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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7일 22시 21분 등록

● 저자에 대하여

사람의 삶은 끊임없는 만남의 연속이다. 그 만남의 대상은 사람일수도 있고, 책일수도 있고, 하나의 사물일수도 있다. 그러한 만남은 가볍게 스쳐 지나가기도 하지만, 한 사람의 삶 자체를 바꾸어 놓기도 한다.
신화학자인 캠벨에게도 이러한 만남은 예외일수 없다. 캠벨은 책으로, 실제 대면으로 일반 대중보다는 훨씬 많은 만남을 가졌다. 그중에서도 캠벨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두 번의 만남으로 보인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어찌 단 두 가지의 만남만이 큰 영향을 미쳤을까마는, 캠벨의 삶을 큰 틀로 보았을 때 그럴 수 있다는 말이다.

그 둘 중 첫 번째는 1910년 뉴욕에서이다. 1910년은 1904년생인 캠벨이 여섯 살이 되던 해였다. 캠벨은 아버지와 남동생과 함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버팔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를 보러갔다. 기병대들이 아메리카 원주민을 토벌하는 그 쇼에서, 캠벨은 토벌당하는 인디언 원주민들에 더 관심을 가졌다. 이는 캠벨의 커다란 만남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 후 캠벨은 뉴욕 자연사 박물관을 통해 인디언 문화와 제의를 공부하고 인디언에 대한 탐구를 계속했다. 결국 이러한 경험이 어린 그에게 인생의 방향을 정하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인디언들의 종교와 무속은 서양의 그것과는 아주 다른 독특함과 고유성이 있다. 인디언들은 토템숭배가 일반적 풍습이었고 관련된 신화가 널리 퍼져 있었다. 거기에 등장하는 동물들로는 곰 까마귀 여우 독수리 산양 고래 같은 것들이다. 그들은 이러한 동물들을 영물로 취급했다. 인디언들은 알래스카에서 미국 남부지방까지 넓게 퍼져 살았고, 지역과 부족에 따라 신화도 다양하게 발달했다.
인디언들의 신앙은 샤머니즘이 가장 보편적으로 퍼져있었다. 인디언들은 인간이 정령들과 직접 교접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교접은 자식들에게까지 전승되어 내려간다고 믿었다. 인디언들의 제의를 맡았던 샤먼들은 정령을 부를때 북을 치고 방울을 흔들며 의식을 진행했다. 북미주의 인디언들은 주로 북을 사용하고 방울은 남북 미주 인디언들이 모두 사용했다.
이러한 아메리카 인디언에 관한 관심으로 시작된 신화에 대한 캠벨의 열정은 일생을 비교 신화학 연구에 몰두하도록 하는 토대가 되었다.

또 하나의 만남은 1924년 이었다. 스무 살이 된 캠벨은 처음으로 유럽을 여행하는 기회를 가졌고 유럽으로 가는 배에서 한 사람을 만난다. 그의 이름은 크리슈나무르티. 인도에서 태어난 그는 모든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및 종교 스승들의 한사람으로 평가되는 철학자였다. 그와의 만남은 캠벨의 삶에 또 하나의 커다란 만남이 되었다.
크리슈티나무르티는 인간이 종교 전통들과 상관없이 스스로 내적 탐구만을 통해서 진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종교에서 안식을 얻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영적인 가이드로 큰 영향을 끼쳐왔다.
‘의미있고도 중요한 물음은 마음이 과연 두려움으로부터, 모든 작고 사소한 이기적 투쟁으로부터,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탐구다. 그리고 마음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진다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진실하고 시간이 개입하지 않으면서 측량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를 스스로 질문할 수 있을까? 이것을 발견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 스스로에게 하나의 빛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아무리 해도 다른 사람의 빛을 가질 수 없으며, 다른 빛에 의해 조명될 수도 없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스스로 자신의 빛이 되라고 주장했다. 내 안이 빛은 나에의해서만 밝혀질 수 있으며, 다른 누구도 나의 것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어떤 종교나 종파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어려서부터 힌두교의 풍습 속에서 자랐고, 동양종교와 신비주의가 결합된 신지학회에 의해 ‘세계의 교사’로 만들어지는 교육을 받았다.
캠벨은 유럽으로 가는 여행 중 영화속 우연처럼 크리슈나무르티를 만난다. 그리고 그에게서 힌두교와 불교를 접하고 강한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인디언과 서양의 설화만 접하던 그에게 동양의 신화와 종교는 뿌리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캠벨이 여섯 살 때 만난 ‘버팔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 그리고 스무 살 때 만난 크리슈나무르티. 이 두 만남은 일생동안 신화를 연구한 캠벨에게 더할 나위 없이 큰 영향을 끼친 만남이 되었다. 하나는 신화에 대한 열정을 발견한 만남이었고, 하나는 접하기 어려웠던 동양의 신화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킨 만남이었다.


