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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23일 22시 22분 등록
[다산문선] 숙명이 낳은 사람, 고독이 낳은 저작

<다산문선, 정약용, 솔>

21세기 지식정보화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가 지식경영인의 모델로 본받을 만한 위인으로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단연코 18세기 조선 실학의 대가인 정약용 선생님일 것이다. 어둠의 시대를 살면서도 백성을 위해 그리고 나라를 위해 실학사상을 체계화한 진정한 지식경영인이다. 책 속에서 그에 대한 면모를 살며시 엿보도록 하자.

"네가 닭을 기른다는 말을 들었는데 닭을 기르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중에도 품위 있고 저속하며 깨끗하고 더러운 등의 차이가 있다. 진실로 농서를 잘 읽어서 그 좋은 방법을 선택하여 시험해보되, 색깔과 종류로 구별해보기도 하고, 홰를 다르게도 만들어 사육 관리를 특별히 해서 남의 집 닭보다 더 살찌고 더 번식하게 하며, 또 간혹 시를 지어서 닭의 정경을 읊어 사물로써 사물을 보낼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책 읽는 사람이 양계하는 법이다. 만약 이익만 보고 의리를 알지 못하며 기를 줄만 알고 취미는 모르는 채 부지런히 힘쓰고 골몰하면서 이웃의 채소를 가꾸는 사람들과 아침저녁으로 다투기나 한다면, 이는 바로 서너 집 모여 사는 시골의 졸렬한 사람이나 하는 양계법이다.

너는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 이미 양계를 하고 있다니 아무쪼록 여러 학자의 서적에서 양계에 관한 이론을 뽑아 계경을 만들어서 육우의 다경과 유득공의 연경과 같이 한다면, 이 또한 하나의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세속적인 일에서 맑은 운치를 간직하는 것은 항상 이런 방법으로 예를 삼도록 하여라." (p170, 학연에게 부침)

닭을 키우는 일도 사사로이 보아 넘기는 법이 없이 공부하고 기록하여 새로운 방법을 찾는 지식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실학사상을 체계화한 방법론을 통해서 대가의 독서방법에 대해서도 알 수 있으니 이는 월급 이외의 보너스를 받는 기분이다.

"나는 몇 년 전부터 독서에 대하여 대략 알게 되었다. 책을 그냥 읽기만 하면 하루에 천백번을 읽어도 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무릇 책을 읽을 때에는 한 글자를 볼 때마다 그 뜻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곳이 있으면, 모름지기 널리 고찰하고 자세히 연구해서 그 근본을 터득하고 따라서 그 글의 전체를 완전히 알 수 있어야 하니, 이렇게 하는 것을 계속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한 종류의 책을 읽을 때에 아울러서 수백 가지의 책을 널리 찾아보게 될 것이요, 따라서 본서의 의리에 대해서 분명히 꿰뚫을 수 있으니, 이 점을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사기』의「자객열전」을 읽다가 “조도제를 지내고 길을 떠났다(旣祖就道)”라는 한 구절을 만나게 되었을 경우 ‘조(祖)’란 무엇입니까?”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아라. 그러면 스승은 ”전별제(餞別祭)이다“라고 대답해줄 것이다. 또 ”꼭 ‘조’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하고 물어서 스승이 ”자세히 모르겠다”고 하거든 집으로 돌아와서 자서를 꺼내 ‘조’자의 본뜻을 살펴보고, 또 자서에 있는 증거를 토대로 하여 다른 책까지 들추어 그 전석을 고찰해서 그 뿌리를 캐고 세세한 뜻까지도 캐도록 하여라. 또『통전』이나 『통고』같은 서적에서 조상께 제사지내는 예절까지 자세히 참고해서 책을 만들면,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오래도록 남을 좋은 책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전에는 아무것도 모르던 네가 그날부터는 조제의 내력을 환하게 아는 사람이 될 것이다. 아무리 큰 학자라 할지라도 조제에 관한 한 가지 일에서는 너와 겨를 수 없을 것이다. 어찌 크게 즐겁지 않겠느냐? 주자의 격물 공부도 이와 같은 것이다. 오늘 한 가지 사물에 대해 끝까지 궁구하고 내일 한 가지 사물에 대하여 끝까지 궁구한다는 것도 이와 같이 착수하는 것이다. 격이라는 것은 끝까지 연구하여 끝까지 도달한다는 뜻이니, 끝까지 연구해서 끝까지 도달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이익이 없을 것이다." (p171, 학유에게 부침)

다산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다산문선>을 읽기 전에 반드시 다산의 생애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야 책 속의 상황과 감정을 가슴으로 느끼며 공감할 수 있다.


1. 저자에 대하여 (다산연구소 참조)


(1) 출생과 가족관계

다산 정약용은 1762년(임오년, 영조38년) 음력 6월 16일, 아버지 정재원(荷石 丁載遠)과 어머니 해남 윤씨(海南 尹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한강 강변 마현 마을이다. 당시로는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초부면(草阜面) 마재(馬峴)이고, 오늘날의 행정구역으로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이다.

8대 연속 홍문관(옥당) 학사를 배출한 집안

정씨 집안의 본관은 나주(螺舟 : 押海)다. 고려 말에 배천(白川)에서 살다가 조선왕조를 세울 무렵부터 서울에서 살았다.

맨 처음 벼슬을 한 선조는 승문원(承文院) 교리를 지낸 자급(子伋)으로 이때부터 쭉 이어져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수강(壽崗), 병조 판서 옥형(玉亨), 의정부 좌찬성 응두(應斗), 사헌부 대사헌 윤복(胤福), 강원도 관찰사 호선(好善), 홍문관 교리 언벽(彦璧), 병조 참의를 지낸 시윤(時潤)은 모두 옥당(玉堂)에 들어갔었다.

5대조 정시윤은 만년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근처인 ‘마재’에 터를 잡아 은거했다. 정약용의 고조부, 증조부, 조부의 3대는 벼슬에 나가지 못했다. 고조의 이름은 도태(道泰), 증조의 이름은 항신(恒愼), 조부의 이름은 지해(志諧), 오직 증조만이 진사였다.

아버지 정재원은 대과에 급제하지 않았지만 영조 임금의 특별한 지시(음사; 蔭仕)로 벼슬에 나갔다. 연천현감, 화순현감, 예천군수 등 고을 수령을 지냈고, 조정에 들어와 호조좌랑과 한성서윤을 지내고, 다시 수령으로 나가 울산부사를 거쳐 진주 목사(晉州牧使)까지 지냈다.

외가는 해남 윤씨, 학문과 예술의 집안

어머니는 숙인(淑人) 해남 윤씨(海南 尹氏)로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후손이요,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의 손녀였다. 윤선도의 증손자인 윤두서는 한국 회화사에 유명한 자화상을 남긴 화가로 유명하다.

아버지 정재원은 세부인 사이에 모두 5남 5녀의 10남매가 있었다. 첫 부인은 24세로 요절한 의령 남씨(宜寧 南氏: 1729-1752)이다. 소생으로 큰아들 약현(若鉉)이 있다. 둘째 부인 해남 윤씨((海南尹氏: 1728-1770)와 사이에 약전(若銓), 약종(若鍾), 약용(若鏞) 3형제와 딸을 두었다. 이 딸이 나중에 이승훈에게 시집간다.

다산 정약용의 나이 9세 때(1770년) 어머니 해남 윤씨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12살 때(1773년) 서울에서 20세의 김씨(1754-1813)를 데려왔다. 어린 다산을 친자식처럼 돌봐준 그가 서모 김씨다. 서모 김씨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김의택(金宜澤)의 딸로서 슬하에 삼녀 일남(약횡)을 두었다. 큰딸은 채제공의 서자인 채홍근(蔡弘謹)에게, 다음은 나주목사를 지낸 이인섭의 서자 이중식(李重植)에게 시집갔다.

서학 등 새로운 사조(思潮)에 눈떴던 집안

다산의 집안은 혼맥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익 계열의 학통을 계승하고, 서학(천주학)에 관련을 맺게 된다.

다산의 누이는 조선 최초의 영세교인인 만천 이승훈(蔓川 李承薰 : 1756-1801)에게 시집갔고, 다산 자신은 이승훈의 누이를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당시 명망이 높던 이가환(李家煥)은 이승훈의 외삼촌이며 이익(星湖 李瀷)의 종손이었다.

광암 이벽(李檗)은 다산의 맏형인 정약현의 처남이다. 다산은 그를 통해 처음 서학(천주학)을 접하게 된다.

또 백서(帛書)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1775-1801)은 다산의 조카사위이다. 16세 때 진사시에 장원급제한 수재인 황사영이 정약용의 맏형인 약현의 딸(丁命蓮)에게 장가들었다.

재능이 있었으나 닫힌 시대와 당쟁에 희생된 형제들

다산의 작은 형 정약종은 형제보다 뒤늦게 천주교를 접했지만 그 믿음이 독실하여 신유사옥 때(1801) 희생되었다. 전도에 힘쓰다가 책롱사건으로 마흔 둘의 젊은 나이에 순교했다. 형 약전과 막내(다산)가 믿음을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형제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했다. 엄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배교하지 않은 약종의 아들 철상(哲祥), 하상(夏祥), 딸 정혜(貞惠) 역시 천주교로 인해 요절했다.
이가환과 이승훈도 이때 죽음을 당하고, 다산은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다 경상도 장기로 유배당했다.

뒤이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황사영은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로 인해 경상도 장기에 유배되어 있던 다산은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취조를 받았다. 관련사실이 드러나지 않아 극형은 면했으나 형 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된다.

형 약전은 학문적으로 뛰어난 사람이다. 다산과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의 연(緣)뿐만 아니라 다산의 학문을 알아주는 지기(知己)이기도 했다. 1801년 11월 하순 함께 귀양길에 올라 나주 율정점(栗亭店)에서 눈물로 헤어진 후 16년 동안 서로 한번도 보지 못했다. 약전은 그의 나이 59세인 1816년에 유배지에서 세상을 떴다.

