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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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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14일 10시 07분 등록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조셉 캠벨, 이윤기 옮김, 민음사

I. 저자에 대하여
이번 저자에 대하여는 [신화의 이미지]에 소개된 저자 소개란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594p-596p)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 1904 - 1987)

그는 한때 뉴욕 시 최고의 육상 선수였고, 색소폰 주자였으며, 대공황이 닥치자 우드스탁의 숲 속에 은거하며 종종 재즈 밴드에서 연주한 대가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였다. 삼십대 중반에 열애에 빠져 결혼한 그의 아내는 무영가였고, 조지 루카스는 그에게서 영감을 받아 ‘스타워즈’를 만들어냈다. 그가 바로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가, 비교신화학자로 칭송받게 된 조지프 캠벨이다.

조지프 캠벨은 1904년 뉴욕의 아일랜드계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평생에 걸친 신화에 대한 관심은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비롯된다. 여섯 살 때 캠벨이 아버지와 함게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버팔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를 보고, 기병대장이 아닌 토벌되는 인디언에게 강하게 매혹되었던 이야기는 캠벨을 좋아하는 독자들 사이에서 자주 회자되는 에피소드이다. 그 이후 캠벨은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책들을 즐겨 읽었고, 인디언에 관련된 물건들을 수집하고, 뉴욕 자연사 박물관을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캔벨은 1921년 다트머스 칼리지에 진학하여 생물학을 전공했으나, 메디치가(家)에 대한 책을 읽고 1922년 콜롬비아 대학으로 편입하여 영문학과 비교문학을 공부하였다.

1924년 처음으로 유럽을 여행하는데, 선상에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를 만나 힌두교와 불교에 흥미를 가지게 된다. 이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아더 왕 전설 연구로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특별 장학금을 받아 1927년부터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서 로망스어, 중세 프랑스어, 프로방스어, 라틴어 등을 공부하고, 제임스 조이스, 피카소, 브라크 등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1928년 뮌헨대학으로 옮겨 산스크리스트와 인도-유럽어족의 언어들, 괴테와 투마스만의 문학, 프로이트와 융의 사상을 공부하였다. 대공황에 따른 경제적 사정으로 박사학위를 포기하고 1년 뒤 귀국한다. 귀국 후 극빈한 생활 속에서 독서에 몰두하다가, 1933년에 겨우 모교인 캔터베리 프레프 스쿨의 교사로 임명되었고 슈펭글러, 토마스 만, 융, 조이스, 프레이저 등의 연구에 몰두했다. 다음 해 사라 로렌스 대학의 교수가 되어 이후 38년 동안 문학, 독일 철학, 비교신화학 등을 가르쳤다.

그의 방대한 지식과 다양한 어학 실력 앞에서는 모두가 혀를 내둘렀는데 신기하게도 그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 잘 깨닫지 못했다. 그이 강의를 듣던 한 학생이, 그 수업을 듣기 위해 매주 읽어야 하는 독서 분량이 너무 많다고 항의했을 때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쨌건 그걸 다 읽어보려 했다니 놀랍네. 그것들은 일주일 동안 읽으라고 내 준 것이 아니네. 평생 읽으라는 것이지.”

1938년에는 사라 로렌스 대학 학생이었던 진 어드먼과 결혼했다. 유명한 무용가 마서 그레이엄의 제자였던 진 어드먼은 훗날 일류 무용가고 명성을 떨쳤다. 1940년에는 콜롬비아 대학의 인도학 교수였던 하인리히 침머와 알게 되었는데, 침머와의 만남은 캠벨의 신화연구가 세상과 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캠벨은 1924년 융 학파가 주도하는 볼링겐 시리즈의 편집자가 되어, 인도 예술과 신화에 관한 침머의 연구들을 편집하였다. 1944년부터 집필하기 시작한 조지프 캠벨의 대표작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1949년, 볼링켄 시리즈의 하나로 출판되었고 그것은 국립예술문자협회에서 주는 상을 받았다. 또한 그는 『에러노스 연감 회보』의 편집자로서 스위스에서 칼 융, 미르치아 엘리아데, D.T 스즈키 등을 만나게 된다. 1950년대 중반부터 그는 훌륭한 신화 강연자로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대표작으로는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외에도, 『신화와 함께하는 삶』(1972), 『야생 수거위의 비행』(1969), 『신의 가면』4부작(1959-1968)과 그의 신화연구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신화의 이미지』(1974) 등이 있다.

1987년 10월 30일, 캠벨은 호놀룰루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해 12월, 빌모이어스와의 TV 인터뷰 ‘신화의 힘’이 방영되어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다.



