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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2일 15시 07분 등록
■ 저자에 대하여

● 르네 그루세 René Grousset (1885.9.5~1952.9.12)

프랑스의 역사가, 동양학자. 체르느스키 박물관장, 기메 미술관장을 역임했다. 프랑스 동양학의 중요 인물이다.《오리엔트 문명》,《대초원의 제국》등 동양문명, 동양미술 분야에 업적을 남겼다.

원어명 René Grousset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동양학
주요저서 《오리엔트 문명》(4권, 1929∼1930) 《칭기즈 칸》(1944)《대초원의 제국(帝國)》(1938) 《중국사》(1942) 등


“그루쎄의 이 책 『유라시아 유목제국사』는 이제 중앙아시아 분양에서 하나의 고전으로 분명히 평가받게 되었고, 어느 언어로 씌어진 개설서이든 아직도 이 글을 능가하지 못 하고 있다.”

이 책을 번역한 이들(김호동, 유원수, 정재훈)이 옮긴이의 말에서 적은 말이다. 옮긴이들은 모두 유라시아 전문가들이다. 특히 김호동 교수는 고대 중앙아시아 방언까지 연구한 중앙아시아사 분야
의 세계적 권위자다. 옮긴이의 말에는 이런 글도 있다.

“그(르네 그루세)가 이처럼 다양한 주제에 대해 쉬지 않고 저술을 계속했기 때문에 우리는 과연 그가 유라시아의 유목제국에 대해서 얼마나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식견을 가졌겠는가 하는 의구심도 갖게 된다. 더구나 투르크어나 몽골어와 같은 유목민족의 언어에 대해 그가 정통한 것으로 보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본서를 읽기 시작하면 그러한 의구심은 말끔히 사라지고 오히려 이처럼 방대한 지식을 그가 어떻게 수집하고 또 어떻게 이처럼 조리 있고 흥미 있게 설명할 수 있었을까 하는 놀라움을 느끼게 된다.”

이 글은 아마도 중앙아시아 민족들의 언어에 정통한 김호동 교수가 적었을 것이다. 김호동 교수는 르네 그루세의 박식함에 놀라워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얼마나 박식한지 전혀 몰랐다. 칭기즈칸이나 몽골 제국에 관하여는 처음으로 읽어보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르네 그루세의 박식함은 김호동 교수의 말처럼 당시 프랑스의 높은 학문적 수준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마스페로, 발라즈, 폴 펠리오(Paul pelliot), 샤반느(Edouard Chavannes) 같은 탁월한 동양학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르네 그루세 박식함의 또 한 가지 배경이 될 만한 것은 그가 기메 미술관장을 역임했다는 사실이다. 르네 그루세는 1925년 기메미술관 조수로 지내다가 <아시아 신문>에 근무하였다. 이 무렵부터 『오리엔트 문명』(4권, 1929∼1930) 등의 대작들을 집필 ·간행하였다. 이후에 그는 1933년 체르느스키 박물관장, 1944년 기메 미술관장을 역임하였다.

기메미술관은 실업가 E.기메(1836∼1918)가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수집한 고미술품과 종교관계 고문서류를 토대로 설립된 미술관이다. 창립 이후, 많은 중요한 개인수집품들을 기증받았고, 또 동양에서의 프랑스 고고학 조사단의 발굴품을 추가 소장하는 등 내용을 충실하게 했다. 특히 1945년에는 그때까지 루브르미술관 동양부에 속해 있던 작품이 이관되어 질과 양에 있어서 세계 유수의 동양미술관이 되었다.

아마도 르네 그루세는 기메미술관장으로 근무하면서 아시아에 관한 많은 정보를 열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루세는 점점 프랑스에서는 동양학의 중요한 존재가 되었으며, 《칭기즈 칸》(1944)으로 1946년 아카데미 회원에 선출되었다.

그의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분야는 아시아 전역에 이르렀다. 이를 테면 현장 법사와 고구려의 무장 고선지를 연구하기도 했다. 현장 법사는 서유기에 등장하는 삼장법사의 실제 모델로 당나라 때 서역에서 불경을 가지고 와서 전한 고승이다. 고선지는 한국의 칭기즈칸으로 불리는 장군으로 세계의 문명사에 기여한 인물이다. 학계에서는 ‘고선지’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서양 학자로 영국의 오렐 스타인(Aurel Stein, 1862~1943)을 꼽는다고 한다. ‘고선지 연구’에 관한 두 번째 선진국은 프랑스인데, 에두아르 샤반느와 폴 펠리오, 르네 그루세(Rene Grousset) 등이 대표적 고선지 연구가로 꼽힌다고 한다. 이들은 처음에 언급한 탁월한 동양학자들이다. 우리 나라 학계에서도 연구가 초기 단계인 ‘고선지’에 대하여 저 먼 나라의 어느 학자인 르네 그루세가 열심히 연구하였다는 생각을 하니 이채로운 기분이 든다.

[참고]
네이버 백과사전 ‘기메미술관’

■ 내 마음에 들어온 글 귀

[19] “잘치우트 족은 문제없이 쓰러뜨릴 수 있다. 그들에게는 통솔하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전쟁의 지도자, 타고난 조직가, 이것이야말로 보돈차르의 자손이 놀라우리만큼 훌륭하게 보여 준 재능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세계의 정복자’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먼저 알랑이 충고했듯이 몽골 인의 화살을 다발로 엮어 낱낱의 부족을 하나로 뭉치게 할 필요가 있었다.

