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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4일 08시 56분 등록
한국의 새로운 역사를 꿈꾸며

#1. 저자에 대하여

한국 사학계의 제1세대로서 일제 식민사관 극복에 앞장섰으며, 한국사 시민 강좌를 여는 등 한국사의 대중화에 힘쓰신 국사학계의 거목, 이기백 선생님은 1924년 10월 2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에서 태어나서 2004년 6월 2일, 향년 80세의 나이로 별세하셨다.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인 증조부 이승훈과 민족운동에 관심이 많던 부친 이찬갑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개념을 익히고 역사학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아버지는 ‘우리말이 귀하다’면서 우리말로 쓰여진 책이면 시집이건 소설이건 역사책이건 닥치는 대로 사 놓으셔서 집안에 읽을거리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신채호 선생의 ‘조선사 연구초’를 열심히 읽었는데, 어려워 잘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 책 속에 실린 ‘조선역사상 일천년내 제일대사건’이란 논문만을 감동깊게 읽었지요. 또 함석헌 선생이 ‘성서조선’에 연재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로부터도 역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특히 사육신이나 임경업에 대한 서술이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습니다.”

1941년 오산중학교를 졸업한 뒤, 1942년 일본 와세다 대학교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 1944년에 중퇴하고, 194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했다. 물론 일제시대와 해방 후 어지러운 정세 속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일제 치하에서 2개월 군대생활을 하다, 남하한 소련군에게 붙잡혀 포로수용소에서 포로 생활도 겪었고, 1947년 학생들의 반대 운동으로 봄학기가 거의 휴강이었으므로, 논문만 내고 겨우 졸업하기도 했다.

“졸업논문을 내라고 해서 제출하니까 1947년 여름에 졸업장을 줍디다. 어떻든 졸업은 했으나 내 공부에는 별 진전이 없었습니다. 그 뒤 배재 중학, 용산 중학을 거치면서 고달픈 교사생활을 하다 보니 공부할 겨를이 더욱 없었어요.”

6.25전쟁을 거치고, 군생활 중 육군사관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기도 했다. 1956년 제대 후 떠돌이 강사생활을 거쳐, 1958년 이화여대 사학과 조교수로 채용되었다. 1961년 재직 중 첫 개설서인 ‘국사신론’을 출판하였다. 1963년부터 1985년까지 서강대학교 교수로 역임하며 ‘서강학파’를 수립했다.

당시 학계의 통설에 따라 서술한 시대구분이 불만이었던 차에 미국 하버드대 와그너 교수의 영어번역 제안을 받았고, 1966년 초 하버드대 옌칭 연구소의 연구교수로 있으면서, 1년 동안의 수정작업을 거쳐 1967년 드디어 ‘자신의 분신’인 ‘한국사신론’을 출판하게 된다.

“내 것다운 개설서가 될 수 있도록 노력을 했습니다. 당시 개설서라면 시대구분에 있어 고대, 중세, 근대 3분법을 당연한 것같이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야만 한국사를 세계사에 동참시키는 것으로 믿었거든요. 나도 처음에는 남에게 뒤질세라 ‘世界史의 기본법칙’이니 하는 책을 열심히 읽었고, 또 많은 자극을 받았어요.

그러나 나는 끝내 어느 일정한 공식에 의존해서 우리 역사를 이해하려는 데 찬성할 수 없었습니다. 역사는 다원적인 방식에 의해 얼마든지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모든 역사적 현상이 하나의 굵은 끈으로 묶여 있는 일정한 시대를 일정한 각도에서 볼 수 있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입니다.

저는 특히 역사의 주인공인 인간을 중시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사회적 지배세력의 변천과정에 기준을 두고 한국사의 큰 흐름을 파악하려고 한 것입니다. 또 낡은 시대의 잔재들보다는 다음 시대의 새 요소들의 성장 과정을 중시하는 입장을 취했죠.”

이기백 선생님은 회갑을 넘긴 1985년에 한림대 교수로 옮겨 1995년에 퇴직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한림과학원 객원 교수와 이화여대 사학과 석좌교수를 역임하며 학문의 열정을 불태웠다.

