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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4일 10시 17분 등록
"한국역사의 개관"
한국사신론

이기백 지음 / 일조각


Ⅰ. 저자소개
이기백(李基白, 1924년 10월 21일 ~ 2004년 6월 2일)은 대한민국의 역사학자이다.

1924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이화여대, 서강대, 한림대 사학과 교수를 역임한 후, 현재는 한림과학원 객원교수와 학술원 회원으로 활동했다. 한국사의 서술 방법을 혁신한 『한국사 신론』(1967년)과 더불어 『민족과 역사』 『한국 사학의 방향』 『한국사를 보는 눈』 등을 통해 식민주의 사관의 극복과 주체적 역사 인식의 정립에 기여해왔으며, 『고려 병제사 연구』 『신라 사상사 연구』 등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도 여러 업적을 제시하였다. 반년간지 『한국사 시민강좌』의 책임 편집을 맡아 한국사의 바른 인식을 대중화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역사란 무엇인가](이기백, 차하순 편저, 문학과 지성사)에는 그의 ‘근대 한국사학의 발전’이라는 글이 실려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관료 분야 친일파로 분류한 했다.
그의 책 [한국사신론]에서는 일제가 주장한 ‘일제식민사관’을 비판한다는 했는데, 그런 그가 ‘친일’논쟁에 휩싸이는 것만큼 치욕적인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저자조사에서 친일과 역사기술이라는 면을 더 다루지는 못했다.)

Ⅱ. 책이 내게로 왔다(감상)

1. 역사는 보는 눈 없이 역사 공부하기

나는 여태껏 사관없이 역사를 공부하였기 때문에, 역사적 사건들이 내겐 별 의미가 없었고, 또 그것들을 공부했다고 해도 금새 까먹고, 기억해 내지 못했다. 그리고, 어떤 한가지 사건이 다른 사건들과 연관되는 연관성 또한 찾을 수 없었다. 이것이 사관의 부제로 오는 역사인식이다.

기억하고 싶은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들에 줄을 그으면서 드는 생각하나. 사교에 혹은 지식의 축적에 필수 요소로 꼽는 것이 역사지식이다. 그것이 기본으로 깔려야만이 그 위에 다른 탑을 쌓을 수 있다는 말인데, 그런 견해에서 본다면 뒤돌아서면, 어쩌면 돌아서기 전에 까먹어 버리는 나는 어쩌란 말인가?
이 책도 역시 이런 나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책은 되지 못했다.

며칠 전 본 도올 김용옥님의 MBC 공개강의를 녹화한 것을 동영상으로 보았다. 열변을 토하시면서 식민사관에 대해서 말씀하였는데, 일제는 우리를 원래 당파싸움을 일쌈고 뭉치지 못하는 존재로 보고, 그리고, 사대주의에 젖어서 살아온 사람들이라서 강대국(일본)이 이끌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탈피해야 할 것은 이것 뿐만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이런 노골적인 일제의 주장에 찬성하는 것 말고도, 우리 역사를 서양의 시대 구분에 그대로 끼워맞추려는 우리역사에서 봉건사회를 찾으려 하는 것 조차도 식민사관이라고 했다. 유럽의 침략으로 일본은 유럽의 사관을 받아들였다. 유럽의 역사 인식에서는 봉건사회가 있다. 그리고, 일본도 거기에 맞는 ‘봉건영주’가 존재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그것이 없었다. 그들이 가장 멋진 시대로 인식하는 근세사회의 특징인 봉건 영주가 전권을 행사하는 다스림이 아닌 국가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리는 시대가 조선시대(?)에 곧장 나타나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봉건사회와 근세를 찾아 구분하려는 노력 또한 그 바탕에는 일본 사학자들의 시대구분을 그래도 따르려는 것이라고 주장하셨다. 봉건사회의 다음 단계인 근세사회를 찾으려는 노력에서 나오는 실학에 대한 것도, 실증없이 막연히 ‘실학자’ ‘실학파’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 조차도 비판으로 열변을 토했다. ‘동학’이라는 용어는 ‘동학운동’을 주도한 이들이 그 이름을 실제로 사용하였지만, ‘실학’이라는 이름은 우리가 실학자라고 부르는 그들이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근거를 대었다. 이렇게 실학자에서, 그들이 등장한데서부터 근세의 시작을 찾으려다 보니, 이것저것 주저리 주저리 외울 것 경제, 문화, 여러 가지 책들을 서술해 댄다고 했다.
도올의 주장대로 이 [한국사신론]을 본다면, 도올의 역사인식 앞에서는 비난을 피해 갈 수 없을 것 같다. 도올이 반박하는 시선으로 역사를 기술한 역사학자들이 교과서도 만들었을 터이니 학교에서 쓰고 있는 교과서들도 이런 비난을 피해가기는 어려울 듯 하다.

