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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26일 03시 02분 등록
1.저자에 대하여

’다중지능 이론’의 창시자인 하워드 가드너에 대하여 심리학계 일부 학자들은 사회심리학자의 대가인 에릭슨의 계보를 잇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점은 하워드 가드너가 본문 중에도 밝히고 있다) 하워드 가드너에 대해 말하기 전에 심리사회성격의 창시자이며 1960년부터 1970년까지 하버드대학의 교수였던 Erik H. Erikson, (1902-1994))에릭슨을 잠깐 살펴보고자 한다.
에릭슨은 성격발달이 전환기의 연속이며, 각 전환기는 바람직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누어진다고 보고 각 단계의 과제를 위기를 성공적으로 해결하며 넘어서야 성격발달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는 이론, 즉, 자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인간관계를 가족, 사회, 문화의 관련 속에서 보다 포괄적으로 설명하고, 사회 문화적 영향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그의 8단계에 따른 성격발달이론을 심리 사회적 발달이라고도 한다.

하워드가드너의 가장 위대한 연구자적 업적은 ‘다중지능이론’ 통합하고 검증한 것이다. ‘다중지능이론’ 은 피아제의 인지이론등, 수많은 연구자들에게 받은 영향과 자신의 연구과정을 토대로 음악, 신체운동, 논리수학, 언어지능, 공간지능외에도 대인관계지능, 자아지능, 최근에 주장한 여덟 번째 지능인 자연친화, 실존지능을 논하고 있다. 그러나 심리학은 실험이 되지 않는 통계는 검증 되지 않은 것으로 보기 때문에 8과 2분의 1지능으로 말하고 있다.

그 가운데 대인관계지능, 자아지능 등은 상당부분이 에릭슨의 ‘인간은 선천적인 것보다 후천적인, 사회에서 직간접 경험을 통해 더 많이 발달 할 수 있다는 것에 영향을 받고 있으며 가드너가 1975년에 발표한 논문 중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지능이 통합적으로 발달하고, 협력적인 사회활동이 지능발달에 기여한다’ 말하고 있어 그 같은 학계의 주장을 뒷받침 하고 있다.
또한 다중지능이론이 ‘두뇌이론’을 바탕으로 연구된 것이기 때문에 현장의 교육자가 학습자들에게 응용해보고 싶어 하는 매력적인 이론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Gardner(1999)가 우려하는 것과 다중지능이론의 비판적시각에서 본다면, 다중지능 교육은 획일적인 평가환경에서 적용이 용이하지 않다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나라처럼 국가수준의 교육과정에서 평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체제하에서는 다중지능이론에 근거하여 교육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런 이유로 일부 대안와 예체능계학교에서 다중지능교육 적극 적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움직임에 힘입어 공교육에서도 적용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 공교육에서 다중지능이론을 접목해 보고자 한 노력의 일환으로 초등학교의 90년대 중, 후반에 성행했던 열린교실등을 사례로 들 수 있겠다.
다중지능 이론이 우리 학습 사회에 미친 영향도 지대해서 최근 EBS 다큐 프라임에서 다중지능 이론을 ‘아이의 사생활’이란 타이틀로 기획, 5부작으로 방송되기도 했다.

♣ Howard Gardner하워드 가드너( Howard Gardner)의 프로필.
아버지가 일찍 죽고 유태인과 재혼한 어머니가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민을 오면서 가드너는 1943년 미국 펜실베니아주에 정착한다.
1965년 하버드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고, 무슨 생각에선지 가드너는 런던대학의 경제학과에서 1년간 수학한다. 다시 돌아와 하버드 대학에서 발달심리학을 전공한 후, 1971년에 박사학위를 받는다.
가드너는 이미 1975년도부터 ‘다중지능’ 이론의 논문을 발표한다. 발표 초기부터 학계에 주목을 받았던 ‘다중지능(MI) 이론’이 정리되어 1983년 발표 되자 심리학계에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가드너는 하버드 의과대학과 보스턴 대학에서 Postdoc 과정에 들어가는데 이 과정중에 두뇌손상을 입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인지적 장애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된다. 현재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교수이자, 하버드대학교 심리학과 겸임교수, 보스톤대학교 약학대학 신경학과 겸임교수, Harvard Project Zero의 추진위원장, Good Work Project 책임자로 재직 중에 있다.
1972년부터 데이비드 퍼킨스(David Perkins)와 함께 Harvard Project Zero의 공동 소장으로 연구해 오면서, 기존의 지능관에 대한 회의를 펼치고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여 1983년 `Frames of Mind: The Theory of Multiple Intelligences`라는 저서를 통해 7개의 지능을 주장하였다. 총 18권의 책과 수백 편의 학술 보고서를 발표한 가드너는 1981년에 맥아더 펠로우십(MacArthur Prize Fellowship)을, 1990년에는 미 교육 분야에서는 처음으로 그라베마이어상(Louisville's Grawemeyer Award)을, 2000년에는 구겐하임 펠로우십(Guggenheim Fellowship)을 받았다.
♣저서로는 <열정과 기질>, <체인징 마인드>, <마음의 틀>, <통찰과 포용><선도적 마음-지도력 해부><미래를 위한 5가지 마음> <20세기를 움직인 11인의 휴먼 파워>, <다중지능 이론> <다중지능: 인간지능의 새로운 이해>, <비범성의 발견> 등이 있다.
♣ 2000년 존 구겐하임 펠로십을 수상했고, 2005년 포린폴리시지(誌) ‘세계 100대 지성’에 선정되었으며 월스트리트 저널이 지난 5일 발표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영 사상가 20인’의 2위에 하워드 가드너가 선정되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창조적 거장들의 삶을 지배한 실험정신
p.13. 이 책은 내 연구의 정점이자 출발점이다. 창조성이라는 현상과 역사적 실례(개별 사례)에 대핸 평생 동안의 관심을 하나로 모았다는 점에서는 정점이며, 인간의 창조적 기질을 새로운 접근법으로 연구했다는 점에서는 출발점이다. 이 새로운 연구 방식에서 나는 인문학의 전통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적 전통에도 의지하였다.
p.13-14. 하지만 에릭 에릭슨(Erick Erickson)의 심리분석적 연사와 전기를 읽었을 때 나는 지적인 고향을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곧 연구 주제를 사회적 관계(사회과학이나 행동과학)로 바꾸었고, 점차 인지발달에 관한 심리학에 관심이 쏠렸다.
나는 인간 경험의 감정적인 측면에 대한 관심과 인지적인 차원에 대한 호기심 사이에서 다소 갈등을 느끼고 있었는데, 대학 졸업반 시절에 스위스의 심리학자 장 피아제(jean Piaget)의 저서를 읽으면서 인지적 차원에 약간 더 무게를 두고 이런 갈등을 해소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일시적인 해소책에 불과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영국에서 연구생으로 지낼 때 피아제를 집중적으로 읽었다. 나는 여가 시간을 현대 사상과 현대 예술에 좀 더 친숙해지는 기회로 삼았다. 그러면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입체화, T. S. 엘리엇의 문학을 비롯해 20세기 초반 유럽의 주요 국가에서 분출되었던 과학, 예술, 정치 방면의 눈부신 창조적 업적에 매료되었다. 대학원에서는 발달심리학(developmental psychology)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지만, 그처럼 눈부신 업적을 낳았으면서도 동시에 두 차례의 끔찍한 세계대전과 끈덕지게 지속된 냉전에 휘말려 들어간 인간 사회에 대한 관심이 이미 나의 내부에서 강렬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p.15-16. 하지만 그러한 묘한 착각이 만연한 탓인지 나는 창조성에 관한 학회에 자주 초대받았고, 창조성에 관심이 많은 기자들과 심심찮게 인터뷰를 했으며, 어울리지 않게도 유력한 창조성 연구 그룹의 일원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사실 나는 오랫동안 비범한 인간의 업적에 관심을 두고 있었으므로 내 학문적 정체성에 대한 그런 사소한 오해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상관은 없었다.
p.17-18. 프로이트와 피카소는 서로 다른 지능을 대표하는 사람들로서, 나는 이 점을 신중하게 비교하고 대조하였다.
프로이트가 언어(Linguistic) 지능과 논리(logical) 지능이 뛰어난 경우라면, 피카소는 (spatial) 지능과 신체(bodily) 지능이 우수한 경우이다. 두 사람이 자신의 지능을 활용한 방법도 굉장히 독특했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창조성이 어떻게 상이한 지능을 통해 발현되는가 하는 문제였고, 이 난해한 문제를 해결할 요량으로 서로 다른 지능을 대표하는 몇 명의 인물을 비교하고 검토하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처음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흥미로운 인물들(모짜르트, 성 아우쿠스티누스, 공자 등)을 선택할 생각이었지만, 방법론이나 내가 가진 전문적 식견의 한계를 감안했을 때, 동일한 시대에서 일곱 명의 개인을 선택하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다. 이렇게 해서 이 책에서 다루는 일곱 명의 창조적인 인물이 선택된 것이다.
p.18. 일곱 명의 창조적인 인물들은 각기 연구자의 평생을 걸어야 할 만한 인물이라는 점, 현대는 굉장히 복잡한 시대라는 점, 분석 도구가 새로운 것이어서 여러모로 불완전했다는 점이었다. 이 책은 현재의 분량보다 세 배는 더 큰 분량이 될 수도 있었고, 수많은 도표와 알람표로 눈을 어지럽히는 모양새가 될 수도 있었다.
p.20. 젊은이
불행하고 어리석은 젊은이여
도회의 한 구역에서 방금 돌아온 젊은이여
안개 서린 전차 창문으로 비치는,
군중의 비참하고 불안한 모습들
사치스런 장소에 들어갈 때마다 밀려 드는 두려움
모든 게 너무 비싸기만 하다, 너무 고급스럽다.
자네의 미숙한 매너와 유행에 뒤진 옷, 그리고 서투른 행동을
사람들은 다 알아봤을 테지,

자네 곁에 서서 이렇게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당신은 잘생긴 청년이군요,
당신은 건장하고 튼튼해 보입니다,
당신이 불행하다니 믿기지 않는군요.

