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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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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21일 03시 38분 등록
조셉 캠벨, 『신화와 함께 하는 삶』 한숲 출판

1. 저자에 대하여

훗날 내가 조금이나마 신화를 이해하게 된 계기로 켐벨을 기억하게 될 것이고, 그에게 고마워하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생애 내내 다민족의 신화를 열렬히 사랑했고, 그것들을 분석해서 신화를 주목받는 학문의 반열에 오르게 한 혁혁한 공을 세운 캠벨은 남자로서도 멋지다. 그의 강연을 들어보고 싶고, 생전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회가 된다면,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해도 그의 강연 모습을 꼭 보고자 한다.
다음에 읽을 책 <신의 가면> 시리즈는 문체부터 좀 다르지만 대부분의 편안히 풀어 놓는 그의 이야기들은 마치 대청마루에서 모깃불을 쫒으며 듣는 여름밤의 세헤라자데의 천일 야화 같다. 이야기 속에 화자가 다른 이야기를 불러 오고 또 그 화자가 다른 화자를 불러 오면서, 절대로 끝날 것 같지 않은, 어린이가 자라 성장할 때까지 들어도 새로운 이야기가 계속되지만 주인공의 이름만 바뀔 뿐 스토리는 같은 구조인 이야기.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아이들에게 들려 줄 옛이야기를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 번역자인 이경덕의 추천의 글도 좋았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추천의 글.
p.1. 미로와 미궁은 얼핏 서로 닮은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다. 미로와 미궁은 크게 다르다. 미로는 말 그대로 길이 넝쿨처럼 얽혀 있어서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 힘든 길이다. 그러니까 미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처럼 복잡하게 뒤엉켜 있어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 분간할 수 없는 곳이다.
그러나 미궁은 길이 하나밖에 없다. 외길이기 때문에 길을 잃을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 미궁은 나선이 그려진 원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좌우를 살필 필요 없이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중심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미궁에서 빠져나오고 싶다면 그대로 뒤로 돌아 갔던 길을 되돌아 나오면 된다.

p.2. 영국의 사르트르 성당의 바닥에는 미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신발을 벗고 그 길을 걷는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단순한 일을 할까. 미궁을 들어가는 일이 단순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궁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자기의 중심, 세상의 중심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미궁으로 깊이 들어가기에 앞서 신화학자들이 즐겨 인용했던 이야기를 하나 보자. 이 책의 저자 켐벨 역시 스승이었던 하인리히 침머의 “인도의 신화와 예술”을 편집하면서 마지막에 이 이야기를 소개했다.

p.3. 제켈의 아들 아이시크는 너무 놀랐다. 그렇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선량한 경비대장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난로 뒤 지저분한 구석을 파보았다. 그곳에는 정말로 보물이 묻혀 있었다.

p.4. 아이시크의 이야기는 미궁의 의미를 말해준다. 보물은 늘 생활하던 공간에 묻혀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을 뿐이다. 만약 아이시크가 꿈의 계시를 믿지 않았다면 보물은 그대로 먼지 아래 숨겨져 있었을 것이다. 아이스크는 꿈을 믿었고 보물을 찾기 위해 떠났다. 그는 보헤미아 왕궁의 철통같은 경비를 확인하고도 보물찾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미궁은 외길이지만 힘든 길이다. 그러나 미궁의 중심에 도달하면 모든 것이 변한다. 아이시크는 보물을 얻었다.
신화는 미궁이다. 신화학자들이 아이시크의 이야기를 자주 인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신화는 사람들에게 미궁으로 안내하고 보물을 얻도록 해준다.
“신화와 상징들 그리고 먼 곳으로부터의 지혜의 징표들은 바로 그러한 방법으로 우리 자신의 보물에 대해 우리에게 이야기해 줄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우리 존재의 잊혀진 마음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그것을 파내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것은 우리들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고 우리를 둘러싼 모두의 이익을 위하여 살아 있는 정신의 신전을 건립토록 허락할 것이다.”

p.5. 한 가지, 캠벨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던 때가 고고학이 획기적으로 발전하고 과학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다. 캠벨 역시 그 시대의 분위기에 젖지 않을 수 없었고 글의 곳곳에 고고학과 과학의 그림자가 배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특히 이 글의 11장인 ‘달 위를 걷다’의 경우 인류가 달에 발을 디딘 것에 대해 좀과도한 기대와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캠벨은 유명한 독서가였고 신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이해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중심이 무너지는 일은 없다.
글 중간에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케네디의 국장을 보며 신화를 생각하는 대목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경우는 2002년 월드컵에서 경험한 것과 다르지 않다. 이처럼 신화는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화란 자기를 찾고 이해하는 일이며 혼잡한 세상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살게 해 주는 힘이다. 미로가 아닌 미궁으로 이끌어 ‘살아 있는 정신의 신전’ 을 세울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리고 이 책은 신전을 세우기 위한 훌륭한 초석이다.

머리말
p.6. 이 책에서는 1958년부터 1971년까지 뉴욕 쿠퍼 재단 포럼의 그레이트 홀에서 스물다섯 차례에 걸쳐 있었던 신화 강좌 중 열세 차례의 강연을 선별해 새로 구성했다.(중략)
그곳에서 강연하면서 계속 즐거웠던 이유는 물론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그레이트 홀과 에이브러햄 링컨이 연설했던 자리에 내가 서있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지만(미국 웅변의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 몸을 담고 있다는 은밀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좀 더 직접적으로는 페어차일드 박사가 수차례의 자유강연과 토론을 통해 그 공간에 끌어들인 청중들,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활짝 연 청중의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다. 박사가 마이크를 들고 복도를 천천히 오가며 강연을 한 다음 질문시간이 되면, 누구나 손을 들고 의견을 제시하거나 질문을 던지거나 연설을 할 수 있다. 덕분에 나는 공통적인 관심사를 가진 이들과 얘기를 나누는 일이 가장 즐겁고 재미있는 경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책 속의 딱딱한 문장에도 생생하고 즐거운 강연 분위기가 고스란히 담긴다면 좋겠다.