이 책을 통해서 얻는 이점이라면, 일제의 침략의 과정, 갑오경장, 대한민국의 성립 과정, 4월 혁명을 등 역사적 사실을 다시 한번 짚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2. 내 마음을 빼앗긴 부분
(1) 첫번째 나를 홀린 부분
[253-254] 가령 지전상인은 造紙署의 紙匠을, 雜鐵廛人은 冶匠을 지배하였고, 廣州分院의 장인도 상인물주에 예속 가고 있었다. 또 江商들은 선박을 제조,판매하였고, 松商은 인삼가공업을 사역원 譯官들로부터 인수,운영하였다. 이것은 17,18세기 수공업에 있어서 가장 보편적인 양상이었다.
그러나 한편 수공업자들 중에는 상인들의 통제를 받지 않고 스스로 물주가 되어 독립된 자기의 자본으로 장인을 고용하여 생산하고 또 판매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령 毛衣匠은 머리에 쓰는 방한구인 목도리를, 刀子匠은 粧刀를 스스로 제조 판매하여 선전이나 刀子廛의 상인과 경쟁하였다. 특히 철기와 유기의 제조업에서 더욱 그러하였다. 가령 무쇠匠(水鐵匠)은 솥(부정)의 생산이나 판매에 있어서 모두 자신이 독점권을 향유하고 있었다.
.... 실직적인 광산 경영자는 穴主나 德大였다.

* 나를 흥분하게 만든 것은 수많은 직업의 이름이다. 이런 이름들이 사람의 이야기처럼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이런 이름들이 들어가는 삶의 모습이 담긴 우리 소설을 제대로 읽고 싶다.

두번째 마음을 빼앗긴 부분
[353] (표)한말의 사립학교의 관심가는 학교의 일부 명단
연대/학교명/설립자/지명
1883 / 원산학사 / 정현석 / 원산
1886 / 이화여학교 / 미북감리회 / 서울
1905 / 보성학교 / 이용익 / 서울
1906 / 서전서숙/ 이상설 / 간도
1907 / 대성학교 / 안창호 / 평양
1907 / 오산학교 / 이승훈 / 정주

* 나는 원래 학교에 관심이 많다. 작년에 이화여자고등학교 앞에 200주년 설립 기념 박물관에 가서 교육과 선교의 힘에 흥분했던 것들이 되살아 났다. 여기에 옮겨 적은 것들은 일제시대 독립운동과 관계있는 사람들과 관계된 학교 이름들이다.

Ⅲ. 역지사지(내가저자라면)

저자의 말에 딴지 걸고, 저자에게 똥침놓기

(1)
‘[한국사신론]을 기술하면서 저자가 가장 뜻을 둔 바는 크게 둘이었다가고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중략) 둘째는 구체적 사실들의 시대적 사회적 연결관계를 찾아서 이를 체계화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과거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서 살아 있는 역사를 생동감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에 힘썼다. 이에 따라서 [한국사 신론]에는 저자 나름의 독자적 시대구분이 시도된다.'(p.iii)

머리말에 있는 저자의 말이다. 생동감은 무슨, 딱딱하다. 저자의 바램은 그럴지 몰라도 익은 사람은 안 그렇다. 기존의 시대구분과 다른 구분이라면, 나라이름으로 각장을 구별하여 기술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인가. 독자적 시대도 없다.

(2)
‘한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지에 대한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이다.
한국사의 올바른 인식을 방해하는 낡은 틀을 과감히 깨버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왔고, 이러한 신념이 [한국사신론]에서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 물론 여전히 옛 틀에 기준을 두고 비판하는 주장이 있다는 것을 저자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구구한 이야기는 늘어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미켈란젤로가 그러했듯이 저자도 “10세기 뒤에 보라”고 할 수박에 없을 듯하다.‘

10세기 뒤에 기억날만한 업적을 이룬 사람이긴 한 건가? ‘밀레니엄’이라는 말이 메스컴 자주 나올 때, 과거 10세기 동안의 중요사건이나 인물, 사상을 꼽아 보았을 때, 어떤 건이나 인물의 영향이 200백년을 넘긴 것도 몇 가지 없었고, 긴 세월이 흐른 뒤에 그것의 영향력에 대해서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었다. 커다란 변화와 세월을 뛰어넘는 것은 예수의 사상, 불교의 중심사상, 베토벤의 음악, 미켈란젤로나 다빈치의 예술 등 몇 안되었다. 저자의 지나친 명예욕이다. 다만 저자가 기술한 역사적 사실만은 10세기 이후에도 사실로도 인식되고 있을 것이다.