● 마음에 들어온 글귀

아기를 안고있는 이 여성(그림 1-1)은 신화의 기본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누구나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것이 어머니의 몸이다. 르 드블뢰(1857~1939 프랑스 사회학자)가 어머니와 자식, 자식과 어머니간의 “신비적인 관계”라고 불렀던 것은 궁극적인 낙원이다. 우리의 어머니인 대지와 전우주는 이 경험을 범위가 더 넓은, 성인의 경험속으로 옮긴다. 어린아이와 어머니의 관계와 같은 정도로 자신과 우주의 관계가 완전하고 자연스럽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자신과 우주 사이의 완전한 조화와 일치를 얻게 된다. 우주와 조화를 이루면서 그곳에 오래 머무는 것, 이것이 신화의 주요한 기능이다. [5]

사람이 태어난다. 아기는 자기 본성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생물학적 존재이며, 아직 백지상태이다. 그러나 태어난 직후부터 사회는 아기에게 각인을 시작한다. 어머니의 몸, 어머니의 태도 전체가 각인되는 것이다. 아기는 애정이 넘치는 어머니를 가질 수도 있고, 자식 따위는 낳고 싶지 않았다는 어머니를 가질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아이의 심리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아이가 사회에 적응하기 어렵게 한다. 나는 제인 구달에게서 어린 침팬지도 오랜기간에 걸쳐서 어머니에게 의존한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그리고 침팬지의 사회적 심리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는 인간이 부딪치는 문제와 같다. 그것은 젖을 뗀 뒤에 행동 면에서나 심리면에서나 어떻게 어머니로부터 독립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6]

먹을 것은 충분하다. 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침략해서 상대방이 토지나 재산을 약탈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남자들은 무엇을 하면 좋을까? 아마 일도 하지 않고 그냥 멍하니 둘러앉아 있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을 발명했다. 이것은 전쟁놀이지만 창은 진짜 창이다. 한 남자가 살해되면 전쟁은 끝나며, 다음 기습공격이 시작될 때까지 기다리는 기간이 있다. 덕분에 남자들에게 할 일이 생겼다. 그들은 언제나 상대방의 반격을 경계하면서 준비를 한다. 남자란 뭔가 진지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동물인 것이다. [7]

여기에 묘사된 것은 사람의 일생의 주기에 대응하는 달의 주기인데 보름달은 사람의 서른다섯 살에 해당한다. 예이츠가 이 책에서 사용한 용어로 표현한다면, 우리는 초월적인 신비로부터 태어나고, 사회는 곧바로 우리들에게 각인을 시작한다. 우리가 써야하는 가면은 사회가 씌워진 것이다. 예이츠는 이것을 원초적 가면이라고 부른다. [33]

만일 당신이 자신을 의식과 동일시한다면, 그것을 옮겨준 수레에는 감사의 마음으로 작별을 고할 수 있다. 오 죽음이여, 너의 가시는 어디에 있는가? 당신은 당신 자신을 참으로 영원한 것과 동일시한다. 의식은 형상을 내던졌다가 되찾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그리고 당신은 자신이 모든 존재에 내재하는 의식과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당신은 만물과 하나가 되고, 따라서 지지무개(事事無儗)라고, 곧 개별 존재와 전체 사이에는 어떠한 장벽도 없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지상에서이 궁극적인 신비체험이다. [35]

그런데 이런 종류의 만다라는 모두 동쪽이 열려있다. 닫혀 있지 않고 열려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월적인 빛을 받아들이기 위함이다. 만물은 초월성에 대해서 투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구약성서의 야훼와 같은 신이 “내가 곧 끝이다(I'm final)”라고 말했다면, 그 신은 이미 초월성에 대해서 투명하지 않다. 그는, 보다 오래된 문화의 신들과 달리, 자신의 인격화에 앞서는 에너지의 인격화가 아니다. 그는 “내가 그것이다(I'm it)”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신이 그런 식으로 자기를 닫게 되면 우리 역시 자기를 닫게 되고, 결국 초월성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거기로부터 나오는 것은 숭배의 종교이다. 반면에 신이 자기를 연다면 그 곳에서 성스러운 것과 하나가 되는 종교가 생긴다. [40]

그때 신들이 내려와서 그들을 위한 제의를 열자 소년들은 건강을 되찾는다. 그런데 그 제의란 어떤 것 이었을까? 그 제의는 내가 방금 말했던 것, 그들 자신의 인생역정이라는 제의였다. 정신분석의들은 유년시대에 일어났던 일을 회상하게 함으로써 정상을 되찾게 해준다. 그것과 똑같은 제의를 치렀던 것이다. [56]

이 이야기는 신화적인 모험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자란 세계의 경계를 넘어 아직 누구도 가본 적이 없는 초월의 영역으로 들어가서 없었던 것을 얻고 그 전리품과 함께 돌아온다. 여기에서는 이런 종류의 신화체계가 가지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57]

신화가 살아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에게도 말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실제로 당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그림을 보는 것과 같다. 그 그림은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만일 당신이 “저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하고 물었을때 화가가대답해준다면, 그것은 당신을 경멸하기 때문이다. 그림과 마찬가지로, 신화는 기능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당신이 이미 신화를 경험하고 해석하고 확대했다면 신화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화는 먼저 기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우리는 기능하는 신화를 잃어버린 것이다. [59]

그러나 농업의 정착과 가축의 사육에 이어 나타난 공동체의 확대와 함께 직업의 차별이 생기기 시작한다. 비전문가 또는 아마추어 문화 대신, 가족이 대를 이어가면서 평생동안 관리, 사제, 상업, 농업과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들간의 차별과 함께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생활양식이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단일조직의 구성원이라는 자각을 가지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그러한 자각이 붕괴되고 있다. [71]