(2) 청년기

다산은 스스로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제법 문자를 알았다’고 회고했다. 9세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10세부터 과예(課藝)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침 아버지가 벼슬을 하지 않고 있는 동안에 경전(經典)과 사서(史書) · 고문(古文)을 매우 부지런히 읽었으며, 또 시율(詩律)을 잘 짓는다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이 무렵에 지은 시를 모아 『삼미자집(三眉子集)』을 만들었다(현재 전하지 않음). 삼미(三眉)의 뜻은 유년시절에 마마를 앓아 눈썹에 마마 자국이 있어 눈썹이 셋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실학의 대가 성호 이익을 사숙(私淑)하다

다산은 15세에 홍화보의 딸(풍산 홍씨)과 결혼했다. 마침 아버지가 호조좌랑으로 다시 벼슬에 나가게 되어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살게 되었다. 이것은 지방수재에 불과했던 그에게 세상과 학문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다산은 이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때 서울에는 이가환(李家煥) 공이 문학으로써 일세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자형인 이승훈(李承薰)도 또한 몸을 가다듬고 학문에 힘쓰고 있었는데, 모두가 성호 이익(星湖 李瀷) 선생의 학문을 이어받아 펼쳐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약용도 성호 선생이 남기신 글들을 얻어 보게 되자 흔연히 학문을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16세 때(정조 원년, 丁酉, 1777)에 아버지가 화순(和順)현감으로 나가게 됐다. 다산도 따라가서 그 이듬해에는 동림사(東林寺)에서 독서를 했다(〈동림사독서기〉 참조). 19세(庚子年, 1780) 봄에는 아버지께서 예천(醴泉)군수로 옮겼다. 다산은 진주(晉州)에 들러 노닐다가 예천으로 가서 쓰러져가는 관청집에서 공부를 했다. 21세(壬寅年, 1782) 가을에는 봉은사에 머물면서 경의과(經義科)의 과목을 공부했다.

정조의 총애가 시작되다

22세(癸卯年, 1783) 봄에는 경의과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게 됐다. 여기서 다산은 10년 연상인 33세의 정조를 처음 만난다. 정조가 중용강의(中庸講義) 80여 조목에 관하여 답변토록 과제를 냈다. 이발기발(理發氣發)의 문제에 있어서 이벽(李檗)은 퇴계 이황의 학설을 주장했고 다산이 답변한 내용은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학설과 우연히 합치됐다. 정조가 다 보고 난 후 다산을 매우 칭찬하고 1등으로 삼아주었다. 다산은 이후 성균관 우등생으로 학자군주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서학을 처음 접하다

23세(甲辰年, 1784) 4월 이벽을 따라 두미협(斗尾峽)으로 배를 타고 내려가다 처음으로 서교(西敎)에 대하여 이야기를 듣고 책을 보았다. 그러나 다산은 성균관(태학) 공부에 힘쓰느라 그 외의 일에 마음을 둘 겨를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26세(丁未年, 1787) 이후로는 임금의 총애가 더욱 높아갔고 자주 이기경(李基慶)의 정자(亭子)에 나가 과거 공부에 열중했다. 이기경도 서교 듣기를 즐겨하여 손수 한 권의 책을 베껴놓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듬해(戊申年: 정조 12년, 1788) 서교를 탄압하자는 상소가 빗발쳤고 서교에 관한 책을 압수해 불사르기도 했으며, 남인 내에서 공서파(攻西派)가 분리해나가기 시작했다. 홍낙안 · 목만중 · 이기경 등이 정약용 등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3) 벼슬시절

정조의 기대 아래 벼슬길 시작되다

28세 때(己酉年, 1789) 봄에 다산은 대과에 합격하여 희릉직장(禧陵直長)으로 발령을 받았다. 벼슬길이 시작된 것이다. 다산의 벼슬생활은 39세, 즉 정조가 죽은 해(1800)까지 계속됐다. 정조 시절 후반기 12년 동안에 해당한다.

그리고 대신들의 품의로 규장각(奎章閣)의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됐다. 규장각은 정조가 젊고 학문적 자질이 뛰어난 인재를 골라 더욱 학문에 정진하게 하고 장차 개혁의 중심세력으로 삼고자 만든 것이다. 다산은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측근으로 활동하게 됐다.

화성에 발현된 기술관료 다산의 역량

31세 때(임자년, 1792) 봄에 홍문관의 수찬(修撰)이 되었다. 4월에는 아버지가 진주 임소에서 돌아가셨다. 집에서 여막살이를 하는 다산에게 정조는 임무를 맡겼다. 정조가 기유년(28세, 1789) 겨울에 한강에 부교(浮橋:배다리)를 놓을 때 다산이 그 일을 성공적으로 해낸 것을 상기하면서, 다산에게 수원 화성의 설계도를 작성해 바치라고 명한 것이다. 신도시 수원 화성은 정조가 사도세자를 위해 계획한 각별한 것이었다.

다산은 윤경(尹畊)의 〈보약(堡約)〉과 유성룡(柳成龍)의 〈성제(城制)〉를 참조하여 종합하되, 벽돌을 이용하고 성벽의 중간부분을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등 독창성을 발휘했다. 그의 설계는 문앞을 반원 형태로 둘러싸는 옹성, 적군이 성벽을 기어오르는 것을 막기 위한 포루와 적루, 이를 감시하는 현안, 화공을 막기 위해 물을 쏟는 장치인 누조 등이 특징이다.

또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을 창안하고 활차(滑車)와 고륜(鼓輪) 등을 써서 작은 힘으로 크고 무거운 물건을 운반할 수 있게 했다. 이로써 비용을 4만냥 이상 절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반 백성을 부역으로 강제동원하지 않고 임금노동자인 모군만으로 성을 건설할 수 있었다.

암행어사 정약용

33세(갑인년, 1794) 7월에 아버지의 복을 마치자 성균관 직강으로 제수 받았으며, 8월에는 비변사(備邊司)의 낭관을 맡았다. 10월에 다산은 정조의 은밀한 명에 의해 경기 암행어사가 되었다.

다산이 맡은 지역은 적성, 마전, 연천, 삭녕이었다. 다산은 민간에 암행하면서 백성들의 참혹한 현실을 직접 목도했다. 이는 시(奉旨廉察到積城村舍作 : 교지를 받들고 순찰하던 중 적성의 시골집에서 짓다)’에 잘 나타난다. 백성의 참상이 수령과 아전들의 착취로 인한 것으로 파악하고 제도를 악용하여 착취를 일삼는 탐관오리를 벌주었다.

다산은 고위직에게도 추상같았다. 암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다산이 관찰사(觀察使) 서용보(徐龍輔)의 비리를 정조에게 고했다. 이 고발사건으로 서용보는 다산에 악감정을 갖고 정조 사후 철저하게 보복하게 된다.

34세(을묘년, 정조 19년, 1795) 정월에는 특별히 사간(司諫)으로 임명되고 이어서 통정대부(通政大夫)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됐다. 2월에 임금은 다산을 특별히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제수하고 화성에서 있을 대행사(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에 시위(侍衛)해서 따라오도록 했다. 정조의 다산에 대한 신임과 기대는 더욱 커갔다.

다산을 둘러싼 불안한 기운

30세(辛亥年, 1791) 전라도 진산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진사 윤지충과 그의 내외종 사촌 권상연이 제사를 폐지하고 부모의 위패를 불태웠다하여 처형되었다. 이때 홍낙안(洪樂安) 이기경 등이 이승훈 정약용 등을 공격하고 이후로 사이가 더욱 멀어졌다.

계축년(32세, 정조17년, 1793) 여름에 문숙공(文肅公) 채제공이 화성유수(華城留守)로 있다가 영의정이 되어 들어와 상소를 올렸다. 임오년(1762년, 사도세자(思悼世子)가 벽파의 모함으로 뒤주 속에서 굶어죽은 해. 다산이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에 참소했던 사람(노론 벽파)을 처벌하자고 주장한 것이었다.

정국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정조는 영조의 금등지사(金縢之詞)를 꺼내 보이면서 장헌세자의 효심과 영조의 후회감을 밝혀주어 겨우 파문이 진정되었다. 비록 파문이 진정되었지만, 다산은 “우리 당(黨)의 참혹한 화란은 대개 이 사건에서 움트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간 노론 벽파는 현실적인 정치실세였다. 정조는 그 속에서 착실히 개혁세력을 성장시키면서 상황을 바로잡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노론 벽파는 천주교를 빌미로 반격을 노리고 있었다.

천주교를 빌미로 한 노론의 대공세

을묘년(정조 19년, 1795) 여름 4월에 중국의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周文謨)가 변복을 하고 몰래 들어와서 북악산 아래 숨어서는 서교(西敎)를 몰래 펴고 있었다. 체포하려 했으나 주문모는 놓쳐버리고 최인길(崔仁吉) · 윤유일(尹有一) 등 3인을 붙잡아 장살(杖殺)해버렸다.

이 사건을 빌미로 노론이 공세를 퍼부었다. 목표는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이었다. 정조는 곤혹스러웠다. 이들을 비호했지만, 계속되는 공세에 한발 물러나서 오히려 이가환과 정약용의 천주교 혐의를 씻어주고자 했다. 이가환을 충주목사(忠州牧使)로, 정약용을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하여 임명하고, 이승훈은 예산현(禮山縣)으로 유배 보냈다.

금정(金井)은 충청도 홍주(洪州)에 소속된 역원(譯院)인데, 역속(驛屬)들이 대부분 천주교를 믿고 있었다. 다산은 금정에 도착하여 그곳의 세력가들을 불러다가 조정의 금령(禁令)을 거듭거듭 설명해 주고 제사지내는 일을 권고했다. 그리고 기호지방의 중요한 천주교도인 이존창을 체포하여 감화시켰다.

다산 36세(정사년, 1797) 정조는 다산이 천주교 혐의를 충분히 씻었으므로 중용할 때라 생각했다. 그래서 6월 다산을 동부승지로 임용했다. 이에 대해 다산은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상소문’을 올려 천주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솔직히 밝혔다. 이 상소는 다산이 한때 천주교에 경도되었지만 나중에 버렸노라는 변명이자 고백이었다. 그러나 반대파는 이 글의 일부 문구만 떼어내 다산이 천주교 신자라는 증거라며 더욱 몰아 세웠다.

곡산부사, 지방행정관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하다

사직상소를 낸 다음달 정조는 다산을 황해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특별히 임명했다. 그때 세력을 잡은 자로 참소하고 시샘하는 자가 많아 다산을 몇 년 외직(지방직)에 근무하도록 하여 그 불길을 진정시키려는 것이었다.