“학자가 공부를 안 하면 죽은 거와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어차피 죽을 바에는 공부를 하다가 죽는 게 나을 듯 싶습니다.”

또한 1987년부터 제자들과 함께 해온 반연간 학술지 ‘한국사 시민 강좌’는 역사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학술적, 교육적 공로 등을 인정받아 학술원 저작상, 인촌상, 국민훈장 모란장 등 다양한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제자인 이기동 교수는 선생님을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제자들에게는 관대한 분”이라고 말했고, 정두희 교수는 “대학원 시절의 세미나는 제자들이 선생님의 학설을 비판할 정도로 자유로운 분위기서 이뤄졌다”면서 “선생님은 당신과 다른 견해라 하더라도 옳다고 생각되면 다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대표작 ‘한국사신론(1967)’이외에도 ‘민족과 역사(1971)’, ‘신라정치사연구(1974)’, ‘한국 고대사론(1975)’ 등 20권 이상의 책을 저술 또는 번역한 그는 “진리를 거역하면 민족도 망하고 민중도 망한다”고 할 정도로 진리지상주의자였다. 해석보다는 지나치게 사실을 강조한 그의 성향은 때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실증적인 학문연구방법이 해방 후 한국사학의 토대를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학문과 진리의 외길을 걸었던 이기백 선생님은 돌아가시던 해, 2월 이런 유언을 남기셨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감당해야 할 일정한 책임을 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책임을 성실하게 실행하여 자기가 태어날 때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겸손한 태도로 사람과 사귀며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않기를 바란다.

사람이란 원래 약한 존재이다. 마음 속에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여 올바른 생활에 흔들림이 없기를 바란다. 비록 내 육신은 떠나더라도 마음을 여전히 살아서 함께 할 것이다. 내 무덤 앞의 작은 돌에는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 넣었으면 좋겠다.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 2004년 2월 1일 이기백”

*이기백 선생님의 말씀은 2001년 11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인용하였다.


#2. 내 마음에 들어온 인용문

(3) 한국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우리가 힘써야 할 일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우선적인 과업은 식민주의사관(埴民主儀史觀)을 청산하는 일이다. ... 그들은 한국이 대륙에 붙어 있는 작은 반도였다는 지리적 조건 - 이것은 실은 고려 이후의 일에 지나지 않았지만-을 들어서 한국의 역사는 대륙이나 섬나라에 의하여 타율적으로 움직여 온 역사였다고 강조하였다. 말하자면 한국의 독립성, 한국의 자율성을 근본적으로 부인한 것이다. ... 역사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지 지리가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4) 그들은 또 한국민족이 선천적으로 혹은 숙명적으로 당파적(黨派的) 민족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이 민족적 단결을 파괴하여 독립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말한다면 민족성이 역사의 산물인 것이지 역사가 민족성의 산물인 것은 아니다.

(4) 그들은 또 한국의 문화는 독창성이 없는 모방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 그러나 이것은 문화가 근본적을 보편성을 기반으로 하고 성립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데서 오는 잘못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순수하게 고유한 문화란 어느 민족에게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 민족 문화는 인류문화의 보편성을 근거로 하고 자기 민족의 역사적 현실에 적합하도록 창조적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창조적 노력의 성과를 한국사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7) 역사는 곧 인간의 역사이며, 한국사는 곧 한국인의 역사이다. 이것은 다툴 수 없는 진리이다.

(10) 이 책에서 시도된 시대구분의 기준은 사회적 지배세력(주도세력)에 놓여 있다. 즉, 사회적 지배세력의 변천 과정에 기준을 두고 한국사의 큰 흐름을 파악해보려고 한 것이다. ... 그리고 이러한 여러 분야의 인간활동을 그 시대의 주인공인 사회적 지배세력과의 연관 속에서 이해하도록 하였음은 물론이다. 나아가서 그렇게 설정된 시대들의 교체 과정을 전진적인 자세에서 파악하도록 노력하였다. 즉, 낡은 시대의 잔재들보다는 다음 시대의 새 요소들의 성장 과정을 중요시하는 입장을 취하였던 것이다.