[29] 이 동족간의 싸움은 적잖이 흥미를 일으킨다. 몽골의 국토를 에워싼 지배권이 과연 오논 강 상류 부족의 것이 될 것인가, 아니면 케룰렌 강 하류 부족의 것이 될 것인가? 그러나 그 문제의 결말은 두 세대 후인 칭기즈칸의 출현을 기다려야 했다.

[32] 암바카이는 죽음에 임하여 용케도 사자를 보내어 선왕 카불의 아들들 중에서도 특히 용맹스런 쿠투라와 자기 자식들에게 유언을 전했다.
“나는 타타르 사람들에게 붙잡혀 있다. 내 본보기를 교훈으로 삼아라. 그로 말미암아 활을 당기는 너희들 손톱이 다 빠져 달아나도록 열 손가락이 모두 닳아 없어지도록 반드시 내 원수를 갚아라!”
암바카이는 숨을 거두기 전에 금나라 황제에 대해서도 가공할 복수가 내려질 것을 예고했다. 풀길 없는 원한은 몽골인의 가슴 속에 엉겨 있었고, 훗날 칭기즈칸과 그의 자식들에게 의하여 저 타타르인의 마지막 피와, 금나라 황제의 마지막 피로 보상받게 된다.

[39] 그는 적의 장수 두 명을 쓰러뜨렸는데, 그것은 타타르 군에 대한 몽골군의 패전 속에서 유일하게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예수가이는 그 자랑스런 승리를 오래도록 되새기려 쓰러뜨린 적장의 하나인 테무친의 이름을 자기 맏아들에게 붙여주었던 것이다.

[48] “당신은 저 세 사나이의 모습을 잘 보셨습니까?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당신 목숨을 노리고 있는 것 같아요. 당신이 살아남기만 한다면 수레위에 앉아있는 여자든 검은 수레 안의 여자든 소원대로 차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고른 여자에게 저의 이름을 지어주시어 저를 생각하시고 커어룬이라 불러주세요. 목숨이 첫째입니다. 자, 어서 가십시오! 달아나세요! 이걸 가지고 저를 생각하며 이 냄새를 맡아 주십시오......”
말을 마치자마자 커어룬은 속내의를 벗어 집어 던졌다. 남편은 말에서 뛰어내려 그것을 움켜잡았다.

[49] 족외혼(族外婚)을 대대의 규율로 삼는 몽골 인은 아내를 맞이하기 위하여 약탈혼의 수단에 의지해야 하는 경우가 너무나 잦았고, 이로 말미암아 부족 간의 분쟁도 수없이 유발되었다. 오논 강 상류의 몽골 족과 메르키트 족 사이에는 여자의 유괴가 쉴 새 없이 되풀이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원한이 전해져서는 끝내는 한쪽의 멸망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50] 칭기즈칸이 몽골에 질서를 세우게 되자 저마다 부족 이외에서 아내를 구해 오던 이족혼(異族婚)의 규율은 유괴의 방법을 쓰지 않더라고 평화적으로 실시되게 된다.

[50] 더없이 정숙한 아내이며 지평선 저 너머로 사라지는 남편을 못내 애석하게 여기고, 개인적인 유품을 넘겨주는 지극히 자연스런 동작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녀는 남편을 분명히 사랑했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미련 없이 단념해버리는 현실적인 여성으로서 남편에 대한 애정으로 자기와 헤어지게 된 것을 위로하며 목숨을 보전하도록 권한다. 그리고 일단 예수가이의 집에 들어와서는 다른 생각 없이 새로운 가정을 맺는다. 불운의 나날이 계속되던 끝에 예수가이가 사라지자 이번에는 남자 못지않게 나서서 일가의 지휘권을 장악한다. 이렇듯 곧은 마음, 왕성한 기력, 정확한 분별력을 지닌 어머니가 없었다면 칭기즈칸의 생애도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51] 성인이 된 후에는 남달리 큰 키, 튼튼한 골격, 넓은 이마, 몽골 인 치고는 긴 수염, 그리고 또 ‘고양이 눈’등 출중한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
[56] 예수가이의 비극적인 죽음, 그 고통과 가족의 앞날을 염려하는 임종 시의 비통한 외침은 훗날 칭기즈칸, 테무친의 전기에 있어서 그 첫 장을 이루고 있다. 거기서 몽골의 시인이 느낀 감동은 오늘날까지도 독자의 가슴을 울린다. 세계의 정복자는 그 얼마나 가혹한 조건 아래서 인생을 배워야만 했던가! 몽골의 숲과 스텝의 야만스런 풍습은 앞에서 보아온 바와 같다. 매복, 배반, 유괴, 살인 등이 횡행하는 사회에서는 사람까지도 야생의 나귀나 사슴처럼 사냥의 대상이 되었다. 대들보와도 같은 아버지를 여읜 아홉 살의 아들 테무친은 그와 같은 강철 같은 사회 속에서 내동댕이쳐진 것이다.

[60] 차라카 노인의 죽음을 앞에 두고 어린 테무친이 흘린 눈물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뜻하지 않은 일이기는 하나 이렇듯 인간다운 애정과 정다움의 발로는 장래의 칭기즈칸이 출중한 인물임을 처음으로 나타낸 것이다.

