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지희
  • 조회 수 2426
  • 댓글 수 1
  • 추천 수 0
2008년 5월 19일 14시 07분 등록



역사속의 영웅들. 월 듀란트. 황금가지/ 2002년

1. 저자에 대한 기록

출생: 1885년 11월 5일, 미국 메사추세스 주 노스 아담스(North Adams)에서, 프랑스-캐나다계 퀘벡 이주민인 조셉 듀란트(Joseph Durant)와 메리 앨라드(Mary Allard)사이에서 태어났다.

유년기: 종교인으로서의 살기를 원한 부모의 의향에 따라 뉴저지주 카톨릭 교구 성베드로 부속학교에서 수녀들에게 배우는 동안은 자신이 사제가 될 것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청년기: 18세가 되던 해, 도서관에서 다윈, 헉슬리, 스펜서 등의 무신론자들과 만나며, 종교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기에 봉착한다. 짐작하건데 이과정이 후일 그의 여정에 커다란 도돌이표를 찍었다는 생각이 든다.
때문에 그가 사제가 되리라 굳게 바라던 부모와의 반목이 시작되었고, 1905년, 그는 종교 대신 사회주의에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1907년, 대학을 졸업한 후 듀란트는 뉴욕 이브닝 저널의 리포터로 일한다. 그러나 성범죄를 취재하는 일은 뼈속까지 도덕주의자였던 그와 번번히 상충된다.

그해 가을, 뉴저지, 사우스 오렌지(South Orange)의 세톤 홀 대학에서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와 기하학 등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09년, 듀란트는 같은 대학의 부속 신학교에서 그가 소속되어 있던 비밀 조직과 함께 토마스 아퀴나스와 칼 마르크스를 연구한다. 또한 그곳에서 사서로 일하며 읽게 된 여러책들과 더불어 스피노자의 대표작 ‘에티카(Ethics Geometrically Demonstrated _ 기하학적으로 증명된 윤리학)’는 그가 철학자로 들어서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듀란트는 이제껏 자신이 믿어왔던 신념을 부정하고, 진리의 길을 가던 중 교계로부터 파문당했던, 스피노자의 삶에서 자신의 미래상을 발견한다. 그
에게 스피노자는 폭풍같았으며, 마침내 1911년, 40달러를 손에 들고 신학교의 문을 나서게 된다.
맨하탄에서 같은 해, 페러 모던 스쿨(Ferrer Modern School)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자유주의 교육을 현장에서 실험하게 된다. 또한 이곳에서 그의 평생 배필인 에이리얼 듀란트(본명, Chaya Kaufman)와 사랑에 빠진다.

1913년, 결혼하기 위해 교사직을 사임한 그는 생계를 위해 강의를 시작하는 한편 대학원공부를 병행한다. 딸 에델이 태어나고, 부모들과도 화해하게 된다. 이시기의 그는 영국의 역사가, 버클(Henry Thomas Buckle)의 책 ‘Introduction to the history of civilization in England’ 을 접하게 되며 버클이 마무리하지 못한 것을 자신이 수행하기로 결심하는데 이른다.

생의 중기: 1917년, 저서 ‘Philosophy and the Social Problem’을 내고, 박사 학위를 받고, 콜럼비아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지만, 1차 세계대전으로 수업이 순조롭지 않자, 한 교회(Labor Temple)에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철학, 문학, 과학, 음악, 예술의 역사에 대한 강좌를 진행한다.
1921년, ‘Little Blue Books’ 시리즈의 발행인인 줄리어스(E. Haldeman-Julius)가 우연히 수업을 듣고, 그의 강의를 책으로 만들자고 제안한다. 듀란트는 이 제안을 거절하지만, 줄리어스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11권의 소책자가 모여 1926년 ‘철학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게 된다.

베스트셀러가 된 저서의 성공으로 경제적인 자유를 얻게 된 듀란트는 문명의 역사에 대한 저술을 시작한다. 또한 잡지 등에 기고를 하게 되고, 그것을 묶어 1929년 출판한다.
이듬해에는 자신의 초기 사회적·종교적·정치적 각성과정을 담은 자전적 성격의 유일한 소설 〈과도기 Transition〉를 출간했다. 1970년에 나온 〈삶의 해석 : 현대문학개관 Interpretations of Life : A Survey of Contemporary Literature〉은 평생 동안 현대문학을 읽으면서 써온 주해들을 확대한 것으로, 일반대중을 겨냥해 비공식적 이야기와 일화를 쓴 작품이다.
그후, 그는 아내 에이리얼과 함께 철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역사 이야기인 ‘문명 이야기’의 집필을 시작하고, 그 중 제10권, ‘Rousseau and Revolution(1967)’은 그에게 퓰리처 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주었으며, 1977년에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포드 대통령으로부터 ‘자유 훈장(Medal of Freedom)’을 수여 받는다.
생의 말기: 그는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청년기에 큰 영향을 미쳤던 사회주의적인 시선에서 미국 노동자들의 더 나은 작업 환경과 평등한 임금, 여성의 참정권 등을 위해 투쟁했다. 1945년 3월 22일의 ‘상호 의존 선언(The Declaration of Interdependence)’은 이러한 그의 노력의 일환이었다.
윌 듀런트는 생애의 마지막까지, 저서에 대한 구상을 하고, 쓰고 있었으며 이 책을 23개의 장으로 구성하려 했지만, 21번째를 완성했을 때 그의 아내 에이리얼이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1981년 말 듀런트 자신도 심장병으로 눕게 되었다. 월 듀런트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 13일 만인 1981년 11월 7일, 96세의 생을 뒤로 하고 아내의 뒤를 따른다.

2. 저자에 대한 생각
월 듀란트는 역사를 철학안에서 보기를 원했다고 알려져 있다.

내게 있어서 역사란 철학의 한 부분이다. 철학은 광범위한 전망을 얻으려는 시도이다. 삶과 현실의 광범위한 전망을-당신의 태도를 현실이나 삶의 특정한 부분을 향해 이끌어가는 광범위한 전망 말이다. 예를 들면 그것은 당신을 더욱 이해력 있고 용서를 잘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줄까? 당신은 적어도 두 가지 방식으로 광범위한 전망을 얻을 수 있다. 하나는 과학을 통해서이다. 그것은 외계현실의 모든 현실의 모든 양상을 물들이고 있는 다양한 과학을 공부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공간 속의 사물보다는 오히려 시간 속의 사건들을 공부하는 것이다. 나는 첫번째 방식(과학)은 포기하였다. 그것이 지나치게 외적이고 수학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의 내면에서 그리고 다른 사물들 안에서 내가 찾아낸 생명의 요소에는 비현실적으로 여겨졌다. 나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역사를 공부하려 한다고 말했다. 과학을 통해서는 그것을 찾아낼 수가 없다. 역사는 시간 속의 사건들을 탐구함으로써 철학적 전망을 얻으려는 시도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허락해 주신다면 결론적으로 나는 자신이 역사를 쓰는 철학자라고 생각한다. '
-본문 중에서-
역사를 조망하는 작업에서 철학적 관점으로 쓴다는 것은 작가의 깊이가 전제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 면으로 이책을 살펴 보았는데
‘그것은 공간 속의 사물보다는 오히려 시간 속의 사건들을 공부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작가의 성향을 알 수 있었다.

시간속의 사건속에서는 인간이 중요해지고 인간이 주가 된다. 곧 그가 살아간 과거의 삶이 곧 내가 살아가는 현재의 깊이에 반영될 수 있는 것이다.
공간은 어디서나 재현 될 수 있는 것이고, 때문에 시간을 넘나들며 역사는 현재에서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시기를 살다간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H. 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서에서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 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라고 말했다. 즉 과거의 사실'(fact of the past)과 '과거에 관한 사실'(fact about the past) 그리고 '역사의 사실'(historical fact)을 구분함으로써, 과거와 현재 사이의 역사학적 관점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그가 주장하는 바는, 역사가는 '과거의 사실'에 접근하기 위해, 사료에 기록된 사실인 '과거에 관한 사실'을 재료로 삼아 연구하여 역사가 자신에 의해 재현된 '역사의 사실'을 구성해낸다는 것이다. 여기서 '역사의 사실'은 역사가의 당대적 상상력의 개입에 의해 재현된 또 하나의 '과거에 관한 사실'인 셈이다. 그리하여 그에게서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대화'의 산물이 되는 것이다.

이책을 읽는 동안 월 듀란트도 이와 같은 관점으로 이 책을 썼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되었다. 그가 만약에 이책의 서문을 썼다면 늘 주장하던 철학안의 역사보다 우선해서 즉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소통이다" 라고 썼을 것이라고 예측해 본다.

2. 기억에 남는 구절.
월 듀런트의 마지막 유언.
p.8-9. 맨 정신으로 프로그램을 살펴보고 있다. 지적 가미가제 특공대 한 쌍을 위해 내가 지도를 그렸구나. 에이리얼이 도와준다고 해도 그토록 야심적인 일정표를 구성하고 낭송한다는 것이 내 육체적 능력의 한계를 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겠다.…… 나는 죽음의 신이 우리를 찾아냈다고 생각한다. 점점 흐려지는 기억력, 불안정한 걸음걸이 그리고 다리에 새로 생긴 경직 등의 형태로 그가 명함을 남기고 갔으니 말이지. 죽음에 대한 이런 예고가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필요 이상으로 오래 살았음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 같다. 어찌 되었든 나는 너나 파라마운트가 나의 영속성을 위해 에너지와 돈을 투자하게 하지는 말아야겠다.
그런데도 듀런트는 현대 독자에게 흥미와 이익이 된다고 생각되는 임시 명단을 역사에서 추려냈다. 그의 명단은 공자에서 이태백과 에이브러햄 링컨을 거쳐 윌트 휘트먼에 이르는 것이었다. 이 생각은 단순한 나열을 넘어선 중요성을 가진 것이었다.

p.10. 내게 있어서 역사란 철학의 한 부분이다. 철학은 광범위한 전망을 얻으려는 시도이다.

p.11. 듀런트의 사망과 더불어 그의 개인 기록들이 사라졌다. 일부는 친척들에게 그리고 다른 일부는 수집가들과 문서고로 넘어갔다. 그 문서들 중에 이 원고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세 번이나 이사를 하고 한 번의 홍수를 겪고도 살아남았고 나는 2001년 겨울, 우연히 이것을 발견하였다. 월 듀런트가 이것을 끝내고 21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이었다.

p.12. 니체와 똑같이 <모든 철학은 그 역사에 (그 힘을) 빼앗겼다>고 느꼈던 듀런트는 현재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과거를 공부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곳이 바로 인류의 본성이 진정 어떤 것인지 찾아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p.13. …… 수많은 성인, 정치가, 발명가, 과학자, 시인, 예술가, 음악가, 연인, 철학자들이 살아서 말하고 가르치고 조각하고 노래하는, 정신의 나라, 하늘의 도시 …….