1. 신화에 미친 과학의 영향
p.16. 사내아이는 냉정하고 침착하게 말했다. “알아요, 하지만 과학자들은 사실을 근거로 하지요. 그들은 뼈를 발견했다고요.” 우유와 샌드위치가 나오자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었다. 잠시 이 아이 같은 젊은 진리 탐구자의 사실과 발견 때문에 파괴된 신성한 우주의 이미지를 생각해 보자.

p.26.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 대가와 1885년 1년 간 함께 지냈고 금세기 첫 25년간 히스테리와 꿈, 신화 연구를 한층 발전시켰다. 프로이트의 관점에 따르면 신화는 꿈이라는 심리적 상태를 다룬다. 프로이트의 관점에 따르면 신화는 꿈이라는 심리적 상태를 다룬다. 다시 말해 신화는 공공의 꿈이고 꿈은 개인의 신화다. 그에 따르면, 신화와 꿈은 모두 유아기 근친상간의 소망이 억압된 징후로 공공의 종교와 개인의 신경증간의 유일하고도 본질적인 차이다. 신경증을 앓는 사람은 수치심과 고독감을 느끼고 징병 속에 고립되는 반면, 신들은 우주라는 스크린에 크게 비추어진다.

p.27. 꿈과 신화 연구를 통해 이 내면의 힘과 대화를 하다보면 더욱 깊고 더욱 현명한 내적 자아의 드넓은 지평을 깨달을 수 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신화를 소중히 하고 계속 살아 있게 하는 사회는 인간 정신의 가장 건전하고 풍요로운 땅에서 자라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위험도 있다, 즉 자신의 꿈에 이끌리고 근대의식 세계와는 동떨어진 신화를 계승하여 현대 생활에 맞지 않는 낡은 생각과 감정 패턴에 고착된 존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융은 어느 극단에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대화는 무의식에서 나와 지속적인 상호작용에서 의식을 통해 인식된 상징적 형상을 통해 이루어진다.

p.28-29. 과학적 사고는 ‘세상의 기원과 창조자에 대한 믿음을 앗아’갔다. 그래서 그리스 학문의 빛이 막 이슬람에서 유럽으로 전해지기 시작하던 바로 그 때 -약 1100년경부터-부터 이슬람의 과학과 의학은 정체되고 사라져갔다. 그와 함께 이슬람도 스러져갔다. 과학뿐 아니라 역사의 횃불 역시 기독교 서방세계로 넘어갔다. 이후 12 세기 초부터 장구한 인류 역사에 비해 대단히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던 대담하고 훌륭한 정신사가 이어졌다. 유럽 경계 너머의 땅에 한 번도 발을 내딛어 보지 못한 사람은 이 몇 안되는 사람들에게 진 엄청난 빚을 다 갚지 못할 것이다. 소위 ‘개발도상국가’ 의 사회 변화는 수백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침략과 그 로 인한 여파로 이루어졌다. 작은 사회는 모두들 오래 전에 확립되고 굳어진 신화에 고정되어 있으며 충돌에 의해서만 변화가 일어났다.(중략)
하지만 현대 과학자들에게 ‘진리’란 무슨 의미인가? 분명 신비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그런 의미는 아닐 것이다! 과학적 발견과 관련된 위대하고 본질적인 사실-대단히 놀랍고 대단히 매력적인 사실-은 과학이 절대적인 ‘진리’인 척 하지도, 또 그럴 수도 없다. 과학은 그저 이 세상의 ‘실용적인 가설’ 이며(“아, 과학자들이라니!” “그렇겠죠. 하지만 그들은 뼈를 발견했잖아요.”) 당장은 지금까지 드러난 모든 관련 사실을 고려하는 것처럼 보인다.
p.30.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믿어야 하는 것도, 해야 하는 일도 없다. 한편 원하기만 한다면 누구나 오래 전 중세시대나 동양, 심지어 원시인의 종교를 택할 수도 있다.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정신병원에 가지 않게 해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은 것으로 추앙받을 수 있다.

2. 인류의 출현
p.35. 신화는 인류와 함께 시작됐다. 인류의 출현과 관련된 부서지고 깨진 최초의 증거를 따라가 보면 호모사피엔스의 세계와 예술에 이미 신화적 목적과 관심이 형성되어 있다는 흔적이 나타난다. 나아가 그러한 증거는 인류의 통일성에 대한 무언가를 말해준다. 신화적 사고라는 근본적인 주제는 역사 전반에 그리고 인류가 차지하는 영역 전반에 걸쳐 항상 보편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p.36-37. 죽음에 대한 의식과 죽음을 초월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신화의 가장 커다란 발생원인이었다. 이와 함께 또 다른 깨달음이 있다. 즉 한 인간이 태어나 그를 돌보고 보호해주는 사회집단, 그리고 거의 평생 동안 그 역시 돌보고 보호해야 하는 사회 집단은 그가 태어나기 오래 전부터 존재했고 그가 죽은 다음에도 존재하리라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인류의 한 구성원은 죽음을 맞이해야 할 뿐 아니라, 살면서 겪는 모든 일은 자기가 태어난 사회체제의 것이 되도록 스스로 적응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한다. 그리하여 개인이 스스로 동화되도록 해야 하는 사회체제는 한 개인의 인생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개인은 사회에 참여하면서 죽음을 초월한 인생을 알게 될 것이다. 유사시대와 선사시대라는 긴 시간 속에 세계 곳곳에서 발생한 모든 신화 체계에는 이 두 가지 근본적인 깨달음-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과 사회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상징적으로 결합되어 있고, 의례와 사회를 이루는 중요한 힘이었다.

p.42-45. 따라서 신화는 기본 원리를 인정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본질적인 문제를 얘기하고 있다. 그 문제는 의식적인 정신이 가장 은밀하고 깊은 곳과 계속 접촉해야 할 때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 성스러운 이야기와 그 이미지는 일상적인 낮의 의식은 알지 못하는 영혼에서 의식적인 마음으로 보내는 메시지다. 그리고 그것이 시공간의 영역-미래든, 현재든, 과거든-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힌다면 그 힘은 신화 그 자체가 상징하는 이차적인 것, 즉 신성시된 막대기나 돌, 동물, 사람, 사건, 도시 혹은 사회 집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왜곡될 것이다.
동산에 대한 성서의 이미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얘기해보자. 동산의 이름 ‘에덴’은 헤브라이어로 ‘기쁨, 즐거운 곳’을 의미하고, 페르시아어의 ‘주위’를 뜻하는 ‘pairi’ 와 ‘벽’을 뜻하는‘daeza’에서 유래한 영어의 ‘파라다이스’는 곧 ‘벽으로 둘러싸인 곳’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에덴동산은 분명 벽으로 둘러싸인 즐거운 동산이고 가운데에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 혹은 선악과 불멸에 대한 지식의 나무 두 그루가 있다.
더구나 마르지 않는 수원으로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네 줄기의 강은 이 세상을 정화시키기 위해 사방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은 인간 최초의 조상이 쫓겨났을 때 두 지품천사는 돌아가는 길을 지키라고 동문 쪽에 배치되었다.

