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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4일 17시 02분 등록
■ 저자에 대하여

● 이기백


1947년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이화여자대학교 교수(1958~63), 서강대학교 교수(1963~84)를 거쳐 1985년부터 한림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고려시대 병제(兵制)를 연구했으며, 신라의 귀족세력과 전제주의를 대표하는 상대등과 집사부의 상관관계를 연구하여 신라의 정치적 발전과정을 파헤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골품제에 대한 연구도 진행했으며, 고구려사·백제사에도 연구영역을 넓혔다. 한국사에 대한 사론(史論)도 다수 발표했다. <다음 백과사전 中에서>

이기백 선생의 어린 시절

소년 이기백은 넉넉하지 않은 집안에서 자랐다.
“집안의 1년 농사 소출이 50섬 정도였으니까 빠듯했지요. 그런데 선친이 집안일을 일절 돌보지 않고 국내외로 떠돌아다녀 형편이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월사금을 못 낼 정도였어요. 보통학교 다닐 때 어머니에게 「연필 한 자루 사 달라」고 울고불고 하던 기억이 나요.”

그가 태어난 곳은 평북 정주 오산이다. 정주는 사과의 명산지였다.
“제가 세 살 때 별세한 할아버지가 생전에 아직 열매도 맺지 않은 사과나무 과수원을 사 놓으셨습니다. 저의 장래 학비 마련을 위해서 그러셨대요. 제가 고보에 다닐 무렵에는 아버지가 과수원 일을 열심히 하셨어요. 과수원과 농토를 묶어 「五山농장」이란 이름을 붙이시대요. 사과나무가 200그루쯤 되었어요. 정주는 황주, 진남포 다음가는 우리나라 사과의 명산지였죠. 그 무렵 과수원이 어찌나 잘 되었던지 아버지가 목돈을 좀 쥐셨어요. 수확한 사과를 그냥 두면 썩으니까 저장창고를 만들어서 갈무리하여 봄까지 출하했지요.”

형편이 좋지 않았지만 어린 시절에 책을 구하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순전히 아버지 이찬갑 선생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우리말이 귀하다」면서 우리말로 씌어진 책이면 시집이건 소설이건 역사책이건 닥치는 대로 사 놓으셔서 집안에 읽을거리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申采浩(신채호) 선생의 「朝鮮史硏究草(조선사연구초)」를 열심히 읽었는데, 어려워 잘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 책 속에 실린 「조선역사상 일천년내 제일대사건(朝鮮歷史上 一千年來 第一大事件)」이란 논문만은 감동깊게 읽었지요. 또 咸錫憲선생이 「聖書朝鮮」에 연재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로부터도 역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특히 사육신이나 林慶業(임경업)에 대한 서술이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습니다”
훗날 고인은 역사를 전공하게 된 것은 이들 역사학자의 민족주의사관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소년 이기백에게 감동을 준 책은 또 한 권 있다. 이기백은 “러시아의 압제 밑에서 신음하던 폴란드 사람들의 처지가 당시 한국의 비참한 현실을 연상시켰기 때문”에 소년시절에 『퀴리부인 전기』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어린 시절, 그에게 감동을 준 책은 『퀴리부인 전기』,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 그리고 함석헌 선생의『성서에서 본 한국역사』 등이었다. 이기백은 1941년 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고등학원을 거쳐 1942년 가을 와세다 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했다.

아버지 이찬갑의 영향

이기백 선생은 2001년 11월호 월간조선 권두(卷頭) 특별 인터뷰에서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많이 털어놓았다.

이기백은 1924년 10월 평안북도 이찬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찬갑은 오산학교 출신으로 서울 서대문 피어선 신학교(지금의 평택대학교)에서 목사 수업을 하다 중도에서 그만두고 「성서조선(聖書朝鮮)」의 기고자로서 김교신(金敎臣), 함석헌(咸錫憲), 송두용(宋斗用) 등과 함께 우리나라 초창기 無교회운동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아버지는 소비조합운동이나 無교회운동 같은 데 관심이 깊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집에다 (오산학교 학생들을) 하숙시켜서 생계를 꾸려가셨죠. 집은 동네에서 제일 컸어요.”