(3)
‘누가 역사를 만들고 움직여 왔는가 하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사건과 제도의 서술로서 만족하여 왔던 것이다.’
* 이 책도 그런면이 없지는 않는 것 같은데... 그래도 이 책에서는 지배 세력에 대해서는 다룬다.
일제시대부분이 일제가 만든 역사라서 그렇게 재미없게 기술했냐고 저자에서 따지고 싶을 정도였다. 읽는 동안 답답했다. 사실의 기술이란 것을 충실히 한다는 측면을 생각했더라면 은근히 일제를 공격하고 비난하는 것보다는 좀더 순한 역사책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4)
[255] 그들 스스로 연구성과와 어긋나는 것이 있으면 선학의 학설이라도 거리낌없이 비판하였다. 말하자면 그들의 학문은 독창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관심을 가진 현실이 바로 조선의 현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학문은 민족적 성격을 띤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조선의 학문은 새로운 성격을 하게 되었다.
* 조선의 현실? 민족적 성격? 그럼 다른 시대의 학자들은 안그랬나? 세종시대의 천문학 연구자들이 우리나라 별자리를 연구하고 달력을 냈다면 그건 독창적이 아닌가? 조선의 현실과 민족적 성격하고는 안맞나? 대체 조선의 현실이란 뭐고, 민족적이란 말의 의미가 뭔지 알 수 없다.

(5)
[253] 그리고 유기는 안성이나 납청 같은 곳에 많이 생산되었는데, 여기의 수공업자들은 자기의 자본으로 임노동자를 고용하여 생산하였고, 생산품은 장시가 서는 날 상인들에게 판매하였다. 그리고 계약에 의해 임노동자를 고용하여 화폐로 지불하고 있었다.
* ? 의문이다. 정말 임노동자가 있었나? 안성의 유기는 작은 것은 혼자 만들 수 있지만, 큰 것은 여럿이 일사불란하게 만들어야 한다. 불로 달구고 달군 쇠가 식기전에 망치질을 해야하는 유기의 특성상 여럿이 작업을 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여럿의 유기쟁이들이 같이 일하고, 그것을 팔아서 수입을 분배하는 것을 임노동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남사당패들이 놀고는 각자 자기 몫을 분배하는 것을 임노동자라고 불렀나?

(6)
[261] 그 까닭은 소수 벌열의 집권으로 말미암은 사회적, 정치적 모순을 극복하는 길을 서학에서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하는 성리학과는 반대로 서학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착하다고 하는 인간원죄설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약한 자를 억누르 개인의 이익을 억누르는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골몰하는 벌열이나 부농, 거상들로 말미암아 빚어진 모순에 가득 찬 현실 속에서, 이에 비판적인 재야학자들이 이 서학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암담한 현실 속에서 몸부림치던 일부 경세치용의 실학자들은 종교적 신앙을 통하여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려는 데 새로운 희망을 느끼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이상사회를 건설하고 싶어하는 실학자들을 기술하는 데에, 여기에 성선설과 인간원죄설이 왜 들어가냐? 이런 구성은 싫다. 아무이유없이. 그냥 하나의 설명으로 할거면 그렇게 해줄 것이다. 이상국가 건설은 나를 흥분하게 하지만 인간원죄설은 싫어하는 것이라서 이렇게 짬뽕으로 보는 것은 싫다.

(7)
[242] 또 장희빈의 몸에서 난 왕자의 세자 책봉 문제 때문에 역시 서인 대신에 남인이....
* 이런 진부한 표현이. 우리는 신분을 우선시했던 조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러는 것 같다.

[271] 그러나, 이러한 방법(암행어사의 파견)으로써 지방행정의 잘못을 제거할 수는 없었다. 비록 비교적 청백한 관리가 암행어사에 임명되었다 하더라도 도도한 시세를 거역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 지방행정의 문란을 서술하는 부분에서 ‘도도한’의 수식어는 걸맞지 않다. 역설적 표현을 쓰는 것이 아니라면 이곳에 안 어울리는 표현이다. 바닥으로 곤두박질 쳐가는 상황에 ‘도도한’이라니. 역사 교과서 같은 이 책에 정말 안 어울리는 표현이다.

[322] 고종은 경운궁으로 거치를 옮김과 함께....
* 이 저자는 ‘옮김’과 같이 이렇게 명사적 표현을 많이 쓴다.

(8) 밋밋한 교과서는 싫다.
사실을 기술이 꼭 생동감있는 이해를 헤치는 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다. 묘사하듯이 쓰거나 혹은 이야기를 하듯이 쓰거나, 호흡이 짧게하는 문장을 쓰는 것이 생동감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비판을 실랄하게 하든지 했으면 완전히 저자에 동조해서 생생하게 하나의 입장에 서서 생동감있는 이해를 했을 텐데. 자신의 주장과 다른 주장에 대해서, 그리고 일제에 대해서 은근히 비난하고 해서 밋밋하다.