우리는 지금도 시간이나 천체의 주기를 계산할 때 이 육십진법을 사용하고 있다. 문자에 의한 기록, 수학 그리고 천체에 대한 정확한 관찰 덕분에, 행성은 수학적으로 결정 가능한 속도로 움직인다는 결론이 얻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학적으로 기록할 수 있는 우주의 질서라는 이념이 생겼다. 그것은 문화의 전면적인 변화이며,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새로운 요소가 들어온 것이다. 아주 옛날에는 이 특정한 한그루의 나무, 이 특별한 연못이나 바위 등의 예외적인 것이 중요했다. 그뒤에는 어떤 동물이나 식물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 우주적 질서라는 관념이 생기고, 예외는 환영받기는커녕 배척된다. 예외는 이상한 존재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우주관이 생기게 되었다. [72]

이것은 타락이 아니다. 이런 전통에는 타락의 관념이 없다. 인도에서는 신이 자진해서 춤을 추며 세계에 들어온다. 세계는 유희이며 놀이이다. 그것이 이 신화들의 기본적인 분위기이다. 적어도 그것은 즐거운 것이며 유머러스한 것이다. 세계의 신화 가운데서 구약성서의 신화만큼 음울한 것은 없다. [77]

여기에는 배타주의와 부족주의가 있는데, 그것은 오늘날에도 유태인들에게서 이어지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야훼만이 유일한 신이며, 다른 신들은 악마들이다. 이 세상에는 이스라엘에만 신이 있다. 이것이 우리가 서양의 전통 속에서 계승해온 종교이다. [88]

미케네의 위대한 아크로폴리스의 한 매장지에서 두 마리 말이 끄는 전차가 발견되었다. 같은 시대의 중국의 한 매장지에서도 두 마리의 말, 전차 그리고 전차를 모는 전사가 발견되었다. 인종은 다르지만, 문화는 같다.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는 인도의 위대한 전차부대 용사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기원전 1340년 무렵의 투탕카멘의 그림에도 같은 종류의 전차가 나온다. 같은 전통에서 나온 것이 확실한 것 같다. 이것을 창조적인 중심으로부터의 파괴라고 부른다. 새로운 이념과 함께 그것과 연결되어 있던 신들이나 에너지의 상징들도 퍼져나간다. [90]

여기에는 신들이 우리 인간 에너지의 반영이라는 생각이 다시금 나타나 있다. 우리가 신들을 먹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은 실제로 식인풍습으로 나타난다. 아니며 단지 “내 머리는 아누비스의 머리요, 내 어깨는 세트의 어깨이니라”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내 몸의 모든 기관은 신들의 기관이며, 누구도 저승에서 내 심장을 빼앗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누구나 저승을 두렵고 위험한 곳으로 생각한다. “돌아가라, 그대 북쪽의 악어여. 돌아가라. 그대 남쪽의 악어여.” 그리고 사자는 저승의 입구에 다다른다. 매우 중요한 순간이다. “나는 어제요, 오늘이요, 내일이다. 나는 다시 태어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나는 신들이 솟아나오는 원천이다.” 이것은 위대한 자각이다. 당신이 죽기전에, 그것이 어렵다면 저승에 닿기 전이라도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이다. [100]

그럼 그 다음은 무엇일까? 지혜의 몸 아래에 있는 것은 아난다마야코샤, 곧 축복이다. 생명은 환희의 표현이다. 그런데 애처로운 정신의 칼집이 모든 것을 양식의 몸과 연결시켜서 “아아, 인생이란 참으로 비참하도다” 하고 생각한다. 누군가 이 주일 간격으로 잔디를 깎는다고 하자. 그때마다 풀이 “글쎄, 이런다고 무슨 소용이 있담?” 하고 생각하는 것을 상상해보기 바란다. 그것들은 두 개의 완전히 다른 방향성이다. 정신의 칼집은 윤리, 곧 선과 악, 밝음과 어둠, 기쁨과 고통에 관계한다. 지혜의 칼집은 그런 분별이전에 무엇이 있는가를 안다. 그것은 환희이다. 따라서 그것이 당신의 본디 모습이다. 당신은 환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아무리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크나큰 번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비참에 빠져 있다고 할지라도, 만일 환희의 문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기만 한다면, 이 현실이야말로 인생의 환희임을 깨달을 수 있다. 고통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 영웅적인 신화에는 이런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104]

신화에서 그런 들고나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무엇이 들어가고, 무엇이 나오는가를 확인해보기 바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신화가 전하는 신비적인 가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들어간 것은 족장들이고, 나온 것은 민중이다. 지옥의 밑바닥과 같은 고난의 땅 이집트에서 민중이 일치단결하여 공동으로 자기 인식을 이룬 것은 위대한 일이다. 영웅은 모세가 아니다. 구약성서의 영웅은 민중이다. 민중은 하나의 단위로서 간주되며, 개인은 그 일원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강조되는 것은 집단, 집단, 집단이다.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근동의 특징이다. 유럽에서는 다른 데에 강조점을 준다. 유럽을 기독교에 동화시킬 때 생긴 문제 중의 하나는 둘도 없는 실체로서의 개인의 의식을 어떻게 재발견하고 유지해갈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근동의 집단주의 전통을 개인적인 자기실현의 전통속에 어떻게 옮겨심을 것인가와 같은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13세기 유럽의 성배 전설의 문제 이기도 하다. 13세기에 이 전설은 새로운 방식으로 정리되었다. [109]