이찬갑은 늘 덴마크를 재건시킨 그룬티비그가 했다는 “그 나라의 말과 역사가 아니고는 그 민족을 깨우칠 수 없다”는 말을 되풀이해서 아들들에게 들려 주었다고 한다. 자신의 이해타산을 셈하며 시류에 눈을 번득이는 권력자와 학자와 언론인이 아니라 평범한 평민들이 깨어날 때 우리의 삶이 바뀌고, 세상이 바뀐다고 생각했고, 그룬티비그의 그 나라와 역사와 말만이 그 나라를 깨울 수 있다고 믿으며 역사와 한글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찬갑은 1958년 4월 23일에 주옥로 선생과 함께 풀무농업학교를 연 것도 이런 교육론을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한국사학의 거두인 그의 장남 이기백, 한국어학의 권위자인 그의 3남 이기문은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났다.

역사학의 거두 이기백 교수

일제시대 일본 와세다대를 중퇴한 고인은 46년 서울대 사학과에 3학년으로 편입한다. 그는 당시 서울대 사학과 이병도 교수로부터 실증적인 학문연구 방법을 익히게 된다. 사료에 대한 비판과 검증 과정은 그에게 역사의 ‘진리’를 캐는 작업이었다. 그는 이 고된 과정을 통해 사실(史實)을 밝혀낼 수 있다고 믿었고, 여기에 역사학자의 사관이 가미되면 그것이 곧 역사의 진리라는 믿음을 안고 살았다.

그는 "진리를 거역하면 민족도 망하고 민중도 망한다"고 말할 정도로 진리 지상주의자였다. 해석보다는 지나치게 사실을 강조한 그의 성향은 때로 비판을 받긴 했지만, 그의 실증적인 학문연구방법이 해방 후 한국사학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의 학문 연구는 61년 출간된 ‘국사신론’을 비롯해 ‘신라정치사회사 연구’ ‘고려병제사’ ‘신라사상사 연구’ ‘한국고대정치사회사 연구’ 등 굵직굵직한 성과물을 발표하면서 결실을 보게 된다. 특히 ‘국사신론’은 67년 ‘한국사신론’으로 증보되면서 한국의 대표적인 통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한국사신론’은 한국사를 공부하는 대학생이라면 거의 모두가 이 책을 보았을 정도로 한국사 분야의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또 영어와 러시아어를 비롯한 여러 외국어판으로 번역돼 한국사를 국제사회에 소개하는 대표적인 책이기도 하다.
고인은 권위적인 학풍으로 상아탑에 안주해온 역사 연구를 일반인에게 쉽게 소개하는 데도 앞장서왔다. 지난 87년부터 제자들과 함께 해온 반 년간 학술지 ‘한국사시민강좌’는 지금까지 34집을 발행하면서 역사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역사학의 거두 이기백 교수‘ 부분은 경향신문 2004-06-02 를 인용)

그는 "학자가 공부를 안 하면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공부를 하다가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 이기백 교수다. 고인은 말년 한국사의 대중화 작업에 관심을 많이 기울였다. 1987년 9월부터 역사대중지 ‘한국사시민강좌’(일조각)의 책임편집을 맡아 올해 2월까지 34집을 발간했다. 한국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일반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든 이 반년간지는 무크지와 정기간행물의 중간 형태로 전문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유지하며 성공적인 잡지로 자리 잡았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는 『한국사신론』을 자신의 분신이라고 피력하며, 천년동안 읽힐 고전이 될 것으로 확신했다. “10세기 뒤에 보라”는 말로 자신의 책에 대한 강력한 믿음을 표현했다는 사실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다한 학자인 것 같아 그의 그러한 자세를 본받고 싶다. (굳이 천년 후를 확인해 보지 않더라도) <출판저널>은 그의 책이 21세기에도 빛날 것이라고 말했고, 나는 그의 학자로서의 훌륭한 태도만큼은 그의 사후에도 여전히 빛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 내 마음에 들어온 글 귀

[3] 그들은 한국이 대륙에 붙어 있는 작은 반도였다는 지리적 조건-이것은 실은 고려 이후의 일에 지나지 않았지만-을 들어서 한국의 역사는 대륙이나 섬나라에 의하여 타율적으로 움직여 온 역사였다고 강조하였다. 말하자면 한국의 독립성, 한국사의 자율성을 근본적으로 부인한 것이다. 그러나 그 주장이 디디고 서 있는 지리적 결정론은 이론적으로 용납될 수가 없다. 역사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지 지리가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실제 역사의 구체적 전개과정에서도 한국을 밖으로부터의 침략자에 대하여 끈질긴 항쟁을 하여 왔다. 그러므로 이론에 있어서나 실제에 있어서나 그들이 말하는 반도적 성격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허위였던 것이다.

