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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14일 02시 57분 등록

가자, 아메리카로!

(We, The People)
리오 휴버만 저, 박정원 역, 비봉출판사


1. 저자에 대하여

리오 휴버만(Leo Huberman)

개인적 약력
언론인이자 학자, 노동운동가로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적 지식인이다. 1903년 미국 뉴저지의 뉴어크에서 태어나 1969년 사망했다. 고학으로 뉴욕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서 잠시 교편생활을 하다가 잡지 편집자를 거쳐 1938년부터 1년간 컬럼비아 대학 뉴칼리지의 사회과학 부장으로 재직했다. 1947년 CIO(미국노동총연맹산업별조합회의)계(系) 전국회원조합의 교육선전부장으로서 노동운동에 전념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 시기에는 PM이라는 노동자 신문의 편집장으로 노동운동을 이끌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전국선원노조의 교육부장을 지냈다. 1949년에는 폴 M 스위지와 함께 세계적으로 유명한 진보 잡지인 <먼슬리 리뷰 Monthly Review>를 공동으로 창간해 죽을 때까지 편집자로 일했다. 주요 저서로 《자본주의 경제의 길(1936)》 《사회주의 입문(1950)》 등이 있다.

먼쓸리 리뷰(Monthly Review)
미국의 좌파진영에서 오늘날까지 정파적 차이를 넘어서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잡지. <먼쓸리 리뷰>가 등장하게 된 1949년은 미국의 진보세력에 대한 일대 탄압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기 시작한 때였다. 헨리 월러스를 대통령 후보로 내보낸 진보당조차도 청문회와 수사대상이 되어가는 상황이었으니 독립적 마르크스주의 진영의 결집을 내세운 <먼쓸리 리뷰>를 시작한다는 것은 그 발상자체로서도 무모했을 뿐만 아니라 대단한 용기와 각오가 아니면 되지 못할 일이었다.

<먼쓸리 리뷰>의 실질적인 출발은, 그 자신은 좌파는 아니나 사회적 관심이 깊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공동 편집자인 폴 스위지와 하바드 대학 동료교수이자 헨리 월러스 선거운동에도 함께 했고 이미 1935년에 하바드 교수노조 결성에 동지적 연대를 했던, 미국 문학의 권위 매티슨(F.O. Matthiessen)이 예기치 않게 받은 유산을 기증받아 이루어질 수 있었다.

물론 광란의 빨갱이 잡기(redbaiting)로 미국사회가 소용돌이치고 있는 시기의 좌파 월간지 출범과 그 항해가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리오 후버만은 1952년, 의회의 비미국인 활동 청문회(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에 소환되어 사상검증의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헌법의 언론자유에 대한 조항을 들어 자신들의 발언과 활동, 그리고 책 출간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매카시즘의 공세에 정면으로 맞섰다. 언론과 사상의 자유가 헌법정신으로 살아 있는 한 자신들의 생각과 표현이 국가적 질문과 추궁의 대상 자체가 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좌파운동의 영역을 적극적으로 방어해내었던 것이다.

그는 미국 공산당의 노선과 활동내용에 동조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공산당 활동을 불법화시키는 것에도 반기를 들었다. 매카시즘의 고조기에 <먼쓸리 리뷰>는 겉이 보이지 않도록 포장해서 발송했어야 했고, 기고자들도 “어느 대학의 사회과학 교수가”라는 식으로 익명의 방식을 통해 자신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좌파 내지는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것이 알려질 경우에 가해질 사회적 매장에 대한 지극한 공포가 지배하고 있던 시대에 등장한 <먼쓸리 리뷰>는 실로 대단히 놀라운 용기를 가진 것이었으며 폴 스위지는 이러한 작업의 선두에 서서 미국 좌파운동의 새로운 발판을 마련했다.

흥미로운 것은, <먼쓸리 리뷰> 창간호에 전 세계적으로 천재와 동일어로 인식되고 있던 아인슈타인이 “어찌해서 사회주의인가?(Why Socialism?)”라는 기고문이 게재됨으로써 진보진영의 영역이 대중적 상식을 넘어선 분야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 사실이다. 아인슈타인은 사회주의에 대한 공적 논쟁이 정치적 금기사항으로 강제되고 있는 현실에서 <먼쓸리 리뷰>가 이에 대한 정당한 논의의 장을 펼쳐줄 것을 주문, 맥카시즘의 파고가 좌파 운동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을 극복할 수 있도록 촉구한 것이었다. 한편 아인슈타인의 이러한 진보적 사회관은 미국 정부 당국을 당혹하게 했는데 그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하기 어려웠던 미국 정부는 아인슈타인을 “천진난만한 과학자”정도로만 대중적으로 인식시키는 프로파간다를 펼쳤고, 이러한 영향은 지금까지 남아 있을 정도이다.

