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2007년 7월 29일 22시 58분 등록
#1. 시작하는 글
 
'마흔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는 '나, 구본형의 변화 이야기'의 개정판이다. 개정판(마흔세 살…)에는 이전(나, 구본형…)과는 달리 사부님의 사진들이 많이 담겨 있다. 새삼 사부님의 사진을 들여다보니, 기분이 묘 해졌다. '나는 이제 이 분을 사부님으로 모시고 있다.' 1년 전만 해도 다만 책 속의 저자였던, 나와는 생판 남이었던 이 분이 이제 내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오셨다.
 
사진을 한참 동안 들여다본다. '나는 어쩌다 이 분을 만나게 되었나?' 이분 때문에 내 삶은 퍽 힘들어졌다. 안 그래도 고민 많은 나에게 더 많은 고민거리를 안겨주었다. 또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아니다. 이 분 때문 에 내 삶은 꿈틀 되기 시작했다. 아름다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꿈꾸기 시작했다.'
 
모자란 나는 아직도 매일 흔들리면서 가고 있다. 신경림의 시구처럼, "이래서 이 세상에 돌로 버려지면 어쩌나 두려워하면서, 이래서 이 세상에 꽃으로 피었으면 꿈도 꾸면서"
 
평생 흔들리면서 갈 테지만, 요즘은 꿈을 더욱 자주 꾼다. 조금씩 선명해지고 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면, 길 위의 삶을 즐기면서 간다면 혹, 그 '완성'에 이르지 못해도 좋은 일이 아닌가. 시작도 하지 않은 것보다는 행복한 일이 아닌가.'


#2. 저자에 대하여
 
올해 초, 3기 연구원이 되기 위한 시험을 치르며 나는 그의 책 '코리아니티'를 리뷰했었다. 그리고 '저자에 대하여'를 다음과 같이 ‘그 분과의 만남'에 대해서 썼다.
 
-----------------------------------------
 
첫 만남. 2003년 봄. 사자같이 젊은 놈들
 
입사 초기였다. 기대와는 너무나 다른 회사 생활 때문에 방황하던 그 때, 나는 그의 책을 처음 만났다. 정제되진 않았으나 젊은 수사자의 갈기처럼 변화에 대한 갈망이 사방으로 뻗쳐 휘날리던, 나와 같은 고민을 가 진 그들의 뜨거운 심장이 펄떡펄떡 느껴지는 책이었다. 그러나 내 열정의 거친 맥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평범한 일상 속으로 잦아 들었다.
 
내가 그를 만나기 위해, 그 책 속의 주인공들처럼 변화하기 위해 이렇게 뜨거운 시험을 치르게 될 줄을 그 때는 미처 몰랐다.
 
두번째 만남. 2006년 가을. EBS-MS MBA 강연
 
무엇이든 해야 될 것 같은 불안한 마음에서 시작한 온라인 MBA의 오프라인 입학식에서 글이 아닌 강연으 로 그를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 날 나는 그의 한 마리 먹이감이 되었다. 직접 길을 걸어본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묵직한 믿음의 언어로, 그는 내 마음 속에 있던 불안의 상처를 헤집었고, 그저 그럴 뿐인 일상을 바꾸어야 한다고 몽둥이로 호되게 내리쳤다.
 
강연의 중간에 그는 연구원 선발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언급했다. 귀가 번쩍 뜨였다. 강연이 끝난 뒤 평소 의 나답지 않게 난 그에게 명함을 건네며 연구원에 대해 여쭸다. 그는 웃으면서 생각보다 ‘힘들 것’이라며 겁을 주었다.
 
세번째 만남. 2007년 3월 16일 새벽. 나•구본형의 변화이야기
 
저자에 대해 쓰기에는 내가 그를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토요일 늦은 오후, 그의 40대를 갈무리한 자 서전을 한 권 샀다. 책을 읽으면서 그가 느꼈던 직장 생활의 갈등과 고민, 그리고 변화와 사람에 대한 열정 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 ‘구본형’에 대해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가 그렇게 늦게 결 심하고 시작했음을, 그만큼 더 두려워했음을 알고, 내 자신의 변화를 향한 첫 발걸음에 더욱 힘을 실어본다.
 
네번째 만남. 2007년 3월 31일. 새로운 시작
 
지금까지 지나온 인생의 점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찾아가는 기분이 든다. 드디어 1년 동안을 함께할 소중 한 사람들과 사부님을 만났다. 조금은 고생했다고 격려도 받을 테고, 앞으로 더 힘든 날들이 남아있다고 엄 포를 놓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마음만은 변함이 없다. 그가 나의 영혼을 흔들었듯이, 나도 열정으로 그의 가슴을 한번쯤 뜨겁게 울리는 사람이 되어 보리라! 이렇게 소중한 만남의 순간 순간을 마음을 다해 즐겨보리라!
 
---------------------------------------------------
 
내 10대 풍광의 첫 장면처럼 그와의 만남은 이루어졌고, 이제 그의 연구원이 된 나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그분을 직접 뵙게 되었다. '나는 처음의 결심처럼, 그 열정처럼 나아가고 있는가?' 다시 한 번 자신을 되돌아본다.
 
구본형, 그는 마흔이 넘어서야 변화의 뜨거운 첫 발걸음을 내디딘 늦깎이 변화경영전문가이며, 10년 동안 14권의 책을 써 낸 정력적인 저술가이며, 미적지근한 인생을 산다는 것의 아픔을 알기에, 더욱 뜨거운 가슴으로 자신의 틀 안에서 주저하고 있는 우리를 흔들어 깨우려는 열정 넘치는 스승이다. 말과 행동이 다른 여느 어른들과는 달리 자신이 직접 몸으로 이해하고 실천해 본 믿음의 언어만을 전하고자 하는 책임감 있는 인생의 선배이며, ‘선비처럼 섬세하고. 무사처럼 선이 굵은’ 남자가 되고 싶은 하는 기개 넘치는 일상의 혁명가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구하려는 큰 뜻을 품은 '올바른 이기주의자'이며, 내 인생을 뒤흔든 소중한 ‘불쏘시개’다.
 
사부님을 뵈면서 '위대함은 어떻게 시작되는 것일까?' 생각해본다. 사부님께서 한 달 동안의 단식을 하던 그 어느 날 아침처럼 갑자기 시작되는 것일까? 그렇게 한 순간에 시작되는 것일까? 아니다. 그 시작을 위해 얼마나 많은 날이 필요했던가. 그 순간을 위해 43년의 세월이 울고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터져 나온 것이다. 그 동안 쌓아두었던 그 모든 것들이 이제 더 이상 쌓일 곳이 없어 넘쳐 흐른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망설임의 날들이 한 순간에 끝장나버리고, 한여름 밤, 노란 달맞이 꽃처럼 툭, 하고 피어 올라, 유유한 강이 되어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위대함은 일상에서 시작된다. 좋은 하루 하루가 만들어낸다. 그 좋은 날들이 쌓여 더 이상 제 안에 갇혀 있을 수 없을 때 그렇게 흘러 넘치는 것이다. 좋은 향기는 어느 한 순간에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저절로 풍겨 나오는 것이다. 자신을 닮은, 그러나 자신을 넘어선 자연스러운 것이 바로 위대함의 향기이다.
 
사부님께선 "뒷물이 앞물을 뛰어넘으려고 해야 비로소 강물이 힘차게 흐를 수 있다" 하셨다. 힘차게 흐르기 위해서는 흘러 넘쳐야 한다. 흘러 넘치기 위해서 자신을 쌓아 나가야 한다. '나는 그만큼 쌓아 올렸는가? 나는 그만큼 울었는가?' 아직, 한참 멀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자신을 뛰어 넘어 흘러 넘치는 물이 되고 싶다. 사부님이란 큰 그릇을 흘러 넘치는 맑은 향기가 되고 싶다. 그렇게 사부님을 빛내는 제자가 되고 싶다. 꼭 그렇게 될 것이다.
 
 
#3. 내 마음에 들어온 인용문
 
개정판 서문
 
지난 10년 동안 14권의 책을 썼다. 그 중에서 나는 이 책을 가장 좋아한다. 이것은 마흔 살의 혁명에 대한 기록이다. … 과거를 기록하면서 미래를 얻었다는 점이 이 책을 쓰면서 얻어낸 최고의 수확이다.
 
미래는 지금 서 있는 이 자리를 딛고 이 자리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충분히 썩어 비옥해진 과거가 미래의 수확량을 결정한다는 것은 농사를 한 번이라도 지어본 사람은 금방 알 수 있다. 과거를 충분히 썩혀 소화해내지 못하면 과거가 살아서 미래를 지배하게 된다. 즉 과거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과거의 관성, 과거의 습관, 과거의 자취와 흔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과거의 온갖 흔적, 그 영욕을 깊이 썩혀두면 우리는 지혜를 얻게 된다. 그것이 앞길을 밝히는 불빛이 된다.
 
나는 아름다운 미래를 '회고'할 수 있게 되었다. '미래에 대한 회고', 이것이 개인사를 정리하면서 내 마음을 무찔러 들어온 생각이다. 나는 10년 앞을 달려나가, 그 곳에서 거꾸로 10년 동안 펼쳐지게 될 내 인생 최고의 장면들을 되돌아보았다. 시간적 도치가 주는 장점은 '계획을 이미 발생한 실천 결과'로 치환시켜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앞으로 10년을 잘 살게 '되었'다. 과거의 기록이 건강한 미래를 계획하도록 도와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좋아한다.
 
책을 펴내며
 
'자서전이란 다른 사람에 대한 진실을 말하기에 더없이 좋은 수단'임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내가 살았던 삶이며 동시에 내 속에 있는 그들의 삶이었다. 나는 이러한 깨달음이 바로 인간에 대한 성찰의 확대라고 믿고 있다.
 
역사는 기록된다. 기록되지 않으면 잊혀진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기록함으로써 나의 문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평범한 개인에게 있어 개인사의 편찬은 본인의 과제다. 아무도 대신해주지 않는다. 이 책은 바로 그 프로젝트이다.
 
