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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27일 23시 16분 등록
네가 바로 그것이다_4

조셉 캠벨 / 박경미 옮김




1. 작가에 대하여
곧 5월이다. 꽃 불. 세상은 또, 활활 피어 오를 것이다. 발맞추어, 멋들어진 간이역 주막의 행사도 한창이다.

해서…… 여기 못생긴 꽃 하나 더.



그 남자

신화 속에 잠든 그는
내가 책을 열면 눈을 크게 뜨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뜨거운 열정과 차가운 이성으로
내 철학을 무찌르는 그 남자
신화를 하는 남자
그리고 종교를, 어떤 때는 철학을, 흥이 나면 예술도 하는 그 남자

상징 오, 은유 오,
알 수 없는 이야기로 운을 떼던 그 남자
꿈 오, 심리학 오, 무의식 오,
현학의 주제를 이어 풀리는 시를 쓰는 그 남자
이것은 무슨 말이 오? 를 묻는 내게,
알알이 동문서답처럼 경멸은 도무지 않는 신사 같은 그 남자

꿈처럼, 인생처럼, 신화를 품에 안은 그 남자
나에게 영웅의 플롯과 신화의 모티프를 외우게 한 그 남자
아름다운 시구(詩句)로 향을 내고
명문(名文)으로 운을 밟고
비극과 희극의 구슬을 굴려
은유의 신비를 들려준 그 남자

*많은 물소리처럼 목소리 한 그 남자
이것 다고, 저것 다고, 쟁이어
치레, 영혼을 들어 보인 그 남자
사랑이 많은 남자
결국 사랑이라며 영혼과 신화를 얽는 남자
안타까운 목소리로, 세상에 “자비요” 외치는 다름아닌 그 남자

유쾌함이 꼬마 같은 그 남자
온 몸으로 이야기하고, 온 정성으로 써 내리는 그 남자
계절로 따지면 봄이요
맛으로 따지면 냉이요
풍채로 따지면 만리성 같은
맑고, 시원하고, 거대한 그 남자

신화를 하는 그 남자
그리고 종교를, 어떤 때는 철학을, 흥이 나면 예술도 하는 그 남자
뜨거운 열정과 차가운 이성으로
내가 책을 열면 눈을 크게 뜨고 무진장 침을 튀기는 그 남자
사랑이 너무 많은 남자
그래 다름아닌, ‘네가 바로 그것’인 그 남자



* 그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요한계시록 1:15)

※ 유용주 시인의 <거머리>, 서안나 시인의 <위층에 사는 그 여자>에서 에너지를 얻음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서문
비록 그의 피부 밑에 나의 신경이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 안에서 내가 고통을 느끼게 된다. (쇼펜하우어) [10]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그랬듯이 의도적으로 본 주제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를 할 줄 아는 노련한 강연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14]
어떠한 종교 전통에 속하는 신자라 하더라도 만일 참된 신자라면, 조셉 캠벨의 글을 읽음으로써 신앙이 감소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들의 성스러운 가르침들과 의례들을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그 전통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1]

제1장 은유와 종교적 신비
그는 은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 친구 존은 아주 빨리 달립니다. 사람들은 그가 사슬처럼 달린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은유입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은유가 아닙니다. 은유는 이렇습니다.” “존은 사슴이다.” [31]
은유를 사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종교적 은유들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기에 자신들은 무신론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32]
신화의 첫 번째 기능은 다음의 세 가지 참여의 방식을 통해 현재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일깨우는 것이다. 즉 자기 밖으로 옮겨놓거나 자기 안으로 깊이 침잠하게 되거나, 아니면 스스로 변화하게 한다. [34]
예술가들은 각자의 분야와 재능에 따라 신화의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 소명을 받았다. 다시 말해 예술가들은 초월적이고 무한하며 풍성한 존재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도록 현대판 은유를 제공한다. [41]

제2장 종교적 신비 경험
신비의 경험은 단지 기대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적 계획을 포기해야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계획이란 두려움과 욕망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계획을 버리면 빛이 다가올 것이다. [61]

제3장 신에 대한 개념들
신이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거나 이름 지을 수 있는 것들을 넘어선 무언가를 지시한다. [66]
신화는 자신의 가장 내밀한 세계를 탐구하는 사람들의 환상으로부터 유래했다. 그리고 문화는 신화에서 유래한다. [77]
할라이(이슬람 신비주의자)는 신비가의 열망을, 불꽃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의 열망에 비유했다. 밤중에 타오르는 등잔불을 본 나방은 그 불꽃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불타올라 새벽녘까지 불빛 주위를 맴돌다 친구들에게로 돌아가서,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말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날개가 아주 못쓰게 되어버린 것을 보고 나방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마 너는 이제 그것을 보지 못할 거야” 이것은 금욕주의자의 상황이다. 그러나 그는 다음 날 밤 다시 돌아가서 유리를 통과하는 방법을 알아내고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과 완전히 하나가 되고 스스로 불꽃이 된다. [84]
인간에게는 동물들이 알지 못하는 삶의 또 다른 질서, 존재의 신비 앞에서 느끼는 경외, 즉 삶에서 느끼는 영적 감정의 뿌리이자 가지라고 할 수 있는 ‘신비스럽고 떨리며 매혹적인 것’에 대한 경외가 있다. [87]
그들은 무리 지어 가는 것은 수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각자 자기가 선택한 가장 어둡고 길 하나 없는 지점에서 숲으로 들어갔다. <성배를 찾아서>에서 (…) 서구의 낭만적 특성은 유례 없는 동경으로부터, 이 세상에서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무엇인가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나온다. [91]

제4장 종교적 상상력과 전통신학의 규칙들
영웅이란 결국 운명이 어떻게 되든 상관 없이 자신들의 행동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99]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하며, 그것들을 넘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을 때에만 진정으로 알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단 논박 대전>) [107]

제5장 유대-기독교 전통의 상징들
은유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은유는 사실이 아님을 아는 사람들,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은유가 사실이 아님을 아는 사람들을 ‘무신론자’라고 부르며, 은유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종교인’이라고 생각한다. [119]
플라톤의 <향연>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 남성-남성, 여성-여성, 남성-여성 [137]

