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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18일 10시 22분 등록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p. 423)


김구 선생님께서 쓰신 '나의 소원'이라는 제목의 짧은 글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림으로써 학생들의 가슴에 선생님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를 심었다. 학생들의 기억 속에서 그는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였고, 조국의 독립을 꿈꾸는 활동가였다. 자신에게 허락된 세가지 소원을 모두 털어 우리나라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꿈꾸었던 그의 절규는 학생들의 가슴에 글보다 긴 여운을 남겨주었다.

나라를 잃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자유를 빼앗긴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자란 어린 학생들의 가슴에도 그 글은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세가지 소원을 묻는 램프의 요정 앞에서 '1등 하게 해달라'거나 '여자친구 생기게 해주세요' 등의 꽤나 현실적인 소원들을 떠올리던 그 시절 철없는 아이들에게 세가지 소원 모두 '독립'이라 외치는 김구 선생님의 목소리는 서늘했고, 또 뜨거웠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입시 준비의 한 구석으로 선생님의 자리는 밀려났고, '나의 소원'은 주제, 문체, 특징, 짜임 등의 이름으로 난도질 당하고 누덕누덕 기워진 채 본 뜻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어렴풋한 이름과 껍데기만 남았다. 그저 '나라의 독립을 열렬히 바랬던 독립운동가'라는 단순한 설명문에 갇혀버렸다. 김구 선생님은 그렇게 학생들의 기억 속에 좀더 의미 있게 자리매김 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

예전에 호주에서 생활할 때 같은 집에서 살던 형이 한 명 있었는데, 그 형의 성은 '백'씨였다. 비교적 풍족한 집안을 뒤로 하고 호주로 온 그 형의 생활은 그다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잠잘 시간을 쪼개서 하루 종일 힘들게 일했고, 열심히 공부했다. 형은 성실하고 독한 사람이었다. 그런 형과의 술자리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는 단골 안주였다. 술자리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존경하는 사람, 혹은 역할 모델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고, 그 때마다 형은 김구 선생님의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그 형에게 김구 선생님은 단순한 독립투사가 아니었다. 좀더 가까웠고, 강렬했고, 감동적이었다. 형은 항상 아이를 낳으면 '백범'이라 이름 짓겠다고 했었는데, 난 그 이름이 갖는 의미도 모른 채 그저 외자 이름이 근사하다고 생각했었다. 대신 내 아이에게 존경하는 사람과 똑같은 이름을 지어준다는 생각은 꽤나 묵직한 느낌을 주었다. 형으로 인해 선생님에 대한 나의 궁금증은 커졌다.

그로부터 몇 년 후, 호주에서 돌아와 형은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아이의 이름을 '범'이라고 짓지는 못했다. 이유는 바로 형의 어머니, 그러니까 태어난 아기의 할머니께서 반대하셨기 때문이었다. 반대하신 이유는 단순했지만 그만큼 명료했다. "훌륭한 사람도 좋지만 그렇게 힘든 삶을 살게 될까 두려워서 안된다"는 것이었다. 형은 끝까지 '백범'이라 짓겠다고 고집하였지만 결국 어머니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고 한다. '힘든 삶'이란 무엇을 말씀하신 것일까? 독립운동가의 고단한 삶을 말씀하신 것이었을까?

고등학교 시절 한 때 느꼈던 '나의 소원'의 뜨거움과, 아이의 이름으로는 쓸 수 없는 그 '힘든 삶'에 대한 의문을 가슴에 안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눈오는 벌판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발걸음 함부로 하지 말지어다. 오늘 내가 남긴 자국은 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느니 - 분단 전후 백범이 가장 즐겨 썼던 서산 대사의 선시이다. 눈보라치는 조국의 위기에 당면하여 일신의 안위나 현실 정치의 이해관계보다 후손들에게 남겨줄 역사를 강조하였다.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상을 보면 더러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맑스-레닌-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니, 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예전 동경을 우리 서울로 하자는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p. 14)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 (p. 15)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p. 39)