[3] 한국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우리가 힘써야 할 일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우선적인 과업은 식민주의사관을 청산하는 일이다. 식민주의사관은 한 마디로 말하면 일제의 한국에 대한 식민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왜곡된 한국사관이었다.

[3] 역사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지 지리가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4] 민족성이 역사의 산물인 것이지 역사가 민족성의 산물인 것은 아니다.

[4] 문화는 근본적으로 보편성을 기반으로 하고 성립된다.

[4] 일반적으로 말해서 순수하게 고유한 문화란 어느 민족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또 설혹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 민족의 우수성을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4] 민족문화는 인류 문화의 보편성을 근거로 하고 자기 민족의 역사적 현실에 적합하도록 창조적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4] 요컨대 일제 어용학자들은 식민주의적 한국사관은 한마디로 현실적인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객관적 진리를 압살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리의 추구를 그 생명으로 삼는 학문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왜곡된 한국사관을 타파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한국사관이 올바로 발전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식민통치라는 악조건 속에서 올바른 한국사학을 키우기 위한 근대사학의 3가지 전통 사관과 각 사관의 한계를 기억하자. 그것은 민족주의사학, 유물사관, 실증사학이다.
[5]민족주의사학은 한국사의 발전을 민족의 정신적 측면에서 설명하려 하였다. 한국사의 근원이 되는 것은 한국민족의 혼이요 정신이므로, 이 혼이나 정신이 왕성할 때에는 한국사도 찬란한 발전을 하였으나, 그것이 약해지면 역사도 또한 약해진다고 믿었다.

[5] 유물사관은 민족 속에는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의 대립이 있어 왔고, 그 대립의 양상은 일정한 공식에 의해서 역사적으로 발전해 왔다고 주장하였다.

[5] 실증사학은 한국사의 발전을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이에 맞추어서 보는 것에 반대하였다. 오히려 실증적인 태도로 객관적인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함으로써 한국사의 올바른 이해에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7] 역사는 곧 인간의 역사이며, 한국사는 곧 한국인의 역사이다. 이것은 다툴 수 없는 진리이다. 그런데 종래 한국사의 서술은 종종 인간이 없는 역사인 경우가 많았다. 특히 개설서의 경우에 그러하였다. 누가 역사를 만들고 움직여왔는가 하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사건과 제도의 서술로써 만족하여 왔던 것이다.

[7] 아직 한국사학은 제도사학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유교적인 개인 중심의 역사 이해에 대한 비판의 일환으로써 중요시된 것이 제도사학이었다. 물론, 군주이건 영웅이건 간에 개인 중심의 역사관은 청산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제도가 인간없이 운영되었는가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따라서 누가 필요로 해서 그런 제도를 만들었는가 하는 데 대한 해명이야말로 그 제도를 이해하는 핵심 문제가 아닐 수 없다.

[8] 사회세력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재인식은 한국사를 생명력이 넘치는 역사로 만들 것이다. (중략) 한국사를 인간의 역사로서 파악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한국사학에서는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8] 한국민족도 결국은 인류의 한 구성원이고, 따라서 거기에는 인류의 다른 구성원들과 공통점이 있는가 하면 또 차이점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공통점과 차이점을 인식하는 것이 한국민족의 역사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하나의 길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통점과 차이점의 인식은 다른 말로 한다면, 그 보편성과 특수성의 인식이 되겠다.

[9] 역사에 적용하는 법칙은 다원적인 것이지만, 그 여러 법칙들은 어느 민족에게나 다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다만 많은 법칙들이 어떤 민족의 역사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날 때에, 그 결합하는 양상이 다른 민족의 경우와 같아질 수 없고, 그것이 곧 그 나라 역사의 특수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한국사의 보편성과 특수성도 이러한 원칙에 입각해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에 작용하는 보편적인 여러 법칙들에 대한 이해가 깊으면 깊을수록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 깊어진다는 말이 된다. 이 목적을 위하여는 구체적으로 한국사와 다른 민족의 역사를 비교해 보는 방법이 필요하다. 따라서 한국사의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비교사학의 방법이 더 널리 적용되어야 하리라고 믿는다.