낙타 털 외투를 걸친 테너 가수를 부러워할 필요도 없지
자네가 그의 마음속 두려움을 알고 그가 어떻게 죽을지 안다면

자네의 근심거린 빨간 머리 여인,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녀는 마치 불 속의 인형처럼 보이고
그녀가 익살꾼들의 놀림에 깔깔대는 것을 자네는 이해하지 못할 테지.
1취리히에서의 우연한 만남
일곱 명의 창조적인 사색가
p.32-35. 시대적 배경을 1914년에서 1918년까지 지속된 세계전쟁 기간으로 정해 놓고, 스토파드의 「익살」을 확장하여 무대에 올릴 만한 인물을 고른다고 생각하면, 서로 비교가 가능하면서도 우리 시대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 역사적 인물들을 쉽게 선택할 수 있다.
● 신경학자에서 정신분석의가 된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빈에 살면서 환자를 치료하고, 자신이 창시한 정신분석학 운동의 영향력이 점차 확산되는 현상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지만, 마음 한켠에서는 취리히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는 경쟁자 칼 융(Carl Jung)에게 신경이 쓰인다. 그는 전장에 나간 아들의 운명을 걱정할 뿐 아니라, 내부에 파괴적인 독성을 지닌 인간 사회의 생존 가능성에도 우려의 눈길을 보낸다.
● 이론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 이제 막 취리히에서 베를린으로 옮겨온 그는 이곳에서 대학의 저명한 물리학 교수 및 새로운 물리학 연구소의 소장으로 일한다. 평화주의자로서 자신의 고향 사람들이 일으킨 전쟁에 반대하는 선언을 한다. 부인과 이혼하면서 그녀에게 노벨상 수상을 약속하는데,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 빛에 관한 기존의 생각을 뒤엎은 자신의 혁신적인 이론에 노벨상이 주어지리라고 확신한다.
● 스페인 태생의 화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 20세기 초에 파리로 이주한 그는 조르쥬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와 함께 구상한 입체주의 화풍을 서서히 확산시킨다. 전쟁 기간에 연인 에바의 죽음을 목도하고, 발레뤼스(Vallets Russes) 발레단의 무대를 꾸미기 위해 로마로 건너가 러시아인 발레리나 올가 코클로바(Olga Koklova)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 초연 당시 심한 물의를 일으켰던「봄의 제전(Le sacre du printemps)」(1913)을 작곡한 러시아 태생의 작곡가. 2ㅔ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서유럽을 떠나지 않기로 결심하고 전쟁 기간 내내 주로 스위스에 머물며 작곡을 한다. 이곳에서 그는 획기적인 작품 「병사 이야기(Histoire du soldat)」와 「결혼(Les noces)」을 작곡한다.
● T. S. 엘리엇(T. S. Eliot. 1888-1965).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난 시인으로 20세이 초엽에 유럽으로 건너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을 때 그는 가족의 소망을 뿌리치고 유럽에 정착하기로 결심한다. 전쟁이 발발함과 동시에 초기 대표작인 「프루프록의 연가(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1922)을 완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 마하트마 간디(Magatma Gandhi. 1869~1948). 인도의 정치 및 영적 지도자. 영국과 남아프리카 등 해외에서 20여 년을 보낸 뒤, 얼마전 조국에 돌아왔다. 영국의 통치에는 반대하지만, 전쟁 기간에는 연합국을 지지한다. 평화적으로 저항하는 혁신적 방법을 지속적으로 생각해내고, 전쟁이 끝나자 인도에 비폭력적인 정치 혁명을 일으키면서 전세계에 걸쳐 폭넓은 반항을 일으킨다.
현대를 탄생시키고 형성한 사람들의 목록을 어떻게 작성하건 여기서 빠진 사람이 눈에 띄게 마련이다. 왜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나 버지니아 울프(Wirginia Woolf, 1882~1941)가 아니라 T. S. 앨리엇인가? 왜 마오쩌뚱이나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목사가 아니라 마하트마 간디인가? 어째서 이사도라 던컨(Isadora Duncan, 1877~1927)이나 조지 발란쉰(George Balanchine,1904~1984)이 아니라 마사 그레이엄인가?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분야를 선택했건 무시된 분야가 생각나게 마련이다. 왜 운동이 아니라 무용이고, 사업이 아니라 정치이며, 생물학이 아니라 물리학이란 말인가? 이 책에서 집중하는 대상 시기 역시 논란을 피할 수 없다. 현(근)대의 개시를 1776년, 1789년, 혹은 1848년의 정치 혁명에서 찾아야 한다거나, 혹은 1500년이나 1815년에 풍미한 사상이나 발생한 사건들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또한 진정한 현대적 미학의 기원은 세기말에 등장한 풀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의 음악, 스테판 말라르메(Stephane Mallarme, 1842~1898)의 시에 있고, 과학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꾼 혁신적인 업적은 1920년대의 양자 역학이나 20세기 중엽의 유전 정보 해독, 혹은 최근의 혼돈 이론이라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이 책의 목표
p.37. 그리고 마지막 목표는 심한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어도 활기에 넘쳤던 시대, 즉 내가 ‘현대(the modern era)'라고 부르는 시대에 관해서도 내 나름의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전혀 다른 시대에서 그리고 다양한 문화권에서도 창조적인 인물들을 고를 수 있지만, 대체로 동시대인이라고 할 수 있고(프로이트는 1856년에, 마사 그레이엄는 1894년에 태어났고 다른 인물들은 이 사이에 태어났다.), 넓게 보아 서유럽 문명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선택하면 유리한 점이 있다. 몇몇 재능 있는 사람들의 특정한 업적을 살펴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형성했고 또한 그들이 그 특성을 만드는 데 기여했던 시대에 관해서도 검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성적 주체
시대를 통틀어 프로이트만큼 전인미답의 영역을 고독하게 개척했던 탐구자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런 프로이트도 다른 사람의 든든한 격려와 지원을 받았는데, 이것은 아마도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친구 빌헬름 플리스(Wilhelm Fliess)를 높이 평가했다. 프로이트는 일단 자신의 기본 생각을 명확히 설명하면, 다소 괴팍한 플리스와 절교할 위험까지 감수하면서도 과감하게 나아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곧 정신분석학 이론을 공유할 사람들을 자신의 모임에 끌어들이기 시작했고, 그 모임은 계속 성장하여 정신분석학이 발달하는 데 중요한 매개 역할을 했다. 따라서 나의 첫 번째 사례 연구에서는 고독한 탐구자로 출발해서 절친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고 나아가 새로 탄생한 분야에 소속된 구성원들과 상호작용을 하게 된 변화의 궤적이 기본 틀이 된다.
p.43-44. 경계선에 위치한 거장
하나의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기꺼이 이주하는 것은 현대의 두드러진 현상이며, 이 책에서 다루는 창조적인 거장들 역시 다양한 문화에 흠뻑 젖는 것이 필요하고 매력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파리나 취리히와 같은 국제적인 도시에 이끌린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특히 엘리엇은 다른 누구보다도 현대의 창조적인 인물이 지니는 경계성(marginality)을 고려하게 하는 인물이다. 그는 상이한 문화권에 끼어 있었고 다양한 시대에 ‘걸쳐 살았던’ 셈인데, 정신 장애에 가까운 불안과 혼란을 겪었다. 게다가 엘리엇은 분명히 미국의 주류 계층에서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창조적인 인물이 스스로 경계인이 되는 사례의 시금석과도 같다. 또한 엘리엇은 30대에 창조성의 절정에 이른 대표적인 시인으로서, 나이가 먹은 뒤에도 지속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인물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비평가와 극작가, 그리고 편집자로서 크게 활약했다. 그의 생애는 창조적인 인물이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인 것이다.
p.44. 창조적인 미국 여성
그레이엄은 이전 시기에 여성에게 부과된 여러 한계를 극복하면서 자기만의 예술 형식을 창조했고, 스스로 단체를 설립하고 자신의 예술적 유산을 남겼다. 아마도 다른 누구보다 마사 그레이엄은 그녀 스스로 행동의 귀감, 즉 역할 모델이 되어야 했을 터인데, 이 점은 생물학자 바바로 맥클린토크(Barbara McClintock)와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Margaret Mead), 화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작가 버지니아 울프 등 20세기의 선구적인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p.46. 위의 간략한 소개에서도 드러났지만, 창조성에 대한 나의 연구 방식은 특정 시기에 집중하여 창조적인 인물의 생애를 검토하는 데서 출발한다. 즉, 그가 획기적인 도약을 구상하고 실현하는 시기, 그리고 그것에 대해 기존의 권위자들과 관련 제도가 대응하는 시기에 집중하는 것이다. 나는 이들의 고유한 생애를 아우르는 연결의 수준을 넘어서, 교육상 의미 있는 이들의 개별 사례에 두루 해당하는 공통점을 찾아내는 한편, 이들 간의 차이점을 부각시킬 생각이다. 앞에서 언급한 핵심 요소와 관련지어 말하자면, 아인슈타인과 피카소의 사례 연구는 아동과 대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출 것이고, 프로이트와 스트라빈스키, 간디의 경우는 창조적인 인물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엘리엇과 그레이엄의 사례 연구에서는 이들이 활약하는 분야에서 비교적 경계적인 위치에 속했다는 사실에 중점을 둘 것이다.
p.48. 공교롭게도 내가 고른 주요 인물은 모두 서유럽에서 살았고, 다른 두 사람(간디와 그레이엄)도 유럽 문명으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서로간의 ‘비교 표준’ 역할을 한다. 즉, 전반적으로 비슷한 생활환경과 문화권에서 살았지만, 경험 영역이 상이한 분야의 활동을 선택한(혹은 선택당한)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p.49. 나는 이와 같은 시대정신(Zeitgeist), 즉 특정한 개인들이 우연히 그것을 일깨우고 결과적으로(어쩌면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것을 매개하는 역할을 하는 시대정신이 존재한다는 견해를 신봉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역사를 우연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시제로 가장 극적인 역사적 변동을 일으키는 요인은 빗나간 총탄이라든가 화산 폭발과 같은 우연적인 사건인 경구가 많은 것이다.(중략)