새벽 굼벵이는 살고자 흔적 없이 가버리나
저녁 모기는 죽기를 무릅쓰고 소리치며 달려든다. (p. 58)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찌 밝히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현을 목표로 하여 발자취를 밟아가도록 하게. 예로부터 성현의 지위까지 도달한 자도 있고, 좀 모자라는 자도 있고, 성현이 되는 길이 너무 높고 멀다 하여 중도에 달아나거나 자포자기하여 금수만도 못한 자리에 몰려 있는 자도 있다네.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자네, 상심 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자네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이 아닌가?" (p. 62)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라 할 수 있다. (p. 63)

"...나라가 망하는 데도 신성하게 망하는 것과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더럽게 망하게 되겠네." (p. 65)

"내 집이 흥하든 망하든 네가 알아 하여라." (p. 100)

"지금 소위 만국공법이니, 국제공법 어디에 국가간의 통상,화친조약을 체결한 후 그 나라 임금을 시해하라는 조문이 있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국모를 시해하였느냐? 내가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살면 몸으로, 네 임금을 죽이고 왜놈을 씨도 없이 다 죽여 우리 국가의 치욕을 씻으리라!" (p. 108)

신서적을 보고 새로 깨달은 것은, 고선생이 전에 조상께 제사 지내면서 '유세차 영력 이백 몇해'라고 쓴 축문을 읽던 것이나, 안진사가 양학을 한다고 하여 절교한 일이 그리 잘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 115)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스런 물고기가 아니리.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니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 (p. 126)

"설사 한 집에 장정이 년놈 합하여 두 명이라 하면, 매일 한 사람씩이라도 양반집 일을 안 할 때가 없고, 일을 하는 날은 그 놈의 집 식구가 다 같이 와서 밥을 먹소. 그러니 품삯을 많이 지불하여 상놈 집에 의식주가 풍족하게 되면 자연히 양반에게 공손치 못하게 될 것 아니오? 그래서 그같이 품삯을 작정하여 주는 것이오"
나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내가 상놈으로 해주 서촌에 난 것을 늘 한탄하였으나, 이 곳에 와서 보니 양반의 낙원은 삼남이요 상놈의 낙원은 서북이다. 그나마 내가 해서 상놈으로 난 것이 큰 행복이다. 만일 삼남 상놈이 되었다면 얼마나 불행하였을까? (p. 148)

"형님 내외분은 창수놈 글공부시킨 죄로 온갖 고생을 하셨으면서도 아직 깨닫지 못하시오?"
작은 아버지의 관찰이 사실은 바로 본 것이었다. 만일 글을 몰랐다면 동학 두령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인천 사건도 없었을 것이다. 텃골의 순전한 한 농군으로 땅 갈아먹고 우물 파 마시며 살았을 것이다. 세상을 요란케 할 일은 없었을 것이 명백하다. (p. 165)

"군자는 알고도 속아 줄 수 있다." 원문 : "君子可欺以方" '맹자'에 나오는 구절 (p. 171)

"무슨 일이고 한두 번 실패하더라도 낙심할 것이 아니니, 구하면 얻게 될 날이 있다고 내 전에 말하지 않던가?" (p. 173)

"뱀의 꼬리를 붙잡고 올라가면 용의 머리를 볼 터이지요." (p. 173)