”가자, 아메리카로” : 비하인드 스토리
양희은씨의 ‘아침이슬’도 송창식씨의 ‘고래사냥’도 금지곡이었다. 장발도 단속대상이었다. ‘기업혁신을 위한 창조적 파괴’를 주장했던 정통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도 ‘불온서적’으로 분류됐다. 슘페터의 고전조차 불온서적이 되는 판이었으니, 미국의 진보적인 좌파 역사학자 리오 휴버먼이 쓴 책들은 당연히 금서목록에 들었다. 박정희 군부 독재 시절의 얘기다.

'문학적 향취가 짙은 역사서‘라는 미국의 진보지 <더 네이션>의 평가를 빌리지 않더라도 이 책은 한번 들면 놓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재미가 있다. 그 흥미진진한 재미에 더하여 책을 읽으면서 미국 역사를 관통하는 큰 흐름이 한눈으로 보이고, 그 큰 흐름을 통해 미국의 어제와 오늘이 한껏 선명한 모습으로 다가선다.

원래 초등학교 교사였던 저자 휴버먼은 학생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미국 역사책에 절망한 나머지 이 책을 썼다. 그러나 이 책은 1932년 출판되자마자 일반 성인들로부터 더 큰 호응을 얻었다. 세계의 온갖 인종과 종교가 뒤섞여 만들어진 미 합중국의 얽히고설킨 역사를 이보다 더 쉽고 재미있게 갈래를 풀어준 책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 터였다.

“미국은 그 시초부터 지상의 모든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자석이었다”란 말로 휴버만은 미국역사의 드라마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 드라마를 통해 독자들은 미국의 동부와 서부, 북부와 남부의 차이를 비로소 분명하게 깨닫게 되고, 미 합중국이 탄생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미국 제도와 사회의 복잡한 다양성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초기 개척시대로부터 1929년 대공황이 있기까지 경제적 대확장의 역사에 담긴 온갖 모험들을 만나면서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부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를 알게 된다.

47년에 개정된 책에서 휴버먼은 대공황이라는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과 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자본주의적 방식인 뉴딜 정책에 대한 평가, 그리고 세계 독점자본의 전시경제 체제를 추가로 다뤘다. 54년 전의 분석인데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한 그의 탁월한 분석력이 새삼 돋보인다.


2.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문구들

(21) 미국에 오기를 원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뱃삯을 지불할 만한 돈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타고 온 배의 선장에게, 그들의 뱃삯을 대신 갚아 주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지 몇 년의 기간 동안 하인으로 팔리는 데 동의했던 것이다.

(23)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오랜 시간 동안 심사숙고하는 법이다.

(23) 웬만한 이유가 없이는 어느 누구도 위에 묘사된 모든 고난들을 겪고자 하지 않을것이다. 친척들, 친구들, 그리고 고향 집의 모든 즐거움과 위안과 안락으로부터 이별하는 슬픔을 보상하고도 남을만한 약속된 미래가 여행의 끝에 있어야만 했다.

(27) 미국은 일손이 필요했다. 유럽과 다른 지역에서는 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구하고 있었다. 이 새로운 나라에서는 일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가자, 아메리카로!

(28) 미국에서 오는 편지 속에는 ... 미국에서 얼마나 성공할 수 있는지를 ... 미국에 좋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알려주는 편지들, 다른 한편에는 점점 더 귀해져 가는 식량. 결론은 이민이었다. 위험과 고난을 무릅쓰고라도, 가자, 아메리카로!

(29) 이곳에서는 누구든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자유가 있다. 읽고 싶은 것을 읽을 수 있고, 쓰고 싶은 대로 쓸 수 있고, 마음 내키는 대로 말할 수 있다. 그래도 아무도 체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가자, 아메리카로!

(32) 그들은 흑인들을 데려올 수 있는 아프리카로 눈을 돌렸다. 18세기 거의 전반에 매년 2만명이 넘는 노예들이 아프리카에서 실려 왔다. 흑인 노예무역은 이윤이 아주 많은 사업이었다. 영국의 많은 재벌들의 재산이 노예무역으로 이루어졌다. 그 유명한 예가 글래드스톤(Gladstone)가(家)이다.

