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2007년 5월 28일 02시 41분 등록

<저자에 대하여>

5월의 끝자락에 서서 이 달 마지막 저자인 D.H. Lawrence를 파헤치다 “저자 조사하기” 트레이닝 중간평가를 한 번 내려보았다. 우리는 왜 치밀하게 저자에 대해 조사를 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조사해야 하는지, 더 나아가서는 저자가 그토록 전하고 싶었던 핵심은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이곳 저곳을 뒤적거렸다. 관련 자료를 읽으면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며, 얼굴 한 번 대면해 보지 못한 사람들을 하나 둘 알아갔다. 그들의 문장과 생각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를 파 내려가다 보면 한 가지 공통된 특성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그들 나름의 축적된 경험이었다. 크던 작던, 경험이라는 것은 우리의 생각 센서를 자극할 뿐 아니라, 그것이 곧 깨달음이 되어 글로 표현되어서 한 권의 완성된 책으로 우리 손에 쥐어지니까. 그렇다면 로렌스는 어떤 경험들을 섭취하며 이 세상을 살아갔을까.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에 생을 마감했던 로렌스는 5000명 남짓 되는 석탄 마을 이스트우드에서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 당시 석탄 산업이 크게 성행했기에 마을 대부분의 남성 노동자들은 석탄공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고, 어린 아이들도 만 14세가 되면 석탄공의 길을 걷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어쩌면 이러한 거친 환경 속에서 자랐기에 오히려 로렌스는 인간 관계의 따뜻함과 자연과 인간의 어울림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가져보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 때문에. 또는 거칠었던 어린 시절 기억들로부터의 해방 때문에?

그의 어머니인 리디아는 이스트우드에 정착해 작은 옷 가게를 열었다. 그녀는 로렌스의 아버지 아서와 사이가 별로 안 좋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본래 교사가 꿈이었던 그녀는 이스트우드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한다. 독서를 즐기며, 지적 대화를 나누는 것에 흥미를 가졌던 그녀의 DNA가 막내인 로렌스에게 고스란히 심어졌던 것은 아닐는지.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동료 석탄 공들과 이어진 아서의 잦은 술자리 때문에 리디아는 심한 우울증과 정신적 분노를 앓고 있었다고 한다.

리디아는 아이들에게 자주 아버지 흉을 보았고, 이 때문에 장남이었던 죠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어머니와는 사이가 좋았으나 아버지를 상당히 미워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정에서 인정 받지 못한 아버지 아서는 더욱 더 알코올에 빠졌으며, 매일같이 목격해야 하는 부부 싸움에 로렌스는 급기야 아버지를 증오하기까지 이르렀다. 아버지처럼 되지 말라는 어머니의 당부에 로렌스와 형제들은 석탄공이 되지 않기 위해 학업에 충실했고, 중산층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리디아는 가장 학업 성적이 우수해 훗날 좋은 직장에 취직한 둘째 형을 편애했고, 로렌스는 건강이 좋지 않아 많은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자식이었다고 한다.

동성 친구보다는 이성 친구들을, 그리고 이성 친구들보다는 책과 더 잘 어울렸던 로렌스는 점점 성적이 좋아져 장학금을 받고 노팅햄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으나, 좋은 성적을 유지하지 못하고 16세에 학교를 나왔다. 그 무렵, 그의 삼촌이 자신의 아들을 살인한 죄로 신문에 크게 보도되어 로렌스의 정신세계에 큰 타격을 줬으리라 짐작된다. 사회에 나와 어렵게 찾은 첫 직장은 공장 점원이었고, 키가 그다지 크지 않았던 그는 일을 하며 점점 더 말라갔다.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둘 째 형이 갑작스럽게 병을 얻어 죽었고, 그로 인한 상심이 너무 컸던 나머지 리디아는 로렌스가 폐렴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길 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회복되었고, 그 뒤로 리디아는 로렌스에게 각별히 신경을 쓰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녀의 희망과 기대를 전부 그에게 걸었다.

