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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gum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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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15일 11시 52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 저자의 생애 II 좋은 자료를 발견해서 다시 소개하는 걸로.

 

- 캠벨이라는 성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그의 가족은 아일랜드계 카톨릭 신자

* 미국은 프로테스탄트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로 카톨릭에 대한 저항이 커 대다수 카톨릭신자인 아일랜드인들에 대한 핍박은 미국에서도 계속됨. 1964년 아일랜드계 미국인인 존 F. 케네디가 미 대통령에 당선되는 쾌거를 이룩했다. 케네디는 이민 4세로 미국 최초의 가톨릭신자 대통령이 되었다. 그냥 카톨릭이라 하지 않고 아일랜드라고 말한 이유를 짐작함.

- 코네티컷 주의 캔터베리 프레프 스쿨에서 열다섯 살에 입학해서 3년 뒤에 우등으로 졸업

* 우등!! 결국 그도 우월적인 유전자구나.

- 버팔로 빌의 와이드 웨스트 쇼를 보면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버팔로 빌이 분장한 위풍당당한 연방기병대장을 동경했지만, 캠벨은 오히려 토벌되는 인디언에 대해서 강한 흥미를 품었다

* 유명한 사람들의 공통법칙 중 하나. 다수가 아닌 자기만의 시선

- 명문 다트머스 칼리지에 진학하여 생물학과 수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그는 메디치가에 관한 책을 읽고

인문학에 흥미를 품게 되어,1922년에 컬럼비아 대학으로 편입했다. 거기서 영문학과 비교문학을 배우는 한편, 육상선수로 활약. 특히 0.5마일 레이스(800m)에서는 콜롬비아 대학뿐만 아니라 뉴욕시의 기록을 깼는데 그것은 당시의 세계기록에 불과 0.5초 뒤진 것이였다. 재즈밴드에서 색스폰을 연주

* 저자 역시 이과에서 문과로 전향을 했다. 마지막 편지에 이어 여기도 메디치가가 나오네. 대단한 가문 이긴 가문인가 보다

* 800m 경기도 있었나? 더군다나 세계기록도 있다하니. 올림픽 정식종목이었으면 출전도 했을 것 같다.

* 악기까지. 예술은 감정을 풍부하게 하니까. 나도 피아노를 시작해야겠다.

- 1924년에 처음으로 유럽을 여행하게 되었는데, 선상에서 인도의 저명한 종교지도자 지두 크리스나무르티를 만나 힌두교와 불교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 대학원에 진학, 아서 왕 전설을 연구하여 문학 석사 취득. 석사논문으로 특별 장학금을 받아 1927년부터 파리대학(소르본대학)2년간 유학하는 기회를 얻었다.

* 공부를 진짜 잘했나 보다. 머리도 좋고. 부족한 점은 안보이는 사람.

- 파리 대학에서는 아서왕 전설의 권위자 밑에서 로망스어, 중세프랑스어, 프로방스어, 라틴어 등을 공부함

제임스 조이스의 문학과 피카소, 브라크 등의 그림에 흥미를 가지게 됨

* 저 많은 언어를 어떻게 섭렵할 수 있지?

- 1년의 파리유학을 마치고 이번엔 뮌헨 대학으로 가서, 산스크리스트와 인도-유럽어족의 언어들을 공부하고, 그곳에서 괴테와 토마스만의 문학과 프로이트와 융의 사상을 섭취했다.

* 어학의 천재인 듯. 1년 만에 프로이트와 융이라!!

- 뭰헨에서 크리슈나무르티의 영향으로 불교에 대한 관심이 한층 더 깊어짐. 그 무렵부터 캠벨은 카톨릭 교회로부터 완전히 멀어졌으며 귀국 후에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공언했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미국 사회이지만, 아일랜드계 카톨릭 신자가 "나는 이미 기독교도가 아니다"라고 성직자에게 고해하는 것은 배교로 간주되었고 친척이나 사회에 대한 오만불손한 도전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컸다. 따라서 그의 행동에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캠벨은 기독교가 설교하는 자연정복 사상과 배타성(선민사상이나 교파간의 교의 대립 등) 그리고 어쩌면 그 이상으로 신화적인 상징을 사실처럼 다루는 것에 대해서 강한 의문을 품었고, 그것에 대신되어야 할 것을 인디언 신화나 불교 사상에서 발견했다. 그는 "토마 복음서"에 큰 공감을 느껴 단테 등 많은 마음의 여행자를 찬양하고 일부 카톨릭 수도사들의 생활방식에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년에 이르러서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불교에서 그의 이상에 가장 가까운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만년에는 자택 서재에 달마대사 초상을 걸어두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불교신자가 되었던 것은 아니며 일상생활에서 명상을 통하여 내면을 향한 끝없는 여행을 계속했다. 그는 설사 자신의 신을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신은 나의 신이 아니다. 따라서 내게 그것을 강요하지 말라."

 

- 켐벨은 뮌헨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작정이었지만, 경제 사정 때문에 1년 뒤에 귀국했다. 미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덨던 것은 주가의 대폭락과 뒤이은 대공황이었다. 캠벨은 이력서를 수십 통이나 썼지만, 그를 불러주는 직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자 그는 은자와 같은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조각가 지망생인 누이 앨리스와 우드스톡의 숲속에 있는 값싼 작은 집을 빌려 극빈 속에서 독서에 몰두했다. 그는 재즈 밴드에서 색스폰을 불고 그 대가로 받은 돈으로 식비를 조달했다. 그는 우드스톡에서 살기 전에는 미국 전역을 여행하기도 했다. 그때 존 스타인벡 부부를 알게 되었는데 스타인벡 부인에게 "순수하게 플라토닉한" 애정을 품기도 했다. 그는 [전쟁과 평화(Voyna i Mir)]를 원문으로 읽기 위하여 러시아어를 공부하기도 했고,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양의 몰락(Der Untergang des Abendkandes)]에 심취하기도 했다.

* 우드스톡의 5년을 공부만 한 것은 아닌 걸로 여행과 독서, 음악, 교류 다양한 것을 했네. 거기에 러시아어까지.

- 그는 1933년에야 겨우 모교인 캔터베리 프레프 스쿨의 교사로 임명되었으며 그곳에서 어학을 가르치면서 슈펭글러, 토마스 만, , 조이스, 제임스 프레이저 등의 연구에 몰두했다. 다음 해에 그는 새러 로렌스 대학의 전임교수가 되었으며 그후 38년 동안 그곳에서 문학, 독일 철학, 비교신화학 등을 가르쳤다.

- 1938년에는 새러 로렌스 대학의 3학년생이었던 하와이 출신의 진 애드먼과 열애에 빠져 결혼했다. 근대 무용의 선구자인 마서 그레이엄의 제자였던 진 애드먼은 뒤에 일류 무용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 교수와 학생간의 사랑의 결실이다. 우리나라에선 여전히....

- 캠벨은 1940년 콜롬비아 대학의 인도 연구 교수였던 하인리히 침머와 알게 되어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42년에 침머의 소개로 융 학파가 주관하는 종교, 신화, 정신분석학 논문집인 [불링겐 시리즈]의 편집자가 되기도 했다. 캠벨이 여느 신화학 학자들과 다른 것은 그의 순수한 학문적 성과의 이면에서 인류의 역사에 대한 반성과 현재와 미래에 관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 자신과 함께 성장해온 신화의 상상력과 초월적 힘을 잃은 비문화적 인류 문명에 대한 경고이다. 또한 좁게는 자기 민족의 신화체계와 자기 문명권의 종교만을 주장함으로써 다른 민족과 문명권의 그것들을 파괴하고 배척하는 비도덕적 인류 역사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특히 그의 비판은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를 향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경고는 그의 엄격하고 철저한 연구 성과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이성적, 과학적 언어로써 반과학적인 종교적 교의를 거부하고 신화를 객관적인 사실과 혼동하는 것을 거부한다. 신화는 인류의 삶의 뿌리이며, 그 뿌리에서 자란 것이 인류의 역사이기 때문에 신화와 그 체계를 정당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성적 언어가 철저하게 요구되는 것은 물론이고 역사적 상상력을 넘어서는 사적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언어는 과학의 언어일뿐만 아니라 영혼의 언어이기도 하다.

- 1983년에 자신이 존경하던 캠벨을 부인과 함께 캘리포니아의 농장에 초대한 일이 있기도 한 조지 루카스의 영화 "별들의 전쟁(Star Wars)"은 캠벨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고 만든 영화라고 한다. 이와 같이 캠벨의 언어와 상상력은 우주적 공간까지 확대되는 영감을 보여주고 있다.

* 캠벨이 없었으면 스타워즈는 없었다. 유명한 광선검도, 다스베이더의 대사도. “I am your father”

- 그의 학식뿐만 아니라 인품을 따르는 사람이 많아 그의 80회 생일에는 무려 1,000여 명의 지인과 제자들이 생일 파티에 참가했다고 한다. 자연과학의 연구 성과를 대중에게 알리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았던 "과학세대"가 자연과학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신화학 학자 캠벨의 저서를 번역하게 된 것은 또 하나의 영역을 넓히는 일이라고 자위하면서 그리고 캠벨의 언어가 이성적인 한에서 "과학적인"것임을 확인하면서 이 작업을 마치게 되었다.

 

. 저자에 영향을 준 사람들

 

1) 하인리히 침머 : 캠벨이 나의 마지막 구루라고 불렀던 사람이랍니다.

인도철학자. 베를린에서 산스크리트와 인도학을 연구한 후 하이델베르크 교수로 취임. 칼 융, 알프레드 베버, 칼 야스퍼스와 교류하였다.(이런 사람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밖에는 안든다. 많은 분야 중에 산스크리트와 인도학이라니...)

컬럼비아 대학에서 4년간 강의를 하면서 제자로 캠벨을 만났다. 캠벨은 침머의 사후 그의 원고를 편집하거나 번역해 출판하였다.

 

나는 주로 제임스 조이스나 토마스 만과 같은 사람들의 책을 통해서 배웠어요. (신화의 힘, p.263)

2)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과 더불어 캠벨이 가장 좋아한 소설가 중 한명이다. 아버지는 정치에 관심이 높았으나 직업적으로 거의 사회 밑바닥을 전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리고 그의 어머니 매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제임스를 포함하여 10명의 자녀들을 낳아 가톨릭 신앙에 따라 키우고자 노력하였다. 제임스는 몹시 엄격하고 절대적 복종과 규율을 강조하는 아일랜드의 예수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다녔다. 이러한 교육 하에 제임스는 신부들의 부당성과 잔인성을 알게 되고 가톨릭 종교에서 멀어지고 그의 작품 속에 비판적으로 묘사하게 된다.

20세기 가장 뛰어난 작가 중 하나라고 평가받고, 그가 쓴 소설들은 대부분 20세기 영미문학의 걸작을 뽑을 때, 적어도 한 작품 이상 언급된다. 이 작가가 쓴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율리시즈(Ulysses)'란 작품이 있다. 20세기 영어로 쓰인 가장 위대한 소설로 평가된다.

제임스 조이스는 피네간의 경야(Finnegans Wake)를 쓰는 데 무려 17년을 쏟아부었다. 영어 외 60여 개 언어, 6만여 개의 어휘로써 조직된 이 난해한 작품은 1927년 잡지 트랑지숑(transition)에 일부분이 소개되기 시작하여 1939년에 출간되었다. 피네간의 경야는 비록 책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결코 읽을 수 없는난공불락의 요새요, 복잡한 미로였다. 한국 제임스 조이스 연구의 태두 김종건 교수가 악마의 언어에 결박당할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 십수년 동안 이 작품의 번역에 매달린 끝에, 한국은 지난 2002년 세계에서 네번째로 피네간의 경야번역국이 되었다.

"율리시즈에 이은 제임스 조이스 최후의 대작. 서구 수천 년의 역사를 주인공의 하룻밤의 꿈 속에 압축한 20세기 문학의 일대 사건이라 불리우는 이 책은 17년간에 걸쳐 60여개 국어의 응축으로 쓰여진, 문학이 가능한 모든 기법과 문체의 실험장이다. 번역이 가능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그 결과만으로도 놀라운 책. "- 김종건

캠벨은 그의 대작 <율리시즈><피네간의 경야>등에 평생 매료되었다. 사실 신화학자이기 전에 영문학자였던 캠벨은 그의 동료와 함께 <피네간의 경야를 여는 곁쇠>라는 해설서를 출간하기도 했는데, 이는 <피네간의 경야>에 대한 최초의 해설서 중 하나로 전해지고 있다. <피네간의 경야>는 원어민 조차차도 읽기와 해석이 불가능한 어려운 책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에 대한 해설서를 출간했다는 것만으로도 캠벨의 해박한 지식과 지적 능력을 엿볼수 있다. 그는 보통사람은 아닌 듯하다.