"선생님이 피발좌임을 말씀하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머리털은 곧 피가 만들 것이요, 피는 곧 음식이 소화되어 만들어진 정액이니, 음식을 먹지 않으면 머리털도 자라날 수 없습니다. 설사 머리를 천 길이나 길러서 매우 크고 훌륭한 상투를 위에 얹었다 손 치더라도 왜놈이나 양놈이 그 상투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어찌하겠습니까? 또 녹의복건을 아무리 훌륭하게 입었다 하여도 왜인이나 양인들이 우러러 절하지도 않을 것이고 무릎 꿇지도 않을 것입니다. 지금 이 나라에서는 학문과 도덕을 공부한 상류층 사람들이 백성을 잔인하게 학대하는 최상의 도부수들입니다. 진실로 온 나라의 백성들은 거의 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이라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이 이익을 좇으니, 자기의 권리와 의무는 모르고 마땅히 탐관오리와 토호의 업신여김과 학대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탐관오리와 토호들이 자기 백성을 업신여기고 학대함과 같이 왜와 서양을 학대한다면, 왜와 서양은 멸종되고 그네들이 천하를 다 호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백성의 고혈을 빨아 왜놈과 양놈에 바치고 아첨하면서, 자기가 누구보다 뛰어난 도부수임을 자랑하고 있으니, 필경 우리나라는 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세계 문명 각국의 교육제도를 본받아서 학교를 세우고 이 나라 백성의 자녀들을 교육하여 귿릉르 건전한 2세들로 양성해야 합니다. 또한 애국지사들을 규합하여 이 나라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 잃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나라가 발전하는 복락이 어떤 것인지를 알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망하는 것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제자는 생각합니다." (p. 179)

아, 슬프도다! 이 말을 기록하는 오늘까지 30여 년 동안 내 마음을 쓰거나 일을 할 때, 만에 하나라도 아름다이 여기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당시 청계동에서 고선생이 나를 특히 사랑하시고 심혈을 다 기울여 구전심수하시던 훈육의 덕일 것이다. 다시 이 세상에서 그같이 사랑하시던 위대한 얼굴을 뵙지 못하고, 다시 그 참되고 거룩한 사랑을 받지 못하겠으니, 아, 슬프고도 애통하도다! (p. 180)

그래서 나는 허벅지 살을 베어내기로 결심하고, 어머님이 계시지 않을 때를 틈타 왼쪽 허벅지에 살조각 한 점을 떼어내었다. 고기는 불에 구워서 약이라 아뢰고 잡수시게 하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다. 그래도 양이 적은 듯하여 다시 칼을 들어 그보다 크게 살조각을 떼어내려고 할 때에는, 처음보다 천백 배의 용기를 내어 살을 베었지만 살조각은 떨이지 않고 고통만 심했다. 두 번째는 다리 살을 베어놓기만 하고 손톱만큼도 떼어내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 탄식했다. '손가락이나 허벅지를 베어내는 것은 진정한 효자나 하는 것이지, 나와 같은 불효자가 어찌 효자가 되랴.' (p. 181)

"자네 뜻에 맞는 처녀란 어떤 처녀인가?"
내 대답,
"첫째 재산을 따지지 않는다. 둘째 처녀는 학식이 있어야 한다. 셋째 직접 상면하여 서로 마음이 맞으면 결혼한다. 이렇습니다."
그 할머니는 첫째, 둘째 조건에는 의문이 없지만, 셋째 조건에는 매우 난색을 보였다. (p. 183)

평안도는 물론이고 황해도에도 신교육의 풍조는 예수교로부터 계발되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만 지키던 자들이 예수교에 투신함으로써 겨우 서양 선교사들의 혀끝으로 바깥 사정을 알게 되어 신문화 발전을 도모하게 된 것이다. 예수교를 신봉하는 사람은 대부분 중류 이하로, 실제 학문을 배우지는 못하였지만, 선교사의 숙달치 못한 반벙어리 말을 들은 자는 신앙심 이외에 애국사상도 갖게 되었다. 당시 애국사상을 지닌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수교 신봉자임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p. 186)