II.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프롤로그 원질신화

재미삼아 귀를 기울여보는 콩고 주술사의 잠꼬대 같은 주문이나, 점잖은 취미로 읽어보는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한 노자 경구집(老子驚句集)의 얅은 번영곱이나, 이따금씩 개뜨리고 보는 견고하기 그지 없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법이나, 기괴한 에스키모 요정 이야기의 빛나는 의마나 그 내용면에 있어서는 별로 다른 것이 없다. 즉 변화 무쌍한 듯하지만 실은 우리가 이상적으로 만나는 이야기의 일정한 패턴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13p

놀라운 것은, 심원한 창조적 중심을 촉발하고 고무한 특징적인 효과가 아이들 놀이방에서 굴러다니는 하찮은 동화책에도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14p

신화의 상징은 영혼의 부단한 생산물인데, 이 하나하나의 상징 속에는 그 바탕의 근원적 힘이 고스란히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시간을 초월한 이 환상의 비밀은 무엇일까? 14p

성생활의 병리학적인 모든 혼란은, 발육이 억압당했기 때문에 야기된 것으로 보아도 좋다. 18p

많은 사람이 저 자신과 어머니가 짝이 되는 꿈을 꾸었거니와 이에 괘념치 않는 자, 그 팔자가 순탄하라리. 18p

우리는 자궁이라는 이름의 무덤 tomb of the womb에서 무덤이라는 이름의 자궁 womb of th tomb까지 완전한 순환 주기를 산다. 그것은, 꿈의 본질처럼 눈앞에서 곧 녹아버릴, 견고한 물질의 세계를 향한 모호하고 수수께끼 같은 흐름이다. 나 개인을 괴롭혔던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모험에의 두려움을 돌이켜볼 때, 결국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유사 이래 이 세계 방방곡곡, 그리고 문명의 갖가지 위장 아래서 남녀가 더불어 경험한 일련의 상투적인 변신이야기 standard metamorphoses일 뿐이다. 25p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수수께끼이며, 영웅의 바탕되는 미덕과 역사적 행위가 풀었어야 하는 문제다. 29p

오직 탄생(낡은 것의 새로운 태어남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죽음의 끈질긴 재현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내부에, 사회적인 무리의 내부에 끊임없는 <탄생의 재현 palingenesia>(우리가 이 땅에서 오래 잔존하게 되어 있다면)이 있어야 한다. 29p

토인비 교수는 이 위기를 묘사하는 데 <해탈 detachment>과 <변용 transfiur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첫 단계, 즉 해탈 혹은 물러섬 withdrawal 과정은, 외적인 세계에서 내적인 세계로, 대우주에서 소우주로 그 중심을 옮김으로써, 황무지의 절망에서 내부에 존재하는 영원히 평화로운 영역으로 물러섬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을 통해 알게 되었듯이, 이 영역이 바로 유아기의 무의식이다. 우리가 잠잘 때 들어가는 곳이 바로 이 영역인 것이다. 30p

영웅이 첫단계에서 하는 일은, 하찮은 세상이라는 무대로부터 진정한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심성의 인과(因果)가 시작되는 곳으로 물러앉는 일이다. 30p

꿈은 인격화한 신화고 신화는 보편화된 꿈이며, 꿈과 신화는 상징적이되, 정신 역학의 동일한 일반적 시각에서 보아 그렇다. 그러나 신화에서는 문제와 해결책이 모든 인류에게 직접 뚜렷이 제시되는 데 견주어, 꿈속에서는 꿈꾸는 사람이 안고 있는 문제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33p

영웅은, 현재의 붕괴되어 가는 사회나 정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회 재생의 심원한 원리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영웅은 현대인으로 죽었지만 영원한 인가(완전하게 되되, 특이하지 않은 우주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따라서 두 번재 엄숙한 과업과 행위는(토인비가 주장하고, 인류의 모든 신화가 보여주듯)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재생의 삶에 대해 그가 배운 바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33p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에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도,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벅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웅이 갈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되는데도 그렇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중시믕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게 하게 될 것이다. 39p

비극이란 형체의 파편이며 형체에 대한 우리의 애착이다. 희극은, 정복할 수 없는 삶에 대한 거칠고, 방만하고, 꺼질 줄 모르는 환희다. 따라서 이 양자는 양자를 서로 보듬고 서로를 엮는, 단일한 신화적 주제와 경험을 나누는 용어다. 42p