 

3) 토마스 만

독일 고전주의의 괴테에 비견되는 20세기 독일문학의 대표주자인 토마스 만은 18756월 독일 북부의 한자동맹 소속 도시 뤼베크의 부유한 집안에서 32녀 중 둘째로 태어났으며(세계적인 작가 하인리히 만이 바로 그의 형이다), 19558월 스위스 취리히 근교에서 타계했다.

독일의 평론가이자 소설가이다. 사상적인 깊이, 높은 식견, 연마된 언어 표현, 짜임새 있는 구성 등에 있어서 20세기 독일 제일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1929년 노벨 문학상을 비롯, 괴테 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1903년 토니오라는 한 혼혈아를 통해 시민사회의 아웃사이더로서 고독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한 예술가의 숙명을 그린 단편 토니오 크뢰거를 발표하고, 비슷한 시기에 그 주제 역시 시민성과 예술성의 또 다른 변주에 불과한 트리스탄을 발표하는데, 이 작품은 토마스 만의 아이러니 수법이 특히 잘 드러나 있는 대표적 단편이다. 19052월에 뮌헨 대학 수학 교수인 프링스하임의 딸 카티아 프링스하임과 결혼하고, 그해 11월에 장녀 에리카 만이 출생한다. 1909년에는 독일의 어느 소공국을 무대로 하는 중편 대공전하를 발표하여, 고독한 예술가적 존재를 사랑과 결혼에 의하여 삶의 세계와 손을 잡게 한다.

* 캠벨은 신화의 힘(p.27)에서 토니오 크뢰거를 예로 들면서 토마스 만이 쓴 작품들은 신화적 전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토마스 만의 세 개의 대표 소설즉, 20대 후반에 쓴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50대에 쓴 마의 산, 그리고 70대에 접어들면서 완성한 요제프과 그 형제들이 세 소설을 토마스 만은 스스로 평가하면서, 처음 것은 독일 소설이었고, 두 번째는 유럽 소설, 그리고 세 번째는 신화를 토대로 유머러스하게 그려낸 인간에 관한 노래라고 말하며, 이것은 보다 풍요롭게 전개되어 간 정신의 성장과정이라 할 수 있다고 어느 한 편지에서 밝힌 바 있다. 1940년에 발표된 뒤바뀐 머리는 인도 설화의 패러디로, 인도의 전설을 빌려 삶과 정신과의 조화적 종합이라고 하는 이상 실현의 어려움을 나타내고 있다.

 

4) 지두 크리스나무르티

캠벨은 1924년에 처음으로 유럽을 여행하게 되었는데, 선상에서 인도의 저명한 종교지도자 지두 크리스나무르티를 만나 힌두교와 불교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1895511일 인도 안드라프라데시에 있는 작은 도시 만다나팔레의 신앙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1909년 그가 열네 살 때 마드라스에 국제 본부를 둔 신지학회(Theosophical Society) 회장 애니 베산트 박사와 다른 지도자 리드베터가 그의 영적 능력을 간파하고 양자로 삼게 되었다.

당시 그의 부친이 이 협회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그들의 눈에 띄게 된 것이다. 이들은 바로 크리슈나무르티가 신지주의자들이 온다고 예측했었던 세계교사(World Teacher)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세계교사는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기 위하여 때때로 인간 형상을 취한 주 마이트레이아, 즉 그리스도나 부처와 같은 존재이다. 세계교사가 오는 것을 준비하기 위하여 별의 교단(The Order of the Star in the East)이라 부르는 범세계적 기구가 신지학회 산하에 구성되었다. 그리고 어린 크리슈나무르티를 그 수장으로 삼았다.

1920년을 즈음하여 그가 세계 언론의 관심을 끌면서 이상주의자들, 영적 모험가들, 진보정치인들, 지식인들, 낭만주의자들이 그를 동방에서 온 새로운 그리스도로 여기고 그의 강연을 들으려고 수천, 수만 명씩 모여들었다.

1922크리슈나무르티는 삶의 전망을 완전히 바꾼 신비 체험의 과정을 겪었다.(뭘까?) 몇 년 뒤에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스스로 던져버렸다. 그것은 많은 이들의 기대를 버리는 일이었다.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린 별의 교단을 해체하고 이 일을 위해 모금된 많은 돈과 재산을 포기했다. 그때부터 1986217일 사망할 때까지 거의 60년 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인간 내면의 근본적인 변화의 필요성을 사람들에게 역설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모든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및 종교 스승들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었다.(나는 처음 들어본 사람이었는데...) 그는 어떤 철학이나 종교를 내세우지 않고, 일생생활 속에서 갖는 우리 모두의 관심사들, 즉 폭력과 부패로 가득 찬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문제나 안전과 행복을 위한 개인의 탐구, 그리고 사람의 공포, 불안, 상처, 슬픔 등과 같은 내면적인 부담으로부터 스스로를 벗어나게 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또한 그는 마음의 미묘한 움직임을 아주 정밀하게 파헤쳐 명상적이고 종교적인 특질을 우리의 일상생활에 도입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했다.

크리슈나무르티 자신은 어떤 종교나 종파 또는 나라에 속하지 않았다. 정치적, 이념적 사상을 내세우는 어느 학파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는 이런 것들이 사람과 사람을 분리시키고 분쟁과 전쟁을 일으키는 요소들이라고 주장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철학적인 문서나 자료를 많이 남겼다. 이 자료들은 대중 강연, 질의응답, 저술, 교사와 학생들 그리고 과학자와 종교인들과의 토론, 개인 대담, 텔레비전과 라디오 면담, 편지 등의 형태로 남아 있다. 전 생애를 통해서 크리슈나무르티는 추종자를 원치 않는다고 주장했다. 다른 사람을 따르는 것은 누가 되었든지 간에 악이라고 말했다.

그는 신자와 제자의 조직을 만들지 않았고 누구도 그의 저술의 해석자가 되는 것을 인가하지 않았으며, 사후에 그의 관심사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후세를 위해서 그의 말, 대화 및 저술의 올바른 내용과 자료를 보존하여 널리 대중들에게 전하는 것만 당부했다. 또한 '내 말을 알리는 가장 빠른 길은 내가 말한 그대로 사는 일입니다.'라고 이야기 하면서 관념으로서의 지식이 아닌 이해를 통한 실천에 대한 부분을 강조했다.

 

5) 인류학자 레오 프로베니우스

독일의 민속학자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일반 대중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다. 탐험대를 이끌고 돌아다닌 탐험가였다. 캠벨은 이 사람의 저작에 관심을 가지고 읽어봤으면 했지만, 그럴 돈이 없자 서점 주인한테 사정을 적은 편지를 보냈는데, 그 서점 주인은 원하는 책을 모조리 보내며 나중에 일자리를 구하거든 그 때 책값을 지불하라고 했다고 전한다.

 

6) 역사학자-오스발트 슈펭글러

<서유럽의 몰락>의 저자 역사를 인간의 생애 주기에 비유했으며, <역사의 연구>를 쓴 토인비에게도 일정부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캠벨이 즐겨 인용하는 작가 중 하나였으며, 나중에 아내가 되는 자신의 수강생 진 에드먼이 대학을 졸업할 때 <서유럽의 몰락>을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신화학자인 제임스 프레이저, 철학자 니체, 분석심리학자 융 이 있다.

 

캠벨 책을 읽기 전에 내가 아는 그는 5년 동안 우드스톡에 들어가 5년간 책만 봤었고 그 힘을 바탕으로 여러 책을 출간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 이러한 그의 경력을 보고 좋아했다. 나는 이 시대의 보통사람이 자기노력에 의해 이 세상에 놀랄만한 성과를 내는 소위 개천에서 용나는 것을 좋아하고 이제는 더 이상 그러는 것이 어렵다는 걸 알지만 나는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을 가진 사람이다. 왜냐하면 신화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이런 성공스토리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롤 모델이 되고 그렇게 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캠벨의 경력을 보고는 그에 대해 실망했다. 사실 그는 철저한 엘리트였다. 엘리트가 나쁜 것은 절대 아니다. 그가 그러한 엘리트가 되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노력했다는 것을 본문에서 알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약간의 신화이다. 이를테면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내고 공부는 늘 뒤에서 했지만 밝은 성격을 가졌다. 그러다 갑자기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5년간 철저하게 혼자 공부를 해 성공을 거두었다. 뭐 이런식이었는데 캠벨은 철저한 엘리트였고 두뇌조차 명석한 사람이었고, 운동, 음악 뭐하나 못하는 것이 없는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성공적인 결혼(물론 아이가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행복한 삶을 살고 천복을 누린 진짜 몇 안되는 사람이다.

 

2.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들어가는 말

캠벨 사상의 정수, 그 아름다운 내면과의 마주침

 

7. ‘타트 트밤 아시(Tat tvam asi)’, 네가 바로 그것이다.이것이 캠벨 철학의 근간이다. 물질이란 없다. 모든 것이 장()이다. 그러한 구별과 제한은 단지 우리 마음속에만 있을 뿐이다.

모든 답은 자기 자신이다. 누구에게서 찾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7. 자신의 사고와 삶에서 이원성(duality)을 만드는 것은, 곧 대립을 만드는 행위이다.

자기와 맞지 않는 집단에서는 이원성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집단에서 있어야 한다면

 

8. 조지프는 이 세미나를 마치면서 다들 이렇게 모이게 된 것을 운명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신화학자가 운명을 말했다. 나도 올해 운명을 실제로 경험했다. 어쩌면 이제는 캠벨을 다시 만날 준비가 되어 있다.

 

8. 파르치팔과 마찬가지로, “그는 천사도 성자도 아니었다. 용기와 동정심이라는 한 쌍의 덕, 거기에 한 가지 더 보태자면 의리라는 덕을 갖추고 모험을 떠나며 행동하는 살아 있는 인간이다. 그는 초자연적인 은총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덕목에서 확고한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마침내 성배를 손에 넣게 된다.”

모든 뛰어난 능력을 가진 기사들을 대신해 조금은 부족해 보이는 파르치팔이 성배를 손에 넣은 이유를

덕에서 찾는다. 그런데 덕이라는 건 보통 동양에서 추구하는 철학의 하나인데..

 

9. 이 책의 나머지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각각은 세가지 층위 또는 단계에 상응한다.

첫 번째 단계(현세에서의 삶)는 주로 골반에 위치한 에너지의 중심심부(차크라)의 주제-생존, 섹스, 그리고 힘-를 다루고 있다. 그는 다른 누군가가 원하는 바대로 행동하는 것은 노예의 도덕이며, 영혼과 육체에 있어 죽음과 부패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가르쳤다.

구본형 선생님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강조하는 것 중에 하나가 노예같은 삶이다. 그렇지만 직장에 다닌다고 해서 다 노예는 아니다. 그 안에서 자기 일이 재미가 있고, 보람이 있고, 자기 목소리, 행동 그리고 자기 발전을 할 수 있다면 노예라고 볼 수 없다. 기준의 정립!!

 

9. 우리가 스스로의 선택 폭을 제한하게 된다면, 우리는 자신의 세계관을 제한하게 되고, 그런 제한이 지나치면 우리 역시 세계의 경찰관’, 즉 자기 자신을 위해 만들어 놓은 상자 밖으로 남들이 나가지 못하도록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만의 세계, 편견, 선입견 이런 것들이다. 당연히 어렵겠지만 유연성을 가지는게 중요하다.

 

11. 우리 각자의 희열을 따르는 것은 방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력이 넘치는 것이었다.

 

11. ‘지금도각자를 위한 길이 저기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며, 일단 그 길에 들어서기만 하면, 이전까지 열리지 않았던, 그리고 다른 어느 누구를 위해서도 열리지 않을 문들이 열리게 될 것이다.

난 이제 그 길에 들어섰다. 닫혀 있는 문이 꼭 열리기를 간절히 기도해본다.(신을 믿지 않지만...)

 

11. 나는 우리가 신들을 향해 한 걸음 내딛기만 하면 신들은 우리를 향해 열 걸음 다가서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11. 피와 찢어짐과 고통이 없다면 새로운 생명도 있을 수 없다.

이해하고 당연하다고 생각은 하는데 그냥 이렇게까지 해야하는 생각이 불쑥 든다.

 

11. “인생이란 무엇일까요?” 조지프는 종종 이렇게 묻고 나서 곧 스스로 답하곤 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죠.”

 

12.우리가 인생이라는 컵을 가득 채우고, 태워 버릴 것은 다 태워버렸다면 노년의 고요는 오히려 반가울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했다면 우리는 노년의 문턱에 도달해서도 뭔가 불만족스러운 욕구 때문에 눈길을 자꾸 뒤로 돌리게 될 것이다. 융의 말마따나 인생에 대해 작별을 고하지 못하는 노인은 인생을 포용할 수 없는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연약하고 병약하게 보인다.”

노년에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정말 다 태워버렸으면 좋겠다. 나도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온 몸에 경련이 일어나곤 한다.