[61] 커어룬은 모든 아이들을 공평하게 돌보아 주었다. 여기서도 그녀는 훗날 몽골의 시인이 ‘커어룬의 어머니’라 부를 만한 일을 너끈히 해내고 있다. 이 미망인과 일곱 명의 아이들은 유목민의 주인 생활에서 하루아침에 추방자 신세가 되었으며, 오논 강 상류의 가혹한 고장인 숲과 스텝 사이에 버려졌다. 그래도 여장부인 어머니는 기가 꺾이기는커녕 있는 힘을 다하여 시인으로부터 ‘현명한 커어룬’ 이라 불릴 만한 일을 해냈다.

[62] 추방된 일가는 이렇게 목숨을 이어갔다. 그들을 오논 강에 버려둔 씨족의 무리들은 그들이 굶주림과 궁핍에 시달려 죽어 버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 무자비한 지역에서 버림받은 채 과부와 아비 없는 자식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래도 그들은 기어코 살아남았다. 그들 자신이 고대 세계의 강철과 같은 인종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69] 그는 급기야 사로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타이치우트 족의 족장 달그카이 키릴루크는 테무친을 처형하지 않았다. 예수가이의 추억을 기리는 한 가닥 양심이 작용한 것이리라. 그가 훗날 털어놓은 바에 의하면 그도 테무친의 처형을 생각했으나 무엇인지 모르게 거역할 수 없는 힘에 눌렸다고 한다.

[79] “서로 언제까지나 신뢰를 굳게 지키도록 하여라. 피차 무례한 언사로 해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과연 이 우정은 두 영웅의 목숨이 이어지는 한 계속된다.

[79] 그처럼 평범한 첫걸음. 스텝의 젊은이라면 누구에게서나 일어날법한 일로부터 세계의 정복자가 될 사람의 행적은 시작되었다. 잘못하면 목숨을 잃거나 잘 돼 봐야 종신 금고의 신세를 면치 못할 모험, 그것을 그는 용기와 침착성으로 극복해 낸다. 그리고 말을 도둑맞았지만 그는 결단력과 의지의 힘으로 그것을 되찾는다. 아무튼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것은 그가 자기와 접한 사람들에게 끼친 인격과 매력이라 할 것이다. 그는 아주 젊어서부터 늠름한 인격과 이를 뒷받침하는 감화력을 지니고 있었다.

[80] 지금의 보올추도 처음 만날 때부터 테무친에게 자기 일신을 바쳤고 언제까지나 운명을 함께 하려 든다. 그 역시 ‘위대한 매력으로 빛나는 눈의 광휘’를 거스르지 못했던 것이다.

[81] 이 서사시에서는 또 신부 보르테가 큰 역할을 했다. 훗날 칭기즈칸에게 이 아내는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몽골 여성으로서 불가결의 조건인 건장한 아들 4 형제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남편을 위해서도 분별력 있는 훌륭한 조언자가 된다.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일을 앞두고 칭기즈칸이 선택을 망설일 때 보르테의 의견에 따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더욱이 그 의견은 선견지명이 있고 단호한 것이었다.

[82]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는 것은 보르테에서 난 자식들뿐이었다. 보르테만이 모든 사람을 젖혀 두고 중히 여겨졌다. 이 아내에 대한 남편의 경의는 아내가 메르키트 족에게 유괴되어 몇 개월 후 임신한 몸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변함이 없었다....... 이 애처로운 상처를 칭기즈칸은 굳이 들추어내려 하지 않았다. 보르테는 마침내 대단히 존경받는 ‘왕후’로서 이 정복자의 기적적 서사시와도 같은 승리를 함께한다.

[83] 그 케레이트 왕 앞에 나오자 테무친은 처음의 말 한마디로 옛날의 유대를 다시 굳혔다. “그 옛날 귀하께서는 저의 아버님과 안다(의형제)의 결연을 하셨습니다. 귀하는 이제 저의 아버님이십니다.” 테무친은 자기 성의의 표지로 귀중한 선물을 바쳤다. 처가에서 결혼 선물로 받은 지 얼마 안 되는 그 검은 담비 가죽이었다. 토그릴은 최상급의 경의 나타내는 선물에 크게 만족하여 몽골왕국의 부흥에 힘을 빌려주기로 약속했다.

[88] 그러나 그들은 묘한 복수심에서 보르테를 치르겔 부크(장사 치르겔)라는 자에게 넘겨주었다. 이 사나이는 지난날 예수가이에게 아내 커어룬을 빼앗긴 예케 칠레두의 아우였다. 이처럼 복수는 부족에서 부족으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유괴와 폭력이 되풀이되면서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었다.

[90] 아무튼 비기사도적 처신이었지만, 테무친은 아름다운 보르테를 잊지 않았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저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93] “나의 벗 테무친의 잠자리에 사람이 없고 그의 가슴이 두 조각났다는 말을 듣고 내 마음도 아프네. 자, 우리는 메르키트의 세 부족을 짓밟고 우리들의 보르테 부인을 구출해 내도록 하세.”

[95] “우리는 거칠게 날뛰는 대자연을 무릅쓰고 아무리 사나운 눈보라 속이라 하더라도 집합하기로 했던 때와 장소를 정확히 지켜야 하는 약속이 아니었소? 몽골 인의 약속은 맹세와 같은 것이요. 그렇지 않소? 약속을 중히 여기지 않는 자는 따돌림을 당하는 것이 우리들의 규율이오. 그런데도 이 마당에 우리가 그런 잘못을 저지르다니!”

