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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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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27일 21시 19분 등록
I. 저자에 대하여

5번째 캠벨의 저서를 끝으로, 조셉 캠벨에 대한 조사를 마무리한다. '신화의 이미지'의 부록에는 지금까지 보아 온 것 중에 가장 자세한 그의 연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 내용을 기반으로 약간의 내용을 추가 또는 삭제하여 조셉 캠벨에 대한 최종 보고서를 끝낸다.

1904.
3월 26일 뉴욕에서 태어난다.

1910.
아버지, 남동생 찰리와 함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버빌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를 관람하고,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에 관심을 갖게 된다.

1913~1918
뉴욕의 뉴 로셀로 이사한다. 캠벨은 그곳에서 공립 도서관 어린이 서가에 있는 인디언 신화에 대한 책을 전부 읽고, 11세에는 성인 도서 서가에 출입할 것을 허락받고 혼자서 공부를 진행. 14세에는 병에 걸려 한동안 집안에서 자연 과학 공부한다.
한마디) 어릴 때부터 신화학자로서의 싹수가 보인다. 대단하다.

1919
뉴 로셀의 집에 화재가 발생하여, 그의 할머니가 숨지고 그가 수집한 인디언에 관한 자료가 불타버린다.
한마디) 이릴 시절에 위기를 겪는다. 그의 어린 시절 또한 영웅의 삶과 비슷하다.

1919~1921
코네티컷 뉴 밀포드에 있는 캔터베리 예비 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생물학을 가장 좋아하였다.

1921
다트머스 칼리지에 입학하여 생물학과 수학을 공부하였다. 2학년 때, 멜레코우스키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로망스 The Rommance of Leonardo da Vinci'를 읽고 인문학에 눈을 뜨게 되고, 콜럼비아 대학 영문과로 전입한다.

1924~1926
육상팀의 주자로 0.5마일 경주에서 콜럼비아 대학과 뉴욕 시의 기록을 세운다. 대학의 재즈 밴드에서 색소폰을 연주하기도 했다. 배를 타고 유럽으로 가는 길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를 만나 동양철학의 세계에 이끌린다.
한마디) 삶의 균형을 제대로 유지하는 모범생의 모습을 보여준다.

1925
콜럼비아 대학에서 문학 학사학위를 받는다. 샌 프란시스코에서 열린 AAU선수권 대회에 뉴욕 체육 동호회 육상팀과 함께 출전하고, 하와이에도 방문하며 워싱턴의 야키마에서 열린 인디언 로데오에도 참가한다.

1926
콜럼비아 대학으로 돌아와 육상팀에서 활동을 계속하며 중세문학을 공부한다. 성배에 관한 석사논문 '가슴 아픈 일격 The Dolorous Stroke'을 쓴다.

1927~1928
프랑스 파리 대학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번역자인 조지프 베디에르 아래서 로망스어, 문헌학, 고대 불어, 프로방스어를 배운다. 여기서 그는 현대 미술(피카소, 브라크)과 현대 문학(예이츠, 엘리엇, 그리고 특히 조이스)을 처음 접하게 된다. 그는 뮌헨 대학으로 옮겨가 산스크리트 문학과 인도 유럽 철학을 공부하였고, 프로이트, 융, 토마스 만, 괴테 등의 작품을 접한다.
한마디) 조셉캠벨의 끝없는 학구열에 불이 붙는다.

1929
미국 주식시장이 붕괴하기 2주 전에 귀국했다. 준비하고 있던 박사논문을 접고 여동생 앨리스와 함께 우드스탁 숲 속에 있는 1년에 20달러짜리 오두막에 세 들어 살게 된다. 그곳에서는 그는 파리에서 시작한 공부를 이어, 엄청난 양의 독서를 한다.
한마디) 자신이 가야할 길을 확실히 아는 사람의 삶은 흔들리지 않는다. 또한 독서를 통한 그만의 독특한 연구방식은 눈여겨 볼 만하다.

1931~1932
그의 오랜 친구 아델 데이비스를 통해, 존 스타인벡과 캐롤 스타인벡 부부, 그리고 생물학사 에드 리켓을 만나게 된다. 에드 리켓과 캠벨은 알래스카의 브리티쉬 콜럼비아까지 해안을 따라 여행하며 조수간의 동물군을 수집하는데, 이 여행은 신화학과 생물학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의 믿음을 재확인시켰다.

1933
그의 모교 캔터베리 예비학교에 취직하여, 역사, 영어, 불어, 독어를 가르치며, 슈펭글러, 토마스 만, 융, 조이스에 대해 공부한다. 그해 발에 은퇴하고 다시 우드스탁으로 돌아와 독서과 집필에 열중한다.

1934
사라 로렌스 대학에서 교수로 초빙되어 38년간 대학 문학부에 재직한다.

1938
그의 학생이었으며 마사 그레이엄 무용단의 단원이었던 진 어드먼과 결혼한다.
한마디) 조셉캠벨과 진 어드먼은 띠동갑이었다.

1941
인도연구자 하인리히 침머를 만난다. 침머를 캠벨을 볼링겐 시리즈의 설립자 폴 멜론과 메리 멜론에게 소개시켜준다. 캠벨은 볼링겐 시리즈이 첫 번째 책 제프 킹 글, 모드 오크스 그림의 '그 두 사람이 아버지에게 온 곳: 나바호족의 전쟁의례 Where the Two Came to Their Father: A Navaho War Ceremonial'라는 주석본을 만들게 된다. 이는 그의 첫 번째 출판물이다.

1942
이후 3년 동안 스와미 니카라난다와 함께 '스리 라마크리슈나의 가르침 The Gospel of Sri Ramakrishna]과 '우파니샤드 Upanishads'의 번역과 편집을 진행한다.