문명이란 무엇인가
p.15. 인류의 역사는 생물학의 한 단편이다. 인간은 수없이 많은 종들 중의 하나이고, 다른 종들과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한 싸움과 살아남기에 가장 적합한 존재들의 경쟁에 종속된다. 심리학, 철학, 정치적 능력 그리고 이상향들은 이 생물학 법칙과 화해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류의 흔적은 대략 기원적 1백만 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중 농업의 흔적은 기원전 2만 5천 년 이전으로는 올라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인류는 땅을 경작하는 농부로 정착 생활을 한 것보다 40배나 긴 세월을 사냥꾼으로 살았다. 97만 5천년의 이 세월 동안 인류의 기본적인 성향이 만들어졌고 아직도 그대로 남아 매일 문명에 도전하고 있다.

p.17. 내 생각에 이것이 바로 문명의 시작이다. 즉 문명이란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자연과 문명 사이의 깊고도 끈질긴 갈등도 함께 시작되었다. 인류 역사의 길고도 긴 사냥 단계에서 아주 깊숙이 뿌리를 내린 개인적 본능과, 최근의 정착 생활을 통해 생겨났지만 아직도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사회적 본능 사이의 갈등이다. 모든 정착지는 단합된 활동을 통해 보호받아야 했다. 개인 사이의 협동은, 마을, 씨족, 신분 계층, 종교, 종족, 국가 같은 그룹들 사이의 경쟁 수단이 되었다.

p.19. 성적 충동은 - 굶주림보다 약간 덜 할 정도로 강력한 것 -공공연한 자극을 금하고, 또 일찍이 책임이 따르는 결혼을 시켜 이런 충동을 제 길로 유도함으로써 통제 가능한 질서로 만들었다.

공자와 추방당한 신선
p.26. 이 거친 자유는 (전설에 따르면) 몇 명의 <하늘의 황제(천황)>들에 의해 끝이 났다. 그들은 각기 1만 8천 년씩 통치하면서 반고의 몸에 붙어 있던 기생충을 정상적인 시민으로 변화시켰다. 복희씨는 기원전 2852년경 사람들에게 결혼, 음악, 글, 그림, 그물로 물고기 잡는 법, 짐승 및 남편 길들이는 법 그리고 비단을 짜기 위한 누에를 치는 법 등을 가르쳐주었다.