영웅이 치르는 신화적 모험의 표준 궤도는 통과 제의에 나타난 양식, 즉 <분리>, <입문>, <회귀>의 확대판이다. 이 양식은 원질신화(原質神話, monomyth)의 핵심 nuclear unit라고 할 수 있다. 즉, 영웅은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여기에서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영웅은 이 신비스러운 모험에서,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45p

대양을 방불케하는 동양의 광대한 이미지로 표현되든, 그리스의 웅장한 서사시로 표현되든, 아니면 장엄한 성서의 이야기로 표현되든, 영웅의 모험은 위에서 말한 핵 단위의 패턴, 다시 말하면, 세계로부터의 분리, 힘의 원천에 대한 통찰, 그리고 황홀한 귀향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동양 전체는 고타마 부처가 깨친 은총(참 법의 놀라운 가르침)의 축복을 받았듯이, 서양은 모세의 심계명의 축복을 받아왔다. 50p

일찍이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닮지 않은 것이 상합하고, 서로 다른 것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지며, 모든 것은 다툼에 의해 생겨난다. 62p

제1부 영웅의 모험

꿈에서든, 신화에서든 갑자기 한 사람 생애의 새로운 시대, 새로운 단계를 암시하면서 이런 모험에 등장하는 인물은 더할 나위없이 매력적인 분위기를 갖는다. 주인공이 필연적으로 맞서야 하는, 무의식적으로는 상당히 익숙해져 있는(의식적으로는 알지 못할뿐더라 놀랍고 무서운 조재로 여겨지는) 이 인물은 자기 정체를 밝힌다. 77p

인간은 밤이고 낮이고, 자신의 어지러운 심성의 폐쇄된 미궁 안에 있는 살아 있는 자신의 이미지인 신적인 존재에 쫓긴다. 82p

이 작업은 자의적인 창조 과정은 분리시키고 이를 이념적인 추상성으로 변용시키지 못한다. 창조적인 예술가 역시........ 자신의 재창조 작업에서 시작, 이념적으로 자아를 구축한다. 그러나 이 경우, 이 자아는 자기 속의 창조적인 의지력을 그 자신의 이념적인 추상으로 변화시켜, 객관화시키는 입장에 서게 된다. 88p

영웅을 도와주는 노파나 요정 노파는 유럽의 민담에 자주 등장한다. 기독교의 성인전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이 역할을 맡는다. 성모이 주선으로 성자는 천주의 자비를 얻는 것이다. 95p

러시아 원정에 즈음해서 나폴레옹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미지의 종국으로 떠밀리는 느낌을 받고 있다. 내가 그곳에 이르는 순간, 내가 불필요하게 되는 순간, 나를 갈가리 찢는 데는 한 입자의 원자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인류가 힘을 모두 합치더라도 나를 해칠 수 없을 것이다. 97p

자신을 안내하고 자신을 도와줄 운명을 인격화함으로써 영웅은 모험의 영역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이윽고 한 단계 어려운 영역의 입구에서 <관문의 수호자>를 만나기에 이른다. 105p

모험이란 기지의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로 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어느 나라에서든, 어느 시대든 마찬가지다. 이 기지의 세계와 미지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의 수호자는 극히 위험한 존재다. 그들과 만난다는 것은 그만큼의 위험부담을 안아야 가능하다. 그러나 능력과 용기를 갖춘 사람 앞에서는 위험은 그 꼬리를 감추고 만다. 112p

"도깨비여, 왜 내가 두려워하겠는가? 태어나면 어차피 한번은 죽게 되어 있는데 두려워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더구나 내 뱃속에는 벼락이라는 무기가 하나 더 있다. 그대가 나를 먹는다고 하더라도 벼락은 삭이지 못할 것이다. 이 벼락은 그대 뱃속에서 그대를 갈가리 찢어 필경은 그대 목숨을 빼앗을 것이다. 결국 그대가 나를 먹으면 우리는 둘 다 죽에 괴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117p

아난다 쿠마라스와미 박사는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체든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고 썼다. 124p

2. 입문

일단 관문을 통과한 영웅은 기묘할 정도로 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로 이루어진 꿈의 세계로 들어간다. 영웅은 이곳에서 거듭되는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 신화와 모험에서 가장 흥미롭게 다루는 부분도 바로 이 국면이다. 128p

주술사는, 그 사회 성니들의 심성에 내재하고 있는 상징적 환상 체계를 출몰시키는 역할을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주술사란, 이러한 유아적 놀이를 주도하고, 공통의 근심거리를 밝혀내는 지도자적인 것이다. 그들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사방세서 성공하고 현실적인 어려움과 싸워 이길 수 있도록 잡귀와 대리 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133p