당초 상동회의에서는 다섯 내지 여섯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상소하고, 앞 조의 사람들이 죽으면 몇 번이든지 계속 이어서 상소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처음 상소하여 체포당한 지사들을 몇십 일 구류에만 처하고 말 정황이니 계속할 필요가 없어졌다. 아무리 급박하여도 국가흥망에 대한 절실한 각오가 적은 민중과 더불어서는 무슨 일이나 실효 있게 할 수가 없다. 바꿔 말하면 아직 민중의 애국사상이 박약한 것이다.
"7년 묵은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한다"는 격으로 때는 늦었으나마, 인민의 애국사상을 고취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국가가 곧 자기 집인 줄을 깨닫고, 왜놈이 곧 자기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자기 자손을 노예로 삼을 줄을 분명히 깨닫도록 하는 수밖에 다른 최선책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모였던 동지들이 사방으로 헤어져서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신교육을 실시하기로 하여, 나도 다시 황해도로 돌아와 교육에 종사하였다. (p. 196)

나는 종산에서 첫아기로 딸을 낳았다. 태어난 지 며칠 만에 모녀를 가마에 태워 와서 찬기운을 많이 쐰 탓인지, 딸아이는 안악에 도착한 후 바로 죽고 말았다. (p. 198)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p. 204)

나는 깊이 생각했다. 이와 같은 위난한 때를 당하여 응당 지켜갈 신조가 무엇인가를 연구하였다. "드센 바람에 억센 풀을 알고 국가가 혼란할 때 진실한 신하를 안다"는 옛 가르침과, 사육신, 삼학사가 죽어도 꺾이지 않았다는 고후조 선생의 가르침을 다시금 생각하였다. (p. 220)

세 놈이 마주 들어다가 유치장에 눕힐 때는 이미 동창이 밝았다. 내가 신문실에 끌려가던 때는 어제 해 진 후였다. 처음에 성명부터 신문을 시작하던 놈이 불을 밝히고 밤을 새우는 것과 그놈들이 온 힘을 다해 사무에 충실한 것을 생각할 때에 자괴심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지 성심껏 보거니 하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와 같이 밤을 새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스스로 물어보니, 온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고틍스런 와중에도, 내가 과연 망국노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 하여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 (p. 231)

태산처럼 크게 보이던 왜놈이 그때부터 겨자씨와 같이 작아 보였다. 무릇 일곱 차례나 매달려 질식된 후 냉수를 끼얹어 살아나곤 하였지만, 마음은 점점 강고해져 왜놈에게 국권을 빼앗긴 것은 일시적 국운 쇠퇴요, 일본은 조선을 영구 통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불 보듯 확연한 사실로 생각되었다. (p. 238)

감방에 들어가서 차례차례 인사를 하며 물어보니, 혹은 '강원도 의병의 참모장'이니 혹은 '경기도 의병의 중대장'이니 하여. 대부분 의병 두령이고 졸병이라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처음에는 극히 존경하는 마음으로 교제를 시작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마음 씀씀이와 행동거지가 순전한 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참모장이라 하는 사람이 군대의 규율이나 전략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의병을 일으킨 목적이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당시 무기를 가지고 여러 마을을 횡행하면서 만행한 것을 잘한 일처럼 큰소리쳤다. (p. 241)

남이 해준 음식을 먹고 남이 만들어 준 옷을 입거늘
품은 뜻은 평생 어기지 말아야 한다.

는 귀절을 망각하였느냐? 네가 어려서부터 늙어서까지 스스로 농사 짓지 않고 스스로 옷을 짜지 않아도 대한의 사회가 너를 입히고 먹였는데, 금일 왜놈이 먹이는 콩밥이나 먹고 붉은 의복이나 입히는데 순종하라고 먹이고 입혔느냐? (p. 244)

구속을 너무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게 할수록 반대로 수인들의 심성도 따라 악화되어서, 횡령이나 사기죄로 들어온 자라도 절도나 강도질을 연구해서 만기 출옥 후에 더 무거운 형을 받아 다시 들어오는 자를 종종 볼 수 있었다. 지금 감옥은 물론 이민족의 압제를 받는다는 감정이 충만한 곳이므로 왜놈들의 처사로는 털끝만큼이라도 감화를 줄 수 없으나, 내 민족끼리 감옥을 다스린다 하여도 남을 모방하여서는 감옥 설치에 아무런 효과가 없겠다고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후일 우리나라가 독립한 후 감옥 간수부터 대학 교수의 자격으로 사용하고, 죄인을 죄인으로 보기보다는 국민의 일원으로 보아서 선을 지도하기에만 주력해야 하겠고, 일반 사회에서도 감옥살이 한자라고 멸시하지 말고 대학생의 자격으로 대우해야 감옥 설치한 가치가 있겠다고 생각되었다. (p. 254)