p.30. 네가 다투지 않으면 지상의 그 누구도 너와 다툴 수 없을 것이다. …… 손해를 친절로 갚아라. …… 나는 선한 사람을 선하게 대하며 선하지 않은 사람을 선하게 대한다. 이와 같이 하면 모두가 선해진다. 나는 진실한 사람에게 진실하며 진실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진실하다. 그러면 모두가 진실하게 된다. …… 세상에서 가장 약한 것이 …… 가장 강한 것을 이긴다.
이런 가르침은 현자에 대한 노자의 개념에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중국인의 사유는 성자가 아니라 현자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래서 선의가 아니라 지혜를 주로 이야기한다. 중국인들의 이상은 경건한 헌신이 아니라 성숙하고 고요한 마음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심지어 도와 지혜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지혜란, 말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모범과 경험으로만 전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아는 것이 많을 경우 그는 이것을 감추려 한다.
p.31. 네가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뼈까지 진흙이 되고 말았다. ……너의 자부심과 야망을 없애라, 애착과 극단적인 목적들을 다 없애라. 네 품성은 이것들로부터 얻을 것이 없다.
p.33.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만큼 덕을 사랑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노라>고 말하고 있다.(중략)
제국(온 세상)에 최고의 미덕을 펼치기 원했던 옛사람들은 먼저 자기 나라의 질서를 잘 잡았다. 나라의 질서를 잘 잡기 원하면서 그들은 먼저 자기 가족을 단속하였다. 가족을 단속하기 원하면서 그들은 먼저 자기 자신을 다스렸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기를 원하면서 그들은 먼저 자기 마음을 바르게 하였다. 마음을 바르게 하기를 원하면서 그들은 먼저 생각을 신중히 하였다. 생각을 신중이 하기를 원하면서 그들은 먼저 지식을 최대한 넓혔다. 지식을 넓힌다는 것은 사물을 탐구하는 것이다.
사물을 탐구하자 지식이 완전해졌다. 지식이 완전해지자 생각이 신중해졌다. 그들의 생각이 신중해지자 마음이 바르게 되었다. 마음이 바르게 되자 그들은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을 다스리게 되자 가족을 단속할 수 있었다. 가족을 단속하게 되자 나라가 바르게 통치되었다. 나라가 바르게 통치되자 온 세상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되었다.
p.34. 그는 열렬히 지식을 구하느라 먹는 일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지식을 얻은) 기쁨에 취하여 근심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는 것도 알아채지 못합니다.(중략)
모든 제자들이 다 떠났을 때 다른 누구보다 그를 사랑했던 자공(子貢)은 스승의 무덤 곁에 3년을 더 남아서 홀로 애도하였다.
p.37. 내가 어째서 푸른 산 사이에 사느냐?
나는 웃고 대답하지 않는다. 내 혼은 고요하다.
내 혼은 사람에게 속하지 않은 다른 하늘 다른 땅에 산다.
복숭아나무엔 꽃이 피고 강물은 흘러가고.
p.39. 그는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물에 비친 달의 영상을 끌어안으려다 그만 강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다.
붓다에서 인디라 간디까지
p.42. 유럽의 언어와 대단히 유사한 산스크리트 언어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문학을 발전시켰는데 그 중 일부는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네 권의 『베다』, 혹은 <지식의 책>들이다. 이 책은 대부분 기도문, 찬가, 종교적 의식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파니샤드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이루어진 종교 철학적 대화이다. 여러 세기에 걸쳐 이 가르침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러다가 기원전 300년경에 기록되었는데 인도 철학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형태의 것이다. 나는 이것을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당신이 나와 함께 그 중 일부를 맛보길 청한다.(중략)
하나 혹은 여러 명의 학생들이 구루, 곧 성생님 앞에 앉는다는 의미다.
p.44. 「친애하는 그대여, 네가 감각하지 못하는 이 가장 섬세한 정수 - 바로 이 가장 섬세한 정수에서 이 큰 나무가 자라 나온다. 내 말을 믿어라……. 이 가장 섬세한 정수야말로 온 세상의 혼이다. 그것이 실체다. 그것이 아트만이다. 타트 트밤 아시 - 그것이 바로 너다. 슈웨타케투야」
「선생님, 내가 더욱 많은 것을 이해하도록 하시는군요」
「그렇다면 그렇게 되어라」
우파니샤드는 아주 많은 것을 가르친다. 자신을 정화시키는 방식으로서의 요가와 이기적인 데 대한 형벌로서의 내생.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아시아의 <세계의 빛>인 붓다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자.
p.47-48. 이 계율은 성행위와 성적인 욕망을 모두 금한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붓다가 사랑한 제자 아난다와의 대화는 다음과 같다.
「여자들에게는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 선생님?」
「아난다야, 그들을 바라보지 말아라」
「만일 그들을 보아야 한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들과 이야기를 하지 말아라」
「하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라, 아난다야」
피라미드에서 이크나톤까지
p.61. 이집트 도덕규범은 근친혼을 막지 않았다. 오누이가 혼인한 기록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많은 파라오들은 왕실의 혈통을 순수하게 지키기 위해, 아니면 가족의 부를 나누지 않기 위해 이 같은 혼인을 했다. 당시 부는 여성의 혈통으로 상속되었기 때문이다. 파라오와 일부 귀족들은 후궁(하렘)을 둘 수 있었지만 보통 사람은 그런 사치를 누릴 수 없었다. 매춘부도 많았지만 많은 그림들은 부부간의 사랑을 예찬하고 있다.
p.63. 오시리스의 누이이며 아내인 이시스는 모성의 여신이었다. 오시리스 신에 의해 비옥해진 나일 삼각주 지역은 이시스의 여러 형상들 중의 하나이다. 식물과 동물도 신으로 숭배되었다. 야자나무는 그 모양 때문에 염소와 황소는 그 생산력 때문에 숭배를 받았고, 뱀은 지혜와 생명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뱀은 어쨌든 양쪽 끝을 붙일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맞출) 줄 알았다. 파라오들도 아몬 - 레 신의 아들로서 신으로 숭배를 받았다. 그는 임시로 지상을 집으로 삼은 신이었다. 아마도 이런 신의 혈통 덕분에 파라오는 그렇게 오랫동안 그토록 물리적 폭력을 덜 사용하고도 통치를 계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p.66. 그는 자신이 물려받은 이름은 아멘호테프를 버렸다. 이 이름은 태양신 아몬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 대신 그는 스스로를 이크나톤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아톤은 만족스럽다>는 의미였다.
구약 성서의 철학과 시
p.73. 이 책의 의도는 문명의 역사를 한정된 지면에 요약해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에 의해 남겨진 사상과 표현의 걸작을 탐구하고 그 예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기원전 약 1800년경에 팔레스티나에 나타나서 135년경 그들의 거룩한 땅에서 흩어질 때까지 유대인의 철학과 문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정도로만 유대인의 역사를 살펴볼 것이다.
p.74. 그들은 대규모 문명을 창출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그곳에 오래 살았다. 수메르 사람, 바빌론 사람, 아시라이 사람들이었다. 바빌론 사람들은 과학과 의학을 발전시켰고, 함무라비 왕은 기원전 1940 년경에 대단히 이성적인 법전을 만들었다.
p.77. 여기서 역사상 가장 일찍 등장하는 극히 다채로운 면모를 지닌 영웅 하나를 볼 수 있다. 승리의 전사이며 시편의 시인이고 하프 연주자이며 또한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자신의 아들 입살룸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밧세바를 그 남편 우리야에게서 빼앗고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었다. 그는 풍부하고 다채로운 요소들을 지닌 놀랍고도 확실한 남자이며, 내면에 많은 야만성의 면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또한 문명의 모든 약속을 보여주는 남자이다.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는 솔로몬이었다. <평화>를 뜻하는 <샬롬>이란 말에서 온 이름이다. 그는 37년 동안 평화와 부유함을 유지함으로써 높은 명성을 얻었다.
p.83. 칼라인을 욥기를 가리켜 <역사상 기록된 가장 위대한 문헌의 하나다. …… 성서나 혹은 성서 바깥에 이와 동일한 문학적 가치를 지닌 글이 쓰인 적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학자들은 이 기록이 기원전 500년에서 300년 사이에 나왔을 것으로 생각한다.
페리클레스에 이르는 길
p.95. 페에소스, 그곳의 아르테미스 - 디아나 신전은 고대 세계의 일곱 기적의 하나였다. 이 에페소스에서 플라톤보다 300년 전에 헤라클레이토스는 신비로운 경구를 사용해서 변화의 철학을 설명하였다. 이것은 헤겔, 다윈, 스펜서, 니체 등에게 영감을 준 사상이었다.
p.102. 미국인들은 그리스 신들의 낭만적인 상상력의 산물이나 시 문학의 은유로 생각하도록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제우스는 지치지 않는 바람둥이고, 아프로디테는 미의 이상으로만 여긴다. 우리는 고전 문학의 수많은 구절들을 잊고 있다.
p.106. 솔로몬은 도덕 관습이라는 아슬아슬한 영역을 위해서도 법을 내놓았다. 지속적인 게으름은 범죄에 해당하고, 방탕한 삶을 사는 사람은 시민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매춘을 합법화하고 세금을 부여하였다.
아테네의 황금시대
p.109. 1820년경 셸리는 이렇게 썼다. <페리클레스의 탄생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죽음 사이에 들어있는 시대는 …… 세계 역사상 가장 기억할 만한 시대이다.>
p.114. 보통의 아테네 남성은 부드러운 성격이 모자랐다. 생애의 처음 6년을 빼고 남자들은 언제나 다른 남자들과 함께 살았다. 성인이 된 다음의 인품은 시장과 상업상의 경쟁, 정치와 철학, 전쟁 등 현실적인 정신의 날카로운 상호 작용에 의해 결정되었다. 종교에 바탕을 둔 도덕성은 빠져 있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정직함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했겠지만 행동은 언제나 달랐다.
소피스트인 트라시마코스는 권력이 곧 정의라고 말하였다. 그리스의 가장 중요한 역사가의 한 사람인 투키디데스는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그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다.
p.117-118. 그리스 전체 세계로부터 아테네는 고대 유럽의 다른 어떤 도시보다 더 많은 예술가들과 시인들, 철학자들을 끌어들였다. 이 사람들은 불타는 경쟁심으로 다투면서 그리고 계몽된 지도자들의 협조를 받으면서 페리클레스의 비전을 영웅적인 척도와 현실로 만들었다.
키츠가 그림이 그려진 그리스 항아리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보았던가를 상기시키는 것 말고는 그리스 도자기에 대해 다른 말은 하지 않겠다. 그것은 <아직 황홀경을 겪지 못한 고요함의 신부>이다. <침묵 속에서 느린 시간>동안 그것을 본다면 아주 많은 것이 그 안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 어떻게 저 폴리그노토스나 제우시스 같은 페리클레스 시대 화가의 정신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남긴 작품에서 근심 없는 시간이, 지워버리지 않은 선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면 말이다. 다만 제우시스의 이야기 한 토막을 전할 수 있을 뿐이다. 다른 화가가 자신의 빠른 작업 속도를 자랑했을 때 그는 <나는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하고 조용히 말했다고 한다.
조각은 그림보다는 더 오래 견딘다. 이 시대의 걸작 두 개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한다. 「아프로디테의 탄생」은 1887년에 로마에 빌라루도비시의 폐허에서 발견되었다. <거품에서 태어난>이라는 의미를 가진 미의 여신이 승리에 가득 차서 엄청난 파도에서 빠져나와 물방울을 떨어뜨리며 일어선다. 아니면 「원반 던지는 사람(디스코불로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가. 그것은 기원전 470년경에 뮈론이 청동으로 주조한 것이다. 이 운동선수는 긴장된 근육의 격앙 상태를 보여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능력을 확신하고 있는 조용한 남자. 세련과 섬세함을 지닌 남자로 그대로 주저앉는다면 책이라도 쓸 것 같은 모습니다.
p.123. 기원전 460년 페리클레스가 서른다섯 살이 되었을 때 아이스킬로스는 첫 번째 위대한 비극 「포박된 프로메테우스」를 만들었다. 그는 인간에게 불과 문명의 기술을 가르침으로써 신에게 도전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제우스의 명령에 따라 프로메테우스는 사슬에 묶여 카카서스의 바위에 결박된다. 거대한 독수리가 그의 심장을 쪼아 먹으면 심장은 다시 회복되고 그러면 독수리가 다시 쪼아 먹는 벌을 받았다. 세 편으로 이루어져 있고 비극이 사라진 결말부에서 아이스킬로스는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와 화해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잔인한 신에 대한 인간의 반항이라는 주제는 2200년을 살아남았다가 셸리의 「사슬에서 풀린 프로메테우스」에서 사나운 발언을 한다.
p.129. 괴테는 이렇게 물었다. <세상의 모든 민족이 그의 신발을 들 만한 가치가 있는 극작가 하나를 만들어냈는가?>오직 셰익스피어 한 사람뿐이었다.
p.132. 아낙사고라스는 추방되었고 소크라테스는 사형 당하였지만 철학에 주어진 자극은 다음 60년 동안 아테네를 자극해서 뒷날 여러 세기 동안 유럽에서 번성할 사상 체계를 만들어냈다. 떠돌아다니는 궤변가들 대신 더 나은 교육을 베푸는 대학(아카데미)이 나타났다. 아테네는 <헬라스의 학교>가 되었다. 예술의 전통은 전쟁의 유혈과 혼란을 통해서도 망가지지 않았다. 머지않아 아펠레스와 프락시텔레스가 나타난다. 그리고 여러 세기에 걸쳐 훨씬 더 많은 그리스의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이 지중해 세계를 위해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고 건물을 지었다.
아테네는 패배의 절망을 딛고 굳건한 힘으로 새로운 부와 문화와 힘을 만들어냈다. 도시국가 아테네의 삶의 가을은 아름다웠다.
플라톤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까지
p.135. 사치가 커지고 지식이 해방되면서 도덕적 해이도 나타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신을 믿고 위안을 주는 헛소리에 매달렸다. 올림포스의 신들은 죽고 새로운 신들이 탄생하였다. 이집트와 아시아에서 외국의 신들이 수입되었다. 절반쯤 고립된 아테네의 신흥 부르주아지 계급은 전통적인 신앙을 거의 존중하지 않았다. 플라톤은 이렇게 적었다. <이제 인류의 일부는 신의 존재를 전혀 믿지 않는다. ……
p.136. <첩이 아내보다 더 나은 것 아닌가? 한 쪽은 법을 자기편으로 삼고 있다. 법은 그녀가 아무리 마음에 안들어도 너는 그녀 편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강요한다. 다른 편은 남자를 잘 대우해서 그의 마음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니면 그는 다른 사람을 찾아낼 것이니까.>피임이나 낙태 혹은 영아 살해를 동원한 가족계획이 유행이었다.