시련은 첫 관문의 문제를 심화시키고 질문은 여전히 미제로 남는다. 자아가 스스로를 죽음에 내어맡길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왜 그런가 하면, 주위에 있는 것은 머리가 많은 휘드라이기 때문이다. 절단한 곳에다 비방을 쓰지 않는 한 하나를 자르면 두 개의 머리가 나타난다. 143p

오, 은자여. 아름다운 은자여!........ 그대 내 어깨로 손을 얹어 보아요. 불 같은 화살이 그대 핏줄을 타고 지나는 것 같으리니. 아니, 내 몸의 더 비천한 곳을 접유하시면, 제국을 정복한 것 이상의 격렬한 기쁨을 맛보시리니. 그대 입술을 더 가까이. 165p

"적어도 아비의 경고만은 명심하도록 하여라. 채찍질은 삼가고 고삐는 꼭 잡고 있어야 한다. 말은 채찍질하지 않아도 자진해서 달릴 것이다. 하늘의 다섯 권역을 지나는 길로 똑바로 들어서서는 아니된다. 왼편으로 비켜가도록 하려라. 내가 지났던 바퀴 자국이 보일 것인즉네 길잡이로 삼도록 하여라. 하늘과 땅이 똑같은 열을 받을 수 있도록 너무 높게도, 너무 낮게도 날지 않도록 하여라. 너무 넢이 올라가면 하늘이 탈 것이요, 너무 낮게 내려우면 땅에 불이 붙을 것이어서 하는 소리다. 그 한가운데로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할 것이다.“ 175p

『코란』은 <어디로 돌아서든, 거기엔 알라 신이 계시도다> 라는 말로 이를 암시하고 있다. 힌두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만물속에 숨어 있어서 그 영혼이 빛을 앓으나, 뛰어난 지력을 가진 명민한 자의 눈에는 보인다」
그노시스 파의 격언에 따르면 <지팡이를 쪼개어도 예수님이 거기 계신다>. 191p

세상에는 도처에 보살(조재와 본질이 대각에 이른 자)이 있고, 보살의 광명을 받고 있지만, 세상이 보살을 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보살이 세상, 즉 연화를 들고 있다. 197p

우리가 일단 세계의 원형들에 대한 편협스런 교회적, 종족적, 국가적인 해석의 선입견을 홀가분하게 벗어던지게 되면, 우리가 전수받아야 할 최상의 도리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서슴없이 이웃을 공격하는, 누구에게만 자애스런 아버지의 도리가 아님을 이해하는 게 가능해진다. 207p

별, 어둠, 등잔, 환영, 이슬, 거품, 꿈, 섬광, 그리고 구름.
이런 것들을 마땅히 보이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215p

영원한 생명이 그들 안에 깃들여 있음을 알 뿐만 아니라 그들과 만물이 사실은 영원한 생명임을 아는 사람은 소원을 성취시키는 나무 숲에 거하며 불사의 영주를 마시고, 들리지 않는 도처의 영원한 화음을 듣는다. 이들을 일러 신선이라고 한다. 218p

우상으로서의 신들의 존재는 존재 그 자체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이 연출하는 유쾌한 신화는 그들 수준의 마음과 정신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지나 그배후의 무(無)에 이르게 한다. 236p

베르나르가 내게 눈짓과 함께,
저 위를 보라는 듯 미소짓고 있었지만,
나는 이미 그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었다.
나의 눈이 점점 밝아지면서,
자꾸만 빨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내가 본 환상은, 말로 할 수 없었으니,
말이 그 나타난 바에 승복하고,
기억 또한 압도당했다. 250p

3 귀환

무춘쿤다는 회귀하는 대신 이 세상으로부터 한 차원 더 떨어진 곳으로 물러서기로 마음먹었다. 누가 감히 그의 결심이 무분별하다고 할 것인가? 257p

승리한 영웅이 여신이나 신의 축복을 획득하고, 그가 속한 사회를 구원할 불사약을 가지고 원상 복귀할 대목이 되면, 영웅 모험의 이 최종 단계에서 초자연적인 후원자에 의한 지원이 따르는 법이다. 257p

영웅이 도망치는 대목에서 또 하나 자주 등장하는 방법은, 도망치는 영웅이 끊임없이 장애물을 던져 추격을 지연시키는 수법이다. 262p

도망에 실패하는 신화는 우리에게 있어서 비극이지만, 성공하는 신화는 신용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단일 신화가 완성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적인 실패나 초인간적인 성공이 아닌, 인간적인 성공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귀환의 문턱에 도사리고 있는 위기가 중요한 문제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269p