1943
침머가 폐렴으로 갑자기 사망하자, 그의 부인이 캠벨에게 침머의 유작들의 편집을 부탁한다. 캠벨은 12년 동안 이 작업을 하여, 다음 작품들을 출판한다.
'인도의 예술과 문명 Myths and Symbols in Indian Art and Civilization' (1946)
'왕과 시신 The King and the Corpse' (1948)
'인도 철학 Philosophies of India' (1951)
'인도 아시아의 예술 The Art of Indian Asia' (1955)

1944
헨리 모튼과 함께 '피네간의 경야를 여는 곁쇠 A Skeleton Key to Finnegans Wake'를 출간한다. '그림동화'의 주석을 쏘고, '댄스 옵서버 The Dance Observer'지의 편집진에 참여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의 집필을 시작한다.

1949
두 곳의 출판사에서 수정 요구 및 거절을 받은 후, 볼링겐 시리즈에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 출간된다. 이 책은 국립예술문자협회상을 받는다.

1953
크리에이티브 영화 재단의 대표가 되었고, 스위스 아스코나에서 열린 에라노스 협회에서 20여 년 동안 나온 화보를 모든 '에라노스 연감 회보'의 편집을 맡았다. 그는 그 일로 스위스에서 칼 융, 미츠치아 엘리아데, D.T. 스즈키 등을 만난다.

1954
인식년을 맞아 인도, 스리랑카, 타이, 미얀마, 홍콩, 일본 등을 여행한다.

1956
위싱턴 D.C의 국무부 외교연수원에서 강의를 시작한다.

1957
그가 편집한 에라노스 협회의 첫 번째 화보, '의미없는 상징 The Symbol Without Meaning'이 출간된다.

1959
에라노스 협회에서 '원시시대 사냥꾼과 농부의 재생 신화의 의례 Renewal Myths and Rites of the Primitive Hunters and Planters'를 출간하고, 캠벨의 저서 '신의 가면' 시리즈의 1권이 출간된다.

1967
'예술, 종교, 현대 문학 학회'의 운영진이 된다.

1969
'야생 수거위의 비행: 신화적 차원의 탐험 The Flight of the Wild Cander: Explorations in the Mythological Dimension'이 출간된다.

1972
뉴욕시의 쿠퍼 유니온에서 행한 강연을 모든 강연집. '신화와 함께 하는 삶 Myths to Live By'이 출간된다. 캠벨은 사라 로렌스 대학에서 퇴임하고 '종교학회' 회장이 된다. 아이슬란드와 터키를 여행하고, 아내인 진 어드먼과 뉴욕 시에 '열린 눈 극장(Theater of the Open Eye)'를 세운다.

1974
'신화의 이미지 The Mythic Image'가 출간된다.

1976
종교적 자유에 대한 공헌으로 멜셔 상을 수상하고 이집트와 그리스 여행을 안내한다.
한마디) 종교적 자유에 대한 공헌으로 상을 받는 다는 것이 인상깊다.

1978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프랫 연구소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는다.

1982
하와이로 이사한다.

1983
'세계 신화의 역사 지도: 1권. 동물적 힘의 길 The Historical Atlas of World Mythology: Vol. 1. The Way of the Animal Powers'이 출간된다. 영화감독 조지 루카스와 친분을 맺고, 캠벨 저작에서 영감을 얻어서 만들어졌다는 '스타워즈' 3부작을 보기 위해 스카이워커 랜치에 초대된다.
한마디) 그 유명한 스타워즈가 조셉캠벨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그의 작품을 읽기 전에는 전혀 몰랐다.

1984
80세 생일 파티가 샌프란시스코 미술관에서 열린다. 여기에는 샘 킨, 스탠리 캘러먼, 바브라 마이어호프, 마리자 짐부타스, 로버트 블라이 등을 포함하여 천 명의 하객이 참석하였다.

1985
'동물적 힘의 길'로 뉴욕 국립예술회에서 문학 명예 메달을 받았다.

1986
'바깥 세계의 내적 접근: 은유와 종교로서의 신화 The Inner Reaches of Outer Space: Myth as Metaphor and Religion'가 출간된다.

1987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새로운 감독/새로운 영화 축제에서 '영웅의 여정: 조셉 캠벨의 세계 The Hero's Journey: The World of Joseph Campbell'의 시사회가 열린다. 10월30일 조지프 캠벨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사망한다.

1987
12월에 PBS에서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 '신화의 힘(The Power of Myth)'이 방영된다.

1988
사라 로렌스 대학교에 '비교신화학의 조셉 캠벨 강좌'가 개설된다.

1991
조셉 캠벨 재단 Joseph Campbell Foundation이 설립되었다.

국내에 번역, 소개된 저작들

『네가 바로 그것이다 Thou Art That』, 박정미 옮김, 해바라기, 2004.
『신의 가면 1: 원시신화 The Masks of God Vol. I : Primitive Mythology』. 이진구 옮김, 까치, 2003.
『신의 가면 2: 동양신화 The Masks of God Vol. II : Oriental Mythology』. 이진구 옮김, 까치, 1999.
『신의 가면 3: 서양신화 The Masks of God Vol. III : Occidental Mythology』. 이진구 옮김, 까치, 1999.
『신의 가면 4: 창작신화 The Masks of God Vol. IV : Creative Mythology』. 이진구 옮김, 까치, 2002
『신화와 함께 하는 삶 Myths to Live By』, 이은희 옮김, 한숲출판사, 2004.
『신화의 세계 Transformations of Myth Through Time』, 과학세대 옮김, 까치, 1998.
『신화의 힘 The Power of Myth』, 이윤기 옮김, 이끌리요. 2002.
-1992년 고려원에서 같은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 이윤기 옮김, 민음사, 1999.
- 1980년대에 평민사에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으로 국내에 첫 선을 보였다가, 이후 대원사에서 '세계의 영웅신화'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1999년 다시 민음사에서 원래 제목대로 바로잡아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으로 출간되었다. 국내에 소개된 조셉 캠벨의 첫 저작이다.
한마디) 어렵게 인터넷 헌책방을 뒤져 '세계의 영웅신화'라는 책을 구입했으나, 책장을 펴보고 난 후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과 같은 책이라는 사실에 매우 황당했다.


II. 내 마음을 무찔러 든 글귀

추천의 글

3) 미궁은 외길이지만 힘든 길이다. 그러나 미궁의 중심에 도달하면 모든 것이 변한다.