이웃에 새로 이사온 체임버스 가족들과의 사이가 돈독해지자 로렌스는 자신의 가족보다는 그들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더 선호했고, 시와 소설에 푹 빠져있던 그 집 막내 딸 제시와 남다른 관계를 맺게 됐다. 자신과 함께 독서와 토론을 함께 나눌 사람이 그의 주변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터라 그녀의 존재가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으리라. 그들은 함께 책에 빠져있는 시간이 많았으며 마치 소울 메이트를 만난듯한 느낌을 받았었다고 한다. 그러나 남의 이목에 신경 쓰며 살던 시대였으므로 제시와 약혼을 하든가 아니면 관계를 정리하라는 가족들의 강요에 로렌스는 결혼할 만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녀와 헤어지게 된다.

2년간 조교생활을 하며 교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그리고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거쳤던 공백기는 그에게 더없이 소중한 시기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가 글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때 그의 나이 20세. 다른 석탄공 동료들이 무엇이라고 수군댈까 걱정하면서도 용기를 내어 시와 소설, 그리고 자서전적 글들을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대학 진학을 전후한 시기에 습작에 열성을 기울여《잉글리쉬 리뷰》 같은 당시 영향력 있는 잡지에 그의 글이 실려 유망한 청년작가로 주목 받는다. 첫 장편 《흰 공작 The White Peacock》도 좋은 반응을 얻었고,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노팅엄 대학을 졸업한 후 크로이든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이 무렵 그는 대학시절 불어교수였던 위클리의 초대를 받아 집을 방문했는데, 거기서 그의 부인 프리다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독일 귀족 집안의 딸로 자유분방한 여성인 프리다는 정식으로 이혼한 후 로렌스와 결혼한다. 이 결합은 로렌스의 문학세계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그녀는 작품소재의 풍부한 원천이 되었으며, 그녀와의 육체적, 정신적인 합일과 갈등의 과정은 남녀관계가 현대사회의 방향과 어떻게 맞물리는지 탐구하는 주효한 장을 제공했다.

이 무렵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입으로는 사랑과 평등을 외치면서 개인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고 대량살상을 자행하는 이율배반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전쟁의 근본 동기가 상업주의적 이해관계에 있다면 이 체제를 넘어설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서구근대의 역사가 그것이 부정한 탈서구적 가치와 만날 진정한 극복의 싹은 어떤 것인가, 이런 의문들은 그로 하여금 영국을 떠나게 했다. 그 이후 그는 이탈리아, 호주, 미국, 멕시코 등 세계 각지를 떠돌며 그 해답을 탐색했다.

로렌스는 1930년 프랑스 방스의 요양원에서 세상을 뜬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그가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발견했던 미국 뉴멕시코 주 타오스로 옮겨져 안장된다. 그가 죽은 후 아내인 프리다는 다음과 같이 그의 생애를 요약했다.
"그는 자기가 보고 느끼고 인식한 것을 글로써 동포에게 전달했다. 그것은 빛나는 삶이자, 더욱 충일한 생명에의 희망이었고......영웅적이고 측량할 길 없는 재능이었다” 라고. 어쩌면 그의 진가를 가장 잘 알아봐 준 사람이 바로 그의 아내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저자 조사를 하며 이렇게 해당 저자의 생애를 훑어 보다 보니, 마치 또 한 편의 책을 읽는 것과도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아마도 저자의 책 못지 않게 저자의 삶 자체가 풍기는 향기 때문이리라. 가끔은 말로 간접적으로 가르쳐 주는 것보다, 그의 삶을 보고 직접 깨닫는 것이 더 큰 가르침일 때도 있는 법이니까.



<내 마음에 들어온 인용문>

“우리는 역사를 너무 인간적이고 친숙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비인간적이며 가공할 요소 속에 미지에 대한 감각을 남겨두어야 한다” (p. 10)

“생명은 커다란 제스처를 쓴다. 인간은 그 제스처의 실체이다. 역사는 이 제스처를 반복한다. 그래서 인간은 그 제스처를 되살게 되며 과거 속에서 완수된다. 역사 속에서 배우는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과거 속에서 완수를 이루지 못한 사람이다” (p. 13)

“로마 제국은 세계사에서 가장 경이로운 정치 체제이다. 그것은 제국의 영토가 광활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국가가 하나로 단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위대한 힘을 오래 지킬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정의를 천부적으로 사랑했기 때문이다” (p. 21)