제6장 유대-기독교 영성의 상징들에 대한 이해
제자와 구루의 일화 [183]
그리스와 기독교 전통에서는 어느 민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개인이 특정한 형태의 고백을 통해 영혼의 변화를 이룬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187]
융은 (…) 인간의 경험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네 가지 기본적인 심리학적 기능 (…) 그것은 이해 기능인 감각과 직관, 그리고 판단과 평가 기능인 사유와 감정이다. [198]

제7장 질의응답
인간이 법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법이 인간을 섬겨야 한다. [211]
1201년 고트프리트 폰 스트라스부르Gottfried von Strassburg가 쓴 궁정 서사시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는 고통과 기쁨은 삶에 고유한 것이며, 이 둘은 서로 분리할 수 없다는 말로 시작된다. [215]
아픔도, 고뇌도, 그리고 아픔과 고뇌에 수반되는 모든 것도 삶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216]
결혼해서 한쪽이 희생할 때 그는 상대방에게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다. [216]
결혼이 전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아니라면, 당신은 결혼하지 않은 것이다. (…) 결혼은 긴 연애가 아니다. (…) 결혼은 일종의 시련이다. (…) 시련은 관계를 위해 자아를 희생하는 데 있다. [217]
욕망은 더 큰 욕망에 의해 치유되지 않는다. [229]
마음이야말로 인간성의 출발점이다. [230]
지옥은 자신들의 자아와 이기적인 가치들에 사로잡혀서 초인간적인 은총에 자신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가리킨다. [230]

제8장 대담
신화는 거짓을 뜻하는 말로 잘 쓰이지만, 실제로는 진리를 표현하는 영구적인 수단이다. [237]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경외감입니다. [250]
설교자들은 상징들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대신, 자신들이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가톨릭 전례의 파괴가 그처럼 끔찍한 재난이 되었습니다. [253]

역자 해설
오늘날 몇 가지 두드러진 형태로 나타나는 세계 종교들은 수천 수만 년에 걸친 인류의 종교 경험이 녹아 들고 응축된 결정체이다. [262]
하나님과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르지만 역사 속에서 만난다. (…) 자연이 아니라 역사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다. [273]
은유는 객관적으로는 결코 알 수 없고, 단지 순간적으로 얼핏 볼 수 있을 뿐인 진리를 독자들에게 은밀하게 보여줌으로써 그 세계를 동경하도록 만든다. 이 때문에 은유는 종교적 언어로서 매우 적절하며, 무릇 종교적 언어란 본질적으로 은유적이다. [279]
결국은 인간 자신이 역사적 존재이고, 이것은 인간이 어떤 보편적인 종교인이 되기보다는 특정 종교에 귀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284]
종교와 그 상징들이란 인간 경험의 심원하고도 불가해한 경지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 경험의 무게는 존중되어야 한다. [285]




3. 여신(타고 남은 불기운)
거세게 타오르고, 많은 잔해를 남긴 책이다. 읽고 나니, 생각이 참 많아졌다.



이 책은 조셉 캠벨이 직접 쓴 것은 아니다. 그의 강연 테이프와 저작, 기고, 인터뷰 따위를 바탕으로 유진 케네디가 재구성한 것이다. 캠벨이 사망한지 1년 후인 1988년부터 ‘조셉 캠벨 재단’이 캠벨의 신화 연구를 이어 왔는데, 이 책이 그 첫 번째 결과물인 셈이다.

구성은 대략 다음과 같다. 총 8개의 장(章)으로 되어 있으며, 앞뒤에 각각 서문과 역자해설을 두어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배려했다. 특별히 ‘7장 질의 응답’과 ‘8장 대담’은 책의 본문이라기 보다는 보너스 항목처럼 더해진 것이다. 질의 응답은 여러 강연에서 나왔던 질문들을 정리한 것이고, 대담은 유진 케네디 자신이 캠벨을 인터뷰한 내용이다.

얼개를 더 크게 잡아보자. 8개의 장은 다시 세 개의 소제목으로 합쳐질 수 있다. 1장에서 4장까지가 1부, 5장과 6장이 2부, 그리고 7장과 8장이 3부다. 주제에 따라 내 멋대로 구성해 봤다.

1부: 신화란 무엇인가 – 은유로 이해하기 (1장~4장)
2부: 유대-기독교의 오랜 오해 풀기 – 역사를 넘어서 (5장, 6장)
3부: 그대를 위한 디저트 – 캠벨 대면하기 (7장, 8장)

멋대로 달아 둔 소제목에서 보이듯, 저자가 책을 통해 하려는 바는 두 가지다. 1)인간에게 신화란 무엇인가? 2)유대-기독교 전통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무엇인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보여주려는 것이 저자의 의도이다.

본격적으로 논의가 진행되기에 앞서, 신화 이해의 큰 틀로 제시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은유’다. 캠벨은 심지어, 신화를 이렇게 정의하기도 했다. “신화는 은유입니다.”

다음을 읽어보자.

그는 은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 친구 존은 아주 빨리 달립니다. 사람들은 그가 사슴처럼 달린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은유입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은유가 아닙니다. 은유는 이렇습니다.”
“존은 사슴이다.” [31]

이것은 본문에서 가져온 것이다. 어느 방송사에서 있었던 대담 중, 호전적으로 질문공세를 하던 사회자에게 은유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어떠한가? 캠벨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겠는가? 그렇다. 그는 은유가 품고 있는 ‘상징의 의미’가 무엇인지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허무맹랑한 영웅들의 모험담처럼 보이는 신화. 그러나 그 내연에는 은유로 감춰진 ‘상징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 말이다.

가령, “존은 사슴이다” 라는 말의 의미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어디, 그에게 뿔이 있나 보자” “없네?” “어디, 그가 네 발로 다니나 보자” “아니네?” “어디, 그의 온 몸에 빨간 털이 있나 보자” “없네!” 라고 하는 것은, 화자의 의도를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임에 다름이 아니다. 화자가 의도한 바는 ‘사슴’이라는 ‘상징’을 들어 ‘빠르게 달리는 존’이라는 ‘의미’를 명쾌하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캠벨에 따르면, 이것이 은유이고, 이 은유가 신비롭게 기술된 신화의 의미를 옳게 읽는 유일한 방법이다.