'나에 대한 이야기(me-story)'는 과거를 넘어 미래를 향한 기록이다. 즉 내 인생의 다음 장면을 그려보기 위한 시도이다. 자신에 대해 쓰다 보면, 해보지 못해 안타까운 일들이 밝혀지고 절실해진다. 이 때 아직 남아있는 시간들은 그 일들을 하면서 살 수 있는 기회로 전환된다.
 
평범한 개인의 미시사(微視史)는 본인이 남기지 않으면 유실된다. 기록이 없으면 역사도 없고 자신의 세계도 없다. … 무엇이 되었든 개인의 역사는 스스로에 의해 편찬되어야 한다. 이것이 군중 속에서, 군중으로, 흔적 없이 매몰되는 자신을 잊지 않는 길이다.
 
사라진 문명이 되지 않는 것, 나아가 남은 시간을 찬란한 문명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나의 이야기 프로젝트(Me-story Project)'가 절실한 이유이다.
 
프롤로그
 
(15)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은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서는 자는 춤을 춘다. - 니체
 
(15) 시간이 다 되어 그 많던 모래알들이 다 떨어지고 마지막 촛농이 숨을 다할 때…. 이 때 인생을 돌아본들 무엇을 어찌하겠는가! 후회 속에서 긴 한숨을 지어본들 갈 길을 재촉받을 뿐이다.
 
한 곳에서 햇빛이 사라질 때, 나는 아침이 시작되는 다른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하여 새로운 날을 다시 시작하며 후회가 있으면 고칠 것이고, 아쉬움이 있으면 채울 것이며, 해보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해볼 것이다.
 
(16) 이 책은 놀이며 유희다. 채워지지 않은 욕망이고 욕망에 대한 절제다. 못 가본 삶에 대한 질투이다. 그동안 배운 학습의 노트이며, 읽었던 책의 주석이다. 자선적 소설이고, 소설적 자전이다. 지나간 삶에 대한 파괴고, 앞으로 살 삶에 대한 창조이다. 나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보려는 실험이다.
 
(17) 과거는 늘 엄격하고 위대한 스승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적 감옥이기도 했다. 과거가 날 만들었으니, 과거를 버리고 벗어나는 것이 또한 내 미래의 과제다. 죽어야 할 자리에는 늘 혁명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역사였다. 살면서 나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 그리고 여러 번 태어나야 한다.
 
1장 _ 지난 10년
 
(21) 문득 산다는 것이 햇빛처럼 즐거워졌다. 나는 한 개의 빛의 입자처럼 춤을 추고 싶었다.
 
(21~22) 마흔 살은 오래 끓어 걸쭉해지기 시작한 매운탕이다. 바야흐로 인생이 뼛속 진국이 우러나오는 시기다. 마지막 젊음이 펄펄 끓어오르고, 온갖 양념과 채소들의 진수가 고기 맛에 배고 어울리는 먹기 딱 좋은 시절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절정을 살짝 지나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23) 비대해진 육체와 달리 정신은 알 수 없는 불안을 감지한다. 내게 마흔은 그런 모습으로 다가왔다.
 
(25) 고독은 비 같은 것이다. 식물을 밤 사이에 자라게 하는 그런 것이다.
 
(29~30) '그녀와 함께 떠나자. 그녀와 함께 도망치자. 다시는 유럽으로 돌아오지 말고 그녀와 소박하게 살자. 태양이 있는 곳, 과일이 익는 곳에서 그녀의 육체와 더불어 살자. 다른 어는 것과도 연관을 맺지말고 지나간 날의 모든 것으로부터 동떨어진 채, 그녀의 머리카락 속에, 입 속에, 그녀의 젖가슴에 묻혀 살자.' - 잉게보르크 바흐만
 
(30) 그때 어두운 곳에 혼자 서서 검고 끊임없이 파도치는 내 내면의 바다를 들여다본 것은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남자는 '여자가 길들인 마지막 가축'이다. 그러나 반 밖에 길들여지지 않아 늘 울타리 밖으로 튀어나가고 싶어한다. 자유는 빛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확실한 것, 굳건히 서 있는 것들의 질서 안에서 자유는 끝나고 만다. 절실하게 바라지만 자유가 주어지면 우리는 자유를 두려워한다. '이내 스스로를 함부로 던져 망가뜨리고' 만다. 마르셸 프루스트는 이것을 "사랑하는 여자에게서 모든 만족을 얻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은 여자와 함께 그녀를 배신한다."라고 표현한다.
 
(31) 현실만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 때려주고 싶다. 그들이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 역시 한 때의 꿈보다 더 영속적이지 못했다. 인생의 결국 짧은 꿈이었다는 것은 모든 죽어가는 사람은 다 알고 있다.
 
현실은 늘 죽음 앞에서 무력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오직 삶만이 현실의 위력에 눌려 죽어지낸다.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은 현실적으로밖에 살지 못했던 그 초라한 현실을 후회한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
 
(38) 나의 과거는 거대한 사회적 방망이에 의해 가슴을 강타당했다. 배반 같기도 하고, 비애 같기도 하고, 무력감 같기도 하고, 허무 같기도 한 통증으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뒷방 노인이 된 마흔이여.
 
2장 _ 마흔 살
 
(43)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천 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있다. - 니체
 
(45~46)
'미루나무가 서 있는 강 길을 걷는다 강 건너 마을에 하나둘 흔들리며 내걸리는 불빛들.
흔들리는 것들도 저렇게 반짝일 수 있구나 그래 별빛, 흘러온 길들은 늘 그렇게 아득하다.
어제였던가 그제였던가 그토록 나는 저 강 건너의 불빛들을 그리워하며 살아왔던 것이구나.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 흔들리며 손짓하는 나무들의 숲에 다가갔다.
숲을 건너기에 내 몸은 너무 많은 것들을 버리지 못했다 지나간 세상의 일을 떠올렸다.
 
내 안에 들어와 나를 들끓게 하였던 것들, 끝없는 벼랑으로 내몰고 갔던 것들, 신성과 욕망과 내달림과 쓰러짐과 그리움의 불면들.
 
굽이굽이 흘러온 길도 어느 한 굽이에서 끝난다 폭포, 여기까지 흘러온 것들이 그 질긴 숨의 끈을 한꺼번에 탁 놓아버린다.
다시 내게 묻는다 너도 이렇게 수직의 정신으로 내리 꽂힐 수 있느냐.
내리 꽂힌 그 삶이 깊은 물을 이루며 흐르므로, 고이지 않고 비워내므로 껴안을 수 있는 것이냐. 그리하여 거기 은빛 비늘의 물고기떼, 비바람을 몰고 오던 구름과 시린 별과 달과 크고 작은 돌이며 이끼들 산그늘마저 담아내는 것이냐.' - 박남준, <나무, 폭포, 그리고 숲> 중에서
 
(50) 마흔 살은 당나귀의 삶이다. 젊은이들의 자유를 포기한 채 두 어깨에 가득 짐을 지고 홀로 사는 짐승이 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이행을 거부하는 것은 또 다른 어려움을 자초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여전히 위대한 화가나 음악가가 되고 싶어하기도 하고, 백만장자의 꿈을 버리지 못한다. 아니면 아직 해보지 못한 아름다운 사랑을 완성해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것은 환상일 뿐이다. 꿈을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흔 살이 되면 사람들은 밀려드는 피로감 때문에, 자신에 대한 다소의 실망감 때문에, 또는 그 동안의 실패의 전력 때문에,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저만치 물러앉는다. 노력이란 얼마나 지루한 가시밭길인가!
 
(51) 어쨌던 젊은이들이 어느 날 나이를 먹어 성인이 되면서 자신의 가슴 속에 있던 '신적인 위대성의 흔적'을 지우고 당나귀가 되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 슬픔은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끝나지 않는다. 슬픔은 어느 날 비탄을 바뀐다. "이제 마흔이 되었다. 그러나 해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세상에 내가 다녀간 자취는 어디에도 없다. 아, 나는 조만간 사라질 것이고 누구의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다. 나는 저물었다. 우리의 세대도 끝났다."
 
(55) 지혜란 '숭고하고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삶을 위해 필요한 실제적인 통찰력을 의미한다.
 
(57) 유머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너무 가깝게 있으면 유머를 사용할 수 없다. 자신을 약간 떼어놓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때 자신을 소재로 농담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너무 멀리 가 있으면 안된다. 무관심은 유머를 만들어낼 수 없다.
 
(58) 이상과 현실의 사이, 제3의 지점,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자리, 스스로를 놀릴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짐만 지고 가는 당나귀의 진지함이 어찌 사람들이 그리는 마흔의 삶이 될 수 있겠는가? 장난도 치고, 흐드러진 메밀밭을 달밤에 지나기도 하며, 물레방아간의 뒤로 숨기도 하고, 달콤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제3의 지점이 마흔 살의 자리다. 개혁은 마음을 변형시키는 것이다. 마흔 살의 문제는 결국 가슴과 영혼의 문제다.
 
(59~60) 마흔 살은 아직 끝나지 않은 연극의 지루한 2막이 아니다. 오히려 연극을 끝내고 진짜 현실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파괴와 창조, 죽음과 재생이라는 이미지와 직결되며, 죽어야 살 수 있다. 이 치열한 반전을 사람들은 일부러 잊으려고 하는 것인가?
 
(61) 전환과 변곡, 이 두 단어야말로 40대를 묘사하는 가장 적합한 언어이다.
 
(62) 위대한 하루가 없이는 위대한 인생도 없건만 하루하루는 잃어도 아까울 것 없는 푼돈처럼 낭비되었다.
 
(62) 마흔 살은 가진 것을 다 걸어서 전환에 성공해야 한다. 이것이 내 지론이다. 다만 내가 거는 것은 돈이 아니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나 자신을 건다. 나는 이 길을 택했다. 내가 도박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길 밖에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흔이 익어가면서 나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계획했다. 나는 비장했다. 나의 40대는 죽음과 친근해진 10년이었다.
 
