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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21일 10시 03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 조셉 켐벨(JOSEPH CAMPBELL)

< 신은 죽었다 >

망원경과 현미경에 의한 탐색으로 신들은 숨을 곳이 없어졌다.
한때 신들이 섬김을 받던, 그런 사회도 이제는 없다.
우리 사회의 기본조직은 종교적(또는 신적) 이기 보다는 경제적, 정치적 조직으로 변했다.
이렇게 되면서 인간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은 어떤 동인(動因)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은 어떻게 사는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조셉 켐벨은 「신화」를 통해서 이 해답을 찾는다.

그는 1904년 뉴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우연히 접하게 된 아메리카 인디언에 빠져들어 인디언 신화를 읽게 된다. 인디언 신화의 내용 중에 어릴 때 수녀님에게 들었던 창세, 사망과 부활, 승천, 처녀 수태 등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신화에 푹 빠져들게 된다. 그 이후 힌두교에도, 중세 아더왕 이야기에도 유사한 줄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평생을 신화학 연구에 바치게 된다.

1925년과 1927년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파리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였다. 1934 년부터 38년간 사라로렌스 대학교의 문학부에서 학생들에게 신화를 가르쳤다. 1940년대와 50년대에는 스와미 니칼라난다를 도와 <우파니샤드>와 <스리 라마크리슈나의 복음>을 번역하기도 했다. 후일 방대한 정리 작업과 연구를 통해〈신의 가면(THE MASKS OF GOD)〉(전 4권)을 펴냈다. 프린스턴 대학 볼링겐 시리즈의 탁월한 편집자로도 유명하며, <천의 얼굴올 가진 영웅> <신화와 함께 살기> <신화의 세계> <신화 이미지> 등의 저서를 통해 왕성한 지적 연구 활동을 펼치다 1987년 세상을 떠났다.

저자는 시대를 앞서 간 선각자라고 생각된다. 저자 이전에 신화학자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르겠지만, “민담과 인류학에 나오는 해골에 생명을 불어넣은 사람”, 20세기 최고의 신화해설가로 불리워 지는 것으로 보거나, 신화 관련 베스트셀러를 저술하고 TV 대담프로를 통해 신화가 일반 대중에게 한층 가까이 다가 갈수 있도록 만든 것 등으로 신화학에 새로운 지평을 연 위대한 스승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과찬인가?

그는 신화를 공부하기 위한 방법을 스스로 터득해 갔다. 그는 스스로를 잡학가(雜學家)라고 얘기 한다. 요즘은 학문 간의 통합 연구가 보편적인 트랜드가 되었지만 저자가 활동한 30-70년대에는 그런 경향이 일반적이지 않았을 듯싶다. 자신이 좋아하는 신화 연구를 위해 혼자서 뭔가를 이룩해야 한다면, 한 우물을 깊이 파고들어 박사학위를 취득해야 할지, 아니면 여러 분야에 걸친 다방면의 공부를 해야 할 지를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저자는 박사학위 취득도 마다하고 문화인류학, 철학, 역사, 예술, 종교 등 스스로 칭하는 ‘잡학’을 두루 공부하여 일반인들에게 신화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부여한다.

그가 보여주는 특징 중 두드러지는 점은 박학다식함과 유연한 사고다. 그는 자신의 방대한 지적 자산을 바탕으로 신화를 종교학, 심리학, 역사학 등과의 연결을 통해 재조명한다. 그가 제시하는 다양한 사례와 그에 대한 해석들은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시간과 공간, 학문 간의 범주를 자연스럽게 넘나든다. 그의 뛰어난 상상력과 유연한 사고가 이 같은 사유를 가능하게 해 주는 것 같다. 유진 케네디는 켐벨을 이렇게 표현한다.“그의 학문 세계는 마치 성서에 나오는 기름단지 같다. 그가 아무리 책을 쓰고 강연을 하고 질문에 답을 해도 늘 새롭게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신화에 대한 열정과 신념 그리고 사랑도 그를 잘 표현하는 키워드 들이다. 그의 대담이나 강연내용에서는 자신이 신화를 공부하면서 체득한 진실을 인류에게 알리고자 하는 열정이 묻어난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는 기독교에서 역사적 사실로 해석되고 있는 성서의 내용을 신화로 해석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을 정리한 책이다. 이것은 그를 수십억 기독교인과 적대 관계에 놓이게 할 수 있는, 거대 종교에 대한 도전이고 반역일 수 있다. 그의 이런 주장에 대한 기독교계의 반응이 어떤지 자못 궁금한데, 어찌 보면 무모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이런 주장을 자신 있게 펼치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의 깨달음)에 대한 열정과 학자로서의 강한 신념을 느낀다. 또한 그것은 자신과 사회에 대한 사랑, 궁극적으로 인간과 우주에 대한 사랑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그는 변화(경영) 컨설턴트이다. 그가 이야기 하는 것은 결국 신화를 통한 개인과 사회의 변화의 필요성이다. 비신화화(非神話化)한 세계를 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들이 왜 신화를 알아야 하는지, 어떻게 신화를 알아가야 할지, 결국 이를 통해서 우리 삶을 어떻게 바꾸어 나가야 할지를 그는 이야기 한다.

개인적으로 그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열 살 나이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찾고 평생 그 분야를 공부하며 살았다는 점, 그의 표현대로 천복을 좇으며 한 평생을 살았으니 그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겠나? 더구나 그의 책에서 보여 지는 신화에 대한 그의 사랑과 열정은 80 고령이라고 보기에 참으로 놀랍다. 그는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건 자기의 인생을 고집스럽게 자기식대로 살아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화를 사랑하면서 끈기와 집념으로 살아간 그의 인생에서 시대를 앞서서 살아간 영웅의 면모를 힐끗 엿 본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서문

“어떻게 나의 고통도, 내가 관심을 갖는 사람의 공통도 아닌 남의 고통을 보고 마치 그것이 나 자신의 고통인 양, 즉각 몸을 던져서 행동하는 것이 가능한가. [.....] 이는 참으로 신비스러운 일이며,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 경험의 세계에서는 어떠한 근거도 찾을 수 없다. 아무리 무디고 이기적인 사람이라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 예들이 매일매일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곤궁에 처해 있고,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 빠져 있다는 단 한 가지 생각 때문에 한 치도 망설이지 않고 순간적으로 반응하며 생면부지의 사람을 돕는다. 이를 위해 때로는 자기 목숨을 버리기까지 한다.....”<쇼펜하우어, ‘도덕의 기초’>[9]