곡산에 이계심(李啓心)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백성 천여 명을 이끌고 관청에 와서 백성들의 고초에 대해 항의하다 달아난 사건이 있었다. 그 이계심이 다산이 곡산으로 부임하는 길에 나타나 백성들의 고통 사항 10여 조목을 적은 글을 바치고는 길가에 엎드려 자수했다. 옆 사람들이 체포하려 했으나 다산은 저지했다. 다산은 관청의 행정에 항의하는 태도가 오히려 관청이 밝은 행정을 하는 데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권위적 지배를 부정하고 백성의 고통을 해결해주려는 목민관의 자세를 몸소 실천했던 것이다.

다산은 곡산부사로 있은 2년간 직접 한 고을의 피폐한 민생을 구제하고 누적된 폐단을 바로잡는 행정을 펼 수 있었다.

정조임금의 죽음, 하늘이 무너지다

다산이 아직 곡산부사로 있던 38세 때(己未, 1799) 정월에 명재상 채제공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다산의 정치적 후견인이었다. 불길한 전조였다.

4월 정조는 다산을 다시 조정에 불러 형조 참의에 제수했다. 곡산부사로 있으면서 의심스러운 사건들을 명쾌하게 해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의 신임이 높아갈수록 주위의 시기도 높아졌다. 대사간 신헌조(申獻朝)가 계(啓)를 올려 권철신(權哲身)과 다산의 형 약종(若鍾)을 사학의 죄인으로 처벌하기를 요구했다.

다산은 39세(경신년, 1800) 봄에 처자식을 거느리고 마현(馬峴)의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참소하고 시기하는 사람이 많은데 벼슬을 하지 않고 낙향하면 공격받지 않으리란 생각에서였다. 정조는 그를 놓아 둘 수 없었다. 다시 불렀다. 그러나 정조의 건강에 탈이 났고 보름새에 운명하고 말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에 빠져있을 때, 죽음의 그림자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다산에게는 이제는 아무런 보호막이 없었다.

(4) 유배시절

죽음의 문턱에서 귀양지로

1800년 6월 정조가 죽자 11세의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고 노론 벽파들이 전권을 장악했다. 이듬해(신유년, 1801) 호시탐탐 노리던 노론 벽파는 장례가 끝나자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채제공의 뒤를 이을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 정조가 장차 크게 쓰려했던 인재들이 붙잡혀 왔다. 이가환, 이승훈은 사교도라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다(신유교옥). 다산은 사지(死地)에서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18년간의 긴 귀양살이가 시작됐다.

다산의 나이 40이었다. 신중하면서도 용기를 지녔던 다산, 중앙과 지방에서 두루 행정경험을 쌓았던 다산, 장차 명재상이 될 것이 예상되었던 다산, 조선을 새롭게 했으리라 기대할 수 있었던 다산. 그러나 다산은 먼 귀양길을 떠나야 했다.

첫 귀양지는 포항 장기였다. 9개월을 지냈는데 황사영 백서사건이 발생하자 다산은 다시 서울로 압송되었다. 다산의 적들은 다산에게 혹독한 심문을 가했지만 다산을 죽이는 데는 실패했다. 다산은 다시 강진으로 유배됐다.

개인적 아픔보다 시대의 아픔에

강진에 도착했을 때, 유배초기인지라 인심은 싸늘했다. 한 늙은 주모의 도움으로 머무른 곳이 동문 밖 주막(酒家)이었다. 이곳에서 1805년 겨울까지 약 4년간 거처했다. 감시의 눈도 심했고 무고도 있었다.

다산은 주막 골방에서 머물면서 주막집을 ‘동천여사(東泉旅舍)’라 일컬었는데, 42세 때 동짓날 자기가 묵던 작은 방을 사의재(四宜齋)라 불렀다. 생각을 담백하게 하고, 외모를 장엄하게 하고, 언어를 과묵하게 하고, 행동을 신중하게 하겠다는 뜻이다.

두 번째 거처로 보은산방(寶恩山房 : 고성사)에 머물렀다. 44세 때(1805) 겨울 큰아들 정학연이 이곳에 찾아와 머물렀고, 다산은 큰아들에게 주역과 예기를 가르쳤다. 45세 때(1806) 가을 9개월 만에 다시 목리(牧里) 이학래(李鶴來)집으로 옮겼다. 1808년 봄 다산초당으로 옮기게 될 때까지 약 1년 반 동안 머물렀다.

다산은 유배생활의 고초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독서와 저술에 열중했다. 다산은 먼저 예학과 주역을 공부했다. 경학에 힘써 당시의 지배이데올로기였던 주자 성리학을 극복하고자 했다. 관념론이 아닌 실천론으로서의 경학이었다.

다산은 개인적 슬픔에 빠져 있지 않고 어두운 시대에 아파했다. 사실 다산이 겪는 고초는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불의(不義)의 시대에 태어난 탓이었다. 그의 시문은 민초들의 고통을 그대로 담아내었다. 농민들의 착취와 압제의 실상을 목격하고, 농촌현실에 근거한 문제의식과 그 해결을 위한 저술에 몰두했다.

다산초당에서 이룬 학문적 업적

다산은 47세 때(1808) 봄에 강진읍에서 서남쪽으로 20리쯤 떨어진 다산(茶山)의 귤동(橘洞 : 현재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산정(山亭)으로 옮겼다. 이 초가가 유배생활 후반부 10년을 머물면서 역사에 빛나는 학문적 업적을 남긴 다산초당이다.

경학 이외에 경세학(經世學)과 다방면의 실용적인 학문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유배 초기에는 6경 4서에 관한 경학연구서 232권의 저술을 마쳤고, 나중에는 경세유포, 목민심서 등의 저술을 마쳤다.

경세유표는 나라를 새롭게 하기 위한 정책제안서이다. 목민심서는 현행법 내에서도 공직을 바로잡아 백성을 살려내려는 취지였다. 다산의 정확한 현실인식과 행정경험을 바탕으로 조선후기의 시대적 모순을 해결하고 민(民)을 구제하기위한 방략이었다.

다산은 유배생활 중에도 제자들을 길러냈다. 강진 읍내에 머물면서 아전들의 자제들을 가르쳤다. 나중에는 그의 외가 친척들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집안의 자제들을 가르쳤다. 이들 제자들은 또한 다산 저술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돌아가는 것도 돌아가지 못하는 것도 운명일 뿐

다산은 만덕사(萬德寺 : 백련사)에 머물고 있던 혜장선사(惠藏禪師)를 만났다. 열 살 이상 연하의 스님을 만나 학문과 우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혜장은 1811년 40세의 나이로 입적하고 만다.

유배기간 중에 형 정약전이 명을 달리 한 것은 크나큰 슬픔이었다. 약전은 다산의 학문을 알아주고 격려해 주었던 지기(知己)였다. 다산은 형과 유배길에서 헤어진 후 만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편지와 저술을 보내 연락하고 있었다. 약전은 다산의 귀양살이가 풀릴 것이라는 말을 듣고 곧 아우를 만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해배는 이뤄지지 않았다. 약전은 유배 16년 만에(1816) 끝내 아우를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

강진에서의 유배생활 동안 몇 차례 풀려날 기회가 있었지만 서용보 등 반대파의 저지로 번번이 무산되었다. 다산은 구차하게 선처를 구하지 않았다. 무익한 일이 분명한데 자존심까지 잃을 수 없었다.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느냐 못 돌아가느냐를 모두 운명이라 여겼다.

(5) 만년

유유자적의 시절, 학문과 인생을 정리

57세 때 가을,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산은 북한강을 유람하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기도 하는 한편, 자신의 학문과 생애를 정리했다.

이미 이루어진 저술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데 힘썼다. 미완으로 남아있던 『목민심서』를 완성했으며, 『흠흠신서』를 저술하여 경세론의 삼부작(1표2서)을 완성했다. 또한 『아언각비』 등의 저작을 내놓았다.

1822년 회갑을 맞이하여, 자신의 60평생을 돌아보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지었다. 자신의 생애를 정리한 자서전적 기록이다. 당쟁에 얽혀 잘못 알려질 수 있는 사실들을 바로 알리고자 하는 의도도 담겨 있었다.

나의 학문과 사상 훗날 알아주리라

다산은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18년을 더 살았다. 1836년 그의 부부가 혼인한 지 60주년이 되는 회혼(回婚)의 날, 그리하여 친척들과 자손들이 모인 날. 그는 75세로 세상을 마쳤다.

다산은 만년에 ‘사암(俟菴)’을 자신의 호로 사용했다. 사암(俟菴)이란 ‘백세이사성인이불혹(百世以俟聖人而不惑)’ 즉 ‘뒷날의 성인을 기다려도 미혹함이 없다’는 뜻이다. 어떤 성인에게도 자기 학문은 질책 받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이 배어있다.

자신을 버린 불의(不義)의 시대는 자신의 실천적 학문을 수용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시대를 넘어 다음 시대에서나마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알아줄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겠다는 뜻이었다.


2.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들


[18] 자고 일어나 곧 시냇가로 달려가서 양치질하고 얼굴을 씻고, 식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여러 중들과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 날이 저물어 별이 보이면 언덕에 올라 휘파람 불며 시를 읊조리고, 밤이면 중이 게송을 읊고 불경을 외우는 소리를 듣다가 다시 책을 읽는다. 이렇게 40일 동안 하고는 내가 말하기를,
“중이 중노릇을 하는 이유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무릇 부모, 형제, 처자의 즐거움이 없고, 술 마시고 고기 먹고 음탕한 소리와 아름다운 여색의 즐거움이 없는데, 저들은 어찌하여 고통스럽게도 중노릇을 합니까. 진실로 그와 바꿀 수 있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형제가 학문을 한 지 이미 여러 해 되었는데, 일찍이 동림사에서 맛본 것 같은 즐거움이 또 있었습니까?” 하였더니 둘째형님도 이렇게 말하였다.
“그렇다. 그것이 중노릇하는 까닭일 것이다.”

[19]어렸을 때 노닐던 곳에 어른이 되어 온다면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고, 곤궁했을 때 지내던 곳을 입신출세하여 찾아온다면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며, 홀로 외롭게 지나가던 땅을 좋은 손님들과 마음에 맞는 친구들을 이끌고 온다면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22] 무릇 사물 중에서 아름다운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갖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물건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그것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이 더욱 많게 되며, 그것을 얻기도 더욱 힘들게 된다. 비옥한 전담과 높은 집, 길다란 인끈과 포근한 갖옷, 아리따운 여자와 좋은 말 같은 것은 평생토록 얻으려고 애쓰지만, 어떤 사람은 얻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얻지 못한다. 그것을 얻을 때는 마치 사나운 새와 짐승이 먹이를 움켜잡고서 사방을 둘러보는 것과 같으며, 그것을 얻지 못할 때는 마치 궁한 귀신이 슬피 울부짖는 것과 같으니 또한 가련하지 않은가.