푸코는 이간은 구조주의적 입장에서 17세기를 바라보면서, 생물학과 경제학, 언어학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 작동하는 지식이 동일한 분류학적 가정을 토대로 한다는 점을 밝혀냈다. 물론 이러한 ‘뼈대’는 고정된 방식으로 작동하지는 않지만, 거의 동시에 나타나고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p.50.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의 작업이나 성과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 그러한 상호 영향이 법칙이 된다고 해도 하등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연구에서는 피카소와 스트라빈스키와 같은 개인들이 서로를 잘 알고 있고 함께 활약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엘리엇과 스트라빈스키는 만년에는 친구가 되었다. 프로이트와 아인슈타인은 우연히 알게 된 사이로서, 편지를 통해 전쟁에 관해서 매우 날카로운 견해를 주고받기도 했다. 이들 창조적인 인물들이 창안한 특정한 관념들은 마치 공용화폐처럼 널리 퍼져 있어서 당대에 살았던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피카소의 입체주의 회화나 엘리엇의 『황무지』, 프로이트의 무의식적 동기에 관한 이론, 관찰자가 시공간 복합체에 편입되어 있다는 아인슈타인의 이론 등은 처음 생겨나고 10년도 되지 않아 널리 알려졌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 걸쳐 새로운 생각이 널리 알려지고 비슷한 시기에 구상되었다는 사실은 많은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무언가 신비한 힘이 역사의 배후에서 작용한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실 창조성이 뛰어난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자신의 작업에 적용하지 못했다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p.53.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걸쳐 서유럽과 동유럽에 만연한 것은, 한편으로는 기존 사회제도의 퇴조와 공통 지식의 소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대개 불온하다 싶을 정도로 낯설고 때로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무모한 창조적 열정이었다.
p.55-56.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 시대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1900년 무렵은 특별한 성격을 갖는 시기로서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중요한 특별한 성격을 갖는 시기로서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중요한 창조자들은 공통의 역사적 힘과 사건에 노출되었을 뿐 아니라, 서로의 활동 내용을 잘 알고 있었고 서로 간에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들 각자의 노력을 독립적으로 연구하는 것도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작업이지만, 특히 현대라는 시대를 공동으로 창조한 이들의 삶에서 비슷한 사건들과 통찰을 찾아내고, 이를 바탕으로 그들의 업적을 연구하면 더욱 더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일곱 몇의 창조적인 인물들을 소개하고 그들이 창조적으로 추구한 주요 주제를 살펴보았으며, 역사적 시대를 규명하려는 연구의 위험성과 가능성을 논의했다,. 앞으로는 이들 일곱 명의 인물들이 성취한 창조적인 도약에 주로 집중할 생각이다. 그런데 제2부에서 개별적인 사례 연구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이 책의 시도를 창조적인 인물과 작품, 그리고 창조 과정에 대한 기존 연구의 범위보다 넓은 맥락에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다.
창조성의 연구 방법
p.64. '진화의 나무'처럼 넓은 시야와 정망을 지닌 이미지를 고안하고 이용하는 것을 선호하며, 자신들이 연구하는 기본 요소나 문제들 혹은 현상에 면밀한 주의를 지속적으로 기울인다. 그루버는 창조성에 대한 ‘진화론적 체계’의 연구 방법에 관해 말한다. 이를테면, 연구자는 특정 분야에서 창조적인 인물이 체계화하는 지식과 추구하는 목적, 그리고 경험하는 감정적 사건을 동시에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체계들은 ‘느슨하게 연결되어’있을 뿐이지만, 오랜 시간 그 체계들이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관찰하면 생산적인 한 인간의 생애에서 창조적인 활동이 절정에 올랐다가 쇠락하는 과정을 이애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p. 64-65. 나의 연구 방식은 개별적인 사례 연구와 발달심리학적 관점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한 개인의 생애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상징체계를 검토하고 이들 간의 상호 작용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그루버의 전통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발현된 창조성을 폭넓고 면밀하게 비교 검토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특정한 역사- 문화적 시대에서 세심하게 선택한 창조적인 인물의 사례를 연구한다는 점에서, 또한 각각의 창조적인 도약과 활동 분야 그리고 그 분야에 속한 공중의 대응 방식이 어떤 식으로 역동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지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그루버의 전통과 구별된다.
p. 66-67. 프로이트는 유아 발달의 중요성을 확신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점도 창조 행위를 보는 그의 관점에 영향을 미쳤다. 프로이트는 놀고 있는 아이와 백일몽을 꿈꾸는 성인, 그리고 창조적인 예술가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는 사실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p.67. 놀고 있는 아이는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하거나, 혹은 자신이 즐거울 수 있도록 주변에 존재하는 사물을 재배열한다는 점에서 모두 창조적인 작가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창조적인 작가와 놀고 있는 아이가 하는 일은 똑같다. 창조적인 작가는 환상의 세계를 창조하고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즉, 작가의 환상세계에는 그의 감정이 충전돼 있다. 물론 그는 환상의 세계와 현실을 날카롭게 구별한다.
p.68. 혹은 혜술가는 그늘이 갈구하는 리비도적 쾌락과 오이디푸스적 쾌락을 창조하는 활동에서 간접적으로 얻는다는 것이다. 스키너의 행동과학적 관점에서 말하면, 사람들이 창조 행위에 나서는 것은 이전에 보상을 받은 겅험이 있거나 ‘긍정적인 강화’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 심리학자들은 창조 행위를 자극하는 요인을 다소 다르게 설명했다.
p.68-69. 내재적 동기
사회심리학자 테레사 아마빌라는 일련의 탁월한 실험을 통해 ‘내재적 동기’의 중요성에 주목하도록 했다. 아마빌라는 고전적인 심리학의 설명과는 반대로, 사람들이 외적인 보상을 노릴 때보다 순수한 즐거움만으로 행동을 할 때 창조적인 해법을 발견하는 경구가 더 많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창조성’이나 ‘독창성’을 기준으로 우리의 행동이 평가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오히려 행동의 반경이 좁아진다.(비교적 상투적인 결과만을 얻는다). 반면 그런 평가가 없을 때는 오히려 창조성을 자유롭게 북돋는 효과를 내는 것이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해서 몰입 상태 혹은 몰입 경험이라는 감정 상태에 관해 설명한 바 있다. 사람들은 이와 같은 내재적으로 동기화된 경험에서 자신이 관심을 쏟는 대상에 완전히 몰입되고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고 말한다. 이렇게 ‘몰입’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그 순간에는 자신이 무엇을 경험하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중에 반성적으로 자신이 완전히 살아 있었고 자신의 모든 것이 실현되는 ‘절정의 경험’을 했다고 느낀다. 자주 창조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감정 상태를 추구한다고 말하곤 한다. 이러한 ‘몰입 순간’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훈련과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몸과 마음의 고통지도 감수하려 드는 것이다. 작품에 전념하는 작가들은 책상에 묶여 있는 시간이 지긋지긋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아마도 결과도 신통치 않은 작품을 쓰면서 그런 ‘몰입 순간’을 겪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더욱 실망할 것이다.
p.75. 1. 구성적 주제(Organizing Themes): 가장 총괄적인 주제로서 내 연구의 길잡이가 될 뿐만 아니라 개별 사례 연구를 정식화하는 기본 원리를 제공한다.
2. 구성의 틀(Organizing Framework): 나의 연구는 많은 훌륭한 동료들과 공동작업을 통해 도출한 학제적인 분석틀을 전제하고 있다.
3. 경험적 조사 문제(Issues for Empirical Investigation): 분석틀만 보면 수많은 문제와 의문점이 생긴다. 이를 경험적인 사례 연구를 통해 명확하게 해명해야 한다.
4. 새로 발견한 주제(Emerging Themes): 개인별 사례 연구를 수행하면서 처음엔 연구 의제가 아니었던 두 가지 주제가 점점 더 명확하게 드러났다. 이는 내가 전혀 예기치 못했던 주제였기 때문에, 이 연구에서 내가 새롭게 발견한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네 항목으로 나누어 이 요소들을 상세히 검토할 생각이다. 편의상 이들 요소와 하위 요소에 숫자와 알파벳을 붙여서 <표 2.1>을 만들었다. 마지막 장에서 이 문제를 다시 논의할 것이다.
이제 순서대로 각각의 요소를 살펴보겠다. 사례 연구에서 이런 요소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경 설명을 충분히 하겠다.