(227) 이리하여 정계에는 훈구세력과 사림세력 사이의 대립이 조성되었고, 이것이 드디어는 사화(士禍)를 낳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화는 사림의 비판에 대한 훈국세력의 정치적 보복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233) 이와 같은 암담한 현상은 백성들을 돌보지 않고 농촌을 황폐케 한 위정자들의 책임이었다. 거의 무방비 상태인 전국이 왜군에게 짓밟히게 되었다.

(233) 그러나 이러한 왜병의 활동은 처음 2개월 동안의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바다에서 왜의 해군 활동이 저지되고, 육지에서는 각지에서 의병(儀兵)이 봉기하여 왜병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우선 바다에서는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의 활동이 주목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년에 부임한 그는 해군이 필요함을 통감하고 함선을 건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사의 훈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 이러한 전비를 갖춘 이순신은 왜의 함대가 다가온다는 보고를 받고 곧 출동하여 각처에서 적선을 격파하였다. 옥포에서의 첫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이어 당포, 당항포, 한산도, 부산 등에서 계속 큰 전과를 거두었는데, 특히 한산도 앞바다에서의 해전은 가장 유명한 것으로 임진왜란의 3대첩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러한 이순신의 활약은 해상권을 완전히 조선군의 수중에 있게 하였고, 그 결과 해상으로 북진하여 육군과 합세하려던 왜군의 작전을 분쇄되고 말았다. 또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역이 안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이순신의 공로에 의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적의 보급로를 위협하여 왜 육군의 작전을 뜻대로 하지 못하게 하였다.

(235) 한편, 육지에서는 사방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정부의 모병에는 소극적이던 국민들이 스스로 향토의 방위를 위하여 무기를 들고 일어났던 것이다. 대개 같은 지방에 사는 양반, 농민, 노비 등이 모여서 의병장을 중심으로 부대를 편성하였고, 병력이 늘어나자 그 작전 지역을 점점 확대시켜 갔다.

(256-257)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으로 대표되는 경세치용의 실학은 농촌 문제의 해결을 지주층을 중심으로서가 아니라 토지의 경작자인 농민을 중심으로 생각하였다. ... 이들은 자신이 토지를 소유하고 경작하는 독립된 자영농민을 기본으로 하는 이상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즉, 사농일치(士農一致)의 윈칙에서 신분적인 차별을 없이하고, 교육의 기회를 균등히 하여 능력 위주의 관리를 등용하며, 상공업의 발전이나 화폐의 유통에 의한 농촌경제의 침식을 방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261) 그 까닭은 소수 벌열(閥閱)의 집권으로 말미암은 사회적, 정치적 모순을 극복하는 길을 서학에서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하는 성리학과는 반대로 서학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악하다고 하는 인간원죄설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약한자를 억누르고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골몰하는 벌열들이나 부농, 거상들로 말미암아 빚어진 모순으로 가득 찬 현실 속에서, 이에 비판적인 재야학자들이 이 서학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암담한 현실 속에서 몸부림치던 일부 경세치용의 실학자들은 종교적 신앙을 통하여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는 데 새로운 희망을 느끼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서학이 유행한다는 것은 벌열 중심의 양반사회, 성리학지상주의의 사상적 질곡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었다.

(271) 비록 비교적 청백한 관리가 암행어사에 임명되었다 하더라도 도도한 시세를 거역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274) 그러나, 노비안을 없앤 일은 역시 커다란 사회적 변화를 말하여 주는 것이다. 노(奴)와 주(主)의 분수를 엄격히 지켜 오던 과거의 신분체제는 무너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276) 민란(民亂)이 또 빈발하였다. 그 주체는 물론 농민이었다. 그러나 대개는 경제적으로 몰락한 잔반(殘斑)들에 의하여 지도되어 대규모적인 반란으로 학대되는 경우가 많았다.

(278) 이러한 민란들은 대개가 포악한 관리의 제거를 목적으로 하는 자연발생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아가서 벌열정치 및 세도정치에 의하여 병든 양반사회 자체에 대한 반항으로 진전되어 갔던 것이다.