“황제들이 정신 이상 증세를 약간씩 보이기 시작한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온 세상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었으며 세상 전체를 그들의 발 아래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로마 전체가 황제 앞에서 겁에 질려 움츠리고 떨었기 때문이었다…… 황제들을 자만과 방만함에 빠져 미치게 만든 것은 바로 이 위대한 로마 시민들이었다” (p. 26)

“콘스탄티누스는 아시아로 눈을 돌렸다. 유럽은 홀로 남아 혼돈과 폭력과 소요와 무질서를 경험하면서 중세의 암흑기를 만나게 되었다” (p. 30)

“그는 죽어가면서 심장에서 솟아나는 피를 손으로 받아 하늘로 향해 던지면서 이렇게 외쳤다. <갈릴리 사람 예수야, 그대가 이겼구나!> 율리아누스는 위대한 마지막 이교도가 되었다” (p. 44)

“기원 394년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유일한 종교로 인정되었다” (p. 73)

“산다는 것은 생산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산다는 것은 파멸을 전제로 하는 무서운 경쟁이었으며 투쟁이었고, 싸움에서 얻는 영광이었다” (p. 74)

“위대한 로마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의 경계 안에서 가물거리고 있는 동안 유럽은 게르마니아와 러시아와 아시아에서 들어온 야만 족으로 홍수를 이루었다. 이들은 그곳에서 위대한 근대 국가를 형성하는 기초를 닦았다” (p. 89)

“이렇게 들어온 야만 족 중에서 주된 종족이 반달족이었다. 이들은 고트족보다 훨씬 더 사납고 더 파괴적이었다. 오늘날 잔인한 파괴 행위를 <반달리즘 vandalism>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이들의 사나운 파괴 행위에서 유래하고 있다” (p. 103)

“이들의 이름은 고대 세계 전역에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대명사가 되었다. 훈족의 파괴력은 검은 망치와 같아서 이미 허물어진 로마 제국을 산산이 부수는 결과를 초래했다. 훈족의 침입은 당에 번개를 요란하게 치고 지나가는 먹구름과 같았다” (p. 107)

“아퀼레이아 시와 인근 마을에서 겨우 도망나온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얕은 바다 주변의 늪 지대와 섬으로 숨어 들어가서 초라한 오두막을 짓고는 생선과 조개 따위를 먹고 살았다. 이것이 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다 위의 도시, 베네치아가 형성되는 최초의 시작이 되었다” (p. 121)

“드루이드는 오크나무 그늘 속에서 숨어 살면서 성스러운 신비에 대해 명상을 하고, 두려움 또는 미지로 불리는 위대한 신의 뜻을 탐색하는 일에 전념했다” (p. 125)

“짐을 실은 말을 이끄는 상인들과, 꾸러미를 멘 일꾼들과, 짐을 든 노예들과, 게르마니아, 브리튼,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온 나그네들이 모두 이 길에서 만나 서로 인사를 했다”
(p. 137)

“게르만적인 독립심과 개인의 자유 정신이 사회적 통합에 대한 옛 로마의 이상과 조화되어, 진정으로 유럽적인 생활의 첫 번째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이 징후는 조잡하고 미약한 정도에 불과했다” (p. 144)

“인간이란 희망 없이는 살 수 없다” (p. 145)

“인간의 자만심은 왕의 권리를 창조했으며, 신의 자비는 주교들의 권한을 창조했다. 교황은 황제들의 주인이다/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짐은 짐의 왕관을 천주님으로부터 받았노라. 따라서 교황이나 리옹의 공의회나 어떤 악마도 이 관을 뺏을 수는 없느니라/황제 프리드리히 2세” (p. 167)

“급기야는 배고픔을 참지 못한 십자군은 죄수들을 구워 먹기까지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보헤몽의 주방으로 들어가 본 첩자들은 투르크인과 사라센인의 시체가 쇠꼬챙이에 끼어져서 불에 구워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사람은 먼저 기독교도였으며, 그 다음으로 노르만족이거나 색슨족이었고, 마지막으로 프랑스인이거나 영국인이었다” (p. 194)