1. 구성적 주제

A. 아동과 창조적인 어른의 관계
B. 창조적인 인물과 다른 사람들의 관계
C. 창조적인 인물과 작품의 관계


2. 구성적 틀 A. 발달
1. 인생 행로
2. 창조 활동

B. 상호 관계 : 개인과 분야 및 장의 상호 작용
1. 정의
2. 학제적인 분석틀
3. “창조성은 어디에 있는가?”
C. 생산적인 비동시성
3. 경험적 조사 문제
A. 개인
1. 인지적 문제
2. 성격과 동기부여 문제
3. 사회적 ․ 심리적 문제
4. 삶의 패턴

B. 분야
1. 상징체계의 특성
2. 활동 유형
3. 패러다임의 지위

C. 장
1. 스승과 경쟁자 및 추종자와의 관계
2. 정치적 갈등
3. 위계적 구조
4. 새로 발견한 주제

A. 도약의 시기에 얻는 인지적 ․ 정서적인 도움
B. 파우스트적 거래


p. 76.남은 두 사례 연구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세계에 대한 좀더 추상적인 관계를 탐구한다. 즉, 엘리엇과 그레이엄의 사례 연구에서는 경계성의 두 유형을 논의하는데, 하나는 앨리엇이 스스로 선택한 경계성이고 다른 하나의 성(gender)과 국정(nationality)으로 인해 그레이엄에게 강요된 경계성이다.(중략)
각각의 사례 연구에서 나는 창조자가 자신의 분야에서 새로운 의미체계를 만드는 과정을 상세하게 검토할 것인데, 다양한 분야에 걸쳐 놀라운 공통점이 드러날 것이다.
p.85. 노발상 수상자인 면역학자 피터 미더워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밝힌 바 있다.
어떤 형태로든 창조성을 분석하는 것은 어느 한 가지 분야에만 유능하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다양한 재능의 협동작업이 필요한 일이다. 심리학자와 생물학자, 철학자, 컴퓨터 과학자, 예술가, 그리고 시인들 모두가 할 말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창조성이 분석을 초월해 있다”는 말은 우리가 깨고 벗어나야 할 낭만적 허상에 불과하다.
p.98. 두 번째로 발견한 사항은 창조자의 성년기를 거의 포괄할 만큼 더 긴 세월을 아우른다. 이 연구를 통해 나는 각각의 창조자들이 모종의 거래는 계약, 다시 말해서 파우스트적인 협정을 맺은 것을 발견했는데, 이들은 이 협정을 자신의 비범한 재능을 오랫동안 발휘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겼다. 대체로 창조자들은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특히 원만한 삶을 포기하면서까지도 자신의 일에 매진하려고 한다.