(49) 비옥한 토질, 더운 기후 ...... 전원(田園), 플랜테이션 ...... 초기에는 계약 노예노동자, 후에는 흑인 노예 ...... 공업 제품을 수입하고 쌀과 잎담배 등의 유일작물을 수출 ...... 무사안일의 부드러운 매너에 느린 말투와 귀족적인 태도의 느린 움직임, 토지 안에서 안정을 누리고 여유를 즐기는 농장주들 ...... 이것이 1760년의 남부였다. 남부를 그렇게 만든 것은 지리적 여건이었다.

(56) 뉴잉글랜드인들이 흑인 노예의 사용을 반대했던 것이 아니라 흑인 노예가 필요 없었을 뿐이었다. ... 북부에서는 반대로 그것이 어느 면에서는 그릇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리적 환경이 서로 상반되는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57) 후에 흑인 노예의 수입이 금지되었을 때 남부에서는 피부색이 검은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고, 북부에서는 반대로 그것이 어느 면에서는 그릇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리적 환경이 서로 상반되는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61) 신세계를 향해 어려운 여행을 감행했던 많은 사람들이 신세계를 보기도 전에 죽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은 와서 보았다. 그리고 죽었다.

(62) 모든 식민지 주민들은 계급과 소유재산에 따라 일정한 권리가 있거나 없거나 했다. 계급과 재산. 그것은 사람들이 언제 무엇을 하든 거의 항상 따라다녔다.

(67) 문명의 끝과 미개의 시작이 만나는 곳, 이곳이 변경이었다. 문명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이곳의 개간지에서는 땅이 거저이거나 값이 아주 쌌다. 바로 문턱까지 황야가 닿아 있던 이곳에서는 인생을 처음부터 재출발할 수 있었다.

(67) 식민지에서는 유럽에서보다 더 빨리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 오를 수 있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미국적 사고방식은 변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변경개척자들은 정책 결정에 대한 발언권을 요구했다. 그들은 법을 만드는 데 그들 자신이 참여할 권리를 요구했다. 처음으로 실천에 옮겨진 곳은 미국이었다. 그것은 후에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매우 중대한 사상이었다.

(70) 황야를 지배하게 된 지금 어떠한 상류계급의 명령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개척자) 자신의 일은 스스로 처리할 수 있다고 믿도 있었다.

(71) 서부로의 행진은 계속되었다. 땅에 대한 갈망이 새로운 이민들을 불러들였고, 더 나은 땅에 대한 욕망이 구정착민들을 불러들였다.

(80) 오늘날의 미국인들도 그들의 식민지 시대 조상들을 닮고 있다. 그들은 그들에게 유익하지 않은 법등은 아직도 계속 무시해 버리고 있다. 그것은 미국의 전통적인 관습이다.

(82) 식민지 주민들은 무엇이 대영 제국의 발전을 돕는 것이며, 무엇이 서인도 제도의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을 부자로 만드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사는 그들 자신이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제국의 법을 지켜서 잘 살 수 있다면, 그런 법은 지켰다. 그러나 잘 살기 위해서 법을 어겨야 한다면 그런 법은 지키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돈지갑에 구멍이 뚫리느니보다는 영국의 법에 구멍이 뚫리는 것이 나았다.

(85)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은 자신들의 뜻대로 하는 버릇에 습관이 돼버렸다. 영제국 정부를 대표하고 있던 총독들과의 그러한 논쟁은 식민지 주민들로 하여금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떳떳이 실행하고 주장하는 연습을 시켜주었다. ... 영국은 영국을 위하여 식민지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반면, 식민지는 식민지를 위해 식민지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다.

(89) 1763년 선언법, 1764년 사탕조례, 1765년 인지조례. 식민지 내의 불경기. 무대는 이미 마련되어 있었으므로 회오리의 시작은 멀지 않았다.

(91) 서민층은 그들의 주된 분쟁의 상대가 유산(有産)계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게이지가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유산자들의 이익을 위해서 투쟁하도록 선동되고 있었다. 참으로 전통적인 수법이었다.

(112) 혁명은 확고한 신념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로 시작되었다.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주저하는 식민지 주민들에게 사물을 그들의 방식대로 보게끔 설득했다.

(117) 혁명은 미국을 영국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켰지만, 아마도 더 중요한 것은, 미국을 상류계급의 지배라는 구세계적 사상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도움이 됐다는 사실일 것이다.