[97] 테무친은 싸움보다는 오로지 사랑하는 아내 생각뿐이었다. 죽음과 공포가 소용돌이치는 속에서 목이 터지도록 보르테를 불렀다.

[97] 훗날 칭기즈칸은 아내가 메르키트 족의 유력자 가운데 하나와 강제로 동거 생활을 한데 대해 눈감아 준다. 보르테 역시 그로 인해 죄책감을 느낀 것 같지는 않다. 남편의 집념과 강한 의지에 마음을 놓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남편은 아내를 되찾기 위해 몽골의 평화를 어지럽히면서까지 여러 왕과 족장과도 동맹을 맺어가며 40,000기 이상의 병력을 동원했던 것이다. 또한 보르테가 메르키트 족과 함께 하는 동안 아이를 밴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으며. 그녀는 남편에게로 돌아온 다음 주치라는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은 칭기즈칸의 장남이라고 정식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말 많은 사람들은 치르겔의 자식일 거라고 수군대곤 했다.
그러나 이 미묘한 문제에 대해서 칭기즈칸이 아내를 원망한 적은 없었다. 하긴 메르키트 족이 침입했을 때 젊은 아내를 간단히 저버렸으니 이제 와서 그만을 나무라는 것도 무리한 일이었다.

[99] 그러나 몽골의 서사시가 어떻게 서술하고 있든 이것으로 메르키트 족이 멸망한 것은 아니었다. 토크토아 베키 등 살아남은 자들은 멀리 발그친의 숲, 바이칼 호반의 카이가에서 재차 군사를 정비했다. 그런 다음 훗날 몽골의 패권을 두고 칭기즈칸과 몇 번이나 다투었으며, 반칭기즈칸의 동맹에는 반드시 가담을 했다.
이상과 같이 세대를 바꿔가며 거듭되는 부녀자의 유괴에서는 칼날 같은 증오심만이 싹틀 뿐, 어느 한 쪽 부족이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 수습의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100] 몽골 제국은 몽골인의 태반이 말살된 다음에야 건설될 수 있었던 것이다.

[100] 테무친은 ‘아버지 칸’인 토그릴과 ‘형제’인 차무하 덕분에 아내를 되찾을 수 있었으므로, 정성을 다하여 이들 두 사람을 받아들였다.

[101] 메르키트 족과의 싸움에 협력한 일로 하여 두 사람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우정의 유대를 새삼 공고히 했다. 이제 그들은 옛 추억을 즐겁게 서로 이야기했다. 오논 강의 방판 위에서 뼛조각으로 공기놀이를 하던 일, 조그만 화살을 주고받던 일.......
이제 둘 다 뭇사람 위에 서는 우두머리로 성장했다. 테무친은 옛 왕가의 전통을 잇는 몸으로 가문은 확실히 더 좋았지만 그 무렵에는 메르키트 족과의 싸움에서 ‘총사령관’ 역할을 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차무하가 세력 면에서 더 앞서고 있었다.
그런 것은 둘째로 하고 두 사람의 우정은 전혀 대등한 입장에서 다시금 맺어지고 있었다. ‘안다’, 즉 맹세에 의한 형제인 이상 어떤 일에 있어서든 서로 돕는 것이 정식으로 맺어진 의형제의 우의였다.

[102] 두 사람은 왕국을 2두 정치의 형태로 부활시키고, ‘안다’임을 앞세워 의형제의 유대에 신성 동맹의 성격을 나타냈다. 그러나 2두 정치란 원래가 불안정 한 것이다. 사실 이들 두 동맹자들은 훗날 제각기 스텝 제국의 부활을 추구하면서 서로 대립하게 된다.

[103] 생애의 중요한 전기를 맞이하여 큰 결단이 요구되면(오늘은 맹우 차무하와의 유대관계로, 내일은 대샤먼과의 관계로) 그는 언제나 겁쟁이로 보일만큼 망설이기만 한다. 그리하여 아내 보르테가 남편 대신 결정을 내리면 남편은 곧장 아내의 의견에 따라 자신의 운명을 맡겼다.

[106] 그의 생애 속에서 결정적 사건이 거기서 일어났다. 왕족들이 그에게 왕위에 오르도록 전했던 것이다.

[110] 차무하는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은 변덕스럽고 친구로 삼기에 신의가 없으며 유난히 잔인했던 모양이다. 그 반면 테무친은 왕가 출신임을 젖혀 두고라도 언제나 흔들림이 없고 뛰어난 평형감각과 타고난 정치력 등을 발휘했다. 그리고 짐승의 가죽을 두른 추장치고는 자기 동맹자들조차도 어엿한 귀인임을 느끼게 하는 무엇인가를 갖추고 있었다.
테무친의 부인이 차무하를 용서하려는 테무친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여보 차무하는 천성이 명예로운 사람이 못 됩니다.”