그런즉 우리가 한 것은 타인이 한 것과는 다르다. 이것 또한 우리들(유태-기독교) 전통의 특징이다. 모세는 영웅이 아니다. 그가 이끌었던 부족이 영웅이다. 우리의 신화는 부족의 신화이며, 우주의 유일한 신은 우리의 신이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전염병이나 그밖에 재앙(출애굽기 7장 이하 참조)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어떤 종류의 신일까? 하느님은 재미로 재앙을 내린다. 하느님이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 박으로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이 거듭 다른 재앙을 파라오와 이집트에 내리기 위해서이다. 틀림없이 그렇게 쓰여있다. 만인의 필독서로 꼽히는 성서에. [110]

먼저 두 개의 단순한 관념을 소개하고 싶다. 첫 번째 관념은 이미 여러번 말한 것이지만 독일의 문화인류학자 아돌프 바스티안의 생각이다. 세계의 신화와 종교체계를 조사한 바스티안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같은 이미지와 같은 주제가 되풀이해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그것을 ‘원소적 관념’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또 그것들은 발생할 때마다 환경에의 적응이나 해석에 차이가 있으며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이런 지역적인 차이를 ‘민속적 관념’ 또는 ‘민족적 관념’ 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이다. 그것은 우리의 주제를 두개의 전혀 다른 부문으로 나눈다. 역사학자나 민족학자는 차이에 관심을 가지기 마련인데, 이런 차이에 중점을 두고 세계의 다양한 신화와 철학을 연구하는 것도 가능하다. 한편 원소적 관념의 문제도 제기된다. 왜 그런 것들이 어디에서나 존재하는가? 이것은 심리학적인 문제이며, 신화나 철학을 비교연구하는 우리와 차이를 조사하는 다른 모든 연구자를 구별하는 점이다. 그런데 동양의 체계를 이야기할 경우, 나는 어디까지나 원소적 관념에 중점을 두고 싶다. [113]

내가 생각하는 영구불변의 철학이란 아난다 K 쿠마라스와미가 해설하고 올더스 헉슬 리가 ‘영구불변의 철학’에서 다룬 철학이다. 내 생각으로는 그것은 신화적 이미지가 가지는 의미를 말로 옮겨 설명한 것이다. 세계의 신비철학들에서 똑같은 관념이 되풀이해서 발견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신화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계속성은 철학속으로 숨어들어간다. 그것이 바로 영구불변의 철학이다. [114]

우리가 원소적 관념이나 영구불변의 계시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도 이런 상징의 구체화가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신을 하나의 사실로서 받아들인다. 신 관념은 하나의 상징이다.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 형상으로 여겨지는 것은 모두 상징이다. [116]

진정한 순례는 글자 그대로의 순례, 물리적인 행동으로서의 순례를 당신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중심을 찾아가는 순례로 바꾸는 것이다. 순례를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순례하는 동안 계속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명상하고, 참된 여행은 자신의 내면을 향한 여행임을 자각하기만 한다면. [118]

따라서 가장 이른 시대의 신화는 인간계와 동물계의 상호 관계를 다루고 있다. 문제는 동물을 존경하면서도 잡아먹는데에 있다. 동물계와 인간계 사이의 계약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을 인식하고, 생명체는 생명을 죽이고 그것을 먹음으로써 살아간다는 생명의 기적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해결해야 할 큰 문제이다. 끊임없이 동물을 잡아먹고, 그 모피로 옷을 만들어 입고, 그 가죽으로 만든 천막속에서 산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그것이 한가지 모습이다. 또다른 모습은 식물게이다. 이 경우에도 우리는 생명을 죽이고 생명을 먹는다. 식물도 동물도 갠지스 강처럼 세계속으로 흘러들어와 우리의 생명을 지탱해주며, 따라서 존경을 받는다. 동물과 식물은 숭배하는 힘 또는 상징이 되며, 인간은 그것들과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된다. [122]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자연은 풍부한 혜택을 준다. 이것은 현재 우리들의 의식에 싹트고 있는 것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환경보호운동을 통해서, 자신이 그 속에서 살아가는 환경을 파괴함으로써 실제로 에너지를 잃고 있으며 자신의 생명력의 근원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 조화의 관념을 가지고 이 세계에서 해야 할 일을 잘 분별해서 올바로 살아간다면 환경의 생명력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123]

모세는 금으로 만든 수송아지를 끌어다가 불에 태우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어 물에 타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성찬을 마시게 했다. 이 이야기에 주의 한 적이 있는가? 실제로 그렇게 쓰여있다. 물론 그뒤 아론은 사제 자리에서 쫓겨나고, 모세가 두가지 역할을 다 맡게 된다. 이슬람 세계의 칼리프는 그런 전통에서 나온 것이다. 정신적인 지배자와 정치적인 지배자가 같은 인물이다. 이 두가지가 매우 밀접하게 결합되었기 때문에 정신과 사회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125]