(120) 혁명이란 말의 가장 핵심적인 의미 중의 하나는 ‘변화’이다. 미국혁명은 미국인들의 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는 구시대의 유럽 국가들에게는 이후 수십 년 동안 오지 않았던 것이며, 또한 미국으로 하여금 ‘자유국가’라는 평판을 갖게 한 것이다.

(125) 대금업자•제조업자•상인•채권 소지자•투기업자•노예소유자 - 그들은 강력한 중앙정부를 원했다. 그들은 돈을 가진 부자들이었고, 그들의 재산을 보호해 줄, 그리고 안전하게 쉽게 돈을 벌게 해 줄 수 있는, 따라서 재산을 늘게 해 줄 수 있는 강력한 중앙정부를 원했다.

(144) 개척자에게는 도구가 필요했다. 그에게는 총 하나, 도끼 하나, 그리고 옥수수 한 자루가 있었다.

(150) 서부인들은 인심이 후했다. 여행중인 나그네를 도와 주었는데 돈은 무슨 돈이냐며 ‘네, 나도 우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니 그만둡시다. 당신이 내게 돈을 줄 권리가 있는 만큼 나도 당신에게 우유를 드릴 권리가 있습니다.’

(151) 황야와의 그러한 투쟁이 개척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투쟁은 그들에게 자립을 가르쳐 주었다. 자신의 두 손으로, 오로지 자신의 힘에만 의존해서 낯선 상황과 맞섰고 그리고 정복했다.

(152) 사람은 누구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할 때 발명가가 된다. 동시에 미지의 것을 두려워 하지 않게 된다. 개척자는 다방면의 기술자가 되었다. 그가 적응해야 했던 상황은 보통 이상의 것이었다. 그는 그러한 상황에 적응했고, 따라서 이제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153) 개척자의 생활은 소박하고 단순했다. 그는 화려한 것을 혐오했다. 그는 꾸밈을 싫어했으며, 그의 태도는 직선적이었다. 그는 평등과 자유를 믿고 있었다. 그는 자주적이고, 강한 자존심과 긍지를 갖고 있었고, 두려움을 몰랐으며, 지칠 줄 모르는 부지런함과 성공에 대한 강한 집념을 갖고 있었다. 황야에서의 생활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183) 그들의 생활은 거칠고 위험했으나 자신을 돌보는 법을 배워 알고 있었다. 그들은 힘들고 외로운 생활을 사랑할 줄 알았다. 문명이 제공하는 생활방식을 내던지고 인디언의 차림새와 관습과 태도를 닮으려 했다. 말과 짐싣는 가축 두 마리, 총과 탄약, 덫과 칼, 커피 포트, 프라이팬, 담요, 알코올과 잎담배, 이것만 있으면 강인한 덫사냥꾼들은 산에서 1년간 생활할 수 있었다.

(194) 들소의 학살은 굉장한 것이었다. 1870년대 말경 들소는 사라졌다. 그와 함께 인디언들로부터의 위험도 사라졌다. 이제 그들은 보호구역 안으로 들어가 그곳의 생활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인디언의 위협은 끝났다.

(198) 1868년 철조망의 발명과 1874년에 시작된 목축지대 전역에 걸친 철조망의 판매는 들판을 쪼개어 개인 소유의 목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204) 그러나 사람이란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 전에는 큰 변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무엇이든 우리 기분에 맞고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면 항상 그것에 집착하게 된다.

(213) 미국인들이 인력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사용했던 또다른 방법이 있었다. 일손을 확보하는 데 실패하자 그들은 그 일을 대신할 기계들을 발명했다.

(222) 북부의 제조업자가 부녀자들, 어린이들, 농한기의 남자들, 노동을 절약하는 기계들, 이주민들의 도움으로 노동력 문제를 해결했던 반면, 남부의 플랜테이션 농장주는 흑인 노예들로 눈을 돌렸다.

(224) "......노예에게 뭔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노예 노동력으로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노예가 일단 한 가지라도 배우고 나면, 일생 동안 그 배운 것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예가 사용되는 곳에서는 다양한 생산이란 있을 수 없다. 만일 잎담배가 생산되는 곳이라면 시장의 상태가 어떻든, 토양의 상태가 어떻든 잎담배만을 유일하게 생산해야 한다." - 케언즈(J.E.Cairnes)
(224) 남부인들은 유일작물 재배와 흑인노예 노동력의 결합이라는 그들의 특수한 조건에 플랜테이션 제도가 가장 적합했기 때문에 그것을 채용했다.