쇼펜하우어의 결론에 따르면 그러한 즉각적인 반응과 행동은 “네가 그것(Tat tvam asi)" 이라는 말로 가장 잘 표현될 수 있는 형이상학적 깨달음이 섬광처럼 지나간 결과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것을 전제한다. 말하자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로막힌 벽이 뚫려서 타인이 더 이상 무관심한 낯선 자로 받아들여 지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의 피부 밑에 나의 신경이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 안에서 내가 고통을 느끼게 된다.”이 근원적 통찰은 “나의 참된 내적 존재가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들 안에 실제로 존재하며..... [그리고] ..... 그것이 자비(함께 고통받음)의 근거로서 모든 참되고 이타적인 덕이 여기에 기초하고, 모든 선행에서 바로 이 자비가 표현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쇼펜하우어>[10]

“근원적 자아는 현실 속에서는 다양하고 구체적인 생명으로 활동한다. 신화에 나타나는 은유들은 바로 이 근원적 자아에 대한 직관으로부터 나온 표징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의례화된 표현들을 통해서, 교훈적인 이야기들과 기도, 명상, 연례 축제 등을 통해서 근원적인 자아가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해당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하나로 모여 마음으로 감성으로 근원적 자아를 알게 되고, 이에 따라 살게 된다.”<조셉 켐벨>[11]

“당신이 걸려 넘어지는 그곳에서 황금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조셉 켐벨>[13]

조셉 캠벨의 목적은 성서 신화들을 탐구함으로써 그것들을 믿을 만하지 못한 것으로 폐기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그것들이 지닌 살아 있는 풍성한 의미들의 세계를 열어 보이려는 데 있다.[15]

스코프 재판 : 1920년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은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금지시키는 주법을 통과시키는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스코프 재판으로 좌절되었다. 존 스코프(John Scope)는 1925년 3월 통과된 이 법을 무시하고 다윈의 이론을 가르쳤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클레런스 대로우의 강력하고도 열정적인 변론으로 근본주의자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주 대법원에서 스코프에 대한 기소는 기각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 법령은 확인되었다. 그러나 1968년 연방대법원은 비슷한 법령이 위헌이라고 선언하였다.[17]

시공을 초월하는 영적 진리들은 은유적 그릇을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다. 은유는 그 외연으로서 역사적 맥락이 지니는 딱딱하고 사실적이며 일차원적인 내용들이 아니라, 그 내포를 통해서만 - 다시 말해 은유가 스스로 일깨우는 진리의 여러 측면들에 대한 증거들의 성운을 통해서만 - 전달될 수 있다.[19]

외연은 일회적이며 시간에 매여 있고 영적이지 않다 : 반면 종교적 은유가 지니는 내포적 의미는 풍부하며 무시간적이고, 다른 어떤 외적 세계에 있는 누군가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 지금 여기 있는 우리들 자신의 내적이고 영적인 경험을 지시한다.[19]

조셉 켐벨의 중요한 가르침에 의하면 이러한 민족적 분열이야말로 오래전에 뿌리를 내린 종교적 가르침들을 왜곡시킨 데 따른 뼈아픈 결과이다. 종교적 은유들을 마음과 영에서 우러나는 상징들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지리적인 사실로 이해하면서 영적인 권리를 주장할 경우 세계는 끔찍하게 분열되고, 어쩔 수 없이 엄청난 비극을 맞게 된다.[23]

자비는 우리들의 내적 품성을 향해 보다 많은 것을 요구하며, 멀리 우리와는 아주 다른 것 같은 사람들의 삶 속으로 우리들 각자가 영웅적인 여행을 하라고 촉구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경험이며, 우리는 이 여행에 뛰어들기 위해 집을 떠날 필요도, 아니 우리가 앉아 있는 의자를 떠날 필요도 없다.[24]

21세기를 위한 캠벨의 메시지는 묵시록적이 아니라 희망적이다. 왜냐하면 그의 메시지는 다시 한 번 우리를 유대-기독교 전통의 토대에 뿌리내리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에덴으로부터 우리를 쫓겨나게 만든 욕망과 두려움을 정복함으로써 수치감으로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인간성을 끌어안도록 하기 때문이다. Tat tvam asi. 네가 바로 그것이다.[25]

제1장 은유와 종교적 신비

“그렇지 않습니다. 신화는 거짓말이 아닙니다. 전체적으로 신화란 상징적인 이미지들과 이야기들을 조합해 놓은 것이며, 인간 경험의 가능성들에 대한 은유이고, 특정한 시대에 이루어진 특정한 문화적 성취입니다.”[30]

나는 전통적인 신화들이 네 가지 기능을 한다고 본다. 첫 번째 기능은 존재의 근원적 조건에 의식을 맞추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주의 ‘신비로운 떨림’을 향해 의식을 깨우고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창세 신화들을 포함하여 원시 신화들은 그 ‘신비스러운 떨림’에 대해 동의하고 ‘예’라고 말하도록 사람들을 이끈다..... 첫 번째 기능은 다음 세 가지 참여의 방식을 통해 현재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일깨우는 것이다. 즉 자기 밖으로 옮겨놓거나 자기 안으로 깊이 침잠하게 되거나, 아니면 스스로 변화하게 한다..... 나는 이것을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신화의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신비적인 기능인데, 이를 통해 존재의 신비의 차원을 발견하고 인식하게 된다.[34]

두 번째 기능은 해석적인 기능이다. 바로 우주 질서의 일관된 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세 번째 기능은 구체적인 도덕 질서, 다시 말해 그 신화가 생겨난 사회의 질서를 정당화하고 지지하는 것이다..... 도덕 질서는 우주적 질서와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거나, 아니면 그 일부분이다. 네 번째 기능은 개인이 삶의 다양한 단계들과 위기들을 통과할 수 있게 하는 것, 즉 개인들이 삶의 전개를 통전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 통전적이란 출생으로부터 중년, 죽음에 이르기까지 개인이 처음에는 그들 자신을 따라, 두 번째는 사회 문화에 따라, 그리고 세 번째는 우주, 마지막으로는 그들 자신과 만물 너머에 있는 ‘신비스러운 떨림’과 일치해서 중요한 사건들을 경험하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38]