p.143. 360년경 코스는 그에게 <아프로데티> 상을 조각해 달라고 주문하였다. 프뤼네를 모델로 작품을 만들었지만 프락시텔레스는 옷을 입은 <아프로디테>를 만들어 그들을 달래주었다. 그러나 크나도스 시는 벌거벗은 조각상을 사들였다. 비티니아의 왕 니코메데스는 도시의 빚을 갚아주는 대가로 그 조각상을 돌려받으려 했지만 크니도스는 불멸의 작품을 선택하였다. 관광객들이 지중해 세계의 도처에서 이 작품을 구경하려고 찾아왔다. 비평가들은 그것이 그리스에서 만들어진 가장 섬세한 조각상이라고 말하였다.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남나즐은 작품을 보고 사랑의 불꽃을 느꼈다고 한다.
p.145-146. 소크라테스: 이런 나라에서 무정부 상태가 커져서 개인의 집에까지 퍼지게 된다. …… 아버지는 아들 수준으로 떨어지고 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수준에 서서 부모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 선생은 학생을 겁내서 그들에게 알랑거리고 학생들은 선생을 멸시한다.
아데이만토스: 그렇다면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
소크라테스: 어떤 일이 과도하게 커지면 흔히 반대 반향으로 반작용이 일어난다. …… 국가나 개인에게서 자유의 과도함은 오직 노예 상태로 넘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 가장 과격한 자유 형식에서 가장 나쁜 폭정 형태가 생겨난다.
로마 공화국
p.160. 문지방 위쪽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유능한 야누스 신이 있었다. 두 얼굴을 가진 이 신은 기만하는 존재가 아니라 문을 드나드는 것을 감시하는 신이었다. 어린아이는, 어머니가 자신을 낳았지만 어머니 속에는 새 생명을 잉태할 능력을 가진 유노 여신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중략- 그러므로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은 영적인 다수와 시간을 초월한 단합 속에서 가족의 일부를 구성하는 존재들이었다. 로마에서는 가족이 국가를 다스렸다.
p.164. 기원전 494년에 대단히 많은 수의 평민들이 로마에서 약 5킬로미터 떨어진, 아니오 강변에 있는 <성스러운 산>으로 나가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기 전에는 로마를 위해 싸우지도 일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런 내부의 반란과 때를 맞추어 외부의 공격이 있을까 두려워진 원로원은 빚을 탕감하거나 삭감해 주기로 동의하였다. 그리고 평민을 보호해 주는 두 명의 호민관을 두기로 하였다. 이것은 계급 전쟁의 시작이었고 결과는 오직 공화국으로만 끝나게 되어 있었다.
p.172. 오래된 문명과 새로운 문명 사이에 사람, 물자, 사상들이 옮겨 다닐 길들이 열렸다. 수많은 그리스 사람들이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그들은 자신들이 물려받은 유산의 단편들을 함께 가지고 왔다. 로마가 그리스를 군사적으로 정복한 데 이어 천천히 그리스가 문화로 로마를 정복하였다.
p.173-174. 그는 풍요의 여신이며 전쟁의 신을 정복한 베누스 여신을 열렬히 불러내면서 작품을 시작하고 있다.
에네아스 종족의 어머니, 남자와 신들의 즐거움, 오 자양분을 주시는 베누스여……. 모든 생명은 당신을 통해 잉태되고 태어나 태양을 바라봅니다. 당신 앞에서 그리고 당신이 잉태되고 태어나 태양을 바라봅니다. 당신 앞에서 그리고 당신이 다가오시면 바람은 도망치고 하늘의 구름은 떠납니다. 기적을 행하는 대지는 당신을 향해 달콤한 꽃을 피워 올립니다. 바다의 파도는 당신을 위해 웃고, 평화로운 하늘은 넘치는 빛으로 세상을 비춥니다. 봄날이 얼굴을 내밀면 수태시키는 남풍이 모든 것을 싱싱한 녹색으로 만들고 그러면 공중의 새들은 맨 먼저 당신과 당신이 오시는 것을 노래합니다. 오 신이여, 당신의 힘에 마음이 붙잡혀 들짐승도 즐거운 목초지에서 뛰어오르고 달콤한 강물을 건너 뜁니다. 당신의 매력에 사로잡혀 당신이 어디로 가시든 누구나 당신의 뒤를 따릅니다. 바다와 산, 흐르는 강물과 잎사귀, 많은 새들의 거처와 초록의 들판을 통하여 당신은 부드러운 사랑을 생명 있는 모든 것의 가슴에 불어넣고 그들이 자신들의 후손을 퍼뜨리도록 하십니다. 당신만이 사물의 본성을 지배하는 것이니, 당신이 없으면 그 무엇도 빛의 해변에 피어나지 않을 것이며 즐겁거나 사랑스러운 것이 태어나지 않을 것이니……. 오 여신이여, 나의 말에 죽지 않는 아름다움을 주소서. 야만적인 전쟁이 잠들고 조용해지도록 만드소서……. 마르스(전쟁의 신)가 당신의 신성한 형식에 몸을 기대거든 위에서부터 그를 포박하여 당신의 입술로 달콤한 감언이설을 퍼부어 당신을 섬기는 로마인들을 위해 평화의 선물을 간청해 주소서.
로마의 혁명
p.181-182. 티베리우스(기원전 162년-133년)는 거의 운명적으로 위대함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그는 두 번이나 집정관을 지낸 남자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딸인 코르넬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자마에서 한니발을 물리친 로마의 장군이었다. 코르넬리아의 남편은 열두 명의 아이를 남기고 죽었다. 그 중 아홉 명이 어린 나이에 죽고 딸 하나와 아들 둘만 살아남았다. 두 아들 티베리우스와 카이우스는 그녀의 위안이자 자랑이었다. 방문객이 그녀에게 보석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으면 그녀는 아들들을 보여주었다. <이 애들이 내 보석이에요.>
p.193. 그가 혁명의 이질적인 요소들을 통합하기 위해 제안한 계획은 아주 단수한 것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기록>이었다. 즉 모든 빚을 깨끗이 탕감한다는 내용이었다. 키케로는 - 당시 뛰어난 웅변가이며 철학 에세이 저술가 -그의 분노한 <연설>에서 카틸리나를 공격하였다. 우리 중 일부는 대학에서 이 연설문을 라틴어 산문의 모델로 공부하기도 하였다.
로마 제국
p.210-211. 또 다른 법은 결혼을 의무로 만들었다. 독신 생활에 벌금을 물리고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일에는 사회적, 경제적 보상을 해주었다. 타키투스 이후의 역사가들은 이 법이 실패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남자와 여자들은 이와 같은 법을 피하는 길을 찾아냈다. 성적인 부도덕은 계속되었으며 오히려 더욱 공개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다. 오비디우스의 『사랑(Amores)』에서 그것은 전문가가 제자에게 전수하는 섬세한 예술이 되었다. 로마 토박이들은 그 수와 활력이 줄기 시작하였다. 그에 반해 가족과 종교에 더 충실했던 이민자들은 수와 권력이 점차 늘어났다.
p.214-215. 스물 네 개의 방과 세 개의 수영장이 있는 편안한 집에서 호라티우스는 <사업상 관심과는 거리가 먼 채로 …… 자신의 황소를 몰아 물려받은 농지를 가꾸는> 농부를 이상화하였다. 그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진짜 혹은 상상의 애인들에게 바치는, 또는 그들에 관한 송가를 썼다. 여기에 나오는 작가들을 위해 좋은 글을 위한 규칙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뒷날 『시학』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명료함, 직접성 그리고 유용함과 즐거움을 뒤섞었을 것 등이 강조되어 있다. 예술은 예술가와 그 수용자의 감정을 전제로 한다. <나를 울게 하려면 당신 자신이 먼저 슬픔을 느껴야 한다.>그러나 예술은 감정만은 아니다. 그것은 훈련된 형식으로 나타나는 감정이다. <평온함 속에서 기억된 감정>인 것이다. 여기서 고전 양식이 낭만주의 양식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형식을 얻기 위해 밤낮 그리스 문학을 연구하라. 새롭거나 너무 낡아서 쓰이지 않게 되었거나 아니면 1피트 반(약 46센치미터)이나 되는 것 같은 긴 단어(sesquipedalian)는 피하라. 당신의 작품이 이 모든 것을 견디고 살아남거든 그것을 8년 동안 감추어두어라. 그러고 난 다음에도 그것이 당신을 즐겁게 하거든 그제서야 출판하라. 그러나 이것이 성숙해진 당신을 부끄럽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하라. 희곡을 쓸 경우에는 세 개의 통일성을 지켜라. 줄거리, 시간, 장소의 통일성이다. 삶과 철학을 연구하라. 연구와 이해가 없는 완전한 양식이란 너무 약해서 사용할 수 없는 공허한 빈 그릇과 같다.
호라티우스는 자신의 작품과 그것이 살아남으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청동보다 더 오래 견디고 피라미드 꼭대기보다 더 높은 기념비를 세웠다.…… 나는 완전히 죽지 않으리라.> 그는 기원전 8년에 재산은 아우구스투스에게, 몸은 대지에 남기고 메케나스의 무덤 곁에 안식처를 찾았다.
네로와 아우렐리우스
p.226. 새로 온 사람들 속에는 수많은 장점들이 있었다. 유대인의 가족생활은 그들에게 힘을 주는 하나의 기둥이고, 소수의 기독교 집단은 그 경건함과 단정함으로 로마인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새로 온 사람들은 원래의 환경과 계율에서 멀어지면서 도덕적으로 타락하였고, 그들이 원래 지닌 관습은 이방의 관습과 뒤섞였다. 관습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 다양한 혈통, 신앙, 목적, 방식 등의 대소용돌이 속에 종족의 단일성과 활력이 뒤섞인 것 등이, 밖에서 들여온 로마의 부와 힘을 합쳐 로마의 도덕 생활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오비디웃, 호라티우스, 마르티알리스 등의 무모한 쾌락주의, 네로의 오락과 범죄 그리고 로마 황후들의 부정 행위 등으로 나타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놀라운 일은 2세기에 아우구스투스 이후 로마 역사에서 가장 스토아적이고 헌신적인 통치자들이 갑자기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p.235. 그는 무덤 저편에 행복의 희망이 없이 그리고 자신을 계승할 아들에 대한 확신도 없이 죽음을 바라보았다. 6년 동안이나 북부에서 전투를 계속하여 승리하고 176년에 로마로 돌아왔을 때는 제국의 구원자로 환영받았다. 그는 자신의 승리가 오로지 일시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2년 뒤 그는 다시 게르만 침입의 물결에 통제하려고 길을 나섰다. 그는 이 전투 도중에 죽었다(180년).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입양의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였다.
코모두스는 로마 제국의 오랜 추락을 시작한 인물이다. 그 사이에 두려운 기독교도들은 대중 속에 몸을 숨긴 채 그리스도가 승리할 날을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었다.
인간 그리스도
p.242-243. 나는 그가 행했다고 하는 대부분의 기적들이 암시에 의한 자연적인 결과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수성이 예민한 영혼에 미친 강하고 확고한 정신의 영향이라고 말이다. 비슷한 현상은 루르드(프랑스의 성지)에서도 관찰된다. 그에 대한 믿음이 그들에게 강장제가 된 것이다. 신앙을 가지고 그를 건드리면 약한 사람들은 힘을 얻고 병든 사람들은 나았다. 우리는 강하고 신념을 가진 여자나 남자의 생각과 의지 속에 들어 있는 힘에 대해 어떤 한계도 둘 수 없다.
기독교의 성장
p.262. 1198년 교황이 된 인노켄티우스 3세는 이런 발전을 보고 교회와 국가에 대한 위협이라고 느꼈다.
p.262-263. 성 베드로님의 작은 배는 수많은 폭풍우에 밀려 바다 가운데 이리저리 표류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전보다도 더 많이…… 단순한 사람들의 영혼을 잘못 인도하는 악마적인 거짓 신앙의 하수인들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활개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신과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그들은 성서의 의미를 그르치면서 가톨릭교회의 단일성을 파괴하려 하고 있다. ……그대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하여 이들 이단자들을 파괴하고 그들에 의해 오염된 모든 자들을 교구에서 쫓아내라고 엄명을 내린다. …… 필요하다면 군주들과 백성들이 칼을 들고 그들을 억압하도록 하라.
p.272-273. 신체적, 영적으로 피로에 지친 아벨라르는 클뤼니 수도원의 어둠 속에 숨어버렸다. 그는 경건함과 침묵과 기도로 동료 수도사들에게 교훈을 주었다. 엘로이즈에게는 편지를 써 보냈다. 그들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신앙이 교회의 가르침 안에 있다고 확인하였다. 그는 그녀를 위해 중세 문학에서 가장 아름다운 송가를 만들었다.
그는 머지않아 병이 들었고 친절한 수도원장은 그를 샬룽 근처에 있는 작은 수도원 성 마르셀로 보냈다. 그는 그곳에서 1142년 4월 21일 예순셋의 나이로 죽었다. 그는 이고 예배당에 매장되었다. 그러나 이제 위로해 주시는 성령 수도원의 원장이 된 엘로이즈는 아벨라르가 이 수도원에 묻히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피에르 수도원장에게 알렸다. 선량한 수도원장은 손수 아벨라르의 시신을 그곳으로 운반해 왔다. 그리고 아벨라르가 자기 시대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해 그녀를 위로하려고 애썼다. 그는 기독교도의 온화함이 가득 담긴 편지를 그녀에게 남겼다.
하느님 안에서 친애하고 존경하는 자매님, 당신과 맺어졌던 사람, 이제 더 낫고도 강하신 하느님 사랑에 의해 육신의 결합이 끝난 사람…… 주님이 그를 지켜주십니다. 당신 대신, 아니면 당신과는 달리 주님의 따뜻한 품 안에 말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 주님의 영광으로 그를 당신에게 돌려주실 것입니다.
그녀는 1164년 그와 같은 나이가 되어 그와 비슷한 명성을 얻은 다음 애인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는 위로해 주시는 성령의 뜰 안의 그의 곁에 묻혔다. 이 작은 교회는 프랑스 혁명 때 파괴되었고 묘지는 훼손되고 아마도 이리저리 흩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유해라고 여겨지는 것은 1817년 파리의 페르라셰즈 공동묘지 구역으로 이장되었다. 오늘날에도 이곳에서는 여름이면 남자와 여자들이 꽃을 가지고 와서 묘지를 장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르네상스 I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중심으로
p.295. 메디치와 다른 피렌체 집안들이 너그러운 후원을 해준다는 명성에 이끌려 학자들은 피렌체로 몰려들었고, 이 도시를 문학 수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이런 경쟁의 지적인 유산을 발전시키고 물려주기 위해 로렌초는 오래된 피사 대학과 피렌체에 있는 플라톤 아카데미를 복구하고 더 크게 만들었다. 플라톤 아카데미는 공식적인 대학이 아니라 플라톤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이들은 일정하지 않은 간격을 두고 로렌초의 시내 궁전이나 카레지에 있는 피치노의 별장에 모여 함께 식사를 하고 플라톤의 대화편 하나를 몽땅 혹은 일부를 낭송하고 그 철학을 토론하였다. 플라톤의 생일이자 기일로 여겨지는 11월 7일이면 아카데미는 거의 종교적인 엄숙함으로 그날을 기념하였다. 플라톤의 흉상이라고 여겨진 흉상에는 꽃으로 만든 관을 씌우고 신상 앞에 하듯이 그 흉상 앞에 불을 밝혔다.
p.305. 그런데도 정부는 그에게 - 그리고 보티첼리에게 -또 다른 주문을 하였다. 로렌초는 데 메디치와 줄리아노 데 메디치에 맞선 파치 가문의 음모로 인해 교수형을 당한 두 남자의 초상화를 실물 크기로 그려달라는 주문이었다. 인체의 기형과 고통에 대해 거의 기묘한 관심을 가졌던 레오나르도는 아마도 이 끔찍한 작업에 어느 정도 열광을 느꼈던 것 같다.
p.307. 이것은 몇 가지 예외를 빼고는 마지막까지 레오나르도의 성격과 운명으로 남을 특징이었다.
어쩌면 그는 구성, 색채, 혹은 도안의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으로 모든 예술 작품을 시작했다가 해결책이 발견되는 순간 작품에 대한 흥미를 잃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말에 따르면 미술은 구상과 도안의 문제이지 실질적인 실천의 문제가 아니었다. 실행은 그보다 못한 정신의 작업이었다. 아니면 그는 자신의 끈질긴, 마지막에는 끈질기지 못한 손길이 실현할 수 없을 정도의 섬세함, 중요성, 완성도 등을 생각했다가 절망에 빠져서 노력을 포기하였다. 그는 너무 빨리 한 가지 일이나 주제에서 다른 것으로 넘어갔다. 그는 너무 많은 일들에 관심이 있었다. 그에게는 하나의 통합하는 목표, 주도하는 이념이 없었다. 이 <보편인(universal man)>은 빛나는 부분들을 이어 붙여놓은 사람이었다. 그는 너무 많은 능력들을 지녔기에 그들을 단 하나의 목표에 집중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5천 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썼지만 단 한 권도 완성하지 못하였다. 양으로만 따지만 그는 화가라기 보다는 저술가였다. 그는 훌륭한 저술가가 될 소망을 품었다. 그리고 되풀이되는 물에 대한 서술처럼 몇 번 시도를 하기도 하였다. 그는 폭풍과 전쟁의 이야기들을 썼다.
르네상스 II
로마