2 현대의 창조적 거장들
-지그문트 프로이드
p.105. 수요 심리학회(Wednesday pychological Society)라는 모임은 프로이트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프로이트는 의학을 연구하면서 사설 병원을 개업했다.
p.110. 이 당시의 편지를 읽어 보면 프로이트가 스스로 세워놓은 야심적인 목표에 강한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젊은 시절부터 그는 자신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중요한 성취를 이루리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 같다. 문제가 있다면, 자신이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 그런 성취를 이룰 것인가였다. 이 점에서 그는 내가 이 책에서 다루는 일곱 명의 창조적인 인물 가운데 야심과 자신감을 가장 분명하게 밝힌 인물이다.
p.113. 프로이트는 브뤼케의 연구소에서 과학 지식과 실험 기술을 익힌 것 외에도 개인적으로도 큰 감화를 받았다. 사실, 브뤼케는 신경학자 장 마르탱 샤르코(Jean-Martin Charcot) 그리고 의사 조셉 브로이어(Josef Breuer)와 함께 프로이트의 아버지 상(像)이었다.
p.116. 프로이트는 ‘자아 이상(ego ideal)'은 이제 꼼꼼하고 엄격한 신경 해부학자 브뤼케에서 좀더 너그럽고 카리스마가 있는, 그리고 심리학에 보다 관심이 많은 샤르코로 바뀌었다.
p.117. 그보다 나이가 많은 브로이어라는 의사가 있었다.
p.121-122. 프로이트는 이 강연에서 절정에 이른 능력을 보여주었다. 언변은 유창하고 매혹적이었으며, 18명의 환자들로부터 얻은 증거 사례로 단단히 무장하고, 마치 의심 많은 청중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듯이 예상 반론에 침착하게 대응했다. 하지만 여러 정황상 프로이트의 주장은 냉담하게 받아들여졌음에 틀림없다. 모임의 사회를 맡은 성 과학자 크라프트 에빙은 “마치 과학 동화를 듣는 듯했다”고 말했다. 프로이트 자신은 후에 “고집스런 바보들에게 냉담한 대우”를 받았다고 썼다. 이런 반응에 낙심이 너무나 컸던지, 이후 42년간의 남은 생애 동안 프로이트가 빈에서 공개적으로 의학 강연을 한 것은 오직 한 번뿐이다.
p.122. 프로이트는 전환점에 도달해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는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하기 직전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빈의 의사들 모임에서 그는 “수천 년이나 수수께끼로 남은 문제의 해답, 즉 ‘나일강의 원천’”을 발견했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빈에서도 다른 어디에서도 프로이트의 말을 귀기울여 들은 사람은 없었다. 대개는 무시당했고 “어리석고 말도 안 되는 억측이며, 비합리적인, 증명되지도 않고 증명할 수도 없는” 주장이라는 모진 비난을 들었다. 한때는 가족들에게 왕 대접을 받았고 동료들과 스승들에게는 애정과 존경을 받았으며, 광범위한 지식을 섭렵할 수 있었던 프로이트가 가장 불행한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브로이어 등 가장 가까운 동료들은 더 이상 뜻을 같이 하려고 들지 않았고, 부인을 비롯한 가족들은 그가 주장하려는 바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때는 세상에 많은 친구들이 있었던 프로이트였지만, 이제 그는 자신의 운명을 그대로 걷기로 했다면, 그것은 그 혼자서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p.123. 프로이트는 학문적인 면에서는 스승인 샤르코나 브뤼케와 같은 인물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사적인 면에서는 가족들과 정서적인 유대감을 맺는 식으로 인간관계를 분리시킬 줄 알았지만, 학문적이고 정서적인 유대감을 한 사람과 맺기를 더 좋아했다. 브로이어는 젊은 프로이트에게 두 가지 역할을 모두 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둘의 관계는 프로이트에게 특히 중요했으며, 사이가 멀어졌을 때 프로이트는 심한 고통을 겪었다. 프로이트의 사상이 두 사람 사이를 떼어놓은 형국이었는데, 그런 후에 남은 것은 텅 빈 공허감이었다. 다행히도 빌헬름 플리스가 1890년대의 중요한 시기에 이 빈 자리를 채웠다.
p.126-127. 1896년 4월 2일: “우리가 몇 년만 더 조용히 연구에 몰입할 수 있으면, 분명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정당화할 만한 성과물을 남길 수 있을 거네.” 1897년 5월 16일: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네. 아무도 모른다니, 아무도 모른다니 말일세. ……꿈이 그저 무의미한 헛소리가 아니라 소원 성취라는 걸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거네.” 1897년 8월 18일: “해 놓은 일이 아무것도 없어. 심리학에는 매우 만족하네만, 내 신경증 이론에 대해서는 심각한 의문이 들어 고통스럽네. 생각하기도 귀찮고, 머릿속이 복잡하고 기분이 혼란스러운 게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네.” 1900년 11월 25일: “외국어로 말하는 사람처럼, 아니 훔볼트의 앵무새처럼 그저 묵묵히 살아갈 뿐이야.” 이런 시기를 살아가는 것은 분명 진이 빠지는 일이었을 것이다. 때로 프로이트는 신경쇠약 직전에까지 이르렀다. 1913년에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 나는 고독의 극에 도달해 있었다. 옛 친구는 모두 잃었고 새 친구는 아직 생기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무도 나를 주목하지 않았는데, 그나마 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건 오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꿈의 해석』 집필을 막 시작한 참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시기를 살아내고 견뎌내서 나는 긍지와 행복감을 느꼈다.
p.127. 『정신분석학 운동의 역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그 외로웠던 시절, 요즘과 같은 압박감이나 분망한 일이 없었던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면, 영광스러운 ‘영웅시대’처럼 느껴진다. 나의 ‘찬란한 고립’에는 분명 장점도 있었고 매력도 있었다.” 다른 혁신가들도 위대한 비약을 이루기 직전의 정신 상태를 회고할 때면, 감정상의 절정과 추락이라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p.129. 억압 개념은 프로이트적 세계관의 핵심이다. 우선, 의식화되지는 않았지만 의식의 표면으로 튀어나오려는 일군의 표상들이 있다고 가정할 필요가 있다. 검열 기제(censoring mechanism)는 의식에 닿기에 부적절한 표상들을 걸러내고 그것을 무의식 영역에 가두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전환 과정(conversion process)을 통해 그 불편한 표상들에 결부된 정서가 여러 종류의 증상으로 전환되는데, 이 중에는 말실수와 같은 무해한 증상도 있고 히스테리 발작과 같은 꽤 심각한 증상도 있다. 불편한 표상들이 전의식(前意識)에 닿거나 의식의 층위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변형되어야 한다. 만약 억압이 프로이트 이론 체계의 중심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면, 꿈은 억압 과정을 이해하고 그 밖의 정신 생활( psychic life)에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프로이트는 꿈의 힘을 발견한 것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플리스에게 자기 집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진 대리석 서판이 있어야 한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1895년 6월 24일, 지그문트 프로이트 박사가 꿈의 비밀을 밝혀내다.” 그는 꿈을 ‘무의식에 이르는 왕도(王道)’라고 불렀으며, 그 비밀을 밝히는 것은 ‘한 사람의 생애에 평생 한 번 허용 될까 말까 한 통찰’이라고 말했다. 자기 이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1890년대에 프로이트는 서로 느슨하게 연결된 네가지 영역을 연구했다. 이들 영역은 대체로 프로이트의 초기 관심사에서 마지막 관심사까지 순서대로 배열되지만, 중첩된 부분도 있음은 물론이다. 관심 영역들은 각기 구별되며, 20세기 초반의 연구로 이어졌다. 이들 영역은 여러 편의 논문에서 나누어 다루어졌지만, 『꿈의 해석』(2899/1900)에서 탁월하고도 단호하게 종합되었다. 이 책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더 논의하겠다.
신경증
샤르코의 임상교실에서 돌아온 후에 프로이트는 다양한 신경증(히스테리, 강박증, 편집증)을 연구하고 그 기제를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분류에 능한 편이었던 그는 유기적인 분류 체계를 만들었다. 어느 때는 전환 히스테리는 정서의 변형 기제로, 강박증은 정서의 전위로, 멜랑콜리는 정서의 교환으로 성격을 규정하면서 이들을 구별했다. 그 다음에는 신경증을 두 개의 주요 종류(억압과 불안)로 나누거나 다섯 개의 범주로 구별했고, 나아가서는 ‘실체의’ 신경증과 ‘심리적’ 신경증으로 분류하기까지 해다.
신경증은 다양한 방어 기제에 의존한다. 방어 기제란 두려운 생각이나 정서적 불안을 야기할 만한 관념을 안전하게 처리하는 심리 기제이다. 억압이 가장 중요한 방어 기제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승화 라든가 반응 형성, 투사, 전위, 금지 와 같은 다른 방어 기제도 존재한다. 임상 의사는 이러한 다양한 방어 기제가 작동하는 것을 관찰하고 환자가 방어 자세를 풀도록 도와주어야 하는데, 이렇게 해야 환자는 처음 병을 유발한 사건을 인식하고 방어 기제를 해소할 수 있다. 임상 설명과 사례 연구, 병인 확인, 증상 분류 치료법 탐색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연구 과제는 브뤼케의 신경 해부학 연구소와 샤라코의 살페트리에르 병원에서 운용된 모델이었다. 이들 연구과제는 당시의 심리학 분야에서 비교적 주류로 인정된 주제였고, 회합이나 의학 잡지에서 가장 많이 발표되는 종류였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다양한 신경증의 병인을 성적 체험으로 확신하게 되고, 신경증의 기제를 심적 억압과 무의식 과정의 관점에서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비교적 전통적인 이런 작업조차도 동료 과학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게 되었다.
심리학
1895년 프로이트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묘한 학문적 시도라고 할 수 있는 작업에 착수해다. 끝내 완성되지도 출판되지도 못한, 장황하기 이를 데 없는 논문을 쓰기 시작한 것인데, 프로이트는 이 논문의 제목을 「신경학자를 위한 심리학」이라고 붙였다가 「과학적 심리학 연구」로 개제했고, 줄여서 「프로젝트」라고 불렀다. 몇 개월 동안 신들린 듯이 써내려간 이 논문에서 프로이트는 신경학의 토대 위에서 자신이 발견한 심리적 기제를 새롭게 구성하려고 노력했다.
이 과제는 프로이트의 강박증이 되었다. 그는 온갖 단편적인 체계를 고안하면서 모든 신경증을 하나의 포괄적인 분석틀에 입각해서 설명하고 싶어 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상과 비정상, 의식과 무의식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심리학을 새로 구성해야 한다고 결론내렸다. 프로이트 자신의 기계론적인 어휘로 말하면, 그 목적은 “자연과학이 되어야 하는 심리학에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다. 즉, 심리 과정을 정량적인 상태로 묘사하는 것이다. 이 때 심리과정을 규정하는 것은 미세한 물질인데, 이 물질은 서로 구별하고 명확하게 기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심리 과정을 더욱 명쾌하게 드러낼 수 있고, 설명상의 모순도 사라질 것이다.” 그는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고백했다.