(247) 산업혁명으로 인해 새로운 권력층으로 부상하고 있던 북부의 상인, 제조업자, 은행가 계급은 남부의 지주계급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분쟁은 60년 이상 계속되었고, 종국에는 '남북전쟁(the Civil War)'로 끝을 내렸다.

(252) 흑인들은 그들의 재산이었다. 재산 중에서도 값비싼 재산이었다. 노예해방에 대해서 떠벌린다는 것은 곧 그들의 재산의 파괴를 뜻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남부인들은 노예폐지론자들을 불타는 증오심으로 맹렬히 증오했다.

(260) 98도 선 서쪽의 땅은 메마른데다가, 기후가 면화를 재배하기에는 지나치게 건조했다. 남부는 노예들을 이끌고 그곳으로 이동할 권리를 얻어냈으나 그 땅은 면화를 재배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자연(自然)이 면화 왕국의 한계를 결정지은 것이다. 그 반면 '축적될 수 있는 자본액과, 발명될 수 있는 기계의 다양함과, 공업에 종사할 수 있는 사람의 숫자'에는 한계가 없었다. 승리는 북부의 편이었다.

(270) 자원, 인력, 기계, 그리고 자본 - 이 모든 것이 함께 어울려 미국을 세계 제일의 부국으로 만들었다. 남북전쟁과 함께 권력을 장악한 자본가들이 원동력 구실을 했다. 그들은 천연자원과 노동력과 자본을 합성하여 현대의 미국을 만들었다. 그들은 미국을 개발했다.

(285) 전문화는 동시에 워험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농민) 말 그대로 "그가 가진 달걀 전부를 한 바구니에 담고 있었다." 만일 바구니의 밑이 빠지게 되는 날이면 그는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의 작물이 흉작이었을 경우 그에게는 팔 것이 없었다. 그의 작물이 대풍년이면 그에게는 팔 것이 너무 많았다. 농업의 전문화는 농민을 기복이 심한 자본주의 경제에 휩쓸려 들게 했으므로 위험했다. 소비를 위한 생산과 교환을 위한 생산은 사뭇 다른 것이었다. 전문화된 농부는 그것을 깨달았다.

(297) 현대 공업은 그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이제 도구가 가장 중요하게 되었다. 사람의 역할은 그것을 보조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숙련된 근로자 플러스 비숙련 도구가 아니라, 숙련된 도구 플러스 비숙련 근로자로 되어 버린 것이다.

(306) 투자자가 주식회사에 이끌렸던 것은 책임의 유한성 때문이었다. 즉, 주식회사의 주주(株主)는 그가 회사에 출자한 금액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었고 책임은 지지 않았다. 주식회사가 또 하나 유리한 점은 주주권(株主權)을 쉽게 타인에게 양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주식회사의 동업자는 순간적으로 물러날 수 있었다. 주식시장에 그의 주식을 내놓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어떤 사업에서 손을 떼기가 쉽다는 것은 기업가들이 그 사업에 좀 더 쉽게 뛰어들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주식회사의 유리한 또 다른 점은 회사가 가지는 영구적인 생명이었다. 법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 즉 법인(法人)은 회사를 구성하는 구성인들과는 분리된 존재이다. 그러므로 구성인들이 죽은 후에도 계속 살아 있게 된다.

(316) 노동자 계급은 그들의 노동조합을 통해서 자본가와 싸웠다. ... 재산이 1위였고 인간의 생명은 2위였다. 그것이 마찰의 한 원인이었다. 자본가들은 돈을 버는 데 관심이 있었다. ... 높은 이윤을 얻는 첫걸음은 비용을 줄이는 것이었다.

(318) 산업혁명은 노동자의 운명을 자본가의 손에 맡기도록 만들었다. 고용주는 공장과 값비싼 기계를 갖고 있었다. 근로자는 더 이상 자기가 먹을 양식을 생산하거나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을 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이제 생산도구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사람의 공장에 들어가서 임금을 받고 일하는 것이었다.

(322) 노동자 계급의 조직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성장했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협동과 상호교류라는 물리적 수단뿐만 아니라 계급 및 계급의식을 낳았기 때문이다.

(351) 1898년 이후 주사위는 던져졌다. 우리는 다른 강대국들과 함께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 들었다. 미국은 세계 제국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371) 1929년경 절정에 달했던 경제활동의 수준은, 1929년에서 1932년까지 전례없는 속도로, 전례없는 한계까지 추락했다.