(63) "내가 꼭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그러나 나라가 선비를 기른 지 500년이 되었건만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도 죽는 이가 없다. 다만 그것이 가슴 아플 뿐이다." - 매천 황현의 절명시
 
(63) 나는 마흔이 넘어서 바쳐야 할 목숨도 없었고, 하고 싶은 일도 없었으며,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이것은 비참한 일이었다. 푼돈 서푼짜리 인생이었다.
 
죽어야 할 자리에는 늘 혁명이 있어야 한다. 분명한 것은 바로 이 자리가 내가 죽어야 하는 자리라는 점이다. 한 세상이 어둠에 싸이게 될 때 또 하나의 새로운 세상은 어둠 속에서 새로운 빛으로 빛난다.
 
3장 _ 직장생활
 
(67) 삶의 방식을 바꾸기 전에는 병이 낫지 않는다. - 니체

(69) 변화는 한가한 사람들의 과제였을 뿐이다. 변화는 바쁘지 않은 사람들의 일이었다. 변화는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가진 불행한 자들, 또는 불행을 인식하는 자들의 과제였다.
 
(71) 혁명이라는 단어는 내게 감동과 전율을 주었다. 그 말처럼 매력적인 단어는 없었다.
 
(72) 이상하게 가난은 냄새로부터 온다. 가난의 냄새는 일상 속으로 스며들어 왔고 조국에 대한 열등감으로 고착되었던 것 같다. 그것은 내 영혼의 바닥에 어둡고 더러운 냄새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72) 에게 해에는 꽃과 바위만 있는 섬이 있다고 한다. 다른 곳에서는 잠깐 피었다 지고 말아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꽃들이 그곳에서는 한 해에 두 번이나 크고 화려하게 만발한다고 한다. 옹색한 땅과 준엄한 바위가 오히려 개화를 촉진하기 때문이다. '결핍이 꽃을 아름다운 꿈 안으로 몰아넣어 준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74) 나는 새로운 원리가 작동되는 새로운 직업세계가 펼쳐지는 것을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변화의 현장에 있던 나는 직업의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잇는 사고의 혁명(Thought revolution)을 남보다 빨리 냄새 맡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사고의 첨단에 있었던 셈이다. 일자리는 증발하고 있었다. 오래된 일자리가 사라지고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규직 일자리가 점점 줄고 있었다. 그 대신 새로운 일자리는 프로젝트와 태스크, 그리고 전문 분야로 대체되고 있었다. … 평생직장은 사망했고, 평생직업은 끝없는 학습으로만 가능한 움직이는 타깃이 되고 말았다.
 
(76) 그들은 아직도 나를 필요로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곳에 없었다. 나는 조직이 변하는 것보다 더 빨리 변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77) 지금의 하기 싫은 일을 버리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그 일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들, 직장 속에는 그런 사람들이 적어도 80퍼센트는 되어 보였다.
 
(78~80) 어느 조직도 필요한 사람은 떠나보내지 않는다. 어려울 때일수록 잡아두고 싶은 사람이 이런 사람들이다. 이것이 '필요의 원칙'이다. 필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늘 그 처신에 특별한 공유점이 있다.
 
첫째, 그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전문가들이다.
둘째, 그들은 적절한 휴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셋째, 그들은 늘 학습한다. 그들은 자신의 과거와 경쟁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세상의 흐름에 대한 대략을 알고 있다. 또 그들은 자신과 세상을 연결하는 새로운 단추를 끼울 수 있다.
 
(80) 아이러니하게도 필요한 사람은 떠남을 늘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 니체는 가장 위험한 조직원은 '그의 이탈로 조직 자체가 파괴되는 조직원'이라고 불렀다.
 
(81~82) 떠남 자체가 목적인 때도 있는데 이때가 바로 그랬다.
 
(82) '내가 여기를 떠난다고 하지 않았느냐? 떠남이 나의 목표니라.' '주인 어른께서는 양식도 준비하지 않으셨는데요.' 그가 말했다. '나에게는 그 따위 것은 필요 없다.' 내가 말했다. '여행이 워낙 길 터이니 도중에 무얼 얻지 못하면 나는 필경 굶어 죽고 말 것이다. 양식을 마련해 가봐야 양식이 이 몸을 구하지 못하지. 실로 다행스러운 것은 이야말로 다시없는 굉장한 여행이라는 것이다.' - 카프카, <돌연한 출발> 중
 
(84) 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은 수동성이다. 나는 능동성이라는 유전자 코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수동성을 강점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85) 마케팅은 유혹이다. 달콤해야 하고, 향기로워야 하고, 엄청난 새로움에 대한 약속을 흘려야 한다. 유혹은 올가미고 덫이다.
 
(85) 유혹은 설득 이전에 이미 설득당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설득이란 언제나 스스로 이미 설득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 설득할 수 있다. 이것이 설득의 제1의 법칙이다. 설득은 늘 미리 이루어진다. 미리 이루어진 설득, 무너진 자기 방어를 유혹이라고 부른다.
 
(87) 하루는 아무 계획도 없는 상태에서 나를 찾아왔다. 하루하루를 낭비하고 있었다. 부끄럽고 한심한 일이었다. 나는 좌절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오랫동안 바라왔던 것, 즉 변화경영에 대한 책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나는 기뻤다. 내게 천둥처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갑자기 나는 내가 기획하는 세상 속을 빨려 들어갔다. 내가 기획하고 연출하며 배역을 맡는 이 훌륭한 놀이를 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 달 쯤 지나 책이 나왔다. 첫 책 <익숙한 것과의 결별>은 독자에게 가는 선물이라기보다는 나에게 주는 메시지였다.
 
(88~89) 전문가는 과거에 의해 전문성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며, 오직 끊임없는 자기학습에 의해 날마다 새로워질 뿐이다. 나는 나의 방식으로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싶었다.
 
(89) 나는 내가 '경계선을 걷는 사람(edge walker)'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내가 믿는 것은 끊임없이 배우고 실험하는 사람뿐이다. 무엇을 하든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는' 사람만이 전문가로 존경받을 자격이 있다.
 
(90~91) 나는 사는 듯싶게 살고 싶었다. 모든 것을 다 바칠 만한 것을 찾고 싶었다. 관성에 따라 굴러가는 하루 말고, 전혀 새로운 뜨거운 하루를 가지고 싶었다.
 
(91) 어제의 나는 꽃처럼 낙엽처럼 죽어 흘러가고 사라졌다. 나무들은 가장 추울 때 그렇게 서 있다. 죽지 않고 새로워지는 것은 없다. 죽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새로워질 수 없는 것이다.
 
(91~92) 이제 스스로의 작은 나라를 세워야 했다. 내 안에서 '군주적 본능'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나의 나라, 나의 세계, 나의 꽃을 피워야 했다. 그것은 겨울보다 더 추운 봄이었다. 그러나 꽃 터지는 봄은 왔다. 피워야 할 꽃, 만들어야 할 세계가 생긴 것이다.
 
4장 _ 얼굴 - 페르소나
 
(96) 그것은 틀림없는 나였다. 내가 죽은 것이다. 브라보!
 
(97) 나 이제 내가 되었네. 여러 해, 여러 곳을 방황하느라 시간이 많이 지났네. 나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녹아 없어져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네. - 메이 사턴, <나 이제 내가 되었네> 중에서
 
(97) 그 때 거울 속에 있던 눈이 까만 청년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때는 꽤 긴 길을 걸어오느라 술이 다 깨고 차가운 공기에 씻겨 여러 가지 가능성으로 빛나는 젊은 눈을 보았었다. 그때 그 눈을 보며 사랑하고 싶다고 느꼈다. 세상과 인생과 여자와 미래를 결국 사랑하게 될 것을 믿었다. 그러나 나는 거울 속에서 그 청년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피곤하고 불만투성이인 중년 사내의 얼굴 하나를 보았을 뿐이다.
 
(98~99) '초상화를 그릴 때 몇 가지 공통적인 어려움을 겪는다. 우선은 초상화가 실제 인물과 달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떨쳐버려야 한다. 실제 인물과 비슷해 보이려는 노력을 하다 보면 생명력이 없어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물의 내면을 그려내는 것이다. 초상화의 생명은 정밀묘사보다 그 인물이 풍기는 분위기와 느낌을 담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초상화의 매력이다. … 초상화는 그 반대로 그려야 한다. 즉, 안에서부터 밖으로 그려야 한다. 왜냐하면 안만 제대로 그려지면 밖은 저절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 초상화가 노마 밀러
 
(100) 생각은 매우 진부하거나 느닷없는 새로움으로 정신을 죽이거나 일깨운다.
 
(102) 난 가발은 싫어한다. 가발을 쓰면 처참해질 것 같다. 다른 사람처럼 평균이 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마음이 열등감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가장 잘 이해하게 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대머리용 가발이다.
 
(104) 눈썹을 볼 때마다 내가 반대머리가 된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이 많은 숱이 눈썹으로 내려왔으니 머리에 날 털이 조금은 감소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107) 다시 코 이야기로 돌아가자. 신이 나니까, 콧방울이 너무 강마르지 않아 꼬장꼬장한 샌님처럼 보이지도 않고 후덕한 사람으로 보이는지도 모른다.
 
(108) 가끔 얇고 세련된 입술을 가지고 싶은 적도 있지만, 자고 일어나 어느 날 아침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대로 체념하고 살고 있다. 지금은 입술 따위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산다. 달려 있으면 문제될 게 없다.
 
(110) 어리숭해 보이는 것이 훨씬 큰 장점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주는 것 없이 미운 놈이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111) 약간 돈 것은 아주 재미있다. 기존의 존재 방식에 대한 파격이 아니라 그 편견에 대한 비웃음이 재미있었다.
 