구체적인 지형이 아니라 영혼의 풍경을 가리키는 에덴동산은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의식적인 마음은 동산에 들어가 영생을 맛보지 못한다. 이미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를 동산 밖으로, 우리 자신의 중심에서 멀리 내던진 것은 지식일 것이다. 그래서 현재 우리는 지식을 통해 사물을 판단하고 영원한 생명 대신 선과 악만을 경험한다. 영원한 생명을 알지 못하지만, 벽으로 둘러싸인 동산은 우리 내면에 있고 이미 우리의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비록 의식적인 개개인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말이다. 신화를 선사시대가 아니라 인간의 내적 영혼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때, 그것이 바로 신화의 의미일 것이다.
이번에는 서양이 매료되었던 성서의 신화애서 동양 전체를 매혹시킨 인도 신화로 눈을 돌려보자. 인도 신화에도 무시무시한 두 수문장이 지키는 불멸의 나무라는 신화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 나무는 싯다르타가 그 아래 동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가 진리 안에서 자기 불멸의 빛을 깨닫고 이후 부처, 즉 깨달은 자로 널리 알려졌던 바로 그 나무다. 그 신화에도 뱀이 나오지만, 이 뱀은 악한 존재가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생명에 깃든 불멸의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동양에서는 다시 태어나듯 허물을 벗는 뱀은 옷을 입었다 벗는 것처럼 육체를 벗어던지고 환생하는 영혼에 비유된다. 인도 신화에서는 머리로 탁자 같이 생긴 지구의 균형을 잡아준다고 상상한 거대한 코브라가 나온다. 물론 그 머리가 주축점으로, 정확히 세계수 바로 밑에 있다. 그리고 부처의 전설에 따르면 모든 것을 알게 된 축복받은 자가 여러 날 동안 절대 명상을 하며 앉아 있을 때에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폭풍 때문에 위험에 빠지는데, 아래에서 올라오는 이 커다란 뱀이 부처를 자기 몸으로 감싸고 부처의 머리는 넓은 목으로 덮어 보호한다. 따라서 나무와 관련된 이 두 신화 중 한 신화에선 저주받은 뱀이 저주 받지만 다른 신화에선 인정받는다. 두 신화 모두 뱀은 어떤 식으로든 나무와 관계가 있고 그 과일을 좋아하는데, 그건 뱀이 허물을 벗고 다시 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서의 전설에서는 최초의 인류가 그 나무의 동산에서 추방당하지만 불교 전통에서는 우리 모두가 그 안에 있다. 따라서 앞서 말했듯이 부처가 앉아 있던 나무는 구체적인 지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동산으로 여겨지는 에덴동산의 두 번째 나무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곳으로 돌아가 부처처럼 그 아래 앉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두 지품천사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불교에도 그런 존재가 있는가?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불교의 중심지 중 한 곳이 일본의 나라라는 성도로, 그 거대한 사원에는 시무외인 자세로 오른손을 든 거대한 연꽃 위에 가부좌한 높이 53.5피트짜리 거대한 청동 부처상이 있다. 이 사원의 경내로 들어가는 문 양쪽에는 칼을 휘두르는 거대하고 무시무시하게 생긴 두 무인상이 지키고 있다. 이들이 불교에서는 야훼가 에덴동산 문에 둔 지품천사에 해당한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이들 때문에 겁에 질려 들어가지 못하는 법이 없다. 그 사이를 지날 때 우리는 이 무시무시한 수문장들이 일깨워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의 집착을 뒤에 남겨놓게 된다.
다시 말해 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동산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신의 질투나 분노 때문이 아니라 삶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집착 때문이다. 시공간 세계를 향한 외부 지향적인 관념 때문에 우리는 그 세계와 그 속에 있는 찰나의 육체에 집착한다. 우리는 이 물질적 삶의 재물과 쾌락이라 여기는 것을 포기하기 싫어하며, 이 집착이야 말로 우리가 동산에 들어가지 못하는 커다란 사실, 거대한 이유 혹은 걸림돌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내면에서 외부를 향한 육체적 감각이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p.45. 불교의 거대한 두 금강역사 중 한 명은 입을 벌리고 있고 다른 한 명은 입을 다물고 있다. 그것은 이 찰나의 세상에서 우리가 만사를 항상 반대 한 쌍으로 경험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 그 사이를 지나면서 우리는 그런 생각을 뒤에 남겨 놓는다.
p.46. 성서의 교훈은 아이가 부모에게 갖는 의존심과 공포심, 존경 어린 애정 등의 태도를 가르치는 불복종과 처벌에 대한 유아용 동화 수준인 반면, 불교의 가르침은 스스로 책임감을 갖는 성인용 우화와 같다. 하지만 두 종교 모두가 갖는 이미지는 구약이나 불교, 그 어느 쪽보다 심지어 인도보다 훨씬 더 오래된 것이다.
p.46-47. 더욱이 상징적 형식과 관련된 비교 학문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나 부처가 실제로 그 가르침에 따른 기적을 행했는가, 아닌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전 세계 종교서를 보면 이 두 위대한 인물에 상응하는 존재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결국 이 두 성인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은 구원자, 영웅, 속죄한 자가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생활이나 꿈속에서 자기 자신과 세상의 성지를 경험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면의 두려운 방어벽을 꿰뚫는 법을 배운 자라는 것이다. 그러한 구원자의 신화적인 전기는 언어를 초월하는 상징으로 세상을 초월하는 지혜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메시지는 보통 아이러니컬하게도 맨 처음 내벽을 쌓는 것처럼 다시 언어화된 생각으로 해석된다. 나는 결혼성사 때 젊은 커플들에게 이승에서 평생 함께 하면 영생하리라고 충고하는 선한 목사들의 말을 들었다. 그 때 나는 생각했다. 세상에! 결혼생활을 유지하면 ‘이승’에서 영생을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이 좀 더 적절한 신화적 충고가 아니겠는가! 실제로 영생은 산다는 행위 그 자체와 항상 동시에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인간의 경험과 표현 안에 내재된 영원한 인간 가치의 차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깨달음을 얻은 위대한 사람들의 구현이다.(중략)
어떤 관점에서 신화는 그러한 초월적 시각의 시적 표현일 뿐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기본적 신화의 오래된 형식 -가령 뱀신과 성스러운 나무-을 그 증거로 삼는다면 오늘날 신비한 계시라고 생각하는 것의 시작은 처음부터 인류의 원시 종교들 중에서도 소수만 알고 있었을 것이다.