[23] 무릇 천하 만물의 아름다움을 모두 따져보아도 하늘에 있는 물건의 아름다움만은 못하다. 그러나 해는 너무 뜨겁고, 별은 너무 희미하며 구름과 안개는 너무 쉽게 없어지니, 마음을 기쁘게 하는 점에서는 모두가 달만 못하다.

[24] 자기가 하고 싶지는 않으나 부득이 해야 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이요, 자기는 하고 싶으나 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그만둘 수 있는 일이다. 그만둘 수 없는 일은 항상 그 일을 하고는 있지만, 자기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그만 둔다. 하고 싶은 일은 언제나 할 수 있으나, 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또한 때때로 그만둔다. 진실로 이와 같이 된다면 천하에 도무지 일이 없을 것이다.

[24] 어려서부터 세속 밖에 멋대로 돌아다니면서 의심이 없었고, 이미 장성하여서는 과거공부에 빠져 돌아설 줄 몰랐고, 나이 서른이 되어서는 지난 일의 과오를 깊이 뉘우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선을 끝없이 좋아하였지만 비방은 홀로 많이 받고 있다. 아, 이것이 또한 운명이란 말인가? 이것은 나의 본성 때문이니, 내가 또 어찌 감히 운명을 말하겠는가? 내가 노자의 말을 보건대,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與),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은 두려워하듯 경계하라(猶)."
고 하였으니 아, 이 두 마디 말은 내 병을 고치는 약이 아닌가? 대체로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뼈를 에듯 하므로 매우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건너지 않으며, 사방의 이웃이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 자기 몸에 이를까 염려한 때문에 매우 부득이한 경우라도 하지 않는다.

[28] 옛 사람이 산을 바라보기만 하여 그 흥취의 반쯤은 남겨놓은 것을 미인을 반쯤 본 것에 비유하여, “얼굴은 아름다웠으나 그 자태는 기억할 수가 없다”고 한 것은 매우 훌륭한 비유다.

[32] 우리나라의 일은 고려 이전까지는 모두 물을 것이 없다.

[61] 내 몸을 이미 엄정하게 닦았다면 그 벗을 사귀는 것도 자연히 단정한 사람일 것이다. 서로를 알아주는 지기는 서로 모이게 되는 것이므로 결코 특별한 힘을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

[62] 사람을 알아보려면 먼저 가정에서의 행실을 살펴야 한다. 만약 그의 옳지 못한 점을 발견하면 즉시 자신에게 비춰보아, 자기에게도 그러한 잘못이 있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러지 않도록 힘차게 공부를 해야 한다.

[63] 임금을 섬기는 방법이란 임금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지 임금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며, 임금에게 신임 받는 사람이 되어야지 임금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침저녁으로 가까이 모시고 있는 사람은 임금이 존경하지 않으며, 사부를 잘 읊는 사람도 임금이 존경하지 않으며, 글씨를 민첩하게 쓰는 사람은 임금이 존경하지 않으며, 임금의 얼굴 표정을 살피며 비위를 잘 맞추는 사람은 임금이 존경하지 않으며, 거듭 관직을 버리고 가는 사람은 임금이 존경하지 않으며, 위의가 장엄하지 않은 사람은 임금이 존경하지 않으며, 측근 신하의 세력에 도움을 받으려는 사람은 임금이 존경하지 않는다.

[64] 지위가 낮은 벼슬에 있을 때에는 온 정성을 다하여 부지런히 공무에 힘써야 하고 언관의 지위에 있을 때는 모름지기 날마다 격언과 곧은 의론을 올려서 위로는 임금의 과실을 비판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고통을 알아야 한다.

[70] 대체로 저술하는 법은 우선 경적을 으뜸으로 삼아야 하고 그 다음은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윤택하게 하는 학문이어야 하며, 국경을 지키고 성을 쌓는 기구의 제도로 외침을 막아낼 수 있는 분야의 것들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자질구레한 이야기들로 구차하게 한때의 괴상한 웃음이나 자아내게 하는 책이라든지, 진부하고 새롭지 못한 이야기나 지루하고 쓸데없는 논의와 같은 것들은 다만 종이와 먹만 허비할 뿐이니, 좋은 과일나무를 심고 좋은 채소를 가꾸어 생전의 살 도리나 넉넉하게 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76] 화와 복의 이치에 대하여는 옛날 사람들도 의심해온 지 오래되었다. 충과 효를 행한 사람이라 하여 반드시 화를 면하는 것도 아니고, 음란하고 방탕한 자라 하여 반드시 박복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 것이 복을 받는 도가 되므로 군자는 부지런히 선을 행할 뿐이다.

[76] 대체로 부귀한 집안의 자식들은 재난이 화급한데도 아무런 걱정이 없는 반면, 몰락하여 버림받은 집의 가족들은 태평한 세상인데도 언제나 걱정이 있는 것처럼 말을 하는데, 이는 그들이 그늘진 벼랑이나 깊숙한 골짜기에 살다 보니 햇빛을 보지 못하고 함께 지내는 사람들도 모두가 버림받고 벼슬길이 막혀 원망하고 지내는 부류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듣는 것이라고는 모두가 사정에 어둡고 허탄하고 편벽되고 너절하고 더러운 이야기뿐이니 이것이 바로 영원히 가버리고 돌아보지 않게 되는 이유이다.
진실로 너희들에게 바라노니, 항상 심기를 화평하게 가져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다름없이 하라. 그리하여 아들이나 손자의 세대에 가서는 과거에도 마음을 두고 경제에도 정신을 기울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늘의 이치는 돌고 도는 것이라서, 한번 쓰러졌다 하여 결코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하루아침의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서둘러 먼 시골로 이사가버리는 사람은 천한 무지렁이로 끝나고 말 뿐이다.

[77] 군자가 책을 지어 세상에 전하려는 것은 오직 한 사람이 알아주기만 하면 온 세상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도 꺼리지 않는 것이다. 만약 나의 책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의 나이가 많으면 너희들은 아버지로 섬기고 너희와 엇비슷한 나이라면 너희들이 형제로 맺는 것도 좋을 것이다.

[79] 학문을 깊이 연구하는 노력은 조금 늦추더라도 먼저 올바른 몸가짐의 공부에 힘써 육중한 산처럼 우뚝 솟은 모습으로 고요히 앉아 있는 자세를 익혀야 한다.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하는 데도 먼저 기상을 점검해서 자기 본령을 세울 줄 안 다음에 점차로 저술에 마음을 기울여야만이 한마디 말, 한 구절의 글이 모두 남들이 아끼고 애호하는 바가 될 것이다. 만약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경시하여 땅에 버려진 흙같이 한다면 이는 정말 끝나버리는 일일 뿐이다.

[79] 세간의 의식의 자료나 재화의 물품은 모두 부질없는 것들이다. 옷은 입으면 해지게 마련이고, 음식은 먹으면 썩게 마련이며, 재물은 자손에게 전해주어도 끝내는 탕진되어 흩어지고 마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가난한 친척이나 가난한 벗에게 나누어 주는 것만이 영구히 없어지지 않는다.

[80] 형체가 있는 것은 파괴되기 쉽지만 형체가 없는 것은 없애기가 어려운 것이다. 자기가 자기 재물을 사용하는 것은 형체로 사용하는 것이요, 제 재물을 남에게 베풀어주는 것은 정신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된다. 물질로써 물질적인 향락을 누리면 해지고 파괴되는 수밖에 없지만 형체 없는 정신적인 향락을 누린다면 변하거나 없어지는 낭패를 당하지 않는 법이다.

[80] 저녁 무렵에 숲속을 거닐다가 우연히 한 아이를 보았다. 그런데 그 아이가 자지러지는 소리로 울어대며 참새 뛰듯 수없이 뛰기를 여러 개의 송곳날에 배를 찔린 듯, 방망이로 가슴을 얻어맞은 듯, 참담하고 절박하기가 금방 죽어가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까닭을 물으니 그 아이가 나무 아래서 밤 한 톨을 주었는데 어떤 사람이 그걸 빼앗아갔다는 것이었다.
아아! 천하에 이 어린아이처럼 울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저 벼슬을 잃고 세력을 잃을 자나 재물을 손해보고 돈을 잃은 자나 아들을 잃고 애통해하다 죽음에 이르게 된 자는 모두 달관한 사람의 안목으로 본다면 모두 한 톨의 밤과 같은 유인 것이다.

[82] 송나라 학자 육자정은 말하였다.
“우주 사이의 일이란 바로 자기 분수 안의 일이요, 자기 분수 안의 일은 바로 우주 사이의 일이다.”

[82] 전체가 모두 완전하더라도 구멍 하나가 새면 이는 바로 깨진 옹기그릇일 뿐이요, 백 마디가 모두 신뢰할 만하더라도 한마디의 거짓이 있다면 이건 바로 도깨비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너희들은 아주 조심해야 한다.

[83] 큰 흉년이 들어 굶어 죽은 백성들이 수만 명이나 되므로 하늘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으나, 내가 굶어 죽은 사람들을 살펴보니 대체로 모두 게으른 사람들이었다. 하늘은 게으른 자를 미워하며 벌을 내려 죽이는 것이다.