[10] 이 책에서 시도된 시대구분의 기준은 사회적 지배세력(주도세력)에 놓여 있다. 즉, 사회적 지배세력의 변천 과정에 기준을 두고 한국사의 큰 흐름을 파악해보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짜여진 각 장들은 곧 그대로 독립된 하나의 시대이며, 이 독립된 시대들은 앞뒤의 시대와는 차이가 있는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여러 분야의 인간활동을 그 시대의 주인공인 사회적 지배세력과의 연관 속에서 이해하도록 하였음은 물론이다. 나아가서 그렇게 설정된 시대들의 교체 과정을 전진적인 자세에서 파악하도록 노력하였다. 즉, 낡은 시대의 잔재들보다는 다음 시대의 새 요소들의 성장 과정을 중요시하는 입장을 취하였던 것이다.

[87] 신라는 당의 침략에 항거하고 정치적인 독립을 지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것이 곧 통일신라의 사회와 문화가 발전하는 기초가 되었고, 나아가서 한국민족의 독자적인 역사 발전의 터전이 되었다.
물론 신라의 통일은 불완전한 것이었다. 과거 3국의 활동 무대에 속하던 만주의 넓은 지역이 그 영역에서 벗어났고, 거기에는 고구려 유민들이 발해(渤海)를 건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라는 실제로는 한반도를 통일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그러함에도 불구ㅠ하고 이 신라의 반도통일은 중대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독립된 기반위에서 한국민족의 형성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신라가 발해 함께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며 대립하고 있다 하더라도 결국 신라의 영토와 주민 및 그들이 이루어 놓은 사회와 문화가 한국사의 주류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의미에서 신라의 반도통일은 커다란 민족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해야 하겠다.

[89] 삼국시대에 있어서의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중국과의 관계는 주로 항쟁의 역사였다. 물론, 외교적인 동맹이나 문화의 수입과 같은 접촉도 있기는 하였으나, 크게 보면 무력적인 항쟁이 주가 되어 왔다. 그러나 당의 침략적 야욕이 분쇄되어 그 세력이 후퇴하자, 신라와 발해는 모두 당과 평화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중국과이 관계는 큰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110] 발해는 멸망과 함께 만주는 한국민족의 역사무대에서 떠나 버리고 말았다. 발해는 한국민족이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만주를 지배한 최후의 국가였던 셈이다. 이 같은 데에 발해가 차지하는 민족사적 위치가 있는 것이다. 발해가 망한 뒤에 고구려 계통의 지배층은 고려로 와서 고려에 의한 민족의 통일에 이바지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한국사의 주류에서 큰 구실을 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관계로 해서 발해가 신라와 함께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에는 신라를 한국사의 정통으로 생각하는 사관이 오랫동안 유지되게 된 것이다.

[116] 장보고의 청해진 세력은 일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중앙의 정치무대에 직접 등장하거나 혹은 이와 대항하는 새로운 정권을 세우기까지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갈라지고 무너져 가는 중앙귀족들이었지만, 그들의 세력기반인 골품제도를 보존하기 위한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리하여 신라사회의 이단자인 해도인 장보고는 몰락하였다.

[118] 농민들은 신라의 융성기에 있어도 조세와 역역의 부담 때문에 유망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유민이 되어 사방으로 흘러 다니거나, 혹은 무리를 지어 도적이 되어서 질서를 교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 호족의 보호 속에서 그들의 새로운 생활을 영위하기도 하였다. 이 새로운 변화는 왕경(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의 옛 질서에 대한 타격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세의 독촉은 말하자면 신라 귀족의 마지막 발버둥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것은 농민들을 반란의 도가니 속으로 밀어 넣었다.

[122] 태조 왕건은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통일 왕조를 건설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여 북진정책을 써서 청천강까지 국경을 넓히었고, 신라사회에 얽어매고 있던 골품제의 사슬을 풀어버렸다. 그러나 한편 또 신라가 지니는 전통적인 권위의 탈을 쓰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신라 왕실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경순왕 김부를 비롯한 신라 귀족들을 극진히 우대하였다. (중략) 이리하여 고래는 어엿한 신라의 후계자가 되었다. 태조는 단순한 변방의 이름없는 성주 출신인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의 전통을 이어받은 존재가 된 것이다.