라벤은 소매를 내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사람들도 앞을 다투어 도망쳤다. 아베은 얼마 후에 그 자리로 되돌아와 혼자서 그 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272p

신화의 영역에서 일상 현실로 귀환하는 영웅의, 역설적이고 험난한 관문 통과의 서곡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구조를 받든, 내적 충동에 따라 살아나든, 신들의 안내를 받든, 영웅에게는 오래 잊고 있던 곳으로 애써 얻은 전리품(홍익)을 가지고 돌아가야 할 단계가 남는다. 280p

4 귀환 관문의 통과

영웅은 우리가 아는 세계에서 암흑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 암흑의 세계에서 영웅은 그 모험을 완성할 수도 있고, 거기에 갇힘으로써 우리들로부터 사라져 버릴 수도 있고, 엄청난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다. 영웅의 귀환은, 그 저승에서의 귀환을 말한다. 이승과 저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하나의 세계다. 신화나 상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281p

인류가 약삭빠르면서도 우매했던 몇천 년 세월을 통해 수십만 번 제대로 가르쳐지기도 했고, 그릇 가르쳐지고 했던 것을 어떻게 다시 가르친단 말안가? 이것이야말로 영웅의 궁극적인 숙제다. 빛이 있는 세상의 언어로, 언어가 무용한 저 암흑 세계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2차원의 평면으로 3차원의 형상을 나타낼 것이며, 다차원의 의미를 3차원의 이미지로 나타낼 수 있단 말이가? 282p

천국에서 1년이 지상에서의 백년에 해당한다는 등식은,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다. 백 년이라는 주기는 전체성을 의미한다. 360도라는 원의 중심각도 전체성을 뜻한다. 힌두교의 푸라나에 따르면, 신들의 1년은 인간의 360도에 해당한다 올림포스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의 역사는 순환 주기의 조화로운 형상을 드러내 보이면서 영겁토록 흘러갈 뿐이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이러한 세계는 변화의 죽음으로 보이고, 신들의 눈으로 보면 불변하는 형상, 곧 끝없는 세계일 뿐이다. 288p

덧없는 만남과 헤어짐,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사랑의 고통이 아닌가. 한 영혼이 제 운명을 저주하고, 운명의 장난에 저항할 때 그의 고통은 더욱 고통스러워진다. 위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기에 대응하는 것은 감정이 아닌 힘이다. 세계 도처에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런 이야기를 한 곳에 모아보면 일치하는 하나의 필연적인 공통 분모가 엿보인다. 기억 속에서 자기 영혼의 다를 부분과 만났음을 상기시키는 신비스러운 반지는 영웅이 그곳에 간 적이 있음을 시사한다. 294p

5 두 세계의 스승

신화는, 이미 변모한 신비의 형상을 하나의 이미지로 굳혀 내보이지는 않는다. 이 경우 변모의 순간은, 마땅히 소중하게 다르어지고 고구되어야 할 귀주이한 상징인 것이다. 그리스도가 변모한 당시의 순간이 바로 이런 순간이다. 297p

무애적 존재의 궁극적인 상태를 표상하는 것이야말로 신화적 존재의 대종을 이룬다. 특히 동양의 사회적 신화적 문맥에서 그러하다. 은자의 숲에 은거하는 현자와 운수행각의 탁발승은 동양의 삶과 전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신화에서 이러한 인물은 방랑하는 유태인(추방당한 무명의 존재지만 주머니 속에슨 고귀한 진주가 들어 있는), 개에게 쫓기는 거지, 음악으로 듣는 자의 영혼을 위무하는 방랑 시인, 가장한 신, 오딘, 비라코챠, 에드슈로 나타난다. 306p

영웅은 생성된 것의 투사가 아니라, 생성되는 것의 투사다. 왜냐하면 그는 현재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는 것이다> 그는 시간 속의 엄연한 불변성을, 존재의 영속성으로 오해하지 않는다. 변화가 영속성을 파괴할 때도, 다음 순간(혹은<다른 사물>)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313p

4 열쇠

많은 신화의 후반부에서 중심적 이미지는 건초 더미에 바늘이 떨어지듯 부수적 삽화와 윤색된 부분에 숨겨진다. 따라서 문화가 신화 시대의 시점에서 현실적 시점으로 옮겨옴에 다라 낡은 이미지는 감지되거나 증명되기 어려워진다. 319p