p.55. 그리고 같은 시기 벽화의 남자 그림은 모두 똑같은 옷을 입은 반면, 여자 그림은 완전히 벌거벗은 채 아무 장식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있다는 점이 내 생각에는 대단히 중요한 듯하다. 이는 남녀에 대한 심리적 가치, 곧 신화적 가치에 대한 무언가를 가리킨다. 여성은 본래 신화적인 존재이며 생명의 근원이자 생명을 낳는 사람일 뿐 아니라 마법 같은 손길과 존재로 경험된다. 달의 주기와 일치하는 여성의 신체 변화 역시 신비다. 반면 옷을 갖춰 입은 남자는 권력을 쟁취해 특별하고 제한된 사회적 역할이나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어릴 적 -프로이드와 융이 지적했듯- 어머니는 자연의 힘으로, 아버지는 사회의 권위로 경험된다. 어머니는 아이를 낳고 먹을 것을 주지만 아이는 (헨젤과 그레텔의 마녀처럼) 어머니가 자식을 다시 잡아먹겠다고 위협하는 사람으로 상상할 수 있다. 아버지는 사내아이를 사회적 역할에 주고 여자아이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일깨워주는 최초이자 최고의 남성적 인물로 경험된다. 구석기 시대의 비너스는 항상 집안의 화덕에서 발견되는 반면, 옷을 입은 남성상은 깊고 어두운 곳에 있는 동굴 벽화에서 훌륭한 동물 속에서 발견된다.
3. 의례의 중요성
p.64. 한편 인류는 중앙 신경계통의 행동해발기구가 대부분 ‘정형화’ 되지 않고 ‘열려’ 있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과 구분된다.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성장한 사회적 각인의 영향을 받기 쉽다. 인간의 아이-생물학적으로 볼 때-는 10-12년 일찍 태어나기 때문이다. 아이에겐 특수한 문화신경에 각인된 특징의 영향을 받은 인간적 특징과 직립 자세, 언어능력 그리고 특정 문화, 사고, 언어 등이 필요하다. 따라서 동물계가 생물학적으로 유전된 유전적 패턴은 인간에게는 대부분 사회적으로 유전되고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 이라고 하는 긴 세월 동안 각인된 패턴에 해당하며, 의례는 전 세계적으로 그러한 각인의 공인 수단이었다. 신화는 이러한 의례의 버팀목이었으며 의례는 신화의 구체적 수행이었다. 아이는 자신이 속한 사회집단의 신화를 습득하고 그 의례에 참여하면서 자연적 ․ 사회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미숙한 상태로 내어난 비결정적 자연 산물에서 특별하고 효율적으로 기능하는 독특하고 능력 있는 사회 구성원이 된다.
p.65. 이렇게 집에서 보내는 시기에 모든 기본적인 사회적 각인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사회적 각인은 심리적으로 성숙해지기 전에 벗어나야 하는 의존적 태도와 관련된다. 아이는 부모의 충고와 지지, 보호를 받으며 환경의 도전에 대처하고 성인으로 인정받기 전에 이 같은 생활패턴은 바뀔 것이다. 따라서 원시사회 사춘기의 통과의례와 전 세계 교육의 기능은 항상 부모에게 의존하는 청소년을 책임감 있는 성인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오늘날에는 청소년이 부모에게 의존하는 시기가 20대 중, 후반까지 늘어났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독립하기가 훨씬 힘들고 독립에 실패할 확률도 높다.
p.66-67. 때문에 교육문제는 상당히 복잡하다. 즉 과거의 패턴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말고 자신의 창조적 기능을 인식하고 개발하도록 그리고 초기 생물학과 사회학이 증명한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발달을 꾀하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근대 서구인의 특별한 의무일 것이다.
p.67.이러한 감상주의의 출발은 인위적인 자연회귀 운동과 ‘고귀한 야만인(Noble Savage)’ 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던 18세기 장 자크 루소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크 트웨인 시대부터 머나먼 땅의 미국인들은 악명 높은 이상의 본보기였다. 그 이상이란 낡고 지저분한 곳에 사는 유럽과 아시아인은 하느님의 나라와 미국의 옥토 그리고 권리장전이 만들어낸 순수한 순박함을 통해 그들 나름의 자연적 순수성을 회복하고 자각해야 한다는 순진한 믿음을 나타낸다. 독일에서 세계 제 1차대전과 제 2차대전 사이에 배낭과기타를 지고 다녔던 반더푀겔(Wanderv gel, 독일 도보 여행 애호단체 - 역주)과 이들 이후 히틀러 청년단이 근대 생활에 대한 이 반동적 사조를 대표적으로 나타낸다. 그리고 요즘 큰 북과 침낭, 어린아이들과 함께 길가에서 캠핑하는 맨발의 백인과 흑인, ‘인디언’들의 목가적인 풍경은 도시 곳곳을 인류학적 연구의 장으로 만들 듯하다. 여느 사회나 그렇듯, 그곳에도 독특한 의상과 통과의례, 정해진 믿음, 그밖에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p.68. 오늘날 형식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했기 때문에 가장 불안한 것이 바로 예술 분야다. 인간의 창조성이 가장 많이 드러나고 가장 정확하게 평가받는 것이 바로 예술이기 때문이다. 현대와 고대 로마의 예술을 비교해 보자. 왜 로마인은 건축과 조각 작품은 그 뛰어난 능력과 기술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작품보다 덜 감동적이며 형식적으로 덜 중요한가?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다루었는데 나는 며칠 전 꿈에서 답을 얻었다. 그것은 중요한 깨달음이었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 답은 이렇다. 아테네처럼 작은 사회에서는 창조적 예술가와 사회지도자들이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고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의 뉴욕이나 런던, 파리 같이 큰 사회에서는 촉망받는 예술가도 작품 의뢰를 받으려면 모임에 참석해야하고 이들을 고용하는 사람들은 예술가의 작업실이 아니라 사교모임에서 적당한 사람들을 만나 적당한 물건을 고른다. 이들은 상품성 있는 양식이나 기법을 담은 작품 수집 외에 고독한 창조 작업의 고통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그 결과 형식적인 고통을 거의 겪지 않은 똑똑한 사람이 기발한 것만을 표현한 ‘인스턴트 예술’이 탄생한다. 이후 이 작품은 비평을 받고 친하거나 친하지 않은 언론인들을 통해 널리 알려지거나 조용히 사라진다. 이 언론인들 역시 수많은 모임에 참석해야 하고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거나 경험할 시간이 거의 없어서 대단히 복잡하거나 새로운 것을 보면 당황할 뿐이다.

p.69. 가령 제임스 조이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금세기 이 위대한 천재 소설가가 평생 노벨상 한 번 타지 못했다는 점이 흥미롭지 않은가? 혹은 바로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정신적 변화가 일어나는 이 위대한 시대-세계 제 2차 대전 후-의 필요조건과 가능성에 필적할 만한 창조적 작품을 단 하나도 모른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몹시 비참한 현실이다. 지금까지 그 사회에 적합하고 삶을 뒷받침하는 신화와 의례는 창조적 선구자와 예술가의 통찰력에서만 탄생됐기 때문이다.(중략)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니체도 그러했으리라-은 형식은 삶이 당당하고 웅장하게 드러나는 수단이자 매개체이고 단순한 형식의 파괴는 인간뿐 아니라 동물의 삶에 대한 재앙으로, 이는 모든 문명의 구조적 형식인 의례이자 예절이라는 점이다.

p.70. 당시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비교대상은 소네트라는 시 예술이었다. 그 역시 대단히 까다로운 형식이니 말이다. 하지만 시인은 소네트 안에서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새로운 자유를 얻는다. 나는 일본에서 운 좋게 여러 다도 다주의 스타일을 관찰하고, 차를 들 때 그들이 실제로 얼마나 편안하고 자유로운지를 알 수 있었다.

p.71. 나는 옛날을 회상하며 ‘야, 경기가 진지하게 벌어지고 쓸데없는 모임에 참석할 필요 없이 경기장에서 정직하게 실력을 겨루는 곳에는 여전히 당당한 형식이 존재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서구의 몰락 The Decline of the West』에서 ‘문화’란 운동선수의 ‘몸 상태가 좋다’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건강한’ 사회 조건이라고 정의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팔을 잡는 방법이나 서 있는 각도 등 세세한 선수의 몸 상태는 어떤 성취의 한 순간을 위한 조건이다. 또한 대단히 정제된 ‘건강한’ 사회, ‘건강한’ 일본의 다주도 마찬가지다. 형식이 파괴되면 1,600미터 경기장에서도 문화의 경기장에서도 승자가 태어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이 진지한 세계는 최고의 형식이 유지되는 곳에서만 문화적 삶이 존속할 것이다. 경기에 졌을 때 다시 뛸 수도 없다.