감각의 욕망은 타오르는 불이다. 귀로 듣는 것은 타오르는 불이다. 눈으로 보는 것은 타오르는 불이다. 그 불을 꺼야한다. 그런데 다른 전통의 관념은 그 불을 더욱 더 지피라고 말한다. 생명이라는 신비에 대해서는 이처럼 두가지 상반된 태도가 있다. 생명은 생명에 의존한다. 새들을 보라. 풀을 뜯는 동물들을 보라. 그들이 하는 일은 언제나 먹는 일뿐이다. 온갖 것들을 죽이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스를 섭취한다. 그렇지 않고는 생명을 유지할 방도가 없다. 생명이란 끊임없이 타고 있는 불이다. 그 불을 더욱 더 지펴야 한다. 그것으로부터 희생에 대한 일종의 열망이 생긴다. [127]

신들은 바로 당신 자신의 에너지의 상징적인 의인화이다. 당신 자신의 에너지는 우주의 에너지이다. 따라서 신은 저곳에도 있고 이곳에도 있다. 그렇다. 천국은 당신안에 있다. 그렇지만 또 어디에나 있다. 이것이 영구불변의 철학의 실질적인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제 자기 내부의 불을 찾아나서야 한다. 그것은 심리학적인 구별작업이다. 그것은 실재의 육체적이고 가변적인 면과 영속적인 불꽃을 구별하는 작업이다. 젊음과 늙음, 삶과 죽음은 그 불꽃의 반영에 지니지 않는다. [129]

열반에 대해서는 많은 오해가 있다. 열반이란 괴로움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심리적인 태도를 말한다. 당신의 인생을 괴로움에 불과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욕망과 불안이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바라는 욕망, 사람을 속이려는 욕망이며, 무엇인가를 잃지 않으려는 불안이다. 이 욕망과 불안이 진정되었을때 당신은 마하수카, 곧 큰 기쁨의 경지에 도달하고 법열을 경험하게 된다. 법열을 경험하게 되면 고통이 당신을 아프게 하지 못하게 된다. 당신은 중심으로 들어가며, 기쁨이 흘러넘치게 된다. 당신이 중심에 들어가면 이미 무엇을 얻는다든지 잃는다든지 하는 일이 없게 된다. 당신은 존재 그 자체가 된다. 이것이 열반이다. [131]

이런 구도자, 곧 부처가 되려는 사람은 부동지(不動地)라고 부르는 ‘세계의 중심축’, 곧 우주의 중심에 있는 나무에 다다르게 되면 그곳에서 좌선에 들어간다. 우주의 중심에 앉는 r서은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조건이다. 부동지를 발견하려고 부다가야로 갈 필요는 없다. 만일 부동지가 있다고 한다면, 지금 이곳에 있다. 그곳은 어떤 곳인가? 욕망과 불안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는 곳이다. [140]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무엇이 최선의 교훈, 최고의 규칙일까? 최고의 규칙은 벗들과 즐겁게 지내고, 즐겁게 식사하는 것이다. 당신의 놀이가 무엇인지를 깨달으라. 그 놀이, 인생의 놀이에 참여하라. 이것이 바로 극락, 곧 마하수카이다. 그래서“‘보가가 곧 요가이다.”라는 궁극적인 말이 나왔다. 환희와 열락이 요가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T S 엘리엇의 ’칵테일 파티‘의 주제이다. 파티를 열지 않으시렵니까. 파티는 존재를 자각하기 위한 제의이다. 그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것이 위대한 불교이다. [145]

불교는 어디로 가건 “너희의 신들을 제거하라” 하고 말하지 않는다. 불교가 가는 곳마다 참으로 간단하게 종교의 융합이 이루어진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특징은 자신들이 진출한 곳의 신들을 전멸시키는 것이다. 보다 온건한 불교의 특성은 먼저 살고 있던 신들 역시 그 땅의 생명력이며, 불성의 표현이라고 본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신들은 자신들의 불성을 드러내는데 참여한다. [154]

요가의 이념은 요가(yoga)라는 말 속에 이미 나타나 있다. 그것은 어떤 것을 다른 어떤 것과 ‘묶다, 결합하다’라는 뜻을 가진 유즈(yuj)라는 어근에서 유래한다. 결합되는 것은 우리의 자아의식과 의식의 근원이다. 영구불변의 철학의 신 관념이 서양의 신 관념과 크게 다른 것처럼, 의식의 관념도 동양과 서양이 크게 다르다. [155]

어린아이가 차에 치이려는 순간,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아이를 구하려고 뛰어든다. 왜 그럴까?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보통 때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형이상학적인 자각이 갑자기 생기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보편적인 의식의 구현이라는 자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과 타인은 하나이다. [160]

당신은 숨을 들이마시면서 그 숨이 모든 신경에 가득 차서 모든 감각기관과 모든 의식기관을 활성화시킨다고 상상한다. 그러는 동안에 이식이 점차 끌어올려진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의식을 억압하는 것은 악귀나 요괴들이다. 악귀의 다수는 우리 같은 대학교수들이나 학교 선생들이다.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규칙을 정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유익한 것은 아니다. [167]