세례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원죄를 씻는 의식>으로 되어 있다. 즉 재생이라는 측면보다는 정화의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차적인 해석이다. 또 설혹 전통적인 탄생의 이미지가 기억되고 있다 해도 이에 선행하는 결혼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신화적 상징은 그 함축적인 의미 그대로 계승되어야 한다. 즉 수천 년에 걸친 영혼의 모험을 유추에 의해 표상해 온 만큼 그 대응 관계의 전 체계를 섣불리 펼쳐 보이기 이전에 그것이 지닌 모든 함축적 의미들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322p

제2부 우주 발생적 순환

1 유출

신화와 꿈은 같은 근원(즉 환상이라는 무의식의 샘)에서 유래하고 그 문법도 동일하다. 그러나 이 신화가 수면의 산물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이 양자는 동일하지 않다. 오히려 신화의 패턴은 의식적으로 통제된다. 그리고 신화는 전통적인 지혜를 전달하기 위한 강력한 회화적 언어로 기능한다. 326p

우리에게 전승된 신화학적 표상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우리는 이러한 표상들이 무의식의 징후(사실은 모든 인간의 생각과 행동)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정신적 원리의 통제되고 의도된 진술임을 이해해야 한다. 327p

영웅의 모험은, 그의 삶에서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나타낸다. 이 순간은 그가 살아 있을 동안에, 우리의 살아 있는 죽음의 어두운 벽 너머의 빛의 길을 발견하고, 이 길을 열었다는 의미에서 참으로 중요한 순간이다.
우주적 상징이 종잡기 어려운 역설로 표상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신의 왕국은 내재적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외재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은 잠자는 공주, 즉 영혼을 깨우는 편의수단이다. 삶은 공주의 잠이고, 죽음은 공주의 깨어남이다. 자기 자신의 영혼을 깨우는 영웅은, 그 자신이 자기 소멸의 편의수단일 뿐이다. 영혼을 깨우는 신은, 그 영웅과 죽음을 함께 한다. 332p


우주 발생적 순환은 우주 자체의 반복, 즉 끝없는 세계로 표상된다. 각 순환의 주기 안에는 소멸의 과정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삶이 잠과 깨어 있음의 주기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333p

우주 발생적 순환은, 현현의 세계로 나아갔다가 미지의 침묵이 지배하는 비현현의 세계로 되돌아온다. 힌두교에서는 성스러운 음절인 <옴AUM>으로 이 신비를 나타낸다. 여기에서 는 깨어 있는 의식을 나타내고, (U)는 꿈의식, 은 깊은 잠을 나타낸다. 이 음절을 둘러싸고 있는 침묵은 미지의 것으로, 그저 <네 번째>로만 불린다. 이 음절 자체는, 창조자이자 수호자아며 파괴자인 신을 뜻하나, 침묵은 순환의 개방 및 폐쇄와 아무 상관이 없는 영원한 신이다. 339p

신화는 이 순환 속에 머문다. 그러나 신화는 이 순환을 침묵에 둘러싸인 형태, 순환과 침묵이 서로 삼투하는 형태로 드러낸다. 신화는, 존재하는 원자 안팎에 충만해 있는 침묵의 계시록이다. 신화는, 고도로 세련된 형상화 작업을 통하여 마음과 가슴을, 모든 존재를 채우고 둘러싸고 있는 궁극적 신비로 향하게 하는 풍향계다. 우스꽝스럽고,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로 보여도 신화체계는 마음을, 가시의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비현현의 세계로 향하게 한다. 340p


모든 신화 체계의 기본 원리는, 끝과 시작이 함께 한다는 바로 이 원리다. 342p


회임에서 생산이,
생산에서 기억이,
생각에서 기억이,
기억에서 의식이,
의시에서 욕망이. 348p

무에서 출산이,
무에서 생산이,
무에서 풍요가,
생산의 힘,
살아 있는 숨결,
숨결은 빈 공간에서, 우리 위에 있는 대기를 생산했다. 349p

그것 보아라, 네 운명을 네가 골랐다. 인간에겐 끝이 있을 것이다. 368p


3장 영웅의 변모

이제 우주 발생적 순환은, 보이지 않게 된 신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갖춘 영웅에 의해 진행되어야 한다. 세계의 숙명은 바로 이 영웅들을 통해 실현된다. 396p

신적인 존재란, 우리 모두의 내부에 있는, 전능한 자아의 계시다. 삶에 대한 묵상은, 따라서 정확한 모방에 이르는 전주곡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내재적인 신성에 대한 명상의 형태여야 한다. 말하자면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서 선함을 얻는> 것이 아니고 <이를 앎으로써 신이 되는 것>이다. 400p