 

12. “너희가 어린아이처럼 되지 못한다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야만 한다. 조지프의 말마따나 자기발견의 사자(獅子)는 사사건건 너는 할지라고 주문하는 그 용을 죽여야만 한다.”

누구도 나에게 주문할수 없도록 사자가 되어보자. 어린사자면 더 좋을까?

 

14. 이 집과 이 의자와 이 페이지에도 마찬가지리라. 바로 여기 있다. 바로 여기 있다. 바로 여기 있다.

 

도입의 단계

 

영웅의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19. 여러분의 지금 모습 그대로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평생 누릴 특권이다.

난 지금 이대로의 모습이 너무 좋다. 정말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 같아 행복하다.

 

21. 전사(戰士)의 방식이란 삶에 대해 라고 하는 것, 그 모든 것에 대해 라고 하는 것이다.

? 전사는 항상 싸워야 한다. 이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라고 하는 것은 노예의 근성인데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대답이 나오겠지

 

21. 우리는 세계를 변화시키려 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임무는 자신의 삶을 바로 잡는 것이다.

그럴 욕심까지는 없다. 정말 나 자신부터 변화시켜 보고 성공하는 것이다. 그 이후에 내 가정, 동네, 지역사회 점차적으로...

 

26. 우리 안의 더 깊은 힘을 찾아내는 기회는 삶이 가장 힘겹게 느껴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

절박함, 절실함이 커지니까.

 

28. 영원은 여기와 지금으로 이루어진 차원이다.

신은 여러분 안에 살고 있다.

아직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거부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여러분 자신의 중심에서 살아가라

 

29. “너는 할지니라고 하는 용을 죽여라. 그 용을 죽인 사자는 비로소 아이가 된다.

뱀이 그 허물을 벗어 버리듯, 여러분은 지난 날을 내팽개쳐라.

쉽지 않았지만 난 지난 날을 완벽하게 버렸다. 지난 5개월간 이전 직장이 하나도 그립지 않았다. 이렇게 버리는 것이 쉬운 줄 몰랐는데...

 

30. 여러분만의 희열을 따르라. 영웅적인 삶은 각자만의모험을 실행하는 것이다. 모험으로의 부름을 따르는 것에는 아무런 안전도 보장되지 않는다.

그래도 그 모험을 따라가야 함을 늦은 나이에 알게 되었다. 모험을 해보고 죽는것이 안해보고 오래사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인생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33. 여러분은 보석을 발견하고 보석은 여러분을 끌어당긴다.

영적인 것을 사랑하게 되면 여러분은 세속적인 것도 얕보지 않을 것이다.

영적인 것을 사랑해본적도 없고 존재하는 것 자체를 부정해 왔는데 이것을 인정하기가 아직 쉽지 않다.

 

36. 스리 라마크리슈나는 말했다.

깨달음을 찾으려는 자라면 마치 머리에 불붙은 사람이 연못을 찾는 것과 같은 간절함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의식의 첫 번째 단계

현세에서의 삶

 

41. 하나님은 아담을 잠재우고, 그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들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말마따나 이브는 커들릿 사이즈의 배우자였다. 바로 그때부터 문제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그 게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남자와 여자, 삶과 죽음, 선과 악, 이런 것이 대립자의 문제들이다.

갈비뼈 하나, 커틀릿 사이즈의 여자로부터 시작된 문제. 그러나 여자 없는 삶은 상상할수 없다.

 

42. 그 이전까지는 이원성에 대한 진정한 인식조차 없었다.…… 그곳에는 금지된 나무가 두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 나무는 바로 선과 악 또는 이원성에 관한 지식의 나무였고 두 번째 나무는 영원한 생명에 관한 지식의 나무였다.

 

42. “무슨 일이냐? 너희가 잎사귀를 걸쳤구나.”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이브는 이때부터 서로의 알몸을 부끄러워하여 무화과 잎사귀를 걸쳤다고 한다. 그럼 이전에는 부끄러움을 몰랐던 것이었다. 알몸이 왜 부끄러웠을까? 부끄럽다는 건 서로에 대해 다름을 인식했기 때문이 아닐까? 선악과를 먹기전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였던 모양이다. 하나님은 왜 아담과 이브를 만들때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채 창조했을까?

 

43. 두사람은 하나님께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말했고, 그리하여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남자는 여자를 비난했고, 여자는 뱀을 비난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 모두에게 훨씬 더 큰 저주를 내렸다. 남자의 처벌은 비교적 가벼운 편이었다. 그저 일하고 땀을 흘리면 그만이었으니까. 반면 여자는 고통 속에서 아이를 낳아야만 했고, 뱀은 남은 평생 배로 기어 다녀야만 했다.

이것을 믿지는 않지만 이 이야기대로라면 나는 뱀에게 감사의 절이라도 해야한다. 너 때문에 내가 이 땅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44. 지구상 그 어디에도 에덴동산은 없었고, 뱀이 말할 줄 알던 시절도, 선사시대의 타락, 동산에서의 추방도, 대홍수도, 노아의 방주도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주된 서양 종교의 역사는 허구에 기반하고 있다.

이 점은 나와 의견이 일치한다.

 

45. 결혼이란 자웅동체를 재건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오로지 사랑 때문에 결혼한다면 그 결혼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은 또한 다른 층위에서도 결혼하여 자웅동체를 재건하고, 완벽한 전체를 만드는 남자와 여자가 되어야 한다.

사랑은 유한하니까. 사랑이 끝나면 관계는 깨진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저자는 상대에 대한 희생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희생으로 얘기한다.

 

47. 지금의 내 아내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런 느낌을 받았지만, 나는 한동안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 강의를 들었고, 나는 마음이 계속 들떠 있었다.

나의 아내도 이런 식의 느낌이었다. 그녀를 처음 봤을때는 여자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고향의 새까만 후배였다. 그러던 그녀가 어느날 여자도 다가왔도 그렇게 내 옆에 있다.

 

48. 아버지는 그 딸에게 있어서 그렇다. ……여성은 남성적 요소에 의해 보충되며 따라서 그녀의 무의식은 이른바 남성적 각인을 지니게 된다. …… 나는 여성에 있어 투사 형성 요인을 정신이나 영혼을 의미하는 아니무스라고 불러왔다.

나의 딸에게 나는 아니무스가 될수 있다. 잘못된 남성상이 무의식속에 자리잡지 않도록 힘쓰자.

 

50. 그 힘에 의해 가능한 행동이 여성으로서의 여러분보다 오히려 남성에 의해 더 적절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곧 관계에 대한 진정한 인식이다.

남성이 하는 일은 여성도 모두 할 수 있다는 동등한 생각은 제발 버리자. 페미니즘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성과 여성은 엄연히 신체적, 육체적으로 다르다. 다름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찾아야 하는 것.

 

55. 여러분이 견뎌 내는 재난은 그 무엇이건 간에 여러분의 성격, 여러분의 됨됨이, 여러분의 삶을 향상시킨다.

일부러라도 재난을 많이 겪어야 된다는 뜻으보 해석될 수도... 굳이 안겪어도 되는 재난을....

 

55. 여러분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여러분은 마치 어마어마한 실패인 양 보였던 파멸 직후의 순간들이 사실은 여러분이 지금 누리고 있는 삶을 만들어 준 사건들이었음을...

좋아 이건 인정한다. 무수히 많은 시련과 고통들이 지금의 이 자리를 만들었으니까.

 

55. 여러분에게 벌어진 일 가운데 긍정적이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비록 그 순간에는 부정적인 재난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부정적인 것도 결국 긍정적인 효과로 나타난다. 이것인가? 그러나 견뎌내는 정도도 다양하다. 견뎌내지 못하면 스스로 파멸하고 만다.

 

57. 금혼이라는 목표는 관계의 첫 순간부터 암시되고 있다. 노년은 어린이의 세대에 이미 내재된 것이다. 어린이의 노년은 일찌감치 저만치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여러분은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이 아직 꼬마임을, 그리고 자신의 옛 경험이란 이제 겨우 시작된 것들임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인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미국사람이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이 또한 나의 선입견이지만 미국 사람들은 결혼생활이 길지 않다는 것이 대다수이므로.

 

60. 비슈누 식으로 사랑을 분석하게 되면, 사랑에는 다섯가지의 단계와 함께 그 각각의 단계를 대표하는 모델이 하나씩 있다. 깨달음을 찾고 성취하는 모든 훈련은 이 경로의 에너지로부터 수행될 수 있다.

갑자기 왜 사랑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사랑이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건 사실이지만 전부는 아닐텐데. 왜 그런지 한번 보자

 

60. 사랑의 첫 번째 단계는 주인에 대한 하녀의 사랑으로, 가장 낮은 단계의 사랑이다. “, 주여, 당신은 내 주인이십니다. 나는 당신의 종이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그렇게 하겠나이다.” 이것은 율법의 종교가 하는 방식이며, 그런 종교에는 수많은 계율들이 있다. 이것은 두려움의 종교다. 여러분은 신의 존재에 대해 아직 자각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것은 저기 있지만, 당신은 여기 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종교적 사고에 대해서나 사랑에 대해서 스스로 헌신할 만한 시간이 많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방법이다.

내가 아무리 신을 믿는다 치더라도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하는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종교가 아직까지도 있는 이유는 바로 사람의 두려움을 먹고 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두려움이 없을 수가 있나. 아마도 로봇이 되지않는 한 불가능하고 그렇게 때문에 기존의 종교와 신흥종교가 생겨나는 것이다.

 

61. 이것은 생각해볼만 한 가치가 있다. 종교의 예배 가운데 그런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내가 보기엔 거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종교의 예배가] 마땅히 도달해야만 하는 길이다. 예배가 단순히 율법과 명령의 계율을 이행하는 것에 불과할 때 종교적 체험은 크게 저하되고, 여러분은 시키는 대로 기꺼이 행동하는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사랑의 자발적 관계는 그것과는 다른 범주다.

 

63. 결혼의 경우에 우리는 여전히 사회며 이웃과의 관계를 조화롭게 유지할 수 있지만, 이처럼 다섯 번째 단계의 사랑에 도달하면 사랑 이외의 것들은 모조리 사라지고, 상대방에 대한 일방적인 집착만 있을 뿐이다. 나머지 모든 것은 잊히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마 여러분 중 일부는 이런 경험을 해 보았을 것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매우 아쉬운 일이다.

다섯 번째를 거쳐서 결혼에 골인 하는 것 아닌가. 그것을 얘기하는건지.. 신에 대한 접신인지...

 

65. 힌두인들이 제공한 이 작은 척도-첫째는 주인과 하인, 둘째는 친구 대 친구, 셋째는 부모대 자녀, 넷째는 배우자 대 배우자, 그리고 다섯째는 오로지 이 절대적인 사랑-에서 우리는 순수한 사랑의 경험을 과대평가할 위험을 항상 지니고 있다. 그 경험을 완화시키면 마치 뭔가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여러분은 반드시 그걸 완화시켜야 한다. 여러분에게는 실제로 가능한 관계가 무엇일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 달리는 사랑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고 하니 멈춰서 중간확인하는 것도 필요하다.

 

65. 순수한 사랑의 경험을 완화시키는 방법은 지금 여러분이 수립하고 있는 관계의 구체적인 측면 속에 있는 어떤 깊은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다. 순수한 열광은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인생에는 또한 가치 있는 관계들이 있기때문이다.

현재의 관계를 깨지말고 충실해라 이런 말인 것 같은데 관계를 깨는 것이 천복을 따르는 것이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긴 답은 개인이 알고 있겠지. 관계의 재정립!

 

65. 그러한 관계들을 배양하기 시작하면, 이러한 순수한 열광을 완화시키면서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잇다. 그것을 반드시 잃어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결혼에 있어서 비결이다.

순수한 열광이라? 아직 머리에 떠오른 것이 없다. 무엇을 말하는 건지. 열광의 대상은 뭘 말하는걸까?

사람, 종교, 신화....

 

65. 결혼에는 순수한 열광과는 전혀 무관한 즐거운 경험들이 상당수 있다. 이런 경험들은 그 에너지 시스템을 이해하고, 우리가 계속해서 결혼 상태를 유지하게 해주는 한편, 결혼이란 결국 둘 중 한 사람이 밖에 나가서 쓰레기통을 비워 오는 것에 불과하다고 폄하하지 못하게 만든다.

쓰레기통은 내가 전담하고 있지만 결혼은 즐거운 경험이 맞다. 그리고 가장에서 주부로 변신한 지금도 재미있다. 캠벨을 이력을 보니 45세에 결혼하여 38년간 결혼생활을 했다. 나는 80을 잡으면 진짜 금혼이 된다.

 

66. 그들을 서로 묶어 준 유일한 끈은 오로지 아이들 뿐이었다. …… 그러한 묵종과 관계로부터는 상호간의 교육과 영혼의 맞물림이 전혀 실현되지 못한 것이다. 이처럼 삶의 후반부에 있어서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에 관해 부부 양측이 아무런 사전개념도 지니고 있지 못했다는 것은 지극히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일이다.