Ⅳ. 책에서 끌어다쓰기(인용)
서장 한국사의 새로운 이해

[3] 한국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우리가 힘써야 할 일 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우선적인 과업은 식민주의사관을 청산하는 일이다. 식민주의사관은 한마디로 말하면 일제의 한국에 대한 식민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왜곡된 한국사관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주장은 한민족의 자주정신, 독립정신을 말살하려는 방향으로 짜여진 것이었다. 한국사의 객관적 진리를 존중하기 보다는 현실적인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역사적 진실을 외면한 것이다.
* 이런 저자의 의도와는 달리, 저자는 ‘식민주의사관’으로 역사를 기술한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그런 듯 하다. 아주 직접적인, 노골적인 식민사관은 아니고, 그것의 경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한 역사기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3] 지방분권적인 봉건사회이어야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적인 자본주의로 넘어간다는 주장도 이를 뒷받침할 학문적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4] 민족성이 역사의 산물인 것이지 역사가 민족성의 산물인 것은 아니다.
* 그럴까? 둘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그 의미를 굳건히 한다고 반박하고 싶다.

[4] 문화가 근본적으로 보편성을 기반으로 하고 성립된다.

[4] 민족문화는 인류문화의 보편성을 근거로 하고 자기 민족의 역사적 현실에 적합하도록 창조적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5] 일제의 식민통치라는 악조건 밑에서도 한국의 사학자들은 올바른 한국사학들을 키우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민족주의사학, 유물사관 그리고 실증사학의 셋이라고 할 수가 있다.
민족주의사학은 한국사의 발전을 민족의 정신적 측면에서 설명하려 하였다. 한국사의 근원이도는 것은 한국민족의 혼이요 정신이므로, 이 혼이나 정신이 왕성할 때에는 한국사도 찬란한 발전을 하였으나, 그것이 약해지면 역사도 또한 약해졌다고 믿었다. (중략)
유물사관은 민족 속에는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의 대립이 있어왔고, 그 대립의 양상은 일정한 공식에 의해서 역사적으로 발전해 왔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서 실증사학은 한국사의 발전을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이에 맞추어서 보는 것에 반대하였다. 오히려 실증적인 태도로 객관적인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함으로써 한국사의 올바른 이해에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6] 어느 하나만으로는 현재 한국사학의 바람직한 모습을 제시해 줄 수 없었다.

[7] 역사는 곧 인간의 역사이며, 한국사는 곧 한국인의 역사이다. 이것은 다툴 수 없는 진리이다.

[8] 여러 인간집단이 존재하는 양상이나 변화해 온 과정을 다른 민족의 경우와 비교하여, 어떤 점이 같았고 어떤 점이 달랐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한국민족도 결국은 인류의 한 구성원이고, 따라서 거기에는 인류의 다른 구성원들과 공통점이 있는가 하면 또 차이점이 잇는 것이기 때문이다.
* 보편성과 특수성

[9] 종래에는 보편성을 강조했을 경우, 그것은 일원적인 입장에 선 것이었다. 즉, 역사는 단 하나의 법칙에 의해서 지배되었고, 그것이 모든 민족에게 그대로 적용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 이것이 도올의 주장대로 라면,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고대원시사회-고대사회-봉건사회-근세사회’로 구분하는 시대구분일 것이다.

[9] 이 잘못을 시정하는 길은 보편적인 법칙을 다원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길 밖에 없다. 즉, 역사에 작요하는 법칙은 다원적인 것이지만, 그 여러 법칙들은 어느 민족에게나 다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다만 많은 법칙들이 어떤 민족의 역사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날 때에, 그 결합하는 양상이 다른 민족의 경우와 같아질 수 없고, 그것이 곧 그 나라 역사의 특수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한국사의 보편성과 특수정도 이러한 원칙에 입각해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제5장 호족의 시대
독특한 이름이라서 봤다. 또 TV 사극에서 호족이야기(왕건)를 재미나게 다루기도해서이다.

[112] 이제 왕위는 혈통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실권과 무장력의 우열로 결정되었다. 흥덕왕이 죽은 뒤에 벌어진 왕위계승전은 그 표본이었다.
* 호족은 무장력을 갖고 있다.

[124] 과거제도를 실시 하였다. 개국공신 계열의 옛 무신 대신에 학문을 하는 새 문신을 관리로 등용하려는 것이었다.

제10장 사림세력의 등장

[230] 사림들의 생활기반은 중앙의 관직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지방의 농장에 있었다. 그들은 관직을 얻어 중앙으로 간다 하더라도 완전히 지방의 농장에서 철수하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여전히 동족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농장과 동족이 서원을 건립하고 향약을 운영해 가는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사림의 승리는 이러한 사회적 여건을 배경으로 하고 이루어진 것이다.