“이로써 제1차 십자군 원정이 끝난 셈이었다. 기독교 사회를 하나로 뭉치게 한 최초의 사건이며 유럽을 잠에서 깨우는 최초의 대 운동으로는 대단히 성공한 셈이었다” (p. 217)

“군인들은 햇볕이 쨍쨍한 교황청 앞에 몰려 섰다. 그러나 교황을 지킬 병사는 없었다”
(p. 224)

“많은 사람들이 이단 죄로 심문을 받고 처형되었다. 종교 재판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마녀와 마법사와 이단들을 나무 기둥에 묶어 불태워 죽였다. 신앙의 시대는 통탄할 만큼 잔인한 시대이기도 했다” (p. 241)

“단테가 사랑한 것은 현실의 베아트리체가 아니라 그의 비전이었다. 그것은 나중에 유럽이 경험하게 되지만 단테 자신은 경험하지 못한, 보다 정신적이고 보다 정열이 결핍된 시기의 꿈이며 환영이었다” (p. 268)

“루터는 황제와 추기경과 군주와 주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할 바를 모릅니다. 주여, 저를 보살펴 주십시오. 아멘>” (p. 294)

“루이는 왕국의 운영을 신에게, 오로지 신에게만 책임진다고 믿었다. <짐이 곧 국가다>라는 말이 그의 신조였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내려다보았으며 사람들은 그에게 끊임없이 아첨을 해야 했다” (p. 317)

“프랑스는 유럽의 북부와 남부의 중간에 있어 두 개의 상반되는 정열이 융해되는 지점이다” (p. 321)

“<저 사람을 보세요> 뒤바리 부인이 슬픈 표정의 미남 왕 찰스의 얼굴을 가리키며 루이 15세에게 말했다. <당신의 의회도 당신의 머리를 자를 거예요>” (p. 335)

“프랑스를 혁명의 도가니로 몰고 간 것은 사람들의 고통이 아니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고통은 있었다. 그러나 실제 혁명의 원인이 된 것은, 지금은 없어져 버린 눈부신 과거에 대한 향수와, 스스로의 미래에 대한 염원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갖게 된 분노의 정신이었다. 자신의 삶이 어리석음과 낭비를 지탱하기 위해서 이용되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분노였던 것이다” (p. 342)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그러나 인간은 사방에서 사슬에 매여 있음을 보게 된다>”
(p. 343)

“프로이센은 이제 유럽의 경이가 되었다. 2급 신생 왕국이 가장 강력한 세 나라와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프리드리히의 정부 체계와 전쟁 운영 방식은 존경과 놀라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패배시킨 이웃 나라들마저 그를 모방하기 시작했다” (p. 364)

“하지만 1740년 이 왕자가 마침내 왕위에 등극했을 때 그의 본성의 착한 면은 망가지고 영혼도 거칠어진 상태였다. 그는 상냥함을 믿지 않게 되었다. 오직 힘만이 승리를 거둔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으며, 인간이 민감하고 현명한 것은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은 부서지지 않기 위해 강해야만 할 뿐임을 확신했다” (p. 371)

“<콜럼버스가 미국을 발견했을 때 느낀 기쁨도, 한 사람이 실제 조국을 되찾는 일에 종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느낀 기쁨보다는 크지 않았을 것이다>- 가리발디” (p. 382)

“겉으로 보기에는 자유가 매우 아름다운 열매처럼 보이지만 입 속에 들어가면 재로 변한다는 사실은 별로 놀라운 것이 아니다. 인간은 항상 자유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p. 417)

“이러한 원칙에 대한 결정은 의회의 토의나 다수결 투표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전장에서 승리를 결정하는 신이 종국에는 쇠로 만든 주사위를 던질 것입니다- 비스마르크”
(p. 419)