p.72. 미국은 거대한 국가지만 그 나흘 동안은 온 국민을 동시에, 똑같이 하나의 상징적 행사에 참석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케네디 대통령의 장례식은 온 국민과 함께 하나가 되어 참석했던 내게 소속감을 준 평화시대 최초이자 유일한 행사였다. 과거 20~30여 년간 미국 국기를 계양하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 국기를 계양하면 존 버치 회의 일원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은 국가의 생명과 운명에 참여함으로서 자신의 목숨과 지위를 확대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온 국민이 한 마음으로 묵상하던 그 주말, 유기적 조직체로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정서체계가 미국인에게 효율적으로 되살아났으며 정서적이고 뚜렷하게 재현되었다.
하지만 그 장례식을 바라보던 나에게, 특히 국기가 덮인 관을 실은 포차와 관련해 또 다른 생각이 스쳐갔다. 그 포차는 검은 말굽의 일곱 마리 회색 군마가 끌고 있었고 그 옆에는 역시 검은 말굽에 한 군인의 손에 끌려가는 또 다른 말이 발걸이가 뒤집힌 텅 빈 안장을 얹은 채 천천히 걷고 있었다. 나는 잿빛 사신의 유령 같은 일곱 마리 군마가 이 세상의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젊은 영웅을 데리고 예전에 그가 내려왔던 일곱 개의 천구를 지나 영원의 자리로 가는 것 같았다. 일곱 개의 천구와 천국의 집에서 지상의 삶을 위해 내려왔다가 죽어서 다시 일곱 개의 천구를 지나 올라간다는 영혼의 여행에 대한 신화는 문명 그 자체만큼이나 이 세상에 오랫동안 존재했다.

p.74. 젊은 영웅의 장례식에서 일곱 마리 회색 군마의 말굽 소리를 듣고 발걸이가 뒤집힌 채 주인 없는 말을 본 현대의 수백만 명 사람들은 칸타카의 전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주제와 전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의전 행사의 신령이며 그 존재는 효력을 발휘했다.
그것이 내가 다루는 주제다. 게다가 이들 존재는 미국 역사의 또 다른 순간, 즉 시민전과 역시 암살당했고 똑같은 방식으로 영원을 향해 운반됐던 링컨의 장례식을 반영한다. 절대적 침묵의 도시 전역에 울려 퍼지는 엄숙하고 느린 군악대의 북소리와 군마들의 검은 말굽소리 안의 상징적 배음-육체의 귀는 듣지 못하지만 모두가 마음속으로 인식하는-에 의해 현대의례의 힘은 엄청나게 높아진다.

p.75. 기원전 3500년 경 최초의 도시국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출현했던 시대에 하늘을 바라보던 성직자가 하늘의 일곱 가지 힘-태양, 달, 눈에 보이는 다섯 행성-이 일정한 성위를 따라 수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속도로 움직인다는 것을 깨닫자 사회의 근본이자 매혹의 중심은 땅과 동물 및 식물의 왕국에서 하늘로 바뀌었다. 우주의 경이에 대한 이 새로운 발견은 우주의 질서라는 개념으로 요약되었고 이는 즉시 지상의 좋은 사회에 대한 천상의 본이 되었다.

p.76-78. 이 같은 속임수는 지금도 효과적이다. 이는 실제 낮의 경험이 아니라 저 깊은 곳, 무의식에서 비롯된 꿈결 같은 신화적 이미지- 육체와 예복, 돌의 형상으로-가 의식 세계에 투영된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이미지는 그 자체로 보는 사람에게 꿈같고 비이성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그 결과 의식으로 표현된 신화적 주제와 동기는 개개인을 초개인적은 목적 및 능력과 연결시킨다. 동물행동 연구자들은 동물계에서 종에 대한 관심이 지배적인 경우-짝짓기나 구애 전쟁 같은 경우처럼-에는 정형화되고 의식화된 행동 패턴이 그 종에 보편적이고 프로그램화된 행동 질서에 따라 각 개체를 움직인다는 것을 발견했다.
마찬가지로 사회관계가 이루어지는 인간의 모든 영역에서는 의식화된 절차가 그 의례의 주인공을 비개인적인 존재로 만들고 그들을 그 자신이 아닌 존재로 높이거나 낮춘다. 따라서 그들의 행동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종, 사회, 계급, 혹은 직업의 것이다. 그러므로 임명식 같은 곳에서 판사나 시장으로 취임한 사람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집단적 원칙이나 법의 매개자라는 그들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그러한 규칙이 없는 사회는 존속하지 못한다. 사람들 역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없다. 한 사람의 개인적 속성은 그 사회의 규칙을 통해서만 막연한 가능성에서 벗어나 유일무이한(세속적이고 공간적이며 한계를 지닌)삶을 실현할 수 있다.

p.78. 프로베니우스는 인류가 과학을 통해 그 신비성을 없앴으며 이제 신비의 핵심은 인간이라고 지적했다. 타자, 이웃인 인간 말이다. 그는 ‘내’가 알기를 바라거나 그를 안다고 상상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 즉 신비와 경이의 존재인 인간을 가리킨다.

p.79-81.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학』을 인용해 고전적으로 인정받는 두 ‘비극적 감정’, 즉 연민과 공포를 이야기하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들 감정을 정의하지는 않았다는 데 주목했다. 그 책의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연민과 공포를 정의한 적이 없었다.” 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연민이란 엄숙하고 영원한 인간의 고통과 대면했을 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감정인데, 이때 우리의 마음은 고통받는 사람들과 같아진다네. 공포 역시 엄숙하고 영원한 인간의 고통과 대면했을 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감정인데, 이때는 공포의 원인을 알 수 없어. 그 원인은 알 수 없는 비밀인 셈이지.” 물론 모든 고통의 알 수 없는 원인이란 죽음 자체로, 이는 삶의 제일 전제조건이면서 실제로 엄숙하고 영원하다. 삶을 들여다보면 이 말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전제조건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라 할 수 있는 고통 받는 인간에게 연민을 느낀다.(중략)
동양의 장례식에 참석해본 사람이라면 한 개인으로서 고통 받는 사람은 장례식을 통해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만 장례식의 모든 요소는 그 사람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음을 눈치 챘을 것이다. 낡은 가죽부대에는 새 술이, 그 사람의 술, 정확히 말해 이 특별한 젊은이의 술이 그리고 영원히 반복되는 주기가 아니라 현재라는 역사적 시간에서 그가 보여준 것이라는 술이 담겨 있다. 하지만 여전히 포차를 이끄는 일곱 마리 말과 옆의 주인 없는 군마에는 오랜 의식의 상징이 담겨 있다. 그 이미지에는 특별하고 전례가 없었으며 복제할 수 없는, 그 고통 받는 인간을 기리는 새로운 노래가 담겨 있다. 하지만 엄숙하고 신비한 인간의 고통뿐 아니라 부정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원인’의 성스러운 암시도 담겨 있다. 그렇지 않다면 장례식의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중략)
-자연의 음악
다른 목에서 나와 한 말로 읊조리는
친근한 바다 목소리, 새처럼 지저귀는 작은 강물소리.
(겨울은 이들에게 금 대신 은을 주었네.
그 물은 더러워졌고 기슭에 줄지어 있던 푸른 잎은 갈색으로 바뀌었네.)
우리가 욕망과 공포의 구분 없이
아픈 나라의 폭풍과 굶주린 도시의 분노에
귀 기울일 만큼 강하다면, 그 목소리들 역시 아이의 목소리만큼 아니면 바닷가에서 연인을 꿈꾸며 홀로 춤추는 여인의 숨결만큼 순결함을 알리라 믿는다네.