[110] “우리는 그대를 칸으로 선출하고 싶다. 그대가 칸이 되기만 한다면 그대를 위해 우리는 적을 향해서도 맨 먼저 말을 몰 것이다. 빼앗은 계집과 뺨이 아름다운 처녀는 그대의 올드 게르로 데리고 가겠다. 다리가 곧은 준마를 달음질쳐서 그대에게 끌고 가겠다. 싸움이 있는 날 만일 그대의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우리들의 제물과 아내를 빼앗고 우리들의 검은 머리를 땅 위에 떨어뜨려라. 평화의 날에 약속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우리를 처자 곁에서 멀리 떨어진 사막 저편으로 내어 쫓으라."
이와 같은 맹세의 말을 한 다음 일동은 테무친을 펠트의 융탄자 위에 올려 앉히고 칭기즈칸이라는 이름, 혹은 존칭과 함께 칸(Khan)의 지위에 앉힐 것을 선언했다.
이 존칭의 내력은 힘의 개념과 결부되어 ‘흔들리지 않는’ 군주, 혹은 ‘불굴’의 군주임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혹은 전 세계의 지상권이라는 생각과 결부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케룰렌 상류의 초원 가운데의 어느 곳에서 12세기도 저물어가는 그 어느 날, 처음으로 환호의 소리와 함께 불리어진 이 이름은 훗날 몽골 민족이 외치는 찬탄의 소리가 되었고, 동시에 다른 민족이 퍼붓는 저주의 외침 속에 옛 세계의 전부를 휩쓸어 버리고 그 다음 세기에까지 남아 전하게 된다.

[116] 칭기즈칸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정당한 원한도 잊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117] 이렇듯 칭기즈칸 주위에 잇달아 부하들이 모여든 것은 그를 적으로 삼기보다 보호자로 삼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기이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칭기즈칸의 권위는 질서, 절도, 혹은 인정미 등을 갖추고 있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적들이 거의 갖추고 있지 못한 인격을 지녔기 때문이기도 했다.

[134] 장차 세계의 정복자가 될 칭기즈칸은 이렇듯 충신의 마음에 절대적인 헌신의 정신이 솟아나게 했다.

[154] “우리는 싸움터에서 함께 돌격해 나간다. 사냥을 할 때에는 손을 마주잡고 사냥감을 몰아낸다. 우리들 사이에서 남들이 불신과 불화의 씨를 뿌릴 때, 우리들 사이에 뱀이 다가올 때, 우리는 뱀이 물어 뜯을 틈을 주지 않고 우리들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말을 서로 믿기로 한다.”


[169] 문자가 없는 사회였으므로 호소의 말을 시의 형식으로 꾸며 두 사신에게 외우도록 했다. 이 ‘칭기즈칸의 호소’라 불리는 것에는 정의, 감동, 예로부터의 애정을 표면에 내세우면서 지극히 정치적인 발언을 담고 있었다.

[180] 이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칭기즈칸의 승리는 급소를 찌르는 병법 덕분에 얻어진 것이었다. 조심스러운 야간 행군에 이어 기습의 효과를 십분 발휘하는 급습을 하고, 다시 적을 막다fms 골짜기로 몰아넣는 포위 전술을 구사하여 칭기즈칸은 처음으로 대승리를 얻었다. 이 대승리가 유목민 사이에서의 그의 패권을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189] “하늘에는 해와 달이 함께 있을 수 있어도 땅 위에는 오직 한 사람만의 칸이 있을 뿐이다.”

[196] “살아있는 것 모든 것은 결국 죽음에 이른다. 사람의 몸은 고통을 받게 마련인 것, 그것이 곧 세상사이다. 내 운명이 그러하다면 싸우는 수밖에 없지!”

[201] 그들은 산에서 내려오자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칭기즈칸은 눈앞에서 그들의 필사적인 용기를 보자 그들의 목숨을 살리고자 했으나, 그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무기를 손에 든 채 차례로 죽어갔다. 칭기즈칸은 주군에게 바치는 충성을 무사 최고의 덕으로 보는 만큼 이들의 용감한 행위를 크게 칭송했다.
주군에게 바치는 충성을 져버린 차무하의 부하를 죽인 장면을 보라! 자신에게 상을 받고자 차무하를 생포해 온 그들을 칭기즈칸은 사형을 상으로 내렸다.

[211] “오오, 나의 안다, 자네는 스스로 마음을 놓기 위해서라도 지금 여기서 나를 처치해야 하네. 그러나 나를 죽이더라도 피를 흘려서는 안 되네(몽골 인의 신앙에 의하면 사람의 영혼은 피에 깃든다). 그리고 이 근처 어디든 높은 곳에 매장해 준다면 나의 영혼은 멀리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자네의 자손들을 수호하겠네. 나는 훌륭한 가문의 귀인이었어. 그것이 보다 더 훌륭한 가문의 안다에게 패배한 것일세. 내 말을 되새겨 주게. 그리고 이 몸을 한 시각이라도 빨리 처치해 주게!”

[225] “오오, 나의 충성스럽고 용맹한 파수병들, 오래도록 나를 섬기는 자들이여, 너희들은 칠흑의 밤에도, 달밤에도, 눈보라칠 때, 억수같이 비가 쏟아질 때, 견딜 수 없는 추위 속에서도 나의 막사 주위를 지키고 나를 편히 쉬게 해 주었다. 나의 진지 주위를 적이 배회할 때에도 너희들은 그 곳에 있었으며, 막사 주위에서 눈도 깜박이지 않고 들릴락 말락 한 화살통 소리에도 벌떡 일어섰다. 나는 너희들 덕분에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243] 이곳에서 처음으로 칭기즈칸은 정착 도시 문명에 접했다. 그러나 이곳은 중국식의 방비를 갖춘 요새의 땅이었고, 순전히 기병으로 이루어진 유목민들로서는 공격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러한 전투에 소용되는 무기를 그들은 갖고 있지 않았다. 칭기즈칸은 영하를 함락시키기 위하여 황하의 흐름을 돌려놓는 것도 생각해 보았다. 그의 천재성을 입증하는 착상이었지만, 몽골 인에게는 기술자가 없어서 결국 계획으로만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탕쿠트 인이 왕국을 끝까지 지켜낸 것은 아니었다.