(372) 1929년의 공황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원인은 오직 하나였다. 그것은 생산제도였다. 화폐제도, 투기, 부의 분배, 기술의 진보, 변경의 사라짐, 제 1차 세계대전의 후유증 등, 그리고 그 외에 경제학자들이 많은 시간을 들여 조작해 낸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하려는 것들은 모두 핵심을 벗어난 얘기들이다. 왜냐하면, 그런 설명들은 병의 갖가지 증상들을 병 자체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의사가 열이 있어 진찰을 받으러 온 환자에게 그 열이 환자의 혓바닥이 흰 때문이라거나 몸의 체온이 올라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만일 그런 의사가 있다면, 그는 엉터리 의사가 될 것이다. 미국이 앓고 있던 질병은 오직 한 가지 뿐이었다. 그것은 최고도로 발전한 최첨단의 자본주의였다.

(373) 그리고 부자의 문전에는 거지 나사로가 함께 살고 있었다.

(383) 확장은 그 자체로 축소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확장이 커질수록 그에 따르는 축소도 커진다. 1932년의 폭락을 설명하는 것은 1929년의 공황이었고, 1929년의 공황을 설명하는 것은 그 이전의 붐이었다. 더 많은 이윤, 더 많은 축적, 더 많은 이윤, 더 많은 축적 ......의 연쇄사슬은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가장 약한 고리에서 분명 끊어지도록 되어 있었다. 사슬은 끊어졌다. 가장 약한 고리의 역할을 한 것은 주식시장의 투기 소송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인 요인은 아니었다. 근본적인 요인은, 자본주의 체제가 그 존속을 무한한 확장, 생산력의 무한한 해방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미 무한한 확장에의 벽을 자동적으로 쌓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확장이 불가능할 때는 수축한다.

(385)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New Deal) 정책”은 하나의 혁명이라 불렸다. 그것은 분명 하나의 혁명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혁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관념적으로 혁명이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혁명이 아니었다.

(389) 구호(Relief), 회복(Recovery), 그리고 개혁(Reform)은 뉴딜 정책의 3R이었다.

(404) 뉴딜이 작물의 감축보다는 확장의 장기적인 계획으로, 모든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고 모든 헐벗은 사람들을 입히는 정책을 추진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계획이 추진되자면 모든 면에서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했을 것이다. 즉, 이윤을 위한 생산에서 사용을 위한 생산으로의 전환이 필요했다.

(408) 항상 그렇듯이, 극심한 불황 속에서 ‘공정한 경쟁’은 ‘부정한 경쟁’이 되어 있었다. ... 물가는 하락했으며 일부 공업분야에서는 생산비에조차 미달되는 가격으로 제품이 판매되고 있었다. 부정한 경쟁은 ‘살인적인 경쟁’이 되었다.

(415) 정부의 지출은 일자리를 만들었다. 정부의 지출은 사람들의 주머니에 돈을 넣어 주었다. 정부의 지출은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소위 “소비의 회복”을 가져 왔다. 정부의 지출이 감소되었을 때는 회복세도 감소되었다.

(425) 어떠한 계획사업에 있어서도 중요한 문제점은 세 가지이다. 우리가 일을 하기 위해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우리가 가진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461) 미국 자신은 확실히 침략자가 아니었다. 미국의 지배적인 관심사는 평화의 유지와 수출무역의 확장이었다.

(465) 우리의 대(對) 스페인 정책은 뉴딜의 기록상 최대의 오점이었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정상 참작의 여지가 없는 범죄였다.

(481) 수년 동안 미국의 대일(對日) 정책은 중국에서의 그들의 잔학행위에 항의하는 한편, 동시에 그들의 침략을 가능하게 한 석유, 면화, 철, 강철 및 기다 군수물자를 그들에게 공급하는 모순된 것이었다. 이 정책은 극동에서의 교착상태가 우리에게 가장 유익할 것이라는 가정하에서 취해졌던 것이다. 우리는 일본이 중국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중국의 시장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는 일본의 패배를 원하지 않았다. 우리가 일본을 소련에 대한 완충물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82) 미국의 참전 초기에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은 생산증대를 위한 투쟁이었다.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욱, 우리는 ‘민주주의의 병기고’가 되어야 했다.