준비 됐다. 이렇게 검이 갖춰지고 나면, 그는 날카롭게 베기 시작한다. 이제부터는 보기 좋게 베어 흩은 상징의 조각들을 모아 아구를 맞춰보자.

1부: 인간에게 신화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의 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자비’다. 캠벨은 이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 두 개의 소재를 사용한다. 하나는 ‘신화의 기능’이고, 또 하나는 ‘신(神)의 의미’이다. 차례로 살펴보자.

첫 번째 소재에서, 그의 논리는 대략 이렇다. “신화는 은유로 쓰여졌다. 그러므로 신화의 내연을 이해하려면, 상징의 문법인 은유를 알아야 한다. 그것이 외연의 구름을 걷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렇게 읽힌 신화는 4가지 기능을 한다. 첫째, 경외감을 주어 신의 존재를 발견케 한다. 둘째, 그 존재의 질서, 즉 일관된 상을 제시한다. 셋째, 해당 공동체의 도덕•질서를 강화한다. 넷째,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삶을 통전적(처음부터 끝까지 널리)(자신-사회문화-우주-우주너머의 신비)으로 이해하게 한다. 그리고 이 4가지 신화의 기능은 인간으로 하여금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다시 말하면 서로가 결국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이것이 바로 ‘네가 바로 그것이다’ 라는 ‘사랑과 자비’의 실천으로 이어진다.” 여기까지다.

바로 두 번째 소재도 살펴보자. 곧 이어, 캠벨은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간다. 첫 번째 소재에서 언급된 신화의 첫째 기능, 바로 ‘신(神) 경험’이다. 인간은 알 수 없는 경외감의 존재를 느껴왔고, 역시 그것을 신화로 표현해왔다. 하지만 이 신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캠벨은 칸트의 ‘초월적 미학’ 관념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단 논박 대전>의 구절들을 인용하며, 인간이 가진 능력으로는 신의 초월성을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신은 신이기 때문에 인간의 경험체계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결국, ‘우리 몸은 의식의 매체일 뿐이고 핵심은 영혼이라는 것’으로 이어진다. 신은 마치, 외부에 존재하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지만, 실은 내부에 존재한 영혼과 상통한다는 말이다. (어지럽지만 좀더 따라가보도록 하자) 이제 새로운 깨달음이 주어진다. 모든 개체는 신이라는 공통의 경외감을 가지며, 실은 그것이 스스로의 영혼이라는 것. 즉, 모든 인간이 가져왔던 신 경험이 결국은 자신의 영혼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이 깨달음 역시, 우리는 하나, ‘네가 바로 그것이다’ 라는 ‘사랑과 자비’의 실천으로 이어진다.

여기까지가 1부의 개괄이다. 신화는 해당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고, 궁극적으로는 ‘네가 바로 그것이다’ 라는 말의 의미처럼, 내가 그인 양, 그가 나인 양, 서로를 동일시 하며 희생적으로, 애틋하게, 하나처럼 살게 하는 ‘규합의 도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화의 기능, 특별히 그 첫째 기능인 신 경험을 살펴봄으로써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에게 신화란?” 의 질문에 대한 캠벨의 대답은 ‘연민’ ‘자비’ ‘사랑’인 셈이다.

바야흐로, 이야기는 ‘유대-기독교의 오랜 오해 풀기’ 라는 2부로 넘어온다. 훌륭한 논설문의 구조가 늘 그렇듯, 이 책 역시 단단한 주장은 방패처럼 앞쪽에서 휘두르고 핫 이슈는 창처럼 뒤쪽에서 질러댄다. 마치 온 몸을 갑옷으로 두르고, 거대한 방패와 첨예한 창을 휘두르는 중세의 기사들처럼…… 전투적이다.

캠벨의 책을 몇 권 읽어보면, 그가 유대-기독교 전통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서양인이지만, 오히려 동양의 종교가 가진 함의(含意: 논리나 뜻)쪽으로 양껏 치우쳐있다.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나 역시 희미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다른 책들에서는 이런 입장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동양에 대해 향수를 품고 있다는 것’ 정도가 행간을 통해 읽힌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이 책, <네가 바로 그것이다>에서는 그 입장이 분명했다. 그의 입장은 대략 이런 것이다. “오늘날의 유대-기독교 전통은 은유로 읽혀야 할 것이 역사로 읽혔을 때, 신화(종교)가 어떻게 타락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은유를 역사로 읽으며, 그 보편성과 절대성을 주장할 때, 신화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게 되고, 더러운 착취의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유대-기독교 전통이 틀렸다는 입장이다. (그가 찌르기 시작했다)

새삼스럽지만, 그의 입장은 일견 옳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종교라기 보다는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부정과 타락이 판을 치고, 왜곡과 곡해(사실과 다르게 이해함)가 만연하다. 진실의 진영에서는 더 이상 자신의 이름을 떳떳이 내세우기가 힘들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역자해설에 주지하고 있는 옮긴이의 말처럼, “그 경험의 무게를 존중하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그의 주장은 위험한 발언이 되고 말았다. 우리에게는 성 바울이나 성 요한, 성 어거스틴 같은 위대한 영혼의 깊이에 대해, ‘정중히’ 고심해봐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그가 말하는 ‘유대-기독교 전통의 오해’(은유와 역사)가 무엇인지는 잘 알았다. 이어지는 내용은 그가 ‘어떻게 이 오해를 풀어가고 있는가’가 될 것이다. 이것은 간단하다. 그가 비교 신화학에서 늘 사용하곤 했던, 플롯과 모티프의 비교를 통해서이다.