사랑의 가장 높은 형태는 사랑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이다 앞뒤를 헤아리지 않는, 적극적인, 금지된, 세상의 관습을 무시한 사랑이며 초월계의 돌파구를 여는 사랑이다. 그것은 자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누군가를 돕는 경험과 비슷하다. 정열과 충동이 너무나 강렬하여 세계가 눈앞에서 사라진다. 이것이 궁정연애의 개념이다. 그리고 단언하건대 그 시절의 궁정연애는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불륜의 죄는 사형에 처해졌기 때문이다. [189]

민중이 찾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건강, 부, 자식이다. 신의 이름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따라서 그것이 하나뿐인 종교, 세계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민중종교이며, 신의 이름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승려와 사제의 직무, 역사적으로 존재해온 사원에 맡겨진 과업은 그들의 신의 이름을 그것과 결합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미친 듯이 돈이 쏟아진다. [194]

전우주가 여신이다. 우리는 여기에 있다. 지옥은 바로 아래에 있다. 천국은 바로 위에 있다. 지옥에는 어떻게 해서 떨어질까. 자신의 자아를 완고하게 닫아버리는 사람은 그것에 사로잡힌다. 지옥이란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천국에는 어떻게 해서 오를까? 마음을 열면 마침내 모든 것이 개인의 한계를 초월하게 된다. [203]

만일 당신이 비열한 인간이라면 그 비열함을 굳게 지켜라. 다만 그 에너지, 곧 샤크티의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완고함만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방향전환시킬 수 없는 사람은 완고한 세상에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지옥이다. 지옥이란 자기의 개별적 존재, 개별적 존재가 자신에게 의미하는 것, 자기의 인격, 자기의 소망, 선악의 관념 따위에 관해서 완고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따라서 그곳이 당신의 미덕이자 당신의 악덕이다. [213]

모두들 우물로 찾아와서 데메티르를 위로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마침내 바우보(성기를 상징하는 여신)라는 작은 여자가 나타나서 음탕한 춤을 추자 데메테르는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웃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훌륭한 모티프이다. 외설스러움이 새로운 전망을 열어준다. 당신은 완성된 인간의 영역을 떠나서 생성과 재생성이 이루어지는 자연역학의 영역으로 물러나며, 비탄의 속박에서 해방된다. [234]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우리는 어떤 제의를 행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이미 제의를 행하고 있다. 단지 그것에 대해서 명상하지 않을 뿐이다. 밥 먹는 일도 제의이다.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라. 벗들과 의논하는 일도 제의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보라. 자식을 낳는 일-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235]

우리가 자아와 공포와 욕망에 집착하는 한, 자신의 개인적인 무제에 집착하는 한, 우주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집착을 버려야 한다. 죽음의 신이 예술가 앞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그림이 생각난다. 죽음의 신이 소리에 귀를 기울여 자아의 교만에서 빠져나오라. 그렇게 하려면 당신의 머리를 사자의 입속에 집어 넣어야한다. 오늘의 진실한 경험을 직시하라. 과거의 경험으로 그것을 해석하지 않도록 하라. [248]

선禪의 과제 중의 하나는 경험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의 의미를 배우고 싶다고 말한다. 인생에 의미는 없다. 꽃에 의미가 있는가? 우리가 찾는 것은 경험을 쌓는 것, 인생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눈앞의 모든 경험에 대해서 이름을 붙이고, 해석하고, 분류하느라 경험에서 멀어져버린다. 당신은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그것은 결혼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아니면 불륜 또는 이런저런 것이 될 수도 있다. 당신은 이런 식으로 분류하느라 경험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머리를 사자 입속에 넣고 이렇게 말하라. “에이, 될 대로 되라.” 그러면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이다. [248]

그런데 몸이 다시 사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약간의 보증을 해줄 수 있다. 당신은 육체적으로 완벽한 나이, 즉 서른다섯살의 나이로 부활할 것이다. 그런즉슨 서른다섯 살 때의 당신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떠올려보라. 그리고 근사한 미래에 대비하라. 당신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완벽한 서른다섯 살이다. 그렇지만 따분하지 않을까? 좋다, 이쯤 해두자. [253]

따라서 성배 이야기에는 유럽의 두가지 전통이 흐르고 있다 그 하나는 고대 게르만-켈트족의 정신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럽의 고유한 영웅적 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근동에서 들어온 기독교적 전통이다. 근동의 사고체계와 가치체계는 유럽의 그것과는 정반대였다. 아니, 지금도 변함없이 정반대이다. 근동에서는 사회에 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이며 유기적 조직체의 한 기관이다. [257]

우리의 의도, 우리의 여행, 우리의 목표는 지금까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것, 곧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똑같은 지문을 가진 사람은 없다. 당신 몸의 모든 세포와 구조는 지금까지 이 세상에 존재한 어떤 사람의 것과도 다르다. 따라서 당신은 여기저기에서 암시를 받으면서도 직접 그것을 움직일 수 밖에 없다. [259]

궁정연애의 온전한 의미는 사랑의 아픔에 있었다. 가슴속에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아픔을 품고 있지 않다면 궁정연애를 경험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느끼는 것이다. 부처는 인생은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 인생은 살아 있음의 고통의 경험이다. 고통이 있는 곳에 당신의 인생이 있다. 그러니 그것을 찾으라. [261]