신화적인 영웅은 <이루어진> 사상의 옹호자가 아니라 <이루어지는> 사상의 옹호자다. 그의 손에 살해되는 용은, 현상이라는 괴물 바로 그것이니, 괴물은 쇠사슬 같은 과거의 옹호자이다. 영웅은 암흑에서 일어서지만, 적은 힘이 세고 권능 또한 엄청나다. 적은 자기 지위의 권위를 자신을 위해 행사하기 때문에 적이며, 용이며, 폭군이다. <과거>를 옹호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옹호>한다는 이유에서 그가 바로 사슬이다.
폭군은 자만한다. 그리고 자만은 바로 폭군이 파멸하는 씨앗이다. 폭군은, 자기 힘을 자기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만한다. 따라서 그는 그림자를 본질로 오인하는 광대역을 맡고 있는 셈이다. 그 시대 본연의 모습의 근원인 암흑에서 다시 나타난 신화적 영웅은 폭군을 파멸로 몰아넣는 비밀을 알고 있다. 단추 하나 누르는 듯한, 참으로 간단한 몸짓으로 그는 이 무서운 형상을 지워버린다. 영웅의 행적은 순간의 결정화에 대한 끊임없는 파괴 행위다. 422p

이 다채로운 쿠훌린의 모험에서, 가장 웅변적이고 가장 극적인 것은, 바퀴와 사과가 구르면서 영웅에게 내어주는 보이지 않는 특이한 길이다. 이것은 운명적인 기적의 상징이며 교훈으로 해독되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것에 대한 감상에 현혹되지 않고, 과감하게 자기 본성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자(니체의 말을 빌리면, <스스로 구르는 바퀴>인 사람) 앞으로는 어려움이 비켜나고 뜻밖의 탄탄대로가 나타나는 법이다. 431p

「모두들 슬퍼하지 말아요. 죽지 않고 영생하는 인간은 있을 수가 없어요. 자기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부터가 틀린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은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는 것은, 오직 생과 사의 끝없는 순환일 뿐입니다.」440p

무섭고 잔인한 폭군은 그가 폐위시킨 예전의 세계 군주나 그를 제거할 영리한 영웅뿐 아니라 아버지까지도 표상한다. 영웅이 변화를 가져오듯이, 무섭고 잔인한 폭군은 한 가지 편견에 고착된 인간을 표상한다. 시간의 순간순간이 이전의 순간순간의 족쇄에서 해방되듯이, 이 괴룡과 압제자는, 그 전 세대, 즉 구세주를 맞던 그 이전 세대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렇게 요약해서 말할 수 있다. 영웅의 임무는, 아버지(용, 시험자, 무섭고 잔인한 왕)의 부정적인 측면을 살해하고, 우주의 자양이 될 생명의 에너지를 그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과업은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서도 성취될 수 있고, 그 의지를 거스르고도 성취될 수 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아니 어쩌면 신이, 그에게 스스로 자식을 위한 제물이 되라는 의지를 심어주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역설적인 논리가 아니라 한 이야기, 같은 이야기를 다른 방법으로 한 것일 뿐이다. 실제로, 용의 살해자와 용, 제관과 제물은, 뒤집어보면 결국 하나다. 이 하나인 세계에서는, 대립물의 양극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신과 거인이 끊임없이 싸우는 세계는 이쪽 세계인 것이다. 어쨌든 용(아버지)은 어디에든 있다. 소산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치 탈환으로 늘어만 간다. 용(아버지)은 우리 삶이 걸린, 죽음이다. <죽음은 하나인가, 여럿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그가 거기에 있는 한 그는 하나지만, 여기 자식들 안에 있을 때는 여럿이다.」441p

어제의 영웅은, 오늘 <스스로>를 십자가에 달지 않으면 내일의 폭군이 된다. 442p

7 성자로서의 영웅
삶의 너머에서 존재하는 이런 영웅은, 신화를 초월한 영웅들이기도 하다. 그런 영웅들은 이 삶의 너머에 존재하는 것을 다루려 하지 않는다. 그런 그들을 신화도 다룰 수 없다. 그들의 전설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하나, 경건한 자세와 그들의 전기가 전하는 교훈은 진부한 상투적 문구에서 더 나을 것이 없다. 그들은 형상의 영역을 떠나 고귀한 존재의 화신이 하강하는 곳, 보살이 머물렀던 곳, <거대한 얼굴>의 옆모습이 <현현하는> 영역으로 들어갔다. <신비에 싸여 있던> 옆얼굴이 드러나면, 신화는 부차적인 언어이며, 침묵이 궁극적인 언어가 된다. 정신이 신비 속으로 빠져드는 순간, 남는 것은 오직 침묵뿐이다. 444p