3) 신화는 미궁이다. 신화학자들이 아이시크의 이야기를 자주 인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신화는 사람들에게 미궁으로 안내하고 보물을 얻도록 해 준다.
"신화와 상징들 그리고 먼 곳으로부터의 지혜의 징표들은 바로 그러한 방법으로 우리 자신의 보물에 대해 우리에게 이야기해 줄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우리 존재의 잊혀진 마음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그것을 파내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것은 우리들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고 우리를 둘러싼 모두의 이익을 위하여 살아 있는 정신의 신전을 건립토록 허락할 것이다."

4) 신화란 자기를 찾고 이해하는 일이며 혼잡한 세상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살게 해 주는 힘이다. 미로가 아닌 미궁으로 이끌어 '살아 있는 정신의 신전'을 세울 수 있도록 해 준다.

1장. 신화에 미친 과학의 영향

17) 전반적인 중세 사상가들의 관점에서 보면 우주의 구조와 사회 질서의 규범, 개개인의 선은 완벽하게 일치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절대 복종을 통해 사회뿐 아니라 내면의 영적 관심 및 외부의 자연 법칙과 하나가 된다.

22) 지금까지 전세계 모든 거대 문명 사람들은 자기네 상징적 인물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고 자신들을 신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선택받은 민족으로 생각하려 했다.

22) 니체와 입센이 알고 있던 것처럼 삶은 삶을 뒷받침하는 환상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23) 사회의 수호자 대부분은 귀찮은 진리 탐색을 방해하기 위해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면서 낡은 환상 편에 서는 경향이 있다. (중략) 이 세상은 거짓을 먹고 살기 때문이며, 진리의 도전에 맞서 거기에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사실 거의 없다.

24) 사회의 도덕적 질서는 항상 신화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신화는 종교로 인정받았고, 신화에 미친 과학의 영향은-필연적으로-도덕적 불안을 낳았기 때문에 삶을 떠받치는 신화의 본성을 과학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한지 아닌지 물어보아야 한다. 신화의 낡은 특징을 비판하면서 신화의 필요성을 오해하고 무시하는지, 목욕물과 함께 아이(모든 세대의아이들)까지 버리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24) 상징화된 '정신의 사실'을 밝히고 분석하며 해석할 뿐 아니라 건강하게 간직할 방법을 개발하고 희미해지는 과거의 오래 전통이 사라질 때 인류가 내면뿐 아니라 세상의 외적 사실을 알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심리학자와 비교신화학자의 임무는 갈수록 절박해질 것이다.

26) 프레이저처럼 프로이트는 신화와 마술, 종교의 세계를 부정적으로, 결국에는 과학에 의해 비판받고 뒤처지며 밀려날 오류라고 평가했다.

27) 신화는 삶 속에서 인식되고 통합되어야 하는 정신의 힘을 그림문자로 말해주고 이 영혼의 힘은 언제나 인간 정신에 보편적이었으며 인간이 수천 년의 세월을 헤쳐 나갈 수 있었던 인류의 지혜를 나타낸다. 따라서 신화는 잠들 때 빠져드는 깊은 곳이 아니라 외부 세계와 관련된 과학의 연구 결과에 의해 대체된 적이 없었고, 또 그럴 수도 없다. 꿈과 신화 연구를 통해 이 내면의 힘과 대화를 하다보면 더욱 깊고 더욱 현명한 내적 자아의 드넓은 지평을 깨달을 수 있다.

2장. 인류의 출현

36) 인류의 신체적 특징이 아니라 심리적 특징을 고려해봤을 때 가장 독특한 흔적은 일차적으로는 신화적인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경제적인 목적과 법칙에 따른 삶의 구성이다.

36) 죽음에 대한 의식과 죽음을 초월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신화의 가장 커다란 발생원인이었다.

36) 개인이 스스로 동화되도록 해야 하는 사회체제는 한 개인의 인생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개인은 사회에 참여하면서 죽음을 초월한 인생을 알게 될 것이다. 유사시대와 선사시대라는 긴 시간 속에 곳곳에서 발생한 모든 신화 체계에는 이 두 가지 근본적인 깨달음-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과 사회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상징적으로 결합되어 있고, 의례와 사회를 이루는 중요한 힘이었다.

42) 신화는 외부의 사건이 아니라 상상의 주제를 말하고 있다. 신화는 사실 보편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인간 정신 혹은 요즘 말로 영혼의 영원한 특징, 특유한 인류의 보편적 상상력을 나타낼 것이다. 따라서 신화는 기본 원리를 인정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본질적인 문제를 얘기하고 있다. 그 문제는 의식적인 정신이 가장 은밀하고 깊은 곳과 계속 접촉해야 할 때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 성스러운 이야기와 그 이미지는 일상적인 낮의 의식은 알지 못하는 영혼에서 의식적인 마음으로 보내는 메시지다.

43) 사실 우리를 동산 밖으로, 우리 자신의 중심에서 멀리 내던진 것은 지식일 것이다. 그래서 현재 우리는 지식을 통해 사물을 판단하고 영원한 생명 대신 선과 악만을 경험한다. 영원한 생명을 알지 못하지만, 벽으로 둘러싸인 동산은 우리 내면에 있고 이미 우리의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44) 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동산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신의 질투나 분노 때문이아니라 삶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집착 때문이다. 시공간 세계를 향한 외부 지향적인 관념 때문에 우리는 그 세계와 그 곳에 있는 찰나의 육체에 집착한다. 우리는 이 물질적 삶의 재물과 쾌락이라 여기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싫어하며, 이 집착이야 말로 우리가 동산에 들어가지 못하는 커다란 사실, 거대한 이유 혹은 걸림돌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내면에서 외부를 향한 육체적 감각이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46) 성서의 교훈은 아이가 부모에게 갖는 의존심과 공포심, 존경 어린 애정 등의 태도를 가르치는 불복종과 처벌에 대한 유아용 동화 수준인 반면, 불교의 가르침은 스스로 책임감을 갖는 성인용 우화와 같다.