4. 동양과 서양의 분리
p.83. 서양인으로서는 최근 서구에서 발전 된 개인과 개성, 권리, 자유 등의 개념이 동양에서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중략)
나는 그리니치 동경 60도 부근에서 이란을 수직으로 가로지르고 동양과 서양을 나누는 굵은 선을 그었다. 이 선을 문화적 분기점이라 여길 수 있을 것이다.

p.84. 서양과는 거대한 산으로, 그리고 동양의 두 중심지도 서로 분리되어 수천 년 동안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단히 보수적이었다.
반대로 레반트와 유럽은 끊임없이 서로 충돌하면서 물자와 사상 등을 교환했다. 그 혼란의 시기에 일어난 엄청난 정신적, 물리적 지각변동은 대부분 인도 및 극동 사이에 놓여 있던 벽이 완전히 붕괴됐기 때문이었다. 전세계는 성서의 바벨탑 이야기에 신화적으로 묘사된 것과 똑같은 문제에 직면했다. 하느님이 사람들의 언어를 다르게 만들자, 바벨탑을 짓던 이들은 안전한 도시건설을 중단하고 각지로 흩어졌다.
오늘날에는 더 이상 흩어질 만한 공간이 없다. 그저 이 시대만의 독특한 문제와 걸림돌만 있을 뿐이다.
이 문제와 바벨탑이라는 신화적 은유는 두 가지 면에서 비슷하다.

p.85-86.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예언을 위해 하늘을 관찰하던 성직자들이 처음으로 달과 태양, 다섯 개의 눈에 보이는 행성들이 수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속도로 움직인다는 점을 깨달은 것은 기원전 3500년경 옛 수메르 도시 국가의 초기 사원에서였다. 또한 그 다음에야 하늘의 우주적 질서라는 개념이 탄생됐고, 이 개념은 사회질서에 반영됐다.

p.87. 어느 고대 문명에나 비슷한 매장식의 기록이 남아있다. 중국과 이집트에서는 8백구 이상의 시신이 순장된 무덤이 발굴되었고, 초기 세 왕조의 파라오는 북부 이집트의 아비도스와 남부 이집트의 멤피스 두 곳에 이같은 무덤을 두었다. 다시 말해 무덤은 각각 4백 명 이상의 수원들이 함께 한 궁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맥락에서 개인은 어디 있는지 묻고 싶다. 사실 그런 세계에는 개인적 인생 같은 것은 없었고, 그저 만물을 지배하는 거대한 우주의 법칙만 있을 뿐이다. 이 법칙을 이집트어로는 마트(Matt), 수메르어로는 메(Me), 중국어로는 도(道), 산스크리트어로는 다르마(Dharma)라고 한다. 거기에는 개인의 선택, 의지, 심지어 생각도 없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일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라고 잠시 자문하는 일이 없다. 태생이 그의 미래와 생각, 행동을 결정한다. 여기서 내가 가장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사회적으로 명백한 우주의 질서라는 이 초기 청동기의 개념(어쨋든 무엇인가 되어야 한다면, 누구든 이 질서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은 지금까지 동양에선 어떤 식으로든 중요하다.
산스크리트어의 동사 ‘존재하다’의 여성형 현재분사는 ‘사타(sati)’로, 인도 아내가 죽은 남편과 함께 산채로 화장되는 것을 가리킨다.
여인은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완성하는 이 헌신적이고 무분별하며 충실한 행동을 통해 영원한 삶, 다시 말해 아내가 된다.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않는 아내는 아사타(a-sati), 즉 ‘무(無)’가 된다. 이승에서의 인생과 의미, 존재는 사회적 역할의 실천과 경험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한 사람만이 참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르의 고대 왕 묘에 있는 두 순장무덤을 돌이켜 보면 그곳에는 실제로 그러한 아내가 있다.
하지만 아바라즈 또한 의례적으로 살해당했다. 왕을 의례적으로 시해하는 관습이 고대에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전 세계 많은 곳에서 발견되었다. 예를 들어 제임스 G.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아무 쪽이나 펼쳐 보라. 초기의 신왕들은 해당 지역의 의식에 따라 6년이나 8년 혹은 12년 마다 의례적으로 살해당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왕실의 고관들도 전원 다시 태어나기 위해 피를 흘렸다. 이 기괴하고 불가사의한 개념, 아무것도 아닌 개인은 죽음조차도 영원하고 전적으로 비인격적인 우주의 법칙에 따라야 한다.
p.89. 우선 모든 저서에서 개인의 완전성을 획득하는 심리적 과정을 ‘개성화(individuation)’ 라고 표현했던 스위스 심리학자 카를 G. 융의 말을 인용해 보자. 그는 누구나 평생 사회로부터 특정한 사회적 역할의 수행을 강요받는다고 지적했다. 이 세상에서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끊임없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데, 융은 이 역할을 ‘페르소나’(personae)라고 했다.
이 단어는 '가면, 거짓 얼굴' 을 뜻하는 리틴어 'persona'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대 로마 극장의 배우는 이 가면을 쓰고 그 가면 너머 말을 한다.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이런저런 가면을 써야 한다.(중략)
이러한 성격은 깊이 각인 된 페르소나로,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자기 자신을 알린다. 이러한 페르소나가 없다면 그 사람은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가면을 벗고 자연스럽게 행동하자!” 같은 말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가면은 무수히 많다. 젊은이의 가면도 있고 노인의 가면도 있으며, 무수한 사회적 역할의 가면도 있고, 임의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덮어씌워 그 사람의 본질을 가린 채 거기 반응하는 가면도 있다.

p.90. 개성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과 해로운 것을 통제하면서 자신의 중심을 찾아 그에 따라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는 일정한 역할의 가면에 따라 행동하고 반응하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융의 말처럼, “모든 삶은 완전한 자아의 실현이다. 때문에 그 실현을 ‘개성화’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삶은 삶을 실현하는 개개 수레에 실려 있으며, 수레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누구나 저마다 다른 운명과 목적을 지고 있으며, 그것을 실현했을 때에야 비로소 삶을 이해할 수 있다.”