그럭저럭 내가 서대문감옥에서 지낸 것이 3년여이고, 남은 기간은 불과 2년이었다. 이때부터는 마음에 확실히 다시 세상에 나가 활동할 신념이 생겼다. 그리하여 세상에 나가서는 무슨 사업을 할까 주야로 생각하였다. 나는 본시 왜놈이 이름 지어준 '뭉우리돌'이다. '뭉우리돌'의 대우를 받은 지사 중에 왜놈의 가마솥인 감옥에서 인간으로 당하지 못할 학대와 욕을 받고도, 세상에 나가서는 오히려 왜놈에게 순종하며 남은 목숨을 이어가는 자도 있으니, 그것은 '뭉우리돌' 중에도 석회질을 함유하였으므로 다시 세상이라는 바다에 던져지면 평소 굳은 의지가 석회같이 풀리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세상에 나가는 데 대하여 우려가 적지 않았다. 만일 나도 석회질을 가진 뭉우리돌이면 만기 이전에 성결한 정신을 품은 채로 죽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하여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九)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蓮下)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 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달라'고. (p. 267)

"독립은 만세만 불러서 되는 것이 아니고 장래 일을 계획, 진행하여야 할 터인즉 나의 참, 불참이 문제가 아니니, 자네들은 어서 만세를 부르라." (p. 283)

...자유를 잃으면 자살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한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p. 298)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 (p. 307)

농촌을 시찰한 나는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한, 당, 송, 원, 명, 청, 각 시대에 관개사절이 중국을 왕래하였다. 북쪽지방보다 남쪽지방 명조시대에 사절로 다니던 우리의 선인들은 대부분 눈먼 사람이었던가. 필시 환상으로 국가의 계책이나 민생이 무엇인지를 생각지도 못하였던 것이니, 어찌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리오.
문영이란 조상은 면화 씨를, 문로란 조상은 물레를 중국에서 수입하였다 하나, 그 나머지는 말마다 오랑캐를 지칭하면서 돌아보지 않았다. 또한 명대 시절 우리나라 의관문물은 모두 중국제도에 따른다 하고서, 실제는 아무 이익도 없이 불편하고 고통스럽기만 한 망건, 갓 등의 망할 놈의 기구만 들여왔으니, 생각만 하여도 이가 시리다.
우리 민족의 비운은 사대사상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질적인 국리민복을 도외시하고, 주희학설 같은 것은 원래 주희 이상으로 강고한 이론을 주창하여 사색 당파가 생겨 수백년 동안 다투기만 하다 민족적 원기는 다 소진하고, 발달된 것은 오직 의뢰성뿐이니, 망하지 않고 어찌하리오.
슬프도다. 오늘날도 청년들은 늙은이들을 노후니 봉건잔재니 하며 비판하는데, 긍정할 점이 없지 않지만 그들 또한 문제가 적지 않다.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은 유혈사업이니 한 번은 가능하거니와 민족운동 성공 후에 또다시 사회운동을 하는 것은 절대 반대"라고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그런데 러시아 국부 레닌이 "식민지 민족은 민족운동을 먼저하고 사회운동은 후에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을 하자, 그들은 조금도 주저 없이 민족운동을 한다고 떠들지 않는가.
정주의 방귀를 '향기롭다'고 하던 자들을 비웃던 그 입과 혀로 레닌의 방귀는 '달다'하니, 청년들이여, 정신을 좀 차릴지어다. 나는 결코 정주학설의 신봉자가 아니고 마르크스와 레닌주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 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p. 352)