47) 영생은 산다는 행위 그 자체와 항상 동시에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인간의 경험과 표현 안에 내재된 영원한 인간 가치의 차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깨달음을 얻은 위대한 사람들의 구현이다

47) "아버지의 왕국은 이 세상 어디에나 있으나 인간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
- 토마복음

3장. 의례의 중요성

63) 인간의 문화권도 마찬가지로. 힘과 에너지가 구조를 버리고 파괴했을 때 나타나거나 활용될 수 있다는 유치한 개념은 삶의 진화와 역사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으로 반박할 수 있다.

64) 동물계가 생물학적으로 유전된 유전적 패턴은 인간에게는 대부분 사회적으로 유전되고 '감수정이 예민한 시절'이라고 하는 길 세월 동안 각인된 패턴에 해당하며, 의례는 전 세계적으로 그러한 각인된 공인 수단이었다. 신화는 이러한 의례의 버팀목이었으며 의례는 신화의 구체적 수행이었다. 아이는 자신이 속한 사회집단의 신화를 습득하고 그 의례에 참여하면서 자연적 사회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미숙한 상태로 태어난 비결정적 자연산물에서 특별하고 효율적으로 기능하는 독특하고 능력 있는 사회 구성원이 된다.

65) 원시사회 사춘기의 통과의례와 전 세계 교육의 기능은 항상 부모에게 의존하는 청소년을 책임감 있는 성인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66) 요즘은 선조 세대와 같이 늘 일정하고 완벽하게 구성된 정적 사회를 이상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사회는 완벽하게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있다. 이 살아 있는 과정에서 모든 가능성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서로 협력해야 한다.

69)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니체도 그러했으리라-은 형식은 삶이 당당하고 웅장하게 드러나는 수단이자 매개체이고 단순한 형식의 파괴는 인간뿐 아니라 동물의 삶에 대한 재앙으로, 이는 모든 문명의 구조적 형식인 의례이자 예절이라는 점이다.

69) 바로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정신적 변화가 일어나는 이 위대한 시대-세계 제 2차 대전 후-의 필요조건과 가능성에 필적할 만한 창조적 작품을 단 하나도 모른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몹시 비참한 현실이다. 지금까지 그 사회에 적합하고 삶을 뒷받침하는 신화와 의례는 창조적 선구자와 예술가의 통찰력에서만 탄생됐기 때문이다.

76) 사회관계가 이루어지는 인간의 모든 영역에서는 의식화된 절차가 그 의례의 주인공을 비개인적인 존재로 만들고 그들을 그 자신이 아닌 존재로 높이거나 낮춘다. 따라서 그들의 행동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종, 사회, 계급 혹은 직업의 것이다.

78) 한 사람의 개인적 속성은 그 사회의 규칙을 통해서만 막연한 가능성에서 벗어나 유일무이한(세속적이고 공간적이며 한계를 지닌) 삶을 실현할 수 있다.

4장. 동양과 서양의 분리

88) 이승에서의 인생과 의미, 존재는 사회적 역할의 실천과 경험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한 사람만이 참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89) 그(융)는 누구나 평생 사회로부터 특정한 사회적 역할의 수행을 강요받는다고 지적했다 이 세상에서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끊임없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데, 융은 이 역할을 페르소나(personae)라고 했다.

89) 성격은 깊이 각인된 페르소나로,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자기 자신을 알린다. 이러한 페르소나가 없다면 그 사람을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90) 융의 표현대로, 개성화되고 자유로운 개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무수한 역할의 가면을 언제, 어떻게 쓰고 벗을지 알아야 한다.

90) 개성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과 해로운 것을 통제하면서 자신의 중심을 찾아 그에 따라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90) 융의 말처럼, "모든 삶은 완전한 자아의 실현이다. 때문에 그 실현을 '개성화'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삶은 삶을 실현하는 개개 수레에 실려 있으며, 수레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누구나 저마다 다른 운명과 목적을 지고 있으며, 그것을 실현했을 때에야 비로소 삶을 이해할 수 있다."

102) 동양에선 각자 자신과 다른 모든 이가 사실은 똑같은 자아인 우주적 존재의 본질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때문에 동양종교의 목적은 보통 살아 있는 동안 자신과 절대적 존재의 동일성을 경험하고 깨닫는 것이다. 반면 성경을 따르는 서양에서는 내면의 자아가 아닌, 저 멀리에 있는 조물주, 절대적인 타자와 관계를 맺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5장. 동양과 서양의 종교적 대립

112) 머릿속에서 해석된 상징은 이미 생명을 잃은 것과 다름없다. '감응 이미지'는 직접 감정 체계에 전달되고, 두뇌는 그 다음에야 흥미로운 반응을 나타낸다.

112) 현악기가 다른 악기에 맞추어 화음을 이루듯, 내부에서는 외부의 이미지에 대한 일종의 공명이 일어난다. 따라서 어떤 사회 집단의 살아있는 상징이 모든 구성원들에게서 이 같은 반응을 일으킬 때 일종의 마술적인 화음이 그들을 하나의 정신적 유기체로 만들고, 이를 통해 그 구성원들은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지만 하나의 존재, 하나의 믿음으로 움직인다.

114) 버펄로가 갑자기 북미 평야에서 사라지면서 인디언들이 중요한 신비적 상징뿐 아니라 한때 그 상징이 보여주었던 삶의 방식을 잃어버린 것처럼 우리의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도 대중적인 종교적 상징은 권위를 주장하지 못한 채 사라졌고 한때 그 종교가 뒷받침했던 생활방식이 역시 없어졌다. 그후 인디언들이 내면으로 관심을 돌렸던 것처럼 허우적거리는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도 그랬다.

117) 언젠가는 죽게 될 '너'는 자신이 사랑하고 붙들고 있는 자신의 모든 것을 지울 때에야 비로소 아직은 존재하지 않지만 만물의 부재(不在) 너머에 있는 절대 존재와의 동일성을 경험할 것이다. '그것'은 알 수도, 이름을 붙일 수도, 이 세상에서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의인화해서 섬길 수 있는 신들 혹은 어떤 절대적인 신이 아니다.