p.330. 라파엘로는 4년 반 동안 거의 종교적인 주의력과 헌신으로 이 프로젝트에 매달렸다. 벽 한 군데에 그는 기독교 삼위일체의 인물들을 그렸다. 그들 옆에 성모가 있다. 이들을 둘러싼 구름 속에는 아담, 아브라함, 모세, 다윗, 베드로, 바울로 등과 그밖에도 성서의 다른 인물들이 있으며 그들은 두 종교의 연속성을 드러내면서 결합되어 있다. 천사 케루빔과 세라핌은 노래의 날개를 단 듯이 공간을 통해 날고 있다. 이들 아래 쪽에서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성만찬의 교리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인간들은 각기 전기를 쓰듯이 세심하게 개인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거대한 그림 「성체 논쟁」은 스물여덟 살 젊은이의 작품이다.
p.331-332. 신학의 이상을 그린 「성체 논쟁」맞은편 벽에 철학의 영광이 나타나 있다. 제우스와 같은 이마와 깊은 눈, 하얀 머리카락과 수염을 날리면서 플라톤은 한 손가락을 들어 위쪽 완벽한 상태를 가리키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옆에서 평온하게 걷고 있다. 30년 아래의 잘생긴 명랑한 남자가 손바닥을 아래로 하고 선을 뻗고 있다. 마치 스승의 과격한 이상주의를 지상의 것이나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끌어내리려는 것 같다. 소크라테스는 손가락을 꼽으면서 자신의 논의를 펼치고 무장한 알키비아데스가 사랑스런 모습으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피타고라스는 공간의 음악을 조화로운 표 안에 잡아넣느라 애쓴다. 아름다운 여인은 아마도 아스파시아일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에페소스 수수께끼를 쓰는 중이다. 디오게네스는 태평스럽게 대리석 계단 위에서 옷을 벗은 모습이다. 아르키메데스는 열중한 젊은이 네 명을 위해 석판 위에 기하학 도표를 그린다. 프롤레마이오스와 조로아스터는 공을 들고 토론하고 있다. 왼쪽에서 한 소년이 책을 들고 열심히 달린다. 분명 사인을 받기 위해서이다. 열의에 넘치는 젊은이 한 사람은 구석에 앉아 열심히 필기하고 있다. 왼편에는 율리우스 교황의 귀염둥이인 어린 만토바의 페데리고가 보인다. 다시 브라만테. 그리고 조심스럽게 모습을 감추어 잘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라파엘로 자신이 등장한다. 코밑 소염이 나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더 있지만 그들의 신분확인은 학자들의 토론으로 남겨두기로 하자. 어찌 되었든 이와 같은 지혜의 전당은 일찍이 그려진 적이 없었다. 아니 생각조차 된 적이 없었을 것이다. 이단이라는 말은 단 한 마디도 없었고 어떤 철학자도 화형당하지 않았다. 한두 가지 잘못을 두고 법석을 떨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교황의 비호를 받는 가운데 젊은 기독교도는 갑자기 모든 이교도들을 한 곳에 모았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의 이해력과 공감을 가지고 그들을 원래의 특성대로 그려놓았다. 신학자들이 그들을 바라보면서 서로 오류의 가능성을 나눌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교황은 두 기록 사이에서 인류의 사색의 협조적인 과정과 창조를 명상할 수가 있었다.
이들 「성체 논쟁」과「아테네 학당」은 르네상스의 이상이었다. 이교적 고대와 기독교 신앙은 하나의 방에서 조화롭게 함께 살았다. 구상, 구도, 조화 등의 측면에서 이들 경쟁하는 두 벽화를 능가하는 화가는 오로지 미켈란젤로, 틴토레토, 베로네제 뿐이었다. 그들 누구도 페리클레스의 그리스와 레오 10세의 로마 사이에 이루어진 결혼을 이토록 훌륭하게 표현하지 못하였다. 라파엘로가 율리우스 2세(1505년-1512년)를 위해 일을 하던 때 (1508-1512년)와 거의 같은 시기에 르네상스 절정의 인물이 동일한 교황의 보호 아래서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p.342. 외과의 수술 목록과 기구들이 고대 이집트의 다양성과 능력에 접근하면서 외과 분야는 빠르게 명성이 올라갔다. 1500년에는 많은 유럽의 외과 의사들이 철학을 의학에 덧붙여야 한다는 히포크라테스의 이상을 실현하였다. 그들은 공부나 가르치는 일에서 아주 손쉽게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곤 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귀족이기도 했으며, 시대의 만병통치약 이었다.
p.343. 라파엘로가 「아테네 학당」에 그려놓은 밝은 등불에 견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니면 아벨라르에서 아퀴나스에 이르는 스콜라 철학 전성기의 인물들에 비할 만한 사람도 없다. 그렇다 해도 너무나도 잊혀진 인물 - 피에트로 폼포나치 -하도 작아서 친구들은 그를 페레토, <작은 피에트로>라고 불렀다.- 이 하나 있었다.
p.343. 주요 저작은 「영혼의 불멸성에 대하여」(1516년)에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개인의 영혼은 벗어날 길 없이 몸에 둘러싸여 있고 그래서 몸과 더불어 죽는다고 가르쳤다고 해석하였다. 다만 보편의 영혼 혹은 정신만이 파괴되지 않는 것이라 했다. 폼포나치는 자신은 철학자로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기독교도로서는 교회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결론지었다. 이것은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발뺌이었다. 지식인들은 그것을 보고 미소지었다. 레오 10세가 손수 주도한 제 5회 교황궁 공회의 (1513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가 비난을 받았으므로 폼포나치의 친구들은 그가 종교 재판에 의해 체포되리라고 여겼다.
p.346. 1512년 율리우스 2세는 피렌체 공화국을 정복하고 메디치 가문을 권력에 복구시켰다. 마키아벨리는 외교관 직위를 잃고, 정부를 복원시키려는 음모에 가담하였다고 고발당해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방면되었다. 그는 은퇴해서 아내와 네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산 카시아노에 있는 별장으로 물러났다. 그곳에서 상애의 마지막까지 「리비우스 처음 10권에 대한 논의」와 또한 자신의 결론을 요약한 『군주론』을 썼다. 이것은 사본 형태로 돌아다니다가 그가 죽은지 5년 만에 출간되었다. 그 이후로는 철학사상 가장 자주 인쇄된 책의 하나가 되었다.
르네상스 III
베네치아의 일몰
p.361. 바이런은 이곳에서 술판을 벌였고 바그너는 여기서 죽었다. 이곳에서는 총독 궁전이나, 열 개가 넘는 수수한 혹은 당당한 성당들, 혹은 수도사들의 학교 같은 곳에서 젠틸레 벨리니, 조반니 벨리니, 카르파초, 조르조네, 티치아노, 틴토레토, 베로네세 같은 화가들이 어지어울 정도로 찬란한 모습으로 연달아 나타난다. 로마도 이렇게 화가들로 이루어진 왕조와는 겨루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베네치아는 적들조차 그 통치 방식에 경탄을 하고 심부름꾼을 보내 통치 구조와 기능을 탐구하게 하였다.
p.365. 1480년 젠틸레는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모하메드는 1년 뒤에 죽었다. 그의 뒤를 이은 술탄은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것을 금지한 회교율법에 따라 젠틸레가 터키에서 그린 모든 그림들을 두 점만 빼고는 모조리 흩어지게 해서 잊혀지게 만들었다. 젠틸레는 죽을 때까지(1507) 위대한 그림들을 제작하였다.
p.371. 틴토레토와 베로네제 그리고 총독 궁전의 훌륭한 방들을 아름답게 단장한 다른 화가들에 대해 우리는 공평한 대우를 하지 않았다. 코레지오, 첼리니 그리고 이탈리아를 <세계의 빛>으로 만든 다른 헌신적인 영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또한 미켈란젤로의 마지막 딱 10년 동안의 작업도 그냥 지나쳤다. 그는 죽은 메디치 집안사람들을 위해 불멸의 조각품을 만들고 성 베드로 성당에 둥근 지붕을 씌워주어, 회의주의 시대인 오늘날에도 그것은 여전히 서구 문명의 중심이며 정상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미켈란젤로에게 찬사를 바친다. 길고 고통스런 생애 동안 그는 계속해서 창작하였고, 미술의 모든 주요 영역에서 걸작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 작품들이 이른바 살과 피를 찢고 나온 것임을 우리는 안다. 그의 정신과 마음에서 터져나온 것으로 한 가지를 완성한 다음이면 그는 출산의 고통으로 약해진 시간을 견디곤 했다. 그것들이 수십만 번의 망치질과 끌과 연필과 붓을 움직여서 형태를 얻은 것임을 우리는 안다. 그것들은 불멸의 주민처럼 하나씩 아름다움이나 중요성의 지속적인 형태들 가운데 자기 자리를 차지하였다.
종교 개혁 I
위클리프와 에라스무스
p.373. 로마 가톨릭 교회는 역사상 가장 특기할 만한 조직의 하나이다. 그 기원, 목적, 방법, 흥망성쇠, 잘못, 업적 등을 객관적으로 연구하면 다른 어떤 주제나 제도의 연구보다 인간의 본성과 가능성에 대해 많은 빛을 던져줄 것이다.
p.375-376. 스페인의 고위 성직자인 알바로 펠라요는 이렇게 적었다. <늑대들이 교회를 통치하면서 기독교 양떼의 피를 먹고 살고 있다. >1311년 망드(프랑스의 남부)의 주교인 윌리엄 뒤랑은 빈 공회의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로마 교회가 나쁜 예들을 떨쳐버림으로써 새로 시작하게 된다면 교회 전체가 개혁될 것이다. …… 이런 나쁜 예들을 놓고 사람들은 분개하고 민중은 그것에 전염되었다. …… 모든 나라에서 …… 로마 교회는 나쁜 명성을 얻고 있다. 외국에서는 모두들 교회의 품안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부터 가장 낮은 신분의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탐욕에만 마음을 두고 있다고 떠들어 대고 출판하고 있다. …… 모든 기독교가 해로운 탐욕의 예를 본받고 있음은 명백한 일이며 또한 악명 높은 일이기도 하다. 성직 계급은 왕자들과 왕들보다 더욱 화려 하게 연회를 베풀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의 왕과 의회는, 루터와 헨리 8세보다 2세기나 앞서서 한 사제가 가톨릭교회의 신학과 정치적 요구를 공격하는 것을 보고 모두들 미소 지었다.
p.397. 도이치 산업과 상업에서 사실상의 혁명이 진행되었다. 대부분의 산업은 아직 수공업이었고, 물자와 자본을 공급하고 완성품을 사다 파는 사업가에 의해 점점 더 통제되었으며 광업이 번창하였다. (중략)
우리는 아마도 야콥 푸거 2세(1459년-1525년)의 시기를 도이칠란트 자본주의의 시작으로 헤아려야 할 것이다. 돈을 통제하는 사업가들이 땅을 소유한 봉건 지주들을 통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5세기 말 도이치 광산과 방직업은 이미 자본주의 노선이 조직되었다. 그러니까 자본 공급자들에 의해 통제되었다.
종교 개혁 II
루터와 공산주의자들
p.407. 테첼은 자신이 부여받은 권위에 따라, 뉘우침이나 고백의 문제가 없이 그냥 돈만 내면 죽은 사람이 형벌을 면제받을 수 있다는 기독교 교리를 선포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또한 이런 형벌의 면제가 아무 영혼에게든지 전혀 문제없이 적용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런 외람됨으로부터 그의 가르침은 <돈이 궤짝 속에 떨어져 딸랑거리기만 하면 영혼은 연옥의 불에서 뛰쳐나온다>는 격언이 되었다. 교황의 형벌 면제 칙령은 이런 제안에 대해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 이것은 공허한 스콜라 철학의 견해였을 뿐…… 교회의 교리는 아니었다.
p.417. 교황의 사절들은 루터에 대한 파문령을 도이칠란트 전역으로 퍼뜨렸다. 어떤 도시에서는 루터의 책을 공개적으로 불태웠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학생들이 교황의 칙서 사본을 불태우고, 교회 법령과 가톨릭 신학 서적들도 함께 태우도록 하였다. 학생들은 좋아하며 또 다른 책들까지 모아 오후 늦게까지 계속 불태웠다. 12월 11일 루터는 교황의 통치를 부인하기 전에는 어떤 사람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수도사가 교황을 파문한 것이다.
p. 418-419. 당시 교황의 사절은 이렇게 보고하였다.
도이칠란트 전체가 무기를 들고 일어나 로마에 저항하고 있다. 온 사상이 도이치 땅에서 공회의를 열라고 외친다. 파문을 알리는 교황의 칙령은 비웃음을 산다. 많은 사람들이 고해성사를 중단하였다. …… 마르틴(루터)은 머리 위에 후광(그리스도나 성인을 표시하는 둥근 빛)이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사람들은 이 그림에 키스를 한다. 그렇게 많은 양이 팔렸는데 나는 한 장도 구할 수가 없다. …… 나는 거리에 나갈 수가 없다. 도이치 사람들은 나를 보면 손으로 칼을 잡고 이빨을 간다. 교황님께서 나에게 전면적인 은사를 베풀어 주시고 만일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 형제와 자매를 보살펴주실 것을 희망한다.
p.420. 황제는 그에게 하루 동안의 시간을 주었다. 4월 18일 그는 다시 출두해서 성서에 반대된다는 것이 입증되는 어떤 구절이라도 취소하겠노라고 동의하였다. 트리어 대주교를 대표하는 요한 에크는 라틴어로 그에게 도전하였다.
마르틴 성서에서 들었다는 그대의 해명은 이미 이단자들이 항상 하던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는 위클리프와 후스가 한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어떻게 그대가 성서의 의미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는가? 그대의 판단을 그 많은 유명한 남자들의 판단보다 위에 놓고 그대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안다고 주장할 셈인가? 그대는 완벽한 입법자인 그리스도가 세우시고, 사도들에 의해 세상에 널리 전파되었고 순교자들의 붉은 피로 봉인되었으며 거룩한 공의회에 의해 확인되고 교회에 의해 정의된 가장 거룩한 정통 신앙에 의문을제기할 권리가 없다. 교황과 황제는 끝없이 논쟁이 계속되어서는 안 되므로 그것을 논의하는 것을 금지하셨다. 마르틴, 그대에게 묻노라 - 정직하게 답변하라 -그대는 이 책들과 그것들이 포함하는 오류와 인연을 끊으려는가, 아닌가?
p.420-421. 폐하와 귀족들께서 간단한 답변을 원하시므로 나는 쓸데없이 구별하지 않고 대답하겠다. ……내가 성서의 증언에 의해서나 명백한 이성에 의해 유죄로 인정된 것이 아닌 한(나는 교황과 공회의의 권위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은 서로 모순되니까), 나의 양심은 하느님 말씀에 따를 뿐이다. 나는 어느 것도 취소하지 않을 것이고 그럴 수도 없다. 양심에 거슬린다는 것은 옳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아멘.
p.421. 수도사 한 명이 1 천 년 기독교에 맞선다면 분명 그가 틀렸을 것이다. …… 나는 루터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겠다. 그는 안전통행증을 가지고 돌아가도 좋다. 그러나 설교를 하거나 어떤 소동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나는 앞으로도 악명 높은 이단자인 그에게 반대할 것이며 여러분이 내게 약속한 대로 선포하리라 믿는다.
p.425. 절반은 혁명적인 루터의 선언에 용기를 얻은 농민군 지도자들은 그에게 이 조문의 사본을 보내고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는 1525년 4월에 인쇄된 「평화를 경고함」이라는 글로 답변을 하였다. 그는 성서에 의해 주어진 올바른 길에 복종해야겠다는 농부들의 제안을 찬양하였다. 그는 자신의 연설과 글이 혁명을 부채질했다는 당시의 비난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책임이 있음을 거부하고 자기가 시민적 복종을 설득하였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지배 계층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철회하지는 않았다.
p.440. 승리한 개신교(1525년-1555년)
종교 개혁이 도이칠란트에서 성공하였다면 그것은 아마도 황제 카를 5세, 교황 레오 10세의 하드리아누스 6세워 클레멘트 7세가 기독교 세계의 최고 권위를 놓고 경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이치 제후들이 도이치 신도들이 낸 돈을 로마보다는 자신들이 더 낫게 사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전쟁으로 바쁜 틈을 타서 도이치 사람들은 교회의 비싼 요구를 물리치고, 선제후들은 한 사람씩 황제에 동의하였다.
에라스무스는 놀라고 슬퍼하면서 유럽이 신학과 전쟁으로 찢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루터 반란의 초기 국면을 후원하였지만 그것이 유럽의 사회적 기둥의 하나인 가톨릭 교회의 붕괴를 가져오려고 했을 때 그로부터 멀어졌다. 그는 루터를 위해 길을 여는데 동참하였다. 그의 「어리석음 예찬」은 당시 유럽을 통해 수천 부가 전파되면서 수도사와 신학자들을 비웃었고 루터의 둔중한 폭발을 위한 폭발 지점을 제공하였다.