(111) 나는 자신을 잘 알지 못했고, 더욱이 자신을 활용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얼굴을 다른 사람의 얼굴과 같았다. 그것은 해골에 인피를 씌운 죽어 있는 얼굴이었다. 그것은 내 생각의 죽음을 상징했다. 나는 다른 사람과 같았다. 나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112) 내 얼굴은 사회가 인정하는 정상의 한계 속에 머물면서 겨우 몇 가지의 모습으로 고착되어 있었다. 고착의 패악은 정신을 경직시킨다는 점이다. 거울 앞에서 얼굴을 마음대로 변형시켜본다는 것은 내게도 익숙지 않은 일처럼 보였다. 나도 날 무서워했고, 밀실에서도 내 의식은 갇혀 있었다. 사회적 기준은 나의 몸을 짜부라뜨린 후 침투했고, 나에게 허용된 개인적 밀실은 끊임없이 감시 받고 있었다. 나는 내 속에서조차 옷을 벗고 편하게 쉬기 어려웠다.
 
(113) 욕망이 자신을 충족해가는 것은 개인혁명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다. 욕망은 부숴 뜨려 땅에 묻어야 하는 끔찍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는 힘과 에너지다.
(113) 내 속에는 불꽃이 있었다. 그 불꽃은 처음에는 그저 어둠 속에 숨어있고 싶어했다. 그래서 자신을 가능한 한 작게 만들어 숨기려고 했다. 불꽃은 너무 작아서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어둠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두려움이 결국 불꽃으로 하여금 무엇인가 하게 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불꽃은 더 이상 숨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14) 돈이 없어도 가난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내가 상상하는 바로 그 사람이 되려고 애썼다. 그때는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후 내 불꽃은 마흔을 넘어서면서 거의 사그라지다가 갑자기 전혀 예기치 않게 다시 훨훨 춤추듯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런 특별한 계기도 없었다. 한순간 '이렇게 계속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114) 단식이라는 상징은 내게 참으로 적절한 출발점이었다. 그것은 나를 가볍게 해주었다. 모든 속박은 '먹고 사는 것'으로부터 왔다. 나는 그때 인형을 움직이는 끈을 보았다. … 인형의 자유는, 그러므로 아이러니하게도 속박으로부터 온다. 실을 끊으면 인형은 움직일 수 없다.
 
(115) 개인은 각자 그 안에 자신의 역사를 안고 산다. 부끄러움도 있고 후회도 있다. 그러나 아름다움도 있고 당당하고 장엄한 순간도 있게 마련이다. 산다는 것은 자신을 재료로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그저 '태어나 먹고 살기 위해 애쓰다 아파트 한 채를 남기고 일흔 여섯 살의 나이로 죽었다.'라고 기록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115) '오동은 천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고,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116) 생명은 내면에 있다. 우리의 내면은 늘 신과 만나는 장소이다. 신은 복잡한 곳에 있지 않다. 바다 위에 머무는 햇빛, 푸른 하늘을 흐르는 구름, 미풍 속의 나뭇잎, 그리고 그 바람, 시냇물이 흰 바위를 스치며 내는 소리, 계류가 흐르다 모여 이룬 소(沼) 속의 가을 물빛, 나뭇잎 하나와 거미줄 한 가닥에 매달린 작은 거미, 비 온 뒤 흙길 위를 천천히 움직이는 지렁이 한 마리는 신이 가장 머물기 좋아하는 장소들이다. 아니면 고추 몇 개가 곁들여진 싱싱한 상추 한 접시와 된장이 놓인 소박한 여름 점심상에도 신은 머문다.
 
(117) 나는 나답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나다운 것에 천착하고 매달렸다. 니체가 말한 '거리에 대한 파토스(pathos of distance)'를 추구했다. 이것은 차이에 대한 열정이었다. 차이는 다름이다. 그것은 다른 것, 다른 사람의 것을 자신의 것과 구별짓는 다름에 대한 열정이다. … 이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달라야 한다. 자기경영의 근간이 되는 것은 실천의 철학이다. 바로 자신의 과거와 경쟁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117~118) 우리는 수없이 많은 남의 얼굴들을 그리워하다 여기에 이르렀다. 학교에 가고 규범을 배우고 문화 속에 던져지면서 의도적 왜곡 속에서 다른 삶들이 되어갔다. 내가 마흔이 되어 한 일은 그런 나의 숨통을 끊어놓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길은 '오랜 세월과 수많은 공간'을 지나야 한다. 나는 이런 사람도 되고 저런 사람도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나는 바로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 여기에 왔다.
 
5장 _ 가족
 
(124)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 - 이탁오
 
(125) 갈등은 마음이 스스로의 길을 결정하는 순간이다. 나침반이 북쪽을 찾고, 그곳을 가리키는 순간 부르르 떨리는 것, 이것을 나는 갈등이라고 부른다.
 
(129) 이 아이의 가장 큰 특성은 숯불처럼 늘 불씨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아이의 불길은 늘 살아난다. 지치고 처져 있다가도 늘 다시 살아난다. 이 아이는 자신을 그렸다가 지우고 또다시 그리면서 자신을 키워간다.
 
(130~131) 인생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기쁨을 위해 산다.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 사랑이고,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행복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기쁨과 나의 기쁨은 늘 섞여 있었다. 작은 수고들은 이런 기쁨을 위해 동반되는 선물의 포장지거나 아름다운 포장 끈이거나 리본 같은 것들이다.
 
(132) 나는 비교적 무난한 사람이다. 말은 없지만 정이 많고 남을 배려하는 축에 속한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꽤 점잖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내 속에도 불 같은 것이 들어 있다. 나도 잘 모르고 있던 불길이 있어 나를 타오르게 하고, 저항하게 하며, 화내게 하고, 불만을 터뜨리게 한다. 뜨거운 기질은 옆에 있는 사람들을 가끔 괴롭히기도 한다.
 
(133) 나는 의미를 찾은 사람이고 나의 세계를 즐기는 사람이다. 어쩌면 이 조급한 세상에서 가장 먼 그림을 그려보려고 하는 자인지도 모른다. 나는 멀리 보는 것을 좋아한다.
 
(137) 아주 단순한 이유, 나는 더 이상 바쁘고 싶지 않다는 점 때문이다.
 
(138) 나는 아무 곳에서나 어느 때나 일할 수 있다. 내가 있는 곳은 어디고 이내 훌륭한 사무실이 될 수 있다. 온통 일할 있는 시간이기 때문에 일에 연연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나게 노는 일에 주력한다. 노는 것은 내게 힘을 주었다. 적어도 내가 내 인생을 마음대로 즐기고 있다는 자부심을 주었다.
 
(138) 나는 새벽에 일어나 두 시간 정도 글 쓰는 일에 몰두하는데, 이 시간은 아주 소중한 시간이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시간이기 때문에 이 시간대를 선택했다. 나는 시간의 불모지를 내게 불하했다. 그리고 가장 귀중한 나만의 시간대로 만들었다.
 
(139~140) 나는 내 마음 속으로 들어가 물었다. 왜 나는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일까? 무엇 때문에 이곳에 머무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가장 먼저 아내와 아이들이 떠올랐다. 가장 소중한 그들이 바로 나의 구속이 된 것이다. 그들이 내 발목을 잡고 있다는 생각은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다른 대다수의 아버지처럼 나도 그들을 위해서는 기꺼이 죽을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왜 하필 죽음이 생각날까? 그때 나는 이미 죽어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내주어야 할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뜨거운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내와 남편,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만 존재할 뿐, 그 사이에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없었다.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랑은 비어 있었고, 생명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이미 생명이 없었다. 책임과 의무만이 무성한 잡초처럼 내 마음의 벌판에 자리잡고 있었다. 살아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그러나 먼저 살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었다.
 
(140) 삶의 우선 순위를 바꾸게 되자 새로운 방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 차는 달빛을 타고 떠올라 전혀 다른 차원의 길을 달려갔다. …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길이 있다. 현실이란 그저 ' 지금의 상황에 대한 남들의 생각', 즉 다른 사람들의 견해일 뿐이다. 나는 나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에머슨의 말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관이 그 사람의 성격임을 종종 잊고 지내는 것' 같다. 누구의 삶이든 그 것은 늘 그 주인을 닮게 마련이다.
 
(144) 그리고 모처럼의 좋은 의도와 휴식을 망쳐놓은 서로에 대해 용서하지 못하고 암담한 마음이 되어 꽉 막힌 길 위에서 부대끼다 돌아오면, 여행은 피곤한 의무이고 생활 속의 작은 전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145) 집은 좋은 곳이다.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정겨운 모습으로 늘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우린 유목민에서 다시 정착민으로 돌아온다. 자유롭고 신선한 공기로부터 아늑하고 따뜻한 공기 속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환기를 하듯 다시 그 자유를 찾아나서곤 했다.
 
(146) 나는 목적을 가지고 친구들과 만나는 것을 싫어한다. 친구는 말 그대로 함께 놀기 위함이다. 어려서 아이들이 친구 집 앞에 가서 이름을 부르며, "○○야, 노올자."라고 불렀던 것을 기억해보라. 서로에게 아무 부담이 없다. 오직 인생을 같이 가기 위함이다. 서로 떨어져 각자 자신의 인생을 살다 우연히 어떤 그리움의 교차점에서 만나 손을 잡고, 웃고 떠들다 헤어지는 것이 제일 좋다. 진짜 친구와는 외로움과 즐거움을 나누는 것이 좋다. 술을 한잔하고 하소연도 하고, 다른 놈들 흉도 보고, 서로 이야기를 들어주고, 높은 이상을 떠들어대고, 현실이 아닌 꿈을 이야기하기도 하는 속없는 만남, 함께 마누라 없는 곳으로 손잡고 떠나기도 하는 순수한 놀이집단이 친구들이다.
 
(147) 삶의 어둠을 견디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고통 역시 개인의 몫이다. 각자에게는 자신이 짊어져야 할 짐의 무게가 있고 나눌 수 없다. 우리는 각자의 짐을 지고 인생의 길을 가고 있다. 친구들끼리 나눌 수 있는 것은 짐이 아니라 외로움이다. 혼자 그 긴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짐을 각자 지고 함께 가는 것이다. 외로움은 함께 있으면 훨씬 낫다.
 