신화의 생명력은 그 상징들의 은유적 열정으로부터 나오며, 또한 거기에 의존한다. 은유와 상징은 단순한 지적 개념 이상을 전달한다. 왜냐하면 초월의 현실성에 실제적으로 참여한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은유와 상징의 고유한 특성이기 때문이다.[40]

은유들은 당대 경험의 맥락으로부터 생생하게 솟아오를 때, 인간 존재의 이러한 깊은 차원들을 향해 말을 거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새로운 신화는 사회적으로나 영적으로 빈곤하게 됨으로써 급속하게 과거의 은유로 변한다.[41]

우리들 가운데 이미 내재하고 있는 새로운 신화, 정신에 고유하게 내장되어 있는 신화는 잠자는 왕자가 연인의 키스를 기다리듯이 새로운 은유적 상징이 자신을 깨워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은유와 상징들은 반드시 현재의 삶과 사고, 경험으로부터 나올 것이며, 그 자체의 힘으로 의식의 가장 내밀한 층을 건드릴 수 있는 특수한 언어로서, 새롭게 충전된 신화를 우리들에게 되살려놓을 것이다.[41]

☞ 여기서 신화를 => 새로운 이론(노후설계 등)으로 대체하고, 은유를 새로운 문장 또는 표현으로 바꾸어도 좋은 표현이 될 듯하다. 구본형 사부는 새로운 표현을 만들고, 그것이 안성맞춤의 표현일 때 환희를 느낀다고 한다. 모든 것은 변한다. 이전의 이론과 표현은 새로운 옷을 기다린다.

예술가들은 각자의 분야와 재능에 따라 신화의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 소명을 받았다.[41]

신화는 특정한 마음의 상태들을 내포하는 은유적 언어들의 조직체라고 할 수 있다.[41]

은유적 상징들을 이해하고, 그것들이 원래의 꾸미지 않은 방식대로 우리 의식의 내밀한 차원에 말을 걸도록 우리가 허락하지 않는 한, 신화의 기능에 대한 이해의 진정한 발전은 없을 것이다.[43]

신화는 의미의 영역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정신과 감성에 부여하는 상징들의 체계이다.[44]

신화적 상징 체계는 본질적으로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 달리 말하자면 동일한 삶의 경험 영역을 공유하는 공동체 안에서만 기능할 수 있다.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삶의 경험들을 심오하고 풍성하게 느끼고 전달하는 상징들을 불러올 수 있을까? 이 상징들은 그 자체를 넘어 꼭 이야기 해야만 하는 궁극적 진리를 지시해야 한다. 삶은 절대적으로 고정된 어느 한 가지 의미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이 상징들은 자체에 부여된 온갖 의미들을 넘어서서, 즉 모든 정의들(definitions)과 관련성들을 넘어서서 참으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를 지시해야 한다. 그 신비란, 바로 우리들 자신과 우리가 사는 세계의 존재 자체와 마찬가지이다. 만일 우리가 그 신비에 고정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 신비의 참된 깊이에 대한 경험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인이 의미의 맥락 속으로 마음을 데리고 가서 그 의미들을 넘어서는 곳에 마음을 던져놓는다면, 그 모든 정의의 범주들을 넘어서는 데서 오는 경이로운 환희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정의의 범주를 넘어서서, 불가능한 여행을 가능케 하는 은유의 기능을 감지할 수 있다.[46]

제2장 종교적 신비 경험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삶은 단순히 전체의 일부분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바로 전체입니다. 전체는 이것저것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브라만들이 거룩하고도 신비롭게 표현한, 실로 단순하고 명료한 것입니다.[.....] Tat tvam asi. 그것은 바로 너다.”<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 [53]

본질상 종교적 경험은 오직 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경험을 다른 누군가와 나누는 순간 그 특성은 사라져버린다.[54]

종교적 관점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선과 악을 대립시키는 윤리적 관점으로서, 성서에 근거한 서구 기독교에서는 선과 악을 대립시키는 윤리를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서구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로 인해 이원론적 영역에 매여 있다. 그러나 신비적 관점에서는 선과 악을 한 과정이 지니는 두 측면들로 이해한다. 중국의 표징이나 태극이 여기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59]

신비의 경험은 단지 기대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적 계획을 포기해야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계획이란 두려움과 욕망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계획을 버리면 빛이 다가올 것이다.[61]

제3장 신에 대한 개념들

정신의학의 목표는 인간이 잘 알지도, 규명하지도 못하는 근원들로부터 나오는 에너지와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정신 구조를 일치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초월에 대해 투명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유리창처럼 되어 단절되었던 빛이 우리를 통해 비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도 초월에 대해 투명해야 마땅하다.[67]

무엇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해야 하는가? 전구인가, 아니면 의식인가? 전구가 없었으면 의식도 없었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식이다. 만일 스스로를 의식과 동일시한다면, 육체는 사라진다. 어떠한 일도 일어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깨달음에 이르게 해준 육체에게 감사할 수 있고, 또 육체를 사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육체는 단지 매체일 뿐이다.[70]

‘개체와 개체는 아무 막힘이 없다(事事無의).’ 이런 생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마음의 각성이며, 자비, 즉 ‘Mitleid'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 깨달음을 통해 열정(passion)에서 자비(compassion)로 관계가 변화된다. 이것은 단순한 소유 관계나 타인과의 투쟁 관계가 아니고, 타인과 동일시하는 관계이다. 물론 이러한 동일시의 관계 안에도 투쟁은 있지만, 무자비한 동물적 투쟁 양태와는 전혀 다른 것이 된다.[73]

신화는 자신의 가장 내밀한 세계를 탐구하는 사람들의 환상으로부터 유래했다. 그리고 문화는 신화에서 유래했다..... 물론 나는 신화가 사실에 기초하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실이건 아니건, 신화가 심리학적 호소력을 지니는 것은 신화로서 그렇다고 말하려는 것일 뿐이다. 전반적인 중세문화는 그 ‘구원’의 소식과 은총을 세상에 알리고자 고안된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신화와 결부되어 있는 사실들의 역사성을 의심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신화를 현실화시키는 제의들을 거부하게 되었을 때, 중세 문명은 붕괴되었고, 새로운 꿈과 환상, 믿음, 그리고 성취에 대한 기대로 영감을 받은 새로운 문명이 생겨나게 되었다.[77]