[83] 나는 논밭과 동산을 너희에게 남겨줄 수 있을 만한 벼슬은 하지 않았다만 오직 두 글자의 신비로운 부적이 있어서 삶을 넉넉히 하고 가난을 구제할 수 있기에 이제 너희들에게 주노니 너희는 소홀히 여기지 마라. 한 글자는 ‘근(勤)’이요, 또 한 글자는 ‘검(儉)’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전답이나 비옥한 토지보다도 나은 것이니 일생동안 필요한 것에 쓴다 해도 다 쓰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근’이란 무얼 말하는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며, 아침에 할 수 있는 일을 저녁때까지 미루지 말며, 갠 날에 해야 일을 비 오는 날까지 끌지 말며, 비 오는 날에 해야 할 일을 날이 갤 때까지 지연시켜서는 안 된다. 늙은이는 앉아서 감독할 바가 있고 어린이는 다니면서 받들어 행할 바가 있으니, 젊은이는 힘든 일을 맡고 아픈 사람은 지키는 일을 하며, 아낙네는 밤 사경이 되기 전엔 잠자리에 들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집안의 상하 남녀가 한 사람도 놀고먹는 식구가 없게 하고 한 순간도 한가한 시간이 없도록 하는 것을 ‘근’이라고 한다.
‘검’이란 무엇인가? 의복은 몸을 가리기 위한 것을 취할 뿐이니, 가는 베로 만든 옷은 해지지만 하면 볼품없어지고 만다. 그러나 거친 베로 만든 옷은 비록 해진다 해도 볼품없진 않다. 한 벌의 옷을 만들 때마다 모름지기 이후에도 계속하여 입을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하는데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면 가는 베로 만들어 해지고 말 뿐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고운 베를 버리고 거친 베로 만들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음식이란 생명만 연장하면 도니다. 모든 맛있는 횟감이나 생선도 입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모든 맛있는 횟감이나 생선도 입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더러운 물건이 되어버리므로 목구멍으로 넘기기도 전에 사람들은 더럽다고 침을 뱉는 것이다.

[95] 도량의 근본은 용서함에 있다. 용서만 할 수 있다면 좀도둑과 세상을 어지럽히는 무리라 할지라도 아무 말 없이 보아 넘길 수 있을 것인데 하물며 그 밖의 일이야 말할 게 이겠느냐.

[97] 한차례 배가 부르면 살찔 듯이 여기고 한차례 주리면 마를 듯이 여기는 것은 천한 짐승들이나 하는 것이다. 시야가 짧은 사람은 오늘 자신의 뜻과 같지 않은 일이 있으면 당장에 눈물을 줄줄 흘리고, 다음날에 뜻에 맞는 일이 있으면 벙긋거리며 낯빛을 펴곤 하여, 일체의 근심, 유쾌함, 슬픔, 기쁨, 감격, 분노, 애정, 미움 등의 감정이 대부분 아침저녁으로 변한다. 그러나 달관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보면 비웃지 않겠느냐?

[97] 아침에 햇빛을 먼저 받는 곳은 저녁때 그늘이 빨리 들고, 일찍 피는 꽃은 그 시듦도 빠르다는 진리인 것이다. 운명은 돌고 돌아 한 시각도 멈추지 않는 것이니 이 세상에 뜻이 있는 사람은 한 때의 재해 때문에 마침내 청운의 뜻까지 꺾어서는 안 된다. 사나이의 가슴속에는 가을 매가 하늘로 치솟는 기상을 지니고서 천지가 눈 안에 들고 우주가 손바닥 안에 있듯이 생각하고 있어야 옳다.

[98] 남이 알지 못하도록 하고 싶으면 행위를 하지 않은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남이 듣지 못하도록 하고 싶으면 말을 하지 않는 것 만한 것이 없다.

[99] 편지 한 장을 쓸 때마다 모름지기 두 번 세 번 읽어보면서 기원하기를 “이 편지가 사거리의 번화가에 떨어져 있어 원수진 사람이 열어보더라도 나에게 죄가 없을 것인가?”라고 하고, 또 “이 편지가 수백 년 뒤까지 세상에 퍼지고 전해져 허다한 식별력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도 나에게 비난이 없을 것인가?”라고 한 뒤에 봉함해야 하니, 이것이 군자가 행동을 삼가는 태도이다. 나는 젊은 시절에 글씨를 빨리 썼으므로 이 계율을 많이 범하였다. 중년에는 화란이 두려워 점차로 이 법도를 지켰더니 매우 유익하였다. 너희들은 이 점에 명심하라.

[109] 내가 저술에 전념하는 것은 단지 눈앞의 근심만을 잊으려는 것뿐이 아니다. 부형이 되어서 이토록 누를 끼쳐준 것을 부끄럽게 여겨 이로써 속죄하고자 해서이니, 이 뜻이 어찌 심각하다고 하지 않겠느냐.

[111] 내가 너희들이 의지를 보니 문자를 폐지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참으로 하나의 비천하고 무식한 죄인이 되려고 그러느냐? 대대로 절의를 높이 받들어온 가문일 때는 문자를 하지 않아도 혼인도 할 수 있고 군역도 면할 수 있거니와, 폐족이 되어서 문자를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문자는 그래도 역사에 속하거니와, 학문을 하지 않고 예의가 없으면 금수와 다를 것이 있겠느냐?
폐족 중에 종종 뛰어난 인재들이 많은데, 이는 다름이 아니라 과거 공부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니, 절대로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하여 스스로 좌절하지 말고 경전에 힘과 마음을 써서 책 읽는 사람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를 간절히 빈다.

[112] 책을 가려 뽑는 방법은 나의 학문이 먼저 주관이 있어 확립된 뒤에야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저울이 마음속에 있어서 취하고 버리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는 것이다.

[113] 부자간에 스승과 제자가 되는 것 또한 즐겁지 않겠느냐?

[115] 그 폐족의 처지를 잘 대처한다는 함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그것은 오직 독서하는 것 한 가지 뿐이다. 이 독서야말로 인간의 제일가는 깨끗한 일로서, 호사스런 부호가의 자제는 그 맛을 알 수 없고 또한 궁벽한 시골의 수재들도 그 오묘한 이치를 알 수 없다. 오직 벼슬아치 집안의 자제로서 어려서부터 듣고 본 바가 있고 중년에 재난을 만나 너희들 처지와 같은 자라야 비로소 독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저들이 독서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뜻도 모르고 그냥 읽기만 하는 것은 독서라고 일컬을 수 없기 때문이다.

[117] 독서에는 반드시 먼저 근기(根基)를 세워야 한다. 무엇을 근기라 하는가? 학문에 뜻을 두지 않으면 독서를 할 수 없으니 학문에 뜻을 둔다면 반드시 먼저 근기를 세워야 한다. 무엇을 근기라 하는가? 효(孝), 제(悌)가 그것이다. 모름지기 먼저 효, 제를 힘써 근기를 세운다면 학문은 자연히 몸에 배게 되는 것이다. 학문이 몸에 배게 되면 독서는 따로 그 층절을 논할 것이 없다.

[118] 너희들이 만일 독서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는 나의 저서가 쓸모없게 되는 것이요, 나의 저서가 쓸모없게 되면 나는 할 일이 없게 되어, 장차 눈을 감고 마음을 쓰지 않아 흙으로 만들어 놓은 우상이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나는 열흘도 못되어 병이 날 것이요, 병이 나면 고칠 수 있는 약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들이 독서하는 것이 나의 목숨을 살리는 일이 아니겠느냐. 너희들은 이것을 생각하여라.

[119] 내가 지난번에도 누차 말하였지마는 대대로 절의를 높이 받들어 온 가문은 비록 독서를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저절로 존경을 받게 되지만, 폐족이 되어 학문에 힘쓰지 않는다면 더욱 가증스럽지 않겠느냐. 다른 사람들이 천시하고 세상에서 비루하게 여기는 것도 슬픈데, 지금 너희들은 스스로 자신을 천시하고 비루하게 여기고 있으니, 이는 너희들 스스로가 비통함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이 끝내 배우지 않고 스스로 포기해버린다면, 내가 지은 저술과 간추려 뽑아놓은 것들을 장차 누가 모아서 책을 엮고 바로잡아 보존시키겠느냐.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이는 나의 글이 끝내 전해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내 글이 전해지지 못한다면 후세 사람들은 단지 대계(臺啓)와 옥안(獄案)만을 의거해서 나를 평가하게 될 것이니, 나는 장차 어떠한 사람이 되겠느냐. 너희들은 아무쪼록 이 점을 생각해서 분발하여 학문에 힘써 나의 이 한 가닥 문맥이 너희들에게 이르러 더욱 커지고 더욱 왕성하게 하여라. 그렇게 되면 훌륭한 집안의 좋은 벼슬도 이러한 깨끗하고 귀함과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를 버리고 도모하지 않느냐.

[121] 계집종과 사내종들이 어머니와 아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를 이간하게 되는 것은 대부분 아들이나 며느리가 그 효도를 극진히 하지 못하여 어머니가 시어머니의 마음에 한탄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125] 나는 일찍이 말하기를, 『성호사설』은 후세에 전할 만한 올바른 책이 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옛사람이 만들어 놓은 글과 자신의 의론을 뒤섞어서 책을 만들었으므로 올바른 의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127] 천하에는 두 가지 큰 기준이 있는데 하나는 시비의 기준이요, 또 하나는 이해의 기준이다. 이 두 가지 큰 기준에서 네 종류의 큰 등급이 생기는 것이다. 옳은 것을 지켜서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높은 등급이요, 그 다음은 옳은 것을 지켜서 해를 받는 것이며, 그 다음은 나쁜 것을 쫓아 이익을 얻은 것이며, 가장 낮은 등급은 나쁜 것을 쫓아서 해를 받는 것이다. 너는 지금 나로 하여금 필천에게 편지를 보내어 항복을 빌라하고, 또 강가와 이가에게 애걸하라고 하니, 이는 세 번째 등급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나 끝내는 네 번째 등급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니, 내가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겠느냐.

[130] 내가 돌아가고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진실로 큰 것이기는 하지만 죽고 사는 것에 견주면 하찮은 일이다. 사람이란 경우에 따라 생선을 버리고 곰 발바닥을 취하여야 할 경우가 있는데, 하물며 돌아가고 돌아가지 못하는 하찮은 일 때문에 아양을 떨면서 동정을 애걸한다면, 만일 국경에 난리가 났을 경우 임금을 버리고 적에게 투항하지 않을 자가 과연 몇 사람이나 되겠느냐. 내가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천명이요,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는 것도 천명이다. 그러나 사람이 해야 할 도리를 닦지 않고서 천명만을 기다리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131] 인간을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반드시 한 점의 양심이 있기 때문이니, 한 점의 양심이 있어야 인간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133]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다면 차라리 진작에 죽는 것만 못하다. 아내도 나를 알아주지 못하고 자식도 나를 알아주지 못하고 일가 형제들이 모두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 처지에 나를 알아주던 우리 형님이 돌아가셨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139] 시를 지을 때는 전연 사실을 인용하지 않고 풍월이나 읊으며 바둑이야기나 술타령만 하면서 겨우 운을 읊조리는 것은 서너 집 모여 사는 시골 마을의 촌선생의 시에 불과하다. 앞으로 시를 지을 때에는 모름지기 사실을 인용하는 것을 위주로 하여야 할 것이다.