(147) 즐거움 역시 함께 나눌 사람이 있어야 한다. 즐거움은 그래야 커진다. 즐거움에는 무게가 없다. 그것은 깃털 같아서 하늘을 날 수 있다.
 
(148) 따질 것도 계산할 것도 없다. 마음이 가는 대로 함께 가는 것이 친구들이다. 친구란 함께 어울림이다. 서로에 대한 애정 없이는 그 어울림이 빛날 수 없다.
 
6장 _ 자연
 
(154) 봄은 햇빛과 바람이다. 그것처럼 언 땅을 녹이는 데 효과적인 것은 없다. 땅은 빨래와 같다. 언 것을 해동하여 물이 질펀해지면 바람으로 날려버려야 한다. 그러면 따뜻하고 약간 촉촉하거나 고슬고슬한 봄 땅이 만들어진다. 걸으면 발바닥에 봄 땅의 부드러운 울렁거림이 느껴진다. 이내 물이 오르고 대지는 온 몸을 열어 속에 있는 것들이 나오게 해준다. 싹은 그 때 비로소 밖으로 나올 수 있다.
 
(157) 자연이 우리를 설득하는 방식은 늘 같다. 먼저 우리를 감탄하게 하여 혼을 빼놓는다. 상상 너머의 매력으로 우리를 사로잡은 다음 아주 '자연'스럽게 마음을 굴복시키고 무릎 꿇게 한 후 신의 음성을 불어넣는다. 이 아름다움이 보이느냐? 너의 초라함이 보이느냐? 네 마음 속에 서식하는 그 벌레의 꿈틀거림이 느껴지느냐? 어째서 그런 짓을 하였느냐? 이 어리석은 것아. 우매한 미망의 어둠에서 나오 가고 싶은 길을 가거라. 숟가락으로 먹은 모든 것은 똥이 아니더냐. 마흔이 넘게 살아온 긴 세월이 참으로 잠깐이고 꿈이 아니더냐. 다행히 아직 꿈이 끝난 것은 아니니 살고 싶은 대로 살아라. 죽음이 널 데려갈 때 좋은 꿈이었다고 웃을 수 있도록 하여라.
 
(158~159) 잠자기 전 우리가 떠났던 세상으로 똑같은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절망하고 또 안도한다. 한잠을 자고 일어나면 커지는 누에처럼, 우리가 젖먹이 어린아이였을 때처럼 한잠을 자고 날 때마다 조금 더 커지고 조금 더 현명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가끔 느닷없는 통찰력이 번개같이 머리를 후려쳐 무언가를 깨닫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늘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지루한 일이다.
 
(159) 왜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은 어떤 것도 쉽지 않다.
 
(160) 우리가 왜 변화해야 하느냐고? 그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작은 세포가 아이가 되고 젊은이가 되고 장년이 되고 노인이 되고, 그리고 죽는 것이 삶이다. 순수한 아이의 생각이 야망으로 가득한 젊은이의 생각이 되고, 이내 세상의 한계에 지쳐버린 장년이 되고, 노회한 노인이 되고, 이윽고 사라지는 것이 인생이다. 변화 자체가 우리의 일상이고 삶이다. 생명이 주어진 순간 삶은 시작되고, 삶이 주어진 순간 죽음의 시계도 카운트되기 시작한다. 왜 살아야 하는가? 삶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왜 변화해야 하는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다.
 
(163) 곽박의 시에 "숲에는 움직이지 않는 나무가 없고, 냇물에는 멈춰선 물결이 없다."라고 했는데, 이보다 더 적절한 변화에 대한 묘사는 찾기 어렵다. "밖으로 자연의 조화를 본받고, 안으로 마음의 근원을 체득해야 한다(外師造化 中得心源)."는 것은 두고두고 마음에 담아둘 충고이다.
 
(164)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삶을 시작하지 못하는 바보이기도 하다. 모든 꽃은 '그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스스로 축복하며' 피어난다.
 
(164~165) 기쁨은 도처에 있고 '늘 활동중'이다. 그들에게 좋은 일이면 나에게도 좋은 일이다. 참새에게 좋은 일이면 나에게도 좋은 일이다. 풀들에게 좋은 일이면 나에게도 좋은 일이다. 빙겐의 성녀 힐데가르트가 "나는 스며든다. 초록빛 풀밭에, 꽃들에게, 그리고 살아 있는 물살에. 나는 깃든다, 죽지 않는 모든 것에, 나는 곧 생명이므로."라고 말할 때, 그녀는 바로 나였다.
 
(167) 나는 다른 사람을 찾아다니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다. 나에게는 발이 없다. 나는 한 곳에 서있다. 나는 나무와 같다. 스스로의 그늘을 만들고 열매를 키워 사람들이 나를 발견하고 찾아 오게 하는 것이 훨씬 나다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나무를 통해 자연 속에서 하나의 자연이 된, 나에 대한 가장 유사한 상징성을 찾아낼 수 있었다.
 
(167~172) 나는 나무다. 스스로 하늘을 향해 커가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땅이지만 가야 할 곳은 하늘이다. … 나의 내면은 땅과 같다. 그것은 알 수 없는 두렵고 위대한 힘으로 가득 차 있다. … 나무는 또한 해마다 새로운 자신을 분만시킨다. 수없이 자신을 탄생시킨다. 사는 법은 죽는 법에 있다. … 낙엽은 나무의 지혜다. 혹독한 겨울에 살아남기 위한 창조적 해결책은 바로 버리는 것이다. … 나도 죽어야 한다. 적어도 일년에 한 번은 죽어야 한다. … 나무는 한 곳에 서서 점점 더 멀리 본다. 발이 없는 대신 세상을 떠돌 수 있는 방법들을 고안해낸다. …
 
(173) 나는 나무와 같은 사람이다. 나는 날마다 내게 귀화한 생각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과육에 담아 수천 개씩, 수만 개씩, 수백만 개씩 퍼트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사람들은 그 씨앗을 마음 속에서 키우면서 '자신의 생각으로 귀화한 생각'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그것이 내가 도처에서 번영할 수 있는 전략이다.
 
인간의 진보는 '사고의 혁명(thought revolution)'에 의해 이루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변화에 대한 생각들'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날려보내는 일이다.
 
(174) 스스로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은 좋은 씨앗을 만들어내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하루를 보내도록 해야한다. 날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시간이 쓰일 곳을 마음대로 배분하며, 그 일의 가치가 빛나는 일을 하고, 스스로의 삶을 즐겨라. 삶 자체가 유혹이 되게 하라.
 
로댕의 말을 잊지 말라. '사랑하고 감동하고 전율하면' 그 삶은 매혹적인 것이다. 날마다 그렇게 살아라. 하루하루를 잘 살아야 좋은 인생이다. 그러므로 하루를 바꾸지 못하면 변화에 성공할 수 없다.
 
(175) 사람의 마음 속에서 싹이 나고 푸른 잎을 단 아름다운 줄기로 자라나도록 늘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라. 그들을 감동시키고, 그들이 행동할 수 있게 하며, 그들이 실천하게 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이 좋아하는 모습과 색깔과 맛을 담은 향기로운 과육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의 유행에 따르지 말라. 자연의 맛은 독특하고 차별적이다. 자신만의 맛과 향기를 가진 품종을 만들어내라.
 
7장 _ 건강
 
(182) 거울을 보면 어느새 중년 남자가 들어 있다. 앞니가 빠진 작은아이, 개구쟁이 소년, 세상의 모든 일을 가능한 상상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던 청년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어느새 거울 속에서 나이 든 남자의 얼굴을 만나게 된다. 젊었을 때의 상상의 대부분은 흔적없이 날아가고 겨우 몇 개만 우연한 현실이 되어 있다.
 
(183) 아리스토텔레스를 보면 제자가 스승을 어떻게 빛나게 하는지 알 수 있다. 영원히 스승의 빛에 가려진 제자는 결국 스승을 욕보이게 한다. 뒷물이 앞물을 뛰어넘으려고 해야 비로소 강물이 힘차게 흐를 수 있다. 제자가 잘나야 스승이 위대해진다.
 
(184) "섬유질이 형성되고 모든 기관에 생명이 부여되는 순간에 나타난 최초의 맥박 그 자체가 죽음의 근원이디. 신체 조직들이 채 형성되기도 전에 이미 그 조직들이 들어가 묻힐 무덤이 마련되는 것이다." - A. 팰그레이브, 상인과 수도사
 
(184) 죽음은 생명과 함께 시작된다. 또한 생명은 죽음과 함께 다시 시작한다.
 
(186) "우리 모두에게 죽음이 무르익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으로써 또 다른 성장을 이루어야 할 바로 그 때가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다 쓴 후에 남의 것을 탐할 수는 없겠지요." - 제퍼슨이 존 애덤스에게 쓴 편지
 
(188) 문명의 본질은 오랫동안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사냥꾼의 습성과 겨우 최근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사회적 본능 사이의 갈등인 것이다.
 
(189) 갈등은 인간의 숙명이다. '멋대로 하지 말라.'고 하는 인간의 재갈, 즉 문명은 기본적으로 다섯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부모는 최초로 만나는 문명이다. 거역하면 패륜이 된다. 학교와 종교는 그 다음에 만나는 문명이다. 사회적 가치관을 만들어 정신을 지배하게 된다. 여론, 그리고 법은 문명이 정한 행동을 넘어서는 것을 제약하는 통제선이다. 이 선은 대체로 굵고 선명하기도 하지만 군데군데 모호한 구명이 뜷려 있기도 하고 간혹 희미한 곳도 있다. 인생은 그 속에서 이루어진다.
 
(191) 인생 100년도 한숨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결국 노령 때문에 죽는다. 우리의 몸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마모되고, 결국은 함몰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 결국 시작한 생명은 그 시작부터 끝을 포함하고 있다. 죽음은 모든 생명이 시작과 더불어 반드시 치러야 할 빚이다.
 
(191) 생명을 길게 연장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순간 순간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199) 마흔은 죽음이 삶과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영적인 나이의 시작이다.
 