p.443.가톨릭 종교 개혁
(1575년-1563년)

셰익스피어와 베이컨
p.466. 영어권 세계의 모든 식자들은 셰익스피어가 쓴 37개의 희곡 모두 혹은 일부에 들어 있는 주제와 기쁨에 친숙하다. 그러나 때때로 그의 희곡 작품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내는 거의 잔혹한 시니즘에 대해서는 거의 놀라움이 표현되지 않았다. 그 문체의 행복한 화려함 한가운데로 거의 시니컬한 고통의 외침이 터져 나온다. 심지어는 가벼운 희극에서도 그렇다. 「뜻대로 하세요」(1600년)에서 <멜랑콜리 자크 씨>는 삶에서 확실한 것이라고는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렇듯 시간마다 우리는 익어가고
그렇듯 시간마다 우리는 썩어가고
그래서 이야기 하나가 열린다.(2막7장)
p.467. 「맥베스」의 살인자는 삶을 잔인하게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꺼져라, 꺼져, 짧은 촛불아!
삶이란 걸어가는 그림자일 뿐, 가련한 배우는
주어진 시간 동안 무대에서 점잔 빼거나 속을 태우지,
그리고 나면 끝이야. 그건 바보가 들려주는 이야기,
아무 뜻도 없는데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찬 이야기(5막5장)
p.470. 우리 잔치는 이제 끝났다,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 배우들은 모두 정령들이야.
그러니 흩어져 옅은 공기로, 옅은 공기로 돌아갈 밖에,
환상으로 짜여진 바탕 없는 피륙처럼
구름 모자를 쓴 탑들이며,
화려한 궁전들, 장엄한 사원들, 이 거대한 대지 자체도,
그렇다, 거기 살고 있는 모든 존재도 흩어지고 만다,
실체 없는 이 무대가 스러지듯이 구름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없어질걸.
우리는 꿈을 만든 것과 같은 재료로 만들어져 있으니,
우리의 작은 삶은 잠으로 완결되는 법.
p.477-478. 그녀가 그들에게 마지막 연설로 알려진 연설을 하는 동안 그들은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황금의 연설」이었다.(1601년 11월 30일).
값이 비싼 것은 아닐지라도 어떤 보석도 …… 여러분의 사랑보다 내가 더 좋아한 것은 없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어떤 재물보다 더 귀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지요. ……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를 높이 들어 올리셨지만 그래도 나는 여러분의 사랑과 더불어 통치했다는 것을 내 왕관의 영광으로 여깁니다.
그녀는 그들에게 일어서라고 명령하고 말을 계속하였다.
왕이 되어 왕관을 쓴다는 것은 그것을 쓴 사람에게 즐거운 것보다는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더 많이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 나 자신에 대해 말하자면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하느님께서 내게 부여하신 의무를 이행하고 그분의 영광을 지속하고 여러분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라면, 내 마음대로 한다면 나는 이 자리를 물러나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노동으로 이루어진 영광에서 해당된 기쁨을 누리고 싶습니다. 나의 삶과 통치가 여러분에게 좋은 것보다 더 오래 살거나 다스리는 것이 내 소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옥좌에 나보다 더 강력하고 더 지혜로운 왕들이 과거에도 많았고 앞으로도 많이 있겠지만 그러나 여러분을 더 사랑한 왕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p.479. 그녀는 지치고 보잘것없는 영국(잉글랜드)을 물려받았지만 그녀가 떠날 때 영국은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이해심의 폭과 국민의 부유함 속에서 배움과 문학이라는 근육이 건장해졌다. 아버지의 독재를 이어받았지만 인간적인 요소와 매력으로 그것을 온전하게 만들었다.
p.480. 그는 주기적으로 왕에게 신중한 충고가 담긴 능변의 「비망록」들을 보내곤 했다. 하원과 상원의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는 방안,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의회를 통합시킬 것, 종교적 다양성을 위해 박해를 중단할 것, 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와 화해함으로써 평화를 만들어 낼 것, 교황의 요구에 대해 나라의 문을 열지 않으면서도 잉글랜드에서 가톨릭교도에게 더 큰 자유를 줄 것, 국교도와 청교도 사이에 타협안을 찾을 것 등이었다. 이 시대의 정책들을 철저히 탐구한 역사가의 판단에 따르면 <이 정책을 수행했다면 다음 50년 동안 나타나는 재앙들을 피할 수 있었을 것>라고 한다. 제임스 왕은 이런 제안들이 일반적인 의견보다 너무 앞서나간 것이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1603년에 임명된 300명의 나이트 작위 명단에 베이컨을 포함시키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프란시스 경은 오래 기다렸다.
p.484. <과학 분야에서 지금까지 이룩한 것은 제 자리에서 맴도는 일이며, 영원한 뒤섞기로서 항상 시작된 곳에서 끝이 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는 이렇게 결론을 지었다. <오로지 한 가지 길만이 남았다.…… 모든 것은 더 나은 계획에 따라 새로 시작하는 것 그리고 더 적절한 기반 위에서 과학과 ‘실용’ 기술과 인간의 모든 지식의 총체적인 재건을 시작하는 일이다.>
p.486-487. 『학문의 대혁신』에서 가장 대담한 시도인 두 번째 부분은 과학의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는 일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귀납법을 인정하였고 이따금 실천하기도 하였으나 그의 논리학에서 우세한 것은 연역법이고, 그것의 이상적 형식은 삼단논법이었다. 베이컨은 낡은 <도구(오르가논)>가 실제 관찰보다는 이론적 사변을 중시함으로써 과학을 정체시켰다고 느꼈다. 그의『노붐 오르가눔』은 과학적 절차의 새로운 도구와 체계를 제안한 것이다. 경험과 실험을 통해 자연 자체를 귀납적으로 연구하는 방법이다. 이 책도 미완성으로 남았지만 그 모든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가장 빛나는 영국철학의 산물이며 이성의 시대를 향한 최초의 명료한 외침이었다.
이 책은 라틴어롤 쓰여 졌지만 빛나고 강렬한 문장들로 되어 있어서 책의 절반 정도가 경구를 뿜어내고 있다. 첫 번째 구절들이 벌써 철학을 압축하고, 귀납법 혁명을 예고하고, 산업 혁명의 징후를 예고하고 있으며, 홉스, 로크, 존 스튜어트 밀에게 경험론 철학의 자극이 되었다.
자연의 하인이며 해석자인 인간은 자연의 경과에 대해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지만, 사실에서나 생각 속에서 오로지 자신이 관찰한 것만큼만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을 넘어서면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 인간의 지식과 인간의 능력은 한 점에서 만난다. 과정을 모르는 경우에는 결과도 산출될 수 없다. 자연이 명령을 내리므로 우리는 그것에 따라야 한다.
p.488. 과학에는 마법의 모자란 없다. 마법의 모자에서 나온 모든 것은 관찰이나 실험에 의해 우선 그 안으로 집어넣어져야 한다. 단순히 우연한 관찰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료의 <단순한 열거>를 통해서가 아니라, <실험을 통해서 찾아진…… 경험>에 의해 행해져야 한다. 진짜 과학의 방법이 그토록 자주 경시되고 무시되고 있을 떄 베이컨은 현대 과학의 방법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경험의 진짜 방법은 우선 촛불을 켜는 것이다(가설). 이어서 촛불을 수단으로 삼아 길을 비추고, 비로소 적절한 경험을 시작해서 …… 그것으로부터 공리를 이끌어낸다. (<천 번째 결실>, 잠정적 결론). 그리고 이렇게 확정된 공리로부터 다시 새로운 실험을 하고 …… 실험 자체가 판정을 내려야 한다.
p.491. 그는 유명한 구절에서 두 번 거듭 무신론을 제자리로 돌려보내고 있다. 무신론의 이유는 <……종교 안에서의 분열이다. 그런 분열은 짧을 수도 있다. 어떤 분열이든 양측에 열성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열은 무신론을 끌어들인다.
p.492. 니체와 비슷하게 그는 좋은 전쟁은 어떤 이유든 다 괜찮다고 느꼈다.
p.496-497. 이렇게 나는 지식의 일부가 시민으로서 지식과 닿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시민적 지식과 더불어 인간의 철학을, 인간의 철학과 더불어 철학 일반을 결론지었다. 이제 잠시 쉬면서 내가 돌아온 길을 되돌아보니 이 글은 내게는 - 우리가 자기 자신의 글을 판단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악사들이 악기를 조율할 때 내는 소리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소음을 낸 것일 뿐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듣기에 좋은 것은 아니지만 나중에 음악이 더욱 달콤하게 여겨질 이유가 된다. 그래서 나는 뮤즈의 악기들을 조율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뒷날 더 나은 손길이 그것을 연주하도록 말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 시대가 세 번째 학문의 시대가 되고 있는 바, 앞선 시대들의 조건을 생각해보면, 모든 질적 측면에서 우리 시대 지력의 탁월함과 생생함이 분명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대 작가들의 산고에 의해 얻은 고귀한 도움과 빛, 오늘날 재산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책을 전달해 주는 인쇄의 기술, 수많은 실험들을 밝혀준 항해술에 의한 세계의 개방 그리고 대규모 자연사……. 나는 이 세 번째 시대가 그리스 학문과 로마 학문의 시대를 훨씬 능가하리라는 신념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 나의 노력들로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이 노력들을 비난함으로써 스스로를 아니면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려 한다면, 이들은 다음과 같이 고대인의 끈질긴 요구를 할 것이다. <원한다면 나를 쳐라, 다만 내 말을 들어라>하고 말이다. 사람들이 그것들을 비난하게 내버려둬라. 다만 그것들을 관찰하고 무게를 달아보라.
p.498. <인간의 오성은 메마른 빛이 아니라 의지와 감정으로부터 어떤 주입물을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과학은 ‘누군가가 원하는 대로의 과학’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이미 가진 것을 참이라고 믿으려 하기 때문이다.>