[151] 사학의 융성은 자연히 관학의 부진을 초래하였다. 이를 우려하여 관학의 진흥을 꾀하고자 노력하는 시책들이 나오게 되었다. (중략) 예종의 뒤를 이은 인종(1122~1146) 역시 그 뜻을 이어 경사 6학의 제도를 세워 고려의 관학기관을 정비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김인존, 김부식, 윤언이, 정지상 등등 대학자가 배출되기에 이르렀다.

[151] 유교의 발전은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낳게 하였다. 유교는 국가를 다스리는 올바른 길로 생각되었으며, 국왕이나 귀족들은 정치가로서의 도덕적인 수양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가 편찬되었던 것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역사책인 『삼국사기』는 유교적 입장에서 편찬된 기전체(紀傳體)의 정사(正史)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유교적인 합리주의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반드시 불교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었고, 이를 내세를 위한 가르침이라고 하여 서로 병존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이 양자에 겸통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것이 고려 말기나 조선시대 성리학자들과 다른 점이라고 하겠다.

[160] 문치주의에 입각한 고려의 귀족정치는 무신의 사회적 열세를 초래하였다. 무신들은 정치적으로 문신보다 하위에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열세에 놓여있었다. 마땅히 무신이 맡아야할 군사령관직도 문신이 맡는 임무가 되어 있었다. 유명한 강감찬은 명장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그의 출신이 무신인 것은 아니다. 윤관이 그렇고 김부식이 또한 그러했다. 결국, 무신은 천대받는 존재였고, 문신에게는 사역되는 존재였다.

[161] 무신의 난은 의종 24년(1170)에 일어났다. 국왕이 보현원에 갔을 때 호위하던 장군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은 군인들에게 “무릇 문관을 쓴 자는 모두 죽이라” 선동하며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경인란). 무신과 군인들의 합류는 이 반란을 쉽사리 성공시켰다. 그들은 이어 의종을 폐하고 그 아우 명종을 옹립하였다. (중략) 이리하여 정권은 문신으로부터 무신의 손으로 넘어간 것이다.
정중부, 이의방, 이고는 무신란의 3거두이다.

[168] 북아시아 초원지대의 유목민족으로서 성장한 몽고의 가장 중요한 정복대상은 남쪽 농경민족이었다. 그것은 농경민족들이 지니는 풍부한 생산품이 그 구미를 돋우어 주었기 때문이다.

[170] 농촌이 황폐해지면 농민들의 생활이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강도(강화)의 정부는 농민에 대한 적극적인 보호 대책을 서둘기보다는 오히려 가혹한 수취로 그 생활을 더욱 곤란케 할 뿐이었다. 이러한 귀족들의 수취는 농민들의 정부에 대한 반항심을 조장시킬 뿐 아니라 몽고에 대한 항쟁 의욕을 꺾어 주었다.

[180] 권문세족은 개인의 이익을 확대시킴으로써 국가의 제도를 통한 지배층 전체의 공동 이익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184] 무명의 승려인 신돈을 중히 쓴 것도 개혁정치의 실시가 권문세족과는 인연이 없는 인물을 등용해야만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188] 고려 후기 유교의 특징은 성리학을 받아들였다는 데에 있다. 성리학은 처음 <소학>을 중심으로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실천적인 윤리를 중요시 하는 면에서 수용되었다. 그러나 점차 인생과 우주의 근원을 형이상학적으로 해명하는 철학적인 국면이 발전되기에 이르렀다.

[193] 고려에서는 초기부터 도서관 시설에 관심이 커서 허다한 서적을 수집하여 보관할 뿐만이 아니라, 이를 등사하여 두게도 하였다. 따라서, 고려에는 수만 권의 진기한 서적이 비장되고 이를 송에서조차 구하여 가는 형편이었다.

[239] 족보는 종으로는 혈통관계를 밝히고, 횡으로는 동족 관계를 기록한 것이었다. 이 족보가 이때에 널리 만들어지게 된 것은 그것이 여러 가지 사회적 특권을 누리는 양반의 신분을 밝혀줄 뿐만 아니라, 또 동족 인사와의 관계를 나타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족보에 의해서 자기 동족중의 유명 인사를 알아두는 것을 필요로 했다. 즉, 족보를 외는 보학은 양반이 지녀야 할 하나의 필수적 지식이었던 것이다.