[141] 우리 농이가 죽었다니 슬프고 슬프구나. 그의 인생이 가련하다. 나의 노쇠함이 더욱 심한데 이러한 비통을 만나니, 진실로 조금도 마음을 위로할 수가 없구나. 너희들 아래로 사내아이 셋과 계집아이 하나를 잃었는데 그 중 하나는 겨우 열흘이 좀 지나서 죽었기 때문에 그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형편이고, 나머지 세 아이는 모두 세살 때여서 한창 품에서 재롱을 피우다가 죽었다. 그러나 모두 나와 너희 어머니 손에서 죽었으니, 그 죽음은 운명이라고 여겨 이번처럼 가슴을 저미듯이 아프지는 않았었다. 내가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어 작별한 지가 무척 오래인데 죽었으니 다른 아이의 죽음보다 한층 더 슬프구나.

[142]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매우 화락해서 털끝만큼도 마음속에 간격이 없게 되면 오랜 뒤에는 자연히 서로 믿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규문에 하나의 화기가 빚어지게 되면 천지의 화기가 응해서 닭이나 개, 채소나 과일 따위도 또한 제각기 무럭무럭 잘 자라서 일찍 죽는 일이 없고, 막히는 일이 없을 것이며, 나 또한 하늘의 은혜를 입어서 자연히 풀려 돌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144] 모든 일을 규문 안의 것에서 시작하여 마음을 두어 계획 조치하고 마음속에 남의 은혜를 희망하는 의사를 완전히 끊어버린다면 자연히 심기가 화평해져서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는 병폐가 없어질 것이다.

[144]내가 남에게 베풀지 않은 것을 가지고 남이 먼저 나에게 베풀어주기를 바라는 것은 너희들의 오만한 근성이 아직도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로는 유념해서 평소 일이 없을 때에 공손하고 화목하여 근신하고 충성하여 여러 집안의 환심을 사도록 힘써야 할 것이요, 절대로 마음속에 보답을 바라는 근성을 남겨두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후로는 너희들에게 우환이 있는데도 저들이 돌보지 않더라도 너희들은 절대 마음에 한을 품질 말고 오로지 곧게 어진 마음으로 ‘저 사람이 마침 서로 방해되는 일이 있어서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힘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절대로 입에 경솔한 말을 올려 “나는 일찍이 이렇게 이렇게 해주었는데 저 사람은 이렇게 이렇게 한다”고 하지 말아라. 이러한 말을 한번 하면 그 동안 쌓아 놓은 공덕이 하루아침에 바람에 날리는 재가 되어 날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

[150] 지난해에 이 때문에 병이 나서 여름 내내 병환으로 보냈고, 10월 이후로도 말할 것 없으니 너희들도 이 아비의 심정을 알 것이다. 그러나 마음에 진실로 반 푼의 성의라도 있다면 아무리 험난한 난리 속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진보가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집에 책이 없느냐? 재주가 없느냐? 눈과 귀가 총명하지 못하느냐? 무엇 때문에 스스로 포기하려 드는 것이냐? 폐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냐? 폐족은 오직 벼슬길에만 꺼리는 바가 있을 뿐, 폐족으로서 성인이 되고 문장가가 되고 진리를 통달한 선비가 되기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거리낌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크게 나은 점이 있으니, 그것은 과거를 봐야 하는 누가 없고, 또 빈곤하고 궁약한 고통이 심지를 단련시키고 슬기로운 생각을 계발해서 인정과 사물의 모습의 진실과 거짓을 두루 알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선배에 율곡 같으신 분은 어버이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괴로움으로 몇 해를 방황하다가 마침내 한번 마음을 돌이켜 도에 이르렀으며, 또한 우리 우담 정시한 선생도 세상의 배척을 받고서 더욱 그 덕이 진보되었으며, 성호께서도 집안에 화를 당한 뒤로 이름난 유학자가 되었으니, 그분들이 탁월하게 수립한 것은 권세를 잡은 부호가의 자제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이것은 너희도 일찍부터 들어오지 않았느냐.
폐족 중에 재주 있고 걸출한 선비가 많은데, 이는 하늘이 폐족에 재주 있는 사람을 내어 폐족을 후대하는 것이 아니라 지위가 높고 귀하게 되려는 마음이 학문하려는 마음을 가리지 않으므로 책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여 능히 진면목과 참다운 골수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평민으로서 학문을 하지 않는 자는 다만 용렬한 사람이 될 뿐이지만, 폐족으로서 학문을 하지 않으면 마침내는 도리에 어그러지며 사납고 비루하여 가까이 할 수 없는 자가 되어 세상의 버림을 받게 된다.

[154] 주자가 말하기를 “온화하고 양순함은 집안을 다스리는 근본이요, 부지런하고 검소함은 집안일을 처리하는 근본이며, 독서는 집안을 다시 일으키는 근본이요, 도리를 따름은 집안을 보전하는 근본이다”했으니, 이것이 이른바 거가(居家)의 네 가지 근본이다.

[155] 효도, 공경, 사랑과 남편은 온화하고 아내는 순종하며 친척과 화목하고 종을 부리는 등의 모든 행동에 관계되는 종류는 집안을 다스리는 근본에 넣어야 하고, 밭 갈고 길쌈하는 훈계와 의식에 대한 훈계, 농사짓고 가축 기르는 법 같은 것으로서 전원에 관계되는 모든 말은 집안일을 처리하는 근본에 넣어야 하고, 뜻을 세워 학문하는 것과 악을 제가하고 선으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격물, 궁리에서부터 책을 소장하거나 가려 뽑는 일, 책을 즐기고 아끼는 것과 같은 말은 집안을 다시 일으키는 근본에 넣어야 하고, 음덕을 베풀고 분노를 징계하는 것과 분수에 편안하고 곤궁에 굳세게 대처하는 것과 일에 대처하고 사물을 대응하는 것, 천명을 즐기고 운명을 아는 등의 사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하는 데에 관계되는 모든 말은 집안을 보전하는 근본에 넣어야 한다. 이것을 모두 합하여 거가의 네 가지 근본이라 이름하고 책상 위에 놓아두고 항상 읽는다면 어찌 몸과 마음에 크게 유익하지 않겠느냐. 너희들은 힘쓰도록 하여라.

[163] 시의 근본은 부자, 군신, 부부의 인륜에 있으니, 혹 그 즐거운 뜻을 널리 펼치기도 하고, 원망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나타내기도 하여라. 그 다음으로는 세상을 걱정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겨서 항상 힘이 없는 사람을 구제해주고 재물이 없는 사람을 구원해주고자 하여 배회하면서 차마 그들을 버려둘 수 없는 뜻을 둔 뒤에야 비로소 시가 되는 것이다. 만약 자기의 이해에만 관계되는 것일 뿐이라면 이는 시라 할 수 없는 것이다.

[165] 효도를 하는 사람치고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효도 하나만 제대로 하면 모든 선이 다 이르게 되는 것이다.

[166] 인의예지는 행사에 시행한 뒤에야 바야흐로 인의예지라 이름할 수 있다. 측은(惻隱), 수오(羞惡)는 바로 안에서부터 발현되는 것인데, 인성의 원리를 말하는 자들은 항상 인의예지를 가지고 네 낱의 물건이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는 것이라 하니 이는 잘못이다. 마음속에 있는 것은 측은이나 수오의 근본일 뿐이니, 이것을 인의예지라고 이름할 수는 없다.

[169] 네가 닭을 기른다는 말을 들었는데 닭을 기르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중에도 품위 있고 저속하며 깨끗하고 더러운 등의 차이가 있다. 진실로 농서를 잘 읽어서 그 좋은 방법을 선택하여 시험해보되, 색깔과 종류로 구별해보기도 하고, 홰를 다르게도 만들어 사육 관리를 특별히 해서 남의 집 닭보다 더 살찌고 더 번식하게 하며, 또 간혹 시를 지어서 닭의 정경을 읊어 사물로써 사물을 보낼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책 읽는 사람이 양계하는 법이다. 만약 이익만 보고 의리를 알지 못하며 기를 줄만 알고 취미는 모르는 채 부지런히 힘쓰고 골몰하면서 이웃의 채소를 가꾸는 사람들과 아침저녁으로 다투기나 한다면, 이는 바로 서너 집 모여 사는 시골의 졸렬한 사람이나 하는 양계법이다.
너는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 이미 양계를 하고 있다니 아무쪼록 여러 학자의 서적에서 양계에 관한 이론을 뽑아 계경을 만들어서 육우의 다경과 유득공의 연경과 같이 한다면, 이 또한 하나의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세속적인 일에서 맑은 운치를 간직하는 것은 항상 이런 방법으로 예를 삼도록 하여라.

[171]나는 몇 년 전부터 독서에 대하여 대략 알게 되었다. 책을 그냥 읽기만 하면 하루에 천백번을 읽어도 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무릇 책을 읽을 때에는 한 글자를 볼 때마다 그 뜻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곳이 있으면, 모름지기 널리 고찰하고 자세히 연구해서 그 근본을 터득하고 따라서 그 글의 전체를 완전히 알 수 있어야 하니, 이렇게 하는 것을 계속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한 종류의 책을 읽을 때에 아울러서 수백 가지의 책을 널리 찾아보게 될 것이요, 따라서 본서의 의리에 대해서 분명히 꿰뚫을 수 있으니, 이 점을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사기』의「자객열전」을 읽다가 “조도제를 지내고 길을 떠났다(旣祖就道)”라는 한 구절을 만나게 되었을 경우 ‘조(祖)’란 무엇입니까?“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아라. 그러면 스승은 ”전별제(餞別祭)이다“라고 대답해줄 것이다. 또 ”꼭 ‘조’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하고 물어서 스승이 ”자세히 모르겠다“고 하거든 집으로 돌아와서 자서를 꺼내 ‘조’자의 본뜻을 살펴보고, 또 자서에 있는 증거를 토대로 하여 다른 책까지 들추어 그 전석을 고찰해서 그 뿌리를 캐고 세세한 뜻까지도 캐도록 하여라. 또『통전』이나 『통고』같은 서적에서 조상께 제사지내는 예절까지 자세히 참고해서 책을 만들면,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오래도록 남을 좋은 책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전에는 아무것도 모르던 네가 그날부터는 조제의 내력을 환하게 아는 사람이 될 것이다. 아무리 큰 학자라 할지라도 조제에 관한 한 가지 일에서는 너와 겨를 수 없을 것이다. 어찌 크게 즐겁지 않겠느냐? 주자의 격물 공부도 이와 같은 것이다. 오늘 한 가지 사물에 대해 끝까지 궁구하고 내일 한 가지 사물에 대하여 끝까지 궁구한다는 것도 이와 같이 착수하는 것이다. 격이라는 것은 끝까지 연구하여 끝까지 도달한다는 뜻이니, 끝까지 연구해서 끝까지 도달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이익이 없을 것이다.