(200) '죽음이 명함을 남겨놓고' 간 다음 적절한 때, 사랑하는 사람들의 품에서, 참을 수 있을 만한 짧은 통증 속에서, 평화로운 죽음을 맞는 것이 좋은 일이다.
 
(200) 나이가 든다는 것은 천천히 삶의 두루마리를 펼치는 일이다.
 
(201) 아름다운 봄날은 빨리 지나간다. 모두 그리워하고 섭섭해 한다. 그러나 가을 또한 곱게 온다. 나이 먹음은 가을을 즐기는 것이다. 그 또한 아름답지 않은가! 릴케처럼 말한다면 아마 이렇게 될 것이다. "신이여, 우리 각자에게 합당한 삶을 주소서.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그 삶에 걸맞은 '합당한 죽음'을 주소서."
 
8장 _ 길에서
 
(206) 나는 지금 과거의 한 사건과 미래의 한 사건 사이에 있다. 하나는 과거에 일어난 일이고 하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이다. 물론 미래의 일은 반드시 일어날지 아닐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이 매우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는 추억이고 하나는 꿈이다. 추억과 꿈은 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다. 마흔 아홉이 되어 지나온 삶을 되새겨보니 실제로 일어난 것과 상상 속에 존재했던 것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모두 한 줌의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206~207) 30년 또는 40년을 더 산들 그때 돌아보면 역시 인생은 한 줌의 꿈에 불과할 것이다. 때로는 즐거움으로, 때로는 막막한 슬픔으로 남았던 그 사건들이 다 지나가 흩어진 꽃잎 같은 꿈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직 살 시간이 남아 있을 때는 과거의 일들이 추억으로, 현실과 이어지는 원인으로 남아 있다고 인식하겠지만, 마지막 숨은 이런 모든 것 역시 한 순간에 일어난 찰나의 것들임을 증명해줄 것이다. 원인도 결과도 없이, 느닷없는 장면들의 중첩으로 떠오를 것이다.
 
(207) 우리가 꿈꾸는 미래의 모든 일 역시 과거만큼 분명한 꿈이다. 현실이 아니기 대문에 비현실이 아니라 또 다른 현실일 뿐이다. 나는 꿈을 또 다른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 내 말은 미래의 꿈 그 자체가 믿음을 통해 추억만큼 분명한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과거에 갇히는 것만큼 미래에 갇힌다. 추억으로서의 역사와 꿈이라는 소설은 둘 다 인생에 중요한 것이다.
 
(208~209) 나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과거 시제로 쓰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 일을 과거시제로 쓰는 순간 내게 이미 일어난 일이 된다. 미래를 과거로 인식하는 것은 정신적 작업의 하나이다. 나는 나를 '정신적 여행자'라는 개념으로 표현하는 것을 즐긴다. 그것은 날개 같은 것이다. 시간이라는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활공한다. 모든 것이 꿈으로 판명되는 마지막 날에 느끼는 그 아득한 자유를 지금부터 즐기지 못하는 것을 아쉽게 생각했다. 지금 이 책을 쓰고 있는 이유도 과거에 갇혀 있는 나를 미래의 빛을 따라 아름답고 화려하며 자유로운 이야기 속으로 데려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결말, 그것은 내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졌다. 그것이 무엇이든 꿈꾸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꿈꾸지 못한 것들만이 내 인생이 아니다. 꿈꾸지 못한 것 가운데 더 아름다운 인생이 있을까봐 걱정이 된다.
 
언젠가 잠을 자다가 학교에 가야 하나 보다 하고 소스라쳐 깨어났는데 아직 식구들이 다 잠들기도 전인 한밤중임을 알았을 때, 그리하여 달콤한 잠 속에 빠져들 수 있는 시간이 넉넉히 남아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주어진 시간이 다 지나간 것 같았는데 많은 시간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바로 그 때의 아늑한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은 것이다.
 
(210) 나는 내가 바라는 그 꿈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될 것이다. 내가 두려워 하는 것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회의 때문이 아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 내가 두려워 하는 것은 지금 해야 할 일을 놓치는 것이다.
 
이런 생각들이 내게 지금 무엇인가를 하게 한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쓰고 더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 내게 한다.
 
(210~211) 추억과 꿈은 같은 것이다. 하나는 일어났다고 믿는 꿈이고, 다른 하나는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꿈이다. 하나는 이미 깨어난 꿈이고, 다른 하나는 앞으로 꿀 꿈이다. 둘 다 지금이라는 현실을 속박한다. 또는 지금을 구원해준다. 때때로 그 역할을 바꾸기도 한다.
 
(211) 꿈은 시간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역사적이다.
 
(211) 욕망은 꿈을 만들고 꿈은 믿음에 의해 현실적 개념이 된다. 미래를 현실로 인식하는 능력은 정신적 여행자들이 가지는 힘이다. 그들은 상상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상상과 더불어 그 속에서 산다. 그것이 생활의 일부이기도 하다. … 글쓰기는 꿈을 현실로 데려오는 나의 방식이다. 나에게 책이란 꿈과 현실을 잇는 통로이다.
 
(212) 꿈은 또한 목적지다. '지금'이란 늘 그곳에 가는 길 위의 어느 지점이다. 정신적 여행자에게 현재란 과거(추억)을 떠나 미래(꿈)으로 가는 길 위의 어는 곳이다.
 
(212)
'내 속에 들어앉은 그들
그들 속에 섞인 나를 증오하다가 다시 그리워하며,
그러다가 아예 이쯤에서 길을 잃어야겠다.
아마도 이곳이 내가 살고 싶은 땅일 것이다.' - 신경림, 내가 살고 싶은 땅에 가서
 
(213) 나는 '그들과 함께 살고 있으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을 통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증오와 그리움 사이에, 길 있음과 길 없음 사이에 나는 있다.
 
(213) '길을 나서자마자 길이 천 갈래 만 갈래니, 만약 자기 자신에게 주재(主宰)하는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올바른 길을 갈 수 있겠는가? - 주자, 선인들의 공부법
 
(213) '우리는 우리 마음 속에 들어와 있는 길을 가게 된다. 갈림길을 맞을 때마다 우리는 선택한다. 우리 마음 속에 그 드물게 굳고 정한 갈매나무 한 그루를 생각하며 자신의 처음 마음을 따르는 것이다.' - 시인 백석
 
(213) '내 앞에 길이 열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네. 그 대신 내 뒤에서 수많은 길이 닫히는 것을 보았네. 이 역시 삶이 나를 미리 준비된 길로 인도하는 방법이라네.' - 파커 파머, 루스의 이야기
 
(214) 지상의 모든 갈림길을 잊고, 그 속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고통에서 벗어나 달로 가고 싶었다. 그 모든 갈림길 가운데 하나가 아닌, 전혀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선택을 넘어 그저 내 앞에 굽이굽이 펼쳐진 길을 따라가다 보면 내 길을 걷고 있다는 축복에 싸이고 싶었다. 나는 달빛을 따라 아름다운 꿈길로 접어들고 싶었다.
 
그때 나는 한 마리의 늑대였다. 절벽의 끝에 서서 달을 보고 울부짖는 울음소리였다. 대상이 없는 분노 때문에 그저 달을 보고 길게 우는 울음소리 속의 외로움이었다. 달에 가고 싶었는데 그것은 차가운 얼굴로 멀리 떠 있었다. 그곳에 갈 방법을 알 수 없었다. 달에 대한 그리움은 그저 울부짖음이었다. 외침은 그래서 가슴을 거쳐 목구멍으로 오르는 동안 알 수 없는 울부짖음을 바뀌었다. 표독스러운 짖음도, 대상의 포획하기 위한 적의에 찬 침묵도, 우렁찬 포효도 아니었다. 거저 길게 뱉어내는 늑대의 울음이었다. 그것은 슬픔과 가장 닮아 있었다.
 
(215) 그러나 나는 그 곳에 도착하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정 자체로 훌륭한 여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길 위에서 끝나는 여행도 위대한 여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길 위에서 죽은 여행자처럼 완벽한 여행자가 어디 있겠는가!
 
(215) 40대의 10년을 보내며 나는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되고 싶었다. 그 곡선의 변곡점 몇 개를 찾아내었으니 만족스럽다. 나는 갈수록 산다는 것이 꿈처럼 여겨진다. 꿈의 물결을 따라 넘실대며 흘러간다. 깨고 나면 아무런 기억도 없듯이, 지나간 세월은 시들어 사라진다. 간혹 무너진 건물의 특별한 부분이 잔해로 남아 쓸쓸함을 더하는 것처럼 앞뒤 연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영상들이 지나간 삶의 유물들이다. 나는 그것들을 본다. 과거 역시 그 잔해 속에서 새로 복원되어야 비로소 원형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미래처럼 모호한 것이기도 하다.
 
(216)
'걸어온 것에도 길은 없고
걸어야 할 것에도 길은 없다.
그렇지만
걸어온 것과 걸어야 할 것 없이는
길 또한 없다.' - 니가르주나
 
(216)
'나의 영혼이여,
그대의 항해는 그대가 태어난 땅이니라.' - 니코스 카잔차키스, <오디세이아>
 
(216) 항해 자체가 인생이다. 그것이야말로 비옥한 정신적 토양이다. 사는 동안 생명을 모두 소모하므로 죽음이 찾아왔을 때 완전히 비어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죽음은 나로부터 아무것도 빼앗아갈 수 없으리라.
 
(217) 그러나 정말 내 인생은 그 책들이 아니라 그 책에서 표현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내 하루하루였다. 나의 하루들은 책으로 표현되기도 했지만, 대개는 물처럼 흘러갔다. 먹고 마시고 즐기고 생각하고 낭비되면서 그렇게 지나갔다. 지나간 것들 속에 내 인생이 담겨 있다. 나는 그 위대한 순간들의 주인이며, 또한 그 초라한 순간들의 책임자였다. 이것이 정말 하루하루의 진짜 인생이었다.
 
(218) 먹고 나면 다 똥이 되는 것이지만 아름다운 식탁을 차리기 위해 정성을 쏟는다.
 