[248] 상당히 넓은 면적의 토지라도 이를 혼자서 경작하는 소위 광작이 크게 보급되었다. 대체로 광작하는 농민들은 부농이었으며, 이들은 이미 자신의 소비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품으로 팔기 위하여 생산하는 기업농이었다.

[250] 양반과 상민의 관계는 비록 그 구분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인 재부에 토대를 두고 크게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255] 실학의 탄생은 정치와 사회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정권 담당자들에 대한 비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정권 담당자의 일부에서도 현실을 개혁하려는 노력이 있기는 하였으나, 대체로 말한다면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측에서 그러한 노력이 더 많이 일어났다. 이리하여 오랫동안 정권에서 축출되어 있던 남인들 중에서 실학자가 많이 나게 되었다.

[255] 그들이 관심을 가진 현실이 바로 조선의 현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학문은 민족적 성격을 띤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조선의 학문은 새로운 비약을 하게 되었다.

[256] 경세치용의 학문을 집대성한 학자는 정조・순조 때의 정약용이었다. 그는 순조 원년(1801) 신유사옥으로 인하여 18년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에 당시 조선사회의 현실에 대하여 직접적인 분석과 비판을 가하는 많은 저서를 남기어 실학 최대의 학자로 불리고 있다. 그는 <경세유표>에서 중앙의 정치조직에 관한 의견을, <목민심서>에서는 지방행정에 대한 개혁을, <흠흠신서>에서는 형정에 대한 견해를 발표하였다. 이 3부작 이외에도 <탕론>, <전론> 등에서 그의 사회 개혁사상을 발표하였다.

[259] 이 시대에 만주사에 대한 관심이 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다. 가령 이종휘는 <동사>의 지에서 고구려에 대하여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 방면의 대표적 저작은 아무래도 유득공이 정조 8년(1784)에 지은 <발해고>일 것이다. 여기서 그는 신라의 통일이 불완전한 것이고 북쪽에 발해가 있었으므로 이는 응당 남북국이라 불러야 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같이 한국사의 무대가 반도와 만주에 걸치는 것이었다는 생각은 실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으며 고조선이 요동에 있었다는 가하는 의견도 종종 나타나 있다.

[261] 서학 신봉자들은 서양 선교사들의 전도에 의해서보다도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천학초함>등의 천주교 서적들을 읽고 자발적으로 이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까닭은 소수 벌열의 집권으로 말미암은 사회적・정치적 모순을 극복하는 길을 서학에서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하는 성리학과는 반대로 서학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악하다고 하는 인간원죄설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264] 이들은 요컨대 실증적인 태도로 유교의 경전들에 접근하여 주자가 아닌 공자의 본뜻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공자의 본뜻을 실증적으로 찾아보자는 입장에서 경서를 독자적으로 해석한 학자로는 정약용이 있었다.

[279] 몰락한 양반 출신의 학자인 최한기는 철종 11년(1860)에 완성된 그의 대표적 저술인 『인정』속에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인재를 옳게 등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사, 농, 공, 상의 구별 없이 인재를 뽑아 교육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또 역사는 앞으로 진보한다는 생각에서 장차 인류가 문명세계 속에서 생활할 수 있으리라는 밝은 전망을 가지고, 쇄국정책을 버리고 문호를 열어 세계의 여러 나라와 호흡을 같이할 것을 주장하였다.

[315] 갑오경장은 한국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정치, 경제, 사회 등 실로 다방면에 걸친 대개혁이었다. 그러나 이 개혁은 일본이 성장하는 자본주의가 침투할 수 있는 평탄한 길을 닦아 놓는 구실도 하였다.

[348] 민족 산업이 부진하게 된 중요한 이유는 무력을 수반한 일본의 정치적 침략을 배경으로 한국의 금융계를 일본인의 은행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354] 이러한 사립학교의 설립에 열성인 것은 양반 출신이 아니라 평민 출신이었다. 또 피교육자도 평민 출신이 많았다. 교육의 내용은 주로 서양의 새로운 학문과 사상이었다. 역사, 지리, 정치학, 법학 등을 비롯해서 산술, 대수 등의 여러 과목이 교수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사립학교들은 새로운 지식의 전달장일 뿐 아니라, 민족운동의 근거지로서 유명하였다. 교내에서 토론회, 웅변회를 개최하여 청년의 의기를 북돋워주었다. 나이 많은 사람이 학생으로 입학하는가 하면, 고급학교 학생이 하급학교의 교사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보수적인 층으로부터는 신교육이 못마땅하게 생각되기도 하였으나, 사립학교는 애국열과 함께 성해 갈 뿐이었다.