세계 신화들에서 발견되는 유사 모티프들이 유대-기독교 전통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아브라함, 모세, 요셉 따위의 성경 인물들의 이야기 역시, 신화적 플롯을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책에서 보여주려는 내용이다) 이것은 유대-기독교 전통도 다른 신화들처럼, 역사가 아닌 은유로 읽혀야 하는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증한다는 것. 따라서 오늘날의 종교 지도자들이 이스라엘의 역사로 풀고 있는 성경의 줄거리도, 실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은유적 상징’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들은 여느 신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유대-기독교 전통에서도 신과 인간의 동일시 체험을 통해 스스로의 영혼에서 신비로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결국 모든 인간이 연결되어 있다는 하나로의 귀속, 즉 ‘네가 바로 그것이다’라는 ‘자비’의 깨달음으로 우리들을 인도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제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면 논의는 마무리된다. 중요한 부분이다. (언제나 마지막이 중요하다) 그것은 바로 ‘연결’이다. 즉, 1부(신화는 자비이다)와 2부(유대-기독교 전통의 오해는 은유를 역사로 잘못 읽은 것이다)의 내용이 어떻게 연관을 맺고 있는지를 알아보자는 얘기다. 바로 가보자.

명쾌함을 돕기 위해, 잠시 유진 케네디가 되어보자. (사실은 조셉 캠벨이 되는 것이다) 이 책을 쓰고 있는 그의 논리 흐름은 어떤 것일까? 이런 것이 아닐까?

“신화는 은유이다. 은유를 통해 신화를 들여다보면, 그 4가지 기능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우리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서로를 향한 ‘연민, 자비, 사랑’의 근거가 아닌가? 이 깨달음을 ‘네가 바로 그것이다’ 로 이름하자.”

(계속된 흐름) “특별히 ‘신 경험’ 부분이 마음에 든다. 우리가 신이라 부를 법한 그 초월적 신비로움은, 결국 인간 스스로의 영혼과 같다는 것 말이다. 동양의 종교는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신과 인간의 동일시, 이것이 그들이 궁극으로 추구하는 바가 아닌가? 그리고 이렇듯 동일시 된 인간의 영혼들이 결국은 모두 하나라는 것. 그래, 우리는 하나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

(조금만 더) “앗!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유대-기독교 전통이 추구하는 바는 ‘신과 인간의 동일시’가 아니라, ‘신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 설정’이 아닌가? 이렇게 되면, 논리가 흔들린다. ‘자비’의 근거는 인간 개체가 연결되어 하나가 된다는 ‘동일시의 논리’인데, ‘관계 설정의 논리’에서는 그 동일시의 내용을 찾을 수가 없지 않은가? 무엇이 문제지? 유대-기독교 전통 역시 동양의 종교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신화가 아닌가? 분명, 여기서도 동일시의 논리로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근거를 찾아보자!

(마지막) “유래카! 유대-기독교 전통의 문제는 은유를 역사로 해석해 왔다는 것이다. 신과 인간간의 올바른 관계 설정이라는 테마에는, 반드시 인간 역사에 신이 개입한다는 내용이 가미되기 마련이다. 종교인들은 그것이 은유인지도 모르고, 역사라 하며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이다. 무지한 사람들. 그건 역사가 아니라 은유다. 결국 유대-기독교 전통도 동일시의 논리였는데…… 이걸 밝혀보자.”

(진짜 마지막) “어떻게 하지? 그래. 우선 성경에서 신화적 모티프와 플롯들을 찾아보자. 거기에도 분명, 여느 신화들과 유사점을 보이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그걸 논증해 보이는 것이다. ‘이것 봐라, 성경도 여느 신화들처럼 은유로 읽혀야 하는 상징에 불과하다. 그대들이 떠드는 것처럼 역사적이고, 과학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란 말이다’ 이렇게 말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곧 알게 될 것이다. 성경 역시 ‘네가 바로 그것이다’ 라는 가르침을 전하는 일종의 신화라는 것을.”

유진 케네디(조셉 캠벨)가 되어 보니 어떤가? 그가 이 책에서 무엇을 하려 했는지 알겠는가? 그렇다. 그는 단순히 유대-기독교 전통을 깎아내려, 흉을 보려 했던 것이 아니다. (일각에서는 그런 비난이 계속되어 왔다) 그의 뜻은 좀 더 높은 곳에 있었다. 그가 하고자 했던 바는 늘 그랬듯, 신화로의 규합이었다. 종교가 되었든, 철학이 되었든, 동요나 전설이 되었든, 이런 것들은 결국 캠벨식으로 보면 인간의 영혼에서 기원한 하나됨의 발로이다. 이것이 다름아닌 신화이고, 이것이 시사하는 바가 다름아닌 “네가 바로 그것이다” 라는 자비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다 됐다. 캠벨의 이야기는 마무리가 된 셈이다. 끝으로, 사견을 더하고 싶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이 말은, 나 역시 성경의 내용을 은유가 아닌 역사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성경에는 분명, 역사적인 내용이 있으며, 은유적인 내용도 있다. 창세기에서 말라기에 이르는 구약의 대부분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술한 역사서이다. (나는 그렇게 알고 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상당부분 은유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은유는 접한 적이 별로 없다) 신약의 대부분을 기술한 바울은 가히 천재적으로 은유 했다. 상징화된 그 뜻은 때마다 새롭고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뿐인가? 잠언, 시편, 아가 따위의 시는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경지의 운율, 대구, 묘사, 언어유희를 보여준다. (덕을 많이 보고 있다) 성경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묘사인데, 차근히 읽다 보면 사진보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사진은 전할 수 없는 상상력의 도움을 받기 때문이다. (사진이 상상력과 무관하다는 말이 아니다) (사진과는 또 다른 상상력을 제공한다는 말이다) 마치, 보고 듣고 만지는 것처럼 읽힌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부가적인 내용일 뿐이다. (글 쓰는 이의 입장에서 적어 보았다) 옮긴이가 그랬던가? ‘그 경험의 무게’를 존중해야 한다고. 캠벨이 아무리 논리 정연하게 논증하였다 하더라도, 나의 종교를 뒤집지 못했던, 아니 살짝 건드리지도 못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그것은 바로 경험이다.