(281) 이들이 천주교에 이끌린 것은 우선 모든 인간은 한결같이 천주의 자녀라는 평등사상에 공명한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중인이나 상민(常民)들이 천주의 자녀로서 양반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천주를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은 감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281) 동학은 철종(1849~1863) 때에 최제우가 제창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유(儒), 불(佛), 선(仙) 3교의 장점을 취하경 서학에 대항한다고 하였으나, 그 교리 속에는 천주교에서 취한 것도 있으며, 또 민간의 무술신앙(巫術信仰)에서 받아들인 것도 있엇다. ... 그는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은 곧 하늘(신, 神)이라 하여 이 둘을 한가지로 생각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심은 곧 천심이요, 사람을 섬기는 것은 곧 하늘을 섬기는 것과 같았다. 이러한 사상은 신분이나 계급으르 초월한 모든 인간의 평등을 부르짖은 것이었다. 사회적으로 압박받는 농민들에게 환영을 받은 까닭이 주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293) 일본의 이러한 일방적 의도에도 불구하고 강화도조약이 지니는 역사적인 의의는 컸다. 그것은 조선이 국제적인 무대에 등장하게 되는 첫 출발이 되어씨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점처 서양 여러 나라와의 통상이 시작되고 문호가 세계를 향하여 개방되게 되었던 것이다. ... 그러나, 신문명의 수입은 동시에 일본을 위시한 열강의 침략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개항은 개화와 자주의 양자를 어떻게 하면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가 하는 커다란 역사적 시련을 한국민족에게 안겨 준 셈이었다.

(302) 김옥균의 수기인 ‘갑신일론’은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결정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1. 대원군을 곧 모셔오도록 할 것.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평등의 권을 제정하고, 사람으로써 관을 택하게 하고 관으로써 사람을 택하게 하지 말 것.
3. 전국의 지조(地租)의 법을 개혁하여 관리의 농간을 막고 백성의 괴로움을 펴게 하며 겸하여 국용을 유족하게 할 것.
4. 내시부(內侍府)를 혁파하고, 그 중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 자는 등용할 것.
5. 간악하고 탐욕하여 나라를 병듥 함이 가장 현저한 자는 벌하도록 할 것.
6. 각도의 환상(還上)은 영영 정지할 것.
7. 규장각을 혁파할 것.
8. 급히 순사를 두어 절도를 막을 것.
9. 혜상공국(惠商公局)을 혁파할 것.
...
14. 정부 육조(六曹) 이외의 무릇 용관(冗官)에 속하는 것은 모두 혁파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작의(酌議)하여 품계(稟啓)케 할 것.

(305) 어쨌던 조선의 문제가 조선이 아닌 다른 여러 나라에 의해서 자기네의 이익만을 위하여 흥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청, 러, 영 여러 나라의 야욕 속에 둘러싸인 조선은 커다란 국제적인 위험 속에 묻힌 셈이었다.

(308) 전봉준의 지휘 아래 농민들은 고부군청을 점령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곡식을 빼앗아 빈민들에게 분배하고, 그리고는 만석보를 파괴하였다. ... 그들은 농민에게 창의문(倡義文)을 산포하여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위하여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는데, 그 마지막 대목은 다음과 같았다.

민(民)은 국가의 근본이다. 근본이 약해지면 국가도 잔약해지는 것이다. 보국안민의 방책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박으로 향제를 베풀어 오직 홀로 온전할 방책만 꾀하고 헛되이 국록과 관직을 탐하는 것이 어찌 이치에 닿겠는가. 우리들은 비록 초야의 유민이나 군토를 먹고 군의를 입고 있으니, 국가의 위망을 앉아서 볼 수는 없다. 팔로가 마음을 같이하고 억조가 묻고 의논하여 이제 의기를 들어 보국안민으로써 죽고 삶을 같이할 맹서로 삼는다. 오늘의 광경이 비록 놀라운 일에 속하나 결국 두려워하여 동요하지 말라. 각기 민업을 평안히 하고 태평한 세월을 함께 빌며 임금의 덕화를 모두 누리게 되면 천만다행일까 한다.