(489) “문제는 기업가들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악하거나’ ‘탐욕스럽거나’ 또는 ‘무책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을 옭아매고 있는, 그리고 그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다이나믹한 제도가 집단적 • 민주주의적 목적에 맞게 설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 진정 요구되는 것은, 민주적으로 규정된 대중의 이해관계에 의해 지배되는 광범위하고 일관된 정책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자본주의가 아직까지 달성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492) 일자리와 평화는 이윤(利潤)만을 위한 생산제도가 아닌, 사용(使用)을 위한 생산제도 하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3. 내가 저자라면

12부작 쯤 되는 서사 드라마를 본 느낌이랄까. 책을 읽는 내내 아주 재미있었다. 흥미로운 일화와 인용, 다양한 증거들, 민중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각, ‘무엇’ 보다는 ‘왜’에 초점을 맞춘 상세한 설명, 그리고 과거를 통한 현재의 조망 등이 어우러져 책 한권에서 미국에 대한 많은 것을 얻었다. 중학교 시절 내 세계사 성적은 언제나 낙제(?)를 겨우 면할 수준이었다. 스토리는 없고, 외울 것 투성이인 역사 책은 내 머리에 아무것도 남겨놓지 못했다. 이렇게 알기 쉽고 재미있게 쓰여진 역사책을 이제서야 만나다니. (아마도 초딩 시절의 필독서였던 ‘먼나라 이웃나라’ 이후 처음인 듯 하다.)

흥미로운 소설책처럼 쓴 역사책
읽는 맛이 좋은 이유는 무엇보다 재미있는 일화들의 영향이 크다. 시대를 잘 반영하는 일화들을 대화체로 잘 표현하고 있어 흡사 소설책을 읽는 듯 하다. 서부 개척자들의 후한 인심을 보여준 ‘우유 한잔’의 일화는 감동적이었고, 증기선들 간의 속력 경쟁에 나오는 노부인의 이야기는 배꼽을 빼 놓았다.

실제 사건들을 세부묘사를 빠뜨리지 않고 하나하나의 장면들을 묘사한 것 역시 책의 가독성을 높인 원인이다. 훌륭한 상상력이다. 게다가 되도록 전문 용어를 자제한 흔적도 보인다. ‘~~적(的)’ 등의 표현은 거의 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는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으니 흐름이 끊기지 않고 계속 읽을 수 있었다. 가독성에는 훌륭한 번역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아니, 증거가 이렇게 다양할 수가?
일화 뿐만이 아니다. 주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된 증거들의 종류에 놀랐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통계 자료뿐 아니라, 그 시대 사람의 편지, 지도와 자세한 설명, 삽화, 소설과 시 등의 문학작품, 도표와 그래프, 심지어는 일반인의 일기까지 그 형태는 무척 다양하다. 통계 자료는 어렵지 않게 단순화하여 표현했다. 알기 쉽게 설명해 둔 흐름의 도식에도 저자 특유의 위트를 잃지 않는다. 예컨대,
프랑스의 배 -> ║
네델란드 배 -> ║ 제국의 벽 – 들어오지 마시오!
하는 식이다. 게다가 이러한 자료들은 위인의 기록과 더불어 일반 민중들의 기록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민중을 위한 역사서’에 걸맞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주로 통계치를 나열하는 식의 일반 책의 ‘증거’에 관한 고정관념을 깨기에 충분하다.

영웅이 아닌 민중의 시각으로
영웅이 아닌 민중의 시각으로 역사를 풀어낸 것은 이 책을 빛나개 해 준다. 일개의 개인드에게 영웅들의 역사는 너무나 멀리 있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 책은 서민의 편에서 그들이 어떻게 느꼈는지, 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는지 등을 기술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역사의 흐름을 짚어내고 있다. 6월 9일의 꿈벗 모임의 핵심은 “꿈으로 가는 작은 계단”으로, 꿈이 지나치게 멀리 있어 과감히 한발을 내딪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징검다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 아니던가. 역사서를 대단한 시각이 아닌 민중의 소소한 일상에서 접할 수 있었던 사건들로 풀어냄으로써 ‘손에 잡히는 역사’로 멀게만 느껴지는 역동적인 역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원인에 대한 진지한 고찰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는 역사에서의 인과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역사는 원인의 연구이다… 나는 역사가란 자기 문제를 신의 조화력 같은 것에 의지하지 않고 풀어나가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역사란 말하자면 죠카 없이 노는 트럼프놀이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은 ‘무엇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나열식으로 늘어놓는 대신 ‘왜 일어났는가’에 더 초점을 두고 있다. 현재의 이상한 미국의 선거제도의 기원이 최오 연방을 구성하던 시기의 자연스런 산물이었다는 것, 공업의 북부와 농업의 남부는 지형적인 조건에 의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북부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한 것은 평등 사상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북부지역의 산업 특성에 따른 이해관계가 원인이라는 것 등은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이러한 자연스런 인과관계에 대한 이해로부터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었다.