[172]무릇 책의 내용을 뽑아서 쓰는 방법은 반드시 먼저 자기의 뜻을 정해서 만들 책의 규모와 항목을 세운 뒤에 뽑아야만 일관된 묘미가 있는 법이다. 만약 세워놓은 규모와 항목이외에 뽑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면 모름지기 책 하나를 따로 갖추어놓고 얻는 대로 기록해야 확고한 힘을 얻게 된다. 물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쳐놓았는데 기러기가 걸렸다고 해서 어찌 버리겠느냐.

[173]어찌하여 글공부에는 이 아비의 성벽을 계승하지 않고 술만은 이 아비를 넘느냐. 이것은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173] 참으로 술맛이란 입술을 적시는데 있는 것이다.

[174] 무릇 나라를 망하게 하고 가정을 파탄시키는 험상궂고 패악한 행동은 모두 술로 말미암아 비롯된다.

[182]나의 친구여! 무릇 미련한 백성과 간사한 관리를 만나거든,
“흥양에는 본래 좋은 풍속이 있었는데 너희들이 왜 그것을 더럽히느냐?”
하면서 꾸짖으면 흥양 사람들이 기뻐할 것이고 만일,
“흥양 사람들은 모두 이렇군.”
하면 흥양 사람들이 괴로워할 것이다.

[183] 책상 위에는 『대전』한 질과『대명률』한 질을 두고 무릇 한 가지 일을 처리할 때는 반드시 점검하여 그 일이 어느 율령에도 침범되지 않거든 그때 시행해야 한다.

[185] 하늘이 짐승에게는 발톱을 주고 뿔을 주고 단단한 발굽을 주고 날카로운 이를 주고 독을 주어서, 각기 하고 싶은 것을 얻게 하고, 사람에게서 받게 되는 환난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벌거숭이로 태어나서 연약하여 마치 그 생활을 영위해나갈 수 없는 것처럼 만들었으니, 어찌하여 하늘은 천하게 여길 데는 후하게 하고 귀하게 여길 데는 박하게 하였을까. 그것은 바로 사람에게는 슬기와 깊이 생각하는 것이 있음으로써 기예를 습득하여 스스로 자기의 생활을 영위하도록 한 것이다.

[196] 대체로 익히는 것이 오래됨으로써 성품이 날로 옮겨가게 되니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겉으로 나타나서 상이 이로 인하여 변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상이 변한 것을 보고는 또한 말하기를 “상이 이렇게 생겼기 때문에 익히는 것이 저와 같다”하니 아, 그것은 틀린 말이다.

[234] 아전이 본디부터 간사한 것은 아니다. 그들을 간사하게 만드는 것은 법이다. 간사함이 일어나는 요인은 이루 다 열거할 수 없다.
무릇 직책은 하찮은데도 재주가 넘치면 간사하게 되고, 지위는 낮은 데도 지식이 많으면 간사하게 되고, 노력을 적게 들였는데도 효과가 신속하면 간사하게 되고, 나는 한 자리에 오래 있는데도 나를 감독하는 사람이 자주 교체되면 간사하게 되고, 나를 감독하는 사람의 행동 또한 정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간사하게 되고, 아래에는 동료들이 많은데도 윗사람이 외롭고 어리석으면 간사하게 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나보다 약한 탓으로 나를 두려워해서 고발하지 못하면 간사하게 되고, 내가 꺼리는 사람이 다 같이 죄를 범했는데도 서로 버티고 고발하지 못하면 간사하게 되고, 형벌이 문란하여 염치가 확립되지 않으면 간사하게 된다.

[235] 무릇 나라에서 공경, 대부, 사의 관직을 설치하고 공경, 대부, 사의 봉록을 제정하여 우대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라면 재주를 시험하고 기예를 선발하고 치적을 고사하고 관등을 승진시킬 때도 당연히 백성 다스리는 것으로 기준을 삼아야 한다.

[236] 아전에게 간사한 짓을 못하게 하려면, 조정에서 사람을 뽑을 때에 오로지 시부에만 의거하여 뽑지 말고, 행정 사무에 익숙한 사람을 현의 관리에 오르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군현이 피폐해지고, 매우 교활하여 다스리기 어려운 아전이 있을 때마다 이들을 시켜 다스리게 하고 나서 진실로 성적이 있으면 의심 없이 공경을 제수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아전의 간사함이 금지될 것이다.

[244] “인의 실상은 어버이 섬기는 일이 바로 그것이고, 의의 실상은 형을 따르는 일이 바로 그것이고, 예의 실상은 그 두 가지를 절문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고, 락의 실상은 그 두 가지를 즐기는 것이 바로 그것이며, 지의 실상은 그 두 가지를 알아 거기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247]왕정이 없어지면 백성들이 곤궁하게 마련이고, 백성이 곤궁하면 나라가 가난해지고, 나라가 가난해지면 조세를 부과하여 징수하는 것이 번거롭고, 조세를 부과하여 징수하는 것이 번거로우면 인심이 흩어지고, 인심이 흩어지면 타고난 운명도 가버린다. 그러므로 급히 서둘러야 할 것이 정이다.

[254] 옛날에야 백성이 있었을 뿐 무슨 목민관이 있었던가. 백성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면서 한 사람이 이웃과 다투다가 해결을 보지 못한 것을 공변된 말을 잘하는 어른이 있었으므로 그에게 가서야 해결을 보고 네 이웃이 모두 감복한 나머지 그를 추대하여 높이 모시고는 이름을 이정(里正)이라 하였고, 또 여러 마을 백성들이 자기 마을에서 해결 못한 다툼거리를 가지고 준수하고 식견이 많은 장자를 찾아가 그에게서 해결을 보고는 여러 마을이 모두 감복한 나머지 그를 추대하고 높이 모시고서 이름을 당정(黨正)이라 하였으며, 또 여러 고을 백성들이 자기 고을에서 해결 못한 다툼거리를 가지고 어질고 덕이 있는 장자를 찾아가 그에게서 해결을 보고는 여러 고을이 모두 감복하여 그를 이름하여 주장(州長)이라 하였고, 또 여러 주의 장들이 한 사람을 추대하여 어른으로 모시고는 그를 이름하여 국군(國君)이라 하였으며, 또 여러 나라의 군들이 한 사람을 추대하여 어른으로 모시고는 그 이름을 방백(方伯)이라 하였고, 또 사방의 백들이 한 사람을 추대하여 그를 우두머리로 삼고는 이름하여 황왕(皇王)이라 하였으니, 따지자면 황왕의 근본은 이정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백성을 위하여 목민관이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259] 신이 엎드려 생각건대, 나라의 큰 정사는 사람을 등용하는 일보다 앞선 것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인재등용은 오직 3년 마다 실시하는 과거뿐인데 그 실상을 자세히 상고해보면 여기에서 뽑은 사람은 대부분은 폐기되어 이름이 문과 방목에 오르고도 기껏해야 낭관에 지나지 않으며, 저 묘당에서 관복을 입고 국정을 담당하는 우직으로 말하면 오직 별시와 반제에 급제하여 올라온 자라야 차지합니다. 이는 마치 아침, 저녁의 식사는 폐하고 오직 차와 과일만을 먹는 것과 같으니, 이름과 실제가 서로 맞지 않음이 이보다 더한 게 무엇이겠습니까.

[268] 그 책 속에 인륜의 상도를 어기고 하늘의 뜻에 거슬리는 말은 진실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또한 감히 전하의 귀를 더럽힐 수 없으나, 제사를 폐하는 말에 이르러서는 신이 옛날 그 책에서 또한 본 적이 없습니다. 갈백이 다시 태어났으니, 승냥이와 수달도 몰랄 것입니다. 진실로 조금이라도 사람의 도리가 미처 없어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어찌 마음이 무너지고 뼈가 떨려서 어지러움이 싹트는 것을 배척하여 끊어버리지 않고, 홍수가 언덕을 넘고 열화가 벌판을 태우듯 성하게 하겠습니까.

[288] 아! 바람타는 나무는 항상 고요히 있을 수 없거니와 어버이의 나이가 어찌 영원히 머물러 있으랴. 진실로 가는 시간을 아까워하는 효자가 있다면 마땅히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289] 근세의 학자는 겨우 학문을 한다는 이름만 있으면 문득 스스로 거만하고 도도해진다. 곧 천리니 음양이니 하면서 담론을 펴고, 벽에다가 태극 팔괘와 하도 낙서 등을 그려 붙이고는 자칭 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여 찾는다 하면서 어리석은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그러나 그의 부모들은 바야흐로 추위를 호소하고 굶주림을 참아야 하며, 병들어 죽게 되어도 태연히 보살피지 않은가 하면, 아예 버릇이 들어 노력하려 들지도 않는다. 곧 그가 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여 찾는 것이 부지런하고 진실해질수록 학문과는 더욱 멀어진다. 진실로 부모에 대하여 능히 효도라는 자라면 비록 학문을 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반드시 학문을 했다고 말하겠다.

[291] 불효의 이유가 두 가지가 있으니 아내와 재물이 바로 그것이다.

[291] 아내와 재물은 본래 부모에게 효도를 하기 위한 것이다. 아내라는 것은 곧 그로 하여금 부모가 살아서는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하게 하고 부모가 돌아가셔서는 제사를 받들게 하며 자손을 낳아 길러서 선조의 후사를 잇게 하는 것이요, 재물이란 것은 곧 부모의 의식을 만족시켜드리는 것이며 부모의 장례와 제사를 받드는 것인, 아내와 재물이 아니면 사람의 자식 된 자가 어떻게 효도를 할 수 있겠는가.