(312) 그러나 근대적인 무기와 훈련을 받은 일본군을 당해낼 만큼 동학 농민군을 강하지가 못하였다. 이리하여 안으로는 양반 중심의 부정부패에 항거하고, 밖으로는 외국의 자본주의 침략에 대항하여 사운 동학농민군을 결국 양자의 연합세력에 의하여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315) 갑오경장에서 중요한 내용의 하나를 이루는 것은 사회적인 개혁이었다. 여기에는 우선 신분제도의 철폐가 포함되고 있다. 즉, 양반과 상민의 계급을 타파하여 귀천을 불구하고 인재를 등용케 한다든가, 같은 양반에서도 문무존비의 제도를 없앤다든가, 공사노비의 법전을 혁파하고 인신의 매매를 금한다든가, 역정, 광대, 백정 등은 모두 면천케 한다든가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양반체제하의 신분제도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회적인 대개혁이었다. ... 갑오경장은 위에서 그 내용을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정치, 경제, 사회 등 실로 다방면에 걸친 개혁이었다. 그러나 이 개혁은 일본의 성장하는 자본주의가 침투할 수 있는 평탄한 길을 닦아 놓은 구실도 하였다.

(317) 이리하여 일국의 황후가 외국인 자객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당하게 되었다. 열국의 비난을 두려워한 일본은 미우라를 재판에 회부하였다. 그러나,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무죄의 판결을 내려 버리고 말았다.

(323) 국왕이 외국 공사관에 가 있고 이권이 속속 외국인의 손으로 넘어가는 상태에 대하여 국민의 비난이 집중되었다. 특히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운동이 그러하였다. 이에 고종은 경운궁(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김과 함께 국호를 대한(大韓), 연호를 광무(光武)라 고치고, 왕을 황제(皇帝)라 칭하여, 국내외에 독리 제국임을 선포하였다(광무 원년, 1897). 독립 제국으로서의 새 체제를 갖추게 된 것이다. 이것은 국민 여론의 승리였다고 할 수가 있다. 다만 그러한 외형의 체제와는 달리 실제에 있어서는 열가지 약점을 나타내고 있었다. ... 자기 나라의 수도에 있으면서도 외국인 일본이 무서워 황제가 행동의 자유를 잃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권은 계속해서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국정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325-326) 이러한 독립협회의 활동은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 목표를 위하여 전개되었다. 첫째는 밖으로부처의 침략에 대하여 자주독립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 둘째로는 일반 국민을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민권의 신장을 주장하였다. ... 셋째로는 국가의 자강(自强)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 이러한 독립협회의 활동 방향은 한국 근대화의 기본적인 과제들을 해결하려는 것으로서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330) 그러나, 루스벨트는 러시아 세력의 침투를 막기 위하여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것이 오히려 적절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를 승인하는 대가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지배를 인정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332) 이것이 광무 9년(1905) 11월에 체결된 한일협약(韓日協約)이란 것으로서, 보통 을사조약(乙巳條約)이라 부르고 있다. ... 을사조약의 내용은, 첫째로 일본 외무성이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괸계 및 사무를 통리, 지휘한다는 것이요, 둘째로 금후 한국정부는 일본 정부를 거치지 않고 국제적 성질을 띤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요, 셋째로 일본이 한국의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한국황제 밑에 1명의 통감을 둔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한국의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하여 버린다는 것이었다.

(333) 고종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3인에게 신임장을 주어서 회의에 참서가여 한국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케 하였다. 그러나, 의장은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서 외교권을 상실하고 있으므로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없다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336) 일본이 한국인으로부터 기대하는 것은 한국인을 다루기에 필요한 지식 뿐이었기 때문이다. ... 요컨대, 일본은 한국인의 정치적 발언을 원하지 않았다. 일본은 정치적 관심을 가진 모든 한국인을 불온분자나 폭도로 취급하였을 뿐이었다.

(336) 그런데 국왕과 대신들은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러시아를 위시한 외국의 힘을 빌리려는 외세의존적인 태도를 취하였는데 그것은 결국 또 다른 침략자들의 야욕을 만족시켜 줄 뿐이었다. ... 국민과 힘을 뭉쳐서 반대하려는 생각은 하지를 못하였다. 고종이나 정부는 일본일의 위협보다도 국민의 비난을 오히려 더 두려워할 지경이었다.