(218) 이제는 나를 다른 사람과 바꾸고 싶지 않다. 수십 년을 다시 길들이며 살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주어진 나를 즐기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219) 깨달음의 내용은 없고 그저 깨달음이 중요하다는 깨달음 정도가 50년을 산 나의 깨달음이다. … 머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도 있다. 깨달음이 없으면 인생의 반전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219) 여든이 되어 물어보자. '삶이 나에게 요구한 것', 즉 내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었을까? 망막에서 빛이 사라질 때, 내 삶의 순간들이 필름처럼 넘어갈 때, 나는 그 곳에서 사소한 일상을 보게 될 것이다. 아이가 어렸을 때, 어떤 찰나의 눈빛, 그녀와 남긴 어떤 대화의 뉘앙스, 그리고 어떤 웃음, 그리고 또 어떤 분노, 아내의 손, 친구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젊었을 때의 어떤 고뇌, 창문으로 보이는 한 그루의 나무, 그 뒤의 하늘 … 바로 이런 것들이 내 삶이었다.
 
(220) '내가 다시 살 수 있다면 많은 착오를 범하고 싶다. 지금 살았던 것보다 더 어리석게 행동하고 싶다. 사실 인생을 살며 심각한 일이 어디 그렇게 많겠는가? 그러니 더 미친 척 행동하고 싶다. 더 많은 기회를 가질 것이며, 더 많은 여행을 할 것이며, 더 많은 산을 오르고 더 많은 강을 건널 것이다. 또 아이스크림도 원 없이 먹을 것이다. 그 대신 콩은 조금 덜 먹을 것이다. 오! 나 자신만의 시간이 있었더라면! 그래서 난 나에게 속한 더 많은 시간을 경험해보고 싶다. 내가 다시 살 수만 있다면,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맨발로 다니고 싶다. 회전목마를 더 많이 타고, 더 많은 일출을 보고, 더 많은 아이들과 놀 것이다. 내가 다시 한 번 살 수만 있다면.' - 여든 다섯살 된 어느 병든 할머니
 
(221) 맑은 날 들판을 산책하듯 사는 사람은 행복하다. 어려운 일을 당하여 그 일의 밝은 면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과거 속에서 아름다운 순간을 늘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과일과 채소, 그리고 여러 고물이 섞인 밥을 먹고 하루에 30분씩 운동하고 한 시간씩 햇빛 쪼일 수 있다며 행복하다. 무엇인가를 할 때 다른 것을 계획하지 않고, 어떤 것을 계획할 때 다른 행위를 하지 않으면 순간에 몰입할 수 있다. 그리고 몰입된 순간 순간을 살 수 있으면 행복하다.
 
다른 사람에 비추어 자신을 알려고 하지 않으면 행복하다. 다른 사람이란 결국 왜곡된 거울에 불과하다. 늘 자신에게 비추어 자신을 발견하려 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일 년에 한 번쯤 흔들의자에 앉아 마치 단 산 것처럼 인생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다. 나는 어떤 이루고 싶었는가,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는가? 이 질문의 답이 찾아지면 인생은 목표를 가지게 될 것이고, 결국 그 길을 갈 것이니 행복해질 수 밖에 없다.
 
(222~223) 바람이 조금 있는 아름다운 날에는 밝은 햇빛 속을 반바지 차림에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산책하고, 우울한 날에는 집 안에서 그 기분에 어울리는 책 한 권을 볼 수 있다면 인생은 이미 행복하다. 이 때 돈이란 밥 먹고 난 후 아이스크림 한 개, 또는 시원한 맥주 한 캔 마실 만큼 있으면 되는 것 아닐까? 인생이란 그렇게 간단한 것 아닐까?
 
아, 내가 세상에 남기고 사는 것은 세월이 지나면 희미해질 내 삶의 발자국이고, 내가 가지고 가는 것은 꿈과 추억이다. 누구에게나 맞는 객관적인 삶의 의미란 없다. 나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삶, 이 유일무이한 구체성이 바로 내 삶이고, 따라서 그 의미 역시 나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것이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 안에서 죽고,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 속에서 죽는다.' - 플루타르크
 
길은 없다. 이것이 길이다. 하루가 길이다. 하루가 늘 새로운 여정이다. 오늘 새롭게 주어진 하루가 또 하나의 멋진 세상이 되지 못한다면 어디에 행복이 있을 수 있겠는가? 변화란 불행한 자의 행복 찾기 아니겠는가.
 
9장 _ 집, 공간
 
(226) 오늘은 참 대단한 날이었다. 도랑에 빠져 죽을 뻔했고, 커다란 상처를 입고 돌아왔다. 그러나 내 과거를 죽여 묻은 위대한 날이기도 하다. 술을 한잔하고 싶은 날이다. 아주 독한 것으로, 아주 큰 잔으로.
 
(231) 서재는 꿈을 꾸기 좋은 곳이다. 그 속에서 동서고금의 많은 이야기를 읽고 싶다. 이야기 속에는 생각해야 될 것들이 많다. 그래서 크지는 않지만 아름답고 차분한 서재 하나를 가지고 싶다.
 
(232) 그리고 아주 작은 골방 하나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무 바닥에 전부 황토로 만든 방이면 좋겠다. 작은 나무 책상 하나에 나무 의자 하나, 그리고 바닥에 놓은 꽤 큰 방석 하나가 이 방을 채운 소품의 전부이다. 나는 이 방을 '삶의 방'이라고 부르고 싶다.
 
살다보면 관성을 이기지 못하는 때도 있다. 이 방은 어제와 결별하는 방이며 특별한 오늘을 부여받는 곳이다. 매일 이 방에 들어와 하루를 시작하고 싶다.
 
(237) 어머니 나무에서 나와 가지 위에 핀 꽃들은 모두 나무의 자식들이다. 끙 하고 힘을 줄 때마다 한 놈씩 나와 가지 끝에 달려 있다. 아름다움으로, 꽃은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참는다. 참다 참다 참지 못하고 터지는 것이 바로 꽃이다. 민감한 시은들은 그래서 꽃 터지는 밤에는 잠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242) 나는 마흔이 넘어 내가 키우려고 마음먹은 작물을 선택하게 되었다. 여전히 다른 작물들에 대해 미련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의 작물을 선택했다. 해야 할 일은 잡초를 뽑고, 자양분을 제공하며, 훌륭한 밭을 제공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의 욕망의 자랄 수 있도록, 하나의 욕망… 가장 나다운 내가 되는 것, 그저 생긴 대로 자라 가장 아름다운 내가 되는 것, 내가 만일 소나무라면 아름다운 소나무로 자라는 것. 만일 느티나무라면 아주 정정한 느티나무가 되는 것. 이것이 내 욕망이었다.
 
(243) 어떤 경우든 식물을 한 번은 전성기에 이르는 것 같다. 일찍 시작한 놈은 봄, 여름에 빛을 내고, 조금 늦게 시작한 놈은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남아 멋을 부린다. 다 제 때가 있다.
 
(244) 멀리 두고 그리는 마음은 그리움이고 가까이 두고 만질 수 있는 것은 행복이다. 그리워하고 또 볼 수 있으니 이처럼 다행일 수 없다.
 
(247) 목련은 아름답지만 지고 난 다음 그 무거운 주검을 주체하기 어려운 것에 비하면, 이 작은 꽃은 살아 있을 때처럼 갈 때도 가볍기 그지없다.
 
(253)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루를 지내는 일상의 작은 공간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유목의 세계 속의 고향이고 내가 뿌리 내린 비옥한 공간이다.
 
(254~255) 나는 하루를 숨쉴 수 있는 작지만 아름다운 공간을 원해왔다. 나무가 있고 꽃이 있고 창문을 열면 신선하고 상쾌한 바람이 밀려드는 그런 공간을 원해왔다. 커다란 창이 있고 그 창 너머 하늘이 보이는 공간을 원해왔다. 그리고 마흔여덟에 북한산 아름다운 언덕 위에 내가 바라던 공간으로 이사 올 수 있었다. 나는 운이 좋았다.
 
10장 _ 학습
 
(259)
책을 통해서만 사상을 더듬는 일당들.
책을 짓눌러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일당들.
머리를 종이 위에 처박고 있는 일당들.
부디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우시라.
그리하여 '진리의 노예'가 되지 말고 '지혜의 친구'가 되시라. - 니체 + &
 
(259) 1인 기업가가 되었을 때, 나는 하늘을 나는 새였다. 하늘은 파랗고 아름다웠다. 비로소 나는 풀려났다. 위탁한 권리를 되찾았고, 무진장한 시간을 돌려받았다. 통쾌한 일이었다.
 
(260) "두려움은 곧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고 무엇이랴." - 칼릴 지브란
 
(263) 사라지는 것 위에 성공을 쌓아올려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나의 생각이다.
 
(263) 학습은 성공을 오랫동안 빛나게 해준다. 나는 학습이 의무가 되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다. … 의무는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다. 의무란 재미없는 것이다. 의무감이란 일상화되는 것이고, 지겨운 것이며, 반복되는 것이고, 아무런 생명도 살 수 없는 무덤이기 때문이다.
 
(264) 나는 어느 책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와 느낌과 생각을 내 일상 속에서 매일 조금씩 찾아내고 표현해보려고 했다. 그것은 늘 살아 있다는 느낌을 선사했다. 나는 놀이가 가진 위대한 즐거움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논다는 것은 순수하며 아무런 이해를 따지지 않는다. 경제적 계산을 넘어 빠져들게 한다.
 
(265) 심심함이야말로 모든 창조적 발상의 원천이었다.
 
(265) 니체는 '노동을 최고의 경찰'이라고 말했다. 노동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억제하고, 열망을 줄이며, 독립의 욕망을 피하는 현명한 자제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사회는 노동을 통해 안전해지곤 했다. 우리는 먹기 위해 일하고 일하다가 죽는다. 한 번도 살기 위해 일을 버린 적이 없다. 놀기 위해 산 적도 없다. 그래서 살기 위해 산 적이 없는 것이다.
 