118) 사람들은 각기 여러 신들을 섬기면서 이 신에게 제례를 올리라, 저 신에게 제례를 올리라 한다. 그러나 모두 하나의 창조자로부터 나온 창조물일 뿐이다....
- 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

119) 동양에서는 경험, 즉 다른 사람의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강조한다. 그리고 수많은 가르침은 스스로 '신'이라 알고 있는 것과 완전히 하나-더 깊이, 더 심오하게-가 되는 방법을 말한다. 하나가 되어 그것을 넘어서고 그 다음에는 초월한다.

119) 부처는 육체가 아니라 육체를 알고 있는 사람이 곧 자신임을, 생각이 아니라 생각을 알고 있는 사람, 즉 의식이 곧 자신임을 깨달은 자이다. 나아가 전구는 빛을 낼 때 가치가 있듯이 자신의 가치는 의식의 빛을 발하는 것임을 안다. 전구에게 중요한 것은 필라멘트나 유리가 아니라 이 전구가 만들어내는 빛이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육체와 신경조직이 아니라 이것들을 통해 빛나는 의식이다. 전구를 보호하기 이해서가 아니라 의식의 빛을 위해 사는 사람은 깨달은 자이다.

120) 예수는 "하느님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말했을 때 신에 대한 모든 죄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고 9세기 후 이슬람의 신비주의자 할라즈도 이와 똑같은 말을 했고 그 역시 처형당했다. 반면 바로 동양에서는 바로 이것이 종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이었다.

121) 효과적인 의례는 모두에게 각자의 생각을 남겨주는 것이다. 교리나 정의는 혼란을 일으킬 뿐이다.

125) 태어난 것에는 죽음이 확실하고 죽은 것에서는 태어남이 확실하다. 피할 수 없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라. 법의 수호가 의무인 귀족으로서 이 정당한 전쟁을 거부하면 너는 덕과 명예 모두를 잃을 것이니라. 행동의 결과가 아니라 의무의 행동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옳도다. 그 다음 그 결실에 대한 모든 욕망과 두려움을 버리고 너의 의무를 수행하라.

126) 서양에서 말하는 의무는 동양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그것은 아이처럼 권위적인 사람에게서 배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서양에서 성인이란 스스로 생각하고 평가하며 발전하는 자아를 말한다.

128) 화가에게 그림의 '의미'를 물어보라. 그러면 다시는 그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지의 의미는 말 너머, 말이 정의하는 의미 너머 직관적으로 파악된다. 이미지가 당신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면 그건 당신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중략) 이 세상의 의미를 물어보지 말고 즐겨라. 자신의 의미를 묻어 않고 자신을 즐겨라. 최소한 건강할 때만이라도 자신을 즐겨라.

131) 어느 사회든 다 사악하고 불행하며 불공평하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따라서 정말로 이 세상을 구하고 싶다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가르칠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즐거운 슬픔과 슬픈 즐거움이라는 삶의 지식으로 사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는 법을 가르칠 수 없다.

6장. 동양 예술의 영감

150) 항상 경계하지 않으면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놓친다. 반면 무위의 예술은 끊임없는 경게 자세다. 그는 항상 깨어 있다. 삶은 의식을 표현하기 때문에 삶은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간다. 삶을 가르치거나 지시할 필요가 없다. 삶은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자연스럽게 살며 자연스럽게 말하고 행동한다.

153) 용기를 잃지 말라! 항상 용기를 갖고 언제나 자신의 유희를 즐겨라! 물론 경기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승패 결과를 떠나 가장 재미있게 경기를 즐긴 사람은 아무리 힘들고 위험해도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제일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다.

153) 예술을 삶의 유희로 보고 인생을 놀이의 예술로 생각하는 이러한 태도를 가지면 수많은 존재의 축복에 즐겁게 다가갈 수 있다.

7장. 선

160) 우리들에게는 의식의 질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을 덧없는 육체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자기 육체를 단순한 의식의 수레로 여기고, 의식을 우리 모두를 통해 현현하는 존재로 여길 수도 있다.

160) 모든 신비한 동양적 가르침의 주된 목적은 자기 동일시의 초점을 소위 이 전구 알에서 그 빛으로, 언젠가는 죽는 이 육체에서 육체란 수레에 불과하다는 의식으로 바꾸게 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인도의 '찬도기야 우파니샤드'에 적힌 저 유명한 격언, 즉 "네가 바로 그것이다." "네 자신은 모든 존재, 모든 의식, 모든 행복의 구분되지 않은 보편적 근거다"라는 의미다.

162) 선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관념의 그물을 끊어내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선을 '무심' 철학이라 하는 이들도 한다. 서양의 많은 심리치료 학파들은 우리들이 가장 갈구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주장한다.

162) 나는 거기에 우리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어딘지는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얼마나 있었는지도 말할 수 없다. 그건 그곳을 시간 안에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 T.S. 엘리엇

166)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는 '불어 끄다'라는 뜻으로, 부처에게는 자아의 소멸을 가리킨다. 이와 함께 쾌락에 대한 욕망, 죽음에 대한 공포, 사회가 부여한 의무감도 사라질 것이다. 해탈한 자는 외적인 권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행하기 때문이다.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모든 고통 받는 존재에 대한 자비심으로 행한다.

170) 부처는 '여래(如來)'라고 한다. 그는 꽃이나 나무 같은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우주, 당신이나 나 같은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것이 어떤 관념이나 관계와 가리키지 않고 그저 그 자체로 경험될 때마다 그 순간 보는 사람은 의미를 두지 않는 순수한 존재로 돌아간다.

170) "공덕을 쌓는 유일한 방법은 순수하고 완벽하며 신비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세속적 행동으로는 그 지혜를 얻을 수 없지요"
- 달마

173) "내면을 들여다보라! 비밀은 네 안에 있다"
- 혜능

176) 우리가 시간을 통해 고통 속에서 속세의 의식으로 경험하는 이 세계가 곧 출세간의 의식으로 열반의 행복을 경험하는 세계다. 생각과 경험의 초점을 바꾸기만 하면 된다.

176) 자아에 대한 의식과 함께 욕망과 두려움을 없애면 열반에 이를 것이다!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는 이미 열반에 이르렀다. 이 모든 세상이 이미 무한한 공간의 선착장에 떠 있는 배요, 모든 이가 배에 있는 그 배 위에 올라 있다.