[233] 선조는 의주로 피안하고, 두 왕자를 함경도와 강원도로 보내어 근왕병을 모집케 하였다. 그렇지만 두 왕자의 모병에 응하는 자도 없었고, 게다가 그들은 왜병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두 왕자의 모병에 응하는 자도 없었고, 게다가 그들은 왜병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아와 같은 암담한 현상은 백성들을 돌보지 않고 농촌을 황폐케 한 위정자들의 책임이었다.

[236] 해군의 활동이 일시 활발하였으나, 이순신에게 명랑에서 격파된 뒤에는, 왜군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해안지대에 봉쇄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토요토미가 죽자 그를 핑계로 모두 철퇴해 버리고 말았다. 이 철퇴하는 왜군은 노량에서 이순신이 거느린 해군에 의해서 크게 격파되었는데, 이 전투에서 이순시은 전사하였다.

[236] 그(조선에서의 패배) 때문에 토요토이 가문은 몰락하고 대신 도쿠가와 가문이 대두하여 새로운 무인정권을 건설하게 된 것이다.
* 그는 집권세력과 집권자의 관계를 마지막장에서 기술하고 있다. 그의 이 주장에 따른다면 임진왜란으로 기존의 지배세력은 약화되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도쿠가와 가문으로 지배세력이 바뀌었다는 것일텐데, 예전에 읽었던 소설 대망에서는 그에 못지 않게 토요토미 가문의 후손이 빈약한 것을 꼽고 있다. 그러니까 집권세력이 구심점을 제대로 갖지 못했고, 지속시키지 못했다는 점이 가문의 멸망이 되기도 한다.

[236] 일본은 조선에서 도자기 시술자를 포로로 데려갔는데, 그들에 의하여 일본의 도자기는 큰 발달을 하게 되었다. 또 약탈하여 간 많은 서적은 일본에서 성리학을 비롯한 학문의 발전에 이바지 하였다.
* 전쟁은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에 국가간에 문화를 뒤섞어 버리는 것이다.

[239] 주리설에서 보면 개개의 사물의 법칙을 인식하는 것보다는 우주의 근원이 되는 생명력에 대한 인식이 더 중요했다. 나아가서는 그 생명력에 근본을 둔 인간의 도덕적 의욕이 중요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내향적인 경향이 있으며 내적인 경험을 존중하게 되었던 것이다.

[240] 주기설은 우주의 근원적 존재를 신비적인 이보다는 물질적인 기에서 구하는 입장이었다. 이 주장에 의하면 이는 기가 움직이는 법칙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기설에서는 사물의 법칙성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는 입장에 서는 것이다. ... 그 방법이 외향적이요 지식주의적인 입장에 서 있어서 외적 경험과 박학을 존중하였던 것이다.

[240] 한 집안이나 한 나라에 있어서의 계통과 질서를 바로하기를 원하는 것이 예학인만큼, 결국 이것은 양반사회의 질서를 옹호, 유지하는 구실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241] 최대의 시조작가 윤선도의 작품에슨 [산중신곡]이니 하녀 자연에 대한 동경이 농후하게 나타나 있다. 그의 [산중신곡] 중의 오우가는, 물, 돌, 소나무, 대나무, 달 의 다섯 친구를 벗삼아 인생의 고요한 즐거움을 맛보다는 내용의 것이었다. 정계를 떠나서 청빈한 생활에 자위하려는 것이었다. 시조문학의 최고 작품들이 이러한 제재의 것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 왜, 이유가 뭐냐? 설명해주라 난 모르겠다.

제 11장 광작농민과 도고상인의 성장

[245] 이게 공물을 미곡으로 대신 납부시킴으로써 방납에 따르는 납공자들의 피해를 덜자는 것이 수미법을 주장한 이유였다.
이 주장은 임진왜란 이전에는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고 말았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이후에 조세의 감소로 인하여 재정의 곤란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그 보충을 목적으로 실시되었다.

* 임진왜란(1592-1598)

[245] 공인이라는 어용상인을 중심으로 한 상업자본을 발전시켰고, 아울러 공인으로부터 주문을 받아 생산하는 독립적인 수공업을 일으켰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적인 커다란 전환을 초래하게 하였던 것이다.
* 경제적 풍요는 전환을 부른다.

[247] 토지경제에 기초를 두고 있는 국가가 농촌의 황폐 위에 설 수 없음은 분명하다.

[248] 이앙법 - 모를 기르는 동안 논은 물을 빼고 밭과 같이 만들어 보리를 기를 수가 있어서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하게 되었다.
* 먹고 사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한다.

[249] 도조법은 정해진 양의 소작료를 내는 대신, 소작농 자신이 생산의 경비와 흉작을 위험을 단독으로 부담하였다. 따라서 지주의 감독권을 배제하고 자유로운 농업경영을 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능력은 광작을 하는 소작농에게서 비로소 가능한 일이었으며, 또 지주와의 사이에 신분적인 차별이 요구될 필요도 없었다.