신화의 첫 번째 기능을 나는 존재하는 자, 영원히 존재할 자, 존재의 신비, 우주와 그 안에 있는 자아의 신비에 대한 경외감과 감사의 감정을 개인 안에서 일깨우고 유지시키는 신비적 기능이라고 지칭했다.[79]

상징은 직접 우리 영혼을 향해 말한다. 영혼은 그 상징을 보여주고 해석하는 사람이 전혀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더라도, 그 상징이 무엇을 말하는지 즉각적으로 안다.[81]

서구 종교는 ‘관계성’의 종교이다. 피조물 a가 창조주 X와 관계(related : R)를 맺는 것이다(aRX). 반면 동양의 종교에 대한 적절한 묘사는 훨씬 단순하다. a=X라는 동일시일 것이다.[84]

인간에게는 동물들이 알지 못하는 삶의 또 다른 질서, 존재의 신비 앞에서 느끼는 경외, 즉 삶에서 느끼는 영적 감정의 뿌리이자 가지라고 할 수 있는 ‘신비스럽고 떨리며 매혹적인것’에 대한 경외가 있다. 이것은 고유하게 인간적이고 영적인 생명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탄생 - 동정녀 탄생 - 이다.[87]

우리는 지구의 감각기관들이다. 우리는 우주의 감각이다. 바로 우리 자신 안에 그것이 있다. 한때 우리가 믿었던 신들은 저기 밖에 있고, 그 신들은 우리들 자신이 투사된 것이다. 그 신들은 우주의 신비를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해석하고자 했던 인간 상상력의 산물이다.[89]

제4장 종교적 상상력과 전통신학의 규칙들

종교적 언어의 본질적 구조인 은유들은 구체적인 지시물들, 외연과 관련해서 읽혀졌다. 그 결과, 실은 은유의 전체적인 의미는 분열과 이원성을 넘어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적대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성직자들은 일차적 임무인 상징을-그들은 사실 상징의 수호자이다- 이해하는 일에 실패했을 때, 유일하게 우리의 영적 탐험을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은 예술가들뿐이다.[96]

감정은 자아를 향한 여행, 즉 모든 것에 앞서는 예술로부터 온다. 예술을 통해서 우리는 다른 모든 요청들을 밀어놓고 형이상학적인 부름을 느끼며, 거기에 응답하게 된다. 모든 종교들의 전면은 윤리적이다. 그러나 종교에는 선악을 넘어서고 나와 너를 넘어서며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형이상학적 근거가 있다. 상징이 그 문을 열때에는 이 형이상학적 배경이 빛나고 흘러나오게 된다.
신화의 기능은 우리가 살고 있는 상황은 물론 그 장소를 영화(靈化)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술가들의 직무는 당신을 위해서 그 일을 하는 것이다.[101]

제5장 유대-기독교 전통의 상징들

인간의 심장 박동은 우주의 심장 박동과 일치한다. 그 둘은 같다. 이러한 리듬의 일치야말로 오래된 우주론적 신화의 핵심이다. 우주론적 신화는 소우주와 대우주가 동일한 박동을 가지고 서로 공명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120]

“최상의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리고 차선의 것은 오해받는다.”[129]

은유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은유는 사실이 아님을 아는 사람들,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은유가 사실이 아님을 아는 사람들을 ‘무신론자’라고 부르며, 은유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종교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들 중 누가 실제로 의미를 이해할까?[129]

에덴이라는 목가적인 장소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동산은 대립의 쌍들로-남성과 여성, 선과 악-이루어진 - 우리들의 정신과 생각이 신의 정신과 생각만큼 거룩하다는 것에 대한 은유이다.[133]

전설은 상징적 주제들과 접목되어 모호하게 기억된 역사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설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이 아니라, 상징화된 개념이나 상징화된 개념들의 체계를 표현한 것으로 읽어야 한다.[142]

신을 하나의 사실로 생각할 때는 신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할 수 없다. 그러나 신을 생명의 역동성에 대한 은유로 보고, 우리 자신을 거기에 포겔 때 우리는 신이다.[147]

기독교는 모든 것을 역사화하면서 동시에 매우 강력하게 영지주의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동산에서 일어난 사건이 기독교 안에서 어떻게 이해되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신화적인 사건이었지만,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되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역사적 사건이지만, 선행하는 신화적 사건에 대한 답으로 해석되었다.[148]

어린이들은 아주 구체적인 언어로 가르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이는 자라며, 산타클로스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사실 그는 아빠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에 관해 배워가는 우리도 성숙해져야 하며, 제도 교회는 보다 성숙한 방식으로 상징들의 의미를 성인들에게 전달해야 한다.[150]

제6장 유대-기독교 영성의 상징들에 대한 이해

신화적 구원자의 전기는 교리가 지니는 의미에 대한 시각적 진술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위대한 인물들에 전설이 덧붙여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웅-구원자의 인격에는 그러한 시각적 서술이 따른다.....아브라함 링컨.....마찬가지로 조지 워싱턴의 정직함에 대한 수많은 일화들도 만들어졌다. 마치 철이 자석에 붙듯이, 그의 순수함에 대한 이야기들에 덧붙여졌다. 그러한 이야기들은 그 사람의 위대함에 대한 증거의 구름으로 존재하게 되고, 그 이야기들의 역사적 정확성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157]

어째서 기독교인들에게 예수의 십자가가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본질적인 의미를 내포하는데, 그것은 전혀 역사적이 아니라 신화적이다. 왜냐하면 사실 에덴동산이나 말하는 뱀 같은 것은 없었으며, 원인(猿人) 이전에 홀로 존재했다는 ‘최초의 인간’이나, 혹은 꿈같이 그의 갈비뼈로부터 나왔다는 ‘어머니 이브’도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에덴동산 신화 같은 것들이 빈번하게 역사로 잘못 읽히고, 신화적 해석들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같은 실제적 사건들과 결부되기도 했지만 신화는 본래 역사가 아니다.[195]

만일 당신이 세상의 빛나는 환희를 본다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해 “예”라고 말할 것이고, 만일 그 환희를 보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것이다. 이러한 영지주의적 통찰은 앞에서 식물과 관련된 신화들과 관련하여 이미 언급했던 경험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 경험을 통해 만유 안에 있는 생명의 역동성을 확인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세상의 현상적 측면에만 매일 것이 아니라 직접 그 핵심을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203]