성배의 주제는 ‘황무지’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황무지는 예비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주제에 대한 해답은 성배이다. 중세의 ‘황무지’와 엘리엇이 그의 대표작 ‘황무지’에서에서 말하는 ‘황무지’는 무엇을 뜻할까? 둘 다 똑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황무지는 진실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규범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 세계이다. [262]

희생이란 에너지의 방출을 위하여 에너지의 그릇을 바치는 것이다. 로마의 정신에서 보자면 당대의 경쟁자인 미트라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기독교 전통에서 구세주는 죽은 자인 반면에 미트라교에서 구세주는 죽이는 자라는 것이다. 실제로 죽은 자와 죽이는 자는 하나이다. [271]

목사들의 설교에 이하면 사랑에는 두가지가 있다. 그러나 어느 것도 개인적인 것은 아니다. 첫 번째 사랑은 정욕인데, 나는 이것을 서로에 대한 육체적인 열정이라고 정의한다. 이것은 완전히 비개인적이다. 또 하나의 사랑은 아가페 즉 정신적인 사랑이다. ‘그대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대 이웃을 사랑하라’ 그 이웃이 누구인가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 또한 완전히 비개인적이다. 그런데 이제 유럽이, 즉 개인의 경험이 찾아온다: “눈은 마음이 호감을 느끼는 이미지를 찾아낸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마음은 정욕의 마음이 아니라 이미지에 반응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마음이다. 구원이란 개인의 내부에 신성한 것이 나타남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다. 이 사랑의 이미지에 마음이 완전히 사로잡히게 되면 다른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궁정전통에서의 다른 어떤 것도 가치를 잃어버린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랑을 위협하는가. 명예이다. 따라서 중세의 전통에서는 명예와 사랑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 고상한 마음을 얻기 위한 궁극적인 희생은 사랑을 위하여 명예를 희생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이다. [281]

여성의 기질은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확실히 존재한다. 이랬다저랬다 변덕이 죽 끓듯 한다. 그리고 침머는 이렇게 말했다. “시련은 참고 견디는 것이다” 인내하라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들지 말라. 오직 참고 견디라. 그러면 아름다운 여성의 자비가 모두 당신의 것이 되리라. [287]

그뒤에 이어지는 것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여러 해에 걸친 숲속 생활이다. 그들은 기독교 시대 이전의 거인들이 만들어 놓은 동굴데 도착한다. 우리는 다시 옛날 켈트인들의 게르만 시대로 돌아온 것이다. 동굴입구에는 연인들의 예배당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예배당 전체가 상징을 이루고 있다. 물론 이 이야기에서는 그것들 모두에 새로운 의미가 주어진다. 본래 제단이 있어야 할 곳에는 수정으로 만든 침대가 있다. 이 제단의 신성함은 성의 신성함이다.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가 그렇게 생각했고, 중세인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사랑의 신성한 맹세는 성교이다. 그래서 성교는 신성하다. [295]

따라서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는 결혼에 대립하는 연애이다. 그것은 기존의 문화에 대항하는 반문화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중세 유럽에서 결혼은 집안간에 결정되는 것이 관습이었다 귀족사회는 이것이 견딜수 없었기 때문에 사랑의 주제를 찬미했던 것이다. 이 양자를 조화시키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성배를 그 해답으로 제시하고 싶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성배 전설은 중세의 가장 위대한 이야긱이다. 볼프람 폰 에션바흐의 ‘파르치팔’ 이야말로 중세 최고의 이야기이다. 그것은 단테의 신곡을 능가한다. 왜냐하면 단테는 천국에서 이야기를 끝냈지만 고트프리트는 이 지상에서 이야기를 끝냈기 때문이다. 모든 일들이 지금, 여기에서, 육체를 가진 인간에 의해서, 참으로 멋지게 해결된다. [297]

볼프람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그가 말하려는 것은 초자연적인 은총과 자연적인 은청을 구별한 중세의 정신적 이상이 유럽을 거세해버렸다는 것이다. 자연적인 은총-말이 가는대로 내버려두는 것-은 허용되지 않으며, 그것이 삶을 이끌어가지도 않는다. 삶을 이끌어가는 것은 초자연적인 은총, 곧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회 추기경들을 통해서 얻게되는 정신적인 관념이다. 유럽에서 자연은 살해되었다. 자연의 에너지-이것이 볼프람의 교훈이며, 그는 실제로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살해되었다. 이교도 기사의 죽음은 그것을 상징하며, 성배왕의 정신적인 불임은 그것의 결과이다. [312]