[250] 이 시대의 활동에 있어서는 우곤 공인의 활동에 주목해야 하겠다. 대동법이 실시된 이후 공납이 없어졌으므로 관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은 공인을 통하여 조달되었다. ... 점차 공인 자본이 성장하게 되었다. ..... 이들은 한 가지 물품을 대량으로 취급하는 관계상 독점적 도고상인 도고(都賈)로 성장하여 가게 되었다.
* 도고상업의 발달

[256] 경세치용의 실학은 농촌 문제의 해결을 지주층을 중심으로가 아니라 토지의 경작자인 농민을 중심으로 생각하였다.
* 중심에 두는 것이 바뀌면 다른 제도(아이디어)를 낸다. 아이디어를 내는 기본원리? 아하!

[259]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擇里志)](팔역지)이다. [택리지]는 사람이 살 많나 곳이 어딘가하는 관점에서 각지의 정치, 경제, 풍속, 인심 등을 적은 책이다.
* 택리지- 가릴택, 마을리, 뜻지, 이 책에 대한 서술이 맞다면 지역에 대한 서술이, 지리가 아닌 사람이 중심이다는 말이다. 사람이 먼저이고, 그리고, 그에 맞는 지역이 선택되었다는 것인데, 이러한 관점을 모를 때엔... 나는 책 이름이 ‘가릴 택’, ‘이로울 리’를 쓰는 것인 줄 알았다. 땅의 이로움을 취한다라는 의미로. 어디에서인가 택리지를 배울 때, 그렇게 배워버린 듯 하다.

[266] “충효열녀(忠孝烈女) 상하(上下)있소?”

제12장 중인층의 대두와 농민의 반란

[270] 1결에 100두 즉 수확고의 2분의 1이 될 정도로 많은 양을 징수하는 경우도 있었다.
* 삼정의 문란 중의 한구절
* 1결은 대체로 200두를 생산하는 면적이다. 여기서 지세는 1/10을 내는 20두가 된다.
1결은 결 20두를 내를 토지의 면적, 토지의 질에 따라서 면적이 다라졌다. 1등급 토지는 약 3000평, 6등급은 1만2000평이다.

[283] 이 판소리 사설의 정리에 공이 큰 것은 신재효인데, 그는 말귀를 실감이 나도록 고쳐서 독자적인 창의를 냈다. 그러나 그러는 과정에서 원래 판소리가 가지는 소박함과 발랄함이 상실되는 국면도 있었다.
* 소리를 그대로 글로 옮겨쓰지 않았다는 말이구나. 그런데 원래 판소리를 소박하지 않은 것이지 않나? 판소리 가사는 소박하지 않은데.... 저자는 대체 어디에서 소박함을 찾았지? 발랄하기는 하지.

[286] 송시열을 모시는 화양동서원이 발하는 서간은 정부의 명령보다도 더 위력을 발휘하였다.

제 13장 개화세력의 성장

[294] [이언易言]은 청의 정관응이 지은 것인데, 국가를 부강하게 하려면 기술만 중요시해서는 안 되며, 기술 뒤에 있는 정치제도 등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의 것이었다.

[305] 영국의 행동은 러시아 세력의 진출에 커다란 제약이 되었다 어쨌든 조선의문제가 조선이 아닌 다른 여러 나라에 의해서 자기네의 이익만을 위하여 흥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자국의 이익을 추구 하지 않는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이익을 추구하는 방법에도 도덕적인 것을 요구해도 그것이 실현 가능할까?

[306-307] 일본 상인들은 농민들을 상대로 폭리를 남기는 약탈적인 무역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농민들이 면제품, 솥, 냄비, 농구, 석유, 염료, 소금 등 각종 수입품을 사들이기 위하여 쌀을 팔 수밖에 없는 사정을 교묘히 이용하였다. 즉 농민의 생활이 곤궁하다는 약점을 노려서 밀 금전을 빌려주었다가 추수기에 그들의 수확의 일부 혹은 전부를 인수하여 가는 방법을 썼다. 이것은 고리대금의 방법으로 가난한 농민들로부터 이중의 이익을 취하는 상행위였다.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대한 반항으로 곡물의 수출을 금하는 방곡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 수많은 우리나라 상인은 어디갔나? 몰락했나? 수입품 취급하는 사람은 없었나?
어느 시대이건 농민들은 곤궁하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 상인들이 그 점을 이용하지 않았다면 다른 상인들이 그 곤궁하다는 약점을 이용했을 것이다. ‘환곡’이 부패한 것도 그것을 이용한 것이니까. 그 당시의 일본의 경제적 침략은 상당하였을 것이다. 사회적 힘이 부족했을 것이고, 그것을 막을 다른 제도적 장치가 없었을 것이다.

[308] 民은 국가의 근본이다. 근본이 약해지면 국가도 잔약해지는 것이다.