177) 원인은 결과에 앞선다. 하지만 도토리가 크는 원인은 무엇인가? 도토리나무가 자라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미래의 일은 지금 일어나는 일의 원인이다. 동시에 과거의 일은 또한 지금 일어나는 일의 원인이기도 하다. 게다가 사방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것들은 지금 일어나는 일의 원인이다. 모든 것은 언제나 다른 모든 것은 원인이다.

8장. 사랑의 신화

183) "이 모든 것이 나다!" 이 이야기의 의미는 의식에 앞서는 최고의 존재가 우리를 무의식으로 자극해 움직이는 동기라는 것이다.

183) 인도의 관점에 따르면 이 지상에서 시공간적으로 우리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우리의 다양성-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하나의 존재, 하나의 씨앗이라는 진리의 이차적이고 현혹되기 쉬운 속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진리-자기 자신과 자신의 한계를 초월한-를 사랑의 희열 속에서 깨닫고 경험한다.

186) 열정적인 사랑이란 무서운 폭풍처럼 성실한 삶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목적은 할라즈가 말했던 나방의 사랑과도 같다. 사랑의 불에 몸을 던지는 것이ㅏㄷ.

9장. 전쟁과 평화의 신화

211) 동물을 사냥하고 전쟁을 벌이는 유목민에서 훨씬 안정된 열대의 마을 정착민-이들은 대부분 육식이 아니라 채식을 했다-으로 관심을 돌려보면 전쟁과 관련된 신화나 심리학이 거의 혹은 전혀 필요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211) 수많은 열대지방 부족들에게서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신화적 주제는 죽음을 통해 생명이 태어난다는 개념을 뒷받침하고 있다.

229) 그리스도의 제자가 그에게 "하느님의 왕국은 언제 올 것인가?"라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기대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여기 있다'거나 '저기 있다'고 말할 수 없다. 하느님 아버지의 왕국은 온 땅에 뻗어 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

237) "무기는 그것을 베지 못한다. 불은 그것을 태우지 못한다. 물은 그것을 적시지 못한다. 바람은 그것을 말리지 못한다. 영원하고 보편적이며 변하지 않는 자아는 영원히 한결 같다... 모든 육체 안에 사는 절대자아는 죽을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생명을 위해 슬퍼하지 말라."

238) 행동의 영역, 즉 삶에는 평화가 없으며 절대로 그럴 수 있다. 그렇다면 평화를 얻기 위한 공식은 집착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다.

238) 결과를 위해 행하는 자는 비천하다. 평화로운 자는 생에서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 모두에서 벗어난다.

238) 행위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과 욕망을 모두 저버린 사람은 의무에 집착하지 않고 행동한다.

10장. 정신 분열증 - 내면으로의 여행

245) 정신분열은 잃어버린 무언가를 회복하고 대단히 중요한 균형을 회복하기 위한 내면의 퇴행적 여행이다.

247) 이그쥬가르쥬크는 "유일한 참 지혜는 인류보다 오래 되었고 엄청난 외로움 속에 나타나며 고통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고난과 고통만이 다른 이들에겐 감추어진 모든 것으로 인간의 마음을 열어준다고 했다."

251) 정신병이나 환각제 경험과 요가수행자나 신비한 경험의 차이는 무엇인가? 모두 똑같이 깊은 내적 바다로 뛰어든다.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거기서 만난 상징적 형상은 대부분의 경우 동일하다. 하지만 대단히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수영할 줄 아는 잠수부와 못하는 잠수부의 차이와 같다.

252) 신화와 의례는 달리 해석되고 달리 적용되며 다른 규칙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전형적이고 본질적인 형태와 개념은 똑같다.

252) 개를 보라. 각자 그 종의 독특한 본성에 따라 움직이고, 그것은 결국 그 생명의 궁극적인 형태다. 인간 역시 거기에 지배되고 결정된다.

255) 모든 신화는 문화적으로 관습화된 신호체계요, 자연 발생적 유전질과 문화적 유전질이 그 신호 속에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둘을 구분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258) 신화는 새 둥지처럼 지역 환경의 재료로 만들어지고 의식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무의식적인 내면의 지시를 받아 구성된다.

261) 정신분열증 과정에서 정신병자 역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 우주와 합일하는 기쁨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 기쁨은 새로운 인식을 깨닫고 느끼는 감정이다. 전에는 신비하기만했던 것들이 이제는 완전히 이해된다. 형언할 수 없는 깨달음을 경험한다. 아니, 사실은 그저 놀라워할 뿐이다.

274) 신화의 영웅, 샤먼, 신비주의자, 정신분열증 환자의 내면 여행은 원칙적으로 똑같다. 귀혼을 하거나 병이 나으면 이는 부활로 경험된다. 즉 ‘두번 태어난’ 자아의 탄생으로 더 이상 낮은 세계에 머물지 않는다.

11장. 달 위를 걷다 - 외면의 여행

283) 칸트의 말처럼 시간과 공간은 '감각의 선험 형식', 즉 태어나기 전부터 몸과 모든 감각이 은연중에 작용하게 될 영역으로 알고 있는 모든 경험과 행동의 선결조건이다. 이러한 선결조건은 '저 멀리' 있어서 하나하나 관찰해서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그 법칙이 있고, 이미 우주를 마음에 얼싸안고 있다. 시인 릴케의 말처럼 "세상은 넓으나 우리 안에선 바다처럼 깊다." 인간의 내면에는 질서 있는 법칙이 있다.

286) 니체는 인간을 '병든 동물'이라고 했다. 인간 삶의 패턴은 열려 있고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인간 본성은 일정한 방식에 고정된 다른 종의 본성과 다르다. 사자는 평생 사지로 살고 개는 죽을 때까지 개로 살아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우주비행사나 은자, 철학자, 선원, 농부, 조각가 등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삶 속에서 수많은 운명 중 하나를 실현할 수 이"ㅆ다. 그리고 이렇게 실현하기로 선택한 삶은 결국 그 이상이나 상식이 아니라 희열을 통해 결정될 것이다.