서양사람, 특히 미국인이 이렇게 얘기하는 것에 놀라웠다. 사실 아이 때문에 사는건 지극히 동양적인 관점이었는데 역시 사람 사는 것은 비슷한 것 같다. 그래도 그 정도 살아보고 아닌 것이니까 노년에 헤어져서 하고 싶은 것 하는 삶도 괜찮아 보이던데...

 

68. ‘고결한 마음이란 것은 사랑이 무엇이냐에 대한 일종의 단서가 아닐까 싶다. 고결한 마음이란 발상은 그 사람에 대한 책임감과 관련되어 있다. 만약 책임감이 없다면 여러분은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다른 뭔가를 하는 것이다.

책임감이 중압감으로 밀려오면 안되는데...

 

68. 결혼 생활을 한다는 것은 곧 상대방의 삶이 내게 달려 있다는 의미임을 수긍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차마 결혼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역시 캠벨은 다르네. 이런 생각을 가지고 결혼하지는 않은 것같다. 단지 사랑해서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런 이유였는데

 

69. 결혼이란 상대방을 책임지고 사랑함으로써 상대방과 진정한 일체가 되는 것이다.

 

70. 배우자와의 관계가 여러분의 삶에서 최우선의 고려사항이 아닌 한, 내 생각에 여러분은 [결혼했어도] 결혼한 상태가 아니다. 반드시 그 관계가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그러한 관계를 최우선으로 뒀기 때문에 지금의 내 자신의 위치를 결정했다. 사실 나도 명예욕, 성취욕이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만두는 건 쉽지 않았다.

 

71. 아내를 고르려면 그 여자의 어머니를 먼저 봐야 한다. 만약 그 어머니가 훌륭한 여자고, 여러분이 이상적으로 간주할 만한 종류의 사람이라면, 그 딸들 가운데 누구와 결혼하더라도 그녀는 여러분을 위한 삶을 구현할 것이다.

내 아들에게 꼭 얘기해주어야겠다. 그럼 딸에게는 아빠를 잘 보라 해야 하나?

 

73. 결혼은 남성의 주도권이 무너지는 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이마음이다. 결혼을 함으로써 나는 모든 것은 그녀 위주로 돌아갔다. 그래도 이것이 좋으니 그녀는 나의 샤크티가 맞다.

 

74. 심지어 하느님조차도 무조건적인 사랑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을 지옥으로 던져 버린다니까 말이다.

그 뿐 아니라, 정말 착하게 사는 사람을 더 힘들게 한다.

 

75. 성배로 향하는 열쇠는 공감, 다른 사람의 슬픔을 마치 여러분의 것인 양, 느끼고 또 같이 고통 받는 것이다. 공감의 위력을 깨달은 사람은 성배를 발견한 사람이다.

 

77. 생존은 삶의 두 번째 법칙이다. 첫 번째 법칙은 우리가 모두 하나라는 것이다.

 

79.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만약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할 경우에[그로 인해] 잘못 교육받은 사람은 결국 신화적 의미에서 황무지라고 일컫는 상황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세상은 그에게 말을 걸지 않고, 그는 세상에 말을 걸지 않는다.

자녀들의 교육문제는 언제나 정답은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부모는 아이들에게서 나오는 작은 어느하나의 가능성도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80.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에겐 반드시 아버지가 있어야 한다. 아버지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어머니는 자연을 표상하지만, 아버지는 아들과 딸을 사회적 관계로 인도한다. 여러분은 어머니로부터 여러분의 몸을 얻었다. 여러분은 아버지로부터 사회에서의 역할을 얻는다.

우리집은 반대인데 나는 주부, 집사람은 가장. 이런 경우에도 이런 공식은 성립되는건가?

 

80. 아버지는 긍정적인 면으로나 부정적인 면으로나 아들의 모델이 된다.

 

82. 그때 내가 깨달은 사실은 만약 부양할 가족이 벗다면 돈이 전혀 없어도 잘 살아갈수 있다는 것이었다.

부양할 가족이 있으니 늘 문제였다. 그리고 그때니까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요즘은 글쎄 돈이 없으면 많이 힘들꺼다. 그냥 힘든 수준이 아닐꺼다. 부양할 가족이 있는데 오로지 자신의 천복을 쫓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82. 대신 나는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함으로써 제법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이렇게 되는 것을 나 역시 간절히 바라고 바라는 일이지만 세상에 얼마나 이렇게 될수 있을까?하는 의문은 남아있다. 결국 세상은 성공한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지 더 많은 실패자에 대해서는 절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83. 자신의 삶을 오로지 돈 벌기에 바치는 사람들을 향해 나는 일종의 경멸을 품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없고 남이 있기에 갖는 일종의 반발심리라고 봐야 하나

 

86. 그런 열등감은 벗어던져라. 왜냐하면 열등감이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남과의 비교에서 내가 만들어내는 열등감이지만 그걸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다. 그냥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87. 융을 발견하게 된 것도 바로 독일에서였다.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뭔가 번쩍이는 것이 있다는 것을 나도 믿는다.

 

87. 그 망할 놈의 논문만 쓰면 땡이었다. …… 결국 이까짓 것 개나 줘 버리자고 생각했다. [대신]나는 숲으로 들어가 5년 동안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하여 나는 박사학위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덕분에]나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자유로웠고, 아무런 책임질 일도 없었다.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이 부분에서는 대단하다는 말 밖엔 안나온다. 나같으면 그냥 논문을 가볍게 써 주고 숲으로 가면 될것인데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했을까.

 

88. 그저 읽고, 또 읽고, 읽으면서 노트 필기를 했다.

그냥 읽으면 안된다.

 

88. 나는 조이스와 토마스 만과 슈펭글러를 읽었다. 슈펭글러는 니체를 언급했다. 나는 니체를 읽었다. 그러다가 니체를 읽으려면 쇼펜하우어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쇼펜하우어를 읽었다. 그러다가 쇼펜하우어를 읽으려면 칸트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식으로 해서 칸트도 읽었다. 일단 거기까지만 가도 되긴 했지만, 칸트를 출발점으로 삼자니 상당히 힘들었다. 그래서 거기서 다시 괴테로 거슬러 올라갔다.

처음에는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했는데 나중에 가서는 최초 인류에게까지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굉장히 어렵고 힘든 방법임에는 틀림없다.

 

89. 5년 동안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비록 잠시 동안이라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계속 살아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점은 확신하고 있었다. …… 나는 아무런 책임도지고 있지 않았다. 전혀, 정말 재미있었다. 일기를 쓰고,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내려 애써 보았다.

 

89.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완벽한 삶을 산 것 같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은 내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순간에 맟춰 나타나 주었다. 내가 그 당시에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은 5년 동안 직업도 없이 지낼수 있는 삶이었다. 그게 가장 절실했다.

나는 집사람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녀 덕분에 나도 연구원을 할수 있고 부양할 가족에 대해 걱정이 없다. 그런데 캠벨은 왜 5년이었을까? 정하고 했을까? 아니면 직업을 구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가?

 

90. 뜻밖의 일 뒤에 또 뜻밖의 일이 뒤를 따르는 식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돌아보면, 여러분은 비로소 그것이야말로 완벽했음을 깨달을 것이다. 따라서 내 지론은, 만약 여러분이 자신의 길을 가고 있으면 만사가 여러분에게 [자연스레] 찾아오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여러분 자신의 길이고, 어느 누구도 그 길을 앞서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전례도 없은 것은 당연하고, 따라서 모든 것이 그야말로 뜻밖이며, 그야말로 적시인 것이다.

결국 지금의 위치 나도 우연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찾아온 나의 길이라는 것인데...나는 내 의지대로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 모든 것도 다....

 

91. 그녀의 형부란 바로 존 스타인벡이었고, 우리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봤다고 생각했는데 <분노의 포도>의 작가라고 한다. 이런 인연도 있구나.

 

92. 나는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두권짜리 <서구의 몰락>을 꺼내 들었는데, 이런, 세상에! 거기 적힌 내용은 벼락과도 같았다. 슈펭글러는 말했다. “젊은이여, 만약 그대가 미래의 세계에 있고 싶다면, 자신의 그림붓과 시 쓰는 펜일랑 선반 위에 얹어 두고, 멍키 스패너나 법전을 집어 들어라.”

책을 읽어봐야겠지만 내용은 인간의 문명은 모든 생명체와 같이 성장과 몰락의 순환을 반복한다고 했다. 새로 태어나 유년기를 거쳐 장년기로 성장하며 노년기를 지나 죽음에 이른다는 것이다. 멍키 스패너와 법전은 무엇을 얘기하는 것일까? 사람이 직접 먹고 사는데 필요한 것에 집중하라는 뜻인가?

 

97. 가령 내가 카멜 도서관에서 우연히 손을 뻗어 한 권의 책, 그러니까 내 인생을 뒤바꾼 책을 발견한 것처럼.

마치 내가 구본형선생님의 책을 접한 것처럼 같은 이치일 것이다.

 

99. , 정말로 좋은 시절이었다. 나는 그저 이리저리 돌아다녔고, 내가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다녔다. 나는 오로지 내적으로 이치에 닿는다고 느껴지는 일만을 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는 도무지 살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게다가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을때에는 책을 읽는게 최고인 거다.

비록 내가 나이가 많은 것이 아쉽지만 나도 제 2의 인생을 살면서 하고 싶은 것을 찾고 싶었다. 누군가는 와이프 잘 둔 덕본다는 비아냥도 들었지만 뭐 어때? 정말 나도 두 번째 인생은 돈 때문에 무엇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좋아하고 잘 하는 것을 하고 싶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지를 못했다. 그래서 하나씩 하나씩 해보기로 했는데 변경연이 날 초대했다. 그래서 더 행복하다. 이 시기가 끝나면 또 내가 해보고 싶은건을 하나씩 해보는거다.

 

99. 당장 그날 하루무엇을 할 것인지는 생각하되, ‘내일은 뭘 해야지하고 미리 생각해 둔 것에 매달리지는 말아야 한다. 여러분이 아무런 책임질 일을 갖고 있지 않을 경우 여러분은 다음 두가지를 결코 걱정해서는 안 된다. 하나는 굶는 것이며,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다.

 

99.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것을 받아들이고, 여러분의 마음에 드는 곳에 머물라. 중요한 것은 여러분 스스로가 나의자리라고 생각하는 곳에 머무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야 그저 그들만의생각일 뿐이니까.

 

100. 하지만 막상 그 학교에 예쁜 여학생들이 와글거리는 것을 보고 나니, 문득 , 이것도 나쁘진 않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한 저자의 생각. 나라도 선택했을 것이다. 자석이 끌리는 것처럼.

 

101. 나무를 제멋대로 자라게 내버려 두고 외부로부터 압력을 가하지만 않으면, 나중에 가서 여러분은 그것이 하나의 유기적 발전 과정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파르치팔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기대하던 대로 행했기 때문에 일을 오히려 망치고 말았다는 사실.

 

104. 성배 전설에서 말하는 황무지란 뭔가 [의례적으로] 마땅히 해야만 한다고 여겨지는, 또는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여겨지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땅이다.

 

113. 이전까지는 문이라곤 없었던 곳에서, 그리고 다른 누구도 겪어보지 못했던 곳에서 여러분을 위한 문이 열릴 것이다. 여러분은 반드시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것은 모험을 향한 부름이며, 다시 말해서 이제부터는 아무런 안전도, 아무런 규칙도 보장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114. 여러분은 자신이 출발했던 바로 그 장소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여러분 자신을 발견하고 또 만드는 마지막 경험에 도달한다. 이 경험은 네 가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114. 첫 번째는 성스러운 결혼즉 여러분 자신의 영적 삶을 탄생시킨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 또는 여러분이 관계하고 있는 어떤 삶- 가령 남자/여자, 이것/저것-에서 신부가 되는 존재와의 만남이다.

 

114. 두 번째는 아버지와의 화해이다. 여러분은 자신의 본성을, 즉 아버지로부터 불려받은 것을 찾으려 노력한다. 화해는 여러분 자신의 개인적이고 현세적인 계획을 여러분이 떨어져 나온 삶의 방향에 맞게 조화시키는 것이다.

 

115. 세 번째는 신격화’, 나는 만물을 있게 하는 존재다라는 깨달음이다.

 

115. 네 번째는 불사약 빼앗기로 이는 변형의 탈주로, 여기서 영웅은-권능자로부터 추적당하는 가운데-자신이 차지한 물건을 최대한 빨리 빛의 세계로 가져와야 한다.

 

120. 융은 일생의 곡선이 딱 반으로 나누어진다고 말했다. 그 중 전반은 관계의 시간이며, 나머지 후반은 자기 안의 삶의 감각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여러분 자신의 내부를 향한 삶으로 가는 시기이다. 그러고 나서 완전한 해방이 찾아온다.