[311] 동학농민군이 요구한 폐정개혁 내용을 보면, 첫째로는 무엇보다도 경제적으로 농민의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둘째로는 외국 상인의 침투에 따르는 폐해를 없이하는 것이었으며, 셋째로는 정치적으로 간신과 탐관오리를 몰아내고 대원군을 받들어 내정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314] 한편 지방관으로부터는 사업권과 군사권을 박탈하였다. 이리하여 지방관의 권한은 제도상 약화되어 근대관료적 색채를 농후히 하였다.
* 갑오경장, 개혁의 내용이 일부

[316] 대원군은 심지어 정변을 일으켜 고종을 폐하고 대신 그의 손자인 이준용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고까지 하였다.
* 이것은 사실로 믿고 싶지 않다. 나는 대원군이 이러지 않길 바래서 일 것이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사실이라고, 진리라고 믿고 싶은 어리석은 마음이여.

[316] 이 홍범 14조는 한국 최초의 헌법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하지만, 감오경장의 기본 방향을 요약해서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에 주목받고 있다.
* 홍범14조 ㅡ 자주권,행정,재정, 교육,관리 임용, 민권 보장의 내용을 규정한 국정개혁의 기본 강령이었으며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띠고 있다.
① 청국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② 왕실전범(王室典範)을 작성하여 대통(大統)의 계승과 종실(宗室) ·척신(戚臣)의 구별을 밝힌다.
③ 국왕이 정전에 나아가 정사를 친히 각 대신에게 물어 처리하되, 왕후 ·비빈 ·종실 및 척신이 간여함을 용납치 아니한다.
④ 왕실사무와 국정사무를 분리하여 서로 혼동하지 않는다.
⑤ 의정부와 각 아문(衙門)의 직무권한의 한계를 명백히 규정한다.
⑥ 부세(賦稅)는 모두 법령으로 정하고 명목을 더하여 거두지 못한다.
⑦ 조세부과와 징수 및 경비지출은 모두 탁지아문(度支衙門)에서 관장한다.
⑧ 왕실은 솔선하여 경비를 절약해서 각 아문과 지방관의 모범이 되게 한다.
⑨ 왕실과 각 관부(官府)에서 사용하는 경비는 l년간의 예산을 세워 재정의 기초를 확립한다.
⑩ 지방관제도를 속히 개정하여 지방관리의 직권을 한정한다.
⑪ 널리 자질이 있는 젊은이를 외국에 파견하여 학술과 기예(技藝)를 익히도록 한다.
⑫ 장교를 교육하고 징병제도를 정하여 군제(軍制)의 기초를 확립한다.
⑬ 민법 및 형법을 엄정히 정하여 함부로 가두거나 벌하지 말며,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⑭ 사람을 쓰는 데 문벌(門閥)을 가리지 않고 널리 인재를 등용한다.

[318-319] 정부의 보호 속에서 보부상의 조합인 보주상단은 종래의 특권의식으로 부터 탈피하지 못했고, 따라서 근대적 상인단체로 성장하지도 못하였다. 이에 대해서 개항장의 객주들은 객주상회를 조직하여 점점 근대적인 상인단체로 성장하여 갔다.

[319] 개항 초기의 근대식 공장은 민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부에 의해서 운영되는 것이 그 특색이었다.

[320] 유길준에 의하면 개화에는 허명개화와 실상개화가 있었다. 허명개화는 남의 것을 보고 앞뒤를 헤아릴 능력도 없이 무조건 따라서 재물만 소비하는 것이고, 실상개화는 사물의 이치와 근본을 살펴서 자기 나라의 실정에 합당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당시의 한국의 정치나 경제의 개혁을 구상하였다.
* 유길준이라는 이름이 이 책에 자주 등장한다.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323] 고종이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에 있는 것은 러시아를 위시하여 미국, 영국 등 경운궁을 에워싼 외국 공사관의보호에 의지하려고 함이었다. 자기 나라의 수도에 있으면서도 외국인 일본이 무서워 황제가 행동의 자유를 잃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권은 계속해서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국정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 조선의 군대는 어디가고, 궁궐 옆까지 왕의 신변을 위협하는 세력이 들어오도록 두었단 말인가. 대체 어쩌다가 군대를 사용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가? 군대는 없었나?

[352]우리의 형세를 보건대 부하고 강하며 독립하여 응시하는 모든 나라는 다 인민의 지식이 개명하였다. 지식의 개명은 교육의 선미로 되었으니, 교육은 실로 국가를 보전하는 데 근본이다.

[359] 새가 새가 날아든다. 복국조(復國鳥)가 날아든다. 이 산으로 가며 복국, 저산으로 가며 복국, 청산 진일에 피나도록 복국 복국 슬피우니, 志士魂이 네 아니냐.