p.132-133. 나 같은 사람은 무언가에 열정을 쏟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 …… 마침내 한 가지를 찾아냈다. ……심리학이다. 항상 나를 유혹하는 목표였는데, 신경증이라는 주제를 만난 지금은 한층 더 마음이 끌린다. 지금은 두 가지 목표로 애를 먹고 있다. 하나는 정량적인 관점, 즉 신경 작용에 관한 경제학을 도입했을 때 심적 기능에 관한 이론이 어떤 형태를 취할지 파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병리학에서 정상 심리학에 요긴한 부분을 추려내는 문제이다.
p.135-136. 「프로젝트」는 어쩌면 프로이트 한 사람만을 위한 논문이었다. 하지만 이 논문을 플리스와 공유했다는 점은 내가 창조성을 연구하면서 반복적으로 만났던 주제이기도 하다. 창조적인 인물들은 근본적인 비약을 이루기 전에 자신이 새로 만들어낸 언어를 믿을 만한 친구에게 시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마도 자기가 아주 미친 것이 아니며, 정말 중요하고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은 심정 때문일 것이다. 소통에 대한 이런 욕망은 인지적인 측면과 정서적인 측면을 동시에 갖는다. 창조적인 인물들은 학문적인 이해뿐만 아니라 정서상으로도 무조건적인 격려와 지지를 원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소통에 대한 이런 필사적인 노력은 엄마와 아이 사이에 맺어진 최초의 소통 관계와 어린 시절의 친구 관계를 회복하려는 심정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만약에 심리학이 물리학이었다면, 그리고 프로이트가 뉴턴(혹은 아인슈타인!)이었다면, 「프로이트」는 프로이트의 가장 중요한 논문으로 발전했을 터이고, 심리학적 신경학 혹은 신경학적 심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탄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논문은 그저 부정적인 의미에서나 뛰어난 역작이 되었을 뿐이다. 프로이트는 만족스러운 듯이 자신이 천착한 문제가 그의 시대에서는 과학적 신경학의 언어와 방법으로 해결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만약 프로이트가 이 분야를 지속적으로 파고들고 싶다면, 심리학자의 방식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자기 고유의 형식과 언어를 고안해야 했는데, 이는 결국 전문적이기보다는 상식적인 용어가 사용된, 특히 신경학 분야와는 완전히 절연된 이론 형태로 나타났다.
p.139. “나에게 가장 중요한 환자는 바로 나 자신이라네.” 아마도 이 무렵에 프로이트는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그는 ‘공감적인 청자’의 역할을 자기 내부에서 스스로 창조한 정신분석가에게 맡겼던 것이다.
p.145. 어쩌면 놀라운 일일지 모르겠으나, 프로이트의 생생한 묘사에는 공간적, 시각-공간적, 혹은 신체-운동적 이미지 역시 얼마 되지 않는다. 이는 과학적 저서로서는 드문 특성이다. 생물학의 다윈이나 물리학의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들은 사유 과정에 있어서 이미지를 중시했다. 아인슈타인의 경우에는 그가 해명하고자 하는 것은 현상의 법칙이더라도 주로 이미지를 통해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저서는 거의 언어적 영역으로 이루어졌다.
p.145-146. 적은 수의 간단한 도해조차 설득력 있는 서술에 대해 사족 이상의 의미는 없다. 프로이트의 과학적 사유는 그 본질이 언어적이며, 공간적 요소는 거의 없고 논리적 요소가 얼마간 담겨 있을 뿐이다. 아마도 이러한 논의 패턴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일 터인데,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해놓고 있다. “나는 공간상의 관계를 시각화하는 능력이 지독하게 부족한 편이라서, 기하학이나 거기서 유래한 학문을 연구하는 일은 내게는 불가능하다.”
무엇보다도 『꿈의 해석』은 인성 영역을 다루는 프로이트의 능숙한 솜씨를 보여준다. 그는 피분석자들의 욕망과 욕구, 소원, 두려움 등에 민감했을 뿐만 아니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나, 엘렉트라 콤플렉스처럼 모든 인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에 섬세한 감수성을 보였다. 프로이트가 어린 시절부터 자기 가족의 결점이나 문학 세계에 보인 관심이나 극적인 이야기 솜씨 등은 젊은 시절의 편지에서도 줄곧 드러났는데, 마침내 꿈을 다루는 글과 이후의 정신분석학 저술에서 폭발적으로 터져나왔다. 이러한 특색은 프로이트의 저작에 거역할 수 없는 매력과 한 번 읽으면 쉽게 잊혀지지 않는 특성을 부여했다. 과학자들 가운데 프로이트는 인간의 내밀한 영역과 언어와 논리적 설명의 영역에서 눈에 띄게 우수한 편인데ㅡ 이는 유능한 사회과학자나 행동과학자의 전형적인 표본이다.
p.153. 그는 이제 이러한 과도한 도덕주의를 괄호 안에 넣어두고, 정치적 거래판에 들어가 교수직을 얻을 수 있었다. 무려 17년 동안 기다린 일이었다.
p.154.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위대한 주창자였다. 일이십 년 전에는 수줍음과 오만함 때문에 발표를 망치곤 했지만 이를 극복했고 젊은 시절의 편지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났던 유창한 언변을 구사하면서, 그는 매혹적인 강연자가 되었다. 별로 준비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각양각색의 청중 앞에서 역사와 예술, 당대의 독서물, 최근의 사건 현재 강연을 듣고 있는 청중의 관심사 등등에서 적절한 예를 자유롭게 끌어들이면서, 친밀하고도 사려 깊은 태도로 폭이 넓은 강연을 할 수 있었다. 청중의 반대를 예상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반대 목소리를 명확하게 밝히기까지 하면서 청중의 유보적인 태도와 비판을 무장해제시켰다. 사색적인 많은 젊은이들이 설득력이 점차 높아지는 프로이트의 간단한 요약문이나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개성에 매료되어 정신분석학에 이끌렸다.
p.155. 정신분석학 운동의 아버지
앞에서 나는 프로이트를 정신분석학 운동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프로이트는 모든 젊은이의 삶에 아버지의 역할이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점에 주목했었다. 아버지의 역할은 고전적인 오이디푸스 상황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신분석학 운동 내부에서도 매우 중대한 의미를 띠었고, 프로이트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그만큼이나 혼란스러운 결과를 빚어냈다.(중략)
융 자신도 매력적인 성품을 지녔고, 다른 나라와 문화, 사회적 ․ 종교적 배경에서는 나름대로 인정을 받는 사람이었다. 프로이트는 과거 어느 때보다 확실하게 자기 생각의 정당성을 느낄 수 있었다. 융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명예롭지만 고통스러웠던 고립’에 관해 심정을 토로한 후에 이렇게 썼다. “고요한 확신이 내 마음에 들어차기 위해선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의 목소리가 내게 응답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바로 자네라네.” 프로이트는 아무 망설임 없이 그의 조그만 모임에서 융을 가장 중요한 인물로 만들었으며, 1910년 새로 탄생한 국제 정신분석학 협회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했다. 만만찮은 두 사람의 성격이 부딪칠 때가 되면, 그것은 분명 후회할 결정이었다.
p.156. 하지만 결국 프로이트는 인간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충성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불만을 품은 추종자들은 정신분석학 운동에서 불행의 씨앗이 되었다. 아들러나 융 등의 제자들과는 분열이 비교적 일찍 찾아왔고 서로 간에 불편한 감정이 가득했다. 랑크와 페렌치 등은 오랫동안 학파의 일원으로 남았지만 결국 고통스럽게 헤어졌다. 정신분석학 운동과 카리스마적이지만 까다롭기 이를 데 없는 그 창시자 곁에 끝까지 남은 추종자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p.157. 『문명 속의 불만』(1930),『환상의 미래』(1927)와 같은 중요한 저서에서는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주제가 더욱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 마지막 저작인『모세와 일신교』(1939)에서는 새로운 종교를 창시했지만 정작 자신이 ‘진리의 길’을 알려준 당사자들에게 핍박받게 되는 지도자와 직접 동일시하기까지 한다.
p.159. 프로이트와 맺은 인연으로 인해 불운을 겪은 이들도 있었다. 특히 그와 절교하게 된 사람들이 그러했는데, 가령 젊은 제자였던 빅토르 타우스크는 용서할 줄 모르는 프로이트와 결별한 후 낙심한 상태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초기 추종자들 중에 적어도 여섯 명은 같은 선택을 했다. 이는 창조성이 매우 뛰어난 인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우리의 첫 번째 사례이다.
p.161-162. 이 점에서 그는 과학자인 아인슈타인보다 피카소와 스트라빈스키, 그레이엄과 같은 예술가와 더 비슷하다. 새로운 성과물이 정확히 10년 간격을 두고 나오는지 여부는 다소 의문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1910년 무렵에 사회적 문제로 관심사를 확대했고,.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정치와 문화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프로이트 후기의 보다 사변적인 저서들은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많은 나라의 일반 시민들과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에게 주목받는 세계적인 학자가 되는 데는 이들 저서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가 의학 문제나 치료법에 관해서만 글을 썼다면, 성 문제를 과감하게 다룬 우상 파괴적인 정신과 의사 하벨로크 엘리제스와 폰크라프트 에빙의 세계에 머물렀을 것이다.
p.164-165. 프로이트는 스스로를 과학자라고 생각했고 정신분석학을 과학으로 간주했다. 그는 언젠가 자신의 발견이 신경학적 ․ 화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음이 밝혀지리라 확신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나 다른 사람들이 프로이트 저서에 담긴 예술적이고 철학적인 특성을 못 본 것은 아니며, 프로이트에게 정복자 같은 성격의 일면이 있음을 간과한 것은 아니다.)시간이 흐름에 따라 정신분석학의 일부 측면은 과학적으로 적절히 해명되었지만, 정신분석학에 대한 관심 대부분이 과학자 사회 외부에서 나온 것이며 엄격한 과학자들 대다수가 진지하게는 프로이트를 동료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말해야 온당할 것이다. 이런 상황은 프로이트를 실망시켰겠지만, 아마 놀라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경우에도 그는 결국 자신의 주요 이론이 과학적으로 입증될 것이라고 단언했을 것이다. 즉, 프로이트는 그가 흠모하는 영웅인 셰익스피어나 소포클레스와 비등하게 인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넓히는데 공헌했으며, 프리드리히 니체나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프로이트는 특이할 정도로 이들의 책을 읽으려 하지 않았다. 자기 생각의 많은 부분을 이들이 이미 예견했기 때문이다. -처럼 인간 사회의 본성에 대해 통찰했다.
p.165. 내 논의에서 그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이를테면, 그는 특정 지능을 활용하여 창조성의 절정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인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성찰하는 자성 지능을 통해, 그리고 아무도 공감과 이해를 보이지 않을 때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를 통해 그런 성과를 보였던 것이다. 그런 다음에 프로이트는 에너지를 새로운 방향으로 돌려, 자신을 적대하는 세상에게 자기 이론의 진실성을 납득시켰다. 처음엔 세상에 매료되었고, 다음엔 세상에서 가장 고립된 처지가 되어 비밀스런 탐구 작업을 계속했으며, 결국 다시 세상에 돌아와 다양한 집단의 독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던 프로이트는 창조성의 이원적 성격을 새삼 환기시킨다. 특정 분야에서 창조적인 도약을 이루어 냈고, 덕분에 그 분야는 마침내 다양한 인간 사회의 관심과 가치를 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4알베르트 아인슈타인