9년 만에 모자 상봉하는 첫 말씀.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너'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다수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주자는 것일세."
이로 인해 나는 나이 육십에 어머님이 주시는 큰 은전을 입었다. (p. 367)

"자네의 생명은 상제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하지.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운환 정탐꾼도 한인인즉, 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죽은 것보다 못하네." (p. 371)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유리의 역사는 고사하고 우리 언어도 능숙치 못합니다. 그런데 일본에 유학 중 징병으로 출전케 되어 가족과 이별 차 귀가하였던, 부모와 조부모들이 비밀히 교훈하기를 '우리의 독립정부가 중경에 있으니, 왜군 앞잡이로 끌려 다니다가 개죽음을 하지 말고 우리 정부를 찾아가서 독립전쟁을 하다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 말에 따라 일본 부대에서 탈주하다가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살아 우리 정부를 찾아온 것입니다."
이 말에 한인 동포는 말할 것도 없고 연합국 인사들까지도 감격에 넘쳤던 모양이다. (p. 395)

다음 내 가족생활에 대한 관계를 말하자면, 내 일생을 통하여 가족을 모아서 가정생활을 한 적은 시간으로도 짧다. 18세에 붓을 던진 이후 시종 유랑생활이었으니, 장련읍 사직동 생활에서 모친을 모시고 종형 남매 일가와 거주하며 2~3년을 머무르고, 그후 문화, 안악 등지에서 몇 개월 몇 년간 거주하였으나 역시 유랑생활이었다. 가장 오랫동안 머문 곳은 상해 불란서 조계에서 4년간 가족과 같이 생활한 것이다. 아내를 잃은 이후 10여 년 동안 어머님은 인과 신을 데리고 본국에서 지내시고, 남나 혈혈단신으로 동포들의 집에 의탁하거나 새우잠을 자는 옹색한 집단생활을 계속했었다. 어머님이 9년 만에 다시 중국으로 오셨으나, 어머님은 어머님대로 인과 신을 데리고 따로 생활을 하시고, 나는 나대로 동포들의 집과 혹은 중국 친우들의 집에 더부살이 생활을 계속하였다. 중경생활 역시 마찬가지였다. (p. 402)

내가 옛 서적을 익힐 때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라는 구절을 문인의 글재주로만 생각하였다. 그랬는데 그날 교장구에 나가 광경을 살펴보니 들것으로 방공호에 산재한 시체를 수집하는데 어린 아이 시체는 들것 하나에 2, 3명씩, 어른은 1명씩 모아서 쌓으니, 과연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라는 문구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쓰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p. 405)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p. 423)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반드시 최후적인 완성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인생의 어느 부분이나 다 그러함과 같이 정치형태에 있어서도 무한한 창조적 진화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와 같이 반만년 이래로 여러 가지 국가 형태를 경험한 나라에는 결점도 많으려니와, 교묘하게 발달된 정치제대도 없지 아니할 것이다. 가까이 이조시대로 보더라도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같은 것은 국민 중에 현인의 의사를 국정에 반영하는 제대로 멋있는 제도요, 과거제도와 암행어사 같은 것도 연구할 만한 제도다. 역대 정치제도를 상고하면 반드시 쓸 만한 것도 많으리라고 믿는다. 이렇게 남의 나라의 좋은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나라에 독특한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문운에 보태는 일이다. (p. 431)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p. 431)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p. 432)




상놈으로 태어난 그에게 처음부터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과거시험에 도전했지만 매관매직의 타락한 세상 앞에 쓰디쓴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동학에 입도하고 세상을 바꾸려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상놈 출신에 못생긴 외모의 젊은이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는 그것을 비관하고 주저 앉을 수도 있었다. 세상에 저주를 퍼붓고 남들처럼 순응해서 농사꾼으로 그냥 그렇게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았다.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p. 62)

좋은 스승의 가르침은 그를 깨우고 더 나은 세상으로 향하도록 독려했다. 그런 그가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를 죽인 것은 커다란 전환점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에게 일어난 변화는 대단히 극적인 것이었다.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구를 죽였다'는 그의 당당한 외침은 사람들의 가슴을 흔들었고, 이 작지만 강한 파장은 그의 인생을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했다.