[355] 지식층의 정치운동이나 교육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기독교였는데 특히 신교가 그러하였다.

[355] 이들은 전도의 한 수간으로서 의료 등의 사회사업을 경영하여 사회적으로 이바지한 바도 컸거니와 사상적으로 자유주의를 고취하고 민족의식을 앙양하는 데도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361] 민족자결의 원칙은 일제의 식민통치하에서 신음하던 한국민족에서 열광적 환영을 받았음은 물론이었다. 이제 세계는 바야흐로 ‘위력(威力)의 시대’가 끝나고 ‘도의(道義)의 시대’가 온 것으로 믿게 하였다.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하여 한국도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이 민족운동을 일대 독립운동의 전개로 몰아갔던 것이다.

[363]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만방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밝히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일러 민족이 스스로 생존하는 바른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하노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여 이를 선언함이며, 2천만 민중의 충성을 합하여 이를 선명함이며, 민족의 한결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 양심의 발로에 기인한 세계 개조의 큰 기운에 순응해 나가기 위하여 이를 제기함이니, 이는 하늘의 밝은 명령이며, 시대의 큰 흐름이며, 온 인류가 더불어 같이 살아갈 권리의 정당한 발동이라,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지니라.

[383] 일제 식민통치하에서의 한국 민족운동의 특이한 양상의 하나는 그것이 학생들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독립시위운동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388] 한국인이 근대적인 사상이나 학문을 발전시킨 것은 결국 사립학교나 유학을 통한 교육에 힘입은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경성제국대학에 대항하여 민립대학을 세우려는 운동이 전개된 것은 이러한 민족적 요구에 부응하려는 운동이었다고 하겠다.

[405] 4월 혁명은 맨주먹밖에 가지지 못한 민중이 강압적인 정권을 타도하는 데 성공한 한국사상 최초의 혁명이었다. 그 주동적 역할을 담당한 것은 학생이었다. 기성세대나 기성권위에 대하여 불신을 품고 있던 학생들이 4월혁명의 선두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이 혁명은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4월혁명은 독재정치와 부정축재에 반항하는 국민의 힘이 학생들의 젊은 의기를 통하여 발현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밝은 전망을 던져 주었다.

[405] 민주 정치하에서 여러 계층의 갖가지 욕구가 일시에 분출하여 각종 시위가 연이어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은 당연히 국민 여론의 비판을 받았지만, 이는 민주정치가 행해지고 있다는 증거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혼란으로 규정하고, 이 혼란을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일어난 것이 1961년 5월에 있은 5․16 군사 쿠데타였다.

[411] 역사는 발전한다는 명목아래 모든 집권자가 무조건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는 없다. 그들이 한국사의 큰 흐름을 앞으로 전진시키는 구실을 하였는가 혹은 후퇴시티는 구실을 하였는가에 따라서 그들의 역사적 위치가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사의 대세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411] 과거에 민중은 지배세력에 참여하지를 못하여 왔다. 사회의 기층세력이면서도 주인의 구실을 못하였고, 다만 때로 불만의 표시를 나타낼 수가 있을 뿐이었다. 그 불만이 나타난 구체적 표현은 소극적으로는 지배기구의 테두리 밖으로 유망하는 것이었고, 적극적으로는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민중의 반항은 종종 지배세력의 재편성을 초래하는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곤 하였다. 즉 반항을 통하여 민중 자신이 지배세력으로 등장하기보다는 역사의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를 마련하곤 하였을 뿐이었다.

[412]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민중은 한 발짝씩 지배세력으로 등장하는 길을 닦아가고 있었다. 민중이 직접 사회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19세기 말엽부터였다. 이 시기에 우선 주목해야 할 사건은 동학운동이었다. 농민을 중심으로 한 이 사회운동은 일시나마 집강소를 통한 정치 참여로까지 성장하였다. 다음으로는 독립협회의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대체로 도시의 지식층과 상공업자를 중심으로 한 민권운동이었고, 국회를 개설하여 그들의 정치 참여를 주장하는 민족국가의 건설운동이었다.