[360] 안창호는 국내에서 가에로 해산당한 신민회의 후신으로 흥사단을 조직하였다.
* 대성학교, 신민회, 흥사단

[361] 망명활동과 비밀결사에 의지하거나 혹은 교육활동이나 종교운동에 의지하던 민족운동을 전국적인 대규모 독립운동으로 표면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민족자결주의였다. 미족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의 뒤처리를 위하여 팽창하여 가는 약소민족들의 민족운동에 호응하여,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것이다.
*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이지. 미국이 자국의 이익이 되지 않는 것에 대해 어떤 것을 주장한 것을 보았나? 우리를 침탈하게 묵인한 이들이 내세우는 것이다. 민족자결주의는 표면의 이유와 함께 다른 이유도 찾아야 할 것이다.

[362]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 만방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밝히며, 이로써 자손 만대에 일러 민족이 스스로 생존하는 바른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하노라.
* 독립선언서의 일부

제15장 민족운동의 발전

[371] 원료와 원료품 수입의 비율이 증가하였다. 그리고, 수출에 있어서도 식료품, 즉 쌀의 비중이 적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한국이 식민지적 성격에서 이탈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조급한 결론이다. 이러한 완제품 수입이 감소는 일본의 투자가 증가하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본의 정책에 또 한번의 전환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381] 이 파업은 결국 타협으로 매듭지어졌으나, 노동재의가 민족운동과 연결되는 양상ㅇ르 뚜렷이 나타내 주었다.
* 1929년 원산의 노동자 총파업

[388] 한국인이 근대적인 사상이나 학문을 발전시킨 것은 결국 사립학교나 유학을 통한 교육에 힘입은 것임을 알 수가 있다.

[390] 일정한 공식을 한국사에 적용하기보다는 개별적인 역사적 사실의 정확하고 충실한 이해가 한국사를 보다 옳게 이해할 수 있는 방도라고 생각하는 실증사학이 또한 일어났다.

재16장 민주주의의 성장

[397-398]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한 지 1년 뒤인 1947년 5월에 (후략)
* 대한민국의 성립 과정에서
* 미국과 소련은 우리나라에서 사상 때문에 대립하나 그들의 이권 때문에 대립하나?

[407] 역사를 체계화하는 것은 결국 역사의 큰 흐름을 파악하는 일이다. 그러면 이 책에서 시도한 바와 같이 지배세력의 변천을 기준으로 할 때 한국사의 흐름은 어떻게 요약될 수 있는 것일까.

[407] 통일신라기의 전제정치시대를 정점으로 하고, 그 이후로는 반대로 지배세력의 저변이 점차 확대되어 가는 경향을 나타냈다.

[409] 지배세력의 변천은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된 것인가. 거기에서 어떤 법칙성 같은 것을 발견할 수는 없는 것인가..... 대체로 말해서 처음에는 지배층을 형성한 여러 세력들 중에서 보다 유력한 세력이 독점적으로 권력을 향유하는 방향으로 좁혀 들어갔다. 그것이 통일신라 이후에는 지배세력의 바로 밑 계층이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하곤 하여 점점 지배세력의 사회적 기반이 확대되어 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410] 사회적인 지배세력 안에서 정치적인 집권자는 탄생했을 것이다. 즉 집권자는 지배세력 안에서 선택된 지배세력의 대표자였다. 따라서 이 둘은 서로 떨어질 수가 없는 관계에 있었다.

[410] 집권자는 지배세력의 뒷받침 속에서 비로소 정권을 장악하고 그 안정을 얻을 수가 있었다.

[411] 역사는 발전한다는 명목아래 모든 집권자가 무조건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는 없다. 그들이 한국사의 큰 흐름을 앞으로 전진시키는 구실을 하였는가 혹은 후퇴시키는 구실을 하였는가에 따라서 그들의 역사적 위치가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사의 대세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역사는 꼭 발전해야만 하는 것인가? 전진해야만 하는 것인가? 하나의 법칙을 적용하는 직선적인 사관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지 우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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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용
2007.06.04 15:28:51 *.99.120.184
글 속에 정화님만의 독특함이 있어요.
정형화된 틀에서 나오는 느낌이 아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멋이 있어요.
그것을 살려 나가면 좋겠는데. 정작 본인은 그것을 느끼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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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6.04 19:57:21 *.72.153.12
오라버니, 중이 제 머리 깍는 것 보셨수? 난 못 봤는디...
저는 제 생각이 너무 많아서 저자에게 책에 깊이 못 빠져드는 경향이 있어요.

제 궁금증 좀 풀어주세요. 딴지걸었던 것들은 실은 다 궁금한 겁니다. 제가 뭘 몰라서 저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들이예요.한번 틀어지기 시작해서 그때 바로 잡아두지 않으면 골이 깊어져요.

수공업에 임노동자? 역사에서 말하는 '민족적'이라는 의미를 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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