치하포 사건으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낸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모여든 사람들은 결코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일들을 조금씩 이루어 가게 했다. 그 속에서 그의 인생은 단 한 순간도 평탄한 적이 없었다. 많은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고, 또 많은 날들을 죽음의 위협 속에서 지내야 했다. 그러나 그 어렵고 힘들었을 순간에도 그는 아이들을 가르쳤고, 나라의 미래를 위한 작전을 도모하여 나라의 독립을 꿈꾸기를 멈추지 않았다. 선생이 일생 중에 겪은 그 수많은 장애물 앞에 단 한번만이라도 좌절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보통 사람이라면 그 중 하나도 온전히 버티지 못했을 어려운 시간들 중에도 유독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다섯 자식 중에 넷을 떠나 보낸 아버지로서의 백범이었다.

네 자식을 차례로 앞세운 아비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는 울었을까? 혼절하였을까? 죽고 싶었을까? 도대체 어떻게 그 순간들을 넘어 살아 나갔을까? 애석하게도 그는 자신의 네 아이를 잃는 순간에 대해 별다른 이야기를 덧붙이지 않았다. 난중일기 속의 이순신이 아들의 안부를 걱정하며 안절부절 못하고, 그 죽음 앞에 피를 토하는 심정을 절절히 기록한 것과는 다르게 선생은 담담히 죽음만을 기록하였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 허벅지를 도려내어 살과 피를 바친 지극한 효심을 가진 아들이 어찌 자식들의 죽음 앞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도대체 왜 그랬을까?

세상의 모든 부모에게 자식의 죽음보다 가슴 아픈 일이 무엇이 있을까마는 '백범일지'로 김구 선생님의 생애를 들여다보고 나니 자식의 잇따른 죽음도 그저 하나의 사건으로밖에 적을 수 없었을 그의 지난한 생애에 말문이 닫혀버렸다. 어찌 그리 힘들게 살 수 있었을까? 어찌 그리 모진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을까? 질문이 줄을 이었고, 가슴 한구석이 무언가에 눌린 듯 무거워졌다. 불과 몇 십 년 전의 시간, 아직도 그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생존해 있는 그 시대의 삶은 내가 막연히 상상하던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를 모르고 지낸 시간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남이 해준 음식을 먹고 남이 만들어 준 옷을 입거늘(食人之食衣人衣)
품은 뜻은 평생 어기지 말아야 한다.(所志平生莫有違)
는 귀절을 망각하였느냐? 네가 어려서부터 늙어서까지 스스로 농사 짓지 않고 스스로 옷을 짜지 않아도 대한의 사회가 너를 입히고 먹였는데, 금일 왜놈이 먹이는 콩밥이나 먹고 붉은 의복이나 입히는데 순종하라고 먹이고 입혔느냐? (p. 244)


김구 선생님이 나지막하지만 엄한 목소리로 꾸짖는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누군가의 피를 뿌린 자리에 아무 것도 모르고 살아온 것만 같아 마음이 아프다. 내가 어디에 서있는지, 무엇을 딛고 서있는지 조금은 분명해졌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한 발 더 가까워졌다.



저자 조사를 위해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네이버 지식검색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과 답변을 발견했다.