p.168. 아인슈타인은 스스로 ‘부고장’이라 부르기를 고집했던 자서전에서 어린 시절 강한 인상을 받았던 몇몇 일화를 회상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이 네댓 살이었을 무렵 아버지가 나침반을 보여준 적이 있다. 어린 아인슈타인은 나침반을 돌릴 때에도 바늘은 고정된 채 방향이 바뀌지 않은 것을 보고 마냥 신기해했다. 이 신비로운 물건에 비하면, 물건이 땅에 떨어진다거나 달이 추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별로 놀랍지 않았다고 쓰고 있다. 열두 살 무렵 유클리드 기하학을 다룬 조그만 책자를 받았을 때는 경이로움을 느꼈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가령, ‘삼각형의 세 높이는 한 점에서 교차한다’ 와 같은 놀라운 주장을 한치의 의문도 허용치 않을 정도로 너무나 명쾌하게 증명했다는 것이다.
어린 아인슈타인의 창조성을 나타내는 징후는 또 있었다. 그는 아주 까다로운 물음을 제기해 놓고 그것에 대해 골몰하곤 했다. 아마도 미래의 아인슈타인을 가장 잘 드러낸 물음일 터인데, 열여섯 살에 그는 사람이 빛과 같은 속도로 움직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조금 나중에는 엘리베이터가 아주 높은 곳에서 자유낙하할 때, 안에 타고 있던 사람이 지닌 물건은 어떻게 될지 궁금해했다. 그러니까, 물건이 주머니에서 빠지면 바닥에 떨어질지, 아니면 공중에 그대로 떠 있을지가 문제였다. 수수께끼 같은 문제를 내놓고 그가 들었을 때는 누군가 우주론적 문제에 관해 진지하게 조언을 청해 오면, 신이 우주를 가지고 주사위 놀이를 하겠느냐는 괴상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p.169. 사물이 그런 식으로 움직이는 원인은 무엇일까? 자연 법칙을 바꿀 수 있을까? 그러면 모든 결과가 달라질까?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사고 유형과 아이들의 일반적인 사고 유형이 유사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지나친 겸손에서 나온 말일 터인데, 그는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p.169-170. 내가 어떻게 상대성 이론을 발견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보통 어른이라면 시간과 공간의 문제를 생각하느라 길을 멈추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런 문제는 아이 적에나 골몰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경우는 지능 발달이 더뎌서 어른이 된 뒤에나 겨우 시간과 공간에 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나는 보통 능력을 가진 아이보다 그 문제를 더 깊이 파고들 수 있었다.
p.171. 20세기를 수놓은 탁월한 인물들의 경우, 그들의 유년기에 관해 많은 전설이 지어졌다. 아인슈타인은 말문이 늦게 트이고 난독증이 있던 아이로 그려졌으며, 외톨이, 신동, 가난뱅이 학생, 흙 속의 진주 등으로 묘사되었다.
p.180. 철학자 모리스 라파엘 코헨은 훗날 이렇게 말한다. “우리 시대에 물리학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킨 많은 젊은이들처럼, 아인슈타인은 과거의 지식을 너무 많이 배웠다는 점이나 독일인들이 참고 문헌이라고 부른 것 때문에 곤란을 겪지는 않았다.”
p.184-185. 맥스웰은 이러한 절대적인 시공간 개념을 분명하게 거부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우리의 모든 지식은 본질적으로 상대적이다. …… 위치는 명백히 상대적인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관계를 표현하지 않는 용어로는 물체의 위치를 기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간에는 어떤 이정표도 없다. 공간의 어느 한 구역은 다른 모든 구역과 똑같다. …… 즉 우리는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한 바다에 떠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다.
p.188-189. 상대론적 관점의 문제와 가능성을 단순히 직관적으로 제기하는 수준을 넘어 뚜렷한 성과를 보인 사람이 두 명 있었다. 당시의 저명한 네덜란드 물리학자인 핸드리크 A. 로렌츠는 맥스웰 방정식을 후에로 로렌츠 방정식으로 불리게 될 수식을 통해 수학적으로 개념화하면 그 형식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즉, 에테르에 대해 정지 상태인 매질에서 이 매질에 대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매질로 변경을 가해도 똑같은 방정식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로렌츠 변환은, 하나의 계에서 일어난 사건의 시공 좌표를 알고 있고 이 계와 다른 계의 상대 속도를 알고 있다면, 원래 사건이 다른 계에서 갖게 되는 시공좌표 역시 알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이런 이론 체계에서는 한 쪽의 계에서 동시에 발생한 두 사건이 다른 쪽 계에서는 동시에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로렌츠 변환은 하나의 계에서 벌어진 사건의 시공 좌표와, 그 똑같은 사건이 다른 계에서 차지하는 시공 좌표를 새롭게 연결한 셈이 된다.
p. 194-195. 중요한 주제를 골라내는 이러한 능력이 가장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을 찾으려는 아인슈타인의 노력과 긴밀히 맺어졌다. “나 같은 사람에게 발달의 전환점이란, 그저 덧없을 뿐인 개인적 관심사를 서서히 뒤로 하고 사물을 관념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관심을 집중한다는 사실에 있다.”
p.196. 훗날 이같은 ‘수수께끼 푸는’ 행위를 회고하는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사고의 중심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글이든 말이든 언어의 세계는 나의 사고 기제에서 별 역할을 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생각을 전개하는 데 나름대로 기여한 심적 요소는, 마음속에 ‘자발적으로’ 생겨나고 서로 결합되곤 하는 특정 시호와 다소 명징한 이미지이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런 결합과 연상작용이야말로 생산적인 사고에서 가장 본질적인 측면이 아닌가 싶다. …… 내 경우에는 시각적 요소와 근육 감가적인 요소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 관습적인 어휘나 다른 기호들은, 위에서 언급한 결합 작용의 틀이 충분히 잡히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운용할 수 있게 되었을 때나 이차적인 단계로서 애써 찾아야 했던 것이다.
p.203-204. 매우 간결하게 쓰인 이 논문들이 기존의 사고를 단순히 반영하기만 했다는 생각은 어불성설이다. 전기 작가 캐를 젤리히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특수 상대성 이론을 구상하고 그것을 발표하는 데까지는 5주에서 6주 정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상대성 이론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전에도 몇 년 동안 충분히 논의하면서 이론의 주춧돌을 준비하고 있었지요. 다만 근본적인 수준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겁니다.” 아인슈타인은 이 편지에서 ‘근본적인 결정’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다른 글에서 추론하건대, 그 결정은 베소와의 대화가 계기였던 것 같고 다음 날 아침 깨어나면서 머릿속에 떠올랐던 듯하다. 아인슈타인은 두 사건의 동시성이라는 절대적인 개념을 포기하기로 정했다. “시간과 신호 속도(signal velocity, 우주에서 정보가 전달될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 즉 빛의 속도를 가리킨다-옮긴이)는 서로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으므로” 동시성 개념을 절대적으로 정의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특수 상대성 이론이 아이슈타인이 오랫동안 골몰하던 문제에 관한 사고 실험에서 유래했고, 학생 시절에 그는 시간과 공간의 수수께끼에 관한 책을 주로 읽었으며, 그가 쓴 많은 편지가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 역학에 관해 설명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해에 쓰여진 다른 논문들도 이와 유사한 기초 연구를 거쳤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뉴턴과 마찬가지로 당시 절정에 이른 이 수학과 과학의 천재가 무척 빠른 속도로 사고했다는 점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p.208. 바로 이 점을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리학의 표준 절차는 현상을 관찰하고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한 후에, 이로부터 원리와 이론을 도출해내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와 정반대로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는 높은 추상 수준에서 기본적인 물리 법칙, 가령 광속 일정의 원리를 우선 제기한 후에 이에 근거하여 경험적인 현상을 추측하고 그 기본 원리를 다른 법칙과 연결시켰다.
p.209-210. 과학 혁명의 대조
여기서 우리는 과학 혁명을 이끌어내는 데 필요한 정신적 능력과 마음가짐을 만나게 된다. 우선 특정 분야의 연구 결과와 원리를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이미 알려진 사실을 다시 발견하는 경우가 생긴다.
p.213. 신사 여러분! 내가 이 자리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이론은 실험 물리학의 토양에서 자란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이 이론의 강점이 있습니다. 이 이론은 근본을 뒤흔드는 관점을 제시합니다. 이제부터는 공간 자체 그리고 시간 자체란 그늘 속으로 사라져버릴 운명에 놓였으며, 오직 이 양자의 결합만이 독립적인 실재로 존속하게 될 것입니다.
p.222. 제 대답을 너무 심각하게 여기지 말고 그저 농담 한 마디 정도로 받아들인다면, 제 이론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우주의 모든 물질이 사라져도 시간과 공간은 그대로 남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상대설 이론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 역시 물질과 함께 사라질 것이라는 얘기지요.