제7장 질의응답

여러분은 신화 체계의 조각들 가운데서 여러분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조각을 선택할 수 있다. 신화 조각의 도움을 받아 상징들이 유래했던 무의식의 체계와 여러분 스스로 관계를 만들어가도록 해보라.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당신은 황소를 보게 되고,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보았던 야훼의 면모도 보게 될 것이다. 황소를 붙잡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황소는 사라지고 당신 홀로 거기에 있게 된다. 그 다음에는 모든 것이 사라진다. 물론 이것은 초월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이런 황홀 속에서 자연은 돌아오기 시작한다. 이제 당신은 두 손에 넘치는 풍요로움을 가지고 도시로 돌아온다. 이 길은 도시로 돌아오는 마지막 단계에서 완성된다. 행복을 베푸는 손이 되어 도시로 들어온 당신은 황소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려는 젊은이들에게 한마디 해 줄 수 있을 것이다.[209]

산에서 십계명을 가지고 내려온 모세의 경우처럼, 모든 사회질서들은 결국 홀로 신비를 경험하고 시험을 통과해서, 인류를 위한 가르침을 가지고 돌아오는 한 개인의 깨달음과 경험에 소급된다.[210]

라틴어 ‘educere'(이끌다)가 시사하듯이, 교육(education)의 기본 개념은 밖에서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 안에 있는 것을 이끌어내는 것이다.[213]

영원은 바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며, 나 자신의 진리와 존재의 영원성을 나의 가능성 안에서 경험할 수 있다. 만일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자신이 본래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죽지도 않으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통찰이 태양의 신비, 태양 빛으로 표현되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될 것이다.[214]

“나는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고귀한 마음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일을 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세상을 향해서 즐거움, 삶, 그리고 고통 없는 기쁨만을 추구하는 이들이 아니라, 고귀한 마음으로 멋지게 쓰라림을 견뎌내는 이들, 그들의 쓰라린 삶의 멋짐, 멋진 삶의 쓰라림, 그리고 멋진 죽음을 지켜내는 이들을 위해” 글을 쓴다고 말한다.<고트프리트, 트리스탄과 이졸데 작가>[215]

어떻게 보통 사람이 초월에 이를 수 있는가? 매 먼저 시를 공부하라고 말하고 싶다. 시를 어떻게 읽는지 배워라. 시를 읽을 때 반드시 메시지나 메시지의 단서를 얻는 경험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초월의 경험은 서서히 올 수 있다. 초월에 대한 경험에 이르는 길은 많다.
의식은 중요한 접근법 가운데 하나다. 의식은 우리가 신화의 제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 내적으로 영상(image)과 함께 움직일 준비가 되면 초월이 다가온다.[219]

남자나 여자가 개인에게 속하지 않고, 개인을 도구로 부리는 어떤 위대한 힘에 속한 가치들을 위해 일할 때, 그는 영웅이 된다. 여인은 생명을 낳는 힘의 도구(vehicle)가 됨으로써 영웅이 된다.[219]

우리 문화에서는 제의와 제의가 상징하고 강화하는 신화들을 모두 파괴해 버렸다. 미국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신화들과 제의들은 퇴색했으며, 인종적, 계급적 분열은 가속화되고 있다. 어쩌면 사람들은 신화적으로 자신이 어떤 집단과 어울리는지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국가로서의 집단이 아니라, 인종적인 하위 집단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안게 될 것이다. 이는 모든 분리된 집단들을 하나로 묶는 고유 신화가 약화된 결과이다.[222]

오늘날 미국에서는 피켓 시위나 그와 비슷한 시위의 선이 얼마 안 되는 효과적인 제의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집단의 구성원들이 함께 걷고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피켓 시위의 선을 넘어갈 수 없다. 그것은 분리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피켓 시위의 선은 성스러운 공간이다.[223]

모름지기 예술이란 전체 사회를 조직하는 신화를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중세는 신화에 토대를 두 사회였다[227]

제8장 대담

신화는 거짓을 뜻하는 말로 잘 쓰이지만, 실제로는 진리를 표현하는 영구적인 수단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기억하고 싶고 전하고 싶은 이야기들, 예컨대 아서왕의 전설이나 성서의 영속적인 이야기들을 일시적 유행이나 변덕스러운 일, 일상의 덧없는 사실, 또는 기네스북에 오른 세계 기록 같은 것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신화적 형태로 말했다. 신화와 상징은 모든 종교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특징으로, 종교 체험의 특수한 언어이다.[237]

우주시대에는 두 가지 명제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첫째, 우리는 사회적으로 새로운 상징체계로 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낡은 상징체계는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현존하는 상징들은 구체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해석될 때 계시를 드러냅니다.
우주시대의 신비적 명제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세계는 끝나가고 있습니다. 우주의 중심으로서의 세계, 하늘로부터 분리된 세계, 집단 내의 구성원들에게 만으로 사랑이 한정되는, 지평선에 매인 세계, 이 세계는 사라지는 세계입니다. 묵시록은 불타는 아마겟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지와 자기만족이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조합(조합)할 수 있는 신화를 가지지 못한, 갈라지고 분열된 세계관은 끝나고 있습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는 배타주의, 진리를 독점한 집단이 있다는 생각, 이것이 사라져야 할 세계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입니까? 그 나라는 하느님의 보편적 현존이 우리의 이웃들 안에서, 우리의 원수들 안에서, 우리 모두 안에서 실현되는 데 있습니다.[246]

당신도 알듯이, 우리를 앞으로 나가게 하는 것은 경외감입니다.[250]

역자 해설

캠벨은 이 책에서 성서와 기독교의 많은 이야기들을 역사와 사실이라는 관점보다는 인간과 세계, 신에 대한 근원적인 이야기로 보고, 세계의 다양한 여러 신화들과 비교하여 구조적 유사성을 발견하고, 그러한 구조에 나타나는 인간 종교성의 근본 구조를 밝히려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263]