(267) 존재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268) 쓰다 보면 묘한 곳에 이르게 된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곳으로, 예기치 않았던 모습으로 다가든다. 그러면 신이 난다. 글은 글에 연하여 새로운 세계로, 새로운 언어로 파고든다. 나는 이 방법을 즐긴다. 다소 목적지가 불분명한 여정, 가다가 언제고 목적지가 바뀔 수도 있는 유연하고 자유로운 여행… 난 이런 여행이 좋다. 여행은 곧 자유인데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여행에서조차 얽매이는 것은 불쾌한 일이다.
 
미래는 지도에 그려져 있지 않은 세계다.
 
(270) 나 역시 내가 읽은 책이고, 그들이 생각한 생각이며, 그들이 겪은 경험이다. 내 속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의 느낌과 생각과 경험이 살아 숨쉬고 있다. 내가 그들이고 그들이 나이다.
 
(271) 학습의 핵심은 질문하는 법을 배우는 것, 답에 접근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답은 이 탐험의 끝에 나타나는 보물이다.
 
(273) 단칼에 내 심장을 찌르지 못하는 자들은 나와 인연이 없는 것이다. 언젠가 내가 다시 그들의 책을 펼쳤을 때 운명처럼 심장을 찔리게 되면 그때가 그들과 다시 만나는 시간이다.
 
(273) 나는 살고 싶다. 삶만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나 역시 내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하다. 삶을 사랑하는 것은 건강한 변모의 예술이다. 학습은 지식을 보유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획득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늘 버리고 늘 떠나는 것이기도 하다.
 
(273) 나는 배움이란, 이해와 인식으로부터 시작할지 모르지만, 그 너머에 있는 다른 차원의 무엇인가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을 습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274) 학습은 어느 순간 이질적인 삶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열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 배움은 알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던 것을 알게 되고 가슴에 안는 것이다. 낯선 소리, 낯선 얼굴, 낯선 삶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곧 학습의 즐거움이다.
 
(274) '우리가 결국 한 작품 속에서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한 인간의 삶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가능성' - 에리히 아우어바흐
 
(275) 깨달음을 뜻하는 그리스어 '알레테이야(aletheia)'의 어원은 '촛불을 끈다'라는 뜻이다.
 
(276) 망연히 어둠 속에 있던 덕산은 어둠 속에서 찬연히 빛나는 별빛을 보게 된다. 그리고 깨우친다. 이성의 작은 촛불을 끄지 않고는 대우주의 별빛을 볼 수 없다. 가까운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고 있듯이 작은 지식은 늘 큰 지혜를 가리고 있다.
 
(276) "어둠이 가장 짙을 때 깨달음의 길이 열린다(玄之又去 衆妙之門)." - 노자
 
(277) "허물을 벗을 줄 모르는 뱀은 죽어버린다. 생각을 바꿀 수 없도록 방해하는 인간의 정신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정신들은 이미 정신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279) "니체의 뒤를 덮쳐 사생아를 만들어내려고 하니까, 어느새 니체가 자신을 덮치더라." - 질 들뢰즈
 
(279) 그래서 내 속에 여러 명이 있는 것이고, 그들 속에 내가 있는 것이다. 삶은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접속되고 연결되며 내자화되고 확장되는 것이다.
 
(279)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은 니체를 주목할 수 밖에 없다. 그는 변신의 힘이며, 가장 극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그는 '이 곳에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라는 단호한 유혹에 따라 늘 '떠나야 할 곳은 알지만 도착할 곳을 모르는 배'를 타고 있었다.
 
(280) 그는 '다이너마이트'였으며, '광대'였으며, '모든 금지된 곳을 찾아나서는' 유목민이었으며, 외부인이었고, 방랑자였다. 늘 '떠나는 사람이었으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을 잃어버리고 부정함으로써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었다.
 
(280) 니체는 그러므로 '미래의 아들'이었다. '미래란 과거와 현재에 이어지는 다음 시간이 아니라, 이미 와서 우리 곁에 있지만 감지되지 않거나 오해 받고 있는 시간'이다.
 
(281) '인디언이 되었으면! 질주하는 말에 잽싸게 올라타, 비스듬한 공기를 가르며 진동하는 대지 위에서 거듭거듭 짧게 전율해보았으면, 마침내는 박차를 내던질 때까지, 실은 박차가 없었으니까, 마침내는 고삐를 집어던질 때까지, 실은 고삐가 없었으니까, 그리하여 눈앞에 보이는 땅이라곤 매끈하게 풀이 깍인 광야 뿐일 때까지, 그리하여 말 모가지도 말 대가리도 없이.' - 프란츠 카프카, 인디언이 되려는 소망
 
(281) 삶을 살면서 삶 속에 녹아버렸으면… 탐닉하고 오직 삶이 되어 삶 속에서 노닐 수 있었으면… 조금씩 조금씩 빠져들어 마침내 삶이 되었으면.
 
(282)
20년이 흘렀건만 나는 아직도 길 위에 있다네
내가 허비한 20년,
그렇게 애를 썼건만
내 노력은 매번 전혀 새로운 시작이 되고
매번 전혀 다른 실패였다.
 
그곳에 도달하기 위하여,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가기 위하여,
떠나야 할 곳에서 떠나기 위하여,
황홀함이 없는 곳을 지나야 한다. - T. S. 엘리엇
 
(282~283) 혁명은 늘 하루를 바꿔줌으로써 스스로를 실현한다. … 하루를 바꾸지 못하면 혁명도 없다. 자신만의 하루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자신의 세계를 가질 수 없다. 만일 하루를 춤추듯 보낼 수 있으면 행복한 것이다. 매일 그럴 수 있다면 자신의 행복을 찾은 것이다.
 
(283) '새로운 장르의 일상적 삶을 창조하는 것', 이것이 내가 스스로에게 약속한 실천적 개혁이고 혁명이었다.
 
(285) 청중을 통과한 것들은 살아남는다. 그러나 청중의 반응을 얻지 모산 것들은 새로운 언어로 고쳐지거나 버려진다. 책을 내는 것, 다른 사람에게 강연하는 것은 음악가들의 리사이틀이고 화가의 전시회 같은 역할을 한다. 그 자체로 소중한 학습의 도구와 방편이 된다.
 
(285) 하루는 실험장이다. 실험의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실험장. 실험이 목적 그 자체가 되어버린 실험… 내겐 이것이 하루이다.
 
(286~287) '선비처럼 섬세하고 무사처럼 선이 굵을 것.' ...
 
선비의 섬세함이란 무엇일까? 다른 사람의 눈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섬세하다 할 수 있다. 집에서 키우는 작은 화분의 기분을 읽을 수 있다면 섬세하다 할 수 있다. 햇빛이 환하고 바람 살랑거리는 5월, 깨끗한 옷을 입고 거리로 나온 여자처럼 즐거울 수 있다면 섬세하다 할 수 있다. …
 
무사처럼 선이 굵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마음 속에 이는 두려움에 지지 않으면 선이 굵다고 할 수 있다. 달랑 칼 한 자루를 메고 언제라도 떠날 수 있다면 선이 굵다 할 수 있다.
 
(288~289) 나는 내가 어둠과 빛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도전이란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번 다른 실패를 딛고 나일 수 밖에 없는 길로 운명적으로 들어서는 것을 말한다. 첫번째 도전은 실패를 이기는 것이다. 두번째 도전은 실패를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것이다. 세번째 도전은 매일 실험을 즐기는 것이다. 이때는 이미 실패도 성공도 사라진다. 여행을 즐기는 자는 끝없는 호기심으로 새로운 세계에 탐닉한다. 그들은 춤추듯 즐거운 하루를 보낸다.
 
IP *.60.237.51

프로필 이미지
누이
2007.07.30 00:14:32 *.70.72.121
자네마저 떼어 버릴 려고? 그만들 우시게나, 제발~ ㅎㅎㅎ
프로필 이미지
동생
2007.07.30 08:43:31 *.249.167.156
울다가, 웃다가, 털도 좀 나보고...^^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19) 마흔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2] 時田 김도윤 2007.07.29 1933
971 여행의 기술 (섬세한 여행일지) [2] 산골소년 2007.07.27 2313
970 일주일 만에 흙집짓기 (인간과 자연이 하나되기) [2] 산골소년 2007.07.26 3207
969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공지영) // 고독, 집착, 충동 [5] 다뎀뵤 2007.07.23 2991
968 마흔세살에 다시 시작하다 - 구본형 [4] 최정희 2007.07.24 2307
967 [독서19] 마흔세살에 다시 시작하다 [2] 素田 최영훈 2007.07.23 1688
966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를 읽고 [5] 현운 이희석 2007.07.23 2335
965 (19)마흔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구본형 [7] 校瀞 한정화 2007.07.26 2816
964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평범한 사람의 평범치 않은 위대한 이야기 [5] [1] 송창용 2007.07.23 2257
963 (18) 사람의 성격을 읽는 법 [14] [1] 時田 김도윤 2007.07.23 11380
962 [19] 나 구본형의 변화 이야기(2) [7] 써니 2007.07.23 2290
961 [19] 나 구본형의 변화 이야기 [1] 써니 2007.07.23 1871
960 (19) 나 구본형의 변화 이야기 [3] 박승오 2007.07.23 2069
959 마흔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구본형 file [2] 海瀞 오윤 2007.07.23 2092
958 나, 구본형의 변화 이야기 / 구본형 [4] 好瀞 2007.07.23 1746
957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구본형 [8] 香仁 이은남 2007.07.22 2258
956 [18] 사람의 성격을 읽는 법/ 폴 D.티저와 바버라 배런- 티저 [11] 써니 2007.07.28 8034
955 [리뷰018] 사람의 성격을 읽는 법, 티저 부부 [3] 香山 신종윤 2007.07.17 2460
954 [독서18]사람의 성격을 읽는법/폴D.티져, 바바라 베런-티저 [4] 素田 최영훈 2007.07.17 2669
953 (18) 사람의 성격을 읽는법 - 폴 D. 티저 외 [1] 박승오 2007.07.17 2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