그는 종교의 체험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억측처럼 들리겠지만,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그 체험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 체험이 바로 기독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결혼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부부가 되어봐야 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결혼생활과 관련된 책을 백 권 읽고, 여러 편의 논문을 쓴 사람과(물론 독신이다), 진지한 결혼생활을 해온 중년 부부가 있다면, 당신은 누구에게 달려가겠는가? 따라서, 그가 기독교에 대해 하는 말에는 아무런 권위가 없다. 그저 넘겨짚고 있을 뿐이다. 아마 어떤 이들은 그의 글을 읽으며 코웃음을 치고, 때에 따라서는 파안대소 했을 것이다.

묘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만 두자. 그저, 기독교는 그리 말랑말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주었으면 좋겠다. 지난 2천년 동안 수 천 만 명의 순교자를 배출해 온 전투적인 종교이다. 그들이 성자라는 이름으로 죽어갔던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기독교의 경험. 내가 본 바로는, 캠벨은 그곳으로 한 발짝도 내디디지 못했다.

묵직한 이야기를 하고 난 뒤라, 사족의 모양을 띠게 되긴 했지만, 꼭 넣고 싶은 내용이 있어 한 단락만 더 보탠다. 캠벨이 동일 모티프라고 성경에서 끌어온 예들이 왜 그리 하나같이 억측인지 모르겠다. 또한 아브라함, 모세, 요셉의 이야기들을 신화적 플롯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나는 오히려 캠벨 덕에 모르고 있던 내용을 추가로 알게 되었다. 성경은 신화의 플롯과는 다르다는 것을. 캠벨이 끌어온 예는 허무맹랑했으며, 되려 그 반대였다. 성경과 신화는 일치하지 않았다.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캠벨은 논리가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이상한 걸까?




4. 내가 저자라면
오! 박경미...... 님……
‘박경미’ 라는 키워드로 검색엔진을 돌렸더니, 몇 사람의 인물정보가 떴다. 거기에는 내가 찾고 싶었던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 이화여자대학교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부 기독교학전공 교수, 1959년 9월 30일 생, 박경미.

웹 페이지에서 제공하고 있는 정보는 이게 전부였다. 키워드를 바꾸었다. ‘박경미 + 옮김’ 그러자 쓸만한 정보 몇이 더 튀어나왔다.

격월간 ‘녹색평론’ 62호, 서평 <죽을 수 밖에 없음의 의미>, 박경미.
서평 <살아있는 종교>, 박경미
<한국인을 위한 최신연구 신약성서 개론>, 박경미 지음.
토머스 볼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 박경미 옮김.
리차드 A. 호슬리의 <갈릴리>, 박경미 옮김.
조셉 캠벨의 <네가 바로 그것이다>, 박경미 옮김.

다음은 링크를 따라, 그와 관련한 기사나 그가 쓴 서평을 읽어본다. 그의 종교관과 신화에 대한 입장, 번역이 아닌 집필에서 드러나는 그의 문장, 논리전개. 운이 좋다면, 그의 사생활이나 꿈, 철학 따위를 건질 수도 있다.

내가 이런 일들을 왜 했을까? 눈치가 있는 독자라면, 지금쯤 이렇게 읊조리고 있을지 모르겠다. “알았으니까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시지?” 그렇다. 역자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역자에 대해 궁금해진 것이다. 역자를 칭찬해보자. 자그마치 세 가지나 된다.

하나. 번역이 깔끔하다. 아주 잘 읽힌다. 영문의 특성상 뒤에서부터 덮어 씌어지는 표현들을 잘 다스려 풀어주었다. 애초부터 한글로 쓰여진 책처럼, 주어에서 동사로 달려가는 힘찬 문장들이 마음에 든다.

둘.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번역도 집필과 마찬가지로 창조의 작업이다. 창조에는 주관이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다. 책 안에 역자의 공간을 따로 할애하고, 자신의 의견을 개진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독자에게 지도가 되어주고, 뉘앙스라는 미묘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간혹, 인터넷 검색이면 수 분만에 찾을 수 있는 평이한 내용으로, 그것도 한 두 페이지 슬쩍 실어 놓는 역짜! 가 있다. 제발 그러지 말자. ‘객관성 확보’ 운운은 하지도 말라. 객관성을 확보하는 공간은 ‘본문’이라고 해서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가? 핑계다. 성의를 가지자.

잠시 흥분했다. 논의로 황급히 돌아오자. 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역자의 참여가 돋보인다. 끝 부분에 더해진 ‘역자해설’에는 책의 전반적인 줄거리와 저자의 분석방법, 논리의 흐름 따위를 짚어주고 있으며, 나아가 저자의 논리에 대한 자신의 입장까지 밝혀두었다. 책을 시작하기에 앞서 읽어본다면, 숲과 나무를 보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책을 마무리하면서 읽어본다면, 읽고 나서 몽~ 하고 사라져버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셋. 친절하다. “역자의 친절함은 이런 것이다” 하는 것을 새삼 느꼈다. 원서의 형식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라면, 괜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원서를 보지 못했으니) 간간이 사용된 하이라이트 편집이 마음에 든다. 본문의 특정 구절을 가져다, 책의 반 페이지를 할애하면서까지 커다란 폰트로 명시해준 부분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약간 유치하기도 하지만, ‘효과적인 내용전달’이라는 측면에서 잘 먹혔다. 덕분에 좀 가벼워 보이기는 하지만, 근엄한 척 하며 캄캄하게 편집한 <신화의 세계>보다는 훨씬 나았다.

개구쟁이의 생산적 책 읽기
예전에 세이노라는 사람이 쓴 컬럼에서 이런 내용의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는 법을 알려주마. 처음에는 그 분야의 가장 쉬운 책을 찾아 읽는다. 만화책이면 더 없이 좋다. 그렇게 쉬운 책 위주로 몇 권을 더 본다. 그러면 어떤 책을 읽어야 할 지가 보일 것이다. 그때부터는 자신의 판단대로 책을 찾아본다. 그렇게 몇 권을 더 읽다 보면, 내용을 잘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빠른 시일 내에 읽어 내리는 것이다. 1주일 동안 3권을 읽는 것이 6개월 동안 6권을 읽는 것 보다 훨씬 낫다. 그리고는 지나온 책들을 돌아본다. 읽은 것 중에, 자신이 생각하기에 잘 된 책이라 할 만한 것이 몇 권이나 되는가? 5권이면 충분하다. 그대는 이미 그 분야의 전문가다.”