 

123. 변화하는 사람은 거의 누구든지 옛 허물을 벗어 버리는 경험을 하게 마련이다. 여러분이 뱀처럼 허물을 벗는데, 하필이면 그 중 일부를 꽁무니에 그대로 남겨놓고 싶다고 치자. 이것은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뒤에 매달린 것이 바로 근심이다. 여러분은 그걸 떼어내 버릴수 있어야 한다.

변화는 개혁이고 혁명이다. 점진적인 변화는 실패다. 그러므로 과거와는 철저한 독립이 필요하다.

 

124. 여러분이 거기 다른 책임들을 덧붙인다면,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것은 여러분의 새로운 족쇄가 될 것이다. …… 출가는 말 그대로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

 

128. 의례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여러분에게 알려준다. 식사전에 드리는 감사기도는 지금 먹게 될 음식이 한때는 살아 있었던 것임을 여러분에게 일깨워준다.

 

129. 여러분은 살기 위해 자신에게 제공된 또 다른 생명을 먹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뭔가를 죽이면서 자신이 뭔가를 죽이고 있음을 알 뿐만 아니라, 또한 자기 역시 그렇게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안다.

 

139. 종말이란 불타는 아마겟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지와 자기민족이 끝난다는 뜻이다.

 

140. 다만 변화를 위한 노력의 근저에는 마음편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면 오히려 변화를 그르칠수 있다.

 

147. 일본에는 이른바 하리키리(할복)’, 즉 의례적 자살로서는 최상급의 사례가 있는데, 이는 흥미로우면서도 섬세한 의식이다. ……그는 자기 칼-본인의 고귀함과 명예의 상징-을 오른쪽 옆구리에 찔러 넣으며, 거기서 몸 가운데까지 카을 그었다가 아래로 내린다. 그는 반드시 땅에 얼굴을 박고 쓰러져야 한다.

중국, 한국의 문화에 상당히 영향을 받았을텐데, 일본에만 있는 독특한 의식이라니

 

의식의 두 번째 단계

 

깨달음을 향한 길

 

155. 요가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흐름을 통제하는 것이다.

 

155. 요가의 사고방식은 바람을 가라앉히고 물을 다시 평온한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다.

 

157. 여기서의 목표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규칙적으로 호흡하게 하는 것, 마음을 조용하고 잔잔하게 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쿤달리니 뱀을 움직이게 만들어서 척추를 따라 끌어올리는 명상법도 있다.

 

157. ‘차크라(chakra)'바퀴라는 뜻이다. ’차크라는 또한 연꽃이란 뜻의 파드마(padma)로도 불린다. 그런 것이 일곱 개 인데, 그 중 세 개는 골반부근에 위치하고, 세 개는 머리 위에 위치하고, 나머지 하나-심장 차크라-는 그 사이에, 즉 심장의 박동이며 숨의 박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박동이 있는 커다란 구멍에 위치한다.

 

159. 낮은 단계에 있는 이 세 개의 차크라들은 소박한 상태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양상들로 이루어져 있다. …… 이 단계들에서의 기쁨과 슬픔은 저 바깥세상에서 성취한 것,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엇을 얻었는지, 무엇을 잃었는지에 대해 작용한다.

 

161. 여러분이 상위의 차크라들에 도달하려면 처음 세 개의 차크라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생존, 섹스, 그리고 힘이. 여러분이 4층으로 올라가려 한다면 그 건물의 아래쪽 세 개 층을 허물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164. 이는 신에 관한 속된 관념-신에 대한 교리적 관념, 즉 여러분이 신에 관해서 배운바-을 버리고, 신이란 은유로 표현되는 초월적인 것을 취한다는 의미이다.

 

164. 말이 우리를 자유롭게 놓아두기보다는 오히려 가로막는 경향이 있다.

 

166. 베아트리체를 향한 사랑으로 인해 결국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인도된다. ……다시 말해 그녀를 하나님의 사랑의 현시로 바라보았으며, 그로 인해 그는 그 모든 것을 통과할 수 있었다.

 

167. 가장 좋은 것은 말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하자면 말의 범위 너머에 놓여 있는 것에 관해서는 차마 무엇이라고 말할 수 조차 없다는 것이다.

 

167. 두 번째로 좋은 것은 오해되기 십상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말할 수가 없는 것들에 관한 서술이기 때문이다.

 

168. 잔잔한 연못이란 인도에서 흔히 요가라는 관념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사용된다. “요가는 마음의 자발적인 활동을 의도적으로 중지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지속적인 유동체로서,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연못의 수면과도 유사하다. 그 연못을 고요하게 만든다면, 즉 바람을 물러가게 하고 물을 말게 한다면, 그러한 정지상태에서 여러분은 그 모든 변화하는 형상 아래에 있는 완벽한 이미지를 볼수 있을것이다.

갑자기 요가가 해보고 싶다. 막연하게나마 갖고 있던 환상도 있고. 신체를 단련하고 이렇게 깨달음으로 안내해주니 더욱 그러하다.

 

169. 채식주의는 생명을 향한 가장 큰 모독이다. 왜냐하면 생명이란 다른 생명들을 희생시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는 오로지 도망칠 수조차 없는 것들만 먹는다.

나도 한때는 건강을 위해 채식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면 이세상에 정말 먹을게 하나도 없고 먹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데 그것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 신화 책을 읽으면서 생명은 죽음을 통해서 살아갈수 있음을. 동물의 죽음만 죽음이 아니라 저 말 목하는 식물도 결국 죽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임을. 그나저나 우리 수정누나는 이글을 보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궁금하네

 

170. 여러분은 법률이라는 겉옷을 입고 다른 사람들처럼 행동하면서 동시에 신비주의적인 방법이라는 속옷울 입고 있다.

완벽한 비유다.

 

171.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한다.”여러분은 게임을 하는 것이다. 상처를 입을 수도 있지만, 여러분은 자신이 어떤 손상이나 성취조차도 초월하는 장소를 발견했음을 알고 있다. 여러분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174. 는 깨어나는 의식이다. ‘는 꿈의 의식이다. ‘은 깊고도 꿈조차 없는 잠의 영역이다.

 

176. 여러분의 꿈을 글로 적어보라.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신화다.

지금은 신화이지만 언젠가는 내 안에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될 것이다.

 

186. 내 생각에는 세가지 상태의 존재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상태. 또 하나는 여러분이 잠시 멈춰서 그것에 관해 분석하고 생각하는 상태. 여러분이 그렇게 할 때, 자연은 살아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렇게 분석을 마치고 나면, 비로소 여러분은 이제 자연처럼 살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한다. 이는 더 많은 능력, 더 많은 통제력, 더 많은 유연성을 지닌 상태.

 

187. 여러분의 삶에 있어 크나큰 중요성을 지니게 될 사람을 만날 때에는, 그 첫 만남에서부터 장차 뭔가 벌어질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매우 신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89. 나는 명상이란 것을 하지 않았다. 명상으로 인해 내가 지금 노 젓고 있는 이 배의 진로를 지연시키는 갖가지 것들이 드러나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명상의 장점을 소개하고 정작 자신은 두려워서 하지 않았단다. 더 좋은 방향으로 빨리 갈수있게 해줬을수도 있지 않았을까?

 

190. 우리가 과학적 진리에 관해 이야기할 때에는 항상 문제가 생기게 마련인데, 왜냐하면 진리에는 여러 가지 다른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190. 여러분이 절대진리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광기의 일종이다.

 

191. 이상(理想)은 위험하다. 그러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라. 이상없이도 그럭저럭 살수 있으니

 

191. 여러분이 행동하는 그 순간, 여러분은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다른 방식이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행동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191. 인도에서는 삶 그 자체가 죄라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이며, 이것 역시 삶이 불완전하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다. 살기 위해서 여러분은 뭔가를 죽이고 먹어야 한다.

 

194. “‘성스럽게 넘쳐나는 아름다움이라고 부르는 것이로구나그것은 내 삶에 있어 아무런 실용적인 가치를 지니지 못했지만, 그 순간은 그 자체로 뭔가 대단한 것이었다.

 

196. 여러분이 노예의 도덕에서 찾을 수 있는 바는 무엇이냐하면, 탁월함을 지닌 사람들이 도리어 나쁜 것으로 간주된다는 점이다.

 

197. “엘리트 주의? 엘리트주의는 나쁘지이것은 노예의 도덕이 주장하는 바이다.

엘리트가 되고자 하는 의지는 좋지만 주의까지 가면 안 좋은 것 아닌가?

 

197. 그리스와 로마와 유럽 문명 모두가 인도 유럽 사람들의 영향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199. 리가 필연적으로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이 저곳, 바로 저 우주에서도 타당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곳, 바로 이 우주에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칸트의 답변은, 우주의 법칙이 [인간의] 정신에 알려져 있는 까닭은 그것들이 정신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태어날때부터 우리 내부에 지니고 있던 지식, 선험적지식이며, 다만 명백히 외적인 상황에 의해 상기되어 나타날 뿐이라는 것이다.

 

201. 심리학의 한계는 신학의 한계와 똑같다. 그것들은 초월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징화와 관계가 있으며, 이 두 가지의 한계도 똑같다.

 

201. 여러분이 하나님을 단순히 심리적 기능 또는 요인으로 환언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까지만 가고 더 이상은 가지 못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갖고 있는 한, 여러분은 머물러 있는 것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말을 상기하라. “버리고 취하기의 궁극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취하는 것이다.”

종교를 믿는 다는 것은 의심을 하지 않은 것이다. 의심을 한다면 그 종교를 진정으로 믿기가 어렵다. 그저 형식적인 믿음은 취할수 있지만.. 나도 종교을 가질려고 했지만 의심하면 안된다는 그 생각에 기가 질려서.

 

203. 오로지 유대인들만이 알고 있던 어느 신에 의해 7일만에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 그 동산 한가운데에는 두 번째 나무가 있었고, 그 나무의 열매는 그 남녀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창조주는 혹시나 그 남녀가 이제는 그 열매까지 따먹고 자기만큼이나 아는 것이 많고 불멸하는 존재가 될까 두려워 한 나머지, 그들을 저주하고 내쫓았으며, 동산의 문에 거룹들(케루빔)을 세우시고, 돌아가는 불칼을 장치하여,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목을 지키게 하셨다.”

 

203. 그 케루빔은 중요한 상징이다. 순수와 자발적 삶의 동산, 대립자의 쌍에 관한 지식 이전의 단일성의 동산이 시간과 역사적 이원성의 세계, 즉 동산의 문에 케루빔이 서 있고 그 사이에 불칼이 장치된 모습으로 상징되는 세계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205. 그렇다면 무엇이 계속해서 여러분을 동산 바깥에 있게 만드는 것일까? 바로 여러분의 두려움과 욕망이다. 붓다는 바로 이 두가지를 초월했다. 두려움과 욕망의 유혹에 대해 응답하지 않음으로서 붓다는 그 문을 통과해 나무로 나아갔고, 그 밑에 앉아서 한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해방이다. 예수 역시 동산의 문을 통과해 나무로 나아갔고, 결국 그 스스로가 나무의 열매가 되었다.

 

205. 두려움과 욕망에 의해 위협을 당할 때에는 자아를 놓아 버려라.

 

207. 그렇다면 우리의 종교는 실제로 무엇을 가르치는 것일까? 신성과의 일치를 경험하는 방법은 가르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 앞서 말한바와 같이 이것이야말로 첫째가는 이단이기 때문이다. 신 우리의 종교는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수립하고 유지하는 방법과 수단을 가르친다. 그렇다면 이런 관계는 어떻게 해서 성취될수 있는가? 오로지 초자연적으로 부여된, 특별히 선호되는 특정사회 집단의 일원이 됨으로써만 가능하다.

관계를 어떻게 수립하지. 일방적인 관계인가, 유지를 위해 적절한 거리를 두고 하는 관계인가? 그래도 내가 지금껏 들은 말 중에 가장 그럴듯한 말이다.

 

207. 우리의 실제적이고 궁극적인 뿌리는 우리의 인간성 속에 있는 거지 우리의 족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아주 웃기는 얘기다. 자기들이 선택받은 민족이란다. 그럼 다른 민족은 뭐란 말이지?

 

210. 어떤 사람은 공산주의가 종교가 없는 사회체계라고 말한다. 공산주의 사회의 법률은 이미 모두 종교로서의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가 어느새 종교가 되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그 특성 자체가 성서로부터 비롯됐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는 선이 있고 또 악이 있으며, 우리는 선을 위해 싸우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혁명이 일어날 것이고, 그때가 되면 모두가 공산주의가 되어 올바르게 되리라는 것이다.

 

210. 유대교의 경우는 전도의 열망을 지니고 있지 않지만, 다른 세 가지-즉 이슬람교, 기독교, 공산주의-는 전도를 지상과제로 삼는 전통이 아닐 수 없다. 그 각각은 완벽한 세계 정복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쇼가 아닐 수 없다. 이 세계를 완전히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마지막에 거의 불교쪽으로 기울어진 것 같다. 불교는 개인의 성찰과 깨우침을 강조해서 그런 것으로 봐야 하나.