“이렇게 유럽 역사의 순환은 단계별로 완수되었다. 로마 제국에서 시작해서 중세 제국과 교황청을 거쳐 르네상스기 왕들의 시대로 옮겼다가, 다시 그 순환은 산업과 상업을 장악한 중산층에 의해 운영되는 정부와 위대한 상업 국가들의 시기로 옮겼으며, 끝으로 노동자들이 하나로 뭉친 마지막 통치 형태로 이동했다. 그래서 유럽은 하나에서 또 다른 하나로, 제국적 통합에서 노동 계급의 통합으로, 시작에서 끝으로 옮겨가고 있다.
우리는 인간이 두 개의 동기, 즉 평화와 번영을 위한 동기와 경쟁과 군사적 승리를 위한 동기를 위해서 산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군사적 모험과 투쟁 속의 승리에 대한 욕구가 만족되면 평화와 확장의 욕구가 나타나며, 이것은 다시 거꾸로 반복된다. 이것이 생의 법칙이다. 생산적 노동자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래서 물질적으로 평등한 위대한 통일 유럽은, 한 위대한 선민, 대 전쟁을 이끌면서 넓은 평화를 다룰 수 있는 영웅의 주변에서 뭉치지 않는 한 오래 계속될 수 없다. 이것은 국민들의 의지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 국민의 의지 위에서 군림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선택된 사람이어야 하며 동시에 하느님 앞에서만 책임질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평탄치 않은 유럽의 미래가 점진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p. 438)

“다양한 재능을 갖춘 예술가는 자신의 표현 모드와 무드에 따라 소재의 구현 방법이 달라진다. 소재의 성격에 따라 표현의 모드가 달라지며 주제의 모드에 따라 글을 쓰는 무드가 또 달라지는 것이다” (p. 440)

“그래서 로렌스는 그의 역사책이 <이야기와 일화를 많이 읽고 개성을 충분히 갖추었으면서도 아직 추상성에서 지적 자만심을 갖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p. 444)

“그래서 그는 <진정한 역사가 할 수 있는 것은 인간 심장의 가장 심오한 부분으로부터 솟구쳐 오른 물결을 외경심과 존경심으로 지켜보며 이 엄청난 조수의 만조와 간조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부연한다…… <진정한 역사는 참된 예술이며, 허구가 아닌 적나라한 진리>라고 지적한 그의 말도 이런 면에서 설득력을 갖는다…… 역사와 소설은 모두 인간의 활동을 다룬다” (p. 446)

“결국 실제 일어나는 역사나 소설에 나타나는 인간의 역사는 시대와 나라와 상황에 따라 이름과 의상과 풍습이 다를 뿐 똑 같은 인간의 이야기이며 똑 같은 생활 패턴의 변형일 뿐이다” (p. 448)

“인간은 뿌리와 줄기에서 하나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곧 차이점이 나타난다. 인간의 거대한 나무는 서로 다른 종족으로 가지를 쳐나가는 것이다. 커다란 가지는 여러 다른 방향으로 뻗어간다. 그리고 이 서로 다른 거대한 가지에는 제각기 순이 솟는다. 이렇게 해서 인간의 종족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자란다. 이집트 사람들과 중국 사람들, 힌두족과 아시리아 사람들, 아스텍족과 폴리네시아 사람들, 그리스와 로마와 카르타고를 포함하는 지중해의 종족들, 게르만과 슬라브족, 그리고 근대 유럽인들 등 커다란 가지들이 인간의 나무에서 뻗어 있다. 이 가지들은 그 나름의 방향으로 뻗어 저마다 순을 키운다. 하나의 가지는 다른 가지를 대신할 수 없다. 모두 제 각각의 방향으로 뻗어가고 제 나름의 꽃과 열매를 키운다. 서로 다른 나뭇가지들은 서로 다른 정신과 서로 다른 사상에 접목되며, 이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고유의 정신과 사상으로 정착하게 된다. 나의 인간성은 중국사람의 인간성과 똑같다. 그러나 정신과 사상 면에서 우리는 서로 다르며, 앞으로도 영원히 다를 것이다. 이것은 사과 꽃이 붓꽃과 영원히 다른 것과 같은 이치이다” (p. 448)