4장 소멸

놀랄 만한 권능을 가진 막강한 영웅(손가락으로 고바르단 산을 들어올릴 수 있고, 자기 몸을 우주의 엄청난 영광으로 채울 수도 있는)은 바로 우리들 개개인이다. 거울에 비추어볼 수 있는 육체 자체로서가 아니라, 우리들에 내재하는 왕으로 서다. 458p

부처의 죽음에서 우리가 보았듯이, 심령에 의한 조형(유출)의 기간을 거쳐 되돌아 나오는 능력은, 살아생전에 어떤 종류의 인간이었는가에 달려 있다. 신화는 무수한 장애물을 돌파해야 하는, 영혼의 여로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460p

세상은 무법천지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따뜻한 사랑을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472p


III. 내가 저자라면

나는 캠벨이 왜 이토록 신화에 대한 이야기에 몰입할까가 궁금했다.
[신화의 힘], [신화의 세계] 강연내용을 책으로 만든 두 책을 읽는 동안은 그다지 크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읽으면서 참 궁금했다. 이것은 그동안 내가 옛이야기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였을 수도 있다. 나는 신화라든가, 전설, 구연설화 등등....... 이런 이야기에 대해서는 사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런 신비주의 같은 이야기를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생각했던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다.

나는 무신론자다. 사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 같다. 한 달 전부터 성당에 예비교리를 들으러 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도 어려운 것은 신이란 존재에 대한 것이다. 이전의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것은 내 안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신화 또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꿈 이야기 정도로 치부했었다.

이런 관점에서 다음 글은 나에게 귀를 솔깃하게 했다.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수수께끼이며, 영웅의 바탕 되는 미덕과 역사적 행위가 풀었어야 하는 문제다.” 29p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명쾌했다. 그래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라 했던 것이 구나라고 생각했다. 역시 나는 현현된다는 캠벨의 단어에 끌렸던 것이다.

내가 저자라면 나는 신화에 대해 무지한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는 장을 따로 마련하고 싶다. 여기까지 오는데 한참 걸렸기 때문이다. 왜 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하고 읽어야 하는지........ 적어도 나에겐 잘 다가오지 않았다.

영웅은 신이 현현한 인간이었다. 우리는 그들을 바랬고 그들에게 꿈속에서라도 구원의 손길을 보냈다. 그러면 모두를 이루고 있는 보통사람들은 무엇인가? 캠벨의 사고체계에 의하면 보통사람은 영웅의 현현을 꿈꾼다. 그리고 그 꿈같은 이야기는 일정한 패턴을 이루고 있다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건 그가 정신분석학에 대한 프로이트와 칼 융의 생각에서 많은 부분을 확인하고 있음에서 확인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화의 이야기는 꿈 이야기와 무엇이 다른가? 환타지 소설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왜 자꾸만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듯 이야기를 길게 쓰고 있는 것일까? 사실 나는 이런 물음에 대한 이야기를 책 속에서 듣고 싶었다. 나 같은 종족의 사람들이 나 뿐이겠는가? 나는 지금도 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생각하는데서 몇 걸음 때지 못하고 있다.

4장 소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놀랄 만한 권능을 가진 막강한 영웅(손가락으로 고바르단 산을 들어올릴 수 있고, 자기 몸을 우주의 엄청난 영광으로 채울 수도 있는)은 바로 우리들 개개인이다. 거울에 비추어볼 수 있는 육체 자체로서가 아니라, 우리들에 내재하는 왕으로 서다.”

캠벨은 결국 우리들 개개인의 영웅적인 본성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치 수많은 자기계발 강사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하는 “네 안의 거인을 깨워라”라는 외침과 같다.

내 속에서는 수많은 신들이 내가 잘 모르는 나의 조정으로 그 신들을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네 안의 잠자는 거인을 깨울 수 있다면 나에 신화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을 것이다.
IP *.117.68.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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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4.14 15:42:23 *.244.220.254
"나는 무신론자다"라고 당당히 외치시다 어떤 연유로 성당에 나가시게 된건지 궁금하네요~ 암튼 성당 나가시게 된 것 축하드립니다. 저도 유일신을 믿진 않지만 본명이 있는 가톨릭 신자(?)랍니다. 성당이든, 절이든, 사원이든 가는 길이 중요하진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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