인간의 원초적인 종교적 심성과 거기에 근거한 신화는 도덕과 윤리라는 사회적인 검열기제가 인간의 종교의식 속에 내면화되기 이전에 형성된 것이다.
캠벨이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이처럼 원초적이고 노골적이며 다듬어지지 않은 그대로의 인간의 종교성이다. 이 원초적인 종교성에 비추어 기독교 신화들을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캠벨의 관심은 위로부터 오는 계시의 빛에서 준엄한 하느님의 말씀으로 성서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경험의 빛에서 인간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 경우 캠벨이 생각하는 인간 경험 역시 역사․사회․정치적이라기보다는 생물학적이고 심리학적인 경험 쪽에 더 가깝다. 캠벨은 그러한 경험들이 인간의 원초적인 종교적 심성의 형성에 더 직접적으로 관련되고, 따라서 신화에 바탕을 둔 종교의 요체에 더 가깝다고 보는 것 같다. 이 때문에 캠벨은 인류의 심원한 집단 무의식을 이야기했던 융의 심리학을 신화 해석에 적극적으로 이용한다.[264]

캠벨이 발견한 종교적 깨달음의 요체란 인간과 자연, 온 우주를 관통하는 근원적 자아에 대한 깨달음이다. 근원적 자아 안에서 나와 너, 그리고 자연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면, 근원적 자아란 다름 아닌 나 자신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원 제목대로 “네가 바로 그것”이라는 깨달음이다.[265]

유대인들은 자연의 신성화를 우상 숭배, 즉 신화라 하여 단호하게 거부했지만, 자신들의 민족사와 하느님을 뗄 수 없이 결부시켰다. 이들은 하느님의 뜻이 계시되는 장소로서 역사를 강조하는 대신 신화를 거부했다. 그러나 구원사 밖에서, 이스라엘의 신앙적 자기이해 밖에서 보았을 때 이들이 말하는 역사는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사실로서의 역사일 수 없고, 신앙에 의해 해석된 역사, 계시로서의 역사, 다시 말해 신화적인 역사이다. 성서적 종교에서 신화란 역사와 대척점에 놓이는 말이지만, 사실상 이들은 역사를 신화화했다. 유대인들은 신화와 대립된 것으로서 역사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역사 속에서 계시되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새로운 신화를 창조한 것이다.[274]

캠벨은 기독교가 역사적 계시와 교회라는 사회 제도를 강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노정시키게 된 문제점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캠벨은 교회가 순수한 종교적 열정에서 시작되었지만, 역사적 발전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사회 제도로 정착했고, 결국에는 인간의 내적 본성을 신성과 중재하는 역할을 하기보다는 사회적, 정치적 실재로서 스스로를 위한 주장만을 하게 되었으며, 현대의 역사적, 과학적 지식으로부터 제기되는 공격에 대해서도 과거의 주장만을 시대착오적으로 되풀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본연의 기능인 종교적 경험의 중재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276]

그러나 무엇보다도 캠벨이 이 책에서 집요하게 비판하는 것은 신비를 전달해야 할 기독교 전통의 언어가 오로지 역사적으로 이해됨으로써 사실들에 대한 서술로 변질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역사적 계시를 강조함으로 인해 종교적 언어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은유와 상징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신성과의 일치에 대한 감각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캠벨에 의하면 “신화의 역동적이고 은유적인 언어가 전달하는 경험, 내지는 깨달음이란 모든 개체적 존재의 내밀하고도 깊숙한 곳에 있는 내적인 불꽃이 결국은 만물의 근원이자 신으로서의 궁극적 존재와 하나라는 것이며, 종교적 수련의 중요한 과제는 내 안에 있는 신성을 발견하는 것이다.”[277]

캠벨은 우리 자신 안에서 신화적 코드가 고유하게 내장되어 있다고 한다. 그는 이것을 칼 융이 “집단무의식의 원형”이라고 지칭했던 것과 연결시킨다.[281]

그러나 캠벨의 해석에 의해 잃는 것도 분명히 있다..... 캠벨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역사적 계시종교로서의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에 대한 강조점은 포기된다. 이러한 기독교의 강조점은 역사와 사회의 죄악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식, 개인의 죄에 대한 철저한 부정에서 나타난다.[283]

죄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는 역사와 사회의 갈등과 모순을 드러내고, 인간 내면의 왜곡과 위선을 밝힌다. 죄에 대한 이러한 철저한 의식은 경직된 도덕주의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는 하지만, 인간과 사회에 대해 관념적, 감상적 낙관주의에 빠지지 않고 현실적 이해를 갖게 한다. 죄에 대한 기독교적 감수성은 삶의 부정성, 역사의 갈등과 모순, 즉 고통 앞에서 가장 잘 발휘된다. 그리고 캠벨의 기독교 신화 해석에서 근본적으로 잃어버리는 것이 이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283]

캠벨이 집요하게 지적하듯이 성서의 언어를 사실적이고 역사적인 언어로 문자주의 안에 가두어서도 안 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성서의 언어가 탄생했던 당시의 역동적인 인간 경험의 세계, 그 안에서 분출되는 새로운 세계와 초월에 대한 전망은 나와 자연, 시계를 관통하는 일원적이고도 근본적인 신비에 대한 깨달음만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차원이 있다. 사실 캠벨이 시종일관 주장하는 ‘네가 그것이다’라는 원초적인 종교적 깨달음 역시 세련된 철학적 가르침에 머무르지 않고, 그가 추구하는 대로 원초적이고도 생생한 종교적 경험을 담아내려면, 종교적 언어의 역사적이고 경험적인 차원을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성찰해야 할 것이다.[284]

캠벨의 도전과 문제 제기는 어쩌면 우리를 어려운 양자택일 앞에 세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 밖의 초월인가, 아니면 내 안의 초월인가. 동일성과 일치의 종교인가, 아니면 신의 절대타자성과 복종의 종교인가. 그러나 정말로 종교 문제에서 선택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초월은 내 안이건 내 밖이건 그때그때 내가 발견하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던가. 때로 어디선가 밖으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에 겸허히 침묵하고 무릎을 꿇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내가 내 안에 저 깊숙한 곳에서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일과 무엇이 다른가. 살아 있는 종교 경험은 “이거 아니면 저거” 이라기보다는 “이것도, 저곳도”에 가깝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종교와 그 상징들이란 인간 경험의 심원하고도 불가해한 경지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 경험의 무게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285]



3. 내가 저자라면

「신화의 힘」, 「신화의 세계」,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들」에 이은 조셉 캠벨의 네 번째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전 책들에서 찾지 못했던 즐거움을 느꼈다. 캠벨에 대한 이해가 내 머리 속에서 조금씩 자라고 있다는 것과, 그에 따라 신화의 힘, 신화의 세계를 읽으면서 갖게 된 캠벨에 대한 약간의 거부감(기독교에 대한 폄하 또는 신화중심적 세계관에 대한 반복되는 강조)이 완화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내가 캠벨의 사상과 철학에 조금 익숙해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 책이 독자들이 받아들이기 쉽게 잘 만들어진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이 책은 캠벨의 강연과 유고 중 유대-기독교 영성의 기원과 상징, 의미에 대한 부분을 발췌하여 재편집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1979년 캠벨을 인터뷰한 바 있는 유진 케네디 박사가 편집하면서 독자를 위한 세심한 배려를 한 듯하다.