● 내가 저자라면

어렵다, 그리고 당혹스럽다. ‘신화의 세계’는 비교신화학의 입문서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흔히들 생각하는 입문서의 개념처럼 만만하지가 않다. 만만치 않은 책을 읽어나가는 방법은 세 가지 정도의 방법이 좋아 보인다. 하나는 저자인 캠벨이 전하는 삶에 대한 메시지만 뽑아먹는 것이다. 캠벨은 책에서 신화와 혼재해 있는 인간의 삶 속에 흐르는 많은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두 번째 방법은 신화의 이야기만 즐기는 것이다. 책에 소개된 신화 이야기는 인간과 신화의 기원에서 시작해 동서양을 넘나든다. 다양하고 깊이가 있으며 지역별로 대표적인 내용을 싣고 있다. 만만치 않게 어려운 책이지만 신화 이야기만으로도 만만치 않은 재미를 준다. 또 다른 방법은 저자가 소개하는 신화 이야기와 인간의 삶에 던져주는 메시지를 조합하며 느끼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지만 가장 어려운 방법이기도 하다. 읽는 사람에 따라 이 책을 읽는 방법은 서로 다를 것이다. 그러나 느끼는 것은 일정부분 공통분모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신화의 세계’는 조셉 캠벨이 1982년부터 1984년까지 미국 각지에서 강연한 내용을 토대로 하고 있다. 캠벨의 강연을 녹화해서 방영했던 미국의 공공방송(PBS:Public Broadcasting Service)이 그 내용을 다듬어 1990년에 책으로 만든 것이다. 캠벨은 1987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 책을 보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책은 캠벨의 유작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책은 인간과 신화의 기원을 이야기하며 시작한다. 인간과 신화의 원천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첫 문장 ‘신화는 우리의 삶, 우리의 육체 그리고 우리의 환경을 소재로 한다. 역동적이고 살아 있는 신화는 이 소재들을 각 시대의 지적 특성에 적합한 형태로 다룬다.’ 는 이 책을 풀어가면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 말해준다. 캠벨은 원시시대부터 현대에 사는 우리들의 삶까지 한꺼번에 통찰하는 메시지를 펼쳐놓는다. 저자가 이끄는 신화 속 이야기를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가슴을 찌르는 한마디를 던져주는 것이다. 또한 책의 원제(Transformation of Myth Through Time)처럼 그러한 메시지들이 지역과 종족에 따라, 그리고 삶의 형태에 따라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고 이어져 왔는지를 보여준다.

책은 사람의 태어남과 함께 출발하면서 자연스럽게 신화를 엮어나간다. 남녀의 근원적 차이를 근간으로 하는 신화의 상징적인 가치를 말하고, 원인猿人의 진화에서 발견한 인간 의식의 출현을 순차적으로 짚어간다. 첫 장章에서부터 깊숙이 발을 디딘 신화의 세계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와 신석기 시대를 거쳐 이집트 동양철학 불교 요가에 이르고 서양의 성배 이야기까지 종횡무진 신화 속을 거닌다. 캠벨이 고대의 벽화와 종교적 이미지, 삽화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해주는 내용들은 지적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물론 이미지들이 이해하기 어렵고 해독하기 난해해서 혼란을 가중시키기도 하지만 역사속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새로운 경험을 제공한다.
인디언의 이야기에 나오는 ‘왼손의 길과 오른손의 길’은 ‘좌 우’의 개념과 의미가 얼마나 오래전부터 있어왔는지,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고 어떻게 생겨났는지, 성배이야기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궁정연애는 어떤 형태로 마무리 되는지, 이야기들은 쉴 새 없이 쏟아진다. 그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신화속의 상상력에 빠져들고, 그 속에 녹아있는 철학과 사랑을 만나게 된다. 영웅이 나타나 손을 잡아끌고 모험은 숨을 죽이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불현듯 신화가 아닌 내 삶의 일부를 만난다. 세계의 종교와 신화를 연구하고 그것에서 삶의 실마리를 찾는 작업을 해온 캠벨의 메시지가 내 삶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것은 타문화에 대한 이해와 타자에 대한 존중이다. 서양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성경이지만 성경 이전의 시대에 시작된 서양 신화는 그에 못지않게 서양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동양에 살고 있는 우리들조차 익숙하지 않은 불교의 철학과 요가 그리고 티베트 사자의 서는 나와 우리를 벗어나 남과 남들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기회를 준다.

저자의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제작된 책은 ‘대중을 위한 입문서’라고 하지만 실제 대중이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저자가 긴 시간동안 연구한 지식과 사유가 녹아있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대중들에게 생소한 신화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글을 통해서 신화의 내용과 저자의 메시지를 조합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책이 아닌 저자의 강연으로 보았더라면 더 이해가 쉬웠을 듯 하다.

IP *.243.3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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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4.08 10:49:14 *.244.220.254
공감~ 언제 우리 4기 모두 저자의 강연 비디오를 보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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靜山 최현
2008.04.08 15:48:38 *.97.37.242
"만만치 않은 책을 읽어나가는 방법 세 가지" 잘 배웠습니다. 나중에 써 먹어야 할 것 같으데, 꼼꼼히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라 잘 될지 모르겠네요.

월요일 문자 고마웠습니다. 난 핸드폰 문자에 약해서 일일이 답장 보내지 않아도 이해해 주시길 바래요. (문자 보내신 4기 여러분 그리고 옹박 조교님 등 모두...)

레이스 끝나고 나니 써니 선배님이 발길을 '똑' 끊으신 모양이네요. 앞으로는 우리끼리 댓글도 잘 챙겨야 할 듯 싶군요.
4기 여러분 모두 화이팅!

아니 써니 선배님 표현대로, 아자! 아자!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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