[255] 칭기즈칸 역시 그런 호기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다음해인 1215년 봄, 그는 중신 무하리를 보내어 마침내 북경 공략의 진을 펴게 했다. 전해에는 만전의 방비를 굳히고 있는 대도시의 공격에 별로 마음이 없던 정복자가 적진이 어지러워진 것을 보고, 또 주둔병의 일부가 없어졌음을 확인하자 공성전(攻城戰)을 망설이지 않게 된다. 거기에서 칭기즈칸의 성격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그의 견실한 평형감각은 항상 가능과 불가능을 분간하고 그때 그때의 힘에 걸맞는 일을 기도한다.

[256] 그 모든 것을 멸망되었다. 살육은 언제나와 같이 반복되었다. 몽골 병은 궁궐에 불을 질렀다. 물은 한 달 이상이나 계속해서 타올랐다. 칭기즈칸은 중국의 여름철 더위를 피하여 만리장성 저편 드론 놀이라는 호숫가에 물러나 있었는데, 정복의 광경을 보러 오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느 몽골 인이나 그러하듯, 그는 도시 경제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적어도 그 무렵에는 도회지를 정복해도 그것을 파괴하는 것 이외에 다른 생각을 떠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르네 그루세가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에서 표현했던 것처럼 칭기즈칸이 도시를 전혀 몰랐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257] “너는 의무를 분간할 줄 아는 훌륭한 충신이다. 나의 눈, 나의 귀가 되라!”

[259] 처음 칭기즈칸의 군대는 하북 땅의 싸움에서도 파괴만을 일삼았다. 초원의 목자나 숲의 사냥꾼은 문명과 문화를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칭기즈칸 자신은 북경 점령시 투항했던 어느 중국 귀인을 통하여 문명에 접하게 되었다. 이 접촉은 몽골 제국의 문명에 실로 큰 영향을 미쳤으므로, 잠시 그 상황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261] 알렉산더 대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이자 제자이기도 한 철학자 카리스테네스를 원정길에 데리고 갔다가 그를 죽였었다. 마케도니아의 대왕만큼 교양은 갖추고 있지 않았으나 칸은 중국 학자에 대한 애정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297] 칭기즈칸은 본진을 교외인 ‘쿠쿠 세라이’(푸른 궁전)에 두고 처음 이튼 동안은 요새의 짜임새를 몸소 살피고 다녔다. 사흘 째 되는 날, 그는 진격을 명하여 몽골병으로 변장한 가엾은 포로의 무리를 선두에 내세웠다. 사마르칸드의 민간병들은 성 밖에서 공격군을 맞아 싸웠다. 몽골 군은 예의 병법대로 천천히 후퇴하여 편성한 지 얼마 안 되는 적의 의용병을 자기네 복병이 기다리는 곳까지 유인해 갔다. 그런 다음 기병이 적의 보병을 무찌르기는 손쉬운 것이었다.

[311] 이렇듯 복된 오아시스의 땅에 토루이 왕자와 유목민의 군사가 나타남으로써 인류 역사상 가장 처참한 참극 가운데 하나가 연출되었다. 정신적 문화의 파괴가 오아시스 지대 그 자체의 파괴, 곧 ‘대지의 죽음’과 함께 따라왔던 것이다.

[337] 칭기즈칸은 중국의 현인에 대해 실망한 빛은 나타내지 않았고, 그를 대하기 이전보다 더욱 경의를 품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애정마저 느끼게 되었다.

[344] ‘남자의 최고의 즐거움’
“그것은 봄날의 사냥입니다. 아름다운 말에 올라타고 주먹 위에 매를 앉힌 다음, 짐승이 날뛰는 것을 보는 일입니다.”
“아닐세, 그게 아냐. 남자로 태어나서 최고의 즐거움은 적의 무리를 무찌르고 그 뒤를 쫓아 그들의 재물을 탈취하는 것일세. 그리고 그들과 가까운 자들이 눈물로 얼굴을 적시는 것을 보는 일과 그들의 말에 올라타고 그들의 딸이나 아내를 품에 안는 일일세.”

[346] 사람의 위업이란 덧없는 것! 그와 같은 가정 내부의 이야기는 십중팔구 지어낸 것일 테지만, 영웅이 죽은 지 4세기가 지난 다음 그의 자손들은 이슬람권 최대의 제국을 자기들에게 물려준 원정에 관하여 그 일밖에 기억해 내지 못했다.

[352] 러시아군은 불의의 기습을 당하자 오합지졸의 약점을 드러냈다.

[353] 키에프 공이 항복하자, 그를 사형에 처하고 그의 군사들도 죽이고 말았다. 이 때 키에프 공이 널빤지와 양탄자에 짓눌려 죽은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러한 처형법은 후세의 러시아 사가를 격분시켰지만, 몽골 인으로서 피를 흘리지 않고 죽인다는 것은 왕후에게만 허용되는 ‘명예로운 죽임’이었다.