우선 전체적인 구성을 보면 1장에서 4장 까지는 신화와 종교에 대한 정의와 일반적 이해를 돕는 부분으로 구성 된다.

제1장 은유와 종교적 신비 - 신화의 정의와 기능, 신화의 언어(은유), 은유와 신비
제2장 종교적 신비의 경험 - 상징과 종교적 경험, 신비경험
제3장 신에 대한 개념들 - 신에 대한 개념들의 의미, 신의 신비에 대한 경험요소들
제4장 종교적 상상력과 전통신학의 규칙들 - 전통신학의 규칙들과 종교적 상상력의 퇴화, 상상력과 신학적 물음의 관계

5장(유대-기독교 전통의 상징들)과 6장(유대-기독교 영성의 상징들에 대한 이해)에서는 성경에 나타나는 시간 순서에 따라, 주요 장면들의 키워드를 발췌하고 그에 대한 설명을 해 간다. 전체적으로 정리되고 깔끔한 느낌을 준다.

5장에서는 구약에 해당하는, 창세기, 유대민족의 아버지 아브라함.
6장에서는 동정녀 탄생, 동굴, 유아(시절), 이집트로의 도피, 스승이 된 아이, 메시아, 기적들, 최후의 만찬, 유다, 십자가 처형, 십자가, 세계의 종말 의 순서로 내용이 전개된다.

7장(질의응답)에는 캠벨이 실제 강연 후 질문시간에 나왔던 내용을 편집, 정리해 놓아 마치 앞장들의 내용이 강연이고, 강연 후 질문을 하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8장(대담)은 유진케네디가 인터뷰한 내용으로 구성 된다.

각 장의 서두에는 그 장을 구성하는 내용의 출처를 상세히 밝히고 있어 구성 내용에 대한 신뢰감을 주는 것은 물론, 추가적인 공부를 원하는 독자들에게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 책은 백과사전 형식, 읽기 쉬운 에세이집 형식으로 편집되었다. 중요한 키워드에 따라 정리되고, 목차의 제목도 그 키워드를 그대로 사용해서 관심 가는 분야를 찾아가거나, 책을 읽다가 다시 보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찾아가서 다시 읽기에 좋게 돼있다. 전체 책의 분량도 290쪽으로 부담스럽지 않고, 각 절의 페이지 수를 5에서 10페이지 내외로 만들어 지루하지 않게 책장을 넘길 수 있도록 한다. 또한 각주를 잘 활용해서 상세한 부가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후한 점수를 줄만하다.

이 책을 좋은 책으로 만드는 데는 번역자인 박경미의 공로가 적지 않다.

우선 번역이 비교적 정확하고 알기 쉽게 되었다는 점과, 종교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캠벨이 강연 중 잘못 이야기 한 부분을 바로잡아 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책 내용에 대한 신뢰를 갖게 한다는 점이다.

또한 이 책의 백미 중 하나는 “역자 후기”이다. 역자는 캠벨의 기독교에 대한 문제 제기를 명쾌하게 요약 정리할 뿐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 탄생 시의 지역적, 자연적 환경과 기독교를 역사적 관점에서의 해석 할 수밖에 없는 이유, 종교(기독교)의 사회적, 정치적 역할 등 캠벨이 밝히지 않는 부분을 설명함으로써 기독교의 입장을 변론한다.

캠벨이 제기한 기독교의 문제점에 대해서 일부 시인하기도 하지만, 캠벨의 주장대로 성서를 신화적으로 해석 할 경우 잃는 것도 있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죄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는 역사와 사회의 갈등과 모순을 드러내고, 인간 내면의 왜곡과 위선을 밝힌다. 죄에 대한 이러한 철저한 의식은 경직된 도덕주의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는 하지만, 인간과 사회에 대해 관념적, 감상적 낙관주의에 빠지지 않고 현실적 이해를 갖게 한다. 죄에 대한 기독교적 감수성은 삶의 부정성, 역사의 갈등과 모순, 즉 고통 앞에서 가장 잘 발휘된다. 그리고 캠벨의 기독교 신화 해석에서 근본적으로 잃어버리는 것이 이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283p)”

그리고 캠벨에 대한 충고도 잊지 않는다. “캠벨이 시종일관 주장하는 ‘네가 그것이다’라는 원초적인 종교적 깨달음 역시 세련된 철학적 가르침에 머무르지 않고, 그가 추구하는 대로 원초적이고도 생생한 종교적 경험을 담아내려면, 종교적 언어의 역사적이고 경험적인 차원을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성찰해야 할 것이다.(284p)” 부드럽고 완곡한 표현을 쓰지만, ‘캠벨의 주장은 관념적, 감상적 낙관주의에 불과하다’는 강한 비판으로 읽힌다.