<내가 저자라면>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떨림’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책을 고르는 기준도 참 여러 가지라고 생각할 사람도 더러 있겠지만, ‘어제보다 아름다워지려는 사람들’이라는 문구 하나에 매료되어 이렇게 연구원 생활까지 하고 있는 나이기에 그 기준에서 본다면 사실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원제가 분명 <유럽 역사 속의 진동> 인데 이거 또 제목 번역을 마음대로 했구나 싶어 다소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책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쯤, 나는 한글판 제목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새털 같은 나의 삶을 보아도, 휘황찬란한 역사의 삶을 보아도 가슴 떨림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상큼한 번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마부터 시작해 유럽을 차례로 점령했던 게르만족, 고트족, 반달족, 훈족, 갈리아 사람들, 그리고 프랑크족 등 이들 민족들에 대해 각각의 챕터를 할애해 설명한 것은, 마치 우리가 고등학교 때 차례로 배우는 수의 세계를 연상케 했다. 처음에 아라비아 숫자를 배우며 우리는 자연수가 수의 전부라 생각하지만, 점점 더 시간이 지날수록 ‘0’ 이라는 숫자를 기준으로 음수라는 것도 존재함을 배우고, 정수, 무리수, 허수 등 수의 세계가 무한히 확장될 수 있음을 깨우치게 된다. 이것은 어떤 논리적인 전개라기 보다는 하나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더 가깝다고 하겠다.

<역사, 위대한 떨림>도 이와 마찬가지로 연대기 순으로 사건을 나열하기 보다는 유럽 역사의 세계를 확장시켜 나가면서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주제 위주로 책을 써 내려갔다. 유럽 역사 전체를 한꺼번에 다 소화할 수는 없어도 각 민족의 흥망성쇠, 기독교와 십자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프랑스 혁명과 유럽 각 나라의 독립 및 통일 등 유럽 역사의 세계라는 큰 숲을 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물론, 너무 방대한 주제들을 다루다 보니 스토리 전개의 호흡이 다소 빠른 감이 없지 않았지만, 이유야 어찌되었건 그의 글에서는 지적 겸손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었다. 무엇이 그를 자만하지 않게 만들었을까.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일진대, 방대한 양의 책을 읽어 왔을 그가 지적 겸손을 몸소 보여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오랜 병마와 싸워야 했던 그의 삶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것은 그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핸디캡이자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인간의 한계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을 테니까.

한 때 로마를, 그리고 유럽 전체를 점령했던 권력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로렌스는 매우 차분하다. 그들을 치켜 세우지도, 그렇다고 비하하지도 않는다. 그저 대수롭지 않게 한 명 한 명 열거해 나가는 대범함이 적어도 <역사, 위대한 떨림>에서만큼은 그가 소설가가 아닌 역사가답다는 생각을 하게 하니까 말이다. 단지, 아쉬움이 남는다면 챕터 수를 줄여 19개가 아닌 10개 미만의 주제들로 추려 보다 심도 있는 이야기를 전개시켰다면 어땠을까 싶다. 그러나 어쩌면 그에게 그것을 기대하기에는 조금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마지막에 넒은 평화를 다룰 수 있는 영웅의 중요성을 부각시켰지만, 어쩌면 우리 모두 각자가 스스로를 영웅이라고 생각할 때 비로서 그 한 사람의 영웅이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영웅도 결국은 한 명의 인간이며 그 인간은 우리 모두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기에 말이다. 나 자신을 알아야 다른 사람도 잘 알 수 있듯이 내가 영웅이 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도 당연히 영웅이 될 수 있는 법이다.

미국이 ‘부’ 라는 큰 흐름을 타고 발전해 왔다면, 유럽은 다양한 종족들 속에서 ‘평화’를 끊임없이 갈망하면서 오늘날 유럽 연합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아슬아슬하게 지속되는 긴장 속에서 유지되는 평화의 끈이 끊어지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그들 모두 가지 다른 하나의 뿌리, 즉 인간이라는 나무에서 비롯됨이리라. 문득, 제레미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이 생각났다. 빌려놓고서는 읽어보지 못하고 대출기한 때문에 반납했던 유러피언 드림. 미국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유럽. 그 책에 대해 더욱 더 아쉬움이 남는 것은 그저 욕심일까.

결국 로렌스가 이야기하고 싶어했던 핵심은 반복되는 역사 속 인간의 변화무쌍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들, 그것이 아니었을까.
IP *.6.5.183

프로필 이미지
도윤
2007.05.29 14:41:01 *.249.167.156
역시 책을 읽지 않으면 댓글을 달기도 힘든가보다.. 윤패밀리는 나만 빼고, 로렌스의 책을 읽었네. 나도 읽고 싶었는데, 읽지 못한 책.

