 멀리 물러나고 적들이 더 덤벼들 것 같아서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 되었다.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기를 세워 군령을 내리도록 하고 또 초요기를 세웠더니, 중군장인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 가까이 왔으며, 거제 현령 안위의 배가 그보다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였다. 그러자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뛰어들었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처형하고 싶지만 전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하였다.

안위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해서 몽둥이를 들거나 긴 창을 잡거나 또는 돌맹이를 가지고 마구 후려쳤다. 배 위의 사람들이 거의 기운이 빠지게 되자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쫓아 들어가서 빗발치듯 마구 소아 댔다. 적선 세척이 거의 다 뒤집혔을 때 녹도 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뒤쫓아와서 서로 힘을 합쳐서 적을 쏘아 죽여 적은 한 놈도 살아남지 못하였다.[386]

10월 14일 저녁에 천안에서 온 어떤 사람이 집에서 보낸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온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거칠게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痛哭)’ 두 자가 쓰여 있었다. 면이 적과 싸우다 죽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리하기가 보통을 넘어섰기에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서 지하에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목숨을 이을 수밖에 없구나!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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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6.03 01:43:08 *.36.210.11
6월 8일 각 고을의 담당 서리 11명을 처벌하였다. 옥과현의 향소(유향소)에서 지난해부터 군사를 동원하는 일이 부실하여 도망간 사람이 거의 1백여 명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매번 거짓말을 하기에 이날 목을 베어 매달았다. 모진 바람이 그치지 않고 마음도 어지러웠다.[107]

- 상전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두고 거짓말을 매번 하면 아무리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성인군자도 다른 부하들을 위하여 도저히 보아줄 래야 보아 줄 수가 없는 것인가 봅니다. 일벌백계인 것 이겠지요.

6월 12일 아침에 흰 머리털 여남은 오라기를 뽑았다. 흰 머리카락이 있다고 하여 어찌 싫어할 일이겠냐만 위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뽑은 것이다.[108]

- 올 해 환갑을 지낸 큰 오라비를 보며 어머니는 "아들이 머리가 허옇게 다 쇠니 내가 빨리 가야 한다. 자는 듯 가야 할 텐데 걱정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철 없이 왜요? 오래 살아 환갑 잔치도 보고 좋지 뭘 그래요? 하니까 "아들의 머리가 허연데 뭐가 좋으냐, 오래 살아 험한 꼴 볼까 두렵다" 고 하셨다. 어머니는 자신의 흰 머리카락보다 아들의 흰 머리카락을 더 애처로이 여기시며 안쓰러워 하셨다.

4월 13일 일찍 아침을 먹고 어머니를 마중하려고 바닷가로 가는 길에 홍 찰방 집에 들렀다.... 조금 있자니 배에서 달려온 종 순화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곧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니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모두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 대강 적으리라.[337]

<그는 뛰어난 전략가이자 부하를 잘 다스리는 장수였다.>
8월 12일 늦게 거제 현령, 발포 만호가 들어와서 나의 명령을 들었다. 그들에게서 배설이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모양을 전해 들었다. 괘씸하고 한탄스럽기 짝이 없다. 이런 자들이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 아첨이나 해서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지위에 올라가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치고 있건만, 조정에서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377]

나는 조용히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 맞혀라.” 하였다. 여러 장수의 배를 돌아다보니 이미 1마장 정도 물러났고,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멀리 떨어져 가물가물하였다. 배를 돌려 바로 중군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목을 베어다가 내걸고 싶지만,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가 점점 더 멀리 물러나고 적들이 더 덤벼들 것 같아서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 되었다.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기를 세워 군령을 내리도록 하고 또 초요기를 세웠더니, 중군장인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 가까이 왔으며, 거제 현령 안위의 배가 그보다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였다. 그러자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뛰어들었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처형하고 싶지만 전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하였다.

<그는 어머님을 극진히 보살피려던 효자요, 아들을 지극히 사랑했던 평범한 아버지였다.>

안위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해서 몽둥이를 들거나 긴 창을 잡거나 또는 돌맹이를 가지고 마구 후려쳤다. 배 위의 사람들이 거의 기운이 빠지게 되자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쫓아 들어가서 빗발치듯 마구 소아 댔다. 적선 세척이 거의 다 뒤집혔을 때 녹도 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뒤쫓아와서 서로 힘을 합쳐서 적을 쏘아 죽여 적은 한 놈도 살아남지 못하였다.[386]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394]

- 위의 세 가지 문장에서는 이순신을 읽으며 충무공의 마음이 그대로 감정 이입된 현 형아의 모습이 느껴집니다. 아마도 조금도 다를 것 같지가 않습니다. 형아 또한 충무공 못지 않은 이땅의 건실한 인재요, 어미의 효성 지극한 아들이요, 사랑하는 가족을 둔 자상하고 애달픈 아버지이기 때문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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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2008.06.03 09:53:59 *.97.37.242
이런 과찬의 말씀을...
써니선배, 나를 충무공에 비하다니
언감생심, 꿈이라도 꿀 수 있겠는지요?
하지만 기분은 좋네요. ㅎㅎㅎ 인간이 아직 이것밖에는...

발췌한 글 밑에 선배 생각을 짧게 다니 읽기도 보기도 좋네요.
그런 식으로 해야 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쫓기는 마음으로 과제를 하다보면 항상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음 리뷰부터는 좀 고쳐봐야 할 것 같군요.
덧글 고맙습니다. 가르침 달게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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