역자 후기는 이 책을 매우 균형 잡힌 책으로 만들어 준다. 이제껏 읽은 4권의 책에는 캠벨본인과 예찬론자들의 주장만을 읽어왔다. 역자 후기가 반대 시각에서 캠벨을 읽는 사례를 보여주었다. 균형 잡힌 독서와 사고가 필요한 이유를 깨닫게 한다.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조셉 캠벨의 목적은 성서 신화들을 탐구함으로써 그것들을 믿을 만하지 못한 것으로 폐기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그것들이 지닌 살아 있는 풍성한 의미들의 세계를 열어 보이려는 데 있다.[15]

“그렇지 않습니다. 신화는 거짓말이 아닙니다. 전체적으로 신화란 상징적인 이미지들과 이야기들을 조합해 놓은 것이며, 인간 경험의 가능성들에 대한 은유이고, 특정한 시대에 이루어진 특정한 문화적 성취입니다.”[30]

우리들 가운데 이미 내재하고 있는 새로운 신화, 정신에 고유하게 내장되어 있는 신화는 잠자는 왕자가 연인의 키스를 기다리듯이 새로운 은유적 상징이 자신을 깨워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은유와 상징들은 반드시 현재의 삶과 사고, 경험으로부터 나올 것이며, 그 자체의 힘으로 의식의 가장 내밀한 층을 건드릴 수 있는 특수한 언어로서, 새롭게 충전된 신화를 우리들에게 되살려놓을 것이다.[41]

☞ 여기서 ‘신화’를 =>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야 할 무엇인가로 대체하고, ‘은유’를 ‘새로운 문장 또는 표현’으로 바꾸어도 좋은 표현이 될 듯하다. 구본형 사부는 새로운 표현을 만들고, 그것이 안성맞춤의 표현일 때 환희를 느낀다고 한다. 모든 것은 변한다. 이전의 이론과 표현은 새로운 옷을 기다린다.

신화는 의미의 영역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정신과 감성에 부여하는 상징들의 체계이다.[44]

인간에게는 동물들이 알지 못하는 삶의 또 다른 질서, 존재의 신비 앞에서 느끼는 경외, 즉 삶에서 느끼는 영적 감정의 뿌리이자 가지라고 할 수 있는 ‘신비스럽고 떨리며 매혹적인것’에 대한 경외가 있다. 이것은 고유하게 인간적이고 영적인 생명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탄생 - 동정녀 탄생 - 이다.[87]

신화의 기능은 우리가 살고 있는 상황은 물론 그 장소를 영화(靈化)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술가들의 직무는 당신을 위해서 그 일을 하는 것이다.[101]

어떻게 보통 사람이 초월에 이를 수 있는가? 매 먼저 시를 공부하라고 말하고 싶다. 시를 어떻게 읽는지 배워라. 시를 읽을 때 반드시 메시지나 메시지의 단서를 얻는 경험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초월의 경험은 서서히 올 수 있다. 초월에 대한 경험에 이르는 길은 많다.
의식은 중요한 접근법 가운데 하나다. 의식은 우리가 신화의 제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 내적으로 영상(image)과 함께 움직일 준비가 되면 초월이 다가온다.[219]

신화는 거짓을 뜻하는 말로 잘 쓰이지만, 실제로는 진리를 표현하는 영구적인 수단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기억하고 싶고 전하고 싶은 이야기들, 예컨대 아서왕의 전설이나 성서의 영속적인 이야기들을 일시적 유행이나 변덕스러운 일, 일상의 덧없는 사실, 또는 기네스북에 오른 세계 기록 같은 것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신화적 형태로 말했다. 신화와 상징은 모든 종교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특징으로, 종교 체험의 특수한 언어이다.[237]

캠벨은 기독교가 역사적 계시와 교회라는 사회 제도를 강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노정시키게 된 문제점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캠벨은 교회가 순수한 종교적 열정에서 시작되었지만, 역사적 발전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사회 제도로 정착했고, 결국에는 인간의 내적 본성을 신성과 중재하는 역할을 하기보다는 사회적, 정치적 실재로서 스스로를 위한 주장만을 하게 되었으며, 현대의 역사적, 과학적 지식으로부터 제기되는 공격에 대해서도 과거의 주장만을 시대착오적으로 되풀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본연의 기능인 종교적 경험의 중재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276]

그러나 캠벨의 해석에 의해 잃는 것도 분명히 있다..... 캠벨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역사적 계시종교로서의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에 대한 강조점은 포기된다. 이러한 기독교의 강조점은 역사와 사회의 죄악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식, 개인의 죄에 대한 철저한 부정에서 나타난다.[283]

캠벨의 도전과 문제 제기는 어쩌면 우리를 어려운 양자택일 앞에 세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 밖의 초월인가, 아니면 내 안의 초월인가. 동일성과 일치의 종교인가, 아니면 신의 절대타자성과 복종의 종교인가. 그러나 정말로 종교 문제에서 선택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초월은 내 안이건 내 밖이건 그때그때 내가 발견하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던가. 때로 어디선가 밖으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에 겸허히 침묵하고 무릎을 꿇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내가 내 안에 저 깊숙한 곳에서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일과 무엇이 다른가. 살아 있는 종교 경험은 “이거 아니면 저거” 이라기보다는 “이것도, 저곳도”에 가깝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종교와 그 상징들이란 인간 경험의 심원하고도 불가해한 경지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 경험의 무게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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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8 (03) 신화와 함께 하는 삶- 조셉캠벨 이은미 2008.04.21 1897
» [03] 네가 바로 그것이다 - 조셉 캠벨 [2] 정산 2008.04.21 1884
1406 7_신화의 이미지, 조셉 캠벨 [1] [1] 홍스 2008.04.21 2434
1405 [03] 신화와 함께 하는 삶 - 조셉 캠벨 [2] 거암 2008.04.21 1907
1404 [03] 신화와 함께하는 삶-조셉캠벨 [1] 손지혜 2008.04.21 1919
1403 (03) 네가 바로 그것이다-조셉 캠벨 이한숙 2008.04.21 2882
1402 (07) 신화와 함께 하는 삶 2. [1] 서지희 2008.04.21 2104
1401 (07) 신화와 함께 하는 삶 1. 서지희 2008.04.21 1711
1400 [03]신화의 이미지 - 조셉 캠벨 [1] [4] 양재우 2008.04.21 2164
1399 신화와 함께 하는 삶-조셉 캠벨 [1] [2] 유인창 2008.04.20 2282
1398 [03] 신화의 이미지 - 조셉캠벨 최지환 2008.04.20 2322
1397 열하일기1(미완성 정리) [1] 김지현 2008.04.16 2819
1396 [50] 황진이, 선악과를 말하다/ 황진이ㆍ문화영 [3] 써니 2008.04.16 3065
1395 나는 무엇을 잘 할 수 있는가 [6] 김나경 2008.04.16 2673
1394 6. 시인은 노래 했노니 이것이 험로라고 [5] 서지희 2008.04.14 2204
1393 6. 시인은 노래 했거니 이것이 험로라고 [1] 서지희 2008.04.14 18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