(351) ‘시일야방성대곡’은 일본의 사기적인 침략행위와 정부의 무능을 지탄한 뒤에, 다음과 같은 비분강개한 말로써 끝맺고 있다.

오호, 애통하도다. 우리 2천만 남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느냐, 죽었느냐. 단기 이래 4천 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졸연히 멸망하고 말았는가. 애통하도다, 동포여.

(362)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 만방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밝히며, 이로써 자손 만대에 일러 민족이 스스로 생존하는 바른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하노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여 이를 선언함이며, 2천만 민중의 충서을 합하여 이를 선명함이며, 민족의 한결같은 자유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 양심의 발로에 기인한 세계 개조의 큰 기운에 순응해 나가기 위하여 이를 제기함이니, 이는 하늘의 밝은 명령이며, 시대의 큰 흐름이며, 온 인류가 더불어 같이 살아갈 권리의 정당한 발동이라,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지니라.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과 민족이 스스로 생존하는 바른 권리를 가졌음을 선명한 이 독립선언서는 일본의 가혹한 식민통치에 대한 보복적인 행위를 선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368) 결국 일본이 표방한 소위 문화정치란 세계의 여론에 눌려서 시행된 기만적인 표면적 완화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식민정책의 근본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있은 것은 일본인의 국내적인 모순이거나 대외적인 침략과정에 따라 한국에 대한 요구가 변화됨으로 말미암은 정책의 전환뿐이었다.

(374) 요컨대, 일본은 한국민족이라는 의식을 뿌리째 뽑아버리고 한국민족의 존재를 지구 위에서 말살하려고 했던 것이다.

(393) 해방의 날, / 서울 장안에 태극기가 물결쳤다. // 옥에 갇혔던 이들이 / 인력거로 츄럭으로 풀려나올 제 / 종로 인경은 목이 메어 울지를 못했다. // 아이들은 새해 입을 때때옷을 꺼내 입고 / 어른들은 아무나 보고 인사를 하였다. // 서울 장안을 뒤덮은 / 태극기 우리 기, / 소경들이 구경을 나왔다가 /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 - 윤석중, 해방의 날

(405) 4월혁명은 맨주먹밖에 가지지 못한 민중이 강압적인 정권을 타도하는 데 성공한 한국사상 최초의 혁명이었다. 그 주동적 역할을 담당한 것은 학생이었다. 기성세대나 기성권위에 대하여 불신을 품고 있던 학생들이 4월혁명의 선두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이 혁명은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4월혁명은 독재정치와 부정축재에 반항하는 국민의 힘이 학생들의 젊은 의기를 통하여 발현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밝은 전망을 던져 주었다.

(406) 그리고 아직도 그 속에는 민주화를 위한 싹이 나타나는 징조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 북한에서 민주화의 서광이 비치게 되는 날이, 또한 통일의 서광이 비치는 날이 되기도 할 것이다.

(411) 우선 이 문제에 있어서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민중은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기층세력이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민중 없이는 사회 자체의 존립조차도 불가능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민중은 직접 생산을 담당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지배세력은 민중에 의지하여 그 존립을 유지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민중은 지배세력에 참여하지를 못하여 왔다. 사회의 기층세력이면서도 주인의 구실을 못하였고, 다만 때로 불만의 표시를 나타낼 수가 있을 뿐이었다. 그 불만이 나타난 구체적 표현은, 소극적으로는 지배기구의 테두리 밖으로 유망하는 것이었고, 적극적으로는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민중의 반항은 종종 지배세력의 재편성을 초래하는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곤 하였다. 즉 반항을 통하여 민중 자신이 지배세력으로 등장하기보다는, 역사의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를 마련하곤 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민중은 한 발짝씩 지배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19세기 말엽부터였다. 이 시기에 우선 주모해야 할 사건은 동학(東學)운동이었다. 농민을 중심으로 한 이 사회운동은 일시나마 집강소를 통한 정치 참여로까지 성장하였다. 다음으로는 독립협회의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대체로 도시의 지식층과 상공업자를 중심으로 한 민권운동이었고, 국회를 개설하여 그들의 정치 참여를 주장하는 민족국가의 건설운동이었다. 그리고 3.1운동은 위의 동학과 독립협회 두 계열의 합작운동이었다. 이리하여 임시정부가 민주주의의 원칙 아래 구성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렇게 크게 성장한 민중은 항상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하는 민족운동의 주동세력이 되어 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해방과 더불어 민중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가 가능하게 되었고, 이 대세는 4월 혁명에서 알 수 있듯이 더욱더 발전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가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사회정의가 보장되는 민주국가의 건설로 이어질 것이 기대되고 있다.