■ 『한국사신론』을 읽고 & 내가 저자라면

20세기의 빛나는 책, 『한국사신론』

얼마 전에 읽은 리영희 선생의 『전환 시대의 논리』는 서평 전문지 <출판저널>이 ‘21세기에도 남을 20세기의 빛나는 책들’ 중의 하나로 선정된 책이다. 1999년 새 천년에 즈음해 전문가 추천을 받아 뽑은 이 리스트는 동서양 고전 130권이 포함된 리스트이다. 해외 서적으로는 토머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가, 그리고 국내 서적으로는 이기백 선생의 「한국사신론」이 가장 많은 표를 얻었다. 이번 주에 읽었던 『한국사신론』은 21세기에 가장 빛날 책으로 선정된 책이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새롭다.

『한국사신론』은 서장에서 이렇게 썼다.
“그들은 한국이 대륙에 붙어 있는 작은 반도였다는 지리적 조건-이것은 실은 고려 이후의 일에 지나지 않았지만-을 들어서 한국의 역사는 대륙이나 섬나라에 의하여 타율적으로 움직여 온 역사였다고 강조하였다. 말하자면 한국의 독립성, 한국사의 자율성을 근본적으로 부인한 것이다. 그러나 그 주장이 디디고 서 있는 지리적 결정론은 이론적으로 용납될 수가 없다. 역사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지 지리가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실제 역사의 구체적 전개과정에서도 한국을 밖으로부터의 침략자에 대하여 끈질긴 항쟁을 하여 왔다. 그러므로 이론에 있어서나 실제에 있어서나 그들이 말하는 반도적 성격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허위였던 것이다.”

이기백 선생은 식민주의사학을 탈피해 한국사학의 과학성을 정립하는 것을 평생의 과제로 설정하고 성실하게 학문에만 매진한 역사가다. 그는 식민주의사학을 한마디로 지리적 결정론이라고 정의하였다. 지리적 결정론의 특징은 타율성이다. 주변의 강대국들에 의해 우리 역사의 운명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지리적 결정론으로부터 사대주의가 탄생하였고, 이기백 선생은 사대주의는 일본 식민주의사학의 발명품이라고 말했다. 이 모든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민족을 대한 사랑은 진리를 향한 믿음에 기반해야 한다고 하여 이것이 따로 있지 않다고 확신했다. 그는 자주 “진리를 배반한 민족은 역사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그의 묘비명을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라고 써 주길 유언했다.

사실 역사에 대한 일천한 지식은 이 책이 얼마나 훌륭한 책인지, 어떤 사관을 극복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생각을 갖지 못하였다. 다만 참 재밌게 읽어 나갈 수 있었다. 어렵지 않아서 즐거웠고, 정확한 사실이라는 생각에 믿음을 갖고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저자는 이 책을 저술하면서 두 가지에 큰 뜻을 두고 저술했다고 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기백 선생은 진리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여 평생의 연구를 진행하였다고 한다. 민족도 중요하고, 민중도 중요하지만, 결코 진리의 중요함에는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 역시, 진리를 좋아한다. 나의 믿음은 진리는 시퍼렇게 살아있고, 정답도 있다는 것이다. 진리는 지혜를 낳는다는 것이다. 진리는 영원하다는 것이고, 순간적인 어둠에 가려질 수 있지만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가를 공부하라는 카의 조언이 아쉬운 순간이다. 이 책을 덮은 후에야 저자에 대한 조사를 행했던 공부 순서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 과제였다. 아~! 역사를 주제로 한 달만 더 했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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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6 23:53:18 *.128.229.230
역사는 미래에 닿아 있다. 미래를 이해하는 결정적 단서인 것이다. 그대가 역사를 한 달 더 하고 싶다면 걱정하지마라. 이제 개인의 역사,즉 개인사로 들어 갈 것이니 한 개인에게 투사된 그 시대를 집어보라. 그리고 그대에게 투사된 현대를 그려보라. 끊임없이 연결하라. 책과 책을 연결하고 사상과 사상을 연결하고, 시대와 시대를 연결하고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고 그들과 그대를 연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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