 

211. 불교에서 삶의 목표란 니르바나(열반)적인 삶의 경험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쁨으로 참여한다.” 신조를 따르는 종교에서 삶의 목표란 십중팔구 계율을 준수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이슬람교에서 삶의 목표란 그 종교의 이름 속에 들어 있다. 이슬람이란 바로 순종’,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과 숭배이다. 이러한 신조는 전사들에게 크나큰 용기와 힘을 제공한다. 그들이죽을을 당하건 안 당하건 간에 그들은 운명에 대한 순종을 지니고 나아가는 것이다. 전사의 방식이란 삶에 대해 라고 하는 것, 그 모든 것에 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전사의 를 긍정적으로 보는 것인지, 부정적으로 보는 것인지 이해가 잘 안된다. 잘못된 신조에 따라 라는 것이 어떻게 옳은 것인가. 자기의 천복을 따르는 것이 아닌데..

 

211.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똑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 둘은 자신들의 하나님을 위해 이 세상을 새로 만들려고 한다. 나로선 무척이나 거부감이 들지만 사실상 그로 인해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기에, 여러분도 거기에 라고 말해야만 한다. 여러분이 자신의 삶의 어떤 사소한 세부사항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모든 것을 해체해 버리는 셈이 된다. 여러분은 반드시 모든 것에 대해서, 심지어 소멸에 대해서도 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 작은 주제가이다.

 

215. 지옥이란 여러분의 삶의 경험의 구체화이며 여러분이 집착하는 곳, 바로 황무지다. 지옥에 있으면 여러분은 어찌나 스스로에게 매여 있는지 은혜가 들어올수가 없다.

 

217. 당신이 오로지 흑인이라는 사실만 갖고서 당신의 삶에 있어서 부정적인 것들을 계속 들먹이며 비난한다면, 당신은 인간이 됨으로써 얻은 다른 특권들을 깡그리 부정하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다만 흑인에 불과할 뿐입니다. 아직 인간이 되지는 못한 셈이죠.

멋있다. 그리고 그냥 그의 얘기에 그렇죠 그래요. 그렇게 동의를 하는게 일반적일텐데 그를 진짜 인간으로 만드는 캠벨.

 

219. 다른 사람이 하는 말 자체가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라. 영웅의 여정의 목표는 여러분 자신이다. 즉 여러분 자신을 찾는 것이다.

 

220. 여러분은 아래로 뾰족한 삼각형을 두가지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다. 하나는 장애물로, 또 하나는 여러분이 향상을 이루어 낼 수 있는 수단으로서 말이다.

 

223. 여러분을 가로 막는 상징을 발견하고 나면, 이번에는 그 상징이 여러분에게 의미하는 바의 중요성에 부합되는 사고와 경험의 양태를 찾아내도록 하라. 그 상징이 무엇을 지칭하는지를 알아내지 못하는 한, 여러분은 그 상징을 제거할 수 없다.

 

229. 다시 말해서 내가 그 상징을 풀어헤치고 그 상징들이 무엇을 지칭하며 의미하는지를 알기 전까지는 그만두지 않기로 결심했다.

16살에 이런 결심을 하다니 달라도 다른 사람이다. 내게 16살은 아무것도 모르는 나인데. 심지어 자아가 뭔지도 모르는 나이인데.

 

232.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간에 모든지식, 모든 명명, 모든 형상을 초월하는 어떤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234. 남들이 여러분에게 행한 어떤 일들의 관점에서 여러분의 운명을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이야기의 의의는 이른바 인격으로서의 하나님의 이미지가 타파되었다는 데에 있다. 여러분이 초인격적인 곳에 도달하면, 여러분은 정의불의에 관해 이야기할 수가 없다.

욥이 자식을 잃고 돈도 잃고 몸에는 종기까지 나서 몸이 고생하자. 그동안 올바르게 살아왔는데 왜 이런 시련을 주는지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한다. 거기에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 꾸짖는다. 이러한 시련조차도 욥을 깨달음으로 안내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으로 해석되는데...어쨌든 내가 기독교에서 가장 이해가 안되는 부분 중의 하나가 이런 것이었다. 세상에 하나님이 있다면 왜 착하게 사는 사람들은 저렇게 힘들게 어렵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반면에 악인이라고 할수 있는 사람은 반대로 왜 이렇게 떵떵거리며 살수 있는지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오늘 이 이야기로 어느정도 이해는 했는데 그래도 찝찝한 기분은 사라지지는 않는다.

 

237. 내 믿음이 무엇이냐 하면, 어느 누구도 궁극의 환희를 경험할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립자의 쌍들을 초월한 것이므로, 만약 누군가가 그것을 경험했다면, 그곳에는 이미 어느 누구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융은 이점을 꼬집는다. “만약 여러분이 주체와 객체를 초월해 버린다면, 과연 거기서 뭔가를 경험하는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여기 함축된 의미를 이해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굳이 수도원에 가서 금욕적인 생활을 하며 힘들게 지낼 필요는 전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체, 객체, 그리고 모든 대립자의 쌍들을 초월한 신비라는 것은 결국 우리가 사는 이 지상의 신비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니 말이다.

저자의 확실한 종교관을 알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대립자의 쌍을 초월한 존재는 없으므로

 

239. 이제는 아무도 그것을 전혀 믿지 않으므로 교황은 이제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과연 누가 처녀수태를 믿겠는가? 처녀수태란 은유적인 것이며, 승천도 마찬가지다.

 

239. 그는 천국이 있는 곳으로 갔다. 바로 내부로 말이다. 그의 승천은 내부로 향한, 신화적 여정을 표상한다. 그리고 처녀수태는 인간에게 있어 영적 삶의 탄생을 지칭한다.

 

241. 만약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힘을 오로지 역사적 용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향한 그 상징의 직접적 언급을 잃어버리고 만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인간의 몸-지상의 상징-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자신과 함께 하나인-에게 갔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는 우리 내부에 있는 영원한 생명과 동일시될 것이다. 그 상징은 또한 하나님이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242. 이 세상의 인간의 삶의 시험과 슬픔에 그가 참여함으로써 그가 바로 여기 우리 안에 있다는 것, 즉 타락이나 실수로서가 아니라 환희와 기쁨으로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243. 인간 자신이 바로 그 낯선 존재, 즉 그를 통해 이기주의의 힘이 반드시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 존재이며, 그를 통해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부활해야 하는 존재이며, 그의 이미지 속에서 사회가 개혁되어야 할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로서가 아니라 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어떤 종족이나 인종이나 대륙이나 사회 계급이나 세기의 어떤 이상이나 일시적 제도조차도, 소진됨이 없고 다방면에 걸친 놀라운 신성한 존재, 즉 우리 모두의 속에 있는 삶의 척도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247. 부활절과 유월절은 완벽한 상징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가 새로운 삶에 부름을 받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삶은 아주 뚜렷이 규정되지는 않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에 매달리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삶의로의 여정, 즉 우리 모두가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여정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과거를 놓아 버려야만 한다.

 

248. 이 그림은 부활절 및 유월절의 신비에 대해 우리 모두가 반드시 지녀야 하는 자유롭고 인간적이며 자발적인 참여를 묘파하고 있다. 자기 보존은 그저 삶의 제2법칙에 불과하다. 삶의 제1법칙은 여러분과 타인이 하나라는 것이다.

 

249.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세대가 이미 지나가 버렸는데도 세상의 종말은 오지 않았고, 그리하여 이를 가리켜 종종 사상 최대로 빗나간 예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카톨릭 교회는 예수가 이 세대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이는 사실 그가 인류 전체의 세대를 의미한 것이며, 따라서 그 사건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또 곧이 곧대로 듣는 신자들이 있다니 놀랍다. 난 그들이 정말로 성경을 제대로 10번 이상 읽어봤는지 한명씩 묻고 싶어질때가 있다.

 

249. “그것은 기다린다고 오지 아니하니,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님이라. 아버지의 나라는 지상에 펼쳐져 있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느니라.” 이것이 영지주의다.

신의 피조물인 영혼이 악마의 창조물인 물질(육체)에 갇혀있으므로 영지(그노시스)를 얻어서 탈출해야 한다는 것이 영지주의 기본 개념이다. 이원론을 기초하고 있다.

 

251.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인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는 예루살렘 성전 구내에 그리스 신의 제단을 만들었다. 그는 유대인의 성전 구내에 그리스 신전을 건립함으로써 이 종교 역시 다른 종교의 변종에 불과함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253. 이 놀라운 문서는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매우 강하게 보여준다. 심지어 일부 어휘는 조로아스터교에서 유래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진실인지도 모르겠다.

 

257. 일상적인 삶의 맥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라면 무엇이든지 성스러운 공간이 될 수 있다.

 

258. 여러분이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의도와 자신의 소망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됨으로써, 비록 작더라도 하늘나라가 거기 있어야 한다.

 

262. 성스러운 공간은 속세로부터 완전히 밀폐 봉인되어 있다. 명상을 할 때 …… 여러분 스스로를 봉인하는 것이다. 명상의 자세는 봉인하는 자세이며, 규칙적인 호흡은 여러분 내부로 향한 탐험을 더욱 북돋운다.

 

266. 성스러운 공간은 초월에 대해 투명한 공간이며, 그러한 공간안에 있는 만물은 명상을 위한 기반을 제공한다.

 

268. 여러분도 이른바 영적 스승이라 주장하는 사람을 찾아갈 기회가 생기면 알겠지만 정신 나간 사람을 상당수 만나게 될 것이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만약 내가 간다면, 그리고 만약 내가 제대로 인도된다면, 그를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270. 이틀 뒤 나는 구루를 만나 보러 오라는 초대를 받았다. 여러분이 제대로 된 길로 접어든 경우에는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

 

270. 나중에 알고 보니 나는 무척이나 운이 좋은 셈이었다. 왜냐하면 그날 내가 그에게 던진 질문은 그가 젏음 시절에 자기구루에게 맨처음 던졌던 바로 그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매우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깨달음을 얻은 자는 이렇게 통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기 자랑

 

276. 불교 사상에서는 두가지 큰 줄기를 구분해야 한다. 첫 번째는 개인의 구원이라는 이상에 전념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수도적인 자기수양을 제시한다. 두 번째는 모든 사람의 구원이라는 이상을 제시함과 동시의 대중의 귀의와 보편적인 세속 참여라는 보다 발전된 원칙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첫 번째는 히나야나, 둘중 더 작은 배 또는 수레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두 번째는 마하야나, 즉 모든사람이 탈 수 있는 더 큰 배 또는 수레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277. ‘삼사라라는 단어는 시간의 흐름을 말하며, 오고 가는 모든 것들과 함께 디오니소스적 시간의 경과에 참여하는 것을 지칭한다. 시간은 형상을 파괴하고 새로운 형상을 가져오며, 여러분 역시 그런 형상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279. ‘자신의 존재가 곧 깨달음인자를 의미하는 보디사트바라는 용어는 …… 깨달음을 향하여 가지만 아직 도달하지 못한자, 다시 말해서 자신의 전생을 살고 있는 붓다.

 

281. 그 각각의 손바닥에는 눈이 하나씩 달려 이 세상의 갖가지 슬픔을 꿰뚤어 본다. 마치 예수의 양손이 못 박혀 꿰뚫린 것처럼 말이다.

 

288. 진정한 근원을 찾기 위해서는 대립자의 쌍들의 너머까지 반드시 나아가야만 한다.

 

289. 불교에서는 니르바나에 도달한 사람을 가리켜 저편 물가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모든 대립자의 쌍을 넘어섰으며, 모든 둘 됨을 넘어섰다는 뜻이다.

 

294.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삶이 곧 여러분의 요가다. 이 단지 똑같은 장소에 있으면서도 기쁨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그것도 단지 여러분의 의식의 단계가 이동됨으로써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294. 붓다는 완전한 의식에 대해 눈이 열린 사람을 말한다.

 

296. 여러분이 만약 영적 체험을 하고나면 말로는 차마 그것을 묘사할 수가 없다. 다만 그 체험에 대한 실마리만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말로 할 수 있는 것을 훨씬 넘어선 체험이기 때문이다.

 

298. 그때 이후로 진을 기다리는 것은 일종의 영적훈련이 되었다. “진이 벌써 도착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해. 주위를 둘러보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살펴봐야지그러고 나면 내가 있는 장소는 어찌나 흥미진진한지, 나로선 집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지루할 새가 없을 지경이다. 가끔은 진이 나를 좀 더 기다리게 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니 말이다.

운전을 할때 예전에는 신호가 바뀌기 전에 빨리 가야겠다는 마음으로 늘 바삐 움직였다. 그러나 요즘은 신호 대기시 책을 읽는다. 한줄을 읽을때도 있지만 너무 좋다. 그리고 저자처럼 신호가 좀 더 길었으면 하는 바램도 생기기 시작했다.