p.231. 그는 용감하게 노력했지만, 양자 역학과 상대성 이론을 종합하는 통일장 이론을 구축하는 데는 실패했다. 사람들 대부분은 이러한 시도를 실패가 정해진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거시적인 규모에서 중력 작용과 우주론을 설명했지만, 원자나 원자 내부의 수준에는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다. 양자 역학은 우주의 물질과 복사 에너지가 그로부터 구성되는 가장 기본적인 입자들의 본성과 구조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이론이었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작업이 다른 많은 동료들의 작업과 점점 더 분리되는 상황에 틀림없이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또한 상대성 이론의 시대에는 그의 업적이 낯간지러운 찬사가 쏟아진 반면, 양자 역학의 시대에는 고통스러운 침묵만을 대면해야 했던 대조적인 경험을 받아 들이기도 조금은 힘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아인슈타인의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과거에도 그는 홀로였지만 결국 자신이 옳았다는 사실과, 모종의 장대한 설계도(비록 인간은 일시적으로, 아니 영원히 이 설계도에 접근할 수 없다고 증명된다 하더라도)가 존재해야 한다는 거의 종교에 가까운 믿음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p.234. 탁월한 젊은 과학자가 중년과 만년에도 계속해서 혁명적인 업적을 이루는 주된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체계가 느슨하고 발전 방향이 다양한 분야, 가령 사회과학처럼 아직 발전 도상에 있는 분야에서 활동하는 경우이다. 흥미로운 점은 활동력이 왕성한 물리학자들이 중년에 들어서도 젊은 지성을 계속 유지하거나 신선한 지적 자극을 받을 생각으로 생물학이나 심리학, 혹은 인지 과학 분야로 진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의 방식은 매우 중요한 발견을 이룬 다음에 남은 생애 동안 그 발견에 따른 지적 자본으로 연구 생활을 지속하는 경우이다. 바로 다윈이 이런 경우이다. 프로이트도(임상 심리학자로서는) 마흔 살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발견한 이론의 다양한 함의를 탐구하면서 말년을 보냈다. 물론 어떤 분야에서 활약하는 재능 있는 젊은 과학자들이 많을수록, 한 사람이 계속 그 분야를 주도하기는 힘들다. 이런 점에서 아인슈타인의 첫 번째 독자들의 질적 수준에 비해, 프로이트의 초창기 추종자들이 다소 한심한 인물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p.236. “나는 신이 어떻게 우주를 창조했는지 알고 싶다. 이런저런 현상이나 이런저런 요소에 대한 각양각색의 견해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신의 생각이다. 나머지는 지엽적인 것이다.” 철학적 색채가 가미된 아인슈타인의 발언은 어느 정도 완전히 독창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그는 분명한 확신을 갖고 일관성 있게, 그리고 인상적인 태도로 그런 주장을 했고, 덕분에 그의 주장은 우리 시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이 될 수 있었다.
p.240. 나는 사회 정의와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는 열정적일 만큼 관심이 많은데 비해, 이와는 이상하리 만치 대조적으로 주변 사람들과 직접 어울리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나는 협동 작업에는 익숙치 않고 혼자서 일하는 스타일이다. ……이러한 고립은 때로 쓰라린 기분을 느끼게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이해와 공감을 얻지 못한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 여기에는 나름대로 보상이 있었는데, 나는 관습이나 다른 사람의 의견과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와 같은 변덕스런 토대에 내 정신을 의존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p.242. 넓게 보아 학자들이란 세계(물리 세계, 사회 세계, 정신 세계)의 현상을 기술하고 설명하는 과업을 맡은 사람들이다. 인문학자들은 문학과 예술, 개인들의 생애, 역사적 사건과 같은 구체적인 현상에 주목하고 이 분야에 어울리는 이론 모델을 활용한다. 반면 과학자들은 실체의 종류와 사건의 유형을 설명할 수 있고 나아가 특정한 조건 하에 이러한 물체와 사건에 어떤 일이 생길지 예측할 수 있는 이론 모델을 세우려고 노력한다.
p.244. 프로이트는 언어 지능과 인성 지능이 우수했다. 이런 시절부터 인간의 본성에 남다른 관찰력을 보였고, 주로 언어에 기반해서 사고했으며, 공간적이거나 논리적 내용은 거의 없는, 주로 언어와 개념에 기반한 이론 체계를 구성했다. 그의 이론 체계는 대부분 일상 언어를 통해, 그리고 직관적으로 자명한 느낌을 주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했다. 실상 프로이트의 이론 체계를 일련의 논리적인 명제로 바꾸는 작업은 상당히 까다로웠다. 프로이트 학파의 연구는 새로운 사례를 서술하고, 새로운 용어를 고안하고, 언어에 기초한 모델을 쇄신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5파블로 피카소
p.250. 그런 후에 동시대의 지배적인 예술 동향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만의 예술적 취향을 추구하였다. 물론 피카소는 모차르트보다 훨씬 오래 살았으며 모차르트에겐 사후 100년 후에나 허용된 성공과 갈채를 살아있는 동안에 누릴 수 있었다. 물론 모차르트 음악에 별다른 애정이 없고 그의 괴팍한 성품에 다소 진저리를 치는 사람이라 해도, 그가 어릴 때부터 비범한 재능을 보인 천재 음악가였다는 사실은 인정할 것이다.
p.251. 게다가 비범한 솜씨라는 것도 여자 아이보다는 남자 아이에게 더 많이 나타나는 현성처럼 보인다. 물론 지금까지 교육적 관심을 주로 재능 있는 남자 아이들에게 쏟았다는 역사적 사실이, 체스의 명수나 수학의 대가가 대개 남자라는 현상에 어느 정도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p.256-258. 예술가의 유년기는 그들이 장래에 이루게 될 업적에 대한 단서를 담고 있다. 그가 아홉 살이던 1890년부터 가족은 피카소가 그림을 그려놓은 종이와 수많은 노트, 학교 교재, 이밖에 피카소가 붓이나 연필을 댄 흔적이 있는 것을 모두 모았다. 이 유품을 통해 우리는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그 모델의 모든 형태적 특성을 마스터하려는 피카소의 끈질긴 노력만을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집요한 실험 정신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피카소는 다양한 화면 구성을 시도하고 똑같은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그렸으며, 호소력 짙은 극적인 감정을 화폭에 담았다.
p.258. 하지만 훗날 피카소가 주도하는 대상의 형태와 크기를 조각내고 왜곡하는 입체주의 화풍의 전조로서 좀더 중요한 요소는 아마도 숫자와 알파벳 기호를 이용한 묘사, 풍부한 입체화법, 시각적 유희, 엉뚱한 캐리커쳐, 앞뒤가 맞지 않는 병치 등일 것이다. 피카소가 20년 후에 조르쥬 브라크와 함께 입체주의를 창안할 때 의식적으로 이 때의 형태 실험을 생각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적어도 무의식 수준에서는 유년 시절의 풍부한 실험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p.259.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같은 실험적 성향이 생긴 이유는 좀더 내생적인 요인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그러니까, 피카소의 실험적인 성향은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는 기질, 미술 소재로 작업하는 일에서 느끼는 순수한 즐거움, 점점 커지는 자기 능력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좀더 불행한 일이지만 미술 소재를 다루는 데 익숙하고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지만 표준적인 학과 공부를 하는 데는 어려움을 느끼는 능력 간의 불균형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학생이면 마땅히 잘 해내야 하는 일을 잘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자기가 강점을 보이는 분야를 맹렬하게 파고들어서 개인적인 좌절감을 극복하고 가족들에게 자기의 진면목을 보이고자 하는 법이다.
p.260. 성장기의 체험과 잊을 수 없는 기억들
피카소의 유년기에서 그의 궁극적인 예술적 성취에 기여한 또 다른 면을 찾을 수 있다. 여기서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피카소가 유년 시절에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일련의 사건들이다. 물론 모든 아동은 외상적인 체험을 하며, 그런 체험이 얼마나 그 아동에게 깊은 충격을 주고 거기서 받은 상처가 얼마나 오래 남는지에 대해 정확히 계산하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모든 기록을 통해 보건대, 피카소는 유아 시절부터 자신이 몸소 겪은 사건이나 사람의 외양을 생생하게 기억할 만큼 감수성이 아주 예민했다.
p.266. 이런 점을 자각하고 고향의 재능 있는 젊은 예술가 사이에서 리더의 자리에 올랐을 때,
p.267. 유진 카리에르의 상징주의 작품, 그리고 여러 잡지와 상업 광고물을 장식한활기찬 삽화 예술 등을 접했다. 어느 유파도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고, 물리학과 심리학 분야만큼 변화의 기운이 넘쳐났다.
p.269. 피카소가 처음 인정받은 시기를 ‘청색 시대’라 부른다. 이 시기에 그는 파리의 비참한 생활상을 주로 그렸다.(중략)
피카소는 상황이 조금 나아지자 처음으로 진지하게 연애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피카소의 ‘장미빛 시대’가 이어졌다. 이 시기의 작품은 색상이 다소 밝아졌고, 서커스단의 생활과 인물을 주로 그렸는데, 이들은 안정되고 평화로운 모습은 아니어도 참혹할 정도로 가난한 형편도 아니었다. 피카소의 주된 주제는 이제 절대 빈곤에서 보헤미안적 예술가의 삶으로 이동했다. 이 두 시기는 모두 피카소가 아직 진정으로 혁신적인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그 나름의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 낸 첫 번째 성숙기로 여길 수 있다.
p.270. 특히 피카소는 시인과 작가들과 사귀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들은 피카소 자신의 관심사와 재능을 보완할 수 있는 친구들이었다. 이들은 피카소가 성취해야 하는 것을 분명히 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에너지를 쏟을 방향에 관해 조언을 해주었으며, 다양한 사상을 가르쳐 주었고, 그의 작품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p.275. 여러 밑그림을 조사하고 X선 사진을 찍어 최종작을 연구한 결과 피카소는 「인생」을 준비하면서 꾀 많은 실험을 했음이 밝혀졌다. 여러 차례에 걸쳐 그는 작품 안에 자화상이나 서로 다른 표정의 젊은 여인을 배치했으며, 배경에는 조인과 나체 여이느 혹은 아버지의 초상을 그려넣곤 했다.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그 정신적 측면에서 카사헤마스의 장례식 장면과 그의 천국행을 그린,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풍의 1901년작「초혼」에서 많은 요소를 빌어온 것이다.
p.279. 아몰리네르는 두 부류의 예술가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자연에 의존하는 ‘모든 걸 한데 모으는’ 스타일의 명인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이 의존하는 성찰적이고 지적인 ‘조립가’형의 예술가이다. 모차르트가 전자 전형이라면, 베토벤은 후자의 전형이다. 신동 피카소는 첫 번째 유형을 대표하지만, 두 번째 유형의 예술가로 변신할 수 있었다고 아폴리네르는 주장한다. “그가 두 번째 유형의 예술가로변신하는 것은 참으로 환상적인 장관이라 할 만 했다.” 피카소 자신도 이런 이율배반을 느꼈는지, 거트루드 스타인에게 “내가 라파엘로만큼 잘 그릴 수 있다면, 적어도 내 길을 선택할 권리는 있을 거네. 사람들도 그런 권리를 인정해야 할 테고. 하지만 그들은 인정하지 않았다네” 라고 불편 섞인 말을 하기도 했다.
다시 말하지만, 한 예술가의 특징작을 선정할 때는 어느 정도 단순화가 필요하다 후보작으로는 우선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1906)이 눈에 띈다. 그림을 그린 과정이 유별났던 탓이다. 피카소는 모델이 된 친구에게 여든 번 이상이나 앉아 있기를 요구했는데, 정작 그림을 그릴 때는 여름 여행을 떠나서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의 형태를 지우고 스타인과는 떨어진 장소에서 사실적인 얼굴을 가면같은 얼굴로 바꿔서 그림을 완성했다. (초상화가 스타인을 닮지 않았다는 비난을 듣자 피카소는 세기의 농담이라고 할 만한 유명한 말로 대꾸했다고 한다. “별로 걱정할 필요 없어. 결국은 스타인이 저 그림을 닮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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