p.90-91. 동양에서는 누구나 사회적 지위에 따른 일정한 가면이나 역할과 전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고, 그렇게 규정된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면서 바다에 떨어지는 빗물처럼 자기 자신을 철저히 잊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서구 유럽에서는 전형적으로 개개인에게는 운명과 역할이 내재되어 있고 살아가면서 그 ‘의미’와 ‘완성’을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동양은 사람이 아니라(근대 공산주의 독재 국가에서처럼) 확립된 사회질서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즉 유일하고 창조적인 개인-동양에서는 이를 위협으로 여겼다-이 아니라, 사회적 원형과의 동일시를 통한 복종과 개인적 삶의 모든 욕망에 대한 내적 억제에 관심의 초점을 두었던 것이다.

p.95. 의무는 욕망, 그 다음에는 소멸과 반대된다. 현대 서구의 관점에서 볼 때는 성인보다는 유아가 의무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동양의 관점에서는 죽을 때까지 계속 갈등해야 한다. 서구에서 자아의 성숙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동양에서는 허용하지 않는다. 그 결과 -간단히 말해-동양은 자아와 이드를 구분한 적이 없었다.

p.98-99. 신과 인간은 더 이상 단순히 모든 이름과 형성을 넘어선 유일하고 비인격적인 존재 중의 존재가 아니었다. 신과 인간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고 심지어 적대적일 뿐 아니라 인류를 경시하기도 했다. 더욱이 인간의 신은 우주의 법칙 앞이 아니라 뒷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p.100. 그 확실한 증거가 내세에서 영혼이 감수해야 하는 심판과 관련된 두 가지 천주교 교리다. 첫째는 각자 영원한 보상이나 벌을 받게 되는 죽음 직후의 ‘개별적 심판’이고, 둘째는 ‘일반적 심판’으로, 이때에는 말세에 지금까지 지상에서 살고 죽었던 모든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공개재판을 받아 하느님의 섭리(살아있을 때 선한 자에게는 고통을 주고 악한 자는 영화를 누리는 것처럼 보이게 했던)가 결국에는 정의로웠음을 보여준다.

p.102. 때문에 동양종교의 목적은 보통 살아있는 동안 자신과 적대적 존재의 동일성을 경험하고 깨닫는 것이다. 반면 성경을 따르는 서양에서는 내면의 자아가 아닌, 저 멀리에 있는 조물주, 절대적인 타자와 관계를 맺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p.103.반대로 욥기를 쓴 익명의 작가와 동시대인 5세기경 당대의 위대한 그리스 극작가 아이스킬로스는 프로메테우스(그 역시 낚시로 거대한 해수를 낚아 새처럼 그 괴수와 놀며 그 살에 작살을 꽂을 수 있었던 신에 의해 고통 받았다)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괴물이다……. 난 제우스에겐 관심 없다. 제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라.”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비록 혀로는 욥처럼 말하지만 가슴으로는 프로메테우스처럼 말한다.

5. 동양과 서양의 종교적 대립
p.105. 과학과 이성이 창궐했고, 세계대전(정확히 말해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으며, 세상은 민주주의라는 이성적인 힘이 지배하고 있었다.

p.109. 그가 보기에 과학과 기계는 서양인들의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비서구 민족들에게 전달되어 서양을 파괴하는 수단으로만 이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죽이고 나면 과학이나 산업의 발전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기술의 쇠퇴나 자신들의 지방색으로 돌아가는 여러 민족과 함께 과학과 기술의 능력은 물론 그에 대한 관심까지 사라질 것이다.

p.111. 종교적으로 유지됐던 사회질서는 인간과 식량을 공급해주던 동물계의 관계를 가장 중시했다. 따라서 버펄로가 사라지자, 버펄로와 관계된 상징도 사라졌다.

p.112. 그런데 살아 있는 신화적 상징의 가장 중요한 효과는 삶의 에너지를 깨워 그리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에너지를 방출하고 에너지를 관리하는 징후로, 사람들을 가르칠 뿐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움직이게 하면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는 인생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와 사회 집단의 목적에 도움을 줄 것이다. 하지만 사회 집단이 제공하는 상징은 효과가 없고, 또 효과적인 상징은 그 사회집단의 것이 아닐 때, 사람들은 분열하게 되고 혼란을 겪으며 상징의 병리학이라고 할 만한 것에 직면하게 된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저명한 정신의학과 교수인 존 W. 페리 박사는 살아있는 신화적 상징의 특징을 살아있는 상징의 특징을 ‘감응 이미지’는 직접 감정 체계에 전달되고, 두뇌는 그 다음에야 흥미로운 반응을 나타낸다.
현악기가 다른 악기에 맞추어 화음을 이루듯, 내부에서는 외부의 이미지에 대한 일종의 공명이 일어난다. 따라서 어떤 사회 집단의 살아있는 상징이 모든 구성원들에서 이 같은 반응을 일으킬 때 일종의 마술적인 화음이 그들을 하나의 정신적 유기체로 만들고, 이를 통해 그 구성원들은 공간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하나의 존재, 하나의 믿음으로 움직인다.

p.116. 동양인들은 자신의 신으로부터 유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신의 신비는 각자의 내면에 있는 유배지에 있다. 그 유배지는 저 멀리 어딘가에 있지 않다. 자기 내부에 있다. 그리고 유배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점이다. 그건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또한 수천 년 전 ‘최초의 인간’의 타락과 관련된 문제도, 유배와 속죄의 문제도 아니다. 심리적인 문제다. 그리고 그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p.117-118. 여기서 ‘너’는 이름 할 수 있는 너, 친구들이 알고 사랑하며 태어났다가 언젠가는 죽을 ‘너’가 아니다. 그런 ‘너’는 ‘바로 그것’이 아니다.
neti neti, ‘그건 아니다, 그건 아니다.’ 언젠가는 죽게 될 ‘너’ 는 자신이 사랑하고 붙들고 있는 자신의 모든 것을 지울 때에야 비로소 아직은 존재하지 않지만 만물의 부재 너머에 있는 절대 존재와의 동일성을 경험할 것이다. ‘그것’은 알 수도, 이름을 붙일 수도, 이 세상에서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의인화해서 섬길 수 있는 신들 혹은 어떤 절대적인 신이 아니다. 『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중략)
그것은 마치 칼이 칼집 속에 보이지 않게 들어 있는 것과 같고, 세상을 먹는 자 아그니가 장작 속에 보이지 않게 들어 있는 것과 같으나, 사람들은 그 안에 든 것을 보지 못한다.
그는 틀에 맞춰진 자가 아니다. 숨을 쉬므로 ‘숨’, 말을 한다 해서 ‘목소리’라 부른다. 보기 때문에 ‘눈’이라 하고, 듣기 때문에 ‘귀’ 그리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신’이라 부른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일에 따라 그를 부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이들 중에 어느 하나만 숭배하는 사람은 그를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어느 하나의 특성으로 드러나지 않고, 다만 하나하나로 나타난다. 이러한 흔적으로 이것이 모든 것의 아트만임을 안다면 그 아는 사람은 이 모든 세상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잃어버린(짐승을) 그 발자국을 보고 찾는 것과도 같다.