옮긴이의 글
귀 있는 이여, 들어보라
p.499-501. 이 책은 그가 남긴 마지막 책이다. 어려운 주제를 쉽게 다루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철학 이야기』(1926년) 이후로 그는 50년에 걸쳐 인류의 문명사를 관찰한 열한 권의 대규모 저작을 쏟아냈다. 바로 『문명 이야기』시리즈다. 고대 인류 문명의 기원에서 시작하여 서양사를 꿰뚫고 나폴레옹 시대까지 1만 년 이상의 시간을 다룬 책들로 제목만 읽어도 현기증이 나는 인류사의 광범위한 전망이다. 자신의 마지막 저작인 이 책에서 그는 인류 문명사 탐구에 평생을 바친 한 사람의 사상가가 마지막 생생한 목소리로 자신이 탐구한 역사의 지혜를 후세에 들려주고 있다.
이 책은 원칙적으로 서양의 역사를 관찰한다. 책을 쓰는 도중 저자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처음 계획했던 것과 다르게 셰익스피어와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가 마지막 장이 되었다. 대신 그때까지의 서양사가 한 눈에 들어오도록 명료하게 정리되어 있다. 문명이란 무엇인가에 이어 4대 문명 발상지가 돌아가면서 관찰된다. 이어서 서양의 역사와 문화의 뿌리인 고대 그리스(6-8장)와 로마 시대(9-12장)가 간략하면서도 알기 쉽게 개관된다. 그리고 서양 정신에서 또 하나의 뿌리가 기록되는 기독교의 성장(13-14장). 유럽에서 기독교 중세가 시들면서 피어난 근대의 꽃은 알프스 남쪽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15-17장)로 북부 유럽에서는 종교 개혁(18-19장)으로 나타난다. 개신교 종교 개혁에 맞선 가톨릭 종교 개혁(20장), 이어서 이성의 시대가 다가옴을 알리는 셰익스피어와 베이컨의 시대(21장)로 끝을 맺고 있다.
경구를 지닌 힘차고 간결하고 사색적인 언어가 이 거대한 내용을 담아낸다.
어차피 복잡하기 짝이 없는 발전 과정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절대로 짧지 않은 인류 문명의 발전 과정을 따라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걸으면서 몇 마디 말로 예리하게 각 시대의 핵심을 찌른다. 이미 역사의 수많은 흥망성쇠를 관찰했던 이 눈길은 인류에 대한 막연한 희망이나 절망을 넘어 담담한 관찰자의 냉정함을 보인다.
이 책에 소개된 내용은 단순히 서양사를 알기 쉽고 읽기 좋게 배열한 것만은 아니다. 어마어마한 학문의 역사를 포함하는 서양사를 단순한 정치, 사회의 역사가 아니라 사상과 예술의 흐름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의 관찰은 유연하고 매력적이다. 바로 문화사를 읽는 눈길이다. 문화사를 읽는 이 눈길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몇 가지 원칙적인 통찰이 재미있다. 문명을 시작한 것은 여자이며 남자는 여자가 길들인 마지막 동물이라는 듀런트의 태연자약한 고백은 우리를 멈칫 놀라게 한다. 문명을 떠받치는 다섯 기둥으로 꼽은 항목들은 기억할 만한 것들이다. 즉 가족, 종교, 교육(학교), 법, 대중의 의견(여론) 등이다. 이 기둥을 바탕으로 그의 관찰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의 축을 이루는 관점의 하나로 역사를 깊이 관찰한 사람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대단히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이 하나 있다. 그는 사회 변혁의 핵심적인 이유의 하나로 부의 편중 문제를 꼽고 있다. 부가 지나치게 한편으로 쏠리면 반드시 혁명의 기운이 생겨난다. 그리고 역사상의 어느 시대이든 관계없이 한 사회가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아니면 그에 휩쓸리느냐에 대한 답변이 그 시대의 배경과 흐름을 이해하는 하나의 중대한 열쇠가 된다. 우리 시대라고 어찌 다르겠는가?
여기서 역사는 영웅의 역사이다. 영웅이란 역사상 위대한 정치가나 장군만이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와 예술가, 시인까지 포함한다. 이 모든 영웅들은 한결같이 위대함과 더불어 인간적인 약점을 지녔다. 듀런트는 이들의 위대성을 깎아 내리지는 않지만 슬그머니 미소를 띤 채 약점을 거침없이 털어놓는다. 역사나 사실을 바라보는 이러한 냉정함이 우리에게는 낯설다. 우리는 서로 모순을 이루는 형용사를 얼른 이해하지 못한다.
p.502-503. 아흔 여섯의 나이로 죽기 직전까지 윌 듀런트의 곁에는 언제나 사랑하는 아내 에이리얼이 있었다. 이들은 1913년에 스승과 제자로 만났다. 두 사람의 행복한 최후에 대해서는 이들이 죽은 지 20년이 지난 다음 이 유작 원고를 발견한 존 리틀의 글에서 읽을 수 있다. 에이리얼은 처음부터 『문명 이야기』의 공동 저자였다. 다만 불행하게도 이 시리즈의 제 7권『The Age of Reason Begins』에서야 비로소 그 사실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이것은 한 위대한 사상가가 자신의 오류를 수정하는 과정이었다고 믿고 싶다. 두 사람은 다행스런 삶의 동반자였고, 나아가 이상적인 동료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행복한 결합이 이들이 함께 살면서 많은 저작을 만들어낸 원동력이 되었음은 분명한 일이다. 그리고 인류의 수많은 어두운 측면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도 분명히 읽을 수 있는 유머와 재치, 낙천적 요소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죽기까지 인류의 역사와 사상에 대한 통찰을 계속했던 그 삶의 흔적을 만나고 그 깊은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우리 삶이 참으로 경이롭고 또 노년을 존경하는 마음이 뭉클 솟아난다. 나도 이 같이 아름다운 노년을 맞이하고 싶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여기서 한 스승이 후세와 젊은이들에게, 특히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들려주는 역사의 교훈을 귀 담아 들어보면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귀 있는 이여, 들어보라.