공감되는 내용이기에 몇 번 따라 해 보기도 했던 방법이다. 이번에 새삼 느낀 것이지만, 이 방법은 정말 먹힌다. (내가 신화 전문가가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이번 달이 시작하기 전에는 신화의 ‘신’자도 몰랐던 내가, 이제는 ‘원소적 관념’이네, ‘영구불변의 철학’이네 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습지만, 나는 이 책을 읽는데 별(?) 무리가 없었다. 한달 사이, 벌써 4권째다. (5권을 읽은 분들은 그야말로 장난이 아닐 것이다) 매우 친숙하게 읽혔다. 물론, 캠벨의 다른 책 보다 쉽게 쓰여졌고, 역자의 기지가 빛났던 책이긴 하다. 그러나 그 내용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신화란’ ‘유대-기독교 전통의 문제점’ 척 보아도 골치 아픈 주제이지 않은가?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려면, 꽤나 전문적인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차크라의 여섯 단계, 칸트의 초월 개념, 꿈과 무의식, 그리고 심리학 간의 상관관계, 모티프와 플롯이 시사하는 바, 잠깐씩 소개되는 여러 나라의 신화들. 그렇지 않은가?

이집트의 오시리스, 힌두교의 크리슈나, 멕시코의 케찰코아틀 따위의 영웅들 이야기가 나오면, 오히려 귀를 쫑긋 세우는 내 모습을 보면서, 한 분야에 집중해서 책을 읽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 방법인가를 몸소 체험했다. 피터 드러커도 그랬다고 한다. 한 분야를 선정하여 1년 동안 책을 읽고 다음 1년 동안 집필을 해서 내 놓는 일을 평생 해 왔다고. 그렇게 2년에 한 권씩 대작을 써냈던 것이다. 이름하여 생산적 책 읽기다.

넘겨 짚기, 그 참을 수 없는 허술함에 대하여
지금부터는 신랄하게 비판을 해볼 셈이다. 신화학의 거장이니만큼 예의는 지켜드릴 셈이다. 흥!

저자가 책을 통해서 하고자 했던 바는, “신화는 ‘자비’이다” 라는 명제가 참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의 논리 흐름은 대략 이런 것이다.

“은유라는 해석 방법으로 신화를 살펴보면, 인간은 신비로운 존재에 대한 경외감을 신이라는 매체로 표현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을 좀더 깊이 성찰해보면, 신으로 표현된 것이 사실은 인간 각자가 가진 영혼과 같은 것임이 드러난다. 따라서 모두가 섬겨야 할 공통의 신은 각자의 영혼인 셈이고, 그것은 결국 하나이다.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인 깨달음이 더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지고, 따라서 신화가 시사하는 바는 서로를 하나로 여기는, 서로에 대한 ‘자비’이다.”

“동양의 종교는 이것을 잘 보여준다. 동양의 종교가 추구하는 바는 신과 인간의 동일시이다. 밖에서 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자비’의 깨달음과 일맥 상통한다. 그러나 유대-기독교 전통은 좀 다르다. 이들이 추구하는 바는 ‘신과 인간간의 올바른 관계 설정’이다. 신은 먼 곳에 떨어져 있는 절대자이고, 인간은 피조물로써 신의 요구에 부합해야 한다. 이것은 ‘자비’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다.”

“이런 오해가 생긴 이유가 있다. 은유로 읽어야 할 신화를 역사로 읽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밝혀 보이겠다. 6장에서 집중적으로 이야기할 셈이다. 유대-기독교 전통의 상징들이 얼마나 신화와 맞아 떨어지고 있는지를. 그리고 독자들은 무릎을 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역시 “신화는 ‘자비’야” 하며.”

저자의 논리 흐름 중, 내가 초점을 맞출 부분은 바로 마지막 6장 부분이 되겠다. 저자는 유대-기독교 전통과 신화와의 유사성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예시를 들어오고 있는데, 대부분이 억측 내지는 곡해(사실과는 다른 이해)였음을 밝히고 싶다.

곡해인 부분을 먼저 보자.
145페이지. 본문에서 그대로 가져온다. “유아 유배에 관한 모든 이야기들은 아이를 데려다 기른 가족이 본래 그 아이의 실제 가족보다 못한 것으로 그린다. 그러나 한 가지 예외가 있는데, 바로 모세의 이야기이다.” 이건 저자 스스로 밝힌 것이다. 모세의 영웅일기는 신화의 플롯과 다르다. 모세는 서민의 가정에서 파라오의 집안으로 유배되었다. 단지 아이 유배라는 플롯이 같을 뿐이다.

160페이지. 신화의 플롯은 처녀가 아이를 낳는 모티프를 제공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처녀인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는 것과 같은 모티프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어지는 플롯은 전혀 다르다. 신화의 플롯은 아이가 성정하면서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것이다. 그렇게 모험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아버지와 자신이 동일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모험은 어느 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면서부터 시작된다.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아닌가? 캠벨은 어떤 모티프를 설명하면서, 맞는 부분과 맞지 않는 부분 중에서 맞는 부분만 부각시키는 일을 자주하고 있다.

다음은 억측인 부분이다. 이건 너무 많다. 몇 가지만 가져와 보자.

186페이지. 그리스도가 태어난 곳이 베들레헴의 동굴이며, 이곳은 아도니스가 탄생한 동굴과 같은 상징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태어난 곳은 동굴이 아니라 마구간이었고, 설령 마구간의 어둡고 침침함을 동굴의 그것과 같은 상징으로 읽었다 하더라도, 끼워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 하필이면 동굴인가? 신화의 모티프라서?