3. 내가 저자라면


<다산문선>의 글 속으로 조금 더 깊숙히 들어가 보고자 몇 권의 다른 책들을 살펴보았다. 책 속의 여러 종류의 글에 담긴 뜻과 감정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 <다산문선>의 책 제목처럼 다산선생님이 남긴 글들 중에 일부를 종류별로 선별하여 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파란만장한 삶을 산 다산선생님의 감정을 그대로 느끼기에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래서 다산선생님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을 먼저 알아야 했고, 그 어둠의 시대에서 운명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다산선생님의 생애를 알아야 했고, 다산선생님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던 서학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이해하고자 우리나라 천주교의 역사를 알아야 했다.

다산선생님에 대해 좀 더 깊이 알게 되면 될 수록 ‘운명’이란 단어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특히 정조와 다산선생님의 운명적인 만남은 서로를 위해 필요했지만 관계가 깊어지면 질수록 운명이라는 끈은 서로를 더 옭아매었다. 당신은 숙명을 믿는가? 극히 숙명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고, 다산선생님 스스로도 “인생의 화와 복이란 정말로 운명에 정해져 있지 않다고 누가 말하겠는가?”라고 애달파 했다.

다산선생님에 대한 나의 느낌은 ‘운명이 낳은 사람’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밖에 없다. 이익 선생님의 <성호사설>을 통해 만난 실학과의 인연, 맏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이 소개한 <천주실의>를 통한 천주교와의 만남, 생원시를 합격해 정조와의 첫 만남에서 사도세자가 죽던 해에 태어난 사실을 알게 된 사연, 정조 서거 후 천주교 박해로 인해 18년간 길고 긴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실학을 체계화한 사람이 다산선생님이다. 참으로 다양한 운명으로 삶을 살아간 분이다.

개혁자, 실학자, 과학자 등 다산선생님에게 붙여진 수식어는 수없이 많지만 그보다 애절한 몇 가지 점에서 오히려 더욱 위대해 보인다.

먼저 18년간 외롭고 힘든 유배생활을 ‘과연 어떤 생각으로 버텨나갈 수 있었을까?’하는 점이었다. 심지어 풍으로 팔다리를 잘 쓰지 못하면서도 끝까지 학문을 놓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행히 이에 대한 다산선생님의 생각을 조금 엿볼 수 있는 글을 책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또한, 글을 통해서 자신의 평가를 후세에게 맡기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자신으로 인해 자식의 앞날이 막혀버린 아버지로서의 후회와 책임을 통감하면서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자식에게 비전을 제시하고자 하는 갈망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저술에 전념하는 것은 단지 눈앞의 근심만을 잊으려는 것뿐이 아니다. 부형이 되어서 이토록 누를 끼쳐준 것을 부끄럽게 여겨 이로써 속죄하고자 해서이니, 이 뜻이 어찌 심각하다고 하지 않겠느냐.” (p109, 두 아들에게 부침)

“내가 지난번에도 누차 말하였지마는 대대로 절의를 높이 받들어 온 가문은 비록 독서를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저절로 존경을 받게 되지만, 폐족이 되어 학문에 힘쓰지 않는다면 더욱 가증스럽지 않겠느냐. 다른 사람들이 천시하고 세상에서 비루하게 여기는 것도 슬픈데, 지금 너희들은 스스로 자신을 천시하고 비루하게 여기고 있으니, 이는 너희들 스스로가 비통함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이 끝내 배우지 않고 스스로 포기해버린다면, 내가 지은 저술과 간추려 뽑아놓은 것들을 장차 누가 모아서 책을 엮고 바로잡아 보존시키겠느냐.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이는 나의 글이 끝내 전해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내 글이 전해지지 못한다면 후세 사람들은 단지 대계(臺啓)와 옥안(獄案)만을 의거해서 나를 평가하게 될 것이니, 나는 장차 어떠한 사람이 되겠느냐. 너희들은 아무쪼록 이 점을 생각해서 분발하여 학문에 힘써 나의 이 한 가닥 문맥이 너희들에게 이르러 더욱 커지고 더욱 왕성하게 하여라. 그렇게 되면 훌륭한 집안의 좋은 벼슬도 이러한 깨끗하고 귀함과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를 버리고 도모하지 않느냐.” (p119, 두 아들에게 부침)

“그 폐족의 처지를 잘 대처한다는 함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그것은 오직 독서하는 것 한 가지 뿐이다. 이 독서야말로 인간의 제일가는 깨끗한 일로서, 호사스런 부호가의 자제는 그 맛을 알 수 없고 또한 궁벽한 시골의 수재들도 그 오묘한 이치를 알 수 없다. 오직 벼슬아치 집안의 자제로서 어려서부터 듣고 본 바가 있고 중년에 재난을 만나 너희들 처지와 같은 자라야 비로소 독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저들이 독서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뜻도 모르고 그냥 읽기만 하는 것은 독서라고 일컬을 수 없기 때문이다.” (p115, 두 아들에게 부침)

“지난해에 이 때문에 병이 나서 여름 내내 병환으로 보냈고, 10월 이후로도 말할 것 없으니 너희들도 이 아비의 심정을 알 것이다. 그러나 마음에 진실로 반 푼의 성의라도 있다면 아무리 험난한 난리 속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진보가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집에 책이 없느냐? 재주가 없느냐? 눈과 귀가 총명하지 못하느냐? 무엇 때문에 스스로 포기하려 드는 것이냐? 폐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냐? 폐족은 오직 벼슬길에만 꺼리는 바가 있을 뿐, 폐족으로서 성인이 되고 문장가가 되고 진리를 통달한 선비가 되기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거리낌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크게 나은 점이 있으니, 그것은 과거를 봐야 하는 누가 없고, 또 빈곤하고 궁약한 고통이 심지를 단련시키고 슬기로운 생각을 계발해서 인정과 사물의 모습의 진실과 거짓을 두루 알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선배에 율곡 같으신 분은 어버이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괴로움으로 몇 해를 방황하다가 마침내 한번 마음을 돌이켜 도에 이르렀으며, 또한 우리 우담 정시한 선생도 세상의 배척을 받고서 더욱 그 덕이 진보되었으며, 성호께서도 집안에 화를 당한 뒤로 이름난 유학자가 되었으니, 그분들이 탁월하게 수립한 것은 권세를 잡은 부호가의 자제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이것은 너희도 일찍부터 들어오지 않았느냐.
폐족 중에 재주 있고 걸출한 선비가 많은데, 이는 하늘이 폐족에 재주 있는 사람을 내어 폐족을 후대하는 것이 아니라 지위가 높고 귀하게 되려는 마음이 학문하려는 마음을 가리지 않으므로 책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여 능히 진면목과 참다운 골수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평민으로서 학문을 하지 않는 자는 다만 용렬한 사람이 될 뿐이지만, 폐족으로서 학문을 하지 않으면 마침내는 도리에 어그러지며 사납고 비루하여 가까이 할 수 없는 자가 되어 세상의 버림을 받게 된다.” (p150, 두 아들에게 부침)

다음으로 학문의 유용성은 완벽한 이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지 못하더라도 구체적인 실용성에 있다는 실학의 정신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양계법 외에도 이런 단면을 여러 군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인의예지는 행사에 시행한 뒤에야 바야흐로 인의예지라 이름 할 수 있다. 측은(惻隱), 수오(羞惡)는 바로 안에서부터 발현되는 것인데, 인성의 원리를 말하는 자들은 항상 인의예지를 가지고 네 낱의 물건이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는 것이라 하니 이는 잘못이다. 마음속에 있는 것은 측은이나 수오의 근본일 뿐이니, 이것을 인의예지라고 이름 할 수는 없다." (p166)

“신이 엎드려 생각건대, 나라의 큰 정사는 사람을 등용하는 일보다 앞선 것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인재등용은 오직 3년 마다 실시하는 과거뿐인데 그 실상을 자세히 상고해보면 여기에서 뽑은 사람은 대부분은 폐기되어 이름이 문과 방목에 오르고도 기껏해야 낭관에 지나지 않으며, 저 묘당에서 관복을 입고 국정을 담당하는 우직으로 말하면 오직 별시와 반제에 급제하여 올라온 자라야 차지합니다. 이는 마치 아침, 저녁의 식사는 폐하고 오직 차와 과일만을 먹는 것과 같으니, 이름과 실제가 서로 맞지 않음이 이보다 더한 게 무엇이겠습니까.” (p259)

그런데 <다산문선>을 편집하면서 몇 가지 아쉬웠던 점이 있었다. 첫째, 글을 쓴 시기의 상황과 배경에 대한 설명이 추가된다면 글의 내용이나 감정 속으로 몰입하기 쉬웠을 것이라는 점이다.

둘째, 책 속에는 많은 지명과 인명이 등장하지만 이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여 충분한 이해와 감성을 이끌어 낼 수가 없었다.

셋째, 책 속의 글들을 글의 종류별로 모았기 때문에 파란만장한 삶을 산 다산선생님을 이해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차라리 시대별로 모아 설명하는 것이 더 감회가 크지 않을까 한다.

<다산문선> 책 속에는 짧게 언급되어 있을 뿐이지만 다산선생님은 주역을 수년간 연구하여 <주역사전>이라는 명작을 남겼다. 언제 유배생활이 끝날지 모르는 어두운 시기에 다산선생님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때를 기다리고자 주역을 연구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주역은 점치는 책이 아니라 일을 함에 있어 거리낌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천명을 알아보는 책이라 한다. 이는 ‘주역은 인생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다’라는 초아 서대원 선생님의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살다보면 미치도록 답답하게 운이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면 대부분 사람들은 막힌 운을 뚫고자 아등바등 발버둥치지만 늪에 빠진 것처럼 계속 빨려 들어가곤 한다. 이럴 때 <주역>은 ‘막힌 운은 인간의 일이 아니니 인간의 힘으로는 풀 수 없다’고 설명한다. 이는 '시간과 공간의 부조화로 인한 것이니 때를 기다려야 한다'라고 가르친다. 깊은 수렁에 빠졌다는 생각이 드는 시기에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질서 있게 생활하며, 때를 기다리는 것이 현명한 방법임을 18년간 긴 유배생활을 이겨내고 현재 최고의 지식경영인으로 다시 우뚝 선 다산선생님께서 진중하게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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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6.24 00:17:09 *.70.72.121
흠뻑 빠져 연애를 한 것 같구려. 리뷰가 점 점 길어지니이다. 그렇게 많이 사모하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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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
2007.06.25 10:06:23 *.99.120.184
맞아요. 우연때문인지 다산선생에 대해 더 많이 알고자 했죠.
그러면 그럴수록 안타까운 마음만 더해 가네요.
이런 위인이 또 다시 태어날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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