286) 시인 로빈슨 제퍼스는 그것을 "한계를 벗어나도록 기만하는 환상"이라면서 "인간성은 부수어야 하는 틀, 뚫어야 하는 껍질, 불이 되어야 할 석탄, 분해해야 하는 원자"라고 말해싿. 무엇이 이렇게 우리의 한계를 벗어나게 만들 것인가?

287)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자마자 동물과 식물의 생활방식은 외적 사회질서와 내적 정체성의 경험이라는 거대한 신화적 패턴으로 인류를 유혹하면서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287) "정말 잘 들어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 (요한 12장 24-15절)

288) 식물의 신화적 이미지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게 하면서' 집단이라는 거대한 삶에 개개 삶의 유기적 참여를 권유한다.

291) 눈과 귀, 정신이 우리 몸에 기능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 지구의 귀와 눈, 정신으로 기능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몸은 이 지고, 이 놀라운 '끝없는 우주 사막의 오아시스'와 하나다. 그리고 뉴턴과 인간, 지구, 우주의 정신에 있는 것과 똑같은 그 무한한 우주의 수학은 우리를 통해 이 아름다운 오아시스에서 피어나고 결실을 맺을 것이다.

295) "살아 있는 우리들 모두는 사실 서양에서는 하느님, 우파니샤드에서는 브라만이라 할 수 있는 하나의 존재가 지닌 여러 측면처럼 한데 속해 있다."
- 에르빈 슈뢰딩어

295) 우리는 실로 이 세상의 눈과 귀, 생각, 말 혹은 신학적으로 말해, 신의 눈, 신의 귀, 신의 생각, 신의 말이다. 마찬가지로 행성이 떠 있는 무한한 정신의 창조행위에 항상 지금, 여기에서 참여하는 자이다.

12장. 글을 맺으며: 더 이상의 한계는 없다.

299) 신은 (나와) 다르고 또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고, 자신과 신을 다르게 생각하고 숭배하는 사람은 그 지혜를 알지 못하는 것이니, 그런 자라면 신들의 짐승과 다를 바 없다.

299) 신들은 인간이 그 지혜를 아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300)
나는 나를 내가 사랑하는 풀밭에서 자라도록 땅에게 주었다.
나를 다시 원하면 발 밑에서 나를 찾으라
- 휘트먼

303) 언젠가는 반드시 죽을 이 육체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다. 영생은 천국의 어느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이 땅에, 지금 존재한다.

304) "진정한 상징은 단순히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속에는 우리의 의식을 깨워 생의 내적 의미와 실재 자체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드는 구조가 담겨 있다. 진정한 상징은 주변의 다른 곳이 아니라 원의 중심으로 데려간다. 인간은 상징을 통해 자신의 깊은 자아, 타인, 신과 사랑을 나누며 의식적으로 교섭한다." "'신은 죽었다'는 말은 사실 상징이 죽었다는 뜻이다."

305) "주관적인 의미에서 모든 인간의 종교는 하나요, 똑같다. 하지만 객관적인 의미로 보면 형식은 서로 다르다"
- 뮌헨 대학의 비교종교학 교수

313) 새로운 신화는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주관적인 의미'에서 볼 때, 오래되고 영원한 신화, 기억하고 있는 과거나 상상한 미래가 아니라 '지금'에 대해 시적으로 새로워진 신화다. 즉 '민족들'의 아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알고 있는 깨어 있는 개인들, 이 아름다운 별에서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개개인이 아니라 평등한 전체적 정신의 중심, 모든 이와 함께 나름의 길을 가고 한계가 없는 개인에게 말을 거는 신화다.


III. 내가 저자라면

* 책의 구성

'신화와 함께 하는 삶'은 제목에서는 보는 바와 같이 신화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삶을 어떻게 연결 지어야 할지에 대해 방향을 제시해주는 책이다. 어떻게 보면 조셉 캠벨의 연구와 저작들을 통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깨달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책의 구성은 '신화의 힘'이나 '신화의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책 역시, 순수하게 출판을 목적으로 집필된 것이 아닌, 약 13년 간에 걸쳐 강연된 내용 중 일부를 선별하여 책으로 옮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나 '신화의 이미지'와 같은 짜임새 있는 구성이라기보다는, 신화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각 장마다 다른 주제를 갖고 이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주제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핵심주제는 제목과 같이 바로 신화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다. 그래서 그런지 앞서 접했던 다른 책들에 비해, 나의 삶, 우리의 삶을 비추어 보며 읽을 수 있어서 좀 더 쉽게 와닿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각 장의 제목 또한 그 안의 내용과 성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친절하여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작가가 많은 고민을 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13년 간 뉴욕에서 진행된 25차례의 강연 중 13개를 뽑아 12개의 장으로 구성한 책이다. 조셉 캠벨 스스로도 자신의 강연 중에서 고르고 골라 엄선한 내용일 것이라는 생각을 책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그의 책에서 논의 되었던 내용 중 12개의 주제를 뽑아, 그에 대해 깊이 있으면서도 독자들이 최대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야기하고 있다.

* 아쉬운 점

캠벨은 머리말에서 이 책의 토대가 된 그의 강연에 대한 이야기를 짤막하게 들려주고 있다. 특히, 강연 이후에 청중들의 질문에 대답하며, 그들과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았던 경험이 매우 즐거웠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곳에서 나왔던 질문들과 그의 답변들을 정리해서 책에 실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 같은 신화에 대해 깊은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신화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캠벨의 강연을 듣는 사람들 역시 그의 책을 읽는 사람들과 비슷한 종류의 궁금증을 가졌을 것이며, 그들의 질문에 대한 캠벨의 생생한 답변은 그의 연구내용에 대한 많은 의문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참 많았기에, 위와 같은 내용이 포함되었더라면 이런 것들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실 책을 읽고 또 읽어 그 내용을 깊이 이해한다면 지금 가진 궁금증들이 대부분 해소 되겠지만, 이미 고인이 된 그의 살아있는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책으로 남겨놓았다면 더더욱 좋았을 것이다.