3. 내가 저자라면
단재 신채호는 ‘개인은 사회의 불무에서 만들어졌을 뿐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월 듀런트도 그 말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윌 듀랜트는 1913년 뉴욕 시 페러 모던 스쿨에서 교수활동을 하던 중 제자 에이다 코프먼과 결혼했다. 윌 듀랜트는 그녀를 에이리얼이라고 불렀는데, 뒤에 그녀는 이 이름을 자신의 법적 이름으로 올렸다.

그녀는 〈문명이야기〉 각 권마다 집필에 관여했지만, 7권 〈이성의 시대가 시작되다 The Age of Reason Begins〉가 출판된 1961년 전에는 윌 듀랜트의 공저자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이후 그녀는 공저자로 남편과 나머지 작업을 계속했고, 10권 〈루소와 혁명 Rousseau and Revolution〉(1967)으로 퓰리처상을 공동수상했다.
〈두 사람의 자서전 A Dual Autobiography〉(1977)에서 이들 부부는 자신들의 공동작업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p.502-503. 아흔 여섯의 나이로 죽기 직전까지 윌 듀런트의 곁에는 언제나 사랑하는 아내 에이리얼이 있었다. 이들은 1913년에 스승과 제자로 만났다. 두 사람의 행복한 최후에 대해서는 이들이 죽은 지 20년이 지난 다음 이 유작 원고를 발견한 존 리틀의 글에서 읽을 수 있다.

에이리얼은 처음부터 『문명 이야기』의 공동 저자였다. 다만 불행하게도 이 시리즈의 제 7권『The Age of Reason Begins』에서야 비로소 그 사실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이것은 한 위대한 사상가가 자신의 오류를 수정하는 과정이었다고 믿고 싶다. 두 사람은 다행스런 삶의 동반자였고, 나아가 이상적인 동료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행복한 결합이 이들이 함께 살면서 많은 저작을 만들어낸 원동력이 되었음은 분명한 일이다. 그리고 인류의 수많은 어두운 측면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도 분명히 읽을 수 있는 유머와 재치, 낙천적 요소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에이리얼의 공동 저술 부분에서 석연치 않은 점들이 보이나, 어쨌든 평생을 함께한 아내인 에이리얼(Ariel) 딸 에덜(Etherl)은 삶의 동반자이자 저술활동의 동반자가 되어 윌 듀런트의 역사학자로서의 생애를 가능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삶의 동반자이자 동료였던 두 사람의 결합은 많은 저서를 만들어내는 시너지 효과를 불러 일으켰을 것으로 보인다. 듀란트가 가정이라는 사회안에서 더 단단해졌을 것이라는 것을 추측해주는 대목이다.

‘문명을 시작한 것은 여자이며 남자는 여자가 길들인 마지막 동물’ '나는 역사가 전체로써 보기를 원한다. 나는 통합된 전체로 짜인, 연관성 있는, 상호 의존적인,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한 시대의 남자와 여자의 모든 활동들을 보기를 원한다. 나는 과거가 모두 함께, 그러했던 모습으로 보기를 원한다.'
라는 듀란트의 목소리는 그런 이유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결혼을 하므로써 사람의 영역, 그것이 어떤 것이든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것이 순기능적이고 동력이 되어 줄 수 있었던 두 사람의 평생해로가 몹시 부러웠다.
우리 사부님이 '사람에게 구하라' 에서 인용한 분문 중 "인간의 역사는 생물학의 한 단편이다. 인간은 수없이 많은 종들 중의 하나이고, 다른 종들과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한 싸움과 살아남기에 가장 적합한 존재들의 경쟁에 종속된다. 심리학, 철학, 정치적 능력 그리고 이상향들은 이 생물학 법칙과 화해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는 듀란트가 왜 역사를 정리하고 평생의 작업으로 삼았는지를 잘 표현하고 있는 대목이다.

‘역사속의 영웅들’ 원고는 저자가 사망하고 나서도 세 번이나 이사를 하고 한 번의 홍수를 겪고도 살아남아 2001년 겨울,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월 듀런트가 저술을 끝내고 21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이었다.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흔의 나이에 소진된 체력으로 구상하고, 집필했을 그와 에이리얼을 상상하니 뜨거운 감동이 밀려온다.

♣아쉬움.
이 책은 영웅중심이지만 아주 개략적이고 그나마도 그들이 관련된 사건에 대해서는 구체적이지 않다. 때문에 영웅사를 읽었음에도 중요한 무언인가가 빠진 듯하다. 그러면서도 4대문명 발상지, 고대 그리스· 로마, 기독교의 르네상스, 종교개혁, 셰익스피어와 베이컨의 시대까지 망라하느라 영웅의 범위가 넓어서 작가의 생각이 모자이크된 상식서를 한 권 읽은 듯한 느낌도 온다.
구체적일 수 없어 요약본일 수 밖에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역량이 느껴지는 책이었고. 때문에 유익한 인문교양서를 읽었다는 느낌이 온다.

역사속의 영웅을 읽으며 일찍이 ‘국가와 결혼했다’고 선언하며 해가지지 않는 영국을 건설하는데 기여한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튜더를 다시 기억해보게 되었다.
왕이 되어 왕관을 쓴다는 것은 그것을 쓴 사람에게 즐거운 것보다는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더 많이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 나 자신에 대해 말하자면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하느님께서 내게 부여하신 의무를 이행하고 그분의 영광을 지속하고 여러분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라면, 내 마음대로 한다면 나는 이 자리를 물러나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노동으로 이루어진 영광에서 해당된 기쁨을 누리고 싶습니다. 나의 삶과 통치가 여러분에게 좋은 것보다 더 오래 살거나 다스리는 것이 내 소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옥좌에 나보다 더 강력하고 더 지혜로운 왕들이 과거에도 많았고 앞으로도 많이 있겠지만 그러나 여러분을 더 사랑한 왕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값이 비싼 것은 아닐지라도 어떤 보석도 …… 여러분의 사랑보다 내가 더 좋아한 것은 없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어떤 재물보다 더 귀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지요. ……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를 높이 들어 올리셨지만 그래도 나는 여러분의 사랑과 더불어 통치했다는 것을 내 왕관의 영광으로 여깁니다.

내가 좋아하는 엘리자베스 1세가 오래 집권했다는 이유로 물러나기를 강요하는 압력을 받고 남긴 말이다.
또한 로마에 갔을 때,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대면하고 넋이 나간 내가 성당에서 일행을 잃어버려 기억과 감동이 밀려 왔다. 이글을 쓰면서 오랜만에 사라부라이트만의 ‘울게하소서’를 리플레이 해서 듣고 있다.



IP *.41.62.236

프로필 이미지
2008.05.19 14:09:18 *.41.62.236
열한시 오십분쯤 올렸는데 두시간 쯤 후에 수정하다 글이 넘쳐 불가피하게 다시 올립니다.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472 [08]열정과 기질 - 하워드 가드너 [1] 양재우 2008.05.26 2191
1471 [08] 하워드 가드너: 열정과 기질 1 지희 2008.05.26 2473
1470 [08] 열정과 기질 - 하워드 가드너 거암 2008.05.25 2184
1469 [07] 열정과 기질-하워드 가드너 손지혜 2008.05.25 2141
1468 [08] 열정과 기질-하워드 가드너 최지환 2008.05.25 1874
1467 [08] 열정과 기질-하워드 가드너 2008.05.25 2129
1466 [번역012] 19장 군더더기 없는 삶, 20장 애쓰지 않는 삶 [1] 香山 신종윤 2008.05.24 2239
1465 역사 속의 영웅들_7 [3] 개구쟁이 2008.05.21 2315
1464 [07] 역사 속의 영웅들, 월 듀런트 현웅 2008.05.20 2238
» [07] 역사속의 영웅들 file [1] 지희 2008.05.19 2426
1462 [07] 역사속의 영웅들 - 윌 듀런트 정산 2008.05.19 2081
1461 (07) 역사속의 영웅들-윌 듀런트 [2] 이한숙 2008.05.19 2311
1460 [07] 역사속의 영웅들 - 윌 듀런트 최지환 2008.05.19 2138
1459 [07]역사 속의 영웅들 - 윌 듀란트 양재우 2008.05.19 2286
1458 [07]역사 속의 영웅들 - 윌 듀런트 오현정 2008.05.19 1974
1457 [07] 역사속의 영웅들-윌 듀런트 2008.05.18 2247
1456 [07] 역사속의 영웅들 - 윌 듀란트 거암 2008.05.18 6304
1455 [독서48]뿌리깊은 나무/이정명 [1] 素田 최영훈 2008.05.18 2944
1454 (06)역사속의 영웅들 이은미 2008.05.17 2125
1453 [50] 사람에게서 구하라 / 구본형 [2] 교정 한정화 2008.05.15 2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