#3. 내가 저자라면

인용문에서는 서장과 10장부터 종장까지만을 정리하였으므로, 전체의 흐름을 잡기 위해 이기백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 전체 한국사의 흐름을 다시 한번 짚어본다.

“통일신라 이후 우리 역사는 지배세력의 저변이 점차 확대되어 오는 경향을 나타냈습니다. 신라 말기에 이르면 중앙에서는 육두품이, 지방에서는 호족의 세력이 등장하더니 , 드디어는 이들이 신라의 김씨왕족 중심의 골품제를 무너뜨리고 고려를 건설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후삼국시대를 난세라기보다는 매우 역동적인 시기라고 말합니다.”

고려는 왕족뿐만 아니라 6두품과 호족 출신의 문벌귀족을 중심으로 한 귀족사회였습니다. 이렇게 지배세력이 수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과거와 같은 관리등용시험을 필요로 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문신 중심으로 짜여 있던 고려사회의 지배세력은 무인 정권 시대에 무신으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특히 고려 후기에는 향리 출신의 사대부 세력의 진출이 눈에 띄게 됩니다.

조선은 사대부 중심의 양반 사회였지요. 따라서 고려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지배세력의 수적 증가를 보였습니다. 사림파가 등장하면서 이런 대세는 더욱 굳어졌습니다. 조선조 말기에 이르면 양반의 신분적 특권은 점점 무너지고 중인, 서리, 상공업자의 사회적 참여가 증대됩니다.

서양의 새로운 지식에 흥미를 갖고 개화 정책을 이끌어낸 것도 이들입니다. 한편 농민층도 점점 성장하여 이들이 동학 운동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3•1 운동과 같은 거족적인 운동도 이러한 기반 위에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의 말처럼 이 책은 한국의 역사를 ‘사회적 지배세력(주도세력)’이란 기준을 통해 살펴보았기 때문에, 전체적인 흐름이 일관성 있게 엮이는 것이 좋았다. 반면, 여러 사건들에 대한 설명이 단편적이라 서사적인 재미는 조금 부족했다.

이는 아마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일’을 학문의 임무로서 가장 중시하는 그의 연구 태도 때문일 것이다. 이 때문에 역사학자 랑케와 비교되며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여러 글에서 밝혔듯이 ‘민족주의사관, 유물사관, 실증사관에서 좋은 점은 취하고, 나쁜점은 버려서’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는 역사학자로서의 객관적인 관점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 듯 보인다.

6월의 연구원 모임에서 모임 자리를 옮기는 중, 사부님께서 웃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전세계의 역사에서 다섯 장면을 고르는데 왜 이리 겹치는 장면이 많으냐고..’ 그래서 솔직히 말씀 드렸다. ‘(제 경우엔) 제대로 읽어본 역사책이 이번 달 과제가 전부라서 그런 것 같다고...’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셨던 듯 하다. ‘다른 분야에도 마찬가지라고, 고작 그 정도의 지식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 많을 거라고...”

그렇다. 고작, 몇 권의 역사책을 읽고서 역사에 대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무엇보다 어떻게 저자의 입장에서 한국의 역사를 쓸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역사는 단지 연구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머나먼 과거의 먼지 쌓인 지식만도 아니었다. 지나간 사건들의 의미와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들은 현재의 자신 안에서 되살려내는 작업이었다. 끊임없이 지나간 시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생명력을 부여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번 달 과제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책들을 만났다.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와 함께 김현식의 ‘포스트모던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었다. 리오 휴버만의 ‘가자, 아메리카로!’와 함께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읽었다. 윌 듀란트의 ‘역사 속의 영웅들’과 함께 안광복의 ‘철학, 역사를 만나다’를 참고했다. 그리고 한국사 신론과 함께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를 살폈다. 하나의 사건이 다른 사건들과 오버랩되고, 철학과 사상이 역사의 장면들과 엮어지는 순간들이 재미있었다.