p.119. 그 다음에는 동양적 관점을 설명하면서, “자연은 가슴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와서 그곳으로 간다.” , “자연은 그 안에서 인간을 낳고, 인간은 자연 밖에선 존재할 수 없다.” , “나는 자연 안에 있고 자연은 내 안에 있다.” 라고 말했다.

p.125. 태어난 것에는 죽음이 확실하고 죽은 것에게는 태어남이 확실하다. 피할 수 없는것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라. 법의 수호가 의무인 귀족으로서 이 정당한 전쟁을 거부하면 더는 덕과 명예 모두를 잃을 것이니라. 행동의 결과가 아니라 의무의 행동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옳도다.
그 다음 그 결실에 대한 모든 욕망과 두려움을 버리고 너의 의무를 수행하라.

p.126. 하지만 우리 서양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때문에 결코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정신적 스승은 ‘구루’라는 동양적 개념이 서양에는 없다. 그런 개념이 있지도, 있을 리도 없다. 성인이라는 우리의 개념은 의심이나 비관 없이 아이가 부모의 지시를 받아들이고 또 그래야 하는 것처럼 사회집단의 명령과 이념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p.127. 동양에서 구루는 제자의 도덕적 인생을 책임지며, 제자는 구루와 동일시하고 가능하면 구루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우리 학생들에겐 그런 제자의 첫째 미덕이 없다.-그래서 동료들에게도 그렇게 말했다-그 첫째 미덕이란 존경하는 구루에 대한 의심 없는 마음, ‘완벽한 믿음’을 말한다.

p.128. 이미지의 의미는 말 너머, 말이 정의하는 의미 너머 직관적으로 파악 된다. 이미지가 당신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면 그건 당신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말은 당신이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 뿐이다. 결국 이미지와 멀어진다. 춤을 출 때에는 그 의미를 묻지 않고 그저 즐길 뿐이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의미를 물어보지 말고 즐겨라. 자신의 의미를 묻지 않고 자신을 즐겨라 최소한 건강할 때만이라도 자신을 즐겨라.
p.129-131. 드디어 그 자리에 자기 자신을 먹고 산 생명인 완벽한 괴물의 형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사자 같은 굶주림의 형상을 남긴 그 태양 같은 얼굴을 보고 시바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내 너를 기르티무카, 즉 ‘영광의 얼굴’이라 부르리라. 너는 내 모든 사원의 문 위에서 빛을 비추어라. 너를 숭배하지 않는 자는 나를 알지 못하리라.”
삶은 경이와 신비를 상징하는 최고신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신의 잔인한 속성과 그 영광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가르침이다.
세상이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 수 있었는지, 자신들이 고통이나 시간 인생 없는 세상을 만들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혹은 ‘우선 사회를 바로 잡고, 그 다음 나 자신을 바로 잡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들 역시 많다-은 신의 평화라는 대 저택의 정문조차 넘지 못한다. 어느 사회든 다 사악하고 불행하며 불공평하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따라서 정말로 이 세상을 구하고 싶다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가르칠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즐거운 슬픔과 슬픈 즐거움이라는 삶의 지식으로 사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는 법을 가르칠 수 없다. 그것이 요가 신(그의 아내는 생명의 여신이다)의 성소 입구 위에서 내려다보는 무시무시한 기르티무카, 즉 ‘영광의 얼굴’의 의미이다. 그 영광의 얼굴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겸손하게 지나가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도 이 신과 여신을 알 수 없다.
6. 동양 예술의 영감
p.135. 쿤달리니는 ‘똬리를 튼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똬리 튼 뱀의 개념을 가리키는 산스크리트어의 여성형 명사로 이 뱀은 일곱 개의 중심 중 가장 낮은 곳에서 잠자고 있다고 한다.
p.145. 하지만 극동 예술은 인도보다는 훨씬 세속적이고 현실적이며 시각적이고 현세적이다.
p.146. 여기서 ‘도(道)’란 만물이 어둠에서 나와 빛으로 가고 다시 빛에서 어둠으로 가는 이치를 말하는데 이 두 원리와-빛의 이동-는 삼라만상을 이루면서 영원히 상호작용하고 다양하게 결합한다.

p.149. 물론 예술가는 주로 눈을 통해 눈앞에 있는 것을 경험한다. 사실 ‘본다’는 것은 공격적인 행위가 아니다. 눈에게 “가서 저기 있는 것을 어떻게 하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보고, 또 보고, 오랫동안 바라보면 세계가 눈 안으로 들어온다. ‘무위(無爲)’, 즉 ‘행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그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행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만물은 그 본성에 따라 그 자체를 드러낼 것이다.
그래서 신이 명상하는 인도 예술가에게 자기 자신을 보여주는 것처럼, 세상은 극동 사람들의 눈에 그 본질적은 형상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가까이 있는 '도(道)’를 멀리서 찾는다”라고 중국철학자 맹자는 말했다.

p.150. 항상 경계하지 않으면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놓친다. 반면 무위의 예술은 끊임없는 경계 자세다. 그는 항상 깨어 있다. 삶은 의식을 표현하기 때문에 삶은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간다. 삶은 가르치거나 지시할 필요가 없다. 삶은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자연스럽게 살며 자연스럽게 말하고 행동한다.

p.152. 주어진 운명에 순종하는가? 햄릿은 이 의문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 고통과 쾌락, 슬픔과 기쁨이 삶 속에 분리되지 않고 섞여 있다는 것, 그것이 삶의 본질이다. 하지만 기쁨을 위한 삶의 의지는 곧 고통을 통해 이 세상에 오려는 의지였다. 그렇지 않다면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환생이라는 동양 사상의 기본 개념이다. 당신이 지금 이 세상에, 이 자리에, 이 특별한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의 궁극적인 깨달음을 위해서는 바로 그러한 의지가 필요하다. 그 놀라운 삶의 의지 때문에 당신은 이 자리에 존재한다. 이때 ‘당신’이란 지금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당신’이 아니라 태어나기 전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당신의 심장을 뛰고 폐를 숨 쉬게 하며 당신을 위해 모든 복잡한 삶을 실천하는 ‘당신’을 가리킨다.

p.153. 마지막으로 예술을 삶의 유희로 보고 인생을 놀이의 예술로 생각하는 이러한 태도를 가지면 수많은 존재의 축복에 즐겁게 다가갈 수 있다. 원죄의 신화를 바탕으로 한 기독교 서구 사회의 자세와는 대조적이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타락했고 그 다음부터 인간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었다. 자연스러웠던 행동이 죄책감을 알게 되는 순간 원죄의 행위로 바뀌었다. 하지만 동양에는 인간이 보고 느끼기에 아무리 잔인해 보인다 해도 자연은 본래 순결하다는 개념이 있다.

p.154. 예술로서의 삶과 유희로서의 예술-득실, 칭찬이나 비난을 생각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행위-은 삶을 요기로, 예술을 그러한 삶의 수단으로 만드는 열쇠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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