[355] 칭기즈칸의 심심풀이가 그처럼 불교적이거나 목가적인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가 즐기는 최대의 휴식은 첫째 사냥이었다. 그것도 1223년 타시켄트 부근에서 즐겼던 것과 같은 대규모의 사냥은, 그에게는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이 유희이고 술 마시는 것이었다.

[357] 몽골 군이 저지른 가공할 비인간적인 행동과 정복자 본인이 몰래 베푼 친절과의 기묘한 대조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살고 있던 환경에서 그와 같은 야만인에게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될지 모르겠지만, 그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는 귀인다운 고귀한 풍모를 보여주고 있다.

[360] 무하리는 칭기즈칸을 충실히 본받고자 애쓰고 있었으므로, 남의 말을 잘 받아들였으며, 문명의 충고에 외면하는 일도 없었다. 한 번은 이전에 금나라 황제를 섬기던 무장 하나가 정복지에 대한 몽골인의 만행에 대하여 용감하게도 의견을 말했다. 그는 ‘몽골 군의 정복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도 이미 귀속한 영토의 백성을 잘 다스리고 아직 귀속하지 않은 국민에게도 안도감을 줄 필요가 있다’고 설복했다. 무하리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그 의견이 옳음을 인정했다.

[362] 무하리의 유언
“지난 40년 동안 나는 칸이신 주군의 대사업을 돕기 위해 싸워왔고 한 번도 몸을 아끼지 않았다. 죽기 전에 오직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개봉을 점령해서 칸에게 바치지 못하게 된 일이다. 그 일은 네가 대신 맡아야 할 것이다.”

[368] 이들 오아시스의 나라를 짓밟은 몽골 군의 행패는 역시 굉장한 것이었다. 주민들은 몽골 군의 칼날을 피하려고 산이나 동굴에 몸을 숨겼지만 살아남은 자는 백에 한 둘에 불과했다. 들판은 사람의 시체들로 덮였다.

[369] 칭기즈칸은 누구보다도 이해력이 풍부하고 건전한 상식의 소유자이다. 그러한 칭기즈칸이 가공할 잔학 행위를 방치해 둔 것은 당시의 몽골 인 환경으로 미루어 유목 생활이 아닌 생활 형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 이외의 방법에 의한 전쟁은 전혀 몰랐으며, 정착민의 토지는 약탈이나 학살, 인간 사냥의 대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이외의 방법도 있음을 터득하게 되자, 칭기즈칸은 곧 예류추짜이에 명하여 정착민의 국토에 일정한 조세를 부과하는 등 규칙적인 행정의 방식을 갖추게 만들었다.
칭기즈칸을 이해하고자 할 때, 현대 문명인의 척도를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도시경제와 유목생활의 차이를 모르는 정복자로서의 칭기즈칸을 고려해야만 한다.

[375] 이렇게 몽골의 영웅은 죽음에 임박한 자리에서도 아들과 막료 장수들에게 마지막 작전을 지시해 두었다. 이 작전은 토루이 이하 여러 장수들에 의하여 6년 후에 훌륭히 실현된다. 1233년 5월 몽골 군의 개봉 점령도 기실 불굴의 황제가 사후에 거둔 승리인 셈이다.

[377] 정복자가 숨을 거두면서 허무한 느낌을 입 밖에 내어 말했다는 것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나의 자손은 훌륭한 옷을 입을 테지. 맛있는 것을 먹고 준마를 몰며 아름다운 계집을 품에 안겠지. 그 모든 것이 누구의 덕분인지도 모르는 채……”

■ 『칭기즈칸의 생애』를 읽고 & 내가 저자라면

#1. “칭기즈칸 국가의 역사가 지닌 역설은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과 백성들의 행위를 건전한 상식의 격언과 잘 확립된 정의로 규제하는 현명하고 사려깊고 도덕적인 지도자의 성격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막 원시적인 야만상태에서 나타나 공포 말고는 적들을 굴복시킬 수단을 알지 못하고 사람의 목숨에 아무런 가치도 두지 않았으며, 도시와 농경문화를 지닌 정주 민족들의 생활이나 자기 고향인 초원에 없던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개념도 없는 유목민들의 야수적 반응 사이에 보이는 뚜렷한 차이이다.” - 르네 그루세

『칭기즈칸의 생애』를 읽으며 르네 그루세가 말한 이 역설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나의 인간에 대한 이해가 보다 깊어지길 갈망하게 되었다. 나는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 보다 깊이 이해하고 싶다. 근거 없는 긍정도 걷어내고, 감상적인 연민도 경계하면서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 이것은 앞으로 계속 인문학을 공부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된다. 그런 점에서 사부님은 좋은 선생님이 되어주실 것이다. 사부님이 역사를 전공하셨다는 사실이 좋다. 사부님의 책을 읽으면 사람에 대한 적확한 견해를 가지게 되어 좋다. ‘적확한’이라는 표현 그대로 사부님의 견해는 틀림없이 들어맞는다. 사람의 본질에 말이다! 사부님의 책은 거짓 희망을 불어넣지 않으면서도 신선하고 명쾌한 자극을 준다. 사람의 본성을 건드리면서 말이다!
아, 오늘은 사부님의 책을 몇 장 읽어야겠다.