『질문』
국어교과서에 실린 김구 선생님의 '나의 소원'을 갈래, 문체, 성격, 제제, 주제, 특징, 짜임, 이렇게 나눠서 분석 좀 해주세요~ 빨리요~

『답변』
갈래 :논설문, 연설문
문체 :만연체, 강건체, 건조체
성격 :비판적, 교훈적, 주관적, 설득적, 논증적
제제 :민족과 국가
주제:조국의 완전한 자주 독립과 우리의 사명
특징: 1. 연설의 목적으로 쓰인 글로 호소력을 지님.
2. 겹문장의 사용으로 다양한 내용을 일관성 있게 전달함.
3. 논리적인 근거와 적절한 예를 들어 주장에 설득력이 있음.
4.다양한 전개 방법을 사용하여 주장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드러냄.
짜임 :
[민족 국가]
서론 : 조국의 완전한 독립 소망.
본론 : 반민족적 사고에 대한 비판.
우리 민족 최고의 임무.
우리 민족 독립의 세계적 의의.
결론 : 우리 민족의 사업 전망과 당부
[내가 원하는 우리 나라]
서론 : 높은 문화 수준의 조국에 대한 염원.
본론 : 국민 교육의 필요성과 목표.
우리 민족의 인후지덕한 품성.
결론 : 바람직한 나라 건설에 대한 당부.

이것이 오늘날 교육의 현장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김구 선생님의 '나의 소원'이다. 이렇게 조각조각 잘려진 '나의 소원'을 읽고 학생들이 김구 선생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을까? 답답한 노릇이다.



전혀 다른 상편과 하편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을 낸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달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편이다. (p. 13)

이렇게 말하면 조금 불경스러울는지 몰라도 백범일지의 상권은 대단히 재미있다. 일화를 중심으로 풀어낸 상권은 정말로 두 아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친근감이 넘치고 생생하다. 책의 전반부를 읽어가면서 나는 연구원 생활 시작 이후 이제껏 읽어왔던 모든 책 중에서 가장 깊이 몰입할 수 있었다. 또 내용에 빠져들다 보니 꽤 빠른 속도로 읽을 수 있었다. 다만 앞부분에서 아들들에게 들려주고자 했던 동기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서 기억에만 의존한 탓인지 조금은 과장된 분위기가 느껴졌는데, 이는 글의 신뢰도를 약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하편은 윤봉길 의사 사건 이후 중일전쟁의 결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지와 기회를 잃어, 이 목숨을 던질 곳이 없이 살아남아서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때 내 나이 벌써 칠십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지 않으므로 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감을 알리려고 쓴 것이다. 이것 역시 유서라 할 것이다. (p. 13)

상권에 비하면 하권은 문자 그대로 딱딱하다.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사건들이 나란히 나열된다. 자연히 긴박한 사건들임에도 불구하고 상권에 비해 글의 생명력은 약하고 읽는 재미 역시 덜하다.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자꾸 재미를 이야기하려니 맘이 불편하다.) 애초에 상권과 하권이 다른 의도로 씌어진 것이므로 아쉽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보통의 책이라면 톤을 잘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IP *.227.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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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2007.06.18 12:43:09 *.99.241.60
향산 말대로 자식을 키우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4명의 자식을
먼저 보내는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지.

첫째 딸은 이름도 짓기 전인 돌도 못돼어 죽고
둘째 딸 화경은 다섯달에(1910~1915)
셋째 딸 은경은 두돌도 돼지 못하여 죽고
장남 신은 스물여덟에 (1918~1845)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라고 할수는 있지만
가혹한 현실이 눈앞을 어른거리더군..
아버지로써 어떠하였을까.. 한번 물어보고 싶더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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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6.18 14:28:55 *.72.153.12
백범일지 읽을 때도 감동이었는데, 종윤이 너이 리뷰를 볼 때는 더하다. 줄을 몽땅치고는 다 옮겨적지 않았는데... 너의 인용을 보니...백범일지를 통째로 외워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구구절절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게 하니까.

그리고, 종윤 너는 인터뷰를 잘 할 거 같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이것저것 물어볼 것 같아. 가장 잘 알려진 문제부터 쑥 치고 들어가는 게 맘에 들어.(사부님 인터뷰할 때도 그럴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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