 

298. 이것은 두려움과 욕망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수 있으리라. 나는 상황이 내 계획대로 되기를 욕망하고, 그런 욕망은 나로 하여금 다른 경험을 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이게 바로 그것이다.! 이게 바로 삶이다! 바라보라! 기운이 넘치니 않는가?하지만 이제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을 좋아할 수 있게 되었고, 아내를 기다리는 것도 더 이상은 지루하지 않다. 심리학적 변화란 이처럼 이전까지만 해도 애써 견뎌 내야 했던 것을 이제는 알고,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을 말한다.

 

299. 두려움과 욕망의 장소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여러분은 불멸으로부터 스스로를 배제시키는 것이다.

 

300. 일시적으로나마 삶을 뒤로 함으로써, 여러분은 스스로를 삶에 바치는 것이다. 세속적 이득에 대한 욕망과 상실에 대한 공포로 인해 여러분은 스스로를 삶에 내어주는 데에서 뒤로 물러서는 것이다. 두려움과 욕망이 사회적 의무를 발생시키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사회가 그런 의무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301. 그러한 요구를 강제된 사회적 의무로 여기고 대처한다는 것은, 결국 여러분이 현상 세계에 주어진 삶의 질서에 연결되고, 또 거기 붙들려 있다는 의미이다.

 

304. 세상을 변화시킬 필요 없이 단지 관점을 바꿈으로써 슬픔에서 탈출하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삶이란 항상 슬픔이 가득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삶을 바꿀 수는 없지만,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꿀수는 있다.

 

306. 반면 동양에서는 이와 반대로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이 시킨 일만 하게되며, 오로지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의 앞에 놓아 준 것만을 갖게된다. 만약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이 시킨 일만 하게 되면, 여러분의 자아는 발전하지 않느다. 결국 동양에서는 사람들이 자아의 개념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자아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자아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개인적 가치평가라는 것도 없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저자에게 호감이 가다가도 동양을 무시하는 발언에 기분이 상한다. 지식이 짧아 멋진 반론은 제기 못하겠지만 이렇게 단정적으로 얘기할수 있는건가?

 

307.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쾌락 원칙, 즉 음식과 위안과 섹스와 삶 그 자체-이 맥락에서 나는 이것을 건강, , 자손이라고 부른다-에 집착하는 삶에의 열망을 뜻하는 이드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바이다. 이드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프로이트는 초자아라는 개념을 가정했는데, 이는 개인을 훈련시키는 사회적 규율로 결국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시키는 것을 하게 만든다. 동양에서 벌어지는 모든 충돌은 곧 초자아와 이드 간의 충돌이다.

 

314. 힌두교에서는 태양이 여성이고 달이 남성이다. 달은 태양 속에서 태어나며 태양 속에서 죽으며, 매달 태양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314. 힌두교의 여신 칼리는 자기 배우자인 남신 시바의 엎드린 몸 위에 서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신은 죽음의 칼을 휘두르고 있는데, 이 칼은 곧 영적훈련을 의미한다.

 

316. 청동 시대라고 부르는 신화체계에서 여성은 위대한 신이며 모든 힘의 원천이다.

 

318. 농사가 생계의 주요 수단일 때 이 세상에는 땅과 여신의 힘이 있다.

사냥이 주요 수단일 때 짐승을 잡을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남성의 주도권이다.

 

318. 현대 종교 중에서도 가장 남성지향적인 이슬람교에서는 여성을 기껏해야 아들을 낳기 위한 수단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으며, 남성의 기능은 대부분 여성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319. 오늘날에는 내가 생각하는 바가 현실로 이루어졌는데-매우 많은 여성들이 남편 없이 혼자 살면서 남성적 성취의 장에 나서게 된 것-이는 사실상 여성들이 속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 의견에 대한 여성들의 생각은 어떨까? 저자는 그리고 여대에서 38년을 재직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의견을 가지 있다는 건 그만큼 자기이론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320. 여성은 원래부터 이 세상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지만, 도리어 남성의 일을 하는 2차적인 에너지의 지위로 이동함에 따라서 여성은 자신의 진짜 힘을 잃어버리고 분개하게 되었다.

 

320. 슈펭글러의 다음과 같은 말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무척이나 감명을 받았다. “남성은 역사를 만든다. 여성은 역사 자체다.” 여성은 그것 자체이고, 남성은 여성이 역사를 만들고 역사 그자체인 곳 안의 장을 꾸며 줄 뿐이다.

 

327. 평범한 가정주부와는 전혀 거리가 먼 내 아내 같은 사람은 남성영웅에 상응하는 여성 영웅이 있음을 기꺼이 시인한다.

 

329. 문학을 통틀어 여성의 모험을 다룬 작품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여성은 이미 그것이며, 여성에게 있어서 유일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그것을 자각하느냐뿐이기 때문이다.

 

329. 남성이 표상하는 것은 여성의 힘의 대행자, 그것도 특정한 종류의 기능을 지시받은 대행자이다.

 

329. 남성 안의 여성적 요소란 여성 안의 여성적 요소에 비하자면 극히 미미한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단순히 신체 구조상의 차이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남자와 여자의 내부에 있는 그런 요소의 비율자체가 다르다는 뜻이다.

 

329. 남성은 반드시 행해야만 한다. 남성은 반드시 어머니로부터 분리되어야 하고, 자신의 행동의 길을 찾아야 하는데 그 길은 곧 고통의 길이다. 여성은 그저 있기만 하면 된다.

 

330. 여성에게 주어진 본성 속에는 여성이 다루어야 할 훨씬 더 무거운 짐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소녀에게 생리가 일어나면서부터 시작되며, 그때부터 소녀는 여성이 된다. 이러한 삶에의 호출은 여러분 가운데 여성에게만 있고 남성에게는 없다.

 

332. 목표는 여러분 자신의 모험에 나서는 것이어야지, 대체물을 지니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333. 조이스는 어떤 두 가지 사이에 고리 역할을 하는 여성에 관해 이야기한 바 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그리고 사람과 사람사이에 말이다. 유능한 여성들이 전혀 낯선 문화에 속한 남성들과 결혼한 경우, 남성들이 전혀 낯선 문화에 속한 여성들과 결혼한 경우에 비해 훨씬 편안하게 느끼게 마련이다.

 

334. 어머니는 그런 식의 어떤 성취를 토대로 자녀를 평가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람대 사람의 관계를 표상할 뿐이다.

 

334. 남성의 힘이 지배한 곳에서 여러분은 분리를 겪는다. 여성의 힘이 지배한 곳에서는 둘이 아닌, 표용하는 특성이 존재한다.

 

334. 왜냐하면 양쪽 구성원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실패하면 한 쌍을 모두 파괴하기 때문이다.

 

335. 위험한 침대는 여성의 기질을 표상한다. 만약 남성이 그냥 매달릴 수만 있고, 남성이 견딜 수만 있다면 그 침대는 얌전해지고, 남성은 그 보상을 얻게 될 것이다.

 

337. 어린이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며, 작은 자연의 물체이다. 아버지는 누군가의 사회적 성숙의 부모다. 작은 자연의 물체이다. 아버지는 누군가의 사회적 성숙의 부모다. 따라서 소년이 입문을 하기 위해서는 어머니를 떠나 남자들만의 캠프로 가고, 거기서 입문 의례를 찾아야 한다.

 

338. 아버지는 분리자이다. 어머니는 합체자이다.

 

338. 나는 주요한 여성의 힘과 미덕이 바로 공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곧 이기적 고립의 결여, 다시 말해 참여에의 포용이다. 심지어 섹스에 있어서도 남성은 공격적이지만 여성은 포용적이다. 우리 모두의 존재 기반이기도 한 보편적 공통성에 대한 표용성이 바로 공감이다. 자발적 감정을 인식하고, 포용하고, 나아가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여성의 힘이다.

 

342. 그 모두가 사랑일 때 세상 모두는 반드시 사랑이어야만 한다. 무엇도 방해해서는 안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정복한다.

 

의식의 세 번째 단계 : 성스러운 삶과의 조우

 

348. 예술의 첫 번째 기능은 내가 일찍이 신화의 첫 번째 기능이라고 명명한 것과 정확히 똑같다. 즉 경험하는 마음으로 하여금 동산 문의 수문장들을 지나쳐 그 안에 위치한 깨달은 삶의 나무까지 데려가는 것이다.

 

348. 하지만 문들의 정화, 즉 수문장들인 화염검 든 케루빔의 일소 등은 예술의 첫 번째 효과이고, 그와 동시에 두 번째 효과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단 한 올의 터럭 속에서 수천마리의 황금사자를 인식하는 기쁨이다.

 

351. 삶의 목표는 환희다. 예술은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는 방법이다.

 

352. 대상을 향한 욕망을 부추기는 예술을 외설적이라고 말한다. 대상을 향한 혐오나 두려움을 부추기는 예술을 교훈적이라고 한다.

 

358. “예술은 자연과 나란히 하는 조화다.” 물론 여기서는 두 가지 자연이 모두 관계된다. 하나는 자연, 즉 저 바깥에 있는 세계고, 또 하나는 우리 안에 있는 자연[본성]의 세계다.

 

360. 심미적 도구-즉 심미적 도취를 유발하는 아름다움의 리듬의 도구-는 마야의 드러내 보이는 힘이다.

 

361. 여러분이 투사하는 힘을 경험하는지, 또는 드러내 보이는 힘을 경험하는지 여부는 여러분의 정신적 태도에 따라 달라진다.

 

362. 이 세계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여러분의 의식이 변화할 뿐이다.

 

363. 여러분이 이러한 심미적 정지의 상태에 도달한 스스로를 상상한다면, 여러분은 무슨 일에 대해서건 두려움과 욕망을 제거하는 것에 관해서, 그리고 삼사라니르비나가 되는 것에 관해서 이해하게 될 것이다.

 

364. 욕정이나 사랑의 방식을 통해서 여성은 남성을 움직이게 할수 있다고 하겠다. 처녀는 남성을 초월, 즉 개인주의를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원리로 인도한다.

 

368. 미술이란 동정녀의 매개다. 미술은 마야의 드러내 보이는 힘의 수단이며, 우리가 지상에서 초월로 나아가는 수단이다. 미술의 세계에서는 누구나 항상 여신을 볼수 있기 때문이다.

 

373. 이 모든 것을 흡수하고 난 다음에야, 여러분은 이전에 가졌던 것보다 더 강력한 추진력을 얻게 되어, 그 모두를 깨뜨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74. 창의적 행동은 뭔가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창의적인 움직임을 산출하는 것이다.

 

374. 여러분이 학교로 돌아가려고 시도한다면 여러분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376. 춤이란 생명 그자체의 지고한 상징이다.

 

377. 예술은 우리를 스스로의 얽힘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한쌍의 날개다.

 

378.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춤추는 것이다.

 

380. “나는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할 거야라고 말하고, 그 신념을 고수한다면 뭔가가 일어날 것이다. 여러분은 혹시 직업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삶을 얻기는 할 것이며, 그것은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382. 여러분의 책임과 여러분의 건강 모두를 유지하면서 여러분의 창조적 측면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밀폐봉인된 은신처를 만들어, 내일 몇 시간 가량은 아무것도 침범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하며 그시간은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구본형 선생님과 같은 방법이다.

 

383. 글쓰기에 있어서는 일단 나오는 말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그냥 말이 나오도록 내버려 둬라.

이걸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시간 낭비는 아닐까? 하는 비판적 요소는 그냥 놓아 버려라.

 

385. 여러분이 일찍이 한번도 하지 않았던 것을 하려면 그 문을 계속 열어두어야 한다. 여러분의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비판을 미루어 두어야 한다.

 

386. 작가의 슬럼프를 돌파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것은 내가 보기에 두가지가 있는데, 그중 첫째는 우선 여러분이 말을 걸고 싶은 상대를 하나 찾으라는 것이고, 둘째는 하루에 두시간 동안 말 그대로 그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쓰는 시간을 떼어 두라는 것이다.

 

390. 영적인 것을 사랑하게 되면 여러분은 세속적인 것도 얕보지 못할 것이다.

 

394. 인도에는 두가지 종류의 미술이 있다. 하나는 심미적인 미술이고 또 하나는 사원미술로서, 후자는 그 목표에 있어 심미적이지는 않다.

 

394. 나는 <피네간의 경야>가 독자 내부의 영적변화에 영향을 끼치는 책이라고 말하는 바이다. 독자들이 이 책을 숙독하고, 조이스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찾아낸다면, 거기에는 세계와 우리의 관계를 변화시킬수 있는 환상이 들어 있을 것이다.

몇 번을 봐야 알수 있을까? 어렵다고 정평이 난 책이다.

 

397. 예술에 관한 심리학 분야에 있어 실러는 두가지 종류의 예술가를 구분했다. 하나는 그가 감상적인예술가라고 부른 쪽이고, 또 하나는 그가 소박한예술가라고 부른 쪽이다.