187페이지. 히브리민족의 출애굽에 대한 것이다. 요셉이 우물을 통해 이집트에 들어가게 되었고, 나올 때는 홍해를 지나게 된다는 내용이 신화의 공통 모티프인 물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가는 내용 중에 잠깐 등장하는 우물이란 소재를 부각시킨 것으로 보인다. 요셉이 이집트로 가게 된 이유는 형들의 시기심 때문이며, 우물에는 잠깐 갇혀 있었던 것뿐이다.

이런 식이라면, 뭐든 끼워 맞출 수 있지 않을까? 변경연의 대문이 파란색인 것은 윈도우의 기본테마가 파란색인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것은 PC사용자들의 피로도를 고려한다는 제작자의 공통된 의도이다. 이렇게 말이다. (헉, 이게 맞으면 어쩌지)

188페이지. 그리스도를 유대 지도자들에게 팔아 넘긴 유다에 대해서, 가장 성숙한 사람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런(그리스도를 배신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던 유일한 사람이라면서 말이다. 이것은 영웅과 대립하는 인물로써 마지막에는 화해가 이루어지는 신화의 플롯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다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팔아 넘겼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다가 자살했으며, 지옥으로 내려갔다. 성숙과 자살, 화해와 지옥은 어정쩡한 조합이지 않은가?

189페이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달려 죽었을 때, 로마의 군병이 그의 가슴을 창으로 찌른 것은, 아도니스가 멧돼지에 받혀 죽고, 오시리스가 세트의 멧돼지 사냥터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내용과 같은 상징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멧돼지의 어금니가 뾰족한 창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무슨 논리가 있는지 모르겠다. 단지 뾰족하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지 않은가? 게다가 아도니스는 어금니에 당한 것이 아니라 받혀 죽은 것이고, 오시리스는 멧돼지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그 사냥터에 갔다가 변을 당한 것인데, 이것을 왜 얽고 있는지 모르겠다. 뾰족한 건 멧돼지의 어금니 말고도 많지 않은가?

박학다식을 무기로 설레 발을 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쉴새 없이 쏟아지는 이야기들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그래” “그래” 하고 넘어가다 보면, 꼭 맞는 이야기처럼 되어버리는 것이다. 캠벨은 논증의 재료를 좀 더 철저하게 준비해야 했다. 벌써 사상누각처럼 한쪽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고 있지 않은가?

오해의 소지
‘유대-기독교 전통’이라는 표현에서도 드러나듯이, 저자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한 묶음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리고 간혹 간, 가톨릭도 이 묶음에 포함시킨다. 이 차이에 대한 개념이 전무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불친절한 처사이다. 그는 본문에서 이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정도는 언급해 주어야 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조금 다릅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이런 내용을 밝히는 데, 지면을 할애하지는 않을 셈입니다. 여기에서 비롯되는 오해들은 독자가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를 규명하고 있는 자료를 찾아보시길 권합니다.” 이렇게 말이다.

여기서 잠깐 그 차이를 짚고 넘어가자.

유대교는 히브리민족, 즉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이다. 기독교와의 가장 큰 차이는 1)신약을 받아들이는가 그렇지 않은가 2)이방인을 받아들이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다. 유대교는 구약만을 성경으로 인정하며 기독교는 구약과 신약을 모두 성경으로 인정한다. 따라서 신약의 중심인물인 예수와 바울 및 열 두 제자는 유대교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다. 기독교는 구약의 이사야서에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예수였다고 믿으며, 유대교는 메시아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믿고 있다. 또한 유대교는 오직 모계 혈통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민족만의 폐쇄된 종교이고, 기독교는 그 근간이 예수라는 유대인이긴 하지만,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도 그 문이 활짝 열려 있다. 누구든 예수를 인정하는 자는 기독교로 들어갈 수 있다. (유대인, 히브리민족, 이스라엘 민족은 모두 같은 말이다)

카톨릭은 BC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시작된 것이라 보면 무방하다. 초대교회의 역사가 시작된 BC40년부터 313년 밀라노 칙령이 내려지기까지 많은 박해가 있었고, 사람들은 동굴이나 산속에 숨어서 신앙을 지켰다. 그러다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인정한다는 선언(밀라노 칙령)을 하면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게 된다. 이어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아타나시우스의 교리해석이 정통으로 인정되고, 카톨릭은 그 모양새를 갖추어가기 시작한다.

기독교와 카톨릭은 이때부터 신교와 구교로 나뉘어 대립양상을 띠게 되는데, 사실 이 대립양상이라는 것이, 대립이라 하기에는 썩 알맞은 것은 아니었다. 교황을 중심으로 한 카톨릭은 강력했으며, 기독교는 여전히 약했다. 제도권과 결탁한 카톨릭은 조금씩 변질되어 타락했고, 종교라는 이름으로 끔찍한 일들을 저지르는데 최 선봉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마녀사냥, 십자군전쟁, 면죄부판매 등) 기독교가 지금과 같은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은 불과 200년이 채 되지 않는다.

기독교와 카톨릭의 가장 큰 차이는 다음 세 가지이다. 1)교황제도 2)동정녀 마리아의 신성인정 3)고해성사. 위의 세 가지는 모두 카톨릭에서만 행해지고 있는 교리이다. 기독교는 오직 성경의 내용만을 교리로 인정하며, 카톨릭은 교황의 발언에도 성경교리와 같은 권위를 둔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신과 직접 대면하며, 카톨릭은 교황, 혹은 교부(신부)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신과 대면한다.

역사가 왜!
내가 읽은 몇 안 되는 묵직한 책 중에, 아직도 큰 울림으로 남아 서성대는 녀석이 하나 있다. 바로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이다. 아무리 매 마른 사람이라도 이 책을 읽으면,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나라에 대한 호국의 샘이 터져, 한동안 ‘애국애국’ 하며 침을 튀기게 된다.

이 책에서 얻은 것은 굉장히 많았다. 한국 역사의 개괄을 정리할 수 있었고, 한국사에 흐르는 뜻이 무엇인지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잊혀지지 않는 것은 역사가의 사명 부분이었다. 선생이 쓴 내용을 인용한다.