책을 읽다보면 읽지 못한 책들은 눈에 밟히고, 읽고 싶은 책들은 더 많아지고, 윤이도 그런가보네^^
프로필 이미지
오윤
2007.05.30 14:50:00 *.6.5.151
도윤오빠... 그리 힘든 일을 어찌 혼자 하셨소? ^^
난 이번 주 완전 책 속에 파묻혀 지내야 함 ㅎㅎ
프로필 이미지
도윤
2007.05.30 16:56:50 *.51.10.24
나도 우연히 떠도는 풍문을 들었지.. 태백산맥의 열개 봉우리를 타고 넘는다던군.. 어찌 그리 힘든 등반을 시작하셨소^^ 부디 무사히 돌아오길!
프로필 이미지
최영훈
2007.05.31 08:59:50 *.99.241.60
역사속을 탐구하다 보니 다른 책에 대한 욕심이 부쩍 생겼음..
옛날에 책 안읽고 뭐했나? 하는 자책감도 있지만,
책에 대한 욕심과 열정이 생겼다는 것도 큰 소득인 것 같다.

등산..정말 좋지..
9월달에 지리산종주를 할 계획인데...(아들과 약속)
기회가 된다면 산에서 숙제하는 것도 괜찮을 듯...
프로필 이미지
오윤
2007.06.01 00:15:59 *.6.5.230
도윤오빠... 내 젊은 날의 허락된 무모함이라고 생각해주오^^
근데 힘들긴 힘들다, 눈물 찔끔 ㅜ.ㅜ

영훈 오라버니... 나는 역사 책을 읽고 있으려니 인간이 미워졌다
좋아졌다 싫어졌다 대견해졌다 아주 만감이 교차했어요ㅎㅎㅎ
정말 자연 속에서 일상을 보낸다는 것은 더없이 소중한 깨달음들을 가져다주는듯 싶어요 ^^ 너무나도 성실한 자연 앞에서 고개가 숙여지더라고요....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852 [11] 역사속의 영웅들 : Will Durant [2] 써니 2007.06.02 2067
851 [11] 역사속의 영웅들 : Will Durant [2] 써니 2007.05.28 2238
850 [011] 역사, 위대한 떨림/D. H. 로렌스 file [3] 香山 신종윤 2007.05.28 2542
» Movements in European History- D.H. Lawrence file [5] 海瀞 오윤 2007.05.28 2095
848 역사 속의 영웅들 / Will Durant [1] 好瀞 김민선 2007.05.28 1852
847 역사 속의 영웅들/윌 듀런트 [3] 香仁 이은남 2007.05.28 2202
846 책의 향기를 다시 돌려준 Will Durant -HEROES OF HISTORY [6] [1] 최정희 2007.05.27 2376
845 김훈, 남한산성을 읽고 [3] [13] 산골소년 2007.06.02 3828
844 &lt;남한산성&gt; 을 읽고 [8] 정재엽 2007.05.19 2678
843 (010) We, the People /리오 휴버만 [1] 校瀞 한정화 2007.05.14 2320
842 『전환 시대의 논리』를 읽고 [7] 이희석 2007.05.14 3587
841 가자, 아메리카로! 리오 휴버만 [5] [2] 香山 신종윤 2007.05.14 2425
840 [독서10]가자 아메리카로/Leo Huberman [3] [2] 素田최영훈 2007.05.14 2125
839 (10) '가자, 아메리카로!'를 읽고 [7] 時田 김도윤 2007.05.14 3775
838 [가자, 아메리카로!] 미국사의 경영학적 재해석 [2] 송창용 2007.05.15 2058
837 가자, 아메리카로(10) [3] 최정희 2007.05.14 2133
836 [10]가자, 아메리카로! (대기업의 전설) [4] [2] 써니 2007.05.14 2119
835 가자, 아메리카로!/리오 휴버만 [4] [2] 香仁 이은남 2007.05.14 2192
834 (10) 가자, 아메리카로! - 리오 휴버만 [2] 박승오 2007.05.14 1996
833 가자, 아메리카로! / Leo Huberman [1] 好瀞 김민선 2007.05.13 2141