* 기독교에 대해

그동안 그의 책에서 기독교에 대한 논의는 매번 언급되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그의 생각을 좀 더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일부 내용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대홍수에 대한 성서의 신화는 사실이 아니다. 사실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가상의 이론일 뿐이다. (19p)

결국 천지창조와 이집트 탈출, 사막에서의 40년, 가나안 정복 등 유명한 유대 전설을 담고 있는 유대인의 텍스트는 '신' 혹은 모세라 하는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니라 생각보다 훨씬 늦은 여러 시기, 여러 작가들이 지은 것이다. (20p)

창세기 1장은 기원전 4세기에 경(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지어졌고, 2장은 기원전 9세기 혹은 8세기(헤시오도스 시대)에 지어졌다. (21p)

성서의 교훈은 아이가 부모에게 갖는 의존심과 공포심, 존경 어린 애정 등의 태도를 가르치는 불복종과 처벌에 대한 유아용 동화 수준인 반면 불교의 가르침은 스스로 책임감을 갖는 성인용 우화와 같다. (46p)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내용으로 강연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을까하고 여겨질 만큼, 기독교도들의 입장에서 읽는다면 파격적이고 금기시 되었을 내용이다. 아마도 과거 어느 시대였으면 이 책은 불태워지고 그는 화형을 당하지 않았을까? 지금이라면,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뜨거운 논쟁이 일었을 법하다. 또한 9장에서는 전쟁을 부추기는 성서의 내용을 상당부분 보여줌으로서 기독교와 성서에 대한 그의 견해를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다.

* 요가 vs 정신분열증

나의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이 책에서는 그동안 읽은 그의 저서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내용이 다루어진다. 바로 정신분열증에 대한 것이다. 캠벨은 정신분열증의 일반적인 패턴이 신화적 영웅의 일반적인 여행 공식과 같다고 말한다. 또한 요가를 통해 얻게 되는 경험과 정신분열증 환자가 겪는 경험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그의 주장은 나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는 이에 대해 깊은 내적 바다에서 수영을 할 줄 아는 잠수부와 못하는 잠수부의 차이로 설명한다. 나 또한 요가 수행자가 경험하는 그것을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으나, 제대로 배우고 가지 않는다면 위험하다고 하니 그 욕망을 잠재우는 수 밖에 없는 것인가? 그 세계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 사부님은 그것을 경험하셨을까? 사부님이 가끔 말씀하시는 뽕 맛이란 것이 그것이 아닐지...

정신분열증적 환상이 신화적 영웅의 여행과 똑같다는 사실에 적이 놀랐다. (244p)

정신분열은 잃어버린 무언가를 회복하고 대단히 중요한 균형을 복원하기 위한 내면의 퇴행적 여행이다. (245p)

요가 역시 의도적인 정신분열이다. (251p)

정신분열증에 걸린 사람은 '집단적인 무의식'까지 내려가고 그곳에서 경험하는 심상은 대부분 신화의 전형과 같은 종류다. (252p)

* 인상 깊은 미로이야기

추천의 글에 적힌 옮긴이 이경덕 님의 글 또한 인상 깊다.

신화란 자기를 찾고 이해하는 일이며 혼잡한 세상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살게 해 주는 힘이다. 미로가 아닌 미궁으로 이끌어 '살아 있는 정신의 신전'을 세울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리고 이 책은 신전을 세우기 위한 훌륭한 초석이다. (4p)

혹시나 우리는 미로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자신에게 한 번쯤은 물어볼만하다. 그저 미로 같은 인생에 들어가서,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매다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은 아닐런지. 그렇다면 우리는 미로가 아닌 미궁 같은 인생을 살기 위해 캠벨의 말대로 신화를 알아야 할 것이다.

* 맺음말

새로운 신화는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주관적인 의미'에서 볼 때, 오래되고 영원한 신화, 기억하고 있는 과거나 상상한 미래가 아니라 '지금'에 대해 시적으로 새로워진 신화다. 즉 '민족들'의 아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알고 있는 깨어 있는 개인들, 이 아름다운 별에서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개개인이 아니라 평등한 전체적 정신의 중심, 모든 이와 함께 나름의 길을 가고 한계가 없는 개인에게 말을 거는 신화다. (313p)

캠벨은 끝까지 정답을 말해주지 않았다. 사실 정답은 없을지도 모른다. '주관적'이라는 단서를 달고 다소 알듯 말듯한 말로 책을 마무리 하고 있다. 자신이 평생을 걸쳐 연구한 결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절대적 진리라고 주장하지 않는 유연하고 열린 마음의 표현일까?
IP *.34.17.71

프로필 이미지
써니
2008.04.27 22:10:16 *.36.210.11
p313

"한계가 없는?"

^-^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이야기로

신을 찜쪄먹는구나.
프로필 이미지
개구쟁이
2008.04.27 23:53:44 *.52.236.185
맞아요...

캠벨은 끝까지 정담을 말해주지 않았어요.



혹시...

모르는게 아닐까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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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5 [04] 내가 바로 그것이다 [7] 홍스 2008.04.28 4260
1424 [04]신화의 이미지 - 조셉 캠벨 [3] 오현정 2008.04.28 2345
1423 [04] 신화의 이미지 - 조셉 캠벨 [2] 정산 2008.04.28 2169
1422 (04) 신화의 이미지-조셉 캠벨 [2] 이한숙 2008.04.28 2425
1421 [04]네가 바로 그것이다 - 조셉 캠벨 [1] 양재우 2008.04.28 2032
1420 [04]동양신화 서지희 2008.04.28 1790
1419 [04] 네가 바로 그것이다 - 조셉 캠벨 [3] 거암 2008.04.28 1946
1418 네가 바로 그것이다_4 [2] 개구쟁이 2008.04.27 2275
1417 [04]네가 바로 그것이다-조셉캠벨 [1] 손지혜 2008.04.27 1796
» [04] 신화와 함께하는 삶 - 조셉캠벨 [2] [2] 최지환 2008.04.27 2284
1415 [04]네가 바로 그것이다-조셉 캠벨 [6] 2008.04.27 2139
1414 [49] 외면일기 - 미셸 투르니에 校瀞 한정화 2008.04.27 2527
1413 [51] 세월이 젊음에게 / 구본형 [6] 써니 2008.04.25 2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