“역사가의 자격은 그 기억에 있지 않고 판단에 있다. (…) 바름이란 내게 좋기 위하여 역사적 판단을 구부리지 않는다는 말뿐이지, 도대체 판단하기, 해석하기를 금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하고 강조하는 내용은 역사를 뚫어보는 ‘해석의 힘’, 바로 ‘뜻’이었다. 우리들 각자는 모두 역사가로서, 바른 ‘뜻’을 가지고 역사를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역사를 바르게 읽을 수 있는 ‘뜻’을 기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선생이 제안하는 내용은 두 가지였다. 1)시대정신을 가질 것 2)잘된 역사가의 잘된 역사책을 읽을 것.

조셉 캠벨이 쓴 몇 권의 책을 읽으면서, 느닷없이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가 생각 났다. 어떤 의미에서 캠벨은 역사보다는 인간의 심리를 믿는 사람이다. 인간의 내면에 감추어진 신비로운 힘이 진리라고 믿는다. 이에 반해 함석헌 선생은 이렇게 쓰고 있다.

“산 진리를 들어 보여주는 이는 그 전하는 진리가 산 것이요, 현실의 인생과 사회에 대해 산 교섭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늘 그 시대정신을 역사적으로 붙들기를 잊지 않는다. (…) 진리는 반드시 역사적 설명으로 시작된다. (…) 그러므로 그들은 그 진리의 주장을 날카로운 역사비판으로 시작하여야 한다.”

나는 조셉 캠벨보다는 함석헌 선생 쪽으로 쏠린다. 캠벨은 은유를 역사로 읽고 있다며 유대-기독교 전통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만약 종교가 진정으로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역사적 함의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솔직히 역사 없이 진리가 기술 될 수 있다는 데에는 도무지 손을 들어줄 수가 없다.

반역자로 몰렸던 사육신의 절개, 애매한 누명을 썼던 충무공 이순신, 모함에 의해 고문당해 죽은 충민공 임경업. 역사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이것이 너무 요원하다면, 가까운 예를 들어 보일 수도 있다. 5.16은 구테타인가 혁명인가? 4.19는 폭동인가 의거인가? 12.12는 혁명인가 사태인가? 역사는 이들을 무엇이라 명칭 했는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응부, 유성원, 이순신, 임경업. 불의의 칼에 스러져간 이들의 넋은, 결국 역사의 판단 앞에 애틋한 위로를 받고 있지 않은가?

종교가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반드시 역사적이어야 한다. 역사의 평가를 받지 못하는 종교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화에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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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8.04.28 00:33:59 *.127.99.34
굉장한 책읽기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책을 집중해서 읽을 수 있지요, 개구쟁이의 열심을 작동시키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하군요.
나도 오래 진지한 크리스천이어서 개구쟁이가 말하는 것들이 대부분 수긍이 갑니다. 특히 캠벨이 기독교라는 세계에 들어와 보지 않고 아는 지식만을 가지고 비교하는 것이 불만이지만, 그런데 그것을 뒤집어 보면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캠벨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체험이란 것도 그래요. 어느 종교든 다 체험입니다. 신비가 살아 있지 않으면 그건 종교가 아니라 신학이거나 과학이지요. 캠벨이 스스로 가장 맘에 들어한 신화의 정의가 '다른 민족의 종교'라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종교를 다 신화로 보고 있는 캠벨이 입장이 십분 이해가 됩니다. 신비와 상징, 은유, 맞아요 신약의 말씀도 사실 그렇게 읽지 않으면 현재 나에게 적용하기가 힘들지요. 그런 점에서 이미 그렇게 다가가고 있는 기독교에 대해 지적하는 건 캠벨이 유대-기독교를 유대교(혹은 카톨릭)과 동일시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요는 종교=신화로 보는 캠벨의 입장은 굉징히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지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화, 종교를 다 갖다 놓고 정말 그 속에 관류하는 어떤 공통점을 찾아낸 캠벨의 입장이 되어 봅니다. 그것 역시 한 종교 안에서 체험하는 신비 이상의 대단한 신비 경험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때문에 저는 캠벨에게 귀를 정말 진지하게 기울여 보고 싶은 겁니다.그리고 내가 기독교 신앙 안에 있었지만 '믿음'으로 해결이 안되던 부분에 대해, 다른 누구보다 시야가 넓고 직관이 발달해있을 캠벨에게 직접 들어보면 무슨 건질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거죠. 그의 방대하고 심오한 지적 여정을 알고 있으니 다른 학자들보다는 신뢰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구요.
개구쟁이가 캠벨의 책 몇 권을 읽은 것으로 캠벨을 평하는 것은 개구쟁이가 캠벨을 비판하는 똑 같은 이유로 캠벨이 앞에 있다면 비판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요. 글자가 다 설명해줄 수 없는 엄청난 것을 경험한 캠벨의 그것을 조금 더 알 수 있다면 하는 심정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캠벨의 책들을 읽으면서,모든 종교에 대해 편견부터 버리자 생각했답니다. 모든 것은 정말 한 길로 통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다원주의의 입장을 무릅쓰고서라도, 힌두교 명상이나 불교의 수행의 깨달음에 대해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 세계가 정말 궁금합니다. 그 신비를 깨닫는다는 것은 아무에게나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제 편견일지 모르겠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캠벨이 어떻게 신화를 연구하는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개인들(나와 너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영적깨달음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삼았을까요. 정말로 깨달음 안에는 가면은 다르나 얼굴은 하나인 신, 그분과 나의 합일이 있지 않을까.그리스도가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말했듯이, 그분을 영접하면 그분이 내 안에 들어와 나와 먹고 마시고 살겠다는 그 경지, 모두 궁극에는 같은 것이 아닐까...생각이 마구 분화합니다.증명을 할 수 없으니 뭐라 말할 수도 없고..그런 체험은 말을 초극한 것일테니까.. 캠벨이 캐낸 보물을 '나'라는 존재(그것이 유일한 통로이니까)의 수수께끼를 통해 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개구쟁이 덕분에-조금 어지럽긴 하지만-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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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쟁이
2008.04.28 19:29:18 *.52.236.185
소은님께서 좋다니 저도 좋습니다. (아하하)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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