 

398. 이것은 두 가지 서로 다른 길이며, 두 가지 서로 다른 기질이다. 고통은 감상적인 예술가들이 분투해야 할 무엇이 아니며, 오히려 자신들의 모든 정력을 성스럽게 넘쳐나는 활동에만 바치고 삶을 살아가는 것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도출되는 것이다.

 

399. 우리는 성스러운 공간을 예술로 가득 채워야 한다. 성스러운 공간이란 다시 말해 사물이 그 어떤 실용적 용도도 지니지 못하는 것으로 경험되는 곳이다.

 

402. 여러분이 만약 선과 악을 구분할 경우, 여러분은 예술을 잃는 셈이다. 예술은 도덕 너머로 나아간다. 여러분의 공감의 범위가 곧 여러분의 예술의 범위다.

 

403. 조이스의 비법은 어디에서나 상징을 보는 것이다. 존 페리 박사는 살아 있는 신화적 상징의 특징을 감응이미지로 규정했다. 이 이미지는 그것이 중요한 곳에서 우리에게 떠오른다.

 

403. 어떤 주어진 사회 집단의 생생한 상징이 그 모든 구성원에게 이와 같은 종류의 반응을 이끌어 낼 경우, 일종의 마술적인 일치가 그들을 하나의 영적 유기체로 연합시키고, 비록 공간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존재와 믿음에 있어 하나인 이들 구성원들을 통해서 기능하는 것이다.

 

404. 일단 여러분이 상징을 이해하게 되면, 여러분 역시 어디에서나 상징을 볼 수 있으리라.

 

404. 신화의 상징들은 제조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주문할 수도, 발명할 수도, 영원히 억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영혼의 자발적인 산물이며, 그 각각의 속에는 그 원천의 배아적 힘이 전혀 손상되지 않고 들어 있다.

 

404. 신들의 현시는 편제하고 있건만, 우리의 눈이 열리지 않아 못 볼 뿐이다. 상징은 우리의 눈을 열어준다.

 

404. 진정한 상징은 우리를 원의 중심으로 데려가며, 원주의 다른 지점으로 데려가지는 않는다. 상징을 통해서 인간은 효과적이고 의식적으로 자신의 가장 깊은 자아, 다른 사람들, 하나님과 접촉하게 된다.

 

405. 우리가 상징을 구체화하면 우리는 거기 집착하게 된다.

 

406. 날아가는 새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이 두가지는 땅의 굴레에서 벗어난 영혼을 상징한다.

 

407. 그 모든 신비는 바로 거기 기독교 상징 속에 있다.

 

408. 이슬은 달에서 떨어진 암브로시아다.

 

409. 경외심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아게 만든다.

 

409. 신화의 신들은 우리 주위의 자연 속에 있는 에너지들을 의인화한 것이다.

 

410. 삼위일체에서 성부는 여러분의 주의가 집중되어야 하는 신이다. 여러분은 성자이고, 성부를 아는자이다. 그리고 성령은 이 둘 사이의 관계를 표상한다.

 

410. 내가 보기에는 여러분은 삼위일체의 개념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신의 개념을 지닐 수 없는 것만 같다. , 그 신을 아는자, 또 그 둘 사이의 관계, 그리고 여러분을 그 신에게 점점 더 가깝게 다가가게 하는 점진적 앎. 신은 여러분 안에 살고 있다.

 

411. 겉으로는 따로따로인 듯 보이는 사물들도 근본적으로는 하나에 불과하다.

 

411. “우리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서로에게 속해 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이는 우리 모두가 사실은 어느 하나의 단일한 존재의 측면 또는 양상인 것과 마찬가지인데, 그 단일한 존재를 서구의 용어로는 하느님이라고 하는 반면, <우파니샤드>에서는 브라흐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411. 대립자의 세계 너머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경험되는 통일성과 동질성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우리 존재의 입자 하나하나까지도-의식의 투하이기 때문이다. 마치 동물과 식물, 그리고 자석에 붙는 금속과 달의 인력에 끌려가는 물이 그렇듯이 말이다.

 

413. 이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한다.

 

414. “, 에수그리스도여, 이것이 바로이것의 본래 모습닙니다. 이것은 마야의 경험이며, 감각의 환생입니다. 물론 감각이란 게 있다면 말이죠.

 

419. 이 세상은 우리의 짝이며, 우리역시 이 세상의 짝이다.

 

419. 이 지구는 온 우주를 통틀어 단 하나의 오아시스이며, 삶의 의례를 위해 따로 떼어 놓은 특별한 종류의 성스러운 숲인 것이다. 그리고 이 지구의 어느 한 부분이나 구획만이 아니라, 지구 전체가 이제는 성소.

우주의 오아시스는 지구의 부분이 아닌 지구 전체. 그렇게 우리는 하나인 것이고 상호 연결이 되어있다.

 

419. 어떤 신이 우리를 그곳에 데려다 놓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곳에서부터 나왔던 것이다.

 

420. 신화의 첫 번째 기능은 여러분이 있는 장소를 신성화하는 것이다.

 

421. 여러분만의 희열을 느껴라.

 

423. 신은 (나와) 다르고, 또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고, [이처럼] 자신과 자신을 다르게 생각하고 숭배하는 사람은 그 지혜를 알지 못하는 것이니, 그런 자라면 신들의 짐승과 다를바 없다.

 

424. 내입에서 마시는 자는 누구나 나와 같이 될 것이다. 내가 그가 되고, 감추어진 것들이 그에게 드러나리라. 만물이 나이니, 나로부터 만물이 생겨났고, 나에게 만물이 이어지리라. 정작을 쪼개면 그곳에 내가 있고, 돌을 들어 올리면 그곳에 내가 있느니라. <도마 복음서>

 

425. 여러분이 모든 것을 원한다면 신들은 그것을 주리라. 하지만 여러분은 반드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나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 언제쯤이면 준비가 되고 그것을 받을수 있을까?

 

425. 거대한 풍파속에서도 신과 같은 침착함으로 살아가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426. 신화는, 또는 달리 말해서, 신화와 종교는 위대한 시이며, 그와 같이 인식할 경우에는 십중팔구 사물과 사건을 관통해서 서로 완전하며 전체인 어떤 존재또는 영원의 편재를 기다린다. 이런 기능에 있어서 모든 신화, 모든 위대한 시, 모든 신비주의적 전통은 합치한다.

 

426. 따라서 모든 신화가 삶을 현대의 삶에 맞도록 가공하기 위해 반드시 성취해야만 하는 첫 번째 조건은 한때는 끔직하면서도 매혹적이었던 우리 자신과 우주-우리가 곧 그 귀와 눈과 정신으로 작용하는-의 경이를 향한 지각의 문을 정화하는 것이다.

 

426. 새로운 신화는 무엇인가? 또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427. 그것은 그 주관적 의미에서 보자면 오래되고, 영원하고, 끊임없는 신화이며, 기억되는 과거나 투사되는 미래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현재의 견지에서 시적으로 갱신되는 신화이다.

 

427. 개인들이 스스로에 대한 지식을 각성할 수 있게 호소하는 신화인 것이다.

 

옮긴이의 말

 

428. 책은 1983년 애설런 연구소에서 조지프 캠벨의 강의를 들었던 다이앤 K.오스본의 필기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거기다가 기존에 출간된 캠벨의 저서 가운데 관련된 부분의 인용문들을 발췌, 수록한 방식으로 꾸며진 일종의 선집이다. 그의 사상에 대한 개론적인 성격의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430. 그는 특정종교의 독단을 배제하고 궁극의 길은 하나로 통한다는 의미에서 겸손과 양보를 주장했다.

 

430. 이 책은 지금까지 대중에게 알려진 신화학자로서의 캠벨의 모습보다는 오히려 인간캠벨의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고 있다. 여러 주제에 대한 그의 진솔한 고백은 평생을 신화와 종교와 은유의 해석에 바친 어느 노학자의 인생철학에 가깝다. 캠벨의 인생철학은 이른바 희열을 쫓으라라는 것으로 요약될수 있겠다.

번역가는 이윤기의 천복을 쫓으라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그래도 천복을 쫓으라가 훨씬 좋네.

 

431. 삶과 선뿐만 아니라 죽음과 악까지도 포용하고 인정하라고 역설한다. 이것 역시 힌두교-불교 전통에 크게 기인한 발언이라고 여겨지는데.

 

431. 캠벨은 인간의 인생을 영웅의 여정에 비유했다. 그 하나하나는 태어남과 부름과 모험과 역경과 귀환과 노년으로 이루어지는 영웅의 여정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희열을 따라,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고, 선한 것뿐만 아니라 악하고 더러운 것까지도 포용하면서, 후회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목차에 대하여

도입의 단계(영웅의 여정을 시작하기전에), 의식의 첫 번째 단계(현세에서의 삶), 의식의 두 번째 단계(깨달음을 향한 길), 의식의 세 번째 단계(성스러운 삶과의 조우)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옮긴이의 말대로 도입의 단계는 캠벨의 잠언으로 구성되어져 있는데 나는 그나마 지난주 신화의 힘을 읽어서 어느 정도 단련이 되었지만 갑자기 이런 잠언들이 나오면 독자가 어리둥절해 질수도 있으니 3단계가 끝나고 마지막에 정리하는 차원에서 캠벨의 잠언을 살펴보는 것이 훨씬 좋을 것이다.

 

보완이 필요한 점

원문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이 번역본에서 첨언([ ], - …… -) 이 너무 많아서 눈에 거슬렸다. 옮긴이가 독자들에게 자기방식으로 더 자세히 설명해주기 위해 추가한 것 같은데 이것으로 인해 오히려 글 읽기가 너무 자주 끊겨 읽기가 힘들었다.(그래도 옮긴이의 열정은 높이 삼)

각 장마다 소주제들로 구분되는데 차라리 그런 소주제의 제목을 적어주었으면 책을 읽고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첫 번째 단계는 소주제로 돈, 이성, 노년, 죽음, 결혼, 출산 등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분류하는 것이 독자에게 도움을 줄 것이다.

주로 다루는 내용이 기독교, 힌두교, 불교이다. 그 중에 특히 기독교와 성경이야기가 절반이상을 차지하는 것 같다. 나는 기독교가 아니라 상관이 없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내용을 보면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대부분 종교를 버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그래서 너무 기독교에 치중된 부분을 비종교 부분으로 채워졌으면 좋겠다. 이 책을 보면 결국 종교는 전부 신화다라는 내용으로 귀결되는 느낌을 지울수 없다.

 

이 책의 장점

일단 지난주 <신화의 힘>보다 읽기가 한결 쉬웠다. 지난주 예방주사를 맞아서 그런지 아니면 우리말 옮긴이가 다른 사람이어서 그런지 용어나 이런 것들도 쉽게 와닿았다.

이 책은 캠벨의 강의록으로서 그의 사상에 대한 개론적인 성격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난주에서 언급되지 않았다. 저자의 어린 시절부터 유년기, 청년기, 결혼 등에 대한 풍부한 일화나 이에 대한 저자의 개인적인 생각들이 언급되어 읽기도 편했고, 신화에 대한 내용이 이해하기가 쉬웠다.

특히 직업관이나 글쓰기 등 예술에 대한 언급한 부분이 연구원인 나에게 크게 와닿았고 저자의 풍부한 지식과 지혜에 또 한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이 책의 저자를 캠벨이라고 해야 하나 다이앤. K. 오스본이라고 해야 하나.

이 책은 1983년에 애설런 연구소에서 조지프 캠벨의 강의를 들었던 다이앤.K. 오스본의 필기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거기다가 기존에 출간된 캠벨의 저서 가운데 관련된 부분의 인용문들을 발췌, 수록한 방식으로 꾸며진 일종의 선집이다. 원제는 <조지프 캠벨 편람(Joseph Campbell companion)>이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캠벨의 강의록으로서 그의 사상에 대한 개론적인 성격의 책이라고 할수 있겠다.

내가 다이앤 입장이라면 강의를 듣고 필기한 내용이 주된 내용인데 강의에 대한 다이앤의 생각이 한줄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책은 쉽게 얘기해서 그동안의 조지프 캠벨이 한 이야기와 저술한 책을 적절하게 섞어서 만든 책이라는 느낌을 지울수 없다. 그래도 캠벨이 허락을 했으니 이 책이 세상에 나왔겠지만.....내가 다이앤이라면 각 장의 소주제에 대한 나만의 생각을 넣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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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9 15:26:58 *.124.22.184

저도 저자 연구하면서 캠벨에게 영향을 미친 다른 저자들을 알아봤어요.  그러면서 왜 캠벨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알겠더라구요. 전 이렇게 저자에서 영향 받는거에 거부감이 있나봐요. 예전에 제가 소설보다 에세이, 자전적 에세이를 봤는데 '이건희', '이명박' ,'전여옥' 등등 이었거든요. ㅎㅎㅎ

캠벨이 다른 시기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궁금하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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