역사를 통한 현재의 조망
또한 E. H.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책의 2부에서는 루즈벨트가 시행한 ‘뉴딜 정책’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작가가 글을 쓰던 시기의 핵심 정책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말하자면, 1부에서는 과거의 흐름을, 2부에서는 과거에 비춘 현재의 모습을 조망하고 있다.

과거에 비추어볼 때 미국은 과연 ‘진보’했는가? 독립선언문에 적힌대로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음을 자명의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책의 ‘We, the people’(책의 원제)로 시작되는 미국 헌법의 첫 문장은 국민의 주인의식과 평등, 자유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미국의 가장 큰 부자 3명이 소유한 재산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60개 국가 전 인구가 소유한 재산보다 더 많다. 미국 내의 빈부 격차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오히려 더 악회되었다. 오늘날 미국을 움직이는 것은 민중이 아니다. 소수의 기업인과 고위관료들이다. 역사석가 역사만을 기술하기 보다는 현재에 개입하여 현재를 진단하고 새로운 대안을 탐색하는 것 – 매우 훌륭한 시도라 생각한다.

너무 긴 인용문의 길이
다양한 인용문과 사례는 좋았으나, 그 길이가 너무 길어 아쉽다. 긴 길이에 비해 정작 핵심 문장은 몇 문장 되지 않는 경우가 있어, 후반부에는 인용을 잘 읽지 않고 뛰어 넘기도 했다. 저자가 잘 사용하는 (특이한) ‘…’ 문체를 이용하면 간결하면서도 임팩트한 인용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미국 여행서 같은 번역 제목
“이번 휴가 때 미국 가려고?”
책을 읽는 동안 세 명이나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번역의 훌륭함은 책을 읽는 내내 감탄했는데, 왜 제목(We, The People)을 이렇게 번역한 것일까? 역사책으로써, 그다지 상업적으로 끌리는 제목도 아닌데 말이다. ‘가자, 아메리카로!’라는 문구는 굶주린 유럽 사람들이 늙은 자신의 나라를 버리고 젊은 “약속의 땅”으로의 이민을 결정하면서 한 이야기 인 것은 알겠다. 그러나 책의 주제는 그러한 약속이 어느 정도까지 실현되었는가가 아니던가. 오히려 부제인 ‘부자의 문전에 거지 나사로가 함께 살고 있었다’가 너무 길 지언정, 주제를 더 잘 드러낸다.

아쉬운 We, The People (우리 국민)
책을 읽고 나서 개운치 않은 부분들이 몇 있다. 여성들은 어디로 갔는가? 책에 인용된 문구는 대개 남성들의 것이라 자연스레 ‘여성들은?’ 이라는 물음이 떠오른다. 아무리 남성위주의 사회였다고 하나 현재의 미국은 어느 나라 보다 여권이 높은 나라가 아니었던가. 저자가 계급적인 시각으로 미국 사회를 분석하고자 한 의도는 이해가 가지만, 시민의 절반인 여성에 대해서 간과한 것은 아쉽다. 또한 신대륙에 오래전에 살고 있었던 인디언들에 관한 내용이나, 계속해서 불거져 나오는 흑인들과 유색인종들의 문제에 대한 시원스런 설명이 없다. 민중의 역사와 관련한 책이라면, 원제의 We, The People (우리 국민)들의 범위를 좀 더 폭넓게 가져가야 하지 않았을까.

IP *.112.72.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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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2007.05.14 16:16:32 *.99.241.60
We the people에 대한 부분은 나하고 같이 느꼈구만.
작년 카트리나 피해때에도 구호가 늦었다는 사실과
자동차가 없어서 피난을 못갔다는 뉴스를 보고
차별적인 요소가 아직도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음

역시 여성에 대한 참정권은 1920년대에 인정된 것을 보면
여성에 대한 배려는 맨 나중에 이루어지는 일인것 같았음

잘 읽고 간다. 수고했다 승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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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희
2007.05.14 19:14:04 *.114.56.245
자료의 적재적소라는 용어를 교육에서는 자주 사용하는데 지나친 자료는 수업의 흐름을 방해하고 자료 게시에서 끝날 수도 있다(자료의 홍수)이를 경계 하라. 옹박씨가 잘 짚었군요. 저는 리오의 입장에서서 우리의 취사전택의 폭을 넓혀주고 있다고 뭉실뭉실하게 생각했는데
역시 옹박씨는 다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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