#2. “그처럼 평범한 첫걸음. 스텝의 젊은이라면 누구에게서나 일어날법한 일로부터 세계의 정복자가 될 사람의 행적은 시작되었다. 잘못하면 목숨을 잃거나 잘 돼 봐야 종신 금고의 신세를 면치 못할 모험, 그것을 그는 용기와 침착성으로 극복해 낸다. 그리고 말을 도둑맞았지만 그는 결단력과 의지의 힘으로 그것을 되찾는다. 아무튼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것은 그가 자기와 접한 사람들에게 끼친 인격과 매력이라 할 것이다. 그는 아주 젊어서부터 늠름한 인격과 이를 뒷받침하는 감화력을 지니고 있었다.” - 르네 그루세

테무친이 자신의 아내를 구하러 갈 때에 더 큰 두 개의 부족이 테무친을 돕기 위해 군사력을 보내 주었다. 처음에는 칭기즈칸이 가진 감화력 때문인지, 아니면 테무친 주변의 사람들이 남들을 진심으로 돕는 의리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책을 읽어가면서 칭기즈칸이 가진 성품이 남다르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안다의 맹세를 나눈 차무하가 몇 가지 점에서 테무친에 미치지 못한 것을 보면, 칭기즈칸의 훌륭함이 더욱 드러난다. 칭기즈칸은 자신의 보호 아래 두었던 약한 사람들을 끝까지 지켰다. 그루세의 표현은 ‘평생 동안 흔들림 없는 신실함’으로 그들을 보호하였다고 전한다. 초원의 법칙에 의하여 많은 살육을 저지른 그였지만, 한편으로는 분명 정복자다운 도량이 있었던 것이다.
한 챕터를 할애하여 그의 감화력과 자기 민족을 향한 애정, 그리고 의로운 모습과 제국을 이끌어나간 지혜들을 정리해 볼만 하다. 그리하여, 칭기즈칸을 야만인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균형된 시각을 제공할 수 있는 하나의 자료를 만들었을 것 같다. 내가 저자였다면 말이다. 그루세의 말처럼 칭기즈칸은 때와 장소에 따라서는 귀인다운 고귀한 풍모를 보여 주었으니까.

#3. “그 모든 것을 멸망되었다. 살육은 언제나와 같이 반복되었다. 몽골 병은 궁궐에 불을 질렀다. 물은 한 달 이상이나 계속해서 타올랐다. 칭기즈칸은 중국의 여름철 더위를 피하여 만리장성 저편 드론 놀이라는 호숫가에 물러나 있었는데, 정복의 광경을 보러 오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느 몽골 인이나 그러하듯, 그는 도시 경제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적어도 그 무렵에는 도회지를 정복해도 그것을 파괴하는 것 이외에 다른 생각을 떠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처음 칭기즈칸의 군대는 하북 땅의 싸움에서도 파괴만을 일삼았다. 초원의 목자나 숲의 사냥꾼은 문명과 문화를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칭기즈칸 자신은 북경 점령시 투항했던 어느 중국 귀인을 통하여 문명에 접하게 되었다. 이 접촉은 몽골 제국의 문명에 실로 큰 영향을 미쳤으므로, 잠시 그 상황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p.259)

"알렉산더 대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이자 제자이기도 한 철학자 카리스테네스를 원정길에 데리고 갔다가 그를 죽였었다. 마케도니아의 대왕만큼 교양은 갖추고 있지 않았으나 칸은 중국 학자에 대한 애정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p.261)

이처럼 칭기즈칸은 지식과 학문을 존중했고, 학자들로부터 배우려고 애썼다. 물론 그도 처음에는 도시 경제와 문명을 알지 못하였다. 하지만, 북경 정복을 통해 그는 문명의 유익함에 눈을 떴다. 다른 몽골인들은 여전히 무지하였지만, 칭기즈칸만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유산을 글로 남기기를 바랐으며, 법 체계를 세우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몽골 출신의 정복자였지만, 그가 정복하며 행하여 갔던 일들은 자신의 출신지인 몽골의 수준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몽골인들은 글도 몰랐던 것이다.
나도 이러한 칭기즈칸을 본받고 싶다. 이 번 한 주간도 열심히 책을 읽고, 부지런히 글을 쓰자. 배움, 이것이 지금 내가 할 일이다. 그리하여, 비록 평범한 출신의 청년 연구원이지만,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수준의 일들을 창조해 나가자. 후세에 남을 만한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다면 좋겠다. (갑자기 가슴이 벌렁 벌렁거려서 이만 줄입니다. ^^ )
IP *.134.13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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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07.03 16:26:30 *.249.167.156
나는 표현을 잘 못한다. 그래서 네가 좋다고 해도, 나도 좋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난 네가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수준의 일을 창조해" 나갈 것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도 이만 줄인다^^
프로필 이미지
한정화
2007.07.03 23:26:46 *.72.153.12
'가슴이 벌렁거려서...'에 공감한다.
지난달 인물 탐색을 하면서,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특히 지난주는 너무 심하게 놀아서, 힘이 부족한데, 의식은 또렷해지고... 눈은 꺼끄러운데...... 심장은 계속 벌렁거리고.
이런 떨림이 아주 오래오래 갔으면 좋겠다.
너도 그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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