이렇게 책과 책 속을 헤매다 보니, 역사가 단지 과거의 사실 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 역사들은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 속에는 가슴을 끓어 오르게 하는 뜨거운 무언가가 있었다. 때로는 부드럽고, 슬프고, 사랑스럽고, 처참한 이야기들 속에서 나는 이런 메시지를 들었다. 역사는 꿈의 이야기이다. 더 나은 세상의 희망하는 자들의 이야기이다. 미래는 그들의 것이다. 꿈꾸는 자들의 것이다. 그렇게 역사는 한걸음, 한걸음 힘들게 나아왔다.

이번 달의 과제 발표에서도 밝혔듯이, 역사의 풍경 속에서 나를 사로잡은 것은 ‘혁명’이었다. 나는 무엇이 사람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했는지, 유한한 끝을 알고 있음에도 무한한 꿈을 꾸게 했는지가 궁금했다. 무엇이 짐승을 넘어 인간이 되게 했는지, 또 무엇이 인간을 넘어 영웅이 되게 했는지, 그리고 신을 꿈꾸게 했는지 궁금해졌다.

또한 나는 그 가슴 뛰는 풍경들, 피가 들끓는 치열한 풍경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의미를 묻고 싶었다. 죽어있는 박제로서의 역사가 아닌, 바람과 물의 역사, 산과 들의 역사, 그 아름다운 풍경 속 생명의 역사들이 내 눈 앞에서 펼쳐지길 바랬다. 팔딱팔딱 살아 움직이길 원했다. 거친 숨을 몰아 쉬며 꿈틀 되길 바랬다. 단 한마디라도 좋으니, 심장이 뛰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그 ‘혁명’과 ‘대화’가 담긴 뜨거운 역사 이야기를 언젠가 한번 써보고 싶다. 이기백 선생님과 같은 진정한 역사학자들, 그 거인들의 어깨 위에서 그들이 발견한 진실을 뼈대 삼아, 그 사실들에 살을 붙이고 피를 통하게 하여 누군가의 가슴을 울리는 글을 써보고 싶다. 누군가의 눈물 한 방울 떨구게 하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

그래. 에두아르도 갈레아노가 쓴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불의 기억’과 같은 한국 역사 이야기를 언젠가 한번 써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김현식의 ‘역사, 위험한 거울’과 같은 실험적인 시도도 재미있을 것 같다. 이기백 선생님께서 우리의 역사를 독자적인 관점으로 엮어냈듯이, 그 누구도 아닌 우리의 이야기를, 그 깨달음과 사상의 변천사를 새로운 시선으로 재구성하고 재발견해보는 것도 의미 있겠다. 결국 세상을 이끌었던 위대한 나라는 위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만든 나라였다.

이제 역사가 더 이상 고루하고 지루한 학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는 뒤늦은 발견 하나 만으로도 5월의 여행은 내게 충분한 의미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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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용
2007.06.04 15:03:51 *.99.120.184
읽은 책들과 연결되어 나타난 모습이 보기가 좋다.
뛰어난 감각으로 떨어진 조각들을 이어가는 능력이 훌륭하구나.
계속해서 이끌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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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6.04 20:17:09 *.72.153.12
우리는 진짜 많이 부족해. 부지런히 읽어야 겠어.
저자조사 잘 보고 가네~
이번달에 그래도 도윤씨는 책 참 많이 읽었네...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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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06.04 22:18:27 *.83.227.162
많이도 보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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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윤
2007.06.05 08:39:19 *.249.167.156
최선을 다하지 못한 듯 해서.. 아쉬움이 많은 리뷰입니다. 이번 주 업무와 다음 주 출장에 대한 부담감으로 지레 걱정했나 봅니다..

6월은 바쁜 한달이 될 것 같네요. 그 시간 없음 속에서 시간을 찾아보려 노력해야겠습니다. 그게 미적지근한 타